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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8. 2022

나다브 라피드, <아헤드의 무릎>

그의 예술: 동공과 불복종, 그리고 어머니

나다브 라피드(Nadav Lapid), <아헤드의 무릎>(Ahed's Knee)

- 그의 예술: 동공과 불복종, 그리고 어머니     

“해방되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열망에서 비롯됐던 것이 언제부터인가는 다른 사람들을 내쫓으려는 맹렬한 격정으로 변질돼 버렸다.” -나딘 고디머-

혼자서 창작할 수 있는 예술과 그렇지 못한 예술, 적은 자본만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는 예술과 무수한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되어야만 만들 수 있는 예술, 영화가 언제나 후자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펜과 종이, 캔버스와 물감, 붓만으로도 충분히 혼자서 무언가를 창조해낼 수 있는 문학·미술과 달리, 영화는 더 많은 장비가 필요하고, 카메라에 담아내고자 하는 대상과의 합의, 그것을 촬영하고 편집하고 보정하는 무수한 노동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론상으론 영화도 충분히 혼자서 창작할 수 있는 매체다. 모든 것을 혼자 도맡는 1인 제작 시스템으로 난니 모레티처럼 하나의 영화를 만들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혼자서 영화를 만든다고 한들, 세트장을 제작하거나 로케이션하러 가는, 결코 적지 않은 제작비를 혼자서 충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수한 노동력을 뒷받침해주는 제작사, 또 제작비를 후원해주는 이해관계 속에서 영화가 절대적 독립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 투입한 만큼 거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돌려받아야 할 몫이 비교적 적은 문학, 미술과 달리, 영화는 그 수치가 끝도 없이 불어나기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영화를 처음 기획한 감독의 순수한 시선, 주관적인 탐구는 이내 곧 영화의 토대를 이루는 제작자, 후원자들의 무수한 의견이 더해져 날카로움과 특유함을 잃어버리고, 많은 대중의 취향 위에 머물고자 뭉툭해진다. 그래서 감독은 고민이 깊다. 이스라엘의 영화감독 나다브 라피드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신작 <아헤드의 무릎>에서 여러 이해관계에 부딪히는 자신을 투영한 이야기를 선보인다. 1975년 텔아비브 태생의 나다브 라피드는 2011년 <폴리스 맨>으로 장편 데뷔한 이래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국내에는 모든 작품이 영화제에서 간접 소개되었고, 그의 작품 <시인 요아브>를 원안으로 한 미국의 리메이크작 <나의 작은 시인에게>가 우회적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현실을 첨예하게 담아낸 <시인 요아브>와 달리,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원전의 풍성한 사회성, 예술에 대한 탐구를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시인 요아브>와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차이가 사회성, 예술에 대한 사유인 것처럼, 라피드는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줄곧 탐구한다. 본 신작까지 합해서 총 네 편의 장편을 공개한 그의 작품세계는 <폴리스 맨>과 <시너님스>를 이어볼 수 있고, <시인 요아브>와 <아헤드의 무릎>을 한 쌍으로 여길 수 있다. 일단 그의 장편 데뷔작 <폴리스 맨>에서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날카롭게 담아낸다. 라피드는 장례식과 결혼식,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과 아이들 및 임산부의 모습을 대비하며, 이스라엘이 누군가의 무고한 죽음으로 삶을 영위함을 날카롭게 직언한다. 경찰은 정의를 추구하지 않고 시온주의와 후기 자본주의의 끄나풀로 전락한다. 또 이스라엘 내 무수한 부를 쥐고 있는 기성 부르주아지와 이들에 의해서 기회가 가로막힌 청년 프롤레타리아트의 격차와 갈등이 드러난다. 전자가 시온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신봉한다면 후자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데, 청년들은 타개하고자 했던 노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들의 죽음 위로 살인자들은 다시 삶을 건설한다. 이렇게 <폴리스 맨>이 극심한 빈부격차로 청년들이 살기 어려운 이스라엘을 포착했다면, <시너님스>에선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로 이주했을 청년 요아브의 삶을 조명한다. 요아브는 '자유'를 중시하는 프랑스에서 이스라엘 출신임을 나타내는 모든 흔적을 반강제로 지우고, '평등'을 말하는 국가에서 경제적 차등에 의한 성적 착취를 경험하며, '박애'를 외치는 세계에서 추방을 겪는다. 폐쇄적이고 강제된 정체성이 강요되는 이스라엘을 떠났지만 프랑스에서도 모국의 자유 박탈은 이어지고, 프랑스에서 요아브가 내뱉는 단어들은 이스라엘에서 말하던 '동의어'의 반복이다. 즉 라피드는 동의어에 다름 아닌 프랑스와 이스라엘을 이어내며, 자유로울 개인이 갈 곳 없는 이념과 구조, 자본에 종속되는 인간의 비극을 그려냈다.  


그리고 창작이나 예술이란 단어로 <아헤드의 무릎>과 묶일 수 있는 <시인 요아브>에서도 마찬가지로 사회 비판을 수행한다. 군대는 빈곤한 계층이나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부르주아의 발화, 아이들이 맹목적으로 전쟁을 위한 선전노래에 노출되는 것을 포착하며 말이다. 라피드는 이스라엘에서 진정 순수하고 자유로운 예술을 꽃피울 수 없는 상황이 시름겹다. 이는 국가가 어려서부터 세뇌하는 선전예술의 영향, 그리고 권력을 가진 매체들이 창작하지 않고 절도하기 때문이다. 언론에선 히틀러의 몸에 핫팬츠를 합성한 사진을 찾았다며 웃긴다고 떠들어댄다. 이는 본인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이버상에서 떠도는 사진 하나를 ‘절도’한 것이다. 이러한 매체의 태도처럼, 영화에선 절도가 가득하다. 뛰어난 재능으로 시를 창작하는 힘없는 아이의 옆에, 그것을 자기 것이라고 연기하고, 연극하고, 낭송하는 위선자들이 찰싹 달라붙었다. 또 세상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담아내는 예술은 만인의 입맛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만인의 취미에 부응하는 대중문화와 달리 순수예술은 궁핍하다. 그렇기에 배금주의를 신봉하는 요아브 아버지의 눈에 아들의 창작혼은 아니꼽게만 보인다. 그래서 예술은 저물어간다. 하지만 라피드는 <시인 요아브>에서 무관심하고 방종한 부모님 아래서 본인의 순수한 시각을 키워간 요아브의 예술혼과 자신이 바라보고자 하는 대상을 우직하게 촬영하는 신념을 강조한다. 라피드의 신념은 <시인 요아브>의 도입부에서 니라의 남편이 카메라를 건드려도 오히려 그 터치를 반영하는 촬영, 이후 아이들이 카메라를 의식하고 심지어 적나라하게 쳐다봄에도 이를 제어하지 않는 연출에서 나타난다. 진실하게 연출하는 그는 포착하는 대상의 진실을 꾸밈없이 생생하게 촬영하는데, 이러한 <시인 요아브>의 연출에서 <아헤드의 무릎>에서 탐구할, 리얼리즘과 저항정신이 예고된다. 그래서 <시인 요아브>와 한 쌍으로 묶일 본 작품, <아헤드의 무릎>에서는 과연 어떤 연출의 포부가 이어질까.     


사실 본 작품의 연출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다르게 느껴진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적나라하게 포부를 천명하는 분위기는 유사하다. 다만 라피드의 그간 작품이 매우 거칠고 투박한 편이었다면, 본 작품의 도입은 정제되고 매끈한 느낌을 준다. 도입부,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오고 새하얀 풍경이 펼쳐진다. 이윽고 그것이 비 내리는 하늘이며, 로우 앵글로 포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가로등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더 높은 건물들도 눈에 띈다. 앙상한 가로등에서 더 웅장하고 탄탄한 아파트로의 발전, 하지만 오토바이 소리와 길쭉길쭉한 건물들 사이에 정작 그것을 사용할 ‘사람’은 없다. 이윽고 로우 앵글에서 아이 레벨 숏으로 내려와 사람을 포착한다. 대상은 주인공 Y의 손에서 영화화되는, 이스라엘에 항거하는 팔레스타인의 실존 인물 아헤드 타미미다. Y는 에릭 로메르의 <클레어의 무릎>에서 영감을 받은, 본 작품과 동명인 작품을 연출한다. 그래서 가상의 영화를 연출하는 다듬어지고 부드러운 양식을 선택하지만 정작 영화를 촬영하는 시퀀스가 끝난 이후, 캐스팅 장면과 현실이 교차되는 와중에도 여전히 연출은 섬세하고 정교하다. 이후 Y는 영화 상영회를 위해 아라바로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그곳에서도 연출은 유사하다. 이전 현장에서는 영화를 함께 제작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서 스테디캠과 같은 연출이 가능했다면, 이제는 도서관의 부관장인 야할롬이 그의 곁에 있다. 그녀는 Y에게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계약서 혹은 서약서를 내민다. 그녀가 Y와 동행할 때 연출은 탄탄한 편이나, 야할롬이 떠난 이후 Y가 혼자 오아시스로 향할 때 형식은 핸드헬드로 거칠게 흔들리고, 180도 회전하는 등 매우 유려해진다. 그가 지금까지 사용하던 리얼리즘 연출이 등장하고, 여기에 형식주의적 경향이 뒤섞인다. 혼자 있기 전까지의 움직임이 기껏해야 패닝 수준에 그쳤다는 것을 생각하면 달리가 활용되기 시작하는 숏은 매우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국가·타인·이데올로기에 결부된 그를 포착할 때 사용된 심미적인 숏은 아름답기 위해서 갑갑하고 수동적이길 요구하는 정치를 폭로한다. 나의 눈 대신 그들의 눈으로 보고, 또 그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작위성, 영화는 이로부터 ‘나의 시점 숏’을 회복한다. 그들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Y의 호소를 직면하고, 아라바 주민들을 보라.      


그렇게 생생한 눈을 회복했을 때, 국가나 타인을 위한 발화가 아니라 내 얘기를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국가가 허용한 것을 위반하는 영화는 현재에 펼쳐진 것들만 포착하지 않고 나만 볼 수 있는 회고, 상상, 가상으로 이탈한다.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것에 더해, 다듬어지고 정돈된 서사로 영화가 흘러가지 않아서 작품은 더욱더 정신 사납게 느껴진다. 후술하겠지만 ‘솔직하게 보기’, '기록'의 의미를 역설하기 위해서 영화는 매우 산만한데, 라피드는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봐야 하는 이유라 말한다. 검열이라는 프레임에 가둬지지 않은 생생한 이야기와 솔직한 시선, 진실한 대상을 말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자.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본 작품에서 탐구하는 기록의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주인공 Y는 온갖 것을 기록한다. 비행기를 타고 아라바로 향하는 와중에도 풍경을 촬영하고, 이후 아라바에 도착한 이후에도 부산스럽게 다양한 것을 기록한다. 산발적으로 바라보는 Y의 시선은 매우 산만한데, 이러한 Y를 포착하는 라피드의 시선, 카메라도 정돈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또 Y가 야할롬과 대화하는 장면은 감상자에게 제시되었다. 이후 Y에게 영화 관계자가 발신하는데 거기서 야할롬과의 대화, 즉 우리가 익히 아는 정보를 또다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댄다. <시너님스>에서도 주인공에게 재생산되어 일상이 된 사건을 동어반복에 가깝게 늘어놓곤 하였는데, 라피드는 이러한 '앵무새'와 같은 연출을 현실을 기록하는 방법으로 삼는다. 현실에서는 특정한 목적에 관계없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라피드의 태도는 본 작품 속 도서관의 태도와 대비를 이룬다. 야할롬이 Y에게 계약서를 내밀고, 거기에는 시오니즘에 맞춘 주제들이 선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에 해당하는 것만 전시, 아카이빙, 상영될 수 있다. 국가의 기록은 객관적이지 않다. 예술을 싫어하는 예술부장관이 담당하는 기록은 편향적이고 정치적이다. 이러한 교조적인 기록, 특정한 목적에 맞추어 대상을 가두거나 배제하는 기록은 현실을 왜곡한다. 이에 반해 라피드는 현실을 다룬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를 다루기 위해서, 그는 산만하고 우발적인 시선을 가지며 반복을 기꺼이 촬영한다.     


그렇게 현실로 다가서는 라피드, 한편 그는 회의감을 떨치지 못한다. 본 작품에서는 다큐멘터리적인 숏이 초반부에 등장한다. Y가 오아시스로 향하는 도중에 그가 상상하는 장면이다. 영화의 카메라에 자유롭게 촬영되며 사막을 거닐던 그는, 이윽고 대도시의 밤거리를 걷고 있는 상상을 한다. 사막이 대도시로 바뀌는 본 장면이 다큐멘터리로 기록됐는데, Y는 분명 배우지만 그 주변의 행인들은 감독에 의해 통제되지 않은 현실에 놓인다. 배우 이강생이 배역을 연기하지만 그가 누비는 거리는 통제되지 않았던 차이밍량의 <데이즈>처럼, 마찬가지로 공리가 현실에 숨어든 장이머우의 <귀주 이야기>, 스칼렛 요한슨이 현실에 녹아든 <언더 더 스킨>처럼 말이다. 그런데 본 작품에서 현실을 누비는 숏이 상상을 가리킨다.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져 상상 곧 다큐멘터리에서 깬다. 라피드는 현실의 동어반복을 형식으로 구현할 순 있어도, 정작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기록하는 것은 허상으로 보는 듯하다.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서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도시를 상상한다. 아무것도 없어야 만이 무언가가 가득 들어찬 것을 포착할 수 있는데, 상상은 허상일 수밖에. 허상을 진실로 뒤바꾸려면 공간으로 향해야 하는데, 공간은 구속하고 방해하기에.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가의 눈과 입을 대변해야 하는 계약서, 또 야할롬의 질문에 '좋아요'라고 답하거나, 예의상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등 Y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그들에 의해 제약된다. 야할롬이 소개해준 숙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의 시점 숏은 술이나 마약에 취한 듯 혼란하게 흔들렸다. 그것이 Y가 현실을 인식하는 관점이라면, 야할롬이 말을 건네자 그의 시선은 차분해지고 안정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불쾌하고 솔직한 형식이 아라바에 도착하자 심미적으로 뒤바뀐다. 이렇게 공간에 옥죄인 영화는 결코 온전한 다큐멘터리를 기록할 수 없을지 모른다. 이에 라피드는 국가나 대중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진실을 반영한다. 이스라엘 관객들은 <아헤드의 무릎>에서 그들에게 적대적인 아헤드가 고문당해 무릎이 박살 나는 장면을 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을 통해 기대할만한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GV에서도 관객들이 기대할만한 대답을 전하지 않는다. 관객 및 국가가 기대하고 통제하는 것 대신, 이러한 것들을 바라는 그들의 야만, 폭거를 우회적으로 비추고 기록한다.      


이는 이란 당국이 규정한 선전적 영화 관습을 의도적으로 뒤집은 비(非)영화로 현실을 비춘 자파르 파나히의 <택시>와 유사한 작업이다. 라피드는 정치권력이 지향하는 애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어지럽게 콜라주하여 당국이 규정한 영화를 거슬러 이스라엘의 현주소를 통찰하고 예술혼을 실현한다. 결말의 Y는 이스라엘과 작별한다는 한 시구를 언급한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프랑스가 사실상 동의어임을 밝힌 <시너님스>처럼, 공간과 사람에게 귀속된다면 Y는 어딜 가나 별 다를 바 없으리라. 이에 공간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저항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Y가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때는 나를 포착하는 카메라를 내가 들고 있을 때, 이러한 나를 아무도 쳐다보지 않거나 호명하지 않을 때다. Y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어떠한 속박도, 그래서 어떠한 저항도 필요 없는 상황에서의 솔직한 자기표현이다. 그가 그나마 의식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카메라다. 흡사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하게 Y를 촬영하는 장면에서 그는 카메라 바깥으로 나가진 않으므로, 카메라가 위치한 방향까지만 뛰어듦으로, 카메라 앞에서 자기표현을 한다는 기준으로만 구속된다. 이러한 카메라로 Y의 몸 각 기관을 클로즈업으로 현란하게 나누고 조립한다. 이러한 바람과 달리 그는 카메라 대신 ‘정치’에 구속된다. 미학자 리디아 괴어는 예술과 정치에 대한 현대의 토론은 두 개의 일반적 진술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그중 하나가 "예술은 자유에 관한 것이고 정치는 권력에 관한 것이다."라는 문장이다. 이를 따른다면 야할롬에게 서명하는 Y는 권력에 귀속된다. 정치에 상응하는 야할롬, 그리고 그녀와 친한 아얄롬이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는 일단 들어야 한다. 또 야할롬을 의식하는 Y는 항상 '짧게 말하겠다'는 문장을 발화에 덧붙인다. 권력에게 자신의 자유를 일련 양도하거나, 혹은 권력에 위압되는 태도다. 또 Y의 군 복무 회고에서는 국가에 의해 남과 여는 강제로 나뉘었고, 욕망과 삶을 향한 의지는 억제되어 죽으라면 죽어야만 했다. 현재에는 국가를 위해 계약서를 들이밀고, 과거에는 국가를 위해 청산가리까지 먹으며 죽음까지도 지배당했다.     


그러나 예술가인 Y는 권력을 위해 지시하는 정치에 불복종하며 자유를 찾는다. 그들이 '듣기'를 요구한다면, 그의 눈은 하늘이나 외부 풍경, 여성을 '바라보며' 해찰하고, 그의 입은 상대의 발화와 관련 없는 '먹을 것'을 줄곧 갈구한다. 텔아비브의 규제를 얘기하는 딱딱한 통화 와중에, 팬티만 남기고 홀딱 벗은 Y는(<시너님스>의 자본과 타인의 요구에 반강제로 벗게 된 요아브의 알몸, 노출과는 전혀 다른) 진실하게 체조한다. 그가 행사에서 상영하는 영화 도입부에서는 당국이 풍기문란으로 규정하는 신음이 들려오고, 결말에서는 아기의 얼굴로 마무리하여 탄생 과정의 진실을 은폐·왜곡하지 않는다. 한편 Y의 금기에 대한 저항은 복종/불복종으로 과장되어있다. 아얄롬이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Y에게 견과류를 건넸을 때는 입에 대지도 않았다가, 그가 얘기를 시작하자 먹기 시작한다. Y가 연출한 영화에서 솟구치는 군인들의 정욕 및 Y의 성적인 관심, 아얄롬의 이야기에 지루함을 숨기지 못하는 태도는, 금기에 극단적으로 반항하는 자아를 보여준다. 그는 군 복무 시절, 국가 및 선임의 편에 서서 후임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관행의 방조자였기에, 더 반성하듯 불복종하는 것 같다. 국가의 지나친 민족주의에 대한 반동은 자유가 아니라,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 그를 옥죈다. 외부로부터 유리되어 계속 연주와 노래만 하는 밴드, 상상에 저민 Y처럼 현실에 반대하는 자신에게 도취된다. 이들의 반대는 곧 금기로 가득한 현실 자체를 거부한다. 이러한 그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반항꾼'이라 할 수 있다. 복종만 할 수 있고, 불복종을 할 수 없으면 노예, 반면 불복종만 할 수 있고 복종은 할 수 없다면 반항꾼이다. 반항꾼은 분노와 실망, 억울함에 추동되어 신념, 원칙의 이름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Y는 국가에 대한 크나큰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국가가 자유로운 개인에 사형선고를 내려 분노는 식지 않는다. 그런데 불복종만 반복하다가 야할롬을 벼랑 끝 사지로 내몬다면 잔인한 국가와 그는 다를 게 무엇일까. 그래서 그는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 이성과 신념과 인본주의적인 양심에는 복종하되, 권위와 불합리에는 불복종하는 혁명가 말이다. 나르키스가 Y의 맨살을 어루만져주며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그 순간, 더 이상 모든 것에 불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눈물과 야할롬을 향한 마땅한 연민에는 복종하며, 그렇게 '자유로운 개인'이란 신념에 복종하는 혁명가가 된다.      


예술가인 Y, 그의 예술은 토대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Y에게 자신을 투영한 라피드에게 토대는 바로 ‘어머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의 창작에 중요하게 개입한다. <시인 요아브>에서 요아브에겐 친모가 없다. 소년은 시를 창작하지만 이를 예찬해주고 알려줄 이가 부재했다. 어머니 대신 소년 곁에 있는 여성들은 무관심하거나 그의 시를 표절한다. 이러한 요아브 곁에 니라가 찾아온다. 처음에는 요아브를 이용해 제 배를 불렸으나, 계모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요아브에게 기회를 주자 소년은 더욱더 활달하게 창작한다. 본 작품의 요아브와 니라의 관계는 실제 라피드와 어머니의 관계를 상징한다. 항상 그의 각본은 어머니가 공동 참여하였고, 프로듀싱을 도왔기 때문이다. 라피드의 모자관계는 <아헤드의 무릎>에서 예술 외의 생애까지 어머니가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언급된다. 이렇게 어머니와 공동 창작하던 라피드,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어머니가 폐암으로 인해 죽어가는 자전적 상황이 반영된다. 자전거를 함께 탄 어머니와 아들이 갑자기 Y를 스쳐 지나간 장면도 예사롭지 않다. 그들과 반대로 Y, 곧 라피드는 홀로 놓인다. 그에게 어머니는 '대지'다. Y는 항상 어머니가 좋아할 대지, 하늘의 풍경을 촬영하고 거기에 자신의 음성을 남긴다. 이러한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촬영’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흡사 핸드폰에 담겨 ‘어머니’라 불리는 대지와 통화하는 것 같다. 라피드는 대지와 같은 어머니 위에서 살고 연출한다. 그리고 각본을 쓰는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다. 그렇게 어머니와 아들은 상호보완하며 자신을 실현했다. 그런데 라피드의 어머니가 죽어가자, 그는 예술과 삶의 동지로서 어머니를 새로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여성, 곧 어머니는 야할롬이다. 어머니가 죽어가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짙어진 듯한 Y는 야할롬의 품에 안겨 호소하는데, 흡사 <피에타>처럼 그녀가 Y를 위로하듯 보인다. 하지만 야할롬은 Y의 호소 대신, 시오니즘과 애국주의가 적힌 계약서에 서명을 요청한다. 이후 Y는 새로운 어머니가 요청하는 것을 녹음하여 주민들에게 폭로한다. 야할롬과 Y의 관계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 이들의 급박한 상황에서 나르키스가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녀는 무언가를 요청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를 끌어안는다. Y, 곧 라피드는 저항하지 않는 자신 또한 용인해주는 어머니를 바란 것일까,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녀는 허상이다. 나르키스는 단지 극단적 상황에서 Y를 회유하기 위해 나섰을 뿐이며, 그녀는 어리기에 그를 포용하기에도 적합지 않다. Y의 녹음 폭로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 야할롬,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마을 사람들에 의해 Y도 죽는다. 결국 녹음을 폭로하는 것을 단념하고 국가를 떠나는 예술가는 영영 망명자다, 어머니를 잃거나 버림받거나 찾지 못한… 하지만 <시너님스>를 파리에서 찍었던 라피드는 이후 본 작품을 촬영하러 이스라엘로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스라엘을 다시 떠나겠지만, 이스라엘에 관한 영화라면 결국 이스라엘이란 어머니 위에서 촬영되리, 은폐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분노하는 자신을 멈출 수 없으리. 언제나 구체적인 사건, 상황, 사람들을 얘기하던 라피드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느슨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는 지금까지 어머니와의 협업으로 조화와 탄탄함을 갖출 수 있던 상황이 무너짐을 보여주는 무정형의 연출이자, 또 제작 지원을 받기 어려워 18일간 다급하게 촬영되어야 했던 여파를 반영한다. 이에 가장 모호하고 산만하며 날이 서 있는 그의 신작은 어머니와 자신을 돌아보고, 국가와 예술가와의 관계에서 탄생하는 라피드의 작품세계를 해제한다. 특히 그의 작품 중 <시인 요아브>를 달리 보게 만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아들은 어머니를 갈망하며, 모자의 결합으로 예술은 탄생하고, 홀로 놓인 아들의 예술은 태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이성 만남 채팅에 목을 매고, 항상 여성에게 눈이 가는 Y이자 라피드는 헤맨다. 지금까지의 어머니와 핸드폰으로 간접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어머니로 군림하려는 국가와 반목하며, 그 사이에서 가장 이상적인 어머니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상적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면 언제나 구속하는 국가에 저항하는 반항을 창작의 결과물로 내놓으리.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무엇을 향한 자유'로 향하고 싶지만, 후자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전자까지 포기하진 않으리. 적지 않은 동물들의 죽음으로 아름답게 탄생한 크레바스의 밑바닥에서 백골의 진실을 들춰내는 것처럼, 정치적 심미화에 맞서 불쾌한 진실을 건져 내리, 직접적으로 포착하기 어렵다면 우회적으로 진실을 비추리라, 심미화의 대상은 오직 자유여야만 하리. 자유를 허용하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 선 라피드, 하지만 그는 여전히 꺾이지 않은 자유 의지를 격렬하게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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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08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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