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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08.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브로커>

자본 너머의 중매

고레에다 히로카즈(Hirokazu Koreeda), <브로커>(Broker) - 자본 너머의 중매     

“인류가 만든 힘이 인류의 가장 위험한 적이 되었다.” -에리히 프롬-

복중 아이와 엄마는 탯줄로 이어진다. 그들은 둘이면서 하나다. 하지만 아이가 세상에 나와 탯줄이 잘리며 하나였던 이들은 둘로 나눠진다. 인간의 책임, 양심, 모성과 부성은 탯줄 없이도 아이를 부모와 이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부모와 아이를 잇는 정신적인 탯줄이 불발하는 경우가 있고, 이에 의해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이어진다. 베이비박스는 피로 연결된 탯줄이 끊어진 아이가, 비록 혈은 다르지만 연민과 동정, 책임을 가진 어른에게 새로 이어질 수 있는 끈의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다. 일반적인 양육과 거리가 먼, 하지만 통속과 편견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가 기존의 부조리를 걷어내고 반성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니, 한국으로 향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브로커>를 통해 포착하는 것도 바로 베이비박스에서 시작되는 인연이자 반성이다. 1962년 도쿄 네리마구 출신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는 아이 영화, 가족 영화, 진실의 탐구 등의 테마로 유명하다. 일단 아이 영화로서 순수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지식의 보고, 또 어른들의 초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반성의 단초를 제공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처럼 재기발랄한 아이들의 상상, 시선, 바람을 그려내고, 높은 시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또 다 커버린 성인들이 잊어버린 이타심을 깨우쳐준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홀로 남겨진 동생들을 어떻게든 돌보려 고군분투하는 장남 아키라의 태도는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환기하며, 어른들의 당연시된 방종에 필연적인 짐을 다시 부여한다. 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아이들은 당연한 것, 익숙한 것, 보편적인 것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님을 순수한 태도로 드러내며, <어느 가족>에서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보편적인 악을 가장 날카롭게 바라보는 고발의 시선이자 거울이다. 히로카즈의 영화에서 맹랑한 아이들은 가장 순수하게 바라보고 선하며 이타심을 발휘한다.     


또 아이의 순수함을 간직한 성인들이 선대의 맹점을 극복한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아버지보다는 순수한, 그리고 자유분방하게 감정을 토로하는 료타는 아들 싱고에게 할아버지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어준다. 한편 이러한 아이들은 그들의 혈육이 아닐 때가 잦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의 뒤바뀐 친자, <어느 가족>에서 '가족' 구성원은 어느 누구도 피가 섞이지 않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이복동생을 보듬는 자매들이 등장한다. 히로카즈는 결핍이 존재하는 이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대안 가족’을 긍정하며, 이를 통해 가족의 참뜻을 환기한다. 익숙하고 친숙하지 않은 존재가 가족 구성원으로 추가되며 오히려 조심스럽게 서로를 배려한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과 결핍을 헤아리고 보충한다. 그것이 진정한 가족이라면, 혈족 구성원들로 이뤄진 일반적인 가정에서 이러한 역할은 불발되기 일쑤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나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반복되는 이혼, <걸어도 걸어도>에서 피상적인 친밀함 이면에 내재한 가족 간의 불쾌함처럼, 대안 가족과 달리 일반적인 가족은 진정 결합하지 못하고 피상만 바라보다가 찢어진다. 이들은 서로의 진실을 모른다. 그래서 히로카즈는 진실을 탐구한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은폐되었던 진실이 드러난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서로의 서운함을 토로하고 그렇게 다시 걸어가는 가족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아버지 사후에 진심을 확인한 료타, 그리고 가족을 위한 맹목적인 희생이 아닌 제 진심에 충실한 쿄코 등이 그렇다. 식구들은 히로카즈가 프랑스로 향한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에서도 서로 모른다. 배우임을 강조하는 어머니, 버려진 자녀임을 강조하는 딸, 알코올중독자 행크 등 진실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반대로 은폐하지만, 바라는 자신 및 거짓된 자신이 아니라 진실한 자신을 밝히는 첫걸음을 진실의 첫 단추로 본다. 모두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렇게 제 책임을 다하고 관계를 맺음에 가족은 시작한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다 밝혀질 순 없다. 허우 샤오시엔에게 히로카즈가 경의를 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에서도, 그리고 최근 가족극에서 스릴러로의 변주를 가한 <세 번째 살인>에서도 이미 영영 사라져버린 죽음은 진실을 답하지 않는다. 공허에 여러 거짓말이 얹혀 더더욱 오리무중에 빠진다. 하지만 죽음은 진실을 밝힐 수 없을지언정, 누군가의 죽음이 진실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따가운 진실을 꾸준히 자극받기도 하고, <태풍이 지나가고>처럼 살아있다면 진실을 파악하며 거짓된 나를 바로잡을 수 있으니. 어쩌면 히로카즈가 밝히는 것은, <환상의 빛>에서 누군가의 상실에도 나는 살아가고, <원더풀 라이프>에서 살아서 좋았던 기억을 붙잡으며, <세 번째 살인>에서 추잡하리만큼 삶에 이기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과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에서 갑작스럽게 막을 내릴 삶일지라도 끝까지 나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파비안느처럼, ‘우리가 삶을 바란다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그 삶 '어떻게', 바로 그것을 히로카즈는 대안 가족과 아이들을 통해 비춰낸다. 본 작품 <브로커>에서도 이 두 소재는 중추적이다. 한국으로 향한 히로카즈는 과연 '어떻게'란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최근 히로카즈의 작품에서 이토록 정적인 연출은 드물었던 것 같다. 카메라는 흡사 초기 작품, <환상의 빛>이나 <원더풀 라이프>의 사진과도 같은 스타일로 되돌아갔다. 물론 분위기는 이들처럼 고요하거나 서정적이지만은 않고, 차에 우발적으로 올라탄 해진에 의해서 때로는 통통 튀지만, 그런 동안에도 카메라는 끈질기리만큼 움직이지 않는다. 우성이를 베이비박스에 놓기 위해서 교회로 향하는 소영을 포착할 때도, 우성이가 베이비박스 앞에 놓일 때도, 그렇게 교회로 오게 된 우성이 상현과 처음 만날 때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나 베이비박스를 포착하는 정적인 숏 안으로 소영이는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카메라는 흡사 그들이 올 것을 기다리는 것만 같다. 우성과 만나는 상현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하여, 프레임 바깥으로 초상 일부가 잘려 나가는데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고집스럽게 멈춰서 그가 프레임에 맞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카메라뿐만이 아니다. 둥글둥글한 곡선으로 구성된 아기 우성은 직선으로 딱딱하게 각진 사각형 박스에 들어가야 한다. 박스가 우성이를 맞추지 아니하고, 우성이가 박스에 맞춰진다. 카메라가 인물을 온전히 담기보단, 인물이 카메라가 형성해 놓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거나 구도를 맞추는 역전된 관계가 반복된다. 이러한 멈춤의 이유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멈춤과 대비를 이루는 움직임을 통해서 나타난다. 박스에 맞춰진 우성이는 상품처럼 눈썹이 그려지거나 광고된다. 상현과 동수는 소영과 함께 첫 번째 아이 매수자에게로 향한다. 매수자는 아이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보정한 것이 아니냐며, 왜 이렇게 머리숱은 없고 아이 부모는 뭐 하는 사람이냐며 품평한다. 그들에게 상현은 항변하기는커녕 쩔쩔매고 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당연하다는 듯 멈춰있다. 그런데 매수자의 망발에 화가 난 소영이 그들에게 육두문자를 쏟아내려 발을 뗄 때, 카메라는 움직인다. 본 작품은 자본으로 환원되어버린 임신과 출산, 양육과 아기,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돈이 없는 존재가 아이를 버리는 것, 아이가 돈이 많은 양부모 내지는 매수자에게 팔려나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저항할 수 없고 도착하게 되어있다는 듯이 영화의 카메라는 멈춰서 그들이 들어올 프레임을 구성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이를 거부할 때, 카메라에 운동이 부여된다. 소영이 첫 번째 매수자들에게 반발할 때는 트래킹이, 이후 거래 장소를 벗어날 때는 달리 숏이 활용된다. 제아무리 돈이 필요한 빈궁한 사람이라도, 또 아동이 상품화되는 것이 보편화되는 사회일지라도, 여기서 이탈하겠다는 듯 말이다. 또 어느 한 모텔에서 살인이 발생했다. 이를 살피러 수사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로 트래킹숏이 활용된다. 거짓에 머물지 않고 진실로 향할 때 움직임이 부여된다. 또 우성이에게 절대 말 붙이지 않고 정 주지 않던 소영이,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봉고차로 향한다. 그리고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자장가를 부를 때, 영화는 그간 드물던 핸드헬드가 사용되며 은은하게 흔들린다. 그간 영화의 숏들은 흔들림 없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아이가 교환 대상이 되는 부조리한 사회가 당연시되고 탄탄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이를 돈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에서 일탈하여 아이와 유대감을 나누는 순간 영화는 흔들린다. 아이와 진심 어린 유대감을 나누는 것이 흡사 일탈이라는 듯 말이다.      


또 카메라는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더라도, 종종 담기는 피사체가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하며 이동하곤 한다. 인천 월미도로 향한 그들이 관람차를 탈 때, 상현이 해진의 고소공포증을 신경 써주고, 동수가 소영을 위로해주고 어머니를 이해할 때, 그들이 탄 관람차는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한다. 동수 또한 고정된 카메라가 형성한 정적인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성인이 되었어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 이와 동시에 자신을 왜 버렸을까 하는 원망으로 보육원에 놓인 카메라로 되돌아온다. 보육원의 비슷한 또래 친구와 함께, 밤바다에서 축구를 하는 그들을 마찬가지로 고정된 카메라에 담아낸다. 자신들의 벗어날 수 없는 처지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이후 축구를 끝마치고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의 은근한 움직임, 그리고 소영을 통해서 어머니를 간접 이해하게 될 때, 동수는 더 이상 카메라 안으로 되돌아오지 않고 카메라 바깥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으로 결말에서 수진이 자기 연인과 우성이를 돌보는 장면에서도 은은한 트래킹이 활용된다. 수진이 동수를 계기로 마음을 달리 생각했을 때, 이념 속에서의 아기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을 벗어나 성장할 때, 그들이 놓인 바다처럼 끊임없이 약동하며 고정된 상태를 벗어날 때, 이렇게 자유로운 운동을 활용한다. 운동과 더불어 추억을 간직한 봉고차가 다시 '운전'하기 시작하며,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구속과 규정에서 벗어날 때 운동이 활용된다. 이렇게 영화의 연출은 운동감에 주목할 법한데, 이와 더불어 빛과 어둠의 사용도 인상적이다. 영화의 도입부, 우성을 베이비박스에 놓으러 가는 소영은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의 신분도 잘 드러나지 않거니와, 옷도 어두컴컴하여 밤거리에 완전히 동화된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 소영은 아이를 베이비박스 앞에 놓지만, 이후 낮이 되고 우성에게 되돌아왔을 때 그녀는 버린 것은 아니며 다시 돌아오려 했다고 말한다. 어둠은 분간되지 않은 진실이요, 빛은 거짓과 위장에 상응한다. 밤거리를 밝게 비추는 교회는 위장된 인신매매의 현장이요, 가로등과 봉고차의 라이트가 비추며 향하는 세탁소의 실체는 인신매매의 중간 장소, 동네 주민에게 넉살과 인심 좋은 상현은 인신매매범이니, 빛은 결코 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빛은 아기가 자본으로 환원되고, 추악한 진실을 보기 좋은 거짓으로 둔갑하여 비춘다. 흡사 그런 것만 보기를 원한다는 듯이, 허용된다는 듯이, 추악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잠식된다. 그래서 이후에도 진실은 항시 어둠 속에 파묻혀있다. 소영이 아이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고, 잘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장면도 KTX가 어두워지고 시끄러워진 순간에, 그래서 상현의 귀에 그녀의 진심은 들리지 않는다. 또 소영이 모두에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는 장면도 불을 끄고 진행한다. 이렇게 어둠은 마땅히 드러나야 할 진실, 그리고 진심이 드러날 수 없는 이 시대의 모순을 보여주는 양식이랴. 마지막까지도 운전의 주체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드러나지 않되 움직이는 것처럼, 동수가 결코 완벽한 가정은 가질 수 없었지만 타협하고 절충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진실로. 영화 속 진실은 자본주의에 의해 은폐된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완곡화', '에둘러가기' 전략으로 온 삶에 이념을 주입하는 것을 밝힌다. '비정규직화'를 노동유연화, 구조조정, 규제철폐라는 말로 뒤바꾸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본 작품에서도 자본주의는 완곡화되어 자본이 미치지 말아야 할 천륜에 스며들고, 서늘하고 추악한 것은 좋은 것인 마냥 착란을 일으킨다. 상현은 자신이 인신매매범임을 알아챈 소영에게, 일반적인 입양이나 보육원보다 훨씬 좋은 환경으로 보낼 수 있는 ‘선의’라며 인신매매와 상품화된 아기를 에둘러서 표현한다. 상현과 동수는 범죄자이기에 적발되지 않고자 그나마 완곡하게 표현하지만, 다른 이들은 더욱 노골적이다. 첫 번째 매수자는 우성이 천만 원이라는 돈을 내고 교환할 가치가 있는지를 직설적으로 따져 묻고, 아기를 상품처럼 품평한다. 해진은 입양되기 위해서, 자신을 입양만 시켜주면 꼭 성공할 것이라며 흡사 '투자'처럼 자신을 선전한다. 입양은 나이가 들면 '상품가치'가 떨어지기에, 나이를 극복할만한 상품성을 어필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본으로 계산되어선 안 될 개개인의 가치가 모두 자본으로 획일화된다. 상현에게 빚을 독촉하는 청년이 어머니와의 사업하는 혈육의 끈을 뒤로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고리대금업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또 영화에서 당연한 것은, 성 행위의 책임인 아이를 홀로 짊어지는 여성이다. 수진은 소영과 같은 여성들, 아이를 키우지도 못할 거면서 낳고 버리는 여성들을 무책임하다며 타박한다. 그런데 그녀의 후배, 이 형사는 그녀들이 어떤 처지가 있을 것이며, 또 친부는 왜 비판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남과 여가 만든 아이지만, 항상 책임은 여성에게만 캐묻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서 남아는 시세가 천만 원이지만, 여아는 팔백만 원이다. 여성에게 불평등하고 불안전한 입지, 보육원의 운동장에서 뛰놀던 소년들과 소영이 머물던 집에서 성매매 포주가 관리하는 어린 소녀들의 엇갈린 운명, 어쩌면 이 사회에서 정해져 있는 것은 아이의 상품화뿐만이 아니다. 소영과 같은 여성들이 양성되는 것 또한 정해진 일이다. 교환 현장에 참여하고 여성의 수난이 정해져 버린 사회, 하지만 영화는 이에 안주하지 않는, 줄곧 정해진 목적지를 이탈하는 ‘로드무비’다. 시각적으로도 주로 서울에 얽매인 한국 영화의 풍경에서, 부산이나 울산, 인천 등으로 이탈하는 생경한 풍경을 롱숏, 드론숏으로 촬영한 것이 흥미롭다. 이러한 공간을 촬영할 수 있는 이유는 정해진 거래, 목적지를 이탈하는 인물들에게서 비롯한다. 매수자들과의 거래를 취소하는 수영에 의해서, 또 차에 몰래 올라탄 해진을 통해 말이다. 본 작품에서 아이 해진은 순수함과 동시에 자본주의, 성인을 반영한다. 입양되기 위해서 자신을 광고하는 장면에서, 또 상황을 수습하고자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장면에선 우리 사회를 거울처럼 비춘다. 이와 동시에 여전히 순진함이 남아있다. 어른들이 허락해야지만 입양되거나 차에 올라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보호자를 선택하고 몰래 차에 올라탄다. 이후 세차장에서 장난스럽게 창문을 열기도 하고, 법을 걱정하는 어른들과 달리 감기에 걸린 우성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동수가 관람차를 타고 싶다는 말이 월미도행을 결정한다. 이러한 동수에 의해 항시 거래처만 돌아다니던 이들이 샛길로 빠진다. 들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위해서 병원에 가는 등 말이다. 이러한 일탈은 인간성으로 향하는 일탈, 당연시된 것으로부터 그 이면을 이해하는 일탈이다. 해진에 의해 목적지가 달라지자 이를 계기로 상현은 이혼한 아내가 양육하는 딸을 만나고, 여정 속에서 동수는 소영을 통해 엄마를 간접이해하기도 하며, 소영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당연하게 가야 하는 목적지에서 이탈하는 그들은 인신매매하는 마음을 개심한다. 또 항시 우성이를 안고 있는 쪽은 사회적으로 당연시되는 여성 소영이 아니라, 남성 동수다. 일하는 수진과 그녀를 보필하는 연인의 뒤집힌 젠더에도 주목할법하다. 수진 또한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 수진에게 동수와 상현은 인신매매자라는 낙인이 이미 찍혀 있고 무조건 도착해야만 하는 결과다. 수진이 소영에게 죄를 캐묻는 편견도 이미 단단히 고정되어 변하기 어려워 보인다. 수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결과의 과정을 단축하고자, 또 불법이란 진실을 찾고자 과정을 불법으로 곡해한다. 모순적이게도 베이비박스에 우성을 넣어 본 여정의 신호탄을 쏜 인물도 수진이다. 하지만 우발로 가득 찬 로드무비를 떠나는 그들을 추적함에 수진의 마음도 달라진다. 이렇게 정해진 목적지, 결과에서 이탈하며 이들은 진정 진실을 찾는다. 영화는 히로카즈의 그간 작품처럼 진실을 추적하는 일대기를 떠난다. 봉고차를 치열하게 추적하는 형사들은 상현이 ‘큐피드’로 포장하는 표면 너머를 들추고자 한다. 하지만 진실을 보고자 하는 시선은 형사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로드무비에서 봉고차에 탄 사람들 또한 서로의 진실을 마주한다. 영화 속 진실은 따갑다. 진실은 다름 아닌 '욕설'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상현은 첫 번째 매수자들에게 우성이를 팔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로 어필한다. 하지만 이에 화가 난 소영은 매수자들도 별거 없고 추악하다는 진실을 욕설로 폭로한다. 이후 잠시 머물기 위해 들른 보육원에서도 마찬가지다. 항시 호루라기를 들고 있는 원장은 아이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칠지도 모른다며 조심하라는 말을 걸걸하게 하고, 귀 따가운 호루라기로 그들을 옳은 방향으로 인도한다. 또 동수는 소영이가 우성이를 버렸기에 불쾌하고, 소영은 동수가 인신매매범이기에 마음에 들지 않아 말다툼이 잦다. 하지만 이들의 모든 날카롭고 불쾌한 말은 진실이다. 당연하거나 듣기 좋은 말에 들어맞지 않은, 이러한 진실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서로에게 날이 선 말다툼은 이내 곧 차분한 자백, 몸부림치지 않는 체포로 이어지며, 진실은 이질적이거나 불쾌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고 이를 기꺼이 책임진다.      


물론 영화는 어떤 거짓은 긍정한다. 서로에게 진심이라면 거짓, 연극이라도 진실이 될 수 있다. 형사들은 인신매매에 대해 잘 모르고, 인공 수정 또한 관심 없는 연기자들을 섭외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진심이 아니기에, 이들은 금세 동수에게 탄로 난다. 이윽고 상현의 봉고차로 시퀀스는 전환된다. 늘 말썽이던 그들의 트렁크가 또 열려서 경찰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이들은 천연덕스럽게 가족인 척 위장하는데, 경찰은 그럴듯하게 보이고 자연스러운 이들의 연기를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로 해진이 우성의 형, 동수는 우성의 아빠라고 믿는다. 이들은 <어느 가족>에서처럼 피도 다르고 가족임도 거짓이지만, 그런데도 가족인 이유는 진심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요, 나의 기대에 상대방을 들어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터놓아도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들처럼 말이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영화에서는 대안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거나 언급된다. 그런데 이들은 진정 대안 가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첫 번째 매수자처럼 불발하거나, 그저 상현이나 동수의 입에서만 언급되지 포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입양될 아이를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가 그들의 기대, 취향에 들어맞기를 바람에, 아기는 식구가 아니라 그들이 요구하는 목적의 사물로 전락한다. 또 한때 입양될만한 목적이 있었던 아이들은 입양가정에 친자식이 생기며 목적이 사라져 파양되기도 한다. 진정 그 아이의 처지를 헤아렸다면 내릴 수 없는 결정, 그래서 이러한 사례는 대안 가족으로 발전할 수 없다. 하지만 봉고차의 '어느 가족'은 서로의 진실을 포용한다. 보육원에서 한껏 다퉜던 동수와 소영은 이튿날 화해한다.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하고, 상대의 진심을 공감한다. 그렇게 상대의 진실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관계를 맺기에 이들은 거짓임에도 진실이,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가족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대안 가족의 가능성을 영화의 상징이 긍정한다. 일단 ‘우산’, 소영은 어렸을 적 갖고 싶었던 우산이 있다. 그런데 현재에 그 우산은 어린 날의 가족이 아니라, 현재의 동수가 씌워줄 수 있다. 소영이 비를 맞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우산을 씌워주며 하나의 지붕 아래 놓일 수 있다.     


또 다른 상징은 ‘단추’다. 수진과 소영은 언쟁을 벌이다 서로의 멱살을 잡는다. 이에 소영의 단추는 느슨해졌고, 수진의 단추는 아예 뜯어졌다. 이는 아이가 부모에게서 멀어질 상징, 수진은 아예 부모와의 끈이 끊어졌고, 소영은 우성과 곧 멀어지고 소원해져 갈 것임을 암시한다. 동수가 단추가 없는 셔츠, 상현이 단추가 있는 하와이안 셔츠를 입는 것도 이와 관련할까. 그런데 단추는 다시 박음질해서 이을 수 있다. 연인에게 단추가 떨어졌으니 새로운 옷을 부탁하는 수진에게는 우성이가 감으로써, 느슨해진 소영의 단추는 여전히 수진에게 우성이의 소식을 전해 들음으로써. 아이를 사산하여 우성이를 입양하려던 가정의 젖도 마찬가지다. 친자식을 위해서 준비되었던 젖은 본래의 목적을 잃었지만, 그 젖의 의미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성에게로 연결될 수 있다. 그렇게 실과 단추는 기존의 옷에서 벗어나 새로운 옷에 박음질 되어, 거짓은 새로운 진실로 재탄생할 수 있으니, 그렇게 끈끈하게 얽힌 서로는 피 대신 실로 한 우산 아래 놓일 수 있으니,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과 유사한 작업을 한국으로 옮겨온다. 여전히 여름날에 ‘가족 연극’이 펼쳐지지만, 배역과 서로에게 진심이라면 진실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진실은 모든 것을 계산하고 자본으로 환원하는 이념 이전을 회복하는 것으로, 당연시된 불가항력을 이탈하는 진실의 로드무비에서 찾을 수 있으랴. 일본 감독이 프랑스로 향한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가족의 책임 사이의 딜레마를 다뤘다면, 한국으로 향한 <브로커>에서는 배금주의에 주목하며, 물신숭배에서 인간성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기원한다. 다만 낙관적이고 맹목적인 삶의 예찬과 희망은 거슬린다. 차가운 진실을 짊어지고도 별 과정 없이 희망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 태어난 아이들이 항상 삶을 찬란히 즐길 수 있는 것도 가상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그런데도 남자 감독이 여자 배우의 몸과 입을 빌려 낙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고 맹목적인 탄생을 예찬한 것은 비겁하다. <원더풀 라이프>처럼 삶에 애착을 갖고, 진창에서 태어나도 행복을 추구하는 아이들에게서 삶의 가치를 찾는 감독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러한 행복으로 쉬이 연결될 수 없는 <아무도 모른다>와 같은 영화 또한 연출한 감독이라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는 문장에 대해서 마냥 감정적인 반발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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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608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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