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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15. 2022

타티아나 후에조,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

다른 여성에게서 나를 느끼기

타티아나 후에조(Tatiana Huezo),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

(Prayers for the Stolen) - 다른 여성에게서 나를 느끼기    

“날아서 이를 수 없는 것에는 절뚝거리면서 이르러야 한다. ……… 그 글은 절뚝거리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한다.” -알 하리리-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남긴바 있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여성, 남성, 인터섹스로 태어나기야 하지만, 거기에 부여되는 무수한 역할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성별인 젠더에 의해 좌우되기에 우리는 구조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물학적 성별의 불가항력이 아니라 젠더에 의해 만들어진 삶을 살고 있다면, 이러한 '만들어짐'을 능동적으로 거부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데, 특정 젠더의 삶이 너무나 부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성이 성 범죄에 처해지고, 신체 훼손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는 젠더이면, 여성들은 당연히 이를 거부하리라. 여성으로 만들어지기를 거부하거나, 남성 우월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성을 개혁하거나. 이러한 여성 운동의 물결이 현 멕시코의 사회적 화두다. 멕시코에서는 페미니사이드(feminicide)라는 용어가 2010년대 새로이 급부상한다. 여성과 제노사이드를 조합한 합성어로, 멕시코의 전역에서 악명 높은 여성 범죄를 지칭하는 단어다. 특히 시우다드 후아레즈라는 지역에서 집요하게 반복해서 발생한 여성 살해가 국제적으로 논란이 되었기에, 2010년대부터 페미니사이드를 근절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다. 페미니사이드는 급변하는 시대와 멕시코의 열악한 치안에서 발생한다. 멕시코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인건비가 저렴하기에 여성의 경제 진출이 활발하고, 여기서 여성 범죄가 발생한다. 밀려난 남성들의 열등감이 경제활동을 하러 바깥으로 나서는 여성들을 표적으로 삼거나, 여성의 노동력을 노리는 인신매매가 열악한 멕시코의 치안에서 빈번하다. 이는 멕시코의 팽배한 마초주의에 의해 더더욱 활개를 치며, 살인과 구분하여 '여성 살해'를 따로 법령에 추가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하지만 과격하고 폭력적인 남성성과 지배력을 긍정하는 마초들에 의해, 수동적이고 가정적이길 요구받지만 이를 거부하는 여성들은 희생양으로 전락한다. 더욱이 카르텔의 성행으로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범죄나 노역에 동원되거나, 상대방 카르텔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소속된 여성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훼손된 신체를 전시하기에 페미니사이드는 근절될 줄 모른다. 이에 어떤 여성들은 여성이기를, 여성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      


이렇게 페미니사이드를 서두에서 언급한 이유는 타티아나 후에조 감독의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가 멕시코의 외지고 고립된 산기슭에서 발생하는 페미니사이드를 고찰하고, 여성임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972년 산살바도르 태생의 타티아나 후에조는 엘살바도르와 멕시코, 이중 국적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엘살바도르 내전을 기록한 <깊은 산 작은 마을>, 멕시코 내 카르텔의 만행으로 인한 여성의 비극을 기록한 <앱센스>, 페미니사이드를 실제로 경험한 두 여성의 다큐멘터리 <템페스타드>를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템페스타드>가 그녀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인신매매 및 공포정치, 카르텔이 장악한 멕시코에서 피해자가 되는 여성이라는 부당한 젠더를 탐구함과 동시에, 이를 실험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템페스타드>는 인신매매와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누명을 쓴 여성의 수난, 아이가 인신매매를 당한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두 삶과 세계를 이어내는 다큐멘터리다. 본 작품의 구성은 카르텔의 만행과 당국의 방치에 의한 황량한 풍경, 정체된 사람들, 그 공허함을 조금이나마 채워내는 진실한 나레이션으로 구성된다. 나레이션은 언제나 과거를 말한다. 과거의 그녀들이 당한 누명, 인신매매의 기억, 남성에게 지배되는 여성의 부당한 운명을 말이다. 이러한 과거는 현재의 눈에 전달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호소하는 증거를 인멸하듯 영화의 풍경은 처량하다. 진실은 거짓으로 둔갑되고 그마저도 현재에 남아있지 않다. 후에조는 현재 사라지는 여성들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붙잡고 발굴하여 채워낸다. 

이러한 본 작품은 '말이 없는 얼굴들'과 '얼굴 없는 말'이 교차된다. 현재에 포착되는 풍경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과거를 회고하는 여인들의 발화는 들려와도 그녀들의 얼굴은 포착되지 않는다. 스스로 말하더라도 신분은 드러낼 수 없고, 신분은 드러나더라도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이 교차된다. 서로가 얼굴을 대신 드러내주고, 대신 말해준다. 서로가 부재하는 요인들을 채워줄 수 있는 이유는 구조가 유사한 여성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카르텔이 점령하든 당국이 장악하든, 여성들은 공포정치에 의해 죽임당하지 않을까 벌벌 떨면서 강제 노역에 처한다. 하지만 그렇게 노역을 당하더라도 여성은 사라진다. 인신매매를 당하거나, 남성이 주도한 인신매매의 죗값을 여성이 짊어져 수감되거나. 이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활개를 쳐 인신매매 피해자는 늘어나고, 당국의 공모에 피해자들은 영영 돌아올 수 없으며, 누명 쓴 피해자들의 가정은 붕괴하여 또 다른 피해자들이 양성된다. 그래서 구조 내에서 넋이 나간 여성들의 얼굴, 터미널에서 어딘 가로 향하는 여성들의 발걸음은 모두가 각기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녀들의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움직이는 발걸음, 가기 싫어도 가야만 하는 발걸음과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린 듯한 텅 빈 얼굴…      


그렇게 ‘피해자 여성’을 양성시키며 악순환하는 구조를 꼬집고, 내전과 범죄를 추적하던 후에조는 이를 자양분삼아 그녀의 첫 번째 장편 픽션인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기도>를 선보인다. 그녀의 첫 장편 픽션에서 후에조는 이전 다큐멘터리에서 선보인 연출을 여럿 이어온다. 일단 풍성한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이전 작품에서도 시각적으로는 은폐된 진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다름 아닌 청각이 아니었나, 본 작품에서도 시각은 일부 은폐된다. 영화는 아이들의 연령대를 기준으로 총 2부로 나눌 수 있다. 소녀들이 어린이일 때가 1부, 청소년일 때가 2부다. 그리고 1부일 때 화면비가 1.66:1이어서 레터박스가 어색하게 일부 노출되는 살짝 좁은 화면비였다가, 청소년기에 1.78:1로 조금 확장된다. 어른들에 의해 1부의 어린이들은 시야, 진실이 제한 당한다. 진실을 알고 싶어도 어머니들은 침묵하고 은폐하여, 보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없다. 청소년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제는 어머니들이 감추던 진실이 그녀들을 향해 다가오기에 화면비는 확장되어, 조금 더 많은 것을 담아낸다. 하지만 여전히 온전하게 볼 수 없는 화면비, 그렇게 화면비가 은폐되는 시각을 반영한다면 후에조는 청각으로 그럼에도 다가오는 진실의 흔적을 새겨 화면비의 한계를 넘어선다. 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도입부로 되돌아가서, 검은 화면에 오직 크레딧만 올라가고 있다. 포착되는 것은 어둠과 글자뿐이기에 이들이 사는 산골짜기는 시각적으로 제시되지 않으나, 새 지저귀는 소리, 곤충이 우는 소리를 풍부하게 담아내어 간접적으로 공간의 진실을 전달한다. 이윽고 자연의 소리뿐만 아니라 사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헐떡거리는 소리, 시각적으로 행위는 드러나선 안 된다는 듯이 오직 인물의 숨소리만 들려온다. 영화는 이렇게 진실을 오롯이 드러낼 수 없는 환경의 반쪽짜리 진실을 청각으로 들려준다. 이윽고 시각도 서서히 진실을 까발린다. 아나와 리타가 땅을 파면서 숨을 헐떡이는 소리였다.      

이후에도 영화는 많은 진실을 보여준다. 대도시, 매스컴, 멕시코 바깥으로 송출되지 않는 열악한 여성 인권, 딸이 아들로 취급되어야 하거나 주검으로 전락하는 페미니사이드의 진실을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아주 생생한 양식에 담아낸다. 핸드헬드와 롱테이크의 조합으로 말이다. 롱테이크가 현실 속 시간에 상응한다면, 핸드헬드는 아이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발걸음에 상응하리. 특히 1부의 수업장면에서 호세피나라는 학생은 생명과 무생물을 판가름하는 것이 발과 다리라고 말한다. 호세피나는 걷고 움직이고 이동하면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물로서 여성을 보여주기 위함일까, 영화는 그녀들이 걷고 뛰어다니는 운동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또 2부의 최후에서 핸드헬드는 그녀들의 급박한 심장 박동이다. 인신매매 당해서 보이지 않는 저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르는 삶의 마지막 흔적, 카르텔들이 협박하는 장면에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급박한 호흡, 죽음으로 둔갑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느끼는 최후의 박동… 핸드헬드는 페미니사이드에 의한 멕시코 여성들의 일반적이지 않은, 점점 더 희소해지는 호흡을 보존한다. 이렇게 현실을 구현하는 형식을 바탕으로 후에조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장면들을 수놓고 촬영한다. 영화의 대다수 등장인물들은 비전문배우들이요, 그들이 누비는 광산은 실제 노동현장과 구별되지 않는다. 본 작품은 현실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야기를 쓰고 만들어가는 영화다. 그래서 롱테이크를 이용해 현실과 밀착하지만, 때로 현실의 시간을 포기하고 비전문배우, 특히 아이들의 초상을 편집으로 각각의 숏에 담아내 기록하고 보존하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아이들, 콜롬비아 영화 중 칸 영화제에 진출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인 <라 벤데도라 데 로사스>에 출연한 비전문배우들이 콜롬비아의 허접한 치안과 불법적인 환경에서 살해당하거나 수감된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성과 생물임이 보장되지 않는 멕시코에서 후에조는 그들의 실존을 섬세하게 기록한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을 들여다보자면 연상되는 감독이 한 명 있다. 바로 켈리 레이카트다. 물론 레이카트의 느리고 미니멀한 영화에 ‘비한다면’ 후에조의 영화가 더 빠르고 리드미컬하며 서사 구조도 복합적이다. 또 후에조는 본 작품에서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함에도, 연기 자체는 제법 기교가 묻어나는 디렉팅을 지향한다. 그래서 레이카트의 건조한 디렉팅과도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후에조의 본 작품에서 레이카트의 색채가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자연물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올드 조이>에서의 이끼와 달팽이, <퍼스트 카우>에서 낙엽과 도마뱀처럼, 후에조 또한 나비와 전갈, 뱀, 사마귀 등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후에조는 레이카트처럼 자연과도 같은 삶, 자연과 공존하고 우애를 맺는 삶을 지향한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은 후에조의 카메라처럼 항시 자연물을 바라본다. 레이카트처럼 다양한 형태와 색채를 갖는 생명체들의 경이로움과 비범함을 포착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렇지 못하다. 영화 속 마을의 주요한 산업은 불법적 양귀비 재배와 광산이다. 인간이 깎고 파괴하고 채굴하는 광산은 자연의 다채로운 색채와 달리 회백색에 국한되고 질감은 매우 딱딱하며, 항시 먼지가 안개처럼 잔뜩 불어와 노동자들의 얼굴을 혼탁하게 가린다. 숲 속에서 나뭇잎에 소녀들의 얼굴이 가려짐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조화를 이루는 것과 상반되게 말이다. 더욱이 스테디캠이나 롱숏으로 포착하여 생동감이 줄어든 촬영, 인간 소외의 거리감을 구축하여 비인간적인 문명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연출처럼 후에조는 자연과 문명을 대비한다. 영화 속 자연은 구순구개열을 앓는 마리아, 자연스러운 머리카락의 자라남, 생물학적인 성별에 따른 '꾸밈'에 대한 관심에서 나타난다. 또 2부, 청소년기로 진입하니 여성들은 자연스레 생리가 시작되고, 선생이나 카우보이를 흠모하며 성에 눈을 뜬다. 1부와 2부 모두 다, 소녀들은 제 삶의 주인을 자신으로 삼고 싶다. 후에조가 포착하고 소녀들이 항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곤충들이 외부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주인 되어 자라나는 것처럼, 자신이 바라는 대로 몸을 꾸미고 치장하고 욕망에 솔직하고 싶다. 친구들이 있고 정이 많이 든 마을에 머물고 싶다. 하지만 소녀들이 바라는 자연스러운 삶을 인위적인 환경이 거스른다.      


본 작품에서 반복 포착되는 ‘미용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공간이 아니다. 소녀들이 인신매매당하지 않고자 아들로 둔갑되기 위해서 머리를 자르는 공간, 취업 알선이 오가는 장소다. 미용실에서는 나 자신이 추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마을은 2부에서 선생이 말하듯 '거꾸로' 뒤집어져 있다. 성별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마리아가 구순구개열을 치료해서 윤택하게 삶을 살려고 하면 납치당하는 세계. 마리아는 1부에서는 머리를 자르지 않았다. 구순구개열을 앓고 있기에 카르텔들이 노리지 않았다. 하지만 2부에서 자신의 바람대로 구순구개열을 치료하니, 이젠 카르텔들이 데려간다. 그래서 생존하기 위해선 나의 바람이 아니라, 카르텔의 욕망과 반대로 행동하고 용모를 바꿔야 한다. 또 카르텔은 헬기를 이용하여 마을에 독극물을 뿌려 자신들의 악행과 힘을 과시함에,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던 소, 등교하던 학생 등은 모두 해를 입는다. 카르텔은 총을 들고 있고 트럭과 헬기를 몬다.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되어 있는 발전된 기술이다. 마을은 너무나도 열악하여 외부와 통화를 하려면, 전파가 터지는 언덕에 올라가야할 정도다. 마을 주민들은 자연과 타협하고 조화를 이룬다면, 카르텔과 국가는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한다. 하지만 철학자 아도르노가 기술과 이성으로 인간을 밝히는 계몽을 두고 ‘야만적’이라 밝히듯,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원리가 인간을 옥죄게 되듯, 곧 야만적인 인간의 인간 지배로 이어진다. 계몽은 계산가능성, 유용성 등으로 인간을 사물, 목적으로 환원한다. 계몽의 원리가 다수를 자신에게 동일시시켜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앗아간다. 그렇게 계몽되는 영화 속 젠더는 효율성에 따르며, 실존하지 않고 사물이자 객체로 머무른다. 마을의 젊은 어머니들에게는 항시 남편이 부재한다. 그 이유는 리타와 남편의 관계에서 암시된다. 생산력이 너무나 열악한 마을,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만 마을을 떠난 것 같지는 않다. 남편은 리타에게 돈을 보내주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낳고, 이후 아이를 기르는 젠더를 부여받는 여성과 달리, 남성은 그 책임이 면제되기에 식구들에게서 떠나간다.      


그렇게 식구가 떠난다고 하여도, 국가가 이들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면 다행이겠지만 후에조가 항시 다큐멘터리에서 고발했듯, 경찰은 카르텔과 공모하거나 그들 또한 인신매매를 자행하고, 군인은 항시 주둔하지 않으며 무능력하다. 이에 부재하는 보호자의 자리에 카르텔이 침투하여 마을 전체를 장악한다. 앞서 언급했듯 열악한 마을을 기준으로 카르텔의 기술력과 힘은 강대하다. 하나의 카르텔은 양귀비밭 전체를 관장하며 가구 모두에게 임금을 지불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카르텔을 따라야 하지만, 생존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말에 굴종해야 한다. 외지인으로 규정되면 카르텔은 그들을 무참히 살해하거나 납치한다. 내지인에서 외지인이 되지 않고자 마을 주민들은 카르텔의 악행을 침묵하고 외부로 이를 발설하지 않는다. 카르텔은 학교를 사라지게 만들어 비판의식을 말소하고, 소녀들의 성적 경제성을 계산하고 납치하며, 소년들은 권총과 마약 유통 과정에 노출되어 자연스레 카르텔이 된다. 그렇게 카르텔이 규정하는 인간과 젠더에 따라서 사람들은 강제로 무언가가 되어야 하거나, 마을을 떠난다. 그래서 영화 속 일대기가 ‘잃어버리는 일대기’다. 1부에서는 머리를 짧게 치고 광산에서 노동하던 소녀가 포착된다. 하지만 그 소녀의 이야기는 2부로 이어지지 않는다. 2부에서는 그 소녀의 자리를 아나, 마리아, 폴라가 대체한다. 이후 도로 검문 당하는 장면에서 여성임을 노출해선 안 되는 사회임을 영화가 암시하고, 카르텔에 의해 사라진 마리아를 통해 1부에서 포착되었던 소녀가 왜 종적을 감췄는지를 대강 유추할 수 있다. 사라져서 착취당하는 여성, 사라지지 않는다면 살해되는 여성, 아들로서 남는다면 이후 어머니가 되는 여성을 더 살펴보자. 도입부로 되돌아가서, 땅을 다 판 리타는 아나에게 들어가 보라고 한다. 흡사 그곳은 무덤과도 같다. 이후 카르텔이 급습해오면 항시 아나는 그곳에 숨는다. 남성들에 의해 살아있는 여성은 오직 어머니들뿐, 딸들은 애초에 없거나 죽었거나 아들로 둔갑되거나. 그래서 영화는 이를 반영하듯 언제나 조심스럽고, 암시가 주를 이룬다. 직접적이기보단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화법을 통해, 그녀들이 진실을 온당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을 가시화한다.      


이후 아나는 후아나의 집에 우유를 얻으러 간다. 그런데 후아나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살포시 열린 문 사이로 확인해보니, 강간당한 그녀가 포착되고 후아나는 보이지 않는다. 후아나의 어머니는 아나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후아나와 그녀의 흔적은 모조리 말소된 채로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녀들의 집은 <템페스타드>에서 주를 이루던 황량한 풍경으로 전락한다. 텅 빈 집에는 후아나의 신발과 자전거만 덩그러니 남는다. 앞서 생명체만이 직접 걷고 뛰고 움직일 수 있다고 언급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물로 전락하는 여성은 ‘신발’을 남겨두고 직접 걷지 못한 채 태워져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렇게 사라진 여성은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가슴에 갈고리가 꽂힌 주검으로 발견된다. 여성의 몸은 남성을 위해 납치되거나, 남성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훼손된다. 남성들은 그녀들의 몸에 표식을 가해 뒤틀린 권리를 주장한다. 하지만 카르텔이 규정한 여성 젠더가 아직 체현되지 않은 소녀들은 직접 보고 달림으로써, 카르텔에 의해 거꾸로 뒤집힌 것을 원상 복귀시킨다. 영화에서는 마리아, 아나, 폴라 각각이 달려가는 씬이 반복된다. 세상은 그녀들이 달리기보다는 파놓은 굴 안에서 누워있기를 바라지만, 소녀들은 그럼에도 달린다. 영화는 소녀들의 달리기, 야밤에 즐겁게 뛰어노는 장면 등 인위적인 젠더 이전의 자유로운 여성을 기록한다. 또 카르텔의 협박에 못이긴 어머니들의 침묵, 은폐에 의해 볼 수 없던 것들을 직접 보기 시작한다. 카르텔에 의해 방치된 후아나의 집을 청소한다. 또 카르텔은 타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제 몸에서 느끼지 않는다. 이는 지배받는 마을 주민들에게도 동일시되어 후아나의 실종이나 풀숲에서 발견된 여성 사체에 대해 어떤 감정도 표출하지 않는다. 아직 카르텔의 지배에서 느슨한 소녀만이 이를 보고 구토하지만, 어른들 사이에는 상호성이 유리되어 있다. 너를 통해서 나를 느끼지 않고, 나를 통해 너를 가늠하지 않는다. 서로의 몸은 닮아있지만, 닮아서는 안 될 별개의 몸이다. 하지만 소녀들은 서로의 먼 거리를 뛰어넘어 다가선다. 소녀들은 눈을 감고 단어를 맞추거나 서로가 똑같은 표정을 짓는 '텔레파시' 게임을 한다. 카르텔의 강제적 동일시와는 다른, 타자의 다름을 이해하는 상호교감으로, 다름을 똑같이 느낀다.     


그리고 젠더, 노동자임을 강요하며 인생의 감각을 말소하는 사회에서 소녀들은 직접적인 감각을 보존한다. 세 친구 끼리 포옹하고, 2부에서는 물속에서 부유 및 잠수하고 손을 잡으며, 그렇게 나와 닮은 서로의 온기와 감촉을 확인한다. 이를 통해 카르텔이 빼앗아 가버린 감각성, 특히 타인의 고통을 내가 느끼는 교감을 복권한다. 딱딱한 대지에서 부드러운 부력으로 해방한다. 그녀들은 각기 다른 숏에 놓이지 않고, 일심동체가 된 그녀들의 얼굴을 회전하며 보여주는 하나의 테이크에서 다 함께 포착된다. 카르텔은 셋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리아를 데려가고, 남은 둘 또한 마을에 가만 놔두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리아와 함께 눈을 감고 손을 잡으며 화음을 섞었던 그 순간을 회고한다. 눈을 감고 마리아를 상상하며, 그녀의 목소리에 섞었던 화음을 직접 소리 내며, 그렇게 사라지고 잃어버린 존재들을 기억하고 보존한다. 내 몸에 간직한 상대의 감각을 느끼고 기억함으로써… 감각을 말소하는 사회, 타인과의 유대를 금지하는 공동체, 그렇게 인간을 소외시키는 구조, 후에조는 본 작품에서도 '사물'로 양성되는 젠더 여성을 고찰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어머니라는 세 시기의 여성을 그리며,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자신은 소외되는 비극을 탐구한다. <템페스타드>에서처럼 페미니사이드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억울한 여성과 잔혹한 범죄를 양성 및 순환하는데 일조하고 있음을 후에조는 세계의 진실을 상세히 파헤치며 고발한다. 함께 놓일 수 있는 작품을 꼽자면 아마트 에스탈란테의 <헬리>, 차이를 꼽자면 폭력에 접근하는 여성 감독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눈동자를 들 수 있으랴, 수치심을 고려하듯. 다만 후에조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였던 시적이고 형식적인 장점이 퇴색된 점이 아쉽다. 본 작이 영상화하는 원전에 의존한 결과일까, 후에조의 목가적인 색채가 묻어나면서도 다소 평범해져버린 문법이 아쉽게 느껴진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묻어난 개성이 드러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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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615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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