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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1. 2022

션 베이커, <레드 로켓>

환상의 구멍

션 베이커(Sean Baker), <레드 로켓>(Red Rocket) - 환상의 구멍     

“때때로 성기는 나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나한테 기생해 살면서 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고,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이빨로 내 살에 달라붙어 사는 우둔한 동물인 것 같았다.” -존 맥스웰 쿳시-

우리의 성욕을 자극하는 스타들은 위인전에 묘사된 인간의 삶이나 성취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위업도, 웅대한 이상도, 전능한 희생정신도 없다. 다만 우리의 애욕, 정욕을 자극하고 불타오르게 할 뿐이다. 그것이 스타들을 칭송하고 추종하는 이유의 전부다. 그것만으로 스타를 숭배할 수 있는 이유는 리비도가 곧 인간 정신 과정의 전부이기 때문이랴.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정신 과정의 흐름이 곧 쾌락 원리에 의해 자동으로 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정신 과정은 쾌락을 가리킨다. 흥분의 양이 증가하면 불쾌하고, 감소하면 쾌락으로 향하기에 정신 과정은 언제나 흥분을 낮추고자 노력한다. 물론 정신 과정은 ‘자기보존욕동’에 의해 ‘현실원리’가 ‘쾌락 원리’를 대체하기도 한다. 또 우리의 에너지가 유래하는 ‘욕동충동’은 오히려 흥분을 고조시켜야 발생하기에, 욕동충동이 정신 과정에 역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정신 과정의 잠시 유예일 뿐,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신 과정은 흥분을 해소해 쾌락을 맛보기 위한 욕구가 꺼지지 않는 불과 같다. 스타들은 분명 현실원리에도 무관하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욕동충동과도 무관하다. 다만 언제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쾌락 원리를 자극하여 정신 과정에 만족을 주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환호를 받는다. 하지만 그래서 스타의 운명은 예상할 수 없다. 한때 반짝거렸던 스타의 용모가 충족되면 하나의 의지처럼 질려버릴 수도 있고, 나이를 차츰 먹어가며 더 이상 흥분을 해소하지 못하고, 오히려 추와 늙음이 몸에 쌓여가 흥분과 불쾌를 고조하는 존재가 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래서 스타의 자아는 찬란했던 과거를 갈망한다. 자아는 보통 나로 여겨지는 요소들을 반복하며 영원회귀를 이루므로, 그래서 스타는 오색 찬연하던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애쓴다. 한때 감당할 수 있는 내부의 자극만을 충족하던 스타들은, 다시 반짝이고자 내가 감당키 어려운 외부의 자극까지도 감내해야 한다. 한때 스타를 신봉하는 무수한 신도들은 언제나 스타를 위해 살았으나, 돌아선 그들은 배신하며 스타에게 충격을 안긴다. 그래서 이들은 돌아가길 바란다. 션 베이커의 <레드 로켓>(발정 난 수캐의 성기에서 비롯한 속어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발정 난 사람을 가리킴)에서 등장하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포르노 스타도 그렇다.     


1971년 뉴저지 태생의 션 베이커는 꿈과 환상, 국가의 풍요와 호화로움, 정의 등을 비추는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그 이면을 비추는 영화감독이다. 베이커의 특징으론 전개에 따라서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비추기, 민족의 용광로로 불림에도 불구하고 타자들이 처하게 되는 수난, 그리고 할리우드가 비추지 않는 빈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태도를 꼽을 수 있다. 보통 베이커의 타자들은 남성의 경우에는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의 불법 체류자나 마약상·포주고 여성들은 <스타렛>,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처럼 포르노 배우, 매춘부다. 그리고 <탠저린>에서 여성 트랜스젠더들이 등장하는데, 그녀들이 모방하는 것도 다름 아닌 매음이다. 베이커가 포착하는 빈자들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위법적인 노동은, 그들에게는 보편이 되어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아이들도 어머니의 춤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 채, 아무렇지 않게 따라한다. 베이커는 이를 특별히 연민 어린 시선으로 포착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이요 당연하다는 듯이 포착한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시작은 명랑하다. 제 삶에 만족은 못하더라도 주인공들은 대체로 당당하기 때문에, 또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처럼 그 표면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지만 빈자, 타자로서 처하는 딜레마와 상승할 수 없는 계급에 의해 영화는 차츰 어두워진다. 이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처럼 계급 이동을 꿈꾸거나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흡사 나를 끌어당기는 늪처럼 더욱 수렁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를 타개하고자 불법은 반복되는데, 감독은 다만 그들 간의 연대를 강조할 뿐이다. <스타렛>에서 서로 결핍이 있는 젊고 늙은 존재들의 연대, <탠저린>에서 유사한 처지에 처한 두 친구의 화해 등이 말이다. 무엇보다 션 베이커의 세계에서는 아이들이 줄곧 등장하는데 순수한 그들은 어른들의 안티테제로 작용한다. <프린스 오브 브로드웨이>에서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서, 제 부모한테 버려지고 떠넘겨진 한 아이는 책임을 모르는 어른에게 깨달음을 제공한다. 또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아이들은 제 의지와는 무관하게 절망에 처했다. 이와 동시에 암울한 세계에서 어른들이 가진 보편성을 거울로 반영한다. 어쩌면 그들은 명랑해야 한다는 것을 따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아이들은 많은 어른이 잃어버린, 순수하게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요, 제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를 위해 타협하고 싶지 않은 자다. 그래서 우정과 바람을 위해 아이들은 달려 나가고, 베이커는 이를 패슽트 모션으로 포착하여 진정한 꿈을 역설한다.   

   

미국의 너절한 이면을 드러내는 작가적 색채가 이어지는 신작, 션 베이커가 항상 강조하던 성이 주된 추동이 되는 신작, 하지만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는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탠저린>은 가장 값싼 카메라라 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적지 않은 누구나 쥐고 있는 아이폰으로 촬영되었다. 가장 보편적인 매체로 보편집단에게 배척받는 타자들을 포착함으로써, 형식으로 주변부의 타자를 포용하고 불러들였다. 하지만 본 작품은 동시대에 가장 비싼 매체라 할 수 있는 16mm 필름이 선택된다. 20세기, 그것도 1900년대 초기의 매체, 작금에는 고루하고 낡은 매체, 흐릿하고 텁텁해 보이는 매체, 16mm 필름이 가리키는 마이키는 여전히 매체가 지칭하는 과거에 흠뻑 젖어있다. 초기 영화 시기의 2.39:1의 화면비는 덤이다. 그는 자신의 지나가 버린 전성기를, 불러오기에는 너무나도 값비싼 영광을 동시대에 여전히 불러오고자 한다. 렉시나 릴리를 희생하고, 레온드리아의 몫을 훔쳐 오며, 레일리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말이다. 16mm 매체로 포착된 마이키는 '퇴물 스타'라는 그의 현실을 너무나도 적절히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 속 트럼프의 연설 장면이 직접적으로 인서트되는 것처럼, 정신적인 흐름이 과거로 회귀하는 텍사스 및 미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보여주기에 효과적이다. 16mm 필름으로 텍사스의 경제를 지탱하는 발전소, 공업 단지들이 포착되긴 하지만, 그 색채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빛바랜 흐릿한 색조로 구현된다. 또 영화 속 남성 우월적 태도는 최근 불거진 텍사스 낙태 금지법 여파를 관통하는 듯하다. 외에 영화는 도입부의 뮤직비디오 같은 연출에 주목할법하다. 단순히 음악에 영상이 결합해서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 아니라, 음악의 가사와 리듬, 박자에 맞춰 편집이 이뤄지기에, 즉 음악이 우선시되어 영상을 좌우하기에 뮤직비디오처럼 보인다. 뮤직비디오 양식으로 포착된 마이키는 마치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로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가상으로서 음악은 퇴물 마이키의 현실을 의기양양한 태도로 아름답게 포장함으로써 거짓에 일조한다.

     

하지만 베이커는 이러한 허상을 연출로 깨트린다. 렉시와 릴리에게 빌붙고 빌어야 하는 퇴물의 ‘현실’을 비전문 배우들의 기용, 음악 대신 현실 속 바람 소리와 적막을 강조하며, 비교적 긴 호흡의 시퀀스나 롱테이크를 통해 보여준다. 션 베이커의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어떠한 환상도 품게 하지 않는다. 감상자가 좋아할 만한 배우들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너무나도 삭막하다. 그것이 곧 현실이다. 하지만 베이커는 이러한 현실에서 일련의 허구성을 추구할 때가 있다. 현실에서 일련의 신비를, 꿈을 실현하는 것은 바로 ‘성교’다. 현실에서 유일하게 허용되는 비현실, 베이커는 이를 가상임을 환기하는 적나라한 줌인 및 줌아웃으로 포착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다가서고자 하는 것, 한편 성교는 찰나이기에 언제나 멀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쾌락은 짧게 선사되고 내내 지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정사는 아주 재빨리 잘려 나간다. 외에 영화는 션 베이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헤드룸이 강조되는 개인의 초상이 특징이다. 그것은 남편으로서 익히 있어야 할 마이키가 언제나 방황하고 존재하지 않는, 그를 잃어버린 렉시의 상황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도입부, 포르노 스타로서 마이키, 그리고 렉시의 남편으로서 마이키가 포착된다. 양자의 마이키 모두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이러한 마이키의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베이커는 버스 등받이 헤드쿠션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헤드쿠션이라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고 밤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우주먼지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존재, 한때 주목받았다가 망각되어 티끌로 되돌아간 존재, 이윽고 잠들어있는 마이키가 포착된다. 만인의 의식에서 잠들어있을 존재, 그는 서서히 깨어난다. 그는 다시금 사람들에게 기억될 것을, 먼지로부터 유용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텍사스로 향하는 것이랴. 하지만 그 누구도 마이키를 반기지 않는다.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포르노 스타는 우리의 리비도를 자극하는 자다. 우리의 리비도는 환상을 바란다.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비도를 탐구한 카를 융은 ‘환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때 현실적 타당성을 지녔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것, 현존세계를 몰락시키고 더 고풍스러운 체계를 들어서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이 바로 환상이다.      


즉 익히 가능하다면, 소유하고 있다면, 이미 현실체계라면 그것은 환상으로 바라지 않는다. 한때 마이키는 누군가에게 불가능하여 실현하고 싶은 욕망이었으랴. 여전히 현실에서 쉬이 찾아보기 어려운 그의 근육질 몸은 젊은 날의 그가 얼마나 인기 있었을지 가늠해 볼법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브라운관의 시대에서 SNS의 시대로 이행한 작금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천문학적인 추종자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에 비한다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는 늙었다. 몸은 여전히 근육질이지만, 얼굴은 평범한 중년 아저씨일 뿐이다. 젊음은 희소하고 짧아서 우리가 바라는 불가능이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쇠락은 익히 가능한 것이기에 환상으로 삼지 않는다. 또 그는 돈이 없다. 집도 없다. 릴리와 렉시에게 빌붙어야 하는 처지다. 한때 트로피가 많았고, 식기세척기를 사용했다고 주절거리면 뭐 하나, 작금에 그는 트로피는커녕 취업조차 할 수 없고, 손으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일련의 사건에 연루되어 텍사스로 도망쳤다. 그리고 릴리가 즐겨보는 TV쇼에 유사한 사건이 송출된다. 마이키는 그 TV쇼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나 다 추하고 악하기는 쉬우니, 그는 환상으로 TV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통속으로만 등장할 수 있다. 집도 없고, 취업도 할 수 없고, 주어진 것이 오직 몸일 뿐이며, 늙어가는 것은 대다수 인간에게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 대상을 두고 우리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마이키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다. 내쉬에게 얻어터지는 루저가 아니라, 레일리를 쟁취한 위너라고 자신을 속인다. 방종하게 모든 것을 내팽개친 탕아가 아니라, 병약한 어머니를 짊어지는 효자를 연기한다. 인기 없는 퇴물 스타가 아니라 렉시와 레일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기남이길 바란다. 자신의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계속 되뇌면서, 여전히 환상의 대상이기를 갈구한다. 하지만 거짓말을 일삼으며 사유지를 제 것 마냥 침범하니, 되돌아오는 것은 현실의 살벌한 총구다.     


또 환상은 자신의 현실에 따라서 변화한다. 도입부에서 마이키의 환상은 쾌락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급박한 자기보존욕동이 그의 환상이었다. 릴리와 렉시에게 사정사정해서 집에서 거주할 수 있는 것, 취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환상이었다. 그렇게 집도 없이 떠도는 자가 집이 생기고, 발로 떠돌던 자가 자전거가 생기니, 자기보존욕동은 해소되고 쾌락 원리가 차오른다. 릴리와 렉시의 별 볼 일 없는 집이 아니라, 레일리의 호화로운 별장과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연상케 하는 휘황한 놀이동산에 이끌린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자전거를 쥐고 나니, 이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차가 제 손에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직까지 렉시와 마이키는 부부다. 부부이긴 하지만 마이키가 렉시를 떠났기에, 그를 받아줄지 말지는 그녀 손에 달렸다. 마이키가 그녀의 집에 거주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다. 하지만 렉시의 집에 거주하고, 또 그녀와 성교도 나누니, 슬슬 그녀를 천대하기 시작한다. 이제 법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한 ‘미성년자’인 레일리를 탐한다. 하지만 이렇게 가능해진 것은 결코 마이키의 몫이 아니다. 도넛 가게에 다른 인부들이 들어오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마이키의 현실이다. 처음 렉시의 집에 갔을 때 자신의 셔츠도 없어서 렉시의 것을 빌려 입은, 현실 속 확고한 자신의 것이 없어 빌려서 사는 빈곤한 존재가 바로 마이키다. 그는 스스로 돈을 번다고 착각하지만, 이는 레온드리아가 마이키에게 기회를 줬기 때문이요, 심지어 그는 레온드리아의 몫을 횡령하고 있다. 빌려 입은 것, 빌려서 거주하는 것, 타인의 몫을 제 것이라 착각한다. 실상 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후반부에 나체로 내쫓기는 것이 그의 적나라한 현실임에도. 그는 더 이상 타인의 환상을 자극할 수 없었기에 텍사스로 되돌아왔다. 환상의 세계,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로부터 말이다. 텍사스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노동과 생산에 집중하는 세계가 텍사스다. 영화에서 언제나 마이키의 뒤편에는 발전소와 공장지대가 빽빽이 들어서 있다. 또 텍사스의 이데올로기는 성에 보수적이니, 성과 환상에 적합한 마이키의 이력은 텍사스에서는 별 도움도 되지 못한다.      


마이키는 텍사스에서 나고 자라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데이비스라는 성과 그가 포르노 세계에 입문하며 후천적으로 작명한 성인 세이버가 있다. 세이버는 sex를 아나그램한 것이다. 마이키가 취업 도움을 받기 위해 기관에 갔을 때 공무원은 데이비스와 세이버, 둘 중 어느 성을 사용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는 답하지 못한다. 텍사스의 데이비스, 캘리포니아의 세이버,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는 빈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것은 몸이다. 그리고 몸이 주어진 인류는 이러나저러나 리비도에 지배된다. 카를 융이 말하길 인간의 언어는 수많은 에로스적 은유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성욕과 관계없는 내용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성애와 전혀 관련 없는 사물에도 성애의 상징을 투영하고 연상한다. 마이키는 릴리와 렉시를 달래기 위해서 도넛 가게에 간다. 그가 처음 텍사스로 돌아왔을 때 도넛은 자기보존욕동을 위한 음식이었으리. 하지만 서서히 배가 차고 생활이 안락해지니, 도넛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도넛 가게는 레일리의 공간, 마이키의 남근을 삽입할 어떤 구멍, ‘하얀 크림’이 채워질 어떤 공간이다. 생활이 안정적으로 변화한 마이키는 렉시와 성교하며 그녀의 얼굴에 레일리를 상상하고, 부인 대신 레일리와 놀이공원에 가서 롤러코스터를 탄다. 롤러코스터가 급락하는 것처럼, 인생의 추락을 맛보았을 마이키, 하지만 거세할 수 없는 리비도는 다시 레일리와 함께 성의 환상을 향해 상승하고자 한다. 마이키가 말하는 '구멍에 빠졌다'는 대사, 인류는 리비도란 구멍에 일찌감치 빠져있는 형국이다. 노동의 공간인 도넛 가게에서 자연스레 성기를 움켜쥐고, 손님이 찾아오자 천연덕스레 태도를 뒤바꾸는 그들은 구멍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구멍에서 자기보존을 위해 시치미 뚝 떼는 것이랴. 레일리는 학업 성적이 좋은 학생이다. 이러한 그녀가 마이키에게 유혹당하는 것은 제 자신에게 부족한 성애, 텍사스에서 불가능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환상임과 동시에,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몸과 연관되리. 마이키가 결국 돈을 버는 것도 생산적인 발전소나 공장이 아닌, 소모적인 쾌락의 보조물인 마약 밀매가 아니던가. 우리는 몸, 그것도 쾌락 원리를 넘어설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욕망은 짧고 찰나적이다. 유일하게 이들의 정사가 조금은 길게 보존되는 숏이 있는데, 바로 레일리가 마이키와의 성교를 촬영하는 장면에서다. 짧게 나타나 증발해 버릴 성교, 인간에게 오직 찰나만 허용되는 젊음을 길게 붙잡고 보존한 영상에 사람들은 그리도 열광한 것이랴. 그런데 영화에서 매달리는 것은 젊음과 성만이 아니다. 남성도 여성이 매달리는 대상이다. 분명 렉시는 다시 돌아온 뻔뻔한 남편을 증오한다. 하지만 릴리는 어딘지 모르게 그가 돌아와 주길 바라는 모습이었다. 이후 릴리는 똑같이 성과 관련된 노동을 해도 마이키는 위험에 노출되지 않지만, 여성인 렉시는 위험에 처했다고 밝힌다. 그래서 여성 둘이서만 사는 집을 보다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그를 허용한다. 또 레온드리아가 마이키에게 유통을 맡긴 이유도 성적인 통념과 관련되리. 하지만 이는 마이키의 능력이 아니다. 마이키가 릴리와 렉시의 집에 그나마 얹혀살 수 있었던 이유는 남성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의 결과다. 또 집을 지니고 대마초를 생산하는 쪽은 릴리와 렉시, 그리고 레온드리아다. 마이키는 그녀들에게 얹혀사는 형국이며, 레온드리아가 거느린 아들들도 핫소스 하나 못 찾고 일 처리도 영 시원찮은 모습이다. 그들은 이데올로기가 자신들을 위대한 남성으로 포장하는 환상에 빠져 있다. 마이키와 레일리의 관계도 그렇다. 마이키는 레일리를 가르친다고 생각하지만, 레일리 스스로 능동적으로 성에 관심을 보인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성공한다면 마이키가 데려가서가 아니라, 레일리가 스스로 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랴. 하지만 텍사스라는 남성 우월적 공간, 포르노 업계에서도 남성 배우의 공을 여성 배우보다 높게 포장하는 언술 때문에, 남성들은 불가능한 것을 자신이 진정 실현한 줄 아는 망상에 빠져 있다. 이러한 망상을 두고 카를 융은 내향 상태, 즉 환상에 침잠하는 상태가 짙어지면 현실에서 멀어지는 정신장애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영화 속 인물들의 정신 상태가 바로 그렇다. 자신이 참전 군인인 줄 아는 로니는 용맹하고도 우락부락한 남성성을 요구하는 텍사스에서 살아남기 위한 망상에 젖어 든다. 마이키는 한때 가능했던 것과 지금 가능했던 것을 분간하지 못한다. 이들이 영화 속 현실에 물의를 일으킨다. 환상은 사악하다. 거짓말하고, 기존을 파괴 및 위반하며, 현실에 집중하지 않으므로, 현실에서 불가능으로 규정된 금기를 기어코 위반하므로, 두 몽상가가 사악한 환상에 눈이 멀어 운전한 결과가 바로 ‘연쇄 추돌 사고’다. 이후 로니는 현실을 책임지지만, 마이키는 이를 회피한다. 현실을 책임지며 그 무게를 감당하는 로니는 숭고하나, 현실에 무책임하고 환상에 무절제한 마이키는 저속하다. 영화는 무책임한 그의 방종과 저속함을 시원하고도 평화롭게 자전거 타는 숏으로 포장하며, 아름다운 환상이 현실에서 유리된 것을 경고한다. 환상은 현실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다수이기에, 현실의 피해를 담보로 한다. 마이키와의 환상을 위해 도넛 가게를 그만둔 레일리는 실현을 확신할 수 없는 환상 때문에 현실을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허황된 것을 아름답게 포장해선 안 된다. 제 마음대로 찾아와서, 또 제 마음대로 떠나려는 마이키, 그의 방종한 환상의 여정에 렉시와 릴리는 마침표를 찍는다. 마이키의 여정은 페이드아웃으로 거칠게 잘려 나가고, 이후 펼쳐지는 장면은 레온드리아의 돈을 횡령한 것이 탄로 나는 현실, 옷도 자전거도 없이 나체로 뛰고 걸어야 하는 공핍한 진실이다. 영화는 나체로 뛰는 마이키를 도입부의 뮤직비디오 같은 연출로 다시 포착한다. 아름다움은 마이키의 귀환을 거짓으로 변호하는 수단이 아니라, 적나라한 진실을 두고 기능해야 한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마이키의 거래, 즉 자신이 외면하고 싶은 더러운 일은 포착되지 않았다. 그래서 환상에 젖어 들 수 있었으랴. 하지만 레온드리아와의 대화에서 그 모든 것이 탄로 난다. 베이커의 영화는 이를 포착하기 위해 봉사한다.     

 

물론 인간은 다시 환상을 향해 고개를 치켜세운다. 결말, 헤일리의 별장 앞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마이키, 과연 그것은 현실일까 상상일까,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빈곤한 자신, 레일리에게 의존하는 자신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직시하지 않고, 환상으로 눈을 돌릴 뿐이다. 육체가 있는 한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션 베이커는 16mm 필름과 2.39:1의 화면비라는 고전 할리우드 양식을 빌려와, 현재에서 과거라는 환상을 구축한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매개하는 허황한 환상을 파괴하고 본 형식으로 현실을 매개한다. 그가 파괴하는 환상은 매체가 가리키는 시대의 예술이 담고 있는 환락, 쾌락의 환상임과 더불어 남성성의 환상이다. 그들 자체로는 빈곤한데, 그들을 과대 포장하는 이념을 까발린다. 베이커는 허황한 것을 약속하고 포장하는 환상을 해체하여 빈곤이란 진실을 매개한다. 션 베이커의 세계 중 아이들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진 세계, 아이와도 같은 순진함, 순박함, 순수가 사라진 세계는 매우 염세적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없고, 모든 행위의 이면에는 숨은 악의가 내재해있다. 또 그가 탐구하는 쾌락의 환상, 리비도는 필연이요, 쾌락 원리가 인간의 기둥이 되어 지탱하는 만큼, 인류는 리비도에 트로피를 선사하고 부도 안겨준다. 하지만 더 자극적인 것을 바라고 위반을 부추기는 리비도의 환상은 내가 가진 것을 등한시하고 권태롭게 만들며, 끝끝내 환상은 현실을 배반할지어니, 베이커는 현실에 사악함만 남기는 리비도를 경계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만을 바라보는 현 미국 사회의 암담한 현주소를 경고한다. 다만 베이커가 늘 탐구해온 리비도라는 요소를 제외한다면, 텍사스라는 공간이나 남성-여성의 젠더에서의 위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깊지 못하여 이전 작들보다 통찰이 다소 얕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평면적인 구도는 환상에 매몰되어 깊게 바라보지 못하는 인물들의 시야를 보여주는 것 같으면서도, 감독과 감상자가 바라보는 인물들조차도 피상적인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듯, 이전 작들을 넘어서지 못한 깊이감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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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601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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