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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22. 2022

세바스티안 마이즈, <거대한 자유>

인간의 조건: 불, 책, 시선

세바스티안 마이즈(Sebastian Meise), <거대한 자유>(Great Freedom) 

- 인간의 조건: 불, 책, 시선    

“게이 세계와 그 생활양식은 단지 ‘섹슈얼리티’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로서 스스로의 사회문화를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디디에 에리봉-

우리에게 홀로코스트는 주로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도 <사울의 아들>이나 <쉰들러 리스트>, <파라다이스>(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 등 나치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를 조명한다. 하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집시나 슬라브족을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도 있었고,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념 박해도 있었으며,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호모포비아도 존재했다. 다만 유럽에서 약 50%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제노사이드가 가장 악랄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학살이 대표성을 띠곤 한다. 하지만 다른 그룹의 피해도 결코 적지 않았기에, 그들이 경제·사회적 권력이 궁핍하다고 한들 역사적 조명은 필수적이다. 집시를 대상으로 한 제노사이드도 평균 추정치 50~80만의 피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다. 당시 약 10만 명의 남성이 동성애자로 낙인이 찍혔고, 그중 5만 명이 선고를 받아 대다수는 일반 교도소에서 복역했지만, 그중 일부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게이와 달리 레즈비언은 크게 박해받지 않았지만, 레즈비언 또한 선고 및 수감 판례가 있었고, 사회적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강제 수용소에서 게이들은 거세, 집단 강간 등 비인도적인 처우를 받았다. 더욱이 단순한 고문과 괴롭힘뿐만 아니라, 나치의 우생학과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희생되었다. 나치는 그들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민족의 종족 번식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동성애자를 꼽았고, 그들을 의학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실험을 강행했다. 호르몬을 인위적으로 조절하거나 신체를 변형시키기도 했고, 남성적으로 일컬어지는 육체노동을 반복하면 이성애자로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극악한 강제노역을 부여했다. 동성애자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실험체로 전락했으며, 이에 강제 수용소에서 게이의 6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게이들을 향한 전쟁, 홀로코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동성애를 불법화하는 법령이 동독에서 1968년까지, 서독에선 1969년까지 이어졌기에, 강제수용소는 해체되었더라도 일반 수감이 이어졌다. 그래서 2차 대전이 동성애자에게 남긴 여파를 담아내는 <거대한 자유>가 포착하는 시기도 바로 1945년부터 1969년이다. 2차 대전은 끝났어도 게이들에겐 끝나지 않은 전쟁의 망령을 포착한다. 이를 연출하는 1975년 키츠뷜 출신의 세바스티안 마이즈는 오스트리아의 청년 감독이다. <거대한 자유>는 그의 두 번째 장편이며, 2011년 <스틸 라이프>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거대한 자유>에서 정치와 얽힌 성을 탐구하는 마시지는, 그의 데뷔작에서도 금기시된 성애에 주목했는데, 이를 ‘still life’란 단어의 양가적 의미로 풀어냈다. 일단 사건의 중심인 잉그루버의 욕망은 드러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오직 청각으로만 제시되거나, 편지의 텍스트로 실현되지 못한 채 잠겨 있다. 그의 욕망이 어둠 속에 잠겨있는 이유는 잉그루버의 성 지향성에 소아성애 및 근친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요, 또 결혼한 상태에서 외도한 그는 불륜까지 삼중 위반을 저지른다. 딸을 향해 욕망을 품은 그의 욕정은 언제나 편지에만 작성되고, 매춘을 통해 상상하며 간접적으로 실현된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들은 이를 모르는 상태였고, 아들 버나드가 그를 뒤 따라가 겨우 적발하고 만천하에 탄로 난다. 그전까지 영화의 카메라는 매우 정적이었다. 포착되는 것도 딱딱한 집, 잉그루버의 노동, 사물 등 생명력 없이 굳어있었다. 인물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스틸 라이프가 의미하는 '정물화'가 생명력이 없고 오직 사용자의 목적에만 충실한 사물을 다루는 것처럼, 영화가 포착한 삶은 사물화된 삶이었다. 대상은 자신의 욕망이란 목적으로 기인한 사물로 치부됐기에, 개개인의 관계는 자유롭기보단 매우 뻣뻣했다. 욕망이 스미지 않은 부자 관계도 노동이 관계를 매개하기에 딱딱하기가 별다르지 않았다. 또 실현될 수 없는 욕망, 이로써 육체를 부정당한 한 개인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건조한 연출이 사용된다. 이후 진실이 폭로되자 잉그루버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욕망의 대상임을 깨달은 리디아도 혼란에 빠진다.      


이윽고 영화의 카메라는 움직인다. 초반부, 아무것도 모르는 리디아가 잉그루버에게 향할 때도 카메라는 움직였다. 사물 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으며 대상에게로 향할 때 우리는 움직인다. 리디아와 잉그루버를 그저 찾고자 하는 카메라는 비로소 정물화로서 스틸 라이프가 아니라, 지속하는 삶으로서 스틸 라이프를 비춘다. 목적화된 사람이 아니라 순수하게 사람을 찾고, 또 청천벽력과도 같은 배반 속에서도 자살하거나 떠날 수 없이 그저 삶을 이어간다. 다만 이에 책임지며 흘러가야 할 것이다. 명확한 죄과는 없지만 딸을 향한 분명한 악의의 책임을 지고 진실을 고백해야지만 삶은 이어진다. 잉그루버는 책임지기 위해 은행에서 강도인 척 연기를 하며 자신을 불법화한다. 그렇게 체포되며 자신의 악의를 다른 죄목으로 대신 짊어진다. 이렇게 <스틸 라이프>에선 관련 법령이 부재하기에 불법 여부가 애매하고 실현 여부도 모호하나, 분명한 악으로서 죄의식을 탐구한다. 법이 뒤따라가지 못하는 성과 악을 꼬집는다. 그리고 <거대한 자유>는 이와 반대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적과 이념을 위해 금기시되고 불법화되는 성애의 시대를 탐구한다. 또 <스틸 라이프>에서 마이즈의 연출은 미카엘 하네케, 울리히 사히들, 마커스 슐레진저, 예시카 하우스너 등 선배 오스트리아 감독들의 정적인 경향을 이어갔는데, 과연 본 작품에서는 어떠한 매무새를 띨까. 본 작품도 전작처럼 대체로 건조하다. 때로 탐미적이라 할 수 있는 필름 푸티지를 재현한 영상, 페드로 코스타를 방불케 하는 ‘어둠 이미지’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를 강렬하게 보여주기 위한 담담하고 딱딱한 형식이 주를 이룬다. 형식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단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체로 고정된 카메라로 인물을 포착한다. 앞서 언급한 오스트리아 감독들처럼 말이다. 인물을 따라다니지 않는 카메라가 한스보다 먼저 교도소에 도착해, 그가 들어오길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기다리니 더욱 갑갑하고 숨 막히는 분위기를 풍긴다. 더욱이 이러한 딱딱한 촬영으로 포착되는 것은 침묵하는 한스에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판결, 교도소에서 강제되는 노동이기에 더욱 뻣뻣하다.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대상, 행위도 딱딱한데, 이를 이어내는 편집마저도 뻣뻣하다. 법정 및 교도소가 만들어낸 메커니즘을 편집이 반영하는데, 메커니즘에 따라서만 행동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라낸다. 거기에는 일련의 잉여, 가능성, 여지도 덧붙여지지 않고, 어떠한 감상주의도 없다. 오직 제도가 체현된 인간, 제도를 재생산하는 인간만이 자리해있다. 이러한 삭막한 연출에서 서서히 영화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달리 및 트랙을 이동하며 찍은 장면, 핸드헬드는 모두 국가가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노동에만 사용된다. 1945년에 교도소로 이송되어 일하고, 시간과 공간에 강제된 행동을 하는 한스, 젊은 날의 한스를 보는 듯한 1968년의 기스에게 허용되는 움직임 또한 오직 노동뿐이다. 그러나 영화는 외부에서 강제된 움직임을 부정한다. 교도소와 제도가 허용한 움직임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지시하는 움직임으로 일탈한다. 서서히 영화의 패닝이나 트래킹은 노동을 이탈하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1945년과 1957년에 한스를 향해 다가가는 빅터, 1968년에 기스를 향해 다가가는 한스 등 교도관의 눈을 피해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이들로 영화의 운동은 변용한다. 그래서 교도관의 시선에 놓인 공적인 시공간에서 인물의 앞과 뒤, 측면을 고루 보여주는 촬영도 인상적이다. 죄수들은 교도관 앞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얼굴과 행동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대상의 실체는 아니라는 듯, 항시 그 옆과 뒤의 다른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듯, 지시 너머의 일면들을 편집으로 이어낸다. 편집 또한 제도 외에 불필요한 것들을 담아내지 않던 영화 초반부의 효율적인 편집으로부터, 감정적이고 사적인 관계가 강조되는 중반부로 향할수록 불필요해 보이나 그들을 즐겁게 하는 잉여들이 덧붙여진다. 그럼으로써 정치 드라마에서 멜로로 이행하고, 템포는 초반에 비하면 느려진다. 이렇게 영화는 운동감과 편집으로 작지만 거대한 개인의 자유를 가시화한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는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재질이 가득한 환경에서 성취한다. 인간의 부드러운 맨살은 딱딱한 철창, 삭막한 철벽을 무너뜨리거나 다른 형태로 뒤바꿀 수 없다. 오히려 부드러운 인간의 몸을 고정된 틀과 같은 단단한 교도소가 강제하고 변신시킨다. 외부와 내부, 대상과 대상을 가르는 금속에 의해 교도소는 어둠이 가득하다.     


영화의 강렬한 이미지 중 하나는 외부와 빛을 원천 봉쇄하는 밀실을 포착하는 숏이다. 공간을 지배해야 할 인간은 사라지고, 역으로 공간이 인간을 잠식하는 비인간화, 감상자가 볼 수 있는 것이란 오직 검정뿐인 절대적인 어둠이다. 이러한 어둠에 동성애자들이 갇힌다. 어둠으로 그들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 동성애자의 흔적을 아무것도 영사하고 있지 않은 ‘검은 화면’과 별다를 바 없이 처리하는 본 작품은, 동성애자의 존재를 말소하여 죽음 및 오물과 동화시키는 역사 속 동성애자의 비극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안주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불과 온기로 금속의 차가움을 극복하고, 빛을 가로막은 벽에 의해 어둠이 자욱하더라도 촛불과 라이터로 빛을 밝힌다. 철을 녹이는 불, 어둠과 동일시되기 이전의 자신을 비춰내고 보존하는 빛으로 인간은 거대한 자유를 쟁취한다. 그럼 이제 영화 속 인물들이 쟁취하는 자유를 살펴보자.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가. 바로 공적 영역으로부터다. 영화의 도입부, 국가는 게이들이 모이는 커뮤니티인 화장실 거울에 카메라를 숨겨놓고 이들을 감시한다. 이들의 만남은 사적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한다면 사적인 것은 자신의 것, 공적인 것은 공동의 것이다. 게이 커뮤니티에서 동성애자들의 만남은 모두 개인들의 것이다. 이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자 게이들의 접선 장소, 사생활이 보호되는 화장실에서 만난다. 하지만 국가는 몰래 이들을 촬영한 필름 릴을 법정에서 까발린다. 필름 릴은 본 작품에서 사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영화 중반부, 한스와 오스카도 본인들만의 비밀스러운 사랑을 조야한 필름에 담고 간직하지 않던가. 이러한 필름 릴에 시각은 매우 자유로운 사적 만남이지만, 청각은 이를 외부에 공표하는 영사기의 딸깍거리는 소리가 덧입혀지며, 청각에 시각은 지배당한다. 또 도입부에 이들을 몰래 촬영한 필름 릴을 인서트한 시퀀스는 크레딧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필름 릴은 온전하게 이어지지 못하고, 검은 화면에 글자가 입혀지는 크레딧을 위해서 계속 잘려 나가는데, 이는 필름 릴을 공개하고 다루는 사람들의 편의와 의도대로 잘려 나가는 동성애자의 삶을 보여주리. 이성애자에 의해 동성애자의 사적 삶은 까발려지고 편집된다.      


이를 확인한 판사는 공동체에 그들이 부적합하다고 판결하고 한스를 교도소에 보낸다. 동성애자가 외부에 드러내지도 않은 삶을 이성애자들이 사회에 까발렸으면서, 자신들이 노출한 책임을 동성애자에게 전가한다. 이성애자에 의해 동성애자는 나만의 삶이 까발려져 공동의 것으로 치부됨과 동시에, '보편'적인 공동을 위해서 자기 삶은 유폐 당한다. 그렇게 한스는 교도소로 향한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종전 이후 1945년, 그리고 1957년과 1968년에도 수감되어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도 그는 교도소로 가기 위해 모의 범죄를 저지른다. 영화의 구성은 플래시백과 플래시 포워드를 오가며, 과거가 현재에 반복되며 재생산되는 시간을 보여준다. 한스는 1945년에 처음 교도소로 옮겨졌을 때 탈의하고 교도관에게 항문을 보여주는 규정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1968년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 외부의 규칙에 단련되어 교도소의 규정이 낯설고 불쾌하게 여겨진 1945년의 한스, 교도소의 밀실이 두렵던 그는 이제 수치심을 유발하는 법과 나를 지워내는 어둠이 익숙해졌다. 그는 교도소에 맞게 뒤바뀌었다. 교도소에 적합한 신체로, 죄수 이전의 자신을 알 수도 없는 존재로, 교도소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교도소는 하나의 틀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교정시설이라 불리는 교도소의 메커니즘, 감시의 역사를 밝힌다. 일단 근대 이전 존재했던 신체형은 왕정주의의 전제적 힘이 국민을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것을 몸에 ‘흔적’을 남기고 훼손시키며 선전한다. 근대화 이후 신체형은 점차 사라지나, 20세기에 나치에 의해서 부활한다. 나치의 신체형은 한스의 몸에 새겨진 죄수 번호다. 동성애자가 나치와 이성애자에 의해 소유되고 지배됨을 보여주는 표식이랴. 이후 전쟁은 끝나고 현대적인 '재사회화'의 모델로서 교정시설인 교도소에 보내진다. 푸코의 저서에서나 본 작품에서나 교도소는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감시의 특권을 부여한다. 교도관은 죄수들을 쏘아보며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의 노동, 샤워, 야간 점호를 강제하고, 규칙을 위반한 자유로운 행위에는 처벌을 내린다. 어떠한 사적인 행동도 불허하는 시선과 감시로 공공의 규칙이 강제되고 체현되는 죄수들의 신체는 시간에 따른 특정 동작을 위한 도구, 시선에 의해 움직이는 장치로 전락한다.     


1968년의 한스는 교도소의 규칙이 습관이 될 정도로 당연해졌다. 그래서 한스는 사회로 나갈 수 없다. 1968년 이후 동성애가 합법화되어 한스는 석방되지만, 자신이 욕망을 선택하는 것도, 공간을 지배하는 것도 결정할 수 없다. 합법임에도 욕망의 대상을 대놓고 볼 수 없고, 여러 공간을 놔두고도 가장 후미진 곳에 놓이며 교도소에서 제일 중요했던 가치인 담배를 사고, 결국에는 낯선 사회에 융화되지 못한 채, 교도소로 되돌아가고자 범죄를 저지르고… 동성애가 불법이어서 한스는 교도소로 와야만 했지만, 합법화된 이후에도 그는 교도소에 가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교도소는 죄수들의 몸에 낙인을 찍고, 그들의 정신을 교도소의 것으로 소유한다. 빅터 또한 가석방 심사를 앞두고 벌벌 떤다. 교도소 바깥에서 자신을 상상하기가 두려운 것인가, 이에 마약을 투여하여 교도관에게 적발되고 교도소에 남기로 한다. 이러한 교도소는 나를 박탈한다. 삶을 죽음과 뒤섞어놓고, 나를 타자와 중첩시키며, 인간을 사물에 흡수시킨다. 교도관들의 규율에 따르지 않았을 시, 가장 강력한 처벌은 밀실에 가두는 것이다. 일말의 빛도 허용되지 않는 밀실, 오직 허용되는 것은 배설물을 받기 위한 양동이다. 어둠 속에서 인간과 공간도 구분되지 않고, 내 몸에서 배출되어 분리되는 배설물도 다시 내게 묻는다. 내 몸에서 배출된 ‘죽은 것’과 살아 숨 쉬는 나는 뒤섞인다. 공간과 인간, 어둠과 존재, 오물과 나 등 구별되어야 마땅할 것들이 모두 뒤섞인다. 그렇게 밀실에서 나는 사라진다. 이후 처벌이 끝나 밀실에서 빠져나온 뒤, 1957년에 다시 교도소로 향한 한스는 벽을 새하얗게 칠한다. 어둠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는 대상은 오직 교도소라는 듯이, 교도소가 대리하는 국가라는 듯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어둠으로서 한스는 국가와는 엄격히 분리된 채로, 그들의 감시와 지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한스는 교도소에서 마냥 그들에게 순응한 것이 아니었다. 공동의 삶이 아니라 분명 개인의 삶과 자유를 향해 일탈한 한스, 이를 위해서 인간에겐 불과 책, 그리고 시선이 필요하다.     


가장 먼저 영화 내내 ‘불’이 반복된다. 교도소의 긴장감, 타인에 의해 쭈뼛쭈뼛해진 나를 녹여주는 유일한 수단이 담배다. 이를 위해서 라이터가 필요하다. 흡사 인간에게 불을 내어주며 자신을 희생한 프로메테우스처럼 한스가 빅터를 처음 신뢰하게 되는 순간도 그가 불을 내어줬을 때다. 불은 그가 담배를 피울 수 있게,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혀 책을 읽을 수 있게, 어둠과 자신을 구분하게 해준다. 영화 속 밀실의 어둠 양식에 빛이 켜지니, 오물 및 어둠에 동화되던 인간 존재가 구분된다. 빛은 드러나야 할 인간과 드러나지 않아도 야만을 구분한다. 더욱이 교도소는 차갑고, 일탈의 대가는 혹독하여 그나마 안락한 방에서도 내쫓긴다. 그래서 기스와 포옹하며 온기를 나누고, 오스카의 자살로 홀로 남겨진 한스를 껴안아 주는 빅터의 태도 또한 불, 그것도 스스로를 불태우고 녹여 타인에게 헌신하는 촛불이다. 타인에게 감촉, 온기를 제공하여 실존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감정 없는 공간에서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나'임을 회복하게 만들어주는 등 우리는 불이 되어 자유를 밝혀야 하리.

두 번째 인간의 요소는 책이다. 한스는 교도소에서 허용되는 유일한 책인 성경을 읽기 위해 성냥을 긁는다. 성경을 읽는 한스는 몸소 ‘예수’가 된다. 기스는 처벌에서 빠져나가고자 한스를 밀고했다. 하지만 한스는 기스의 말을 받아들이고 거짓 자백한다. 기스가 오래 남는다면 자신처럼 교도소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에, 선생으로서 기스가 잊힐 것이기에, 그의 죄를 기꺼이 자신이 짊어진다. 이렇듯 책은 비인간에서 인간으로, 인간 너머의 무언가가 되게 만든다. 그리고 책은 단순히 읽는 수단이 아니라 담배를 마는 종이를 제공하고, 한스가 오스카에게 편지를 쓰는 수단이다. 책이 인간을 규정하지 않고, 인간이 책을 수단으로써 사용하고 규정하며, 한스는 교도소에서 사물화된 자신의 주체적 인간성을 회복한다.

마지막으로 시선이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의 방 이외의 공간에서는 항시 감시한다. 그리고 죄수들이 어디로 움직이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함을 강제한다. 그 시선은 그들의 발이 어디로 향하고 꺾고 멈추는 것을 지시한다. 죄수들은 교도관의 시선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한스는 기스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교도관의 눈을 피해 그의 옆으로 향한다. 동성애를 불법화하는 시선에서 은밀하게 달아나, 자신이 욕망을 선택하는 시선을 회복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에게 향하여 애무하고 키스하며 나를 회복한다. 또 빅터는 교도관들의 눈을 피해 조리실에서 마약을 흡입하거나 문신에 필요한 도구를 훔치는데, 이는 한스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죄수에게 허용되지 않는 물건을 가져오거나. 한스와 오스카의 기억 속에 남겨진, 서로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필름 릴 또한 시선이 묻어난다. 서로의 시선 하에서 어떻게 보여야 함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움직임, 이를 허용하는 관용적인 시선, 원한다면 솔직하게 바라보는 시선에는 자유가 묻어있다.      


이렇게 불과 책과 시선으로 한스는 비인간에서 인간으로, 공동의 존재에서 고유한 개인임을 회복한다. 이러한 일탈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이성애자 공동체에서 게이 공동체를 계속 만들어내는 공동의 일탈도 내포한다. 체포되어도 또다시 접선 장소를 만들고, 교도소에서 게이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고… 동성애자이자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정체성을 사회학에 적용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디디에 에리봉은 저서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의미를 밝힌다. 이성애자는 항상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론적 특권이 있다. 법과 제도를 관장하는 그들은 동성애자의 정체와 개념 및 규정을 마음대로 갖고 논다. 그래서 게이들이 만드는 고유의 커뮤니티는 이성애자들에게 지배당하지 않는 생활양식, 섹슈얼리티를 보존함을 넘어서, 이성애자에게 지배되는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사회문화를 창조한다. 사회에서도 교도소에서도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에게 모욕 및 폭행당하고, 교도관이나 빅터에 의해 내쫓기며, 동성애자들인 한스와 오스카, 기스끼리 있을 수 없다. 교도소의 단절, 특히나 오스카의 죽음조차 뒤늦게 확인되는 고립은 동성애자들에게 더욱 혹독하다. 동성애자들은 이성애자들보다 정보를 뒤늦게 안다. 정보를 다루거나 만드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빅터가 오스카의 죽음을 한스에게 전해준다. 하지만 한스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교도소의 강제되는 야간 점호를 위반하여, 기스와 야간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게이들만의 규칙'을 만들고 이를 공유한다. 또 빅터의 도움을 받아 오스카에게 편지를 전달한다.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허용하는 성경이 아닌, 허용되지 않는 연인의 편지를 오스카가 읽게 된다. 또 빅터는 1945년에는 호모포비아로 보이지만, 1968년에는 한스와 미묘한 감정을 공유한다. 빅터는 사회에 의해 이성애자여야만 했고, 호모포비아여야만 했다. 1945년에 한스가 그의 방에 배정됐을 당시, 그를 추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빅터는 사회에서 강요된 바를 위반하고, 자신을 회복한다. 나치가 한스의 몸에 새긴 낙인을 다른 문신으로 바꾸고, 1968년에는 교도관에게 뇌물을 쥐여주며 한스를 제 방으로 오게 만든다.     


그리고 위반은 동성애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자 이전 '인간'임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사물이 나를 지배하는 교도소의 금을 밟아야 한다. 자신에게 선행을 베푼 빅터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한스, 한스를 위로하기 위해 교도관의 지시에도 굴하지 않고 그를 포옹하는 빅터는 동성애적 에로스라기보단 아가페적이다. 인간의 일대기란 일탈의 일대기다. 교도소에서 벗어나 비행하고 싶었을 오스카의 자살도, 1969년에 인서트되는 달 착륙도, 인간은 기존의 질서, 중력에서 벗어나 자유로 나아가고 싶다. 이러한 일탈의 정신이 이어진다. 1945년, 1957년, 1968년 각각의 연도에서 동성애자를 불법화하는 제도의 여파가 반복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 인간성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간의 일탈 또한 연속한다. 1945년과 1957년에 한스에게 연민을 보여줬던 빅터, 이제 1968년의 한스가 젊은 날의 자신과도 같았던 기스에게로 향한다. 1945년 당시 빅터의 얼굴은 클로즈업으로 거대하게, 한스는 그의 시점에서 롱숏으로 저 멀리, 작고 소외되게 포착되었다. 이런 한스를 빅터가 구원했다면, 이제 1968년에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한스가 롱숏으로 포착된 작고 나약한 기스를 구제한다. 또 제도가 붙여놓은 죄목과 번호로만 제시되던 한스에게 빅터는 어떤 존재냐고 질문했는데, 이 또한 한스가 기스에게 질문하여 그가 교사임을 떠올리게 해주는 대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이어지고 재생산해야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노동하고 굴종하는 죄수가 아니라, 마땅한 불의에 맞서 위반하는 인간의 상이다. 빅터와 한스의 관계 또한, 빅터가 나약해지고 한스가 그를 돌봐줄 수 있는 1969년에는 과거의 관계에서 뒤바뀐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 특히 ‘시간표’나 과거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가장 적절한 형태로 실존한다. 필름 릴에서 포착되는 ‘애벌레’처럼 기존 상태에만 머물지 아니하고 변태하며, 누군가의 지시 없이 스스로 시간을 활용하는 존재로. 이러한 애벌레처럼 교도소에 오기 이전, 항상 도망 다니던 한스의 성 또한 자유로웠다. 하지만 국가가 성을 통제한다.      


앞서 언급한 푸코는 또 다른 저서 『성의 역사』에서 성이 정치, 경제적인 안건으로 떠오르는 이유를 고찰한다. 17세기 서구에서 성은 일반 시민들의 삶에서 순수하게 자유로웠으나, 18세기에 이르러 인구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로 떠오르며 도덕과 과학에서 성을 다루자, 성은 오직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만 얘기될 수 있었다. 이에 자유로운 성은 억제되었는데, 본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나치에 의해 성은 오직 번식을 위한 수단이 되어 이성애자에게만 허용되던 시절, 전쟁 당시 성욕을 조절하기 위해 배식에 약을 섞었던 시대임이 언급되고, 이러한 전쟁의 여파가 1969년까지 법에 남아있다. 그래서 한스의 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출산율이나 인구문제라는 공공문제에 따라서 공적으로 까발려져야만 했다. 성을 통제하는 법에 따라 빅터는 여성이 촬영된 포르노그래피를 들여다보고 있어야 하고, 한스의 성경을 오스카에게 전해주는 '대가'로 펠라치오를 받아야 했다. 성은 있는 그 자체로 논의될 수 없고, 어떤 대가나 특정 상황에서만 허용되는 것으로, 경제적·효율적인 것으로 전락한다. 이윽고 성을 더는 가두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는 변기를 내려 빅터를 위로하는 소리를 숨기지 않아도 되고, 강제된 성 지향성에서 일탈하고자 누군가를 살해할 필요도 없다. 석방된 한스는 '거대한 자유'라는 게이 바로 향한다. 이후 비상구 너머에서 적나라하게 성교를 나누는 게이들을 마주하지만, 그는 흡사 ‘전시되는 풍경’을 관조할 뿐 참여하진 않는다. 더 이상 고정된 카메라는 없고, 달리 숏으로 공간 곳곳을 누비지만 거기에는 쾌락만 전시될 뿐, 사랑이 없어 보인다. 한스가 기스를 위해 희생하고, 빅터와 한스가 ‘서로가 곧 자신인 양’ 일탈하던 희생이 말이다. 한스는 전시장에서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합법 이후에도 성은 정치로 남아있다. 법에 의해서 금기가 강제됐다면, 이제는 합법으로 가능함이 강제되는 것일까. 이에 한스는 맹목적으로 쾌락을 나누는 법의 굴레에서 달아난다. <스틸 라이프>에서처럼 강도로 위장하는 한스, 달리 숏의 움직임이 멈춘 고정된 카메라에 머무르며 체포되기를 기다리는 한스, 그는 ‘죄수’ 외의 정체성이 없는 존재, 금기에서 일탈하는 것이 일반화된 존재일 수도 있지만, 쾌락의 재생산이 아니라 그가 바라는 사랑을 위해서 빅터가 있는 교도소로 향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지막까지 촛불과 같은 태도로 말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알모도바르의 <패러렐 마더스>와 닮아있다. 본 작품과 알모도바르의 신작, 양자 모두 도입은 정치적이다. 알모도바르는 스페인 내전을 꼬집고, 마이즈는 2차 대전 종전 이후에도 존속된 독일의 동성애 탄압을 재현한다. 하지만 어느새 이들 작품은 드라마, 멜로로 뒤바뀐다. 이렇게 두 개의 장르가 혼용된 구성은 우리 삶에 맞닿은 멜로나 드라마에 정치는 어떻게든 투영, 굴절, 저항되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중 본 작품은 개인적인 삶에 미치는 정치의 여파에 초점을 둔다. 동성애를 불법화한 제도에 의해 동성애자는 항상 교도소로 향할 수밖에 없는 죄수로 만들어지고, 죄수 이전의 정체성이 기억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성애자 중심의 법에 순응하지 않고 줄곧 위반하여 동성애자의 성적·사회적 주체성을 줄곧 복기한다. 이러한 과정을 작년 개봉한 <베네데타>처럼 ‘예수됨’으로 표현한다. 동성애자는 한스가 기스 및 빅터의 죗값을 대신 짊어지는 모습, 빅터와 한스가 서로 헌신하는 모습, 이성애자의 세계에서 영영 유배되는 늘 ‘죄인’의 모습, 즉 예수의 상으로 그려진다. 한스의 예수됨은 규칙을 위반하여 선으로 나아가기, 객체에서 주체로서 신이 되기, 언제나 죄인이 되어 이성애자의 죄과까지 짊어지는 게이의 삶, 이단이 실현하는 기독교 정신 등 다양하게 동성애자를 조명한다. 이렇게 마이즈는 '성의 정치학'을 영화로 풀어낸다. 성의 정치학을 미니멀하고도 연극적인 연출로 풀어내던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기조를 따라가는 마시지는 20세기의 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성을 보여준다. 주제도 주제이지만 한스가 게이바로 향한 후반부에선 파스빈더의 대담한 미장센이 연상될 정도로, 정신과 물질 양자 모두가 파스빈더를 닮아있다. 파스빈더를 21세기로 이어내는 마이즈는 정치화된 성에서 항시 일탈하여 삶과 인간성을 되찾는 거대한 자유를 강조한다. 진정 선한 성은 합법도 불법도 아니어야 하고, 교도소와 비상구라는 특정 장소에 놓여서도 안 된다. 시공간에 좌우되지 않은 채로 자유롭게 바라보고 변용하며, 그 자체로 빛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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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62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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