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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2. 2022

호나스 트루에바, <누가 우릴 막으리>

시간을 중재하기

호나스 트루에바(Jonas Trueba), <누가 우릴 막으리>(Who’s Stopping Us) 

- 시간을 중재하기    

“그렇듯이 모든 게 불확실하기 때문에, 청년들은 주위에서 요구하는 미래의 삶을 확실하게 설정하기를 원하며, 바람직한 미래의 생활을 위한 불빛을 명확히 하려고 한다. 확실한 것은 다만 그들의 갈망이 결코 사소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에른스트 블로흐-

2000년을 앞두고 있었던 1999년 칸 영화제에서는 이변이 발생했다. 당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것으로 예측되던 칸의 총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감독상에 그쳤고,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다르덴 형제가 <로제타>로 예상에 없던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선택은 도발적이었다. 다르덴 형제라는 낯선 이름을 선택한 것도 그렇지만, 2000년을 앞두고 20세기와 전혀 달라진 청년, 사회초년생의 얼굴에 집중했다는 점이 그렇다. 과거 희망찬 모습으로, 다소 어설프지만 당찬 모습으로 그려진 청년의 초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일자리는 희소해졌고, 누군가는 부모에게 도움을 받지만 누군가는 부모의 빚까지도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며, 국가의 안전장치도 없다. 송어 호수를 가진 자는 더 많이 재물을 가두어 부유해지지만, 없는 자들의 재물은 더 숭숭 빠져나가며 빈곤은 순환한다. 빈곤한 자들은 이웃과 친구를 사귀어 울타리 안에 둘 여유도 없다. 어제의 친구는 곧 오늘의 경쟁자가 되어 그의 일자리를 빼앗아야 하고, 이에 인간성과 죄책감은 사치로 전락한다, 심지어 산다는 것까지. 이렇게 삶 그 자체가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의 모습은 자국 벨기에에서 큰 파장을 일으켜, 청년 의무 채용 정책인 '로제타 플랜'이 2000년에 제정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작금, 과연 오늘날의 청년은 어떠할까. 그 당시보다 기술은 더욱 발전했다. 분명 당대보다 편해진 것은 맞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결과로 일자리는 더 많이 사라져간다. 어린 날에 꿈꾸고 바라왔던 희망은 죄다 바늘구멍처럼 좁기만 하다. <로제타>보다는 덜 절망적일지 모른다. 그 당시보다는 전 세계적으로 청년 복지가 향상되었으므로, 하지만 여전히 밝지 못한 초상인 것은 사실이다, 꿈만 보고 달려왔던 미래는 기대한 것과 정반대이기에, 이러한 청소년들의 초상을 호나스 트루에바가 담아낸다. 그의 작품 <재회>에서 아역 출연이 계기가 되어 우연히 만난 청소년들과 5년간 동고동락하며 담아낸 다큐멘터리, 이와 동시에 청소년들의 삶과 심리를 픽션으로 풀어낸, 양자가 혼합된 양식으로 그들과 재회한다.     


1981년 마드리드 태생의 호나스 트루에바는 스페인의 청년 감독이다. 올해 3월 <어거스트 버진>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트루에바는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여행 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와 현실을 넘나드는 오묘한 탈경계성을 자신의 색채로 구축했다. 본 작품 같은 경우 후자를 더 눈여겨봐야 할 텐데, 신작만큼 과격하진 않지만 트루에바는 이전 작품들에서 현실 속 통제되지 않은 행인들의 날 것의 반응, 행동, 눈 맞춤을 담아내었다. 이러한 생생한 표현과 행동이 본 작품에서 더욱 날 것으로 포착된다. 한편 언제나 다큐멘터리처럼 현실만 포착하진 않는다. 트루에바는 초기 알모도바르처럼 밴드 음악에 의존하기도 하며, 일상을 잊게 만드는 예술의 자율성을 고찰하기도 하니 말이다. 여행 영화를 탐구하는 그는 현실과 예술을 병치해놓으며, 현실에서 예술로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그의 여행 영화의 특성, 일단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여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트루에바도 여행을 떠난다. 최근 <어거스트 버진>에서는 그의 뮤즈, 잇사소 아라나를 각본에 참여시켜, 자신은 잘 모르는 여성의 몸과 심리를 여행했다. 그리고 항상 밀레니엄 세대를 고찰하지만, 그 또한 나이 앞자리가 4로 넘어가는 문턱에 접어들고 있는지라, 본 신작에서 그는 밀레니엄 세대를 넘어선 MZ 세대로의 여행을 떠난다고 할 수 있으랴. 그의 여행은 다른 시간으로 향하는 것도 익숙하다. <재회>에서 그는 현재에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그의 여행은 언제나 ‘실존’의 여정이다. <로맨틱 엑자일>과 <재회>에서는 언어가 강조된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 욕망을 종이에 고정한다. 하지만 글이 작성된 당시로부터 현재는 바뀌었다. <재회>에서 과거에 두 연인이 가졌던 마음은 지금의 자신도 잘 모른다. 그렇게 내 마음도 변하는데, 상대방의 마음은 어떠할까. <로맨틱 엑자일>은 나의 마음에 따라 여행을 떠나지만, 실존하는 상대방의 정념에 의해 망명자가 되는 추방 일대기다. 한편 그렇게 추방됨으로써, 언어의 배신을 느끼며 그들은 실존한다. <로맨틱 엑자일>에서 정념과 감정을 강조하는 낭만주의를 인용한 것처럼, <어거스트 버진>에서 계속 변화하는 몸을 탐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고정된 개념으로 살지 않고 변화하는 육신으로 실존한다.     


<어거스트 버진>에서 실존하지 않는 나는 권태롭고 빈곤하다. 하지만 우리는 실존하면서 즐겁고 풍요로워진다. 이러한 실존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과의 접촉이다. 똑같은 사람이더라도 그들 또한 실존하기에 과거와 현재의 그들은 같지 않다. 이러한 타인 앞에 선 내 몸이 과거에 생각지도 못한 감정과 반응을 표현한다. 그렇게 유한한 나는 무한한 타인들과 접촉하며 영화 제목의 성모처럼 새로운 나 자신을 잉태한다. 더욱이 virgin에서 눈여겨봐야 할 의미가 ‘처음’인 것처럼, 언제나 처음 맞이하는 몸가짐으로 참여하는 우리의 실존을 강조한다. 한편 트루에바가 다루는 밀레니엄 세대들은 언제나 실존의 여정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나름의 계획이 있지만 그것이 불발되는 <로맨틱 엑자일>, 과거에 자신이 상정한 계획을 스스로가 파기하고 망각한 <재회>처럼, 일단은 과거를 현재에 재연하려고 한다. 그러다 현실의 변화와 우발성에 맞부딪혀 실존을 긍정하는데, <누가 우릴 막으리> 또한 이러한 트루에바의 관점이 도드라질 것 같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본 작품의 시작, 공원에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 트루에바가 5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청소년들이다. 공원에 모인 이들은 상황을 가정하여 약소한 영화를 찍을 예정이다. 이후 촬영이 시작되는데, 촬영 전이나 후나 영화는 핸드헬드가 주로 활용된다. 영화 속 청소년들은 많은 것들이 미숙하고 처음이다. '동정'임을 강조하는 소년, 부모님이 여행을 떠나서 처음 스스로 요리하는 소년,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서 불완전한 풍경, 주체할 수 없는 정념, 사회에 반항하기, 수학여행에 간 청소년들의 들켜선 안 될 미흡한 일탈… 이러한 치기 어림, 과감성, 주체할 수 없는 혈기를 멈추지 않는 흔들림으로 가시화한다. 이렇게 청소년들의 10대 시절을 핸드헬드로 담아내는 트루에바는 영화가 공개된 시점과 아주 가까운, 코로나 팬데믹 당시에도 이들과 만남을 이어갔다. 청소년들은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에 뛰어들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온라인으로 비대면 만남을 가져야 한다. 이에 화상통화 하는 이들의 얼굴을 분할 스크린으로 처리하여 한데 모이게 만들지만 서로에 대한 느낌, 감각은 단절·제한된다. 또 과거에 청소년들이 이리 튀고 저리 튀던 운동감을 느낄 수 없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변화, 또 청소년들이 나이를 먹고 사회에 참여함에 주체할 수 없던 혁명 정신, 반항기가 무뎌져 감을 형식의 변화로 보여준다.     


청소년들의 성장,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변화에 감독은 개입하지 않는다. 실제로 5년간 촬영한 것들 중에서 중요한 사건과 시간을 취합하는 성격은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를 닮아있고, 이를 아카이빙하는 5년 간 감독이 개입을 최소화한 태도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을 닮아있다. 물론 트루에바는 그들과의 친밀함을 바탕으로 직접적인 인터뷰, 토론의 장을 열어놓기도 하지만, 감독이 직접 개입하지 않은 생생한 일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일까, 청소년들의 눈에 카메라와 감독이 띄지 않는, 그들 사이로 철저하게 녹아들고 숨어듦에 형성된 ‘측면 구도’가 인상적이다. 이들 사이로 숨어들어 청소년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학생들은 의식하지 않는다. 선생들은 학교나 수업의 규칙을 학생들에게 지시하므로 청소년들은 그들을 의식하거나 위축되곤 하지만, 카메라와 감독은 그들에게 규칙을 지시하지 않고 청소년만의 규칙을 방해하거나 그 당시에 유출하지 않는다. 그렇게 청소년들 속에 파고들어 측면으로 촬영하는 카메라와 개입을 최소화하는 감독에 의해 생생한 청소년들의 삶과 초상을 보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상을 배려하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트루에바는, 학생들과 찍는 영화조차 청소년들이 상황과 각본을 가정하게 만들고, 촬영 또한 배우가 준비되었을 때 시작한다. 본 작품에서 주도권은 언제나 청소년이라는 대상이며, 트루에바는 대상을 순수하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을 환기한다. 그렇게 5년간의 기록 중 핵심적인 시간만을 취합한 본 작품은 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 30분이다. 그래서 두 차례의 인터미션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쉬는 시간'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과 청소년은 본 작품의 인터미션이 영화를 본 관객이 현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후술하겠지만 본 작품에서 대두되는 개념은 '중재'다. 자아가 커지기 시작해서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운 친구들 사이, 성인이 된 청소년들의 과거와 현재, 궁극적으로는 기록된 대상과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 세대와 세대를 중재한다. 트루에바의 영화는 자족하지 않고, 현실과 가상을 이어내고, 관념과 실천을 엮는 데 의의가 있다. 그렇게 중재하여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가능하고, 과거는 현재, 영화는 현실로, 반대도 가능하다.      


이러한 연출로 포착된 청소년들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발달이론에 따른다면 청소년들은 성욕기에 놓여있다. 성기를 향한 원초적 자극에 집중하던 '남근기', 이후 내적인 성적 충동이 사그라들어 외부를 바라보며 청소년들 간의 우정, 관계를 중시하는 '잠복기'를 거쳐서, 2차 성징 이후 다시 성욕이 들끓지만 남근기와 달리 대상에게 참여하는 소속감도 중요시하는 '성욕기'로 이어진다. 영화 속 청소년들이 바로 성욕기에 놓여있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주된 관심은 당연히 성이다. 나의 동정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것이 곧 나의 전부를 내어주는 것이요, 또 내가 흠모하던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 침울해한다. 또 청소년들이 영화를 만드는 장면을 살펴보자. 그들의 일상은 학교와 교우관계가 반복된다. 허구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에서 소재를 찾고 싶다는 청소년들은 자기 주변에서 영화를 만든다. 그런데 학생들은 주로 불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무리에서 떠돌거나, 상대방에게 모욕적인 기분을 느끼거나, 나의 기준에서 변하거나, 대상과 단절된 듯한 기분을 말이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이유, 일단 청소년들은 경험이 드물다. 경험은 우리에게 기존,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여 새로운 것을 일깨워준다. 경험이 많은 자는 나의 생각이나 계획이 부정될 수 있음을 긍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의 경험이 청소년에게 드물다. 부모님이 부재하여 조성된 파티에서 청소년들은 진실 게임을 한다. 이들의 고백은 무언가를 해본 것보다, 무언가를 안 해봤다는 내용이 한 가득이다. 이렇게 경험이 충분하지 않아 부정되고 좌절당하는 기억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는 자아는 비대하다. 그래서 이들은 익숙하거나 당연하지 않은 부정이 독특한 사건이라서 이를 영화화한다. 또 두 번째 인터미션이 끝난 3부에서 19살인 한 학생이 섬에서 충분히 홀로 생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듯, 나는 완벽한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러한 완벽한 나를 왜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지, 또 이 완벽한 판단에 왜 상대방이 들어맞지 않는지가 오리무중이다. 자아가 커지는 청소년들은 머릿속에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타인과의 대화보다는 고독한 상태에서의 자기 대화가 더 일반적이다. 그리고 독백하는 나는 언제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의 대화는 경험의 부정성과 무관하다.     


더욱이 시대는 변하고 있다. 3부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전후에 낀 청소년들, 도입부에서 영화를 찍을 당시에는 비건 및 채식주의에 따른 불화가 언급된다. 그리고 1부의 토론에서 나타나듯, 청소년들의 정치적 신념은 부모에게 이어지는 게 많기에 현재에는 고루할 수 있고, 이러한 자신의 성향을 완벽하다고 여기기에 타자는 자신에게 악마처럼, 또는 모자란 것처럼 보인다. 사랑에 좌절한 칸델라를 침울하게 만든 파티는 끝난다. 칸델라는 깨어있지만 다른 친구들은 잠들었다. 나가겠다고 말을 남기며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 엄마는 칸델라에게 굳이 많은 것을 캐묻지 않으며, 소녀는 자신의 어두운 방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산하는 스마트폰으로 SNS를 하다가 잠이 든다. 자신의 성, 자아만이 빛을 발산하고, 외의 것은 어둠이다. 그것이 곧 ‘청소년의 방’이다. 방에만 갇혀 있는 청소년은 학교에서도 문제를 일으킨다. 항시 고립된 파블로라는 학생은 친구 및 선생과 불화가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실수로 선생님께 밉보인 것만 같고, 또 서로의 무례함을 참을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은 마냥 홀로 놓이고 싶지 않다. 파블로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들은 소속되고 싶다. 하지만 기성에 소속되고 싶지 않다. 완전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세상에 소속하고 싶다. 1부에서 어른들의 빚을 떠안고 싶지 않다는 시위, 자신들을 우민으로 만들 것 같다는 교육정책에 대한 항의, 자기 계발 시간을 더 보장하라는 토론 등 학생들은 기성 체제에 반발이 많다. 이러한 기성의 정책이 전체주의, 독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청소년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주인 되고 싶다. 3부에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세상으로 향하지 못한 것을 답답하게 여긴다. 정치인들은 항상 태업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들은 동떨어지기를 원치 않고,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와 스페인을 사랑한다. 그래서 얼굴을 절반으로 나눠 한쪽은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고, 한쪽은 기성의 편견을 투영한 하비는 두 개의 인격 각각에 소속한다. 또 2부에서 청소년들은 수학여행에 간다. 이들은 조를 짠다. 열정적인 청소년들은 조를 짜서 게임의 규칙을 만든다. 원하는 사람끼리 모인 조에서 대다수는 게임의 규칙에 찬성하며, 소속은 곧 자신을 반영한다.      


한편 이러한 조의 규칙이 마음에 들지 않는 청소년들이 있다. 장난치고 놀리는 것을 무례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 조에서 튕겨 나온 이들이 또 다른 무리를 형성한다. 앞선 조의 무례함에 상처를 입은 파블로는 자신을 반영하는 새로운 무리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이해받는다. 즉 청소년들은 마냥 안정감을 얻고 싶어서 소속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부심을 느끼는 자아를 이해받으며, 그것의 누울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사회의 문턱에 선 청소년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마냥 따돌림, 추방, 배제가 아니다. 학교에서는 무리를 형성하는 사람들은 청소년 자신이다. 그래서 파블로처럼 배제되더라도, 그렇게 배제된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규칙으로 무리를 형성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앞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자신들을 소속시켜야 하고, 규칙을 창조하는 권력이 초년생에겐 부재한다. 학교에서는 그래비티에 참여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지만, 어른들의 눈에 그래비티 하는 여성들은 문란하게 여겨진다. 또 학교에서는 남/여가 구별되지 않으나, 사회에서는 성별에 따라서 전공이나 직업이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특정 성별이라는 이유로 내가 원치 않게 소속된다. 청소년들은 내가 반영되지 않는 소속이 싫다. 그래서 자신을 반영해주지 않는 선생과 항시 불화를 겪는다. 선생을 울렸다는 일화, “왜 체육선생은 항상 이상한 사람들만 배정될까” 의아해하는 아이들, 교실로 들어가라는 선생의 지시에 시험이 끝났으니 안 들어가도 괜찮다는 자신들의 규칙을 내세우는 등 말이다. 내 눈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 강조하는 것이 상대방의 눈을 빌려오는 ‘중재’다. 도입에서 청소년들의 일상에서 만연한 불화로 영화를 찍을 때도, 항시 불화의 두 당사자 사이에는 중재자가 있다. 중재자가 그들을 이해·화해시킨다. 또 청소년들의 토론은 언제나 트루에바라는 중재자가 만들어놓은 규칙과 상황 속에서 부드럽게 진행되며, 이들의 일상이 영화화되는 장면에서는 항시 나레이션이 등장하여 청소년들의 심리, 내면을 감상자에게 읽어준다. 2부에서 학생들이 그라나다로 수학여행 갔을 때 등장하는 마리아는 마드리드와 그라나다를 이어주는 여행가이드라는 중재자이자, <어거스트 버진>에서 마리아로 등장한 배우가 그녀이기에 허구와 현실을 이어주는 중재자다.     


중재자들은 각각의 차원을 매개하고, 낯섦을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또 청소년들의 일상에서 그들 스스로가 중재할 수 있는 장소를 형성한다. 바로 마드리드의 다양한 청소년들이 모이는 ‘쿠보스’라는 장소로, 거기서는 다양한 취향을 가진 청소년들이 모여들기에 항상 나를 상대방에게 먼저 소개하고 참여한다. 이렇게 너와 나, 다른 차원 및 세대는 서로를 실로 알고 이해하며 중재된다. 이를 위해선 당연한 나, 익숙한 상대방의 재생산을 중단해야 한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항상 서로를 친숙하게 마주하기에 더욱 무례해진다. 2부 수학여행에서 익숙한 규정을 공유하는 무리는, 마찬가지로 같은 학교 학생인 파블로도 당연히 이해하리라 속단한다. 하지만 쿠보스라는 환경에서는 이러한 당연함이 사라져, 익숙하지만 실상 잘 모르는 서로의 재생산이 중단된다. 수학여행도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는 파블로가 겉도는 것이 당연해보였다. 하지만 수학여행에서 파블로가 난폭한 것이 당연하지 않고, 특정 규칙을 공유하는 무리가 무례하다는 것을 확인하여, 이해받은 파블로는 고립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트루에바는 본 신작에서도 ‘여행’에서 중재란 미덕을 길어온다. 이러한 중재와 여행은 곧 사랑이다. 칸델라와 실비오는 서로 사랑한다. 그래서 칸델라가 고향으로 여행을 간 날, 실비오도 과감하게 따라나섰다. 실비오는 자기 세계를 포기하고 칸델라에게 파고든다. 칸델라의 고향 첼레스는 강만 넘으면 포르투갈로 향할 수 있는, 인접한 두 국가의 경계선이다. 사랑하게 된 서로는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향하여 더욱 사랑을 불태운다. 새로운 국가로 뛰어넘기, 나만 바라보던 시야를 상대방의 몸에 포개 익숙한 나를 중단하고 타자에게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 상태에 마냥 머물지 않는다. 포르투갈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오고, 칸델라는 첼레스에 머물지만 실비오는 마드리드로 돌아가야 한다. 이후 첼레스에서 작별한 두 연인은 서로 못지않게 자신을 더 잘 알았다고 말한다. 상대를 사랑하는 내 심장을 더 잘 알게 되었으므로, 또 새로운 환경에서 익숙한 내가 몰랐던 나의 용기가 더욱 잘 보이는 법이므로. 이는 루니와 파블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랑은 스페인어와 루마니아어를 번역하는 과정, 과격하지 않은 포근한 파블로의 처음 보는 어깨에 기대고, 파블로 또한 자신이 이토록 부드러울 수 있음을 인지하는 과정이다.      


실비오와 칸델라, 루니와 파블로의 사랑은 트루에바의 손을 거친 나레이션과 우아한 촬영이 결합하여 현실에 머물지 않고 영화화된다. 파블로의 어깨에 놓인 루니의 얼굴, 포르투갈로 향한 실비오와 칸델라의 목가적인 사랑을 현실에서 이탈한 시적인 정서로 풀어낸다. 그렇게 트루에바의 영화는 현실에서 더 잘 이해하고 잘 봐야 할 것들을 시적인 연출로 일상에서 이탈시킨다. 그렇게 당연한 현실에서 낯선 영화로 여행을 떠나며, 감상자는 일상이나 사랑의 당연함으로부터 벗어나 생경한 미덕을 목도한다. 이렇게 트루에바의 영화 또한 중재자이자 여행의 장소다. 익숙한 자신을 중단시키는 생경한 경험, 대상과의 불화를 종식시키는 이해의 장. 이러한 영화의 의미가 현실에서 가상으로 이탈하는 픽션에서 발생한다면, 본 작품은 픽션임과 동시에 다큐멘터리에 발을 걸치고 있기 때문에, 트루에바는 다큐멘터리로서 영화의 미덕 또한 건져낸다. 이는 3부에서 도드라진다. 이제 학생들은 졸업한다. 그래서 사회의 무게가 어깨에 얹히게 되니, 그들의 일상은 마냥 경쾌하거나 발랄하지 않다. 이들은 아무리 사회에서 운동하고 울부짖어도 변하는 것이 없지 않을까 하는 낙담에 젖어 들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관계가 형식적이고 사무적으로 변한 것 같고, 간접적인 만남 때문에 진정한 상대방을 잘 모르겠다며 고충을 토로한다. 그렇게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사회로 나아가며 변해가지만, 이 와중에 트루에바가 다큐멘터리로 기록하여 보여주는 것은 변하기 이전의 청소년, 그리고 현재의 성인들이 변할 수 있는 가능태로서의 과거다. 청소년들은 이상으로 단번에 나아가진 않겠지만, 꾸준히 실천하고 우리 주변 몇몇이라도 바꿔감에 의미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재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고 희망도 품기 어렵다고 말하는 칸델라는 현재에 비관할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과거에 직접 실천했기 때문에 현재에서 과거로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들은 코로나 팬데믹 정책을 좌우하게 된, 자신들이 투표하는 장면도 눈여겨본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에 이토록 큰 파장을 미친다는 것을 확인한다. 과거로 거슬러 가서 이를 다시 선택할 순 없다. 하지만 과거를 보면서 내가 해야 할 것을 확인하여 현재에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      


과거에 청소년들은 그들이 직접 작사·작곡한 가사와 노래를 연주하며, 이를 듣는 관객들도 거부감 없이 다 함께 즐겼다. 그렇게 자신을 고백하는 가수들은 받아들여졌고, 이를 즐기며 춤추는 관객들 또한 수용됐다. 이러한 서로 간의 이해가 불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만 같지만, 트루에바가 편집 및 재생 프로그램의 ‘되감기’를 굳이 노출하며 다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 과거로의 되감기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트루에바는 기록으로 가능한 과거를 보여준다. 나이가 들고 소속하는 장소, 공동체, 세대도 달라지고, 우리는 무언가를 더하지만 잃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이 불가능을 의미하진 않는다. 트루에바의 기록은 우리에게 ‘가능’을 환기한다. 그것이 트루에바의 또 다른 실존이다. 현재의 재생산 속에서 맹목적으로 잊힌 과거는 마땅히 실존해야 한다. 청소년들의 혈기와 청춘은 결코 마지막이어선 안 되리. 이러한 청소년, 그리고 일반적·보편적으로 묶이지 않는 개인을 ‘중재’라는 개념으로 이어낸다. 재생산되는 편견, 익숙함, 당연함을 중단하며 상대방을 되돌아보기, 그렇게 상대방을 되돌아보며 나와 자유를 되찾기. 그렇게 지난 20년의 변화보다 더욱 가파른 포물선을 그리며 흘러가는 오늘날에 놓인 청소년들이 갖는 기대와 불안을 인지하기, 트루에바의 궁극적인 중재는 가상이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청소년이 청소년에만 머물지 아니하며, 결국 현실 속 감상자의 인식과 행동으로 옮겨가기를 촉구한다. 그렇게 청소년들이 바라는 좌절을 추진력으로, 단점을 보완으로, 소속과 이해를 고루 잡는 사회로의 이행을 중재한다. 이러한 청소년의 삶과 초상을 5년간 기록한 기념비적인 작품, 2020년대의 문턱에서 <로제타>만큼의 중요성을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태도가 유사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나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작품보다 다소 헐겁게 느껴진다. 헐거움이나 느슨함이 미래에 여지랄지, 성인 감상자의 중요도에 비해 다른 것에 초점을 두는 청소년의 시점에 상응하더라도, 긴 상영시간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청소년의 초상을 기성에게 중재하고,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혼재하며 영화의 의미 또한 환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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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02 집에서(전주국제영화제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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