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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n 29. 2022

박찬욱, <헤어질 결심>

리비도는 죽이면서 살고, 자아 욕동은 살면서 죽인다

박찬욱(Park Chan Wook),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 리비도는 죽이면서 살고, 자아 욕동은 살면서 죽인다

“세상 무엇 하나 두렵지 않은 순간들, 닻을 올리는 즉시, 애초 주어진 한계인 불가피한 추락일랑 더는 개의치 않고서, 심연을 향해 기꺼이 뛰어드는 이 도취의 순간들이야말로 우리가 지면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유일한 시간이다…….” -조르주 바타이유-

세계 속의 나는 불완전하다. 세계는 전진하며 인간이 계획했거나 좋아했던 것을 황폐화한다. 그렇게 실존과 파괴, 질서와 무질서가 뒤섞임에 세계는 추하거나, 이러한 결과를 내놓는 힘으로 숭고하게 보인다. 내가 세계 속에서 얼마나 하찮고 알량한지를 까발린다. 그런데 이러한 무질서함에서 질서를 건립하고,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전환하면 세상은 다시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제 각기의 질서와 개성을 가진 개별 요소들을 한데 모아 종합시켜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승화한 것이다. 이에 불완전한 우리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보며 경탄한다. 설령 내게 아름다운 것이 타인에게는 사악하고 추하다고 해도, 우리는 하찮은 자신을 포기하고 완전한 세계로 침잠해갈지 모른다.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 속 형사 해준이 살인 용의자인 서래에게 서서히 잠식되어가는 것도, 자신의 결핍을 비로소 완전하게 승화시키는 그녀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랴. 물론 하나의 아름다움에는, 기존의 완전함이 무질서로 뒤바뀌는 대가를 담보한다. 1963년 서울 태생의 박찬욱은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욕망, 쾌락, 에로티즘, 복수를 소재로 하고, 이를 탐미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뭐든지 예쁜 게 좋다는 대사, 극의 추악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유미주의, <아가씨>의 정교한 미장센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와 같은 ‘미와 악의 혼재’는 그의 작품 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정수다. 박찬욱의 세계에선 마냥 아름답다는 이유로 대상에게 사로잡히고, 이러한 미는 다른 부분에서 사악하거나 해를 끼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범으로 보도되어 지탄받아야 할 대상인 금자씨가 단지 아름답다는 이유로 예찬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라. 이후에도 금자씨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기분좋아하고 선하게 여기지만, 실상 그녀의 악의에 포섭되어간다는 것을 모른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도 친절해서 듣기 좋은 의료인의 목소리 배후에는 전기충격, 코로 음식물 흡입, ‘정상’적인 규칙에의 편입 등 광인들의 자유에 나쁜 것들이 깔려있다. 광인들의 자유, 때로 사악한 바람은 타인의 눈, 보편적인 시선에서 이질적인 것, 불쾌한 것으로 그려진다. 자신들에게 좋고 아름다운 것은 타인에게 고통이다, 미/추는 선/악과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박찬욱은 이렇게 유미주의를 찬미하는 인류의 태도를 연출과 내용으로 고찰한다. 그래서 박찬욱의 작품은 타인에게 예뻐 보이고자 하는 심리가 연출에서도 작위적으로 도드라진다. 아름다움 및 쾌감을 위해선 항시 희생과 악이 수반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내게 좋은 것은 살인, 카니발리즘, 간통, 사디즘이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악하다. 백한상의 범행 동기는 단순히 내게 좋기 위함이다. 아이들의 불쾌한 울음소리가 단지 듣기 싫어서 살해한 것, 한갓 요트를 구매하기 위해 그들을 유괴한 단순성은 하잘 것 없는 선/악을 보여준다. <아가씨>에서 남성들의 눈에 보기 좋은 용모, 남성들을 위한 쾌락 이론은 여성을 인형으로 전락시키고, 그녀들이 놓인 공간을 미로, 도서관, 보존실로 만든다. 이렇듯 박찬욱의 아름다움과 욕망은 주로 사악함과 한 쌍인데, 이는 에로티즘이 죽음으로 다가서며 '좋은 것'이라 주장하는 조르주 바타이유와 유사하다. 순수는 없다. 선에는 악이, 좋은 것에는 불쾌가 뒤섞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순수한 복수는 곧 아이의 몸값인 계좌번호가 뒤섞이고, 복수를 처벌해야 할 형사는 복수의 공모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회개한다. 욕망으로 지탱되는 삶을 위해 우리는 내내 죄를 짓기 때문이다. <박쥐>에서는 이러한 삶에 따른 희생을 역설한다. 신부, 식물인간, 국제결혼 및 민며느리로 생존하기 위해 나의 자유를 헌납한다. 또 쾌락, 생존 이상의 '좋음'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거나 안정성을 포기한다. 용서받기 위해 주임신부를, 욕망을 위해 타인의 피를 갈망하며 범죄로 일탈한다. 기존 및 합법의 일탈은 곧 삶의 일탈로 일어진다. '아프지만 좋아'라는 대사처럼 쾌를 위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항상 불법을 저지르는 인간의 뒤에는 죄책감이 따라다닌다. 때론 관념이지만 심지어는 구체적인 물질로, 그래서 이것마저도 끌어안거나, 죄책감의 불쾌를 외면하기 위해 위반의 쾌감에 더욱 탐닉한다.      


헐리우드에서의 첫 번째 작품인 <스토커>도 <박쥐>와 많은 부분 유사하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잡아먹어야 한다. 찰스는 사랑받고 사랑하기 위해서, 인디아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살해한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새끼 독수리’들이 형제까지도 잔혹하게 살해하며 성체로 자라나는 것처럼, 이기적인 생존과 욕구를 위해 우리는 항시 죄를 짓는다. 그래서 <박쥐>에서처럼 인물들은 ‘샤워’하며 몸에 묻은 죄를 벅벅 닦아내고 지워낸다. 이렇게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박찬욱의 세계에서 주로 주인공은 여성이요, 남성들은 그녀들을 지배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백한상은 금자씨에게 누명을 씌우고, <아가씨>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하여 감금하고 관리한다. <스토커>에서도 남성이 음식을 만드는 등 가정환경을 조성하고 우산을 씌워주고 운전하며 여성을 태운다. 이블린이 남편 사후 아무것도 제 손으로 못할 것이란 대사가 나오는 것처럼, 남성에 의해 여성은 만들어진다. 박찬욱은 작품에서 이를 뒤집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서 금기로 치부되는 것을 뒤엎고 욕망을 성취하는 저항적 의례를 수행한다. 박찬욱은 흡사 타란티노처럼 쾌를 자극하는 장면들을 아주 길게, 자극적으로 펼쳐놓는다. 그의 영화가 현실에서 사악한 우리 욕망의 대리물이라는 듯이, 하나의 해우소처럼 말이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저항의 대상은 보편적인, '정상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도다. 광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과 보편적인 제도-질서정연한 톱니바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부조리-가 강요한 행동 양식 사이에서 갈팡질팡 충돌한다. 저항은 그들이 바라는 것으로 나아가고,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이질적이고 이상한 타자를 포용한다. <스토커>에서도 광인은 찰스를 통해 이어서 등장한다. 박찬욱의 광인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제도의 피해자, 감정 및 생각들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솔직한 존재, 그래서 보편에 어긋나 주변부로 내몰리고 관리되는 존재, <스토커>에서 사랑하고 받고 싶은 존재,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지나치고도 극단적으로 발현되는 진실한 존재가 바로 푸코가 밝힌 광인이다.      


박찬욱의 세계에서 광인들은 포용, 따라 하기 등을 통해 하나는 곧 다수가 되어 함께 일탈하고, 그들이 끝끝내 보편이 된다. 박찬욱의 작품에서 하나의 계획에 다수가 참여하거나, 타인이 내게 번뜩이는 생각을 제공하는 영감 등의 '협동'은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에서 강조된다. 이러한 그가 신작으로 찾아온다. 형사로서 공공에 악한 것을 추적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내게 선한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해준, 박찬욱의 작품에서 아름답지만 사악한 미인의 전형인 서래의 사랑 이야기로 말이다.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는 연출은 바로 하이앵글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기도수의 추락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을 하이앵글 익스트림 롱숏으로 비추고, 결말에선 서래를 찾아 해변을 헤매는 해준을 마찬가지의 구도로 포착한다. 이러한 숏은 광활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해준이 어딜 가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이러한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한 갑갑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과연 누가 지켜보고, 또 어디서 벗어날 수 없을까. 정안의 말에 따르면 해준은 항시 미제 사건, 파헤쳐져야만 하는 살인 사건에 매혹된다. 해준은 이러한 사건을 접하지 않는다면 시름시름 시들어간다. 2부의 도입부처럼 말이다. 그는 형사로서의 자아뿐만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여지가 많은 추상적 미제 사건 속에서 숨을 쉰다. 그에게 미제 사건은 삶을 버티게 만드는 리비도다. 그를 옭아매는 정안의 질서에서 달아나 위반하고 숨쉬기 위해, 또 그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서래를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서래 또한 독립군 집안이 남긴 전언을 따라가며 한국에 ‘돌아오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하늘 아래서 결코 달아날 수 없음을 명시하는 하이앵글로, 미제 사건과 운명으로 항시 되돌아오는 인간을 포착하는 것, 결국 인간은 인간으로서 달아날 수 없다. 인간과 리비도로 되돌아오며 인간은 역설적인 광활함, 해방감을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또 본 작품은 카메라 움직임보다는 편집을 통한 여러 갈래로의 이동이 도드라진다. 그래도 인상적인 움직임을 꼽자면 현실, 현재에서 기껏 패닝 수준에만 그치던 해준의 시점 숏, 의식이 서래를 상상하며 핸드헬드, 달리 숏으로 뒤바뀌는 것을 꼽을 수 있다. 경찰서와 정안의 집에서 패닝 및 틸트 수준에 그치던 해준, 반면 머릿속에서 서래의 집을 거니는 해준의 상상은 카메라 움직임이 더 유려하다. 이러한 카메라의 운동보다 영화는 편집이 더 눈에 띈다. 일단 매치 컷이다. 영화에선 해준의 눈이 기도수의 눈, 호신의 눈과 매치 컷된다. 형사는 눈을 뜬 채로 죽은 피해자들이 최후의 동공에 담은 용의자를 추적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으로 보기 위해 눈에 인공 눈물을 넣는다. 그러나 인공 눈물을 넣어서 선명해지고 명쾌해지는 것은 피해자의 눈뿐만 아니라, 해준의 눈이기도 하다. 분명 도수의 눈동자와 매치 컷 되었음에도 선명해지는 것은 해준이 서래를 바라보는, 정욕이 들끓는 리비도의 눈이다. 그래서 이후 해준의 눈·의식과 매치 컷 및 교차편집 되는 것은 서래의 삶이다. 해준은 정안과 의무적인 섹스를 갖지만, 눈을 감고 서래의 삶을 상상한다. 이후 서래의 삶이 해준의 침실과 교차편집 및 매치 컷된다. 또 서래가 자신에게 '굿 모닝'이라고 건넨 말을 따라 한다. 형사이자 정안의 남편으로서 서래와 함께 있을 수 없는 해준은 자기 삶을 서래와 '매치 컷'함으로써 환상을 대리만족한다. 이후 부산에서 이포로 옮겨간 2부에서는 서래가 해준의 삶을 매치 컷, 교차 편집한다. 해준이 서래에게 사준 초밥을 먹고, 1부의 살인 사건을 유사하게 재현하며 말이다. 그리고 서래는 1부에서 사랑을 위해 경찰로서 자부심을 '붕괴'한 해준 또한 매치 컷 및 교차 편집한다. 2부는 서래가 해준을 만나기 위해 사건을 재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재수사를 독려하며 경찰 해준을 위해 서래는 자멸한다. 후술하겠지만 사랑은 곧 닮아감일지도 모르므로. 그래서 이들이 흠뻑 사랑에 빠졌을 때, 박찬욱은 둘이 하나가 되는 마술적인 숏을 구사한다. 1부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빨려들기 시작할 때, 하나의 테이크에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마술적인 테이크를 구축한다. 그렇게 상대와 나의 시간, 공간, 의식은 뒤섞인다는 듯이.      


한편 2부에서 해준은 서래와 거리를 둔다. 또 서래가 그를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가 붕괴된 해준의 경찰로서의 자부심을 드높여주기 위해서 전개된다. 그래서 1부의 초밥은 2부에서 핫도그로 이어져 더 이상 매치 컷되지 않고, 또 서래의 혐의를 수사하는 숏에서 해준은 서래와 하나의 테이크에 더는 공존하지 않고, 플래시백으로 현재와 과거, 자신과 서래를 냉정하게 분리한다. 이런 점에서 1부의 환상과 사실이 공존하는 숏은 형사로서 이성적인 해준, 인간으로서 정념적인 해준이 뒤섞인 숏으로 볼 수 있다. 용의자로서 서래, 흠모하는 서래가 뒤섞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압도한다. 그래서 2부에서 형사 해준은 욕망하는 해준을 분리하지만, 결국 이는 다시 뒤섞인다. 결말에서 경찰로서 서래를 찾는 해준, 연인으로서 서래를 찾는 해준, 두 모습이 보이지만 결국 후자에 의해 전자는 도구화된다. 용의자 서래가 아니라, 연인 서래를 찾기 위해 경찰을 동원한다. 2부의 결말에서 서래는 해준이 서 있던 땅 아래 영원히 파묻혔고, 해준은 이를 꿈에도 모르며 무한히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멀어지면 우리는 찾고 싶다. 그래서 수사 현장에서 증거에 다가서는 클로즈업, 줌인에 주목할 법하다.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면 선명하게, 멀리 있다면 다가서고, 반면 너무 가까이 있다면 줌 아웃으로 멀어져서 넓어진 여지를 상상한다. 그렇게 줌 아웃으로 멀어져서 갈망하는 것은 바로 '불가능'이다. 영화의 주된 상징은 안개와 바다다. 영화는 정훈희의 <안개>가 극을 관통하는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고, 이에 걸맞게 영화의 도입에서 이포로 되돌아가는 해준이 밤안개를 뚫고 운전한다. 또 서래는 딱딱하여 변화의 여지가 드문 산이 아니라 언제나 유동하는 바다를 좋아하고, 이를 보여주기 위한 공책, 벽지가 인상적이다. 안개와 바다의 특징은 대상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영화 속 안개는 해준이 보고자 하는 대상을 아스라하고도 희미하게 가리고, 바다는 핸드폰과 서래를 파묻는 공간이다. 그렇게 희미해지면 선명하게 다가서고 싶고, 파묻히면 들춰내고 싶다. 그것이 곧 사랑이다. 우리는 익히 다 드러나 있는 대상을 흠모하지 않는다. 더 알고 싶은 대상, 우리의 기존 일상을 무너뜨리는 환상적이고 특별한 대상, 심지어 나 자신을 파괴해도 상관없는 대상을 흠모한다.     


이러한 박찬욱의 사랑은 바타이유의 에로티시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바타이유에게 욕망이나 섹스는 언제나 위반이다. 인습, 세속, 노동만 가능한 질서를 위반하여 불가능의 차원으로 나아가는데 그것이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세속을 넘어선 신성이다. 그러한 처음의 위반은 신성하여 경외감이 들고 공포가 일지만, 이후 결혼해서 '합법적'으로 관계가 가능해진다면 연인은 곧 ‘두 노동자’로 전락한다. 현실에서 대죄를 저질러 다가선 짜릿한 불가능은 곧 현실의 질서로 편입되어 심심한 가능이 된다. 그래서 결혼 이전의 불완전한 욕망, 결혼 이후에는 배신의 금기를 넘는 욕망에 인간은 굶주린다. 특히나 신성으로의 위반은 언제나 '뚜렷‘하게 속과 구분되어야만 짙게 느껴지는 법이므로, 불가능의 문턱이 두터워지면 위반의 강도는 더욱 커지는 법이다. 박찬욱은 그간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본 작품에서 특히나 에로티시즘을 깊이 탐구한다. 해준과 서래, 서로가 연인에게 다가서는 위반은 이러한 에로티시즘에 온당 부합한다. 해준의 부인 정안은 원전 관리자다. 정안은 인간에게 큰 재앙을 불러올 원자력 발전소의 불확실성을 안전하게 통제한다. 2부에서 그녀는 호신에게 원전은 위험하지 않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이를 위해서 무수한 cctv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원전을 관리하는 철두철미함은 해준과의 관계로 이어진다. 정안에게 해준과의 섹스는 의무였으면 좋겠다. 부부의 섹스는 익히 가능한 것이다. 또 섹스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 석류 또한 무의미하게 맛이나 향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갱년기를 예방하기 위해서 꼭 먹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에겐 취식, 섹스라는 원초적인 행위에도 모두 ‘해야만 하는’ 이성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심지어 해준과 헤어질 것을 대비한 모양인지, 해준의 ‘대용’인 동료 남성도 갖춰놓는다. 그렇게 계산되어서 해야만 하는 것들이 해준은 지겹다. 일이 끝나면 마땅히 공적 질서를 위반하여 자유로운 사적 삶을 누려야 하지만, 정안과 함께 있으면 다시 질서에 봉사하는 공적인 삶이 이어진다. 그녀는 해준의 흡연도 금지 및 통제한다. 해준은 그녀 질서를 위한 존재가 된다. 해준은 그녀의 언어가 '이과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녀는 해야만 하는 것과 해선 안 되는 것을 명료하게 계산하고 규정한다. 그런데 그녀가 해선 안 된다고 규정한 것에 해준은 매료된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에게 이끌린다.      


기혼자에게 불륜은 대죄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을 실현했다는 대죄의 쾌감은 더욱 커다란 법이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의 집을 그저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수준에 그치다가, 이윽고 물질적으로 문지방을 넘어선다. 또 서래는 정안과 정반대다. 정안이 모든 것이 명쾌하고 빠져나갈 틈이 없는 이과의 언어를 구사한다면, 서래의 미숙한 한국어는 빠져나갈 틈이 많다. 또 그녀가 중국어를 말할 때는 번역이 필요하다. 빠져나가는 언어, 번역해야 하는 언어, 내 귀에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언어를 위해 해준은 중국어를 배운다. 이러한 서래의 언어는 곧 해준도 닮아 가는데, 2부에서 호신이 '사랑해'라고 직접 말한다면, 해준은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넌지시 돌리고 숨겨서 말한다. 해준은 이러한 신비로운 언어의 베일을 한 겹 벗기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데, 정안은 스스로 모든 것을 들춰내서 신비를 없애는 반면, 서래는 불태우고 감추어 불가능한 신비를 만드는 사람이다. 2부의 서래 또한 ‘사랑해’를 까서 펼쳐놓는 호신이 아니라, ‘사랑해’라는 말을 불가능하게 숨겨놓고 녹음 일부만 전해주는 해준에게 매혹된다. 모든 것이 드러나 있어 더는 밝힐 것이 없는 정안과 호신, 반면 모든 것이 모호하여 보이지 않는 서래와 해준이 감춘 것, 그렇게 내가 보고 듣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마주하고 싶다. 한편 2부에서 정안이 해준에게 헤어지자며 집을 나설 때 해준은 잠시 붙잡는다. 더는 정안을 느낄 수 없을 때, 습관과도 같은 질서나 합법이 아닐 때 우리는 이러한 기존을 뛰어넘어 대상에게로 다가가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해준이 더 보고 싶은 서래는 리버스숏으로 마주하고 있어도 포커싱이 흐릿하거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또 서래는 해준의 현실 앞에서 나타나 있지 않고, 모니터로 간접 현현한다. 5월 개봉한 <파리, 13구>에서 노라와 엠버의 관계처럼, 그래서 해준은 현실에서 그녀를 보고 싶다. 서래는 서서히 선명해지고 포커싱도 명확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명쾌해져도 서래는 여전히 모호한 존재다. 그녀가 좋아하는 바다처럼 유동적인 존재,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와 또 떠날지 모르는 존재, 사람을 살리는 간호사임과 동시에 어머니와 기도수, 철성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 2부에서 해준 곁에 다시 나타나도 여전히 온갖 비밀과 모호함을 간직한 여자, 이러한 불가능으로 뛰어넘고 싶은 여자다.     


이들은 닮았거나, 사랑하면서 닮아간다. 어쩌면 닮기 때문에 사랑했을까.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우정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선호하며, 결국 나 자신을 배려하는 이기적인 행위라 말한 바 있다. 또 하이데거는 타인과의 관계가 온당 타인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호 관계 속에서 공동 배려하는, 나와 타인이 뒤섞인 공동존재라 우정을 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쩌면 이들은 진정한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투영한 상대를 좋아하는 것일지 모른다. 1부에서 해준은 정안에게서 달아나고 싶다. 정안은 항시 기억하는 존재, 사적인 영역에서도 깨어있게 만드는 존재, 해준은 정안에게서 달아나 망각하고 자고 싶다. 이제는 후임 수완, 연수가 칭송하는 최연소 승진 경력도 심드렁하다. 이미 갖고 쟁취한 경찰로서 자아 보다, 현재 둔감해진 리비도가 더 중요하다. 서래는 이런 자신을 가능케 한다. 항시 깨어있어야만 하는 경찰 해준이 맡은 사건을 불사르고 말소하며 인간 해준으로 만들어주고, 이렇게 공적인 자신을 망각시키고 잠들게 하여 불면증을 치료한다. 그렇게 서래에게 빠져들며 해준은 수완에게 서래의 혐의를, 정안에게 불륜을 은닉하고, 서래의 핸드폰을 숨기는 사람, 즉 서래가 되어간다. 서래에 의해 산오를 이해하여 체포한다. 그녀의 언어, 중국어를 배워간다. 또 사랑에 흠뻑 빠진 해준은 사랑을 위해서 자멸할 수 있는 산오와 닮아간다. 이렇게 1부에서 해준이 사랑에 빠졌을 당시, 서래는 그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1부의 막바지에서 서래가 언제나 유혹만 한다면 익히 가능한 대상인 해준이 사라진다. 그렇게 해준이 사라지자 서래는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2부에선 그녀가 그를 닮아간다. 초밥을 먹는 해준의 기호, 먹고 양치하고 서래의 집을 청소해준 깔끔한 해준의 취향을 말이다. 1부에서 서래는 수완의 방문에 더럽히고 망가뜨리는 존재, 해준과 함께 있어야만 치우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또 자신에게 드러나 있던 해준처럼, 해준 앞에 드러나 있기 위해서 그가 있는 이포로 향한다. 그리고 경찰로서 자신을 붕괴시켜 서래를 구원해준 그를 닮아간다. 그의 자부심을 다시 드높이기 위해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증거를 건넨다.      


그렇게 이들은 닮아가지만, 만약 모든 것을 닮아서 불가능의 요소가 남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져 버렸다면 이들의 감정은 그저 통속으로 전락하리. 그래서 서래의 말처럼 진정한 사랑은 안착할 수 없다. 위반으로 시작된 사랑은 닮음으로 이어지기에, 결국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선 전부 닮기 전에 헤어짐을 결심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선 영영 미제로 남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 나는 숨고 상대는 찾지 말지어다. 증거 건네기가 상대를 위한 것이라면, ‘미제로 남기’는 사랑하는 둘 다를 위한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헤어지는 본 작품에서는 상승함과 동시에 추락하는 모순적인 운동감이 도드라진다. 산오로 위장한 이지구, 산오를 잡기 위해서 오르막길, 계단을 올라 옥상을 뛰어넘어서 정상에서 그를 잡는다. 산오가 모든 구속에서 달아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그는 위로 달아난다. 기도수는 크나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산 정상으로 향하는데, 결국 정상의 쾌감이 서래에게 살해당할 여지를 남겼다. 기도수의 뒤를 몰래 따라간 서래도 암벽을 타고 정상으로 향하지만, 그렇게 정상에서 쟁취한 자유에 안락한 삶은 급속도로 추락하여 다시 일을 시작하고,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러한 정상, 높은 곳으로 올랐을 때, 그렇게 자유를 쟁취했을 때 이들은 사망한다. 직접적으로는 산오와 기도수가 그렇고, 간접적으로는 1부와 2부 결말의 해준, 서래가 그렇다. 1부에서 끝끝내 서래가 사는 아파트 고층에서 높은 쾌감을 만끽한 해준의 리비도는 서래에게 경찰로서 자신은 붕괴했다는 말을 남기며 욕망의 정점에서 경찰로서 자아는 추락한다. 2부의 서래 또한 구덩이를 파기 위해 일반 평지보다 높은 모래 둔덕을 만든다. 높게 쌓인 모래가 곧 해준과의 사랑일까, 하지만 이를 위해서 파놓은 구덩이에 자신을 묻으며 존재를 포기하고 모호함과 미지를 감당한다. 즉 영화에서 상승과 하강은 이중적으로 공존한다. 또 아름다운 쾌감을 위해선 거칠거칠한 굳은살이 박여야 하며, 해준은 수사와 욕망이란 양자 중 어느 하나만 깨끗이 ‘청소’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를 위해 추잡해야 한다. 서래 어머니와 철성의 어머니가 약물의 심미성을 즐기며 생을 마감하는 것도 이러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남편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선 다시 추적당하는 서래가 되어야 한다.   

  

하나의 상승을 겪으면 다른 것은 하강, 즉 희생해야 한다. 해준과 정안, 서래와 기도수 및 호신, 이들이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 건강과 종족 보존에 있어선 상승이다. 하지만 자유에서는 추락한다. 그들은 ‘죽는다, 살면서.’ 2부 시작에서 정안 곁의 해준은 분명 숨이 붙어 있지만, 그 추레한 몰골은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한편 해준과 서래가 세속을 위반하여 그들에게 다가서면, 이들은 진정 ‘산다, 죽으면서.’ 해준은 안락한 삶을 죽여가면서 서래와 삶을 이어가고, 또 누군가가 죽어야지만 제 삶의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존재이니. 서래는 중국, 부산, 이포로 옮겨 다니고, 정체성과 남편을 뒤바꾸며, 그렇게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며 항시 자유를 쟁취하였으니. 이 또한 바타이유의 이론에 따른다. 성애의 만족감은 무수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또 상대에게 내 알몸을 노출하는 크나큰 위험의 답례이므로, 위반의 자유 또한 사회와 공동체와 문명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연과 야만으로 내몰리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므로. 심지어 우리는 문명이 부여한 즉자, 사물, 존재자이기 이전, 필연적으로 자유롭고 리비도가 달린 인간이다. 그래서 항시 문명을 위반하는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다. 결혼이라는 법, 국가의 법을 해준과 산오는 위반한다. 폭행하는 남편들에게 속박된 서래와 산오의 연인 또한 위반하여 자유로 나아간다. 하지만 법이란 결국 해준이 정안에게로, 서래는 또 다른 남편을 갖게 만들며, 결국 자신과 문명에 이중적으로 속한다. 또 수완은 경찰로서 해준을 선망하면서도 주관적인 분노와 분풀이에 이지구를 폭행하며, 피해자의 눈으로 봐야 하는 경찰 해준은 필연적으로 리비도가 가리키는 자신의 눈을 포기할 수 없는, 이성과 본능이 혼재된 존재다. 그래서 행위도 진정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2부에서 자라에게 좋은 것은 인간에게 악하다. 재물이나 성욕을 잃는다. 하지만 자라에게 악한 것은 인간에게 좋다. 사랑 또한 그렇다. 사랑하기 위해선 늘 위반하고 모호하고 헤어져야만 하며, 같이 있고자 한다면 불타던 사랑은 식어만 간다. 녹색으로도 보이고 파랑으로도 보이는 서래의 청록색 의상처럼, 시선에 따라 선하고 악하게 보이게끔 양자 모두가 뒤섞여있다.      


그렇게 상승하고 하강하며 출렁이던 영화의 결말은 <박쥐>에서처럼 바다로 향한다. 모순적인 바다, 생명을 부여하면서 앗아가는 바다, 그 바다에서 사랑으로 살아가던 서래는 이를 위해서 죽음을 택한다. 사랑을 위해서 해준은 영영 연인을 찾을 수 없다. 그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인간, 그런 인간의 욕망과 사랑을 박찬욱이 신작에서 탐구한다. 인간은 항시 내가 갖지 못한 욕망이란 선물을 바란다. 서래는 밥을 주는 고양이에게 해준의 마음을 달라고 한다. 그 고양이가 서래에게 좋을 거라 생각한 까마귀를 선물하기 위해선, 까마귀에게 악한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렇게 선물로 얻는 욕망은 자유와 사랑, 이를 위해선 기존 나의 삶, 내가 속한 세속, 법을 위반해야 한다. 그래서 해준과 서래는 사랑을 위해 ‘수갑’을 찬다. 그렇게 희생해서 욕망을 성취했다 한들, 우리는 소중하고 짜릿한 욕망의 감각을 위해서 손에 쥔 욕망을 모순적으로 놔버려야 한다. 우리는 그 욕망이 내게 가능하지 않아서 열망한 것이므로 영영 미제로 보존한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의 연인 대신, 기억의 연인, 그리고 녹음기 속 파편적인 흔적과 순환한다. 그런 우리는 죽으며 살거나, 살면서 죽는다. 서래를 위해선 살면서 죽어야 하고, 정안을 위해선 죽으면서 살아야 한다. 해준의 눈에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서래는 피해자의 눈에 악하고 망측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경찰로서의 삶, 자신을 위한 삶 중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박찬욱은 늘 후자, 죽음과 광인의 길을 택한다. 사랑과 자유를 위해 차라리 죽을 것, 리비도가 생의 전부인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이므로. 그간 박찬욱이 욕망을 다룬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의 형식적 과잉에 비한다면 다르게 느껴지는 작품, 하지만 그가 늘 탐구하던 욕망에 있어선 항상 같고, 오히려 깊이 녹여낸 작품이라 하겠다. 사랑하기 위해선 헤어지고 죽어야 하며, 상승하면 추락하고 붕괴해야 하는 그의 바타이유적 관점을, 티저 포스터가 패러디한 <모나리자>의 스푸마토(선 대신 색채를 강조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부드러운 연기와 같은 기법)처럼 풀어낸다. 사랑하기 위해선 안개 속에서, 물처럼 머물지 않고 변화하고 위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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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629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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