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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21. 2022

엠마 단테, <마깔루조 다섯 자매>

우리의 현재는 과거를 품고

엠마 단테(Emma Dante), <마깔루조 다섯 자매>(The Macaluso Sisters) 

- 우리의 현재는 과거를 품고   

“인간의 지고한 그리움이 바야흐로 인간을 진정 본연의 인간으로 만들어주며, 또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직접적으로 접해 있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수치스럽게 여기거나 분노를 자아낸다.” -카를 융-

철학에서 양심은 의심하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에게 양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능력이지만, 이는 항구적으로 우리에게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양심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것은 ‘감정’을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 방식이다. 이러한 양심에서 비롯된 자아가 부재하면 '아무도 아닌 자'다. 그러므로 아무도 아닌 자가 되지 않으려면 계속 자아와 대화해야 한다. 그것이 양심을 발동하는 또 다른 요건, 곧 ‘사유’다. 비사유는 대화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내 안의 내가’ 악행에 제동을 걸지 않는 '아무도 아닌 자'의 상태, 반면 사유하고 의심하며 '내 안의 나'와 대화할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양심으로서 존재한다. 니체 또한 유사한 이야기를 한다. 양심은 '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 관습적이고 전통적이며 신성시된 것과 싸움으로써 얻어지는 위대하고 새로우며 해방하는 것, 우리는 언제나 외부의 확고한 도덕이 아니라 양심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의심하며 참에 다가서고자 노력해야 한다. 즉 양심이란 참으로, 고귀함으로 다가서는, 어리석지 않고 망각하지 않는 나 자신이다. 엠마 단테의 신작 <마깔루조 다섯 자매>는 이러한 죄책감과 양심에 관한 이야기다. 내면의 기억과 줄곧 대화하는 자매들의 초상,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은, 하지만 잊게 되는 순간 내가 아니게 되는 양심의 갈림길에 선 그녀들 앞에 카메라가 선다. 1967년 팔레르모 태생의 엠마 단테는 이탈리아의 연극 연출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연극 무대를 가꿀 당시 그녀는 시칠리아어를 적극 사용하여 그녀가 나고 자란 팔레르모의 로컬성을 반영하였다. 실제 레즈비언인 그녀는 보편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요인들을 연극에 적극 등장시켰다. 그리고 일반적인 전통, 가족 형태 내에서 나타날 수 있지만, 보편성 때문에 고발되거나 의심하지 않는 근친상간이나 가정폭력, 형식적인 가족을 까발렸다. 그리고 팔레르모의 현실-경제적 낙후, 마피아, 민족주의-을 적극 무대에 반영하였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집필한 소설을 영상화하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한다. 바로 2013년 공개한 <팔레르모의 결투>를 통해서 말이다.     


연극 감독이었다가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플로리안 젤너의 연출은 대단히 연극적이다. 제한적이고 폐쇄된 공간에서, 편집보다는 공간을 드나드는 인물의 동선을 통해 연극적인 효과를 추구했다. 또 하마구치 류스케나 알랭 레네의 경우 연극을 배경으로 영화를 펼쳐내지만, 이러한 가운데서 영화이기에 가능한 구도나 요인을 길어온다. 이렇게 연극성을 빌려와 연극과 영화를 탐구하는 이들과 달리, 엠마 단테는 자신의 연극적 요소를 많이 덜어내는 연출을 선보인다. <팔레르모의 결투>에서 수중으로 향했을 때 슬로우 모션을 활용하거나, 또 지상에서 두 자동차가 맞붙은 장면은 리얼리틱하고도 긴장감을 고조하는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팔레르모의 좁다란 골목에서 사미라와 로사의 대치 상태가 지속되자 영화의 공간은 연극 무대처럼 제한되지만, 이를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수다와 얼굴을 리드미컬한 편집으로 이어내고, 또 죽음 이후 멈춰버리게 된 상황을 롱테이크와 고정된 카메라에 빗대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적인 형식을 모색하는 엠마는 그녀의 연극에서처럼 지역적인 색채를 곳곳에 녹여낸다. 영화의 도입부터 바다든 지상이든 ‘쓰레기’가 가득하고, 또 ‘묘지’에 방문하는 사미라가 포착된다. 그리고 좁다란 골목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시간을 끝없이 낭비하는 다혈질인 민족성을 반영한다. 또 골목은 어느 하나의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팔레르모의 낙후된 지역성을 반영하듯 보인다. 이렇게 낭비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자존심은 멀쩡한 두 차가 ‘쓰레기’가 되게 만들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양측의 치열한 격돌로 주민의 복부가 찔리는 등 ‘죽음’으로 치닫기도 한다. 이렇게 황폐화된 마을에서도 삶은 피어난다. 묘지에서 번성하는 강아지들, 죽어서까지 손자를 아끼는 사미라, 그리고 영화 결말 죽음으로 모여드는 주민들처럼 말이다. 또 팔레르모의 남자들은 좁은 골목의 결투를 오락거리, 도박으로 삼지만, 여성들은 일하고 챙기기에 급급하다. 비생산적인 결투에 돈을 낭비하는 남자들, 이에 팔레르모의 사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어른들이 결투에 정신 팔린 동안 아이들은 맥주를 몰래 마신다. 도로에서는 전복 사고가 나서 농작물들이 엎어진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미라는 자기 딸을 잃었고, 지금은 사위에게 무시당하고 산다. 유일하게 손자가 그녀를 사랑해준다. 그녀와 대치하는 로사는 팔레르모 출신이지만 현재는 외지인으로, 고향은 그녀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마을로 그려진다. 이렇게 일반적인 가족, 고향의 실체를 엠마는 폭로한다. 사미라와 로사 모두 팔레르모의 도로에서 물러서거나 순응하기 싫다. 이러한 본 작품은 팔레르모 내지인들과 북이탈리아로 이주한 외지인의 충돌에 주목한다. 대가족 형태의 사미라 일가와 핵가족·레즈비언 커플인 로사, 클라라는 서로 대비를 이룬다. 팔레르모 내지인들은 예술로 밥벌이하고 레즈비언인 그녀들이 다소 어색하다. 충돌하는 지역, 세대는 서로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 로사는 유년기 내내 자신을 꺾은 팔레르모에게 더 이상 굽히기 싫고, 사미라는 완고한 고집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사위나 세상을 향해 본때를 보이고 싶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로사는 혐오의 대상을 닮아간다. 사미라가 파스타를 던지거나 오줌을 누는 등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한다. 좁다란 골목과 지역, 싫어하지만 따라 하며 악순환되는 습관을 로컬성의 반영으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영화는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는 것이 곧 죽음이라 진단한다. 죽음, 묘비로 변해버린 딸과 달리, 사미라는 사위의 폭언이나 변해가는 세태 속에서도 변하고 싶지 않았으랴. 그러나 고집을 꺾지 않은 사미라는 차 안에서 죽음을 맞고, 죽어서야 자신이 가고자 한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삶과 진보는 로사가 팔레르모를 떠난 것처럼 철회하는 것, 각자의 지역성을 내려두고 우정을 나누는 클라라와 손자처럼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한편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다. 엠마가 내내 매서운 눈으로 바라본 팔레르모, 팔레르모에 머물면서도 사미라가 경멸한 것이 바로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었나. 위하는 척을 하지만 실제론 사미라와 로사의 승부로 도박하고 이를 전시하는 팔레르모, 사미라가 저항한 것은 이 같은 세태이기도 했다. 그들의 뜻대로 승부를 내고 싶지 않음, 형식적인 식구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손자를 사랑함, 그것만큼은 변치 않고 싶었다.     


이후 엠마는 여전히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마깔루조 다섯 자매>를 내놓는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연출은 일련 비슷하다. 여전히 핸드헬드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핸드헬드가 언제나 일정하게, 똑같은 톤으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다. 마깔루조 ‘다섯’ 자매였던 유년 시절이 1부, 네 자매가 되는 중년 시기가 2부, 그리고 세 자매가 되는 노년 시기가 3부다. 자매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핸드헬드의 흔들림은 서서히 줄어가고 얼어붙는다. 1부의 핸드헬드는 소녀들의 경쾌함, 발랄함, 치기 어림에 상응하듯 생기가 넘친다. 더욱이 자아가 커지는 사춘기, 각자의 주장을 물러서지 않은 채 서로에게 날이 선 상황을 형식의 날카로운 운동성으로 가시화한다. 하지만 1부 막바지에서 안토넬라가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2부에서 나이를 먹은 자매들은 안토넬라의 죽음이라는 죄책감, 강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 카티아 같은 경우는 유일하게 가정을 꾸렸기에, 남편 안토니오의 요구에서 옴짝달싹 못한다. 마리아도 동물을 연구하는 ‘직업’에 몸담고 있기에, 예전만큼 발랄할 순 없다. 이렇게 춤추던 그녀들의 발목은 세속에 붙잡히고, 안토넬라의 기억에 현재는 늪처럼 붙잡히자, 그녀들의 자유와 생생한 현재에 상응하던 핸드헬드는 둔해져만 간다. 이러한 2부에서 유일하게 격정적으로 운동이 변하는 장면은 리아와 파누치아가 싸우는 장면이다. 생활에 관한 서로 간의 불화, 안토넬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말이다. 2부의 유일하게 격정적인 운동감마저도 생기나 활력을 대변하진 않는다. 충돌이자 균열이다. 그리고 3부에서 노년이 된 그들은 더더욱 얼어붙는다. 흡사 흔들림이 삶을 만끽하는 움직임이라면, 부동은 죽음에 상응하는 듯이. 그리고 영화는 편집에도 주목할법하다. 등장인물은 오직 마깔루조 다섯 자매로 단출하다. 하지만 적은 수의 주인공이라 한들 서로의 뜻을 한데 모으기는 어렵다. 이를 영화의 잦은 편집으로 보여준다. 하나로 통일할 수 없는 다섯 자매의 치열한 개성을 각자의 숏에 놓이는 얼굴, 한데 잘 모이지 않는 구성으로 보여준다.      


1부에서 마리아는 자고 있고, 다른 네 자매는 깨어 있다. 이후 마리아를 깨워 나갈 채비를 하는 그 순간에도 다섯 자매들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숏에 다섯 자매 모두가 놓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나의 숏에 한 명의 자매만 놓이는 영화의 짧고 빠른 편집은 ‘마깔루조 자매’라는 이름으로 묶이더라도, 결코 관철할 수 없는 개개인의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가 한데 어울려 이것저것 요구하고 다투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시선이 줄곧 다른 자매에게 옮겨감에 영화의 리듬은 부산스럽고 재빠르다. 하지만 비로소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을 때 영화는 느려진다. 그리고 집 안에 놓였을 때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던 자매들, 하지만 바다로 향하는 의견 자체는 일치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숏에 놓인다. 또 3부에서 리아가 죽었을 때, 과거의 존재인 안토넬라와 마리아, 현재의 존재인 카티아와 파누치아가 그녀를 애석하게 쳐다본다. 자매들이 하나의 숏에 놓여서 시선 또한 한데 집중하는 장면, 그녀들의 개성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마음만큼은 동일하다. 망자, 유령, 산자가 한데 모인 이 같은 숏처럼, 영화는 현재에 기억, 망령이 아른거리는 마술적 리얼리즘에도 주목할법하다. 2부부터 자매들의 현실에 안토넬라의 기억과 유령이 공존하고, 3부에서는 리아의 곁에 죽기 직전의 마리아가 서성거린다. 이러한 과거, 유령은 플래시백이나 플래시 포워드가 아니다. 현재에 공존한다. 이러한 숏은 과거, 죄책감, 망자를 품 안에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한편 편집도 잦고 초현실적인 요소들이 있지만, 이렇게 구성된 시퀀스 자체는 짧은 시간을 담아내고, 이는 현실의 시간과 동화된다. 편집은 단지 인물들의 개성과 분절을 드러내기 위함이지, 현실의 시간을 마구 잘라서 왜곡하거나 유리하려는 역할은 아니다. 엠마는 여전히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이제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어둠 속에서 달그락거리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윽고 서서히 다섯 자매들의 형체가 드러나며, 깜깜한 방에서 벽을 긁어내어 구멍을 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매들은 쥐처럼 벽에 구멍을 뚫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매들은 빛이 들어올 때까지 구멍을 더 크고 깊숙하게 뚫어낸다. 비로소 빛이 환하게 들어와 자매들을 비추자 뚫는 것을 멈춘다. 실내, 어둠, 폐쇄적 공간에서 빛, 외부, 개방을 바라는 자매들, 이러한 구멍을 뚫는 시퀀스가 극의 전반을 지배한다. 1부에서 자매들의 부모님은 언급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은 리아, 파누치아가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마리아는 일을 한다. 그녀들이 동생들의 보호자, 부모가 아닌데도 말이다. 부모가 부여한 가혹한 운명에 방치되고 갇힌 그녀들, 그래서 이들은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을까. 외부에서 자매들은 동생들을 보필하면서도 수영하고 연애를 즐길 수 있다. 실내는 자매들에게 강요된 공간이다.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보호자임을, 비둘기를 돌보는 일이 떠맡겨졌다. 하지만 외부에서 그녀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나’를 지중해의 눈 부신 햇살이 밝힌다. 영화의 도입부에선 벽을 뚫는 것뿐만 아니라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되바라진 카티아를 발코니로 내쫓고 문을 닫으며, ‘닫힘과 열림’을 강조한다. 벽의 막힘과 문의 닫힘이 원치 않는 나라면, 벽을 뚫고 문을 여는 것은 바라는 나다. 열어서 해방되고 싶다. 영화 내내 자매들이 키우는 비둘기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은 집의 한구석에서 비둘기를 키운다. 비둘기가 탈출하지 못하게끔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비둘기를 유통하는 남자의 의견에 따라 사료도 제한된다. 비둘기는 곧 자매들과 동화된다. 그래서 안토넬라는 자신처럼 비둘기를 챙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이 열린 모양인지, 비둘기 떼가 군영을 이뤄 찬란하게 비행한다. 비둘기가 평화 및 자유의 상징인 것처럼, 자매들도 문을 열고 바깥으로 널리 나간다. 비둘기가 문을 열고 나가서 비행한다면, 자매들은 지상과 바다에서 춤을 춘다.      


엠마 단테는 연극 감독을 하던 당시에도 리듬감, 율동, 춤, 몸을 강조하던 예술가였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도 문 안에 놓인 상태에서의 신경질적인 움직임 및 서로가 다투는 몸짓을 문밖에서의 자유분방한 율동, 리듬, 표현과 대비한다. 그녀들의 몸은 다른 육체와 부대끼며 충돌이 발생하는 좁다란 환경에서, 사다리 같은 계단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그리고 솔직한 몸은 남성을 사랑해야 하는 강요된 여성을 거부한다. 마리아는 레즈비언으로서 여성 동료와 사귀는 사이다. 그녀들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실내는 부모나 가족에 의해 당연한 것,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 마리아는 여자 친구와 멀어지면서도 다시금 붙잡혀 두 입술을 밀착하고 선택한 접촉, 친밀함을 성취한다. 이러한 몸의 자유를 엠마는 매우 아름답게 포착한다. 본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직접적으로 명시하는 장면은 안토넬라가 비둘기의 모이를 우아한 접시에 담는 장면이다. 안토넬라는 비둘기에게도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르골까지 틀어준다. 외에 아름다움은 파누치아가 립스틱으로 안토넬라의 입술을 칠해주는 것, 마리아가 안토넬라에게 킨더 초콜릿을 내어주는 것 등 하고 싶거나 즐거운 감각 등에 상응한다. 자유로운 존재, 하고 싶은 것을 하며 감각을 누리는 존재가 아름답다. 현재에 춤추는 그녀들의 움직임과 생동감이 아름답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감각, 움직임을 텅 빈 집의 부동, 삭막함과 대비시킨다. 본 작품은 공간을, 특히 텅 빈 곳을 반복해서 포착한다. 자매들이 외출하기 전, 집에서 부산스럽게 준비함에 공간은 생기가 부여됐다. 그녀들의 춤과 몸놀림이 공간에 색을 입히고 온기를 채운다. 하지만 자매들이 외출하여 텅 비자, 공간은 그대로 멈춘다. 자매들은 현재에 참여하지만, 공간은 자매들이 외출한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텅 빈 곳은 2부, 3부에서도 포착된다. 1부에서 그녀들은 현재를 살았지만 2부에서 카티아를 제외한 세 자매는 ‘과거의 집’을 떠나지 못한다. 거기서 안토넬라의 기억에 붙잡힌다. 현재의 집은 과거와 변화가 없다. 1부에서 꽉꽉 채워진 잡동사니, 골동품들은 2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들어와 있어도 1부의 텅 빈 집처럼 멈춰있다. 그것은 자매들이 현재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현재에 참여하던 1부의 자매들에겐 아름다움이 강조됐다면, 2부는 전반적으로 추함이 강조된다. 죽음과 주검을 보이고, 자유와 반대되는 타율을 보고, 심지어 마리아는 암에 걸려 죽어간다. 그나마 다른 자매들이 1부의 얼굴, 체형을 간직하고 있다면, 마리아의 몸은 앙상하게 말라가며 어디론가 빠져가고 있다. 음식을 즐겁게 먹어서 채우지 못하고, 역으로 게워낸다. 그리고 자매들 간의 불화도 극심해진다. 아름다움이 곧 자유, 해방,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음, 이를 위해서 준비하는 일사불란한 질서였다면, 추는 무질서, 억지, 구속에 상응한다. 마리아는 춤을 추고 싶어서인지 발레복을 입지만 춤출 수 없고, 디저트를 어떻게든 먹어보지만 전혀 즐겁지 않다. 그래서 추하게 느껴진다. 2부의 색채는 1부보다 어둡다. 분명 외부의 날씨는 화창한 것만 같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자매들의 눈이 어두운 것일까, 화창한 세상과 달리 그녀들의 삶이 그늘지고 차가운 것일까. 2부부터 어두워진 색채, 3부의 잿빛에 가까운 색채, 이는 심리생리학적인 노화에 원인이 있으랴. 젊어서 미묘하고 섬세하게 색채를 감각하던 동공은 늙어가며 단색조만 구별하기 때문이다. 또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밝히듯 어린아이들이 쨍한 원색을 선호하는 반면, 어른들은 무채색, 단색을 선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습과 유리된 아이들은 원초적인 인류의 선호를 반영하나, 사회와 공동체와 계급이 덧입혀지는 어른들은 튀지 않고 진지한 색채들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색채 변화는 본 작품이 자매들의 시선을 구현한 작품이므로 늙어가고 자유가 사라지는 그녀들의 눈을 반영한 것이랴. 이와 더불어 또 다른 이유를 찾자면 자매들이 죄책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안토넬라와 함께했던 공간에서, 여전히 언니들은 막냇동생에게 해줬던 행동을 반복한다. 초콜릿을 내어주고 립스틱을 칠해준다. 자매들에 의해 안토넬라가 비둘기에게 밥을 주던 접시가 깨지자, 그것을 다시 이어 붙인다. 또 마리아는 춤을 추려고 하며, 카티아는 항상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은 발코니의 어느 한 벽면에 담배를 문지른다. 그렇게 이들은 ‘빛바랜’ 과거, 자신이 해야만 했던 강박, 과거로부터 이어진 습관을 현재에 재현하고 묻히며 살아간다.      


그렇게 죄책감을 곱씹으며, 안토넬라와 관련한 내가 누구였는지를 복기한다. 안토넬라와 무관한 나, 그럼으로써 거짓된 나로 살지 않는다. 자매들은 분명 안토넬라와 관련이 있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2부부터 구멍은 단순히 외부로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토넬라의 비극을 마주하는 창구로 작용한다. 하지만 언니들의 의식은 막내 동생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자매가 구멍으로 마주하는 것은 안토넬라가 계단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의 기억이다. 즉 안토넬라의 죽음이 아니라, 안토넬라가 살아있던 당시를 기억한다. 그녀들은 과거에 책임이 있던 자신으로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후회에 파묻혀서 안토넬라가 곁에 있다고 상상하며 살아간다. 자매들의 삶은 ‘믿음’이다. 여전히 안토넬라가 존재하고, 또 과거와 유사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 그녀들은 보고 싶은 데로 본다. 하지만 영화는 ‘거울’이라는 상징을 사용하며 이를 극복한다. 1부에서 마리아의 육체를 객관적으로 비추던 거울은, 2부에서 암에 걸려 앙상해진 마리아의 육체 또한 여실히 비춘다. 거울은 어린 날처럼 춤추려 하는 마리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시선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의 카메라도 마찬가지다. 하이 앵글 구도로 마리아가 잠긴 욕조를 비추며, 객관적인 그녀의 마르고 창백한 육체를 그대로 반사한다. 3부에서는 리아의 곁에 마리아의 망령이 남아 책을 읽어주지만,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리아의 더 늙은 육체를 고스란히 비춘다. 흡사 영화는 거울처럼 객관적으로 진실을 가리켜야 한다는 듯이, 보고 싶은 데로 보고 믿는 우리의 눈에 객관을 매개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1부에서 그녀들에게 자유의 공간, 삶이 피어나는 공간은 바다였다. 물론 그 바다가 안토넬라의 삶을 앗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필연이다. 삶과 동시에 죽는다는 것, 그리고 현재를 산다는 것, 2부부터 자매는 필연을 외면했다. 그녀들의 삶에서 바다는 보이지 않고, 망자가 살아있다는 착각에 홀렸다. 그리고 마르코나 안토니오, 또 자매들과의 의견 차이에 의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지도 못했다. 3부에서 자매의 집은 더더욱 새로운 것이 채워지지 않는다. 1부에서 자신으로 살던 그녀들은 성인이 되어가며 타인과 기억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고쳐먹고, 지금의 나와 무관한 요소가 잔뜩 채워진 집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모든 잡동사니를 치우고, 무용복과 토슈즈를 신고 죽는다. 그녀가 담긴 관은 해변 방향으로 향한다. 살아서 기억과 함께 사는 우리, 하지만 죽음은 나의 모든 것이 소멸한다. 죽는 우리는 비로소 지상의 모든 책임과 아집에서 해방되어 진정 자유로운 춤을 추리. 그렇게 죽음으로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게 될 우리의 수의는 무용복이어야 하리. 2막의 끝에서 마리아의 죽음이 암시되고 비둘기는 안토넬라의 손에 작은 알을 낳던 것처럼, 죽음은 새로운 가능성을 남긴다. 3막에서 파누치아는 안토넬라의 망령에게 립스틱을 칠해주는 것이 아니라, 닦아준다. 이제는 과거로부터 한 발짝 나아가겠다는 듯이, 과거의 반복이 아닌 현재와 새로운 미래를 살겠다는 듯이. 비로소 비워진 자매의 집, 세월의 흔적과 때가 묻어있지만, 새로운 사람과 사물과 기억이 태어날 '알'을 남기고 떠나간다. 이렇게 엠마 단테는 인생을 고찰한다. ‘나’라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놓인 현재가 규정함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과거로도 구성돼있다. 그 과거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으리. 하지만 이러한 과거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우리는 망령, 유령, 환영을 보고, 현재가 아닌 과거로 퇴행하며 게워내고 빠져나간다. 그러나 현재의 나도 분명한 나다. 현재를 외면해선 안 된다. 우리는 죄책감과 양심이 쿡쿡 찌르는 부끄러움과 함께 현재와 미래로 나아가야 할지다. 후회에 젖어 사는 나는 현재의 자신에게 부끄럽진 않은가. 과거의 죄책감과 현재의 자유는 공존해야 하리, 그것이 과거와 현재를 함께 사는 인간의 진정한 공존이랴.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 믿음에 빠지는 인간의 필연, 부단히 믿음의 바깥으로 나아가다가 다시 믿음의 내부에 갇히는 자매의 인생, 엠마 단테는 인간의 딜레마 또한 분명히 비춘다. 그의 영화와 카메라는 흡사 거울과 같다는 듯, 이를 마주하는 감상자가 자매들과 유사한 강박과 믿음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듯, 현재의 우리는 춤을 추기 위해 발레복을 입어야 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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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21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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