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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26. 2022

로라 완델, <플레이그라운드>

놀이의 규칙, 시선의 늪

로라 완델(Laura Wandel),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 놀이의 규칙, 시선의 늪

“시야가 좁은 사람은 멀리 볼 줄 모르고 따라서 가까이 있는 것을 과대평가한다. 반대로 시야가 넓다는 것은 바로 눈앞의 것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를 볼 줄 안다는 뜻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광장, 회의장, 공공장소… 무수한 사람들의 눈이 오가는 장소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 이유를 우리는 시선의 힘을 진단하여 파악해야 할 것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는 우리가 타자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을 주장한다. 타자가 우리를 쏘아보는 시선에 나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과 야비함, 이를 느끼는 이유는 타자가 순수하게 우리를 배려하며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시선은 우리를 평가한다. 그의 기대, 바람, 뜻, 프레임이 곧 시선에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선이 가득한 장소에서, 그들의 시선으로 우리의 몸과 정신을 인식하고 움직인다. 타인의 시선은 주인이요, 나는 시선 아래서 규정된 노예가 된다. 이러한 시선은 미셸 푸코가 좀 더 객관적으로 연구한 바 있다. 고전주의 시대가 끝난 이후 서구는 보이지 않으면서 감시해야 하는 시선의 기술을 서서히 발전시켰다. 감시 기술은 품행 개선 및 권력 효과를 심층적으로 행사한다. 사회는 구성원을 규범화하고 평가하기 위해 곳곳에 숨겨진 시선으로 은밀히 관찰한다. 감시를 통해 자격을 부여하고 분류하며, 여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을 처벌한다. 우리는 시선을 의식하고 기록되기 위해서 품행 개선을 한다. 이러한 감시는 폐쇄적이고 언제나 바라볼 수 있는 환경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환경의 수용자들은 지속해서 감시되고 있다는 생각에 어색하게 행동한다. 수감자는 동물, 감시자는 왕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선의 감옥은 단순히 교도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선을 피할 수 없이, 규칙적인 시간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 또한 하나의 감시 시설이 될 수 있다. 이에 부합하는 학교가 시선의 감옥, 감시의 현장이 되지는 않을까. 반드시 규칙적으로 가야만 함에 피할 수 없고, 더욱이 비교적 적은 학생 수에 구성원 다수가 서로의 시선에 노출된다. 구성원들은 거의 뒤바뀌지 않으니 특정한 시선에서 해야 하는 행동이 반복되고, 또 어른들의 시선이 미치는 시간은 잠깐이기에 사회화되지 않은 아이들만의 법, 곧 힘의 법이 시선에 투영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가르게 되랴. 이러한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아이는 시선으로 피지배자임이 내면화되지 않을까, 또 누구보다 시선을 의식하는 탈자성을 띠게 되지 않을까.      


1984년 벨기에 브뤼셀 태생의 로라 완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레이그라운드>는 이러한 아이들만의 환경에서 발생하는 감시와 폭력을 고찰한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에서부터 눈에 띄는 격정적이고 현실적인 카메라의 흔들림, 영화의 주체 노라를 치열하게 따라가는 카메라… 벨기에에서 펼쳐지는 이 같은 연출에 우리는 바로 어떤 감독이 연상된다. 바로 다르덴 형제다. 최근 벨기에 청년 감독들에게서 다르덴 형제의 영향력을 배제하긴 어려워 보인다. <걸>로 유명한 루카스 돈트도 그렇고, 본 작품의 로라 완델 또한 다르덴 형제가 다큐멘터리 작업을 전문으로 하던 시절 비롯한 리얼리즘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전문 아역들의 생생한 표현, 특히 노라와 아벨 주변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은 감독의 요구가 최소화된 듯, 흡사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한다. 이 같은 다르덴 형제의 시선으로 완델은 현실적인 학교와 아이들의 삶을 탐구한다. 영화의 롱테이크는 노라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아이들의 시간을 덜 자르고 왜곡을 최소화하여 현실의 시간을 보존한다. 또 아이들의 곁에 숨어서 밀착한 근거리의 카메라로 어른들의 시선에 놓였을 때와는 상반된, 아이들만 놓였을 때 그들이 띠는 숨김없는 표정, 행태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다. 어른들이 파악하고 싶지만 볼 수 없는 학교 안 아이들의 초상을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전달한다. 아이들에게 깊이 밀착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어른들의 시선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비추는 영화의 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자기 얼굴, 친숙한 가족들의 곁에서 떠나기 어려워하는 태도를 가시화한다. 입학이 두려운 노라는 ‘아버지의 딸’, ‘아벨의 동생’이라는 기존의 얼굴을 바꾸기 싫고, 제 얼굴 외부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 이렇게 가정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 노라가 프레임을 꽉 채워 피사체는 잘 드러나지도 않거니와, 그나마 드러난다 해도 포커싱이 명확하지 않아 흐릿하게 포착된다. 노라가 아벨과 아버지 외의 사람들을 보기 싫어하는 시선을 구현하듯 말이다. 외부는 두렵다. 노라가 처음 학교 내부에 발을 디딜 당시, 대상을 명확하게 판가름할 수 없는 불안한 웅성거리는 소음이 점차 볼륨을 높여 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현실에 다가서려는 형식을 표명하지만, 연출은 물질적인 현실성만 구현하지 않고 심리적인 것 또한 가시화한다. 핸드헬드는 분명 현실 속 아이들이 천방지축 뛰어노는 발걸음, 생경하게 외부를 관찰하느라 부산스러운 시선에 상응할 수 있으랴. 이에 더해 본 작품의 핸드헬드는 이들의 심리도 가시화한다.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의 불안,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 이후에는 아이들의 규칙과 어른들의 질서 양자 사이에 끼어 초조해하는 마음 등, 보이지 않는 풍전등화 같은 심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현실의 명도, 채도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칙칙하다. 더욱이 영화에서 진척되는 시간이 결코 적지 않은데, 그 시간 동안 모두 동일하게 우울한 날씨라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이러한 명도와 채도 또한 아이들의 심리를 가시화하는 형식이랴. 낯선 공간, 새로운 사람과 접해야 한다는 두려움, 이에 대한 충격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무너질 것만 같은 불안한 시야를 말이다. 영화의 이 같은 색감은 실제 어린아이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상반된다. 어린아이들은 심리 생리학적으로 다양한 색조와 높은 채도를 선호한다. 특히 아주 쨍한 노랑을, 밝은 원색을 선호한다. 노라도 영화의 말미에 노란 옷을 입고 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밝히듯 세대에 있어선 성인이나 중년, 계급에 있어서 부르주아가 사회적으로 진중한 무채색, 낮은 명도를 선호한다. 사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기 때문이다. 이와 다르게 고채도의 원색과 강렬한 보색을 선호하는 인간의 원초적이고 일반적인 선호를 아이들은 솔직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진솔한 인식이 영화에선 가로막힌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움과 상반된 인위적으로 낮고 어두워진 채도와 명암, 그것은 아이들의 자유분방한 천진함을 가로막는 무언가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랴. 더불어 영화의 주목할 만한 연출로는 초반부의 오버 숄더 숏이다. 두 학생의 어깨 사이로 포착되는 노라의 얼굴, 그녀에게 질문하는 두 친구의 시선에 끼인 듯한 갑갑함을 보여준다.      


또 영화는 편집이 인상적이다. 평형대에서 균형을 잡거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우거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유사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행동이 미처 다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거칠게 잘라버린다. 일반적이지 않은 특정한 환경, 아이들만의 놀이 세계에만 머무를 수 없다는 듯이, 필연적으로 외부 세계의 규칙과 어른들이 개입한다는 듯이, 이에 따라 지속되거나 완결되지 못하는 세계라는 듯이 말이다. 또 거칠게 잘라낸 이후, 앞에 나온 숏과 상반된 숏을 이어내기도 한다. 노라는 평행에서 넘어지거나, 다이빙하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이어지는 숏은 공포가 해소되어 밝고 쾌활하게 뛰어놀거나 웃는 숏이다. 아이들은 낯섦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밝게 성장하거나 고양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학교에서 기존의 현실이나 기우를 거칠게 잘라내며, 격상한 현실로 나아간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운동감은 아이러니하게도 하강이다. 평행에서 떨어지거나, 다이빙하거나, 잠수하는 등 아래로 내려간다. 영화의 운동성도 그렇지만, 모래사장 및 수영장, 바다는 얼마나 깊은지를 아이들이 궁금해 하며, 내용이나 포착된 바에서도 하강이 강조된다. 아이들은 분명 무언가를 배워가지만 그것은 마냥 명랑한 삶은 아니다. 밑으로 침잠하고 묻히면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현실적인 ‘죽음’을 배워간다. '밑'을 논의하는 와중에 병약한 아이가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를 얘기하고, 죽은 새의 장례를 치르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서 하강하지 않게끔 발길질하는 수영을 배우며, 아이들은 죽음으로부터 삶을 배운다. 그리고 영화는 몇 차례의 아이들의 등·하교가 포착된다.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하지만 집에 가서 아이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버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오직 포착되는 소우주는 학교다. 아이들은 어른들과의 생활, 그들이 주도적이지 않은 학교 외부의 생활은 등한시한다. 이를 오직 학교만 포착하는 영화의 편집이 반영한다. 그것은 영화 속 어른의 영향을 배제하는 아이들의 규칙을 보여주는 것이랴. 아이들이 입학하자 환영회랍시고 약한 아이들을 폭행하는 의식, 어른들의 의사가 배제된 그들만의 파티 초대, 그리고 ‘놀이의 규칙’이 강조된다.      


철학자 가다머는 놀이를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진 않지만, 그저 노는 것이 목적으로 이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행위’라 규정한다. 놀이 장소는 현실과 경계를 그어, 외부에 구애받지 않는 질서에 지배되는 완결된 세계다. 역할에 몰입하는 놀이의 참여자들은 정체가 드러나길 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고, 여기에 어른들과 외부의 개입을 거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이러한 놀이의 속성을 따른다. 현실의 아이들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다. 하지만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서 규칙에 따르며, 술래가 되면 눈을 가리고 청각에만 의존한다. 현실의 지식을 따르는 선생님의 눈에 아이들이 들고 있는 죽은 새는 불결하고 치워야할 쓰레기지만, 놀이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시선으론 장례의 대상이다. 외부의 법은 놀이를 무력화시킨다. 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유사한 게임을 할 때, 현실을 따른다면 굳이 움직였다고 해서 정지해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은 외부의 세계가 진지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 놀이의 법에 진지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규칙에 따라 멈춘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따라야만 한다. 따르지 않는다면 노라는 빅투아르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을 수 없다. 그래서 노라는 학교 폭력을 두고 선생님의 중재를 요청하나, 피해자 아벨이나 가해자들은 관여 말라며 반항한다. 노라 또한 처음에는 어른이나 가족의 규칙에 의존하지만, 영화 말미에는 자리를 바꾸라는 선생의 말에 반항할 정도로 어른을 따르지 않는다. 외부를 배제하는 놀이의 이유를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게서 찾아본다면,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프로이트의 성격발달 중 '잠복기'에 해당한다. 남근기까지의 아이들은 제 자신의 성적 충동, 성기에 집착한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에게 집약된다. 하지만 잠복기에 이르러 서서히 성적 충동인 리비도가 ‘잠복’되기 시작하고, 관심은 외부로 향한다. 이제 아이들이 중시하는 것은 성적으로 자극을 느끼는 내가 아니라, 외부와 관계를 맺고 외부가 자산인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복기의 아이들은 관계 유지, 이유도 없는 소속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이러한 놀이에 어른들의 개입을 불허한다. 어른들은 보호자이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노라가 아버지의 두 눈을 동등하게 마주치려면 디딤대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아이 레벨 숏에서 어른들은 로우 앵글이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다.      


또 아이들이 놓인 학교와 외부에서 아벨과 노라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세계는 분리되어 있다. 노라가 입학하던 당시, 아버지는 선생으로부터 보호자는 학교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꾸지람을 듣는다. 어른들은 놀이 규칙에 참여하지 않고 현실의 법에 참여하는데, 그들과 얽히는 아이들은 놀이에서 현실로 추방된다. 더욱이 어른들의 보호에 마냥 의존할 수 없다. 교사의 숫자는 무수한 아이들을 모두 통제하기에 한계가 있다.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거기서 아이들만의 법, 학교폭력이 발생한다. 또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통 그대로 머무른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바뀐다. 당장 노라를 곁에서 성심성의껏 도와주던 선생 아녜스가 전근을 감에 교실의 규칙도 뒤바뀐다. 아녜스와 새로 온 담임선생님의 ‘자리 바꾸기’ 규칙이 충돌한다. 불완전한 규칙에 혼선을 느끼는 노라는 새로운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고집한다. 그래서 불안정한 어른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비교적 안정적인 그들만의 우정을 위해 잠복기 아이들은 놀이에 참여하고 어른들을 차단한다. 어른들, 외부 현실의 영향이 항시 미치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에서 아이들은 그들만의 법, 놀이의 규칙을 점차 강화해간다. 하지만 노라가 놀이에서 말하는 ‘바다의 깊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진짜 바다의 깊이를 묻는다. 놀이의 규칙이 부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랴. 놀이의 규칙은 아이들의 개별성을 존중하기 보다는, 놀이세계가 요구하는 보편성에 들어맞길 바라며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띤다. 노라는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신발 끈을 묶지 못했다. 그걸 보고 다른 학생들이 뒷말을 한다. 또 여학생들은 축구하는 소년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선입견이 있다. 물론 인종차별주의자가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어떤 개념인지 알지 못한다. 단편적으로 그들이 나쁘다는 것만 안다. 또 아버지가 따라다니는 노라, 아벨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왜 너희 아버지는 일하지 않느냐, 게으른 것이 아니냐며 질책한다. 이에 노라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아빠’를 갖고 싶다며 아빠한테 일을 하라고 다그친다. 그리고 학교폭력을 당하며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진 아벨은 용변실수를 한다. 잠복기 아이들은 퇴행적 실수를 하고 냄새가 나는 유아적인 아벨을 허용하지 않고 따돌림 한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기준에서 판단하는 시선, 노라는 아벨의 남매라는 이유로 집단에서 배제된다. 최후의 따돌림은 백인 집단과 다른 무슬림 이민자의 자녀인 이스마일이다. 이러한 집단에 참여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본인이 약자, 피해자가 되는 것도 감내한다. 잠복기의 아이들은 그 어떤 시기의 사람들보다 소속, 그것도 또래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대사처럼 도움을 주면 줄수록 상황은 나빠진다. 외부에서 도움을 받는 존재는 내부 집단과 다른 존재임이 눈에 확연해져, 이에 약자로서도 집단에 참여할 수 없게끔 그들만의 사회에서 도태된다. 이렇게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고,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아이들만의 법을 진단해보자. 학교에 오기 전까지 아이들의 경험은 제한된다. 노라에게 인간관계는 아벨과 아버지로만 국한되고, 홀로 친구들을 사귄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풍부하지 못하다. 다양한 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로소 학교에서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 감독이 포착하는 체육시간의 수영장, 균형 등은 그간 노라가 서있었던 환경이 절대적이지 않았음을 체험시켜준다. 그곳에서 팔과 다리를 다르게 사용해본다. 몸이 새로운 경험을 한다. 또 놀이터에서 놀다가 눈에 들어간 모래는 새로운 고통을 안겨다준다. 놀이를 하며 눈을 가리고 청각에만 의존하는 경험을 해본다. 이에 따라 제한적인 선입견에 닫혀서 얼어붙었던 노라의 완고한 표정이 서서히 녹아내리며 부드러워진다. 조금씩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학교와 친구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던 노라는 오직 자신만을 바라봤다. 친구들이 노라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외부를 바라볼 여유, 잠복기로 나아갈 준비가 덜 돼 있었다. 오직 노라만 포착하는 카메라가 이를 반영한다. 하지만 서서히 노라는 외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비로소 급식시간에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띄며 외부의 시각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렇게 폭넓은 경험을 하기 전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던 놀이 규칙이라면 얼마나 협소하고 원초적일까. 약자와 다름을 포용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규칙에서 약자의 시선은 무기력하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과 규정을 항변할 수 없고, 오직 가해자만 시선으로 규칙을 강제하고 규정할 수 있다. 초반부 아벨은 유약한 노라와 함께 묶여 약자로 규정되고 싶지 않았다. 또 노라가 아벨을 바라보면, 아벨은 가정으로 회귀하게 된다. 노라는 아벨을 학생, 친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빠’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라에 의해 학교의 타자이자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할 수 없는 약자임이 규정되고, 외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폐쇄적인 화장실, 쓰레기통 같은 공간에서 강한 아이들이 반복해서 쏘아보며 약자임은 내면화된다. 또 누군가의 시선에 의존하는 사람이 약자다. 영화의 초반부, 앞서 언급했듯 노라는 외부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자신을 지켜주는 아벨과 아버지가 바라보는 시선만이 익숙했고, 그들만 바라볼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앞으로 걸어 나가지 못하고, 계속 아벨이 있는 뒤를 돌아본다. 이렇게 남근기까지의 시선이 자신과 혈육에게 국한되어있다면, 잠복기부터 비로소 시선이 외부로 향한다. 체육선생은 평형대에서 노라에게 ‘앞을 보라’며 외부를 볼 것을 지시한다. 이렇게 외부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시선이 내게 어떻게 미치는 지, 그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상대를 규정할 수 있다. 아벨과 아버지에 의해 가족으로 규정되던 노라는, 이후 능동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며 오빠에게 죽거나 사라지라며 역으로 규정한다. 이에 아벨은 점점 더 위축된다. 또 체육선생의 시선이 아이들을 향해 다양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은 내 몸에 반영된다. 이렇게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 노라는 아벨을 괴롭히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감히 항의할 수 없고, 아벨 또한 그저 묵묵히 듣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곧 규칙과 집단을 대표하기 때문에 추방당하지 않고자 말이다. 이렇게 시선을 의식하느라 자유롭고 진실하게 바라보는 것을 중단한다. 노라는 친구들과 눈 가리기 놀이를 하다가, 쓰레기통에서 괴롭힘 당하는 아벨을 목격한다. 하지만 다시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자신이 본 것을 침묵한다. 아벨과 엮이면 아이들은 약자인 아벨에 대한 선입견으로 노라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이 세계에 입각해서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영화 중반부에 외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노라는 아벨이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자, 앞으로 걸어가는 규칙에 역행하고 뒤로 향해 선생님을 불러 형제를 돕는다. 학교에 적응하기 전까지는 과거가 그리워서 뒤를 돌아 봤다면, 이제 양심에 따라 뒤를 돌아본다. 놀이의 규칙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겠지만, 괴롭힘 당하는 약자를 봤다면 우리는 시선에 마땅히 연민과 책임을 느낀다. 그래서 아벨이 놓인 쓰레기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아벨에게 폭행당한 이스마일이 신경 쓰여 계속 뒤를 돌아본다. 당장의 이익인 아이스크림을 외면하고 말이다. 결말에서도 노라는 놀이의 규칙에 참여하며 이스마일을 폭행하는 아벨을 말린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부당한 놀이를 멈추고, 상대를 재단하거나 규정하지 않으며, 진실을 바라봐야 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잠복기는 자립심이 서서히 높아진다. 그렇기에 어른들의 규칙에서 벗어나 놀이 규칙을 만들려는 성향도 강해지고, 놀이세계에서 아무리 해를 입어도 어른들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홀로 이겨내고자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마냥 홀로 서기에는 불완전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이들은 경험이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단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전체주의적인 속성을 강화한다. 그래서 아이들만의 규칙은 많은 다양성을 포용할 수 없다. 어른들이 아이였을 당시, 인류가 아이였을 시기의 과오를 반복하는 셈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움이 필요하다. 영화에선 노라에게 신발 끈 묶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이들, 수학문제를 도와주는 아이들처럼, 아이들끼리 충분히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상호보완을 강조한다. 아이들은 다만 단편적이기에 전체주의적 속성을 띠는 것이지, 진정 폐쇄적이고 닫혀있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띠진 않는다. 서로 아니꼽게 보더라도 금세 다시 친구가 되는 것처럼, 마냥 놀이세계에만 매달리지 않고 외부로 시선을 돌려 진실을 확인하는 것처럼, 이들의 사고는 분명 열려있고 말랑거리며 시선은 유연하다.      


새로운 경험과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아이들 스스로 규칙을 보완하게 만든다. 어른들은 그들 스스로가 규칙을 보완하게끔 단지 조력해야 한다. 어른들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바라보고 고백한 노라가 앞으로도 시선에 책임을 지고, 본 것을 외면하지 않도록 조언해주는 아녜스처럼 말이다. 놀이의 규칙, 소속감에 눈이 멀어 피해자였던 아벨은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놀이의 규칙에서 멀리 떨어져서 이를 관찰하던 노라는 이윽고 아벨을 말린다. 이와 더불어 죽음을 배우는 노라는 이스마일의 목을 조르는 아벨을 경각하기 때문이다. 이후 아벨은 이를 수용한다. 더 이상 이스마일을 괴롭히지 않는다. 어른들의 개입 없이도 새로운 경험을 향해 열려있는 아이들의 유연함은 충분히 자정작용이 가능하리. 그리고 이것이 어른들을 극복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 어른들은 비교적 이상적이다. 따돌림 당하는 아벨 또한 파티에 초대하려는 친구의 어머니가 그렇다. 하지만 약자, 다름에 대한 혐오, 특히 이민자 이스마일에 대한 혐오가 그냥 발생한 것일까. 백인의 시선이 만연한 벨기에의 사회를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 감히 속단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인종차별주의자, 실업자 개념을 빌려오는 것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분명 학교 바깥을 모방한다. 또 부모가 개입할 수 있는 것도 백인의 특권이 아닐까? 아이들의 하굣길에 이스마일의 부모가 늦어서 소년은 방치되는 것처럼,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약자, 이민자들은 아이들을 조력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스마일을 위해 위로하고 아벨과의 관계를 중재하는 노라의 시선이 우리 시대에, 그리고 ‘백인만의 법’에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게 완델은 다르덴의 방법론으로 자립심이 커져가고 소속감, 외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가는 잠복기의 아이들이 형성하는 놀이 세계를 고찰한다. 이를 어둡게 만드는 폐쇄적인 놀이세계에서 증폭되는 폭력적인 시선을 고찰하고, 이를 다양한 경험의 부재에서 비롯한 문제로 진단한다. 이러한 다양에 대한 관용이 부족한 것, 다양한 경험의 배타는 비단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좁은 인식, 그러나 이들의 열린 태도는 분명 영화를 바라보는 성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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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52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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