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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4. 2022

카타리나 바스콘셀루스, <변신>

인생은 변신입니다

카타리나 바스콘셀루스(Catarina Vasconcelos), 

<변신>(The Metamorphosis of Birds) - 인생은 변신입니다     

“슬픔과 고통은 엄청난 창의력을 가져다주고 번민은 더 많은 상상력을 안겨 주는 법이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 나소-

변신이란 무엇인가. 변신의 갖가지 의미를 우리는 과거의 지혜에서 길어올 수 있다. 바로 그리스 신화를 '변신'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통해 말이다. 동물도, 인간도, 신도 변신하고, 그들이 살아가고 지배하는 세계도 '변신'한다. 시대의 변신은 무질서함에 질서를 부여하고, 뒤엉켜 있는 것에 역할을 부여한다. 변신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고, 각각의 기능을 차별화한다. 또 『변신 이야기』에는 주체적인 변신이 있다. 에로스의 금화살을 맞은 아폴론이 연모하는 요정을 바라보고, 호색한 목가의 신인 판 또한 정욕이 들끓어 시선에 놓인 요정을 추격한다. 이에 주체적인 다프네와 시링크스는 나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다. 요정들은 그대들이 원하는 용모에 순응하지 않는다. 변신은 나의 자유다. 그리고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절대자와 인간의 격 또한 엄격히 나누던 고대의 변신은 자신이 놓인 '격'에 머무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이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변신은 언제나 동물로 추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위로 올라서려는 세멜레나 파에톤의 변신은 언제나 실패로 끝났다. 물론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뼈를 깎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 헤라클레스처럼 고차원적인 존재로 승격할 수 있으니. 그리고 동물의 정신이 인간적으로 상승하는 변신도 있으니, 겉은 다르지만 정신은 동등한 변신에 대해선 긍정하였다. 그리고 변신은 ‘사랑’이다. 대상을 위해 나의 이미지를 뒤바꾸는 변신, 다른 차원으로 떠나버린 연인과 하나로 묶어주는 변신이 있다. 사랑의 변신은 그 대상과 하나로 묶이며 뒤바뀐다. 그리고 변신으로 긍정적인 것들이 부정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바로 미다스의 변신이 그렇다. 사물을 신봉하지만, 정작 물신화의 극단화는 인간과 자신을 잃게 할 것이라는 비극의 변신이었다.     


그리고 여러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변신하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을 미덕으로 본다. 산호가 바다에서는 잔가지로 여겨지고 지상에서는 바위로 여겨지듯, 오비디우스가 그리스에서 로마로 향하여 히폴리투스에서 비르비우스가 되어 민족적 정체성을 변신했듯 말이다. 그리고 본 작품, 카타리나 바스콘셀로스의 도 이러한 이러한 변용의 가치를 모색한다. 영화의 장르성을 능동적으로 뒤바꾸는 변신, 누군가의 상실 속에서 요동치는 자신과 가족의 변신을 말이다. 영화에서 변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갈망’을 느끼는 감정 및 ‘아픈 기억이 주는 행복한 느낌’을 뜻하는 포르투갈어 '사우다지'라는 단어와 아이는 '통제할 수 없는 작은 새'라는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발생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변신,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변신,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오며 발생하는 변신, 이를 담아내는 연출부터 살펴보자. 일단 본 작품의 화면비는 4:3이다. 본 작품이 거대한 풍경을 포착하거나, 공간과 조응하는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사물이 초상 그 자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피사체 외의 잉여를 담아내지 않는 좁다란 화면비는 효율적이다. 또 본 작품은 영화의 중반부에 감독이 어머니의 초상을 퍼즐 조각으로 맞추는 것처럼, 자신이 잃어버린 어머니에 대한 기억, 현재에 뒤죽박죽 섞여버린 과거를 차츰차츰 재조립하는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회고의 성격에 부합하는 16mm 필름을 사용한다. 빛이 바랜 듯 희끄무레하다. 또 낡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레인 또한 굳이 지워내지 않는다. 흡사 먼지가 잔뜩 낀 것만 같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낡아버린 것만 같은 양식, 하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억을 아주 정확하게 바라본다. 아스라하고 불투명하지만, 아주 적확하게 대상만을 조명하는 화면비와 촬영을 통해서 주로 빈 공간, 어머니의 노동, 당시의 정물, 재현된 초상 및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본 작품의 방법론은 회화와도 같다. 영화에선 호아킨 소로야의 <엄마>, 얀 스테인의 풍속화, 드 라 투르의 성모 그림 등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 영상이 교차 편집된다. 그리고 교차 편집되는 회화와 유사한 방식으로 피사체를 조명한다.      


영화의 초반부, 생선을 포착하는 영화의 구도는 마찬가지로 하잘것없는 일상의 사물들, 곧 썩어 부패할 식료품 등을 회화의 소재로 선택한 바로크 정물화를 연상케 한다. 눈에 띄지 않던 것,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만들고, 곧 '변신'하여 사라져버릴 기존상태를 붙잡는 과거의 회화, 이러한 회화의 방법론을 차용한 본 작품은 기록과 보존이 너무나 당연하고 만연한 오늘날에, 이것이 당연하지 않던 시대의 방법론을 길어와 가치를 다시 한번 환기한다. 한편 영화는 마냥 고스란히 보존하지 않는다. 본 작품은 감독이 어머니의 기억을 보존하는 다큐멘터리임과 동시에, 기록에 일련의 허구와 상상이 끼어들어 와 변신하는 픽션 사이에 놓여 있는 작품이다. 본 작품이 마냥 현실에 봉사하지 않는 것처럼, 본 작품의 내용도 마냥 대상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영화는 주로 어머니의 기억이 묻어나는 편지, 일기 등을 읽는다. 허구의 화자가 대신 읽기도 하고, 외부의 관찰자가 건조하게 해설하기도 한다. 이에 어머니의 편지를 바라보지만 화자가 어머니가 아닌 오묘한 불일치가 발생한다. 시각과 청각은 이렇게 다루는 대상 그 자체에 온당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 작품은 현실을 반영함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재료를 제공한 현실과 불일치하며 변신하는 예술,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는 하나의 기억, 하나의 대상이 ‘메아리’치듯 다른 사람의 눈과 입에 의해 범람 되며 변신한다. 영화 초반에 어머니의 편지를 읽는 하나의 입이 등장한다. 하지만 청각은 하나의 입이 말하는 하나의 발화가 아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겹친다. 또 아이들이 뛰노는 장면에서도 그들을 포착하는 시각과 이들 외에 다른 차원, 시각에서 전달된 목소리, 소음이 끼어든다. 이런 식으로 예술이 다루고 포착하는 대상은 그것과 마냥 일치하지 않고 무언가가 더해진다. 이렇게 시각과 청각의 불일치로 현실로부터 변신하는 예술을 고찰한 감독은, 이것 외에도 여러 장치와 상징을 통해 예술의 변신을 고찰한다.     


감독의 아버지는 젊은 날, 선원이었다. 그래서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이면 아내와 자식들이 그리웠다. 아내는 남편에게 편지를 썼고, 아이들의 사진을 동봉했다. 좁고 작은 흑백 사진에 아이들의 초상이 담겨있다. 아이들의 세부를 상세하게 보고 싶었던 아버지는 돋보기를 이용해 확대해서 봐야 했다. 아버지는 사진 속 아이들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흑백 사진과 달리 색채가 있고, 아버지가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당시에는 훌쩍 성장했다. 그래서 사진은 보존하지만, 사진이 담고 있는 그들은 현재의 피사체를 온당 반영하지 못한다. 또 영화에서는 ‘거울’이란 장치가 강조된다. 아버지는 사진을 통해 아들을 보지만, 아들은 거울을 통해 현재 얼굴을 본다. 현재, 하지만 얼굴은 거꾸로 뒤집혔고 동그란 프레임 안에 놓여있다. 아들이 놓인 거대한 공간을 축소한다. 어쩌면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을 왜곡하고 변형하여 ‘고유한 상’을 만들어낸다. 대상을 비춤과 동시에 일부 변화시키는 거울은 본 작품 속 보존하고 기록하는 카메라의 역할과 같다. 거울은 수동적으로 반사함과 동시에 뒤집고 축소하며 약소하게 변신한다. 이후 거울은 더 실험적으로 변신한다. 감독은 카메라로 포착하는 바위, 자연, 인간의 손에 거울을 놓는다. 그리고 거울은 카메라가 포착하고 있지 않은 바다, 건너편의 숲, 눈을 반영한다. 그렇게 한데 놓일 수 없는 바위섬-바다, 숲-건너편, 손-눈이 하나의 프레임에 공존한다. 이렇게 거울이 현실에 놓여 두 개의 차원이 중첩되고, 불가능한 공존이 가능해진다. 현재는 과거와 함께, 상실된 것은 존재하는 것과 함께, 이렇게 예술은 과거, 잃어버린 것을 되돌린다. 이를 보여주는 형식이 바로 ‘되감기’다. 영화의 후반부, 어머니와 딸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다고 회고한다. 시간은 속절없이 앞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카메라는 되감아서 꺾였던 잎사귀와 이끼를 다시 나무에 붙인다. 시간이 유실시킨다면, 예술은 되돌리고 보존한다. 시간의 입장에서 예술, 예술의 입장에서도 시간은 서로 변신이다. 서로의 섭리에서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작품은 시간에 따른 변신도 탐구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과거에 한 대상의 하나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를 읽고 듣는 무수한 눈과 귀가 있다. 하나의 텍스트가 여러 개의 입에서 낭독되며 하나의 기억은 무수하게 메아리친다. 그래서 서로는 달리 보인다. 과거는 현재에 메아리치는 기억이, 현재는 메아리친 대상의 근원이 말이다. 자신들로부터 변신한 느낌이다. 영화 속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장례식도 이런 관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족은 멈춰버렸다. 사람들은 멈추었지만, 담배는 타들어 간다.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다. 분명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움직이는 이미지다. 하지만 흘러가는 시간, 타들어 가는 담배로부터 사람들은 멈춰서 변신을 거스른다. 그리고 죽음 이전에 머물고자 하는 그들에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담배는 필연적인 변화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현재에서 과거로 향하는 변신이요, 현실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계속 진군하는 변신이다. 본 작품의 다큐멘터리적인 측면은 현실의 변신에 집중한다. 어머니가 죽어 집은 매매되고, 죽은 새는 땅에 묻히고 만개한 꽃이 그 주변에 장식되며, 부모의 편지를 태운다. 하지만 집이 사라짐에 비로소 자유로워지고, 편지가 불태워져서 남게 된 재는 훨훨 난다. 편지에는 부모 자식 간의 비밀이 담겨있다. 그것을 읽는다면 앎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모른다면 자식들은 부모와의 관계나 그들의 의도에 무조건 얽매이지 않는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은 주로 상실하고 털어내며 변신한다. 물론 언제나 상실의 변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란다. 깨끗하던 소년의 얼굴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나고, 집 안에서 조각에 키스하며 사랑을 연습하던 소년은, 이제 실제 여성과 직접 키스하며 인생은 계속 더해진다. 그렇게 더해놓고 시간은 앗아간다. 있는 것을 빼앗아 가며 우리는 '가벼워지는 변신'을 경험한다. 그리고 예술은 생물을 사물로 만든다. 촉촉하던 대상을 건조하고 딱딱하게, 사라져야 할 대상을 붙잡아 무겁게, 특정 순간에 귀속시킨다. 예술과 시간에 따른 각자의 변신은 그 무게에 차이가 있다.     


예술과 시간은 서로의 관점에 따라 변신하는 것만 같다. 각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서로는 변신한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변신은 대상 그 자체가 변신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의 ‘시선’에 따라 변신하는 것을 분명 무시할 수 없다. ‘해마’는 말과 연관이 전혀 없다. 하지만 지상에 사는 인간이, 그래서 지상이 기준이 된 인간이 말과 닮았다는 이유로 해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자식을 지상에 두고 바다로 나온 아버지는, 수컷이 임신하는 해마의 부성에 자신을 투영한다. 그렇게 지상의 시선, 아버지의 시선이 해마에게 투영되어 해마는 특정 상징으로 변신한다. 대상은 타자의 시선을 통해 변신한다. 또 영화에서는 비어있는 것들이 강조된다. 빈집, 빈 병, 비어있어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몸, 이러한 집에 사물, 예술, 모형 배, 여섯 명의 아이들이 채워진다. 비어 있는 우리는 무언가가 채워지기를 원하며, 그렇게 수납하며 변신한다. 수납장에서 어머니의 자손이 훅 튀어나오는 것처럼, 비어서 아무 의미도 없는 대상은 무언가를 채움으로써 변신하고 이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비었다는 것은 없음, 그리고 사라짐, 하지만 비워짐은 채워지기를 원하기에 결국 되돌아온다. 육체가 사라진, 그렇게 세상에서 비워진 대상이 새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고 그것으로 말한다는 것처럼, 육체의 ‘보임’은 새의 언어의 ‘들림’으로 변환하며, 시각적으로는 여전히 비어있을지언정 청각적으로 새롭게 채워낸다. 이렇게 사라지며 변화하는 본 작품에서 강조하는 원소가 바로 ‘물’이다. 선원이 된 아버지, 아버지가 항해하는 출렁이는 바다, 어머니가 수영하는 강 등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유동하는 물을 영화 내내 강조한다. 파도치는 바다는 결코 그대로 놓여있는 법이 없으며, 강에서 수영하는 어머니는 카메라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렇게 기존의 상태는 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은 고체로, 기체로, 또다시 액체로 변화하고 또 변화하며, 눈에 안 보인다 한들 사라진 게 아닌 것처럼, 물을 떠다니는 철새인 우리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눈과 딸의 눈, 아버지 손의 거울과 딸 손의 거울을 매치 컷 하는 것처럼, 부모가 멀어지더라도 분신과도 같은 자식으로 변신하며 남게 된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자식을 탄생시킨 부모의 의도가 남긴 편지가 타들어 가고, 부모가 그들을 찍어준 사진과 일치하지 않게끔 자식들은 변화한다. 과일의 껍질이 깎이고, 아침은 밤이 되며, 지상에서 바다로 나아가고, 커튼이 안과 밖이 각각의 다른 차원을 가르는 것처럼, 자식들도 부모의 색채가 깎이고 부모와 자식은 커튼으로서 서로 다른 삶으로 분리되며 원형에서 변신한다. 이런 우리는 마냥 나로서 변신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자가 되는 변신을 하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언어를 통해 말이다. 본 작품에서는 새의 지저귐, 선원인 아버지의 모스부호, 한 개념을 통역하는 '언어'가 강조된다. 그리고 새의 언어를 이해하였을 때, 인간의 말소리는 점차 사라지고 새의 언어만 남게 되며, 인간의 얼굴이 새로 변신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삶을 투영한 언어를 실로 이해하였을 때, 상대방이 될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이러한 변신에도 불변하는 것들을 고찰한다. 새의 언어를 활용하여 부리를 가진 얼굴이 된다고 해도, 여전히 ‘나’인 자신을 말하지 않을까. 아버지는 바다로 향한다. 몸이 바다에 놓인다. 하지만 지상에서의 기억, 지상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애잔함, 그리움은 변하지 않는다. 육체는 변화해도 정신은 기존으로부터 변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어머니, 딸이라는 단어가 각국의 무수한 단어로 번역된다. 어머니, 딸은 아주 다양하게 불린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어머니,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어머니들의 어머니… 그렇게 무수한 어머니들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비어있었고 채워졌었고, 그렇게 어머니들로부터 태어난 필연적인 딸이 지금의 우리다. 즉 어머니와 딸은 무수한 형태로 모습이 바뀐다고 하여도, 어머니의 몸에 놓였다는 사실과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관계는 불변한다. 감독은 어머니의 초상으로부터 마찬가지의 어머니인 나무의 잎사귀를 클로즈업하고, 그렇게 인간에서 식물로 거슬러 내려가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어머니 자연으로 향한다. 인간, 식물, 대지라는 형태가 뒤바뀌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요, 우리의 삶이 언제나 어머니를 벗어나지 않는 것도 동일하다.     


그래서 감독이 보존하고자 하는 기억은 변신 속에서도 불변하는 것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아주 흐리다. 어둠만이 가득하다. 시각은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고, 그레인만 자글거린다. 그것은 아버지가 듣고 있는 어머니, 자식의 음성이다. 항해를 떠난 아버지는 그리운 가족의 음성을 듣는다. 지상의 가족들에게 아버지, 바다의 아버지에게 가족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이어지지 않는다. 눈으로 볼 수 있던 서로는 청각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그 청각이 불변할 부모와 자식 관계를 보여준다. 음성이 녹음되던 당시로부터 엄마가 사라진 현재에도 그 관계는 마찬가지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달아나고, 지상에 단단하고도 딱딱하게 놓였던 우리는 바다로 향한다. 마지막 숏 이전, 아버지와 딸이 배에 나무를 실어 바다로 항해를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상실하며 또 덧붙여지며 우리는 뒤바뀌지만, 어머니라는 풍요롭고도 자애로운 지대 위에 놓였다는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카타리나는 성장하고 늙고 사라져서 다른 형태로 뒤바뀌어도 분명한 '나 자신'들의 초상, 정물을 보존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앗아가며 변신시키는 시간, 그것을 거스르고 과거를 살피는 예술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불일치, 어긋남이다. 현재, 미래로 달려가는 시간과 그 흐름에서 과거를 살피는 감독은 충돌한다. 서로의 시선에서 각자는 변신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긋남이 변신 속에서 불변을, 불변 외의 변신을 각기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불변과 변신, 양자 모두와 공존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오묘한 경계에 놓인 본 작품은 변신과 불변 사이에 놓인 인생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시각과 청각, 나레이션과 독백, 그리고 대상 및 현실과 예술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대상을 조명함과 동시에 뒤집어서 보고 확대해서 보며, 관습으로 바꿔 쓰지 못하게 변신하는 본 작품은 시적이다. 시인과 작품 고유의 법칙을 따르며 기존 문법에서 변신하는 시처럼, 시적으로 회고하고 인생을 담아내는 카타리나는 곧 하나의 시로써 무수히 변천하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보여준다. 바타이유가 말하듯 시는 자연을 전적으로 정당화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법칙들 밖에 존재하는 것, 반항의 폭력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시로써 기존과 과거를 부정하고 거부하며 줄곧 변신하지만, 그렇게 변신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불변하는 것들을 우리는 시의 내용으로 보존한다. 시는 그렇게 상실을 거부하고, 상실을 존재로 변화시킨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를 비추는 거울과 액자를 들고 두 시간에 공존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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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04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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