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May 13. 2022

자크 오디아르, <파리, 13구>

사랑이란 교육: 자유, 헤아림, 재회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 <파리, 13구>(Paris, 13th District) 

- 사랑이란 교육: 자유, 헤아림, 재회

“내가 그대를 그토록 사랑하므로 그대는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모든 교육의 비결이다.”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타자에 대한 우리의 경험, 이는 누군가를 간절히 사랑할 때, 그들에게 호기심을 느낄 때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고 경험하며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많은 부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사성은 단지 일부일 뿐, 실상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서서히 다름을 인지해가는 과정, 연인을 배려하고 끌어안는 과정이 곧 열애다. 우리는 사랑하며 나와 마냥 동일시했던 상대방에게 나를 분리한다. 그간 나조차 인지하지 못한 낯선 나를 경험한다. 그것을 포용하며 나를 고양한다. 또 경험의 참된 본질은 스스로를 역전시키는 ‘부정의 힘’이다. 새롭게 경험하며 그간 유한하던 앎도 바뀌고, 또 앎의 대상도 넓어진다. 경험은 기존에서 좌절하고 부정되며, 현혹에 빠져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유한한 자신과 예측의 한계, 불확실성을 깨우친다. 현실적인 것을 인정해간다. 그 현실적인 것이 바로 나의 이상, 관념과 다른 타자, 사랑하는 사람이랴. 타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나는 어느 순간 전형적인 나의 의식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관심사를 나의 주관과 일치시켜서 나의 입에 타인을 내세우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사랑으로 새롭게 경험하는 사람은 기존에 갇혀 있던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다른 사유, 다른 언어, 다른 행동,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유한한 자신으로 무한한 외부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일지 모른다. 단순한 앎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변화, 그리고 역전… 이러한 교육과 사랑을 자크 오디아르가 <파리, 13구>에서 대담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는 자크 오디아르의 색채로만 국한될 작품은 아니다. 바로 셀린 시아마가 각본에 공동 참여했기 때문이다. 1952년 파리 태생의 자크 오디아르는 그간 느와르, 스릴러 장르로 명성을 널리 알린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며, 최근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거칠고도 탐미적인 양식을 서부극에 적용하기도 했다. 오디아르의 관심은 크게 자유와 철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구속받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는 마피아에 몸담은 아버지, 반면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는 아들의 갈등을 다룬다. <러스트 앤 본>에서는 아쿠아리움에 갇힌 범고래가 구속된 자유의 상징이다. 장엄한 바다로 향하고 싶은 거대한 포유류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감옥을 넘어서고자 아쿠아리움을 파괴한다. <예언자>에서 감옥은 구체적인 영화의 배경이었다. 또 <디판>에서는 이주한 난민들이 보편자에 의해 경제적으로 귀속되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저당 잡히는 노예화에 주목하며, 그들의 시선에서 어디서나 감옥인 세계를 묘사한다. <시스터스 브라더스>에선 원전의 여러 주제 중에서도 구속당하지 않는 '개인'에 초점을 맞추며 자유로 향하는 여정을 예찬한다. 최후를 앞둔 말이 끝끝내 생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자유를 향한 여정이 곧 초인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오디아르의 작품에서는 항상 여러 시련이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속박된 자유와 관련한 상황이거나, 생존과 긴밀하게 연관된 위협, 장애로 말이다. <예언자> 같은 경우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낸 존재를 절대적 존재로 그려내며, 초인은 부과된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이러한 여정에서 <러스트 앤 본>이나 <시스터스 브라더스>에서는 우애, 연대가 도드라진다. 특히 <러스트 앤 본>에서 서로에게 결핍한 다리, 정신성을 충족하며, 우화에서 등장하는 '시각장애인과 지체장애인'의 연대와 유사한 구도로 현대극을 펼쳐낸다. <디판>에서는 난민이 되며 잃어버린 가족의 대안, 그리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시련을 함께 헤쳐 나가야 함을 역설하며, 연대의 정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오디아르의 스타일은 대체로 아주 거칠다. 우악스러운 인물들이 처하는 거친 상황이 연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디아르가 인터뷰에서 밝히듯, 현실과 다른 차원의 예술로서 마냥 리얼리틱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하드보일드한 소재는 탐미적으로 승화된다. 이러한 완강한 연출로 비정하고도 차가운 현실을 비추는 오디아르는, 청년들의 성장, 기성과 성의 자유 사이에서의 갈등, 이분법적인 규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을 탐구하는 셀린 시아마의 색채와 어떤 조화를 이룰까.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일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흑백이다. 흑백은 색채를 포착하지 못하는 초기 영화 기술의 한계에서 시작된 매체다. 그래서 <이다>, <콜드워>, <레토> 등과 같은 작품에서, 기술에 한계가 있던 시기인 20세기를 가리키는 매체로 선택되곤 한다. 그 당시에 흑백은 당연했다. 기술적 한계와 더불어 흑백은 값이 쌌기 때문에, 컬러 필름이 탄생한 이후에도 예산에 맞춰 흑백 필름을 선택한 감독들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에 흑백은 당연하지 않다. 앞선 사례처럼 과거라는 시간을 지칭하기 위함이거나, 또 흑백에 ‘고전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용한다. 철학자 가다머는 ‘고전성’이란 다양한 시대의 제각기 취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특출나게 차별화된 어떤 것이라 주장한다. 흑백은 컬러 필름의 등장과 디지털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상실되지 않고 보존된 고전적 매체로 자리매김하여, 오늘날 감독들에게 선택되곤 한다. 흑백의 고전적 가치는 앞서 언급한 사례에서처럼 과거를 지칭하는데 탁월한 미적 가치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리, 13구>의 배경은 오늘날이다. 그렇다면 과거를 지칭하는 가치 외의 탁월한 가치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흑백은 색채가 없다. 그래서 차갑고 건조한 느낌을 준다. 특히나 <파리, 13구>의 흑백은 명암이 짙지 않아서 더 메마른 느낌을 준다. 코엔 형제(그리고 조엘 코엔)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나 <맥베스의 비극>처럼 명암 대비가 뚜렷하고 극적이면 빛과 어둠이 꽉 들어찬 느낌, 이에 풍부한 질감을 선사하지만, 본 작품은 매우 현실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명암을 신경 쓰지 않아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마른 느낌, 차가운 느낌, 공허한 느낌은 본 작품이 다루는 권태로운 삶, 섹스조차도 금세 차갑게 식어버리는 상황에 효과적으로 일조한다. 본 작품과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프랑수아 오종의 <영 앤 뷰티풀>에선 의도적으로 알모도바르처럼 색채를 강조하여 풍부한 물질성과 텅 빈 정신성을 극적 대비했다면, 본 작품은 풍부한 물질성을 배제하고 텅 빈 정신성을 극적으로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흑백을 선택한 느낌이다.     


그리고 흑백은 색채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반적인 컬러 영화와 달리 대상의 실루엣, 형체, 즉 '선'에 집중할 수 있다. 그간 서구 미술사에서 색채가 감정적이고 불명확하다면, 선은 이성적이고 명확한 것으로 여겨졌다. 영화 후반부에 노라가 혀로 카밀의 육체를 핥으며, 흡사 혀의 촉각으로 그의 형체를 그리는 것처럼, 우리는 색채 때문에 주목할 수 없었던 파리라는 도시의 구조, 공간감, 육체의 결, 촉각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명확함, 이성적 태도가 사람들을 더욱 권태롭게 만드는 것일까. 이렇게 흑백의 고전적인 미적 속성을 끌어내고 환기하는 영화, 하지만 언제나 흑백만 사용하진 않는다. 영화 중반부, 노라가 로스쿨에 복학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기 직전에 포르노 배우인 앰버의 비디오가 컬러로 포착된다. 권태롭고 삭막한 흑백에서 우리는 성의 환상을 바란다는 듯이, 오색 찬연한 컬러의 차원으로 초월하고 싶다는 것을 흑백과 컬러의 대비로 보여준다. 또 밤에 이들이 몸으로 교감할 때에 명암 대비가 짙고 풍부해지며, 영화 말미 노라와 루이스가 키스할 때 태양을 강조하여 낮임에도 고혹한 빛을 풍요롭게 채워낸다. 앰버를 포착한 컬러처럼 영화가 매우 풍성해진다. 하지만 양자는 마냥 같지만은 않다. 앰버의 비디오가 가상적인 이미지를 탐닉하는 욕망이라면, 노라와 루이스의 키스는 현실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삭막함과 권태를 초월한 풍부함, 심미성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후자다. 컬러가 허구요 흑백이 현실이라면, 우리는 흑백이라는 현실의 한계에서 풍부함을 지향해야 할지다. 이러한 흑백으로 영화는 맨 처음, 하이앵글 구도와 익스트림 롱숏으로 파리 13구를 포착한다. 마천루들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다. 공간은 파리, 시간은 밤이다. 밤이라서 마천루의 각 공간에는 불이 켜져 있지만, 조명은 벽에 갇혀 옆방으로, 저 너머로 건너갈 수 없다. 이윽고 감독은 어느 한 방의 불빛에 주목한다.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에밀리가 놓인 방, 하이앵글 카메라는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지상에서 영화는 비교적 유려한 카메라 워킹으로 인물들을 포착한다. 흑백의 삭막하고도 건조한 세계에서 저마다의 방식, 특히 섹스로 권태를 달래고자 하는 사람들을 카메라로 미끈하게 표현한다. 때때로 핸드헬드처럼 흔들리는 카메라나 줌인 등도 부드러운 카메라 워킹처럼 인물의 상황에 일조한다. 새로운 룸메이트나 동료를 만난 주인공들, 외부의 험담에 스트레스를 받아 서서히 자신만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노라를 포착하며 말이다. 또 영화의 형식은 단절을 가시화한다. 오디아르는 자국의 감독, 베르트랑 보넬로가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이나 <녹투라마> 등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 '분할 스크린'을 이용한다. 화면을 분할하여 서로 멀리 있는 두 인물의 통화를 이어놓아 서로의 시각과 청각을 가까워지게 만들지만, 정작 여전히 서로는 멀리 있다. 통화하기에 시간이 없고 대화에 흥미가 없거나, 잠을 깨우는 등 내 시간을 방해하기 때문에 연락은 불발된다. 가까이 놓이지만 서로의 발화는 상대의 프레임에 침투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영화의 또 다른 화두 중 하나는 고립과 단절, 이에 상응하는 가까이 있지만 멀리 떨어진 서로 간의 외로움을 분할 스크린, 닫힌 문, 시선의 엇갈림 등으로 상징한다. 한편 소외되는 것은 서로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 소외 또한 겪는다. 영화의 초반, 에밀리가 콜 센터에서 일할 때, 또 마트에서 장을 볼 때 편집은 거칠고도 빠르게 잘려 나간다. 에밀리는 콜 센터에서 일하는 것이 진심이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에밀리가 어머니와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로, 어머니도 에밀리도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한다. 직장과 사적 통화, 모두에서 자신은 소외된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룸메이트, 카밀과 대화를 나눌 때 영화의 편집은 온건하다. 대화를 비교적 생생하게 보존하여, 재빠르던 이전 편집에 비한다면 느긋하고 여유롭다. 그렇게 서로에게 집중한다. 소외와 이해는 편집으로 대비를 이룬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를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수한 마천루가 포착된다. 그리고 색채가 없어서 아파트의 골조가 도드라진다.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파리지만, 실상 서로를 모른다는 것을 각 방을 나누는 벽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고립은 아파트뿐만이 아니다. 노라는 파리 13구로 이사 오며 에밀리가 일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음식점을 본 적이 있으며, 또 노라와 카밀은 한 공간에 놓인 적이 있다. 하지만 서로는 한때 그들이 마주쳤다는 것도 모른다. 이는 서로에 대한 무관심에서 기인할 수도 있지만, 시아마의 각본 영향처럼 보이는 '옷 입기'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시아마의 작품에선 언제나 강제로 옷을 입히는 상황이 등장한다. <톰보이>에서의 원치 않는 파란 원피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혼사를 위해 입어야 하는 옷이 그렇다. 에밀리의 전라 상태에서 시작되는 본 작품도 옷 입기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유려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이는 나체로 노래를 자유분방하게 부르는 에밀리를 포착할 때 그랬다. 그리고 나체의 에밀리는 민원인에게 천편일률적으로 반복하는 신규가입 및 요금제에 관한 '대사'를 에로틱한 억양으로 바꿔 부른다. 이후 영화는 콜 센터에 출근한 그녀를 비춘다. 나체의 상태와 달리 ‘옷을 입었고’, 에로틱한 억양도 없다. 단정하고도 말쑥하게, 자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소비자가 듣기 좋아할 만한 '시청각적 옷'을 갖춰 입는다. 그리고 몸에 랩을 칭칭 감는 다이어트 영상을 보며 ‘나체’를 바란다. 에밀리 외의 영화 속 다른 인물들도 직업을 갖고 있다. 에밀리의 룸메이트로 들어온 카밀은 선생이다. 하지만 카밀에게 선생 또한 바라는 옷이 아니다. 직장에서 자꾸 딴짓을 하는 에밀리처럼, 카밀 또한 현재의 일에 만족을 못하고 결국 선생을 그만둔다. 그의 꿈은 박사 학위를 따서 더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또 노라는 33살에 로스쿨에 복학했다. 그런데 젊은 학생들이 주부와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노동을 마치고 학교에 복학했냐며, 편견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힌다. 삼촌과 공인중개사를 하다가 복학했다는 노라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후 파티에서 팔과 다리의 맨살이 드러나는 옷과 자신이 선택한 가발을 착용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포르노 스타 앰버가 아니냐며 자신들이 바라는 옷을 노라에게 덧입힌다. 학생들에게 노라는 어머니이자 앰버라는 타인으로 여겨지며, 그녀는 온갖 모욕과 추파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앰버 또한 노라와 대화할 때는 동등하게 자신을 내놓지만, 타인들의 요구에 부응할 때는 가발을 쓰고 성이라는 목적에 따라서 움직인다. 이렇게 자신은 세계에 참여하고 노동하기 위해 원치 않은 옷을 입고, 또 타인의 시선이 기존의 내게 다른 옷을 입히기도 한다. 카밀의 동생 에포닌은 사람들 앞에 서면 말을 더듬는다. 타인들에 의한 원치 않은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무대에서 자유롭게 제 주장을 쏟아내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할 때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무대에 올라와 있을 순 없다. 또 한때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그녀를 공격했지만, 지금은 화해한 카밀과 같이 있더라도 말을 더듬는다. 에포닌의 말은 온당 자기 것이 아닌 듯, 타인과 자신이 뒤섞여 서투르고 혀가 꼬이는 것만 같다. 에포닌의 말더듬처럼 청각도 하나의 옷이다. 언어라는 옷, 에밀리는 대만계 프랑스인으로 중국어와 불어,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녀에게 불어는 공적인 언어, 중국어는 사적인 언어다. 특히 영화 중반부, 카밀의 부동산에서 대만계 고객과 거래할 때, 중국어로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나, 노라의 불어가 중재하여 공적인 언어로 뒤바뀐다. 이렇게 우리는 타인이 바라는 옷을 입게 되는데, 이는 폭력적이다. 앰버로 오인된 노라나, 루이스란 본명 대신 포르노 배우로서 앰버라는 가명을 사용하는 그녀들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의 발화는 매우 저열하고 난폭하다. 여성을 해하고 싶은 남성의 욕망은 그녀들을 ‘있는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자신들의 쾌감을 위해서 그녀들이 강제로 변형되길 바란다. 카밀과 에포닌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에포닌이 왜 카밀의 평가에 의존해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그만둬야 할까.      


이러한 각자의 욕망이 서로를 고립시킨다. 성희롱에 넌덜머리가 난 노라는 소통의 창구인 핸드폰을 깨부순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썼던 가발을 벗어버린다. 카밀처럼 상대방이 질리면 끝이다. 대상을 배려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에밀리도 타인들에게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기분 내키는 데로만 행동하고 타인에게 눈 먼 상태가 욕망이다. 노라가 참석한 봄 방학 파티, 그녀를 앰버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진실에서 유리된 욕망의 공허한 파티는, 노라인지 앰버인지 분간할 수 없게끔 만드는 깜빡거리는 조명, 풍부하게 들어차있기 보다는 텅 비어 보이는, 희고 창백한 빛이 강조된다. 깜빡거리는 빛처럼 타인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내 기분 따라 상대는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에밀리는 항상 카밀을 사랑했고 바랐음에도, 카밀에게 에밀리는 존재했다가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제 기분에 따라 다시 존재하게 되어 재회하는 그런 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욕망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상을 진정 이해하는 사랑으로 말이다. 카밀은 에포닌의 꿈과 직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전에 에밀리와는 대화로 이를 이해한 바 있다. 중국어와 불어, 선생님과 콜센터 직원 등, 서로의 다른 삶을 이해해갔다. 타인을 이해함에 내 세계는 보다 밝아진다. 노라는 앰버와 대화하며 먼저 수모를 겪은 그녀로부터 조언을 받고, 포르노 세계의 위험성을 알게 된다. 무지를 앎으로 밝힌다. 또 공인중개사 업무를 잘 모르는 카밀, 하지만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는 노라에 의해 사무실은 멀끔해진다. 이후 사랑으로, 섹스하는 관계로 발전된 그들 각각의 두 세계는 부드럽게 달라붙는다. 나체로, 상대방에게 어떠한 옷도 입히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카밀이 에밀리와 헤어진 이후, 동료로 만난 노라를 부드럽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의 거절에 더 이상 추파를 던지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의 말을 그가 따라 함에, 이로써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는 이해받음에 서로는 상대방에게 몸을 맡긴다. 그간 화상 통화로 연락하고, 실제와 영상 각각의 차원으로 분리되어 있던 노라와 루이스도 마찬가지다. 앰버의 본명 루이스를 알게 되고, 또 서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공유하며, 비로소 가상이 아닌 진실한 상대방을 끌어안을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각자의 옷을 챙겨 입은’ 서로는 상대방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간 남자를 사귀던 노라는 여성 루이스에게 키스를 요청한다. 사랑이란 그간 지속해온 성 지향성을 포기하고, 다른 지향성까지도 새로이 알고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일요일’에 만난다. 쉬는 날, 루이스가 앰버로서의 복식을 벗을 수 있고, 노라 또한 중개사의 옷을 벗을 수 있을 때 진실한 모습으로 그녀들은 만난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는 사랑 또한 시아마의 각본일 것으로 추정된다. <톰보이>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외부 가치 체계가 아니라 내부에서 우러나온 진실을 존중할 것을, <쁘띠 마망>에서 볼 수 없는 상대의 영역을 파고들어 가서 이해할 것을 촉구한 태도가 묻어난다. 역경이 부여되고, 이를 초인이 되어가며 극복하는 오디아르의 색채는 본 작품에서 많이 옅어졌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그들은 성교를 나눈다. 본 작품에서 섹스는 서로의 나체를 포용할 수 있는 두 존재의 접합이기도 하지만, ‘일상의 위반’ 또한 의미한다. 영화에서 가장 처음 섹스를 나누는 사람은 에밀리와 카밀이다. 애초에 카밀은 에밀리의 룸메이트로 들어올 수 없었다. 에밀리의 ‘규칙’은 여성만 룸메이트로 받았다. 하지만 카밀에게 흥미를 느낀 에밀리가 규칙을 위반하여 그를 룸메이트로 들였고, 이후 기존 룸메이트의 관계와 ‘역할’을 파기하여 섹스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후 카밀이 저녁 식사를 위해 방을 비워달라고 에밀리에게 요청하자, 그녀는 클럽에 가서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를 ‘이탈’하는 마약을 들이키고, 그간 남성과 관계를 나누던 자신을 ‘넘어서서’ 여성과 키스를 나눈다. 카밀과 노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기존 동료 관계, 서로 간의 목적으로부터의 위반, 이를 통해 우리는 자유를 맛본다. 영화 속 현대인들은 타인을 위해서 말하고, 타인을 가르치고, 타인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자기 소외’를 느끼지 않던가. 또 카밀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자신의 규칙 때문에 에밀리와 노라에게서 버림받고 외로움을 느끼지 않던가. 카밀에 의한 규칙이 아니라, 규칙에 의한 카밀에 의해 감정 소외를 느낀다.     


하지만 때로 타인을 위하는 것이 통속이 된 질서를 위반하여 나를 되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위반은 바타이유의 이론에 기반을 둔다. 성의 철학자 바타이유에게 에로티즘의 본질은 바로 위반이다. 일반적으로 노동의 시간에 성은 금기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간의 인류사에서 성, 특히 쾌락을 위한 성은 노동의 시간 외에도 금기로 규정됐다. 노동의 시간에는 신규가입 및 요금제에 관한 문구만 되뇌어야지, ‘물고 빤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탈적 발언이 에밀리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또 에밀리가 일하다 말고 데이트앱으로 연락받고 뛰쳐나가, 낯선 남자와 성교를 나누는 것처럼 금기를 위반하며 우리의 자극은 배가 된다. 성이 금기인 노동의 시간에, 그리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금기의 대상인 낯선 사람과 몸을 섞으며 말이다. 그렇게 금기로 잊혔던 나를 회복한다. 데이트 이후 직장으로 돌아온 에밀리가 춤추며, 제 자신의 솔직한 몸을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춤추는 그녀를 손님들이 환호하고 박수치는 것처럼, 솔직한 나는 언제 어디서나 환대 받아야 한다. 한편 더 이상 위반이 아닐 때 우리는 지루해진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대상과 깜짝 성교를 나눈다면 짜릿함은 배가 된다. 하지만 카밀이 원치 않는 것처럼 연인 관계로, 즉 익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규정되고, 에밀리가 제안하는 것처럼 ‘특정 날짜’를 계획하여 성교한다면 짜릿한 위반의 감각은 서서히 저하되리. 또한 우리는 연인에게 특별한 대상이 되길 원한다. 그간 길에서 스쳐 지나간 무의미한 상대방이 아니라, 눈에 띄는 상대방, 평범한 질서를 이탈한 반짝이는 대상으로서 말이다. 노라는 카밀에게 특별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카밀이 그간 사귀었던 여성들이 많았다는 말을 들으니, 그 중 하나인 에밀리를 눈으로 직접 보고 나니,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진다. 그래서 일반적이지 않은 항문 성교, 더 가학적인 성교를 요구하며 이전 연인들과 자신을 차별화한다. 에밀리가 카밀에게 스테파니와 함께하는 난교를 요청한 것도 이와 관련한 맥락, 더 이상 섹스가 재미없어졌기 때문이다.   


또 섹스는 두 육체가, 두 사람의 지평을 융합시킨다. 처음에는 새로워서, 유한한 자신으로부터의 무한한 이탈이어서 상대방과 나는 달라붙길 원했다. 하지만 상대방을 알아가며, 대상이 유한해지자 지루해진다. 익히 다 파악되고 나니 당연해진다. 그래서 이들은 멀어진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전부 다 알지는 못한다. 정녕 융합되었다 한들 필연적으로 내가 아닌 상대방을 전부 파악할 순 없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서로, 그래서 멀어지는 서로, 하지만 분명 모르는 상대방과의 재회는 또 다른 앎을 불러온다. 카밀은 옛 제자와 재회하고, 또 새로운 직업인 서버가 된 에밀리와 재회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버지가 새로운 연인을 만나왔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고 이별했더라도, 다시금 그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셀린 시아마의 <쁘띠 마망>에서 자식이 잘 아는 현재의 어머니를 넘어서, 어머니 이전 여성의 삶을 헤아리는 것과도 같다. 영화 속 에밀리의 할머니는 알츠하이머다. 채우지 못하고 항상 망각하여 언제나 그녀가 새롭다. 어차피 할머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따분하여, 그녀는 새로운 룸메이트에게 방세를 깎아주는 대가로 할머니에게 방문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내내 새롭게 반응하는 할머니를 사랑해야만 했다. 이러한 달라진 상대방은 나 또한 달리 보여주니 말이다. 한때 존재했던 카밀의 어머니, 에밀리의 할머니, 이제는 텅 빈 휠체어와 장례식으로, 비존재로 존재를 보여준다. 과거에서 달라진 대상으로부터 카밀은 눈물이, 에밀리는 자신의 소홀함에 마음이 쓰리다. 그들은 몰랐던 자신을 보여준다. 이에 서로가 생각보다 몰랐고, 과거의 앎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파악한 에밀리와 카밀은 재결합한다. 카밀은 에밀리에게 ‘사랑해’라 외친다, 하지만 1초 전에 들었던 감미로운 그 말을 다시 듣고 싶다. 1초 후의 에밀리는 분명 미세하게나마 달라졌으므로, 그 말을 되뇌는 카밀 또한 달라졌으므로, 그렇게 ‘사랑해’라는 단어는 1초 전과 마냥 같지 않으므로, 그래서 우리는 항상 재회해야만 한다. '수화기'를 놓지 않고 시선은 클로즈업으로 더 가까이 다가서며, 상대방을 실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말이다.      


욕망에 들끓는 우리는 질투가 나고, 또 오직 나만의 쾌락을 바라본다. 성기의 요청이 정신을 지배한다. 이에 상대방을 해한다. 연적인 스테파니에게 짓궂게 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공간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공인중개사’의 태도로 대상을 헤아려야 하리. 그렇게 대상을 포용하면 새로운 언어, 내가 모르는 직업, 내가 살지 못한 삶이 열린다. 그래서 사랑이야말로 진실을 알게 만드는 교육이다. 파괴적인 욕망은 대상을 쫓아낸다. 그들의 몸에 생채기를 낸다. 하지만 사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다. 그렇게 끌어안으며 우리는 가상의 영상에서 뛰쳐나와, 현실에서 몸과 몸이 맞대 진실과 호응한다. 또 사랑함에 가능한 섹스는 나를 되찾는 유일무이한 활동 중 하나다. 노동을 위한 삶, 내가 바라지 않은 직업을 위한 삶, 이에 나는 소외된다. 이러한 질서를, 통속을, 일반성을 위반하는 것이 성애, 이로써 소외된 나를 되찾는 것이 성교다. 그래서 우리는 성교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강렬한 위반으로 향하지만, 이보다는 매 순간 달라지는, 그럼으로써 과거에서 위반하는 대상과 재회하라. 과거의 앎을 갱신하고 망각함에 우리는 기존의 위반과 나의 복권이 가능하리. 이렇게 오디아르는 셀린 시아마와의 공동 각본을 흑백의 파리에서 풀어내며, 현대인의 고립과 권태, 이를 극복하는 사랑과 섹스, 재회를 고찰한다. 오디아르가 지난하게 반복해오던 초인이란 관심을 ‘위반’한 것이 흥미로우나 시아마의 섬세한 각본보다는, 탐미적인 연출에 치중하여 각본을 온전하게 살리지 못한 가벼움이 아쉽다. 또 오디아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예 사라져서 그가 연출해야 하는 이유도 실종되었기에, 차라리 시아마가 메가폰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이질적이지만 썩 어울리는 현대와 흑백의 조합, 흑백의 관례를 이탈해 흑백의 고전성을 깊이 탐구한 위반, 그리고 불어 원제(Les Olympiades)처럼 사랑과 교육을 엮은 탐구는 흡족할 만큼 흥미롭다.

----------

감상일: 220513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나다브 라피드, <아헤드의 무릎>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