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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5. 2022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확장, 열림, 발굴

하마구치 류스케(Hamaguchi Ryusuke),

 <우연과 상상>(Wheel of Fortune and Fantasy) - 확장, 열림, 발굴     

“나태했던 나날들과 긴 밤들 그리고 희망만이 떠돌던 고독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먼저 엿본 온갖 기쁨과 흥미있는 우연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 드 모파상-

네 명의 친구들이 간만에 다 모여서 놀러 갔다. 하지만 이내 곧 먹구름이 몰려와 비가 내려, 그들의 여행은 엉망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마냥 우울해하지 않는다. 오늘의 행복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네 명의 친구가 행복이란 목표를 향해 다시금 달려 나가는 데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다. 네 친구는 조만간 다시 만날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네 친구는 여전히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또 '우리'로 내일을 기약한다. 네 친구뿐만이 아니라 가족, 연인 등도 서로가 여전히 존재하고 여러 여지와 가능성을 상상하는 미래의 시간은 행복하다. 1978년 가나가와현 태생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가장 대중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아사코>가 꼽히겠지만, 가장 걸출한 작품을 꼽으라면 <해피 아워>가 오르내리지 않을까 싶다. 기성의 배우들을 캐스팅한 <아사코>가 류스케의 작품 중 다듬어진 편에 속한다면, 즉흥성과 일상,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영향을 받은 리얼리즘이 흠뻑 반영된 색채가 묻어난 작품으로는 단연 <해피 아워>를 꼽을 수 있다. 본 작품에서 류스케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여 일상성에 주목하고, 영화의 소재 중 하나인 방언에 집중하여, 표준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리얼리즘을 선보인다. 앞서 언급한 것에서처럼 영화의 행복한 시간은 바로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오프닝과 결말에서 순환하며 행복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였던 친구들은 오해가 발생하고, 또 각자의 삶을 위해서 뿔뿔이 흩어진다. 하지만 그런데도 서로 재회하여 다시 여행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다. 5시간가량의 길고 긴 러닝타임으로 전개되는 네 친구의 이야기는 옴니버스 구성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처음에 류스케는 특정 인물의 시선에서 혹은 우리(=네 명의 친구)의 시선에서 영화를 전개하였지만, 이후 에드워드 양이나 로버트 알트만, PTA 등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영화를 전개한다. 그리고 각자의 단편이 펼쳐진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행복했지만 실상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네 친구 사이에서도 더 편한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고, 또 함께 온천여행을 가더라도 먼저 떠나는 친구가 있고 남는 친구가 있으며, 이를 즐기는 친구가 있고 즐기지 못하는 친구가 있다. 서로는 이를 몰랐다. 친구 사이에도 몰랐고, 가족이나 부부 사이에도 익숙함이라는 정취 하나만으로 서로의 무지가 당연했음이 폭로된다. 그래서 영화는 주로 롱테이크가 사용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에 더욱 긴 호흡의 롱테이크를 사용한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 할애되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고, 서로의 온 육신을 상대방에게 맡기고 의지하는 신실한 믿음이 있어야만 하리.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내가 아니라 특정한 직종, 관계에 기탁한 자신을 알았지, 진정 독립적인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스스로도 몽매했다. 그래서 상대방이 떠나가며 일상이 비일상으로 바뀌는 순간, 진짜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 내가 할 줄 알았던 것이 실제론 관계 속에서 상대방이 해오던 것이었음이, 굳어진 관계와 정체성 속에서 나는 다만 기계적으로 그것을 수행해왔을 뿐, 진정 나의 행위가 아니었음이 폭로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도 '우리'의 상황을 계산한 거지, 나와 상대방이 분리된 상황을 예측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관계가 해지됨에 따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되새겨보고, 당연하게만 여겼던 상대방의 빈자리를 각별하게 재론한다. 그렇게 여지가 있는 것은 미래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나의 영화는 네 개의 영화로 확장되고, 거기서 파생되는 무수한 시점의 영화로 분화되다가, 이윽고 서로의 간절한 바람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약한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한 작가의 소설을 두고 그것이 현실인지 가상인지에 대한 대담이 오가는데, 분명 현실에서 자양분을 얻음과 동시에 예술 고유의 방향을 물색하는 독립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과 예술의 관계를 더욱 강화한 작품이 류스케의 다음 작인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피 아워>를 관통하는 우연과 가능성을 긍정하는 태도는 <우연과 상상>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작품이었지만 옴니버스와도 같은 구성을 띤 <해피 아워>의 사례, 이러한 류스케의 구성이 세 개의 단편을 모은 <우연과 상상>에 이어져 분명 독립적인 옴니버스임과 동시에, 서로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 '하나'임을 추구한다. 세 개의 작품으로 이뤄진 작품이지만 각각의 연출이 통일된 기조를 이어가며 '하나의 작품'임을 명시한다. 영화의 연출은 건조하고 정적이다. 대체로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되고, 움직임은 절제되어 있다. 절제되었기에 강렬한 몇 안 되는 움직임은 세 편의 작품 모두 중요하게 활용된다. 어딘가에 머물러있던 사람들이 시선을 확장하고, 나의 문을 열고, 누군가와 만나고 나를 되찾기 위한 능동적인 움직임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롱테이크를 활용하여 현실 속 시간과 영화 속 시간을 대체로 일치시킨다. 관객은 흡사 그들의 대화에 동석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기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연출이 바로 줌인이다. 영화의 줌인은 흡사 홍상수 작품의 줌인처럼 매우 투박하고 조야하여 눈에 띄고, 더욱이 각 편에 거쳐서 단 한 번씩 활용되기에 관객의 뇌리에 각인되며 중요한 화두를 담당한다. 1부에서는 개인의 뇌리에서 발생한 상상임을 밝히는 심리로 파고드는 줌인, 이후 숏의 분절 없이 줌아웃을 통해 상상에서 현실로 빠져나와야 함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우연함, 불확정성을 강조하는 줌인이자, 3부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되찾아서 확실해진 자신을 조망할 때 줌인을 사용한다. 이렇게 세 편의 형식상 기조가 유사하지만, 각각의 경계에서 서로가 이어지는 묘한 겹침도 있다. 1부의 끝이 메이코의 열린 시야로 마무리되었다면, 2부의 시작에서는 실내가 포착되어 닫힘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2부의 말미에서 사시키와 5년 만에 재회한 나오는 그에게 키스하고, 마찬가지로 3부의 시작은 20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내려가는 나츠코의 동창회다. 그리고 3부의 끝자락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나를 확장한 것과 1부의 시작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인식을 확장하는 것은 이어지며 순환한다. 이렇게 세 편의 작품은 서로가 단절되지 않은 이어짐, 통일되고 반복되는 연출을 통해 하나의 작품으로 모여든다. 이렇게 겹쳐지는 경계 외에도 세 편의 작품은 우연과 상상을 탐구하며 하나를 구성한다.     


일단 1부, <마법>부터 살펴보자. 모델인 메이코와 그녀와 함께 일하는 구미라는 여성이 차 안에서 대화한다. 꽤 긴 시간 동안 롱테이크로 두 여성이 대화하는 장면만 보여주기에, 영화는 흡사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가 연상된다. 훨씬 리얼리틱하지만 말이다. 여하간 보이는 것은 재잘거리는 두 여인과 그녀들 뒤편에 자리한 차창 밖 풍경뿐이다. 그리고 그녀들의 대화가 지속함에 따라서 차창 밖의 풍경은 거리, 도로, 조명 등이 지속해서 변화한다. 대화를 계속하며 변화하는 여성들의 인식을 흡사 차창 밖 풍경으로 상징하는 것만 같다. 이야기를 듣는 메이코의 의식이 구미의 것으로 확장되듯, 구미에 의해 나조차 잘 모르던 나를 깨우치듯. 이처럼 영화 속 대화는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인식을 변화·확장한다. 대화의 주체는 구미다. 그녀는 한 남자와 만났다. 처음에는 이메일로 만남을 이어가서, 남자는 처음에 그녀가 냉담한 타입일 것이라 오해했다. 오직 보이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차가운 텍스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억양, 어조, 표정 등을 확인하며 구미가 따뜻한 사람임을 확인한다. 이처럼 우리는 단편적인 대화, 제한된 매체로의 소통에서, 깊은 대화, 직접 대면한 대화를 통해 편견, 기존의 판단, 상상을 넘어설 수 있다. 이후 구미와 카즈는 서서히 애정을 쌓아갔다. 그리고 구미는 지금까지 육체를 흥분케 하고 자극하는 사랑이란, 언제나 물질적 접촉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 믿어왔다. 또 그녀는 낯선 사람과의 만남에 항상 거리를 뒀다. 하지만 구미를 실로 이해해주고,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카즈의 사려 깊은 대화에, 물질적 접촉이 전혀 없었음에도 그에게 육욕을 느꼈다. 또 거리 두는 자신을 부정할 정도로 첫 만남부터 카즈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로 구미는 사랑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깨우치고, 심지어 새로운 자기 모습과 만난다. 이후 구미가 대화를 끝내고 차에서 내리자, 메이코는 홀로 남는다. 계획은 이미 예측한 것을 실현하는 셈이지만, 계획을 파기하는 우연은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을 더한다. 구미와의 우연한 대화로 메이코는 많은 것을 더해갔지만, 다시 혼자 남으니 더해질 것이 없고 오히려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혹은, 메이코는 구미가 말하는 남자가 자신의 옛 연인인 카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그녀와의 대화로, 이에 차를 돌려서 그의 직장으로 향한다. 새로운 대화는 나날이 반복되었을 메이코의 퇴근길을 변화시킨다. 구미와의 대화로 메이코는 자신이 미처 몰랐던 것을 깨우쳤다. 메이코와 카즈가 연인이었던 당시 카즈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불륜한 메이코에게 배신감이 너무도 컸으며, 그 고통에 의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말이다. 메이코는 자신을 사랑했던 카즈를 더 잘 알게 되고, 이와 더불어 그에 관한 그녀 자신의 몰랐던 면모들도 확인한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던 상태에서 구미라는 타인이 우연히 침투하고, 생경한 그녀의 시선에서 너무나도 익숙해서 모르고 지나갔던 것들을 서서히 확인한다. 영화의 도입부로 되돌아가 보자. 롱숏으로 언덕 위의 풍경이 포착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딘가를 보고 있다. 류스케의 카메라를 등 진 채 말이다. 그들은 카메라가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만 중요하다. 이후에 영화는 메이코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숏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모델이다. 구미와 같은 스타일리스트들이 자기 얼굴을 예쁘게 꾸며준다. 감독이 상상한 대로, 디렉팅한 대로 가꿔진다. 타인은 그녀와의 상상을 실현하고 촬영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러한 촬영에는 우연이 없다. 도입의 등 돌린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실현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랴. 촬영이 끝나자 패닝이라는 약소한 이동, 즉 변화가 발생한다. 촬영 당시에는 조그마한 미동뿐이었다. 1부의 상상은 눈을 감고 펼쳐진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주관이기에, 상상은 내게 봉사한다. 상상의 끝에서 다른 사람들은 다 사라지고 메이코, 오직 그녀 자신만 남는다. 눈을 감고 상상하는 사람, 그런 상상을 실현하는 사람, 그녀의 질끈 감은 두 눈에 카즈의 슬픔이 과연 보였을까, 눈 감은 채 상상을 실현하는 그녀는 카즈에게 바라봐 달라 요구했으랴. 부자와 섹스하는 상상을 실현했던 메이코는 1부 막바지까지 이기적인 상상을 잠시나마 해본다.      


하지만 메이코와 카즈가 포옹하는 것을 목격한 직원이 카즈에게 쫓아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상상이 아니라 눈을 뜨고 현실 속 자신을 인지해야 한다. 이제 메이코는 구미와 함께 차에 올라타며 눈을 뜨고 구미를 바라본다. 언제나 나만을 바라보던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이제는 구미의 발화에 궁금해하고 몰입하는 시선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주체적인 시선이다. 일방적으로 바라봐주기를 기다리는 시선,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시선이 아니라, 내가 직접 바라보고 다가가는 시선으로 말이다. 주체적인 서로의 시선은 상대방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배려하고 존중하는 시선이다. 메이코만을 위해 희생한 카즈의 시선을 회복해줄 차례가 돌아왔다. 또 타인의 생경한 시선은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제공해주었고, 그들의 시선으로 나를 만들 수 있었기에, 이제는 나의 시선으로 그들을 만들어줄 차례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를 위한 폐쇄적인 이기적인 상상으로부터, 열림으로 향한다. 카즈와의 포옹을 멈추고 그녀가 뛰쳐나와서 도착한 ‘세 갈래 길’의 열린 선택지처럼, 상상을 뿌리친 메이코가 향한 장소가 건물이 세워지는 공사 현장인 것처럼 말이다. 그 드넓은 세계는 현재다. 한때 메이코를 쫓아갈 수 있었을, 그리고 카즈와 재결합할 수 있었을 과거가 아니다. 현재에 과거를 바라는 것이 곧 상상이니,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상상은 언제나 현실 앞에서 검토되어야 하고, 결과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주체들도 함께 살아가는 현실에 적용되어야 한다. 1막에서 류스케의 줌인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기적인 상상은 조악한 줌인처럼 언제나 허구, 가짜여야만 한다고, 단지 현실을 검토하고 예측할 뿐 눈을 뜨고 거짓에서 줌아웃으로 빠져나와 현실을 목도해야 한다고. 메이코와의 추억에 의해 구미를 두려워하는 카즈도, 첫 만남이 너무 황홀하여 그 이후가 역으로 두려운 구미의 걱정도 결국 상상이다. 이들의 상상의 중심에는 메이코가 놓여 있고 그녀는 둘이 열렬히 사랑할 수 있을 진실을 몸소 알고 있다. 자신의 착각과 무지를 극복하게 해준 그들, 이제는 메이코가 두 연인이 가진 상상을 진실로 뒤바꾼다. 그렇게 눈 감은 상상에 우연이 침투하고 진실로 뒤바꾸며 1부는 마무리된다.     


그렇게 1부 막바지에 이기적인 메이코는 비로소 타인을 바라보고, 닫힌 공간에서 건물이 시공되어가는 열린 세계를 바라보며 시선은 확장되었지만, 2부 <문을 열어둔 채로>의 시작은 갑갑해 보이는 건물 내부이기에 시선은 다시 닫힌다. 하지만 여전히 열림과 확장을 지향한다. 안과 밖이 비치는 창문에 학생들의 의견을 개진한 포스트잇을 붙이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극의 주인공 세가와 교수는 문을 항시 열어두는데, 이에 사사키란 학생이 졸업시켜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 공개된다. 그것은 당혹스럽고 낯설다. 나의 문이 닫혀 있으면 우리는 익히 아는 것, 감당할 수 있는 것, 수용할만한 것만 재생산한다. 우리의 상상도 닫힌 것 너머의 것을 생성하지 못한다. 자기중심적인 사사키의 상상이 그렇다. 반면 문이 열려 우연으로 침투해오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예측, 기대를 빗나간다. 그래서 열림을 맛본 나오는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실은 열려있다. 사사키가 계측한 굴욕을 넘어, 그 이상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타인과 부대껴야 하는 곳이 바로 열려있는 현실이다. 이윽고 5개월이 지나, 영화는 나오가 사사키와 바람을 피우는 숏으로 이어진다. 그는 나오와 섹스를 바란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진입하고 다시 '닫히고', 그가 열망하는 바를 정확하게 실현할 장소가 완성되자 여지를 차단한다. 바라보는 사람도 없고 이 시간이면 문을 열 사람도 없다. 나오도 그와 같은 마음이기에 오직 그들만의 세계를 완결시켰다, 이들만의 곳에서 서로가 염원하는 정사를 나눈다. 하지만 공동의 관심이 해소되고, 다시 세계는 두 개의 표상으로 나뉜다. 사사키는 세가와 교수가 자신을 유급시킨 것이 불만이다. 사사키는 자기 좋을 대로 세가와 교수가 여학우들은 유급을 면제해줬을 거라며 마음대로 상상한다. 세가와 교수나 학칙을 이해하지 못한 채, 심지어 제 자신의 흠조차 바라보지 못한 채, 원한과 증오심을 ‘상상’으로 키워간다. 반면 나오는 세가와 교수의 작품 세계가 흥미롭고, 사사키에 비한다면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인지한다. 나이가 많고 성격에 의해 불화를 일으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한때 공동의 관심사로 표상을 공유하던 남과 여는, 이윽고 세가와 교수를 두고 두 개의 표상으로 멀어진다. 각자는 자신의 육신이 잘 아는 것이나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을 언어로 풀어낸다. 그렇게 언어는 나 자신에게 갇힐지 모르지만, 자신의 표상을 닫지 않는다면 타인의 표상을 향해 진입할 수 있고, 언어는 나의 앎을 뛰어넘을 수 있으리. 그러나 사사키는 지나치게 편협하다. 5년이 지나 우연히 사사키와 나오가 재회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옳음을 확인하고자 공격적으로 나오에게 접근한다. 그래서 나오는 그에게 방어적이다. 그 이유는 5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확인해보자, 나오는 세가와 교수와 추문을 일으키기 위해 학교로 향한다. 교수의 소설은 외설적이다. 욕망에 관한 세가와의 표현은 매우 적나라하다. 그것을 낭독하는 나오는 연구실의 문을 닫기를 원한다. 하지만 세가와는 늘 열어둔다. 수치스럽고 부끄럽더라도, 그것을 작성한 자가 바로 세가와고, 이를 현재 읊고 있는 사람이 나오다. 자신의 진실을 모두 개방하고 이에 떳떳해야 한다. 자신의 추한 진실과 약점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이 실로 강자다. 이렇게 열려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그를 유혹하려 했던 자신의 치부와 불완전한 약점을 모두 세가와에게 고백한다. 그것을 들은 교수는 나오의 강점, 보완책을 말해주고 그녀를 존중한다. 5년 전이나 후나 오만한 줏대로 상대를 가늠하는 사사키와 달리 말이다. 오히려 자신의 취약하고 숨기고 싶은 진실을 용감하게 목도한 사람만이 이를 극복하여 강해질 수 있는 법이니. 5년 후로 돌아가서, 나오는 세가와에게 명함을 주고 키스한다. 5년 전의 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듯, 하지만 세가와는 떳떳하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버스는 터널로 진입하고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강해지기 위해선 곧 나만의 세계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다시 5년 전으로 돌아가서 만약 세가와 교수가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면, 카페로 가서 차를 마시자는 나오의 계획을 우연으로 파기하지 않았다면, 나오의 계획이 그려낸 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서로가 양산됐을 것이다.      


하지만 열려 있는 문턱 사이로 타인의 시선과 우연이 오고 감에 ‘바라던 나’는 좌절되지만, 바라는 내가 아닌 ‘진실한 나’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닫혀있는 계획은 사사키에 의해서 생산되고, 문란한 세가와 교수의 상은 두 남녀의 닫힌 계획에서 생성됐지만, 열린 문으로 나오가 와서 우연한 사건을 발생시킴에 교수와 나오는 기대와 계획 너머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 교수는 나오의 반응이 신기했고, 나오는 자신의 우려와 달리 낭독과 녹음이 신선하다고 말하는 교수를 새롭게 경험한다. 이러한 상대방을 열린 시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진실을 터놓기 전까지 서로의 얼굴은 엇갈려 있다가, 비로소 모든 것을 고백한 상대방의 생경한 얼굴을 다다미 쇼트에 가까운 리버스숏으로 정면에서 또렷하게 포착한다. 자신의 기대를 넘어서는 얼굴과 약점을 드러낸 상대방의 얼굴을 정면에서 포용한다. '말이 말을 만들어낸다'라는 세가와 교수의 예술철학처럼, 그는 언어, 단어, 말에 집중하지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다. 이렇듯 2막의 열린 문이란, 우연과 타자가 드나들고, 이를 열린 태도로 수용하는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물론 완전히 닫히지 않은 우연에 의해 세가와와 나오의 만남이 만천하에 노출된다. 이후 5년이 지나 사사키가 말하길 교수는 사직하고 이혼했다고 한다. 이혼은 나오도 매한가지다. 하지만 언제나 문을 열어두고, 자신의 진실을 노출하던 교수는 계획에 없는 후폭풍마저도 감당할 자신이 있지 않았을까. 2막의 줌인은 세가와가 사가와로 바뀌는 우연을 확대하는데,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 우연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를 두고 비아냥거리는 사사키에게 나오는 키스한다. 그는 세가와와 자신이 겪은 우연을 조롱하는데, 과연 그는 버스 안에서 옛 연인과 재회한 우연을 감내할 자신이 있을까. 여전히 소설에 대한 무지, 자신에 대한 무지에 안주하는 그는 과연 진실에 대한 앎을 책임질 수 있을까. 최소한 나오는 우연과 진실에도 열려있었으니. 그렇게 2막은 끝까지 우연과 진실을 열어젖힌다.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     


이후 3막, <다시 한번>으로 넘어간다. 20년 전의 과거를 발굴하고 재현하고자 동창회가 열린다. 나츠코는 기대를 품고 동창회에 방문한다. 하지만 기대는 실망으로 뒤바뀐다. 그리웠던 친구 미카의 얼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키요미야라는 친구가 말을 걸지만, 사실 그렇게 친했던 학우는 아니다. 다음날, 학교 다닐 적 즐겨 가던 식당에서 돈가스 덮밥을 먹는다. 사장님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사장님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때 즐겨 먹던 맛은 그대로다. 이윽고 돌아가려는데 역의 에스컬레이터에서 미카로 추정되는 여자를 만난다. 나츠코는 올라가고 있고, 그녀는 내려가고 있다. 올라가자마자 허겁지겁 다시 내려가서 그녀와 재회한다. 그렇게 미카의 집으로 동행하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는 미카가 아니었다. 아야라는 생판 다른 여성이었다. 어쩌면 진짜 미카와 노조미는 현재 그녀들의 얼굴과 닮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츠코와 아야가 서로에게 투영한 얼굴은 과거의 기억이다. 하지만 식당 사장님이 나츠코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기억으로부터 현재는 달라졌다. 나츠코와 아야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기대와 기억을 본 것일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듯 상대방에게 객관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투영한 상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동창회에서 나츠코를 만난 키요미야는 ‘너는 그런 아이’라며 관행 속에서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진 그녀의 모습을 재생산한다. 실제 나츠코가 다르더라도 말이다. 아야도 그렇다. 아야에게 가족은 익숙하지만 정작 서로는 취미도 달라 무지하다. 아야는 아들과 대화도 안 통하고 이해도 안 된다. 집이란 같은 공간에 놓이지만 아들은 대답도 않는다. 그래서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아내이자 어머니란 역할을 지속한다. 그녀들은 오직 나를 위해 달리고, 집중할 수 있던 20년 전의 관계가 그립다. 사회와 가족에서의 자신은 온전히 솔직할 수 없기 때문에, 나츠코를 터놓을 수 있는 미카, 아야가 되고 싶은 노조미를 만났다는 생각에 그녀들의 마음은 의심도 없이 서로에게 동요했다.     

 

계획하지 않은 우연에 불발된 듯한 나의 회복, 그러나 우연이 나를 회복시켜 준다. 서로에게 익숙해서 소개할 필요도 없는 사이, 익히 대상이 다 알거라 지레짐작해서 내가 할 말을 마구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님이 탄로 난다. 그렇지만 오히려 서로를 잘 모르기에 조심스럽게 나의 정보를 터놓으며 스스로가 누구인지 확인한다. 관행 속에서 ‘그런 나’는 필연처럼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는 흡사 에스컬레이터의 방향과도 같다. 하지만 우연 속에서 당연하지 않은 진짜 내가 떠오른다. 소개하고 질문한다. 대상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해 에스컬레이터가 규정한 방향을 거스르고, 에스컬레이터를 당연하게 따르는 카메라에서 멀어져 아야를 만나며, 나츠코에게 노조미란 이름을 알려준다. 이는 3부의 설정과도 연관될 수 있다. 사이버상에서 모든 것이 다 트여 있다가 바이러스에 의해 오프라인으로 추방되어 닫힌 세계, 하지만 그렇게 닫힌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트여 있는 상대방을 다 알거라는 선입견보다는, 무지의 여지가 남겨진 편이 대상에게 질문하며 진실을 이해하기에는 더 도움이 되는 법이므로. 가깝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은 키요미야에게서 멀어지는 나츠코처럼 실상은 멀리 있지만, 모르는 대상과는 가까워지기 위해 달려갈 수 있으므로. 관행 속에 놓인 서로가 아니라 진실을 터놓는 서로는 2장처럼 문이 열려있다. 진실한 서로를 수용한다. 이름과 정체를 터놓기 이전 한 공간에 놓이긴 했지만 서로는 떨어져 있었고 대화는 끊기기 일쑤였다. 또 롱숏으로 포착되어 단절의 거리감이 도드라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각자의 이름과 신분이 드러남에 서로의 얼굴을 리버스 숏으로 마주한다. 2막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다미 쇼트처럼, 정확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렇게 진실한 나를 노출하고, 이는 진실한 나를 모르던 상대방에게 그려지고 수용된다. 더 이상 기억 속의 상대방, 기대하는 상대방, 관행 속의 상대방을 붙잡지 않는다.      


그렇게 우연하게 만난 그녀들은 한번 더 관행을 파기해보기로 한다. 아야가 미카가 되고, 나츠코가 노조미가 되며 말이다. 그렇게 상상하며 필연에서 우연으로 벗어난다. 나츠코는 미카를 마주하고 아야는 노조미를 마주하며, 그들 앞에 있어야만 드러낼 수 있는 나를 회복한다. 이들의 상상은 일회적이기에 자유롭고, 앞으로 연속될 결과를 계산하지 않아도 돼서 경쾌하다. 아야와 남편의 관계와 달리 말이다. 그렇게 중년이기에 가질 수 있는 근심걱정을 털어놓은 채 나를 회복한다. 그들은 상상이란 가짜 속에서 자신을 회복하는데, 이는 1부의 눈 감은 상상, 2부의 자신의 흠을 외면한 상상이 아니다. 그녀들의 상상은 눈을 뜨고 자신과 대상을 깊이 이해한 상상, 가짜가 만들어지는 관행을 거부하기 위한 거짓이다. 이러한 가짜는 앎과 진실을 확장하고, 나를 더 높은 차원으로 뛰어넘게 만든다. 상상은 대상의 부재에 회복할 수 없는 관계 속의 나를 복권시켜 준다. 그렇게 타인을 위해 나를 양보하던 그녀들은 비로소 자신을 회복한다. 아들 케이나 택배기사를 위한 시간, 남편을 위한 고민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위한 시간과 감정을 ‘줌인’으로 확대하여 보게 된다. 이윽고 나츠코는 떠나간다. 그리고 아야는 다시 재회하자고 말한다. 여기서 재회하고 싶은 것은 누구일까. 나츠코일까, 자신을 회복하면서 생각해낸 동경의 이름 노조미일까, 아니면 다시금 가족의 일원으로 되돌아가야 할 진솔한 아야 자신일까. 확실한 건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에서 이는 닫히지 않았다. 나츠코를 연기하는 타인을 만날 수도 있고, 노조미를 연기하는 타인을 만날 수도 있으며, 나츠코나 노조미와 직접적으로 재회할 수도 있고, 아야를 다시 회복할 수도 있다. 우연이란 언제나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며, 상상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니 말이다. 


이렇게 류스케는 ‘우연과 상상’으로 얽힌 세 편의 옴니버스를 선보인다. 우연한 타인과의 만남이 나를 깨우친다. 너무 익숙하여 내가 미처 무시하고 있던 것을 계몽한다. 당연시된 유한한 나를 무한하게 드넓히고,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타인이지만 이해해주는 타인 앞에서 그간 망각된 나를 회복한다. 그리고 나도 상대방에게 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상대방의 두려움을 해소해주고, 타인의 진실을 회복시켜 준다. 특히나 아직 경험하지 못해서, 또 과거의 고통이 자아내는 두려운 상상을 그들과 다른 나의 시선으로 극복시켜준다. 오만하고도 이기적으로 상상하는 타인의 망상을 깨뜨린다. 한편 대상과 자신에게 충실한 상상은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며 잃어버린 나와 타인을 복권한다. 이렇듯 류스케에게 ‘우연’과 ‘상상’은 가능성이다. 우연한 대화, 개입, 만남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존의 상태에 머물러있지 않을까. 하나로 묶이지만 마치 우연히 만난 듯한 세 작품의 옴니버스 구성도 우연성에 잘 부합한다. 타자인 다른 작품과 함께 놓이며, 하나만 있었더라면 미처 마주하지 못했을 요소들을 부각해주니, 흡사 세 작품도 서로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우연한 배치와 만남이 나만을 위한 편협한 상상에서부터, 타인과 세계로 향하는 무한한 상상으로 확장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그 상상은 불가능한 것, 잃어버린 것을 복권하며, 유한한 한계에 맞닥뜨린 나를 극복해줄 것이니. 이윽고 그 상상의 물음은 관객에게 도달한다. 1장의 두 연인은 어떻게 될까, 2장의 버스와 사사키는 어디로 향하는가, 3장의 친구들은 재회할까, 그렇다면 어떤 재회를 맞이하게 될까. 류스케가 행복한 시간이 바로 우연과 상상이 비롯하는 여지의 시간이다. <해피 아워>에서처럼 우연히 만나고, 겹치고, 균열이 생기고, 상실하며 발생하는 새로운 시선과 열려있는 무한한 가능성, 이를 우연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우연한 세 개의 옴니버스를 붙여서 보여주는 류스케는 행복한 시간을 여전히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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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0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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