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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7. 2022

조안나 호그, <더 수베니어 Ⅱ>

방황을 멈추고 싶다면 명료하게 촬영할 것

조안나 호그(Joanna Hogg), <더 수베니어 Ⅱ>(The Souvenir Part II) 

- 방황을 멈추고 싶다면 명료하게 촬영할 것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

기억은 멈춰있고 자글거리며 불확실하다. 기억을 영화에 비유한다면 고정된 카메라, 색깔 잃은 흑백, 희미한 필름… 반면 현재는 달리 및 트래킹 숏, 컬러, 선명한 디지털이라 할 수 있으랴. 줄리의 회고도 그렇다. 줄리는 안소니와 함께한 시간을 회고하며 멈춰버린 기억, 곧 '기념품'에 침잠하지만, 이윽고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현재는 역동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실로 돌아오는 줄리, 그녀는 영화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그리고 카메라에 현실을 치열하게 담아내고자 고군분투한다. 영화 속 줄리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본 <더 수베니어>의 감독 조안나 호그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다. 호그는 줄리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고, 과거의 감독인 줄리는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이를 통해 감상자, 스크린 너머의 현실로 추억은 다가선다. 그렇게 줄리는 스크린을 뛰어넘는 리얼리즘 영화를 연출하고 싶다. 하지만 나의 바람, 이상, 관념과 현실은 분명 다르다. 전자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경쾌하지만, 현실은 무겁고 뻣뻣하게 얼어붙는다. 영화에 필요한 무수한 자본, 인력, 그리고 촬영되는 사람들이 연출되고자 하는 의사… 이상과 현실이 부딪힘에 줄리는 영화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판단을 유보한다. 줄리가 유보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 한편 이미 닫혀버린 과거는 호그가 줄리와 <더 수베니어>를 통해 비교적 명료하게 닫힌 상태로 담아낸다. 다만 담아내는 것에도 확신은 없다. 단지 경험했던 객관적인 시간에 대한 정확한 기록, 그것을 해석하고 판단하며 답하는 것을 호그는 유예한다. 담아내는 것은 단지 나만의 시선이요, 과거와 기억은 부정확하고 지금 와서 망자가 스스로 답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과거를 어째서 기록할까. 본 작품의 제목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추억>이란 그림에서 따왔다. 연인의 이름을 나무에 새기며 간직하려는 여인, 그렇게 붙잡아야 하는 이유는 기억과 과거가 현재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호그는 자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탐구한다. 과거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중대사와 딸의 세부까지도 결정하는 자였다. 반면 학생 시절의 호그는 방세 낼 여유조차 없는 궁핍한 청년이었다. 이러한 어머니가 늙었기에 그녀를 영화로써 보존한다. 그리고 서서히 현재로 다가서는 그녀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아니다. 줄리의 연인 안소니는 그녀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 앞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된다. 줄리가 어머니가 됨으로써 과거의 어머니는 현재의 딸에게 되돌아온다. 이에 줄리를 연기하는 오너 바이언이, 줄리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틸다 스윈튼의 실제 딸인 것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변화하기에, 변하기 이전의 상태를 보존한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낸 당대의 시대상도 기록한다. 역사적 맥락이 곧 프롤레타리아인 안소니와 부르주아인 줄리의 의식을 가르기 때문이다. 사실 호그의 기억에서 안소니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두 연인의 대화는 자기중심적이고 피상적이며 상대를 설득하기 어렵다. 그들이 아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기에. 하지만 영화감독이 되어 자신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상대방 또한 참여하지 않고 관조하여, 조금이라도 자신과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 시대상까지 굽어보며 말이다. 물론 안소니는 사라졌고, 그 당시의 세계는 아스라하고 헛헛하게만 남아있다. 기억은 필연적으로 흐느적거리고 드문드문하다. 보존한다 한들 당대와 상대방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의도 자체가 대상을 명확하게 기록하려 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 자신의 추억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다루는 대상이 시대나 안소니가 아니라, 그녀의 추억 자체였기에 이토록 노회하고 느슨하며 허름하게 느껴졌을까. 이러한 그녀의 추억 연대기는 끝나지 않았다. 호그는 <더 수베니어 Ⅱ>로 줄리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호그의 두 번째 추억 이야기,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면 이번에도 필름을 사용한다. 16mm 필름과 35mm 필름이 교차 사용된다. 호그는 디지털카메라 대신 선택한 필름이 가져다줄 수 있는 여러 효과 중 아스라함, 신비로움, 희뿌연 매체성에 주목한다. 현재와 달리 기억은, 그리고 추억은 가질 수 없어서 언제나 신비롭다. 희소하기에 신묘하고 빛이 나는 추억을 매체로 가시화한다.      


아름답지만 이미 죽은 것인 추억은 생명력이 없다. 그래서 필름에 따른 영화의 미장센은 전체적으로 창백하다. 그럼에도 화사한 빛, 나름의 따스함이 이중적으로 공존한다. 이미 죽어버린 시간, 하지만 내게는 기억으로 생명력을 갖고 있는 이중성이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컴컴하면서도 밝은 매체성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기억은 고정되고, 움직이더라도 방향은 제한된다. 과거에 쌓인 기억은 덧붙여지거나 축적되지 않고 서서히 뒤로 사라져가기에, 앞이 아니라 뒤로만 움직인다. 또 여러 가능성을 기투 할 수 있는 미래와 달리, 고정된 과거에 가능성이란 없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유추하거나 움직여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과거에 사로잡힌 대상을 포착하는 영화의 카메라는 거의 고정되어 있다. 움직임도 패닝 수준에 그친다. 둔한 운동성, 딱딱한 형식이 완결되어 변화가 불가능한 과거의 죽은 특성을 드러낸다. 한편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안소니를 잃은 줄리, 딸의 어린 시절을 갈망하는 부모님 정도에 그친다. 다른 이들은 아직까진 이들처럼 상실을 겪지 않았다. 또 줄리 주변의 인파들은 대부분 영화학도다. 그래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에 탄생할 무언가를 만드느라 매우 번잡하고 바쁘게 움직인다. 미래의 여러 가능성을 골똘히 모색하느라 산만하게 움직이는 현재를 포착하는 연출을 과거에 상응하는 형식과 달리한다. 멈춰있는 카메라는 달리 및 트래킹으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편집도 훨씬 잦다. 과거에 머무는 안소니의 기억을 회고하는 영화의 롱테이크는 흡사 그것을 조금도 잘라내고 싶지 않은 열망에 상응한다면, 현재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싸매는 학도들에겐 잦은 편집이 발생한다. 시간은 닫히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듯 말이다. 음악이 거칠게 잘려나가고, 행동이 완결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열린 현재성에 상응할 수 있을까. 물론 영화에선 현재이지만, 감독과 우리의 시선에서는 과거이기에, 현재에 과거를 바라보는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 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화 결말에서는 현재로 돌아온 줄리를, 살아 숨 쉬는 살 떨림과 박동에 상응하는 핸드헬드로 보여준다.      


편집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과거를 포착하는 형태가 언제나 롱테이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과거를 포착하는 양식 중에도 짧은 숏들이 연이어 이어지며 하나의 시퀀스를 형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의 시간을 여러 편집으로 나누는 것과 과거의 여러 시간을 짧게 이어내는 것은 분명 다르다. 기억은 서서히 잊히고 사라진다. 그래서 중요한 몇몇 기억을 제외하곤 잔상만 남는다. 황홀했던 새 소리, 정물, 초상, 수확의 풍경, 식사자리… 영화의 파편적인 편집은 즐거운 감각의 잔상만이 남아 현재를 기쁘게 하는 기억의 속성을 보여준다. 현재의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고자 무수하게 나누고 잘라서 각각을 신경 써야 하는 것과 다르게, 느슨하고 듬성듬성하게 방치해두어 큰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되는 향수… 한편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고 일면만 포착하는 것들에 감독은 정교함과 세심함을 추구한다. 본 작품은 줄리의 가방과 같은 정물, 초원 및 정원의 풍경, 영사기의 빛을 조명하는 필로우 숏 등이 인상적인데, 흡사 바로크 정물화나 고전주의 풍경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황홀하다. 쇼펜하우어는 정물화를 두고 대상의 객관성과 정신적 평안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라 표현하지 않던가. 시간에 초월하여 어떠한 욕구도 없이, 그나마 남은 잔상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보존하려는 태도가 호그의 정교한 연출에서 나타난다. 외에 영화는 줄리의 사적이고 일상적인 영역과 감독으로서 그녀가 촬영하고 창작하는 공적 영역을 교차한다. 후자에서는 아카이빙 푸티지에서부터 흑백, 줄리를 포착한 양식보다는 선명한 매체를 사용하며, 형식으로 영역을 구획한다. 그리고 이들은 각기 다른 화면비에 담기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사실상 영화사의 모든 화면비들이 총망라된다. 줄리는 1.66:1에 담긴다면, 나머지 영상들은 1.33:1, 1.85:1. 2.39:1 등 각자의 장르, 고전성에 따라 다른 화면비에 담긴다. 앞서 단편적인 기억을 정교한 구도에서 조명하는 것처럼, 각 영상과 촬영이 더 잘 보일 수 있는 틀을 모색한다. 본 작품에서 고찰하는 영화의 의의가 '더 잘 보이게 해주는 것'이니 만큼, 효과적인 가시화를 골똘히 모색한다. 흡사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말이다.      


영화를 찍는 줄리, 그녀는 더 잘 보이게 만들고 싶다. 영화를 통해 안소니와 자신의 관계, 그리고 나의 마음을 알고 싶다. 잘 알고 싶은 이유는 우리의 인생에서 항시 '멀어짐'이 잦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대상을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들은 미지에 놓인다. 그래서 줄리는 영화를 찍고 붙잡아서 그들을 파악하고 싶다. 그렇게 멀어지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과거’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하얀 꽃이 포착된다. 풀숏 수준으로 포착하다가, 조지아 오키프의 회화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깝게 포착한다. 이후에도 감독은 정원이나 초원에서 피어난, 이제 막 만개한 갖가지 꽃을 촬영한다. 영화에서는 꽃의 젊음과 찬란함이 영원하게 보존되리. 하지만 현실에서 꽃의 아름다움은 이내 곧 과거가 되고 만다. 만개한 꽃은 우리에게서 항시 시듦으로 멀어진다. 그래서 그리워한다. 이러한 꽃이 곧 사람과도 같다. 안소니를 잃은 이유에서일까, 줄리는 몸이 좋지 않다. 그래서 영화 도입에서는 부모님 집에 와있다. 크고 장성해서 영화 제작을 관장하고 안소니까지 보필하던, 그렇게 이제는 '어머니'가 되어가던 줄리, 하지만 제 한 몸 신경 쓰기 어려울 정도로 잔병을 앓자 그녀는 다시 딸이 된다. 부모의 시선에서 유약하여 그들에게 양육되어야 하는 어린 딸이 돌아왔다. 하지만 줄리는 다시 일어서고 멀어진다. 어머니는 좀 더 있다 가라고 제안하지만, 줄리는 산책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부모에게서 멀어진다. 한때 어린 딸이었던 줄리의 과거는 현재로부터 멀어진다. 그래서 가까워지는 것은 현재다. 현재가 당연하고 과거가 희소하기에, 줄리는 멀어져가는 과거에 집착한다. 안소니에 대한 그리움, 죽음의 의문에 말이다. 그래서 연인의 죽음에 답을 찾고 부채의식을 내려놓고자 과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사에게 향하고, 안소니의 부모님께 방문한다. 거기서 그들과 같이 안소니를 회고한다. 학교로 되돌아온 이후에도 바쁘게 움직이고 말하는 동료들과 달리, 줄리는 혼자서 멈춰있다. 현재로부터 과거는 저 멀리, 이러한 과거를 회고하는 존재는 현재에 동떨어져있다. 혼자 다른 차원, 시간, 관념에 놓인 듯한 이방인으로서 말이다.      


이렇게 현재의 우리에게 과거는 멀어진다. 하지만 멀어짐은 과거만 해당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것은 ‘물질’이기도 하다. 영화 초반부, 집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줄리에게 남자 학우 짐이 방문한다. 이윽고 그들은 눈이 맞아 성교를 나눈다. 그간 저 멀리서 포착되던 줄리의 육체가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포착된다. 이윽고 정사가 끝나, 줄리는 남은 반면 짐은 떠난다. 클로즈업은 둘이 찰싹 달라붙어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그렇게 정사가 끝나고 남은 것은 줄리의 몸과 그녀의 생리혈 뿐이다. 안소니에 대한 관념은 일부 남아있으나 그의 육체는 떠난 것처럼, 마찬가지로 짐의 몸도 떠난다. 정사가 끝난 직후의 창백한 방이 포착된 이후 이어진 숏은 새빨간 자동차를 타고, 새빨간 옷을 입고 있는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빨강은 우리의 육체, 피, 물질적인 쾌락 등을 상징하는 색채다. 희멀겋고 창백하여 어떠한 생기도, 물질성도 찾아보기 어려운 줄리의 새하얀 방과 다르다. 안소니가 떠나고 그녀에게서 물질적 쾌락도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직 기억, 관념뿐이다. 그래서 줄리는 물질을 사진기로 촬영한다. 정열적이고 뜨거운 빨강, 그것이 언젠가 사라져버릴 것을 알기에. 영화는 이처럼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물질을 강조한다. 줄리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도기를 만들면서 현실에 실현한다. 관념이 현실에서 물질로 닿으면 지식의 타당성을 보여주지만, 이후 줄리가 에트루리아 도기를 깨버린다. 엄마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만든 것도 이처럼 깨질 수 있으리라. 또 영화 속 육체는 다른 물질을 먹으면서, 담배를 불태우면서 유지되고, 영화 속 줄리가 계속 구토를 하듯 우리는 채움과 동시에 비워지고 멀어져가는 물질이다. 그래서 줄리는 물질을 보존하기 위해 사진기를 든다. 과거로부터 멀어짐, 물질로부터 멀어짐, 마지막으로 멀어지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앞서 언급한 구토는 줄리가 섹스 이후 계속 구역질을 한다는 점에서 임신으로 추측될 수도 있었지만, 줄리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버거워하며 제 뜻을 관철하는 상황에서 발생하기에 자신의 비워냄, 유실을 상징할 수 있으랴.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계속 비워지고 그래서 멀어진다. 줄리는 학교, 교수로부터 제작 지원금을 타고 싶다. 하지만 줄리의 설명이 진정 모자랐던 탓일까, 아니면 호그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그들은 ‘군도’처럼 서로 고립되고 단절된 탓일까, 설득과 이해가 쉽지 않다. 그래서 줄리는 자신의 계획에서 멀어진다. 맥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줄리는 그에게 호감이 있다. 그녀의 말을 잘 들어주고 이해해줘서, 그 또한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밤에 만나자고 제안하지만, 그가 게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내가 잘 몰라서 상대가 멀어지고, 이에 상대와 기대했던 나의 계획이 틀어진다. 또 영화는 협업이 필연이다. 아무리 줄리가 감독이라 한들, 인간인 이상 동료들은 나름의 주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줄리는 자전적인 안소니와의 관계를 영화화한다. 하지만 줄리를 연기하는 가렌스가 도무지 안소니와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는다며 투덜거린다. 줄리와 안소니의 연애는 가렌스의 삶에서 비롯한 연인의 상, 연애의 개념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렌스가 줄리를 바라보는 시선, 묘사도 단편적이다. 학교에 잠시 나오기에 특정 환경에서 예민함을 보이는 줄리만 알 뿐이다. 그렇게 줄리를 연기하는 가렌스로부터 줄리는 소외되고 멀어진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촬영을 마치고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퀀스에서 치열한 언쟁이 발생한다. 각자의 예술관이 다 제각각이기에 서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영역, 자리가 생겨난다. 이러한 자신의 뜻에서 멀어지지 않고자 투쟁한다. 나의 멀어짐, 타인과의 타협에 행동은 뻣뻣해진다. 줄리가 구토하고 에트루리아 도기를 떨어트리는 것도 제 몸을 명확하게 행동·통제할 수 없어서다. 그래서 상담사를 찾고 제 자신을 토로하며 나의 복권을 시도한다. 이러한 나의 멀어짐은 곧 대상의 멀어짐이기도 하다. 대상을 잘 알았다면 이렇게 멀어질 일이 없었다.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고, 대상으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 명확치 않음에 발생한 소동이다.      


그래서 우리는 잘 알아야 하지만, 정작 잘 모르겠다. 줄리의 어머니는 안소니에 대한 앎, 감정이 혼탁하다. 단지 줄리가 그를 잘 알고, 딸이 안소니의 죽음에 슬퍼했기 때문에, 이를 따라 행동했다. 어머니는 안소니의 앎, 그에 대한 감정을 줄리를 통해 우회하여 알고 표현했다. 영화라는 매체는 이러한 ‘우회’적인 앎을 기능한다. 영화의 시대상은 1989년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후반부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는 장면이 전파를 타기 때문이다. 독일에 직접 가있지 않지만, 장벽을 붕괴하는 장면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tv를 통해 줄리는 우회적으로 사건을 알게 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린다. 즉 감상자는 영상, 영화를 통해서 무언가를 안다. 감상자가 줄리의 어머니라면, 영화는 곧 줄리요, 영화가 다루는 대상이 안소니로서, 어머니가 줄리를 통해 안소니를 우회적으로 알듯 말이다. 그래서 영화감독 패트릭은 제작진들을 항상 다그친다. 무엇이 느껴지느냐고,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들의 느낌과 생각으로 영화의 대상을 우회적으로 감상자들이 알게 될 테니 책임감을 갖고 계속 채찍질한다. 영화는 현실의 대응물, 그렇기에 대응하는 대상을 잘 알아야 하고, 잘 모른다면 속단하기보단 맥스처럼 질문해야 한다. 하지만 예술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는 모사품이 아니다. 줄리가 안소니의 관계를 투영한 자전적인 영화는 매우 다양한 장르로 표현된다. 히치콕 풍의 스릴러, 독일 표현주의적 경향, 장 콕토를 연상케 하는 상징주의, 그리스 신화나 이집트 신화에서 모티브를 차용해오는 등 말이다. 이러한 상징은 모호하다. 그 자체를 보여주지 않고 숨기거나 가리기에, 그 배후를 들추고자 골똘한 생각을 요구한다. 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낯선 '사건'에 깊이 참여하여 우리에게 닫힌 실재의 층을 열어주기에, 우리의 기억에 보다 강하게 각인된다. 상징이 파헤쳐지면 모호함은 사라지고, 친밀함보다 더욱 선명한 명료함이 남는다. 그렇게 감상자와 줄리는 상징에 참여하여, 안소니와의 관계를 더욱 자명하게 알게 되리.      


현재에 몸이 놓이면서도 계속 과거로 향하던 줄리, 자신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던 그녀는 여러 차원이 겹겹이 중첩된 상징적 공간에 자신을 배치한다. 현실에서 저승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거기서 안소니의 죽음을 직면한다. 그를 촬영함과 동시에 안소니의 죽음이 발생한다. 어쩌면 줄리는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줄곧 헤맸을까. 하지만 본 작품과 동명인 줄리의 영화에서, 그녀는 ‘수베니어’라는 제목을 찢고 빠져나온다. 그가 죽었기에 이를 남기고자 카메라를 들었음을 확인하고, 그간 미루고 있던 장례를 끝마쳤다. 그녀는 세트장이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온다. 현재의 우리는 현실에 집중할 수도 있지만, 과거로 향할 수도 있다. 무수한 선택이 가능한 교차로가 곧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의 우리는 지금 정확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 줄리는 자신의 영화에서 안소니와 자신의 관계에만 집중한다. 산만하고 흐트러져 있었던 정신, 이에 모호하던 그들의 관계를 직시한다. 영화의 명료하고도 세련된 방식,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지칭하는 형식으로 이를 깨우친다. 이를 연출하면서 자신의 의문을 해소한 줄리는 비로소 더 이상 헤매지 않는다. 영상과 현실의 다른 매체, 영상에 담긴 죽음과 현실에 놓인 삶은 서로 다른 영역을 달리고 있으므로, 현실에 놓인 그녀의 삶은 현재에 집중해야 하므로. 그렇게 줄리는 현재로 되돌아와 삶에 집중한다. 냄새를 맡고, 과거를 찍기 위해서 빌렸던 빚을 청산한다. 한편 본 작품의 결말은 다시 영화다. 실제처럼 보였던 줄리의 생일파티가 세트장에서 촬영되고 있다. 가짜였을까, 연기일까, 하지만 단지 참/거짓의 이분법에만 국한될 수 있을까? 현재가 모호한 우리는 그렇게 명료한 영화로 다시 향하는 것은 아닐까, 열려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우리는 여전히 닫힌 기념품에 안락하게 침잠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호그는 전작에 이어 본 작품에서도 여전히 기억과 영화를 탐구한다. 기억처럼 멀어지는 것들, 그렇게 멀어지면서 나 자신도 멀어지게 되는 현실을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멀어짐을 다시 가깝게 클로즈업한다. 명료하게 정돈된 영화와 신중한 생각을 유도하는 상징을 통해 앎을 오랜 기억에 남긴다. 이를 창작하는 사람도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표현을 채찍질하며 모호한 스스로를 깨우친다. 이러한 본 작품은 흡사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처럼, 연인의 죽음이라는 강박증에서 헤어 나오는 ‘치유 행위’로서의 영화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결말은 영화가 너무 명료하여 중독되고, 상징에 골똘히 참여하는 나머지, 현실이 영화에 잠식되는 것을 의미할까? 호그가 여전히 <더 수베니어> 시리즈가 끝나지 않았다고 공언한 만큼, 결말의 함의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여하간 호그는 기억의 속성에 상응하는 편집과 매체로 이를 풀어낸다. 더욱이 몇 광년 떨어진 별에서 날아오는 과거의 존재인 빛 또한 영화가 탐구하는 기억에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본 작품에 가득한 빛, 줄리의 작품을 영사하는 빛 또한, 과거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회고의 속성을 강화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본 작품에서 단지 흥미로운 것은 형식뿐이다. 필름이라는 값비싼 매체로, 타인에게 별 중요치 않은 사적 기억을 진솔하게 옮겨왔다는 과감함에 미덕을 찾을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사소하고 하잘 것 없는 기억이라도 값지다는 것을 환기함이 의의일까. 혹은 <나의 집은 어디인가>처럼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픽션이라는 모호한 경계 때문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까. 사실 이러한 결합 외에 별 특별함을 못 느꼈다. 특유한 형식만큼이나 사유가 빛나지는 않는다. 분명 미덕이 있긴 하지만, 서구 평단의 요란한 포장과 찬사까진 동의하지 못하겠다. 메타 영화들이 대체로 높게 평가되는 경향, 자신들이 잘 알거나 친밀한 이야기를 다뤘다는 이유로 평정심을 잃고, 지나친 자기위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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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17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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