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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02. 2022

마이크 밀스, <컴온 컴온>

미래로의 여행

마이크 밀스(Mike Mills), <컴온 컴온>(C'mon C'mon) - 미래로의 여행     

“아이들이 어른을 보면 이렇게 보이는구나!” -페터 한트케-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원리』 1부에서 나이대별로 달라지는, 욕구하고 욕망하며 희망하는 바를 고찰한다. 유년 시절의 자아는 '무엇을 갈망하는지'를 '갈망'한다. 바라는 것은 과연 내가 무엇을 바라느냐다. 그렇게 기다리고 떼를 쓰며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하다가, 어느새 아이는 꿈을 꾼다. 현재 바깥으로 나가서 내가 바라는 나를 수집한다. 그렇게 아이는 나중에 자신이 될 무언가를 미리 싹트게 한다. 갈망을 알게 된 아이는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를 알게 된다. 아이는 꿈이 무엇인지를 갈망하고, 이윽고 꿈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꿈을 꾸며 커가는 아이는 이윽고 청년이 된다. 꿈꾸는 사람은 이곳저곳에 머무른다. 더 나은 삶을 향해서, 꿈을 향한 최적의 장소를 찾으려 이리저리 방황한다. 이윽고 성년이 되면 청년들은 특정한 환경에 정착할지 모른다. 그렇게 성년이 되고 나면, 이제는 정착한 주위의 여건을 고려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미래를 확실하게 설정하길 원하던 청년들은, 원하는 미래를 일부 실현한 성년이 되면 과거로 향한다. 성년은 주로 후회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들 마음에는 중요한 무엇이 빠져있기에, 또 생활환경은 불만족스럽기에 나름의 ‘새로움’을 바란다. 항상 모든 것이 새로웠던 유년기, 많은 것이 단조로워졌지만 그럼에도 새로움을 바라는 성년, 바로 이 두 존재가 영화에서 만난다. 마이크 밀스가 2014년 태어난 아이를 양육하며 느꼈던 감정을, 빔 벤더스의 <도시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녹여낸 신작 <컴온 컴온>에서 말이다. 1966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태생의 마이크 밀스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영화감독이기 이전, 그래픽 디자이너,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썸서커>로 장편 데뷔하였다. <컴온 컴온>까지 총 네 편의 장편을 내놓은 그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기억과 함께 사는 현재를 탐구한다. <비기너스> 같은 경우 늦게 커밍아웃 한 아버지와 소외된 어머니, 이로 인해 불행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며, <우리의 20세기>에서는 항공사를 바랐지만 아내가 된 어머니의 삶이 아들 제이미에게 그늘처럼 드리운다.     


또 그의 영화는 자전적이기도 한데, <비기너스>에서 박물관 관장이자 늦은 나이에 커밍아웃 한 할은 마이크 밀스의 실제 아버지를 투영한다. 직업에서도, 커밍아웃한 나이도 말이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인물들이 나고 자란 시대상이 담긴 푸티지, 사진 등을 인서트한다. 한 인물은 인서트한 역사성, 시대성과 결코 유리되어 있지 않다는 듯,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푸티지 인서트가 그의 특징 중 하나다. 이와 더불어 그의 영화는 항시 플래시 포워드나 플래시백 구성을 취한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 현재’, ‘과거가 상기되는 현재’에 꼭 플래시백이 침투하고 이는 일회적이지 않다. 또 과거와 유사한 구도, 행위가 반복되는 숏이 매치 컷으로 겹쳐서 시퀀스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는 밀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기억과 현재,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반영한다. <비기너스>에서 떠난 아버지의 빈자리는 이제 현재에 아들이 대신 채워간다. 아버지의 죽음은 유품, 빈집 사이를 누비는 아들로 이어진다. 그렇게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가는 삶이기에, 부자의 삶은 제법 유사하다. 아버지가 과감하게 커밍아웃을 한 것처럼, 올리버도 아나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의 상징처럼, 부모는 하나의 품종을 만든 브리더와 같다. 하나의 품종에는 브리더의 의도가 깃들어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품종은 브리더의 손길, 브리더를 바라본 기억에서 마냥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브리더가 항시 좋은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올리버는 할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조지아의 아들이기도 하다. 동성애가 불법 및 질병으로 규정된 20세기를 살아온 할은 이성애자인 척 결혼했고, 그래서 조지아는 무심한 남편 때문에 항상 외로웠고, 이러한 부부관계를 보고 자란 올리버의 기억에 사랑은 '불연속'이다. 올리버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조지아를 닮아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인 일탈을 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아나와의 사랑이 영 원활하지 않다. <우리의 20세기>에서 영향은 이중적이다. 주체적인 삶을 꿈꿨기에 아들을 존중하면서도, 자신의 꿈이 좌절되고 얻은 소중한 아들이기에, 자식이 느끼기엔 갑갑한 영향력을 쏟는다. 1979년의 산타 바바라에서 자식들이 인생이 전부인 어머니들의 기억은 자식들에게 답답함과 반발심리를 드리운다.      


하지만 밀스의 작품은 과거, 기억, 부모, 품종에 얽매이길 바라지 않는다. <비기너스>에서 개량된 품종이 본래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처럼, 올리버가 기억을 모방하지 않고 부모와 자신이 해본 적 없는 선택을 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플래시 포워드에서 현재로 나아간다. <우리의 20세기>에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기억에 지배된다 한들, 어머니들이 나고 자란 시대와 아들·딸이 나고 자란 시대는 다르다. 도로시아는 자신의 가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쏟지만, 제이미나 줄리는 이러한 부모의 영향과 기억에서 달아나 '시작'을 하고, 그들보다 나이가 많고 이미 어머니를 떠난 아비가 도로시아 대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또 딸뻘의 여성들이 도로시아를 그들이 사는 시대로 인도하며 마찬가지로 시작을 보여준다. 기억은 일방적이지 않다. <비기너스>에서 세상을 뜬 부모에게 자식이 ‘처음의 기억들’을 심어줄 수 없었지만, <우리의 20세기>처럼 여전히 살아있다면 기억은 계속 상호 축적된다. 제이미가 태어나서 불발되었던 어머니의 꿈이 제이미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처럼. 밀스는 이번 작품 <컴온 컴온>에서도 기억을 탐구한다. <비기너스>처럼 현재에 가야 할 곳을 기억이 가리키거나, 때론 습관·아집과 같은 기억이 발목을 붙잡기도 하지만, <우리의 20세기>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자극받아 기억에서 탄생으로, 과거로부터 미래로 나아가는 작품이 바로 <컴온 컴온>이다. <비기너스>는 동시대에서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줄곧 오갔고, <우리의 20세기>는 배경이 1979년이었다. 그리고 본 작품은 아예 오늘날로 시대를 옮겨온다. 플래시백이 활용되긴 하지만 이전 작품들처럼 잦진 않고, 또 그리 먼 과거로 가지 않는다. 기억 자체가 21세기에 머무른다. 그래서일까, 밀스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큰 변화를 준 연출은 인서트다. 전 작품들에서 시대상을 상세히 묘사하는 밀스는 당대의 대통령, 사건, 사물 등의 ‘사진’을 인서트했다. 오늘날이 영상이라면 과거는 이미 멈추어버린 사진, 또 오늘날로부터 과거를 파악하는 일은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뒤로 가는 역행, 이미 지나간 것들의 갑작스러운 침투, 즉 이질적인 '삽입'이다.     


그래서 과거를 다루는 밀스는 인서트하였으나, 오늘날에 머무르는 본 작품에서는 인서트하지 않는다. 하지만 밀스에게서 한 개인은 공간 및 시대에서 유리되어 있지 않기에, 영화 속 인물을 둘러싼 배경은 인서트가 아니더라도 상세하게 묘사해야 한다. 그렇게 인서트로 시대를 지칭하던 연출에서, 현재의 인물들을 포착한 숏들과 별다르지 않은 촬영으로 오늘날의 디트로이트, LA, 뉴욕, 뉴올리언스를 가리키지만, 영화 자체는 매우 복고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흑백’이라는 점이다. 본 작품을 수입해온 찬란에서 5월에 배급한 <파리, 13구>에서도 과거를 지칭하는 흑백이 아니라, 현대의 특정 성격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흑백을 사용했었는데 본 작품에서도 맥락은 유사하다. 흑백이라는 점에서 처음에는 영화의 배경이 과거는 아닐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곧 스마트폰이라는 현대적인 사물이 나타나 의심은 종식된다. 그렇게 하나의 의문은 해소되었지만, 이제 우리에겐 "왜 흑백이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뒤따른다. 이에 답하기 위해선 흑백의 성격과 영화를 조명해야 한다. 본 작품의 흑백은 명암 대비가 낮아서 매우 희다. 의도적으로 조명을 세팅하여 명암을 짙게 한, 고전적이고도 인위적인 흑백 영화가 아니라, 온 세상에 평평하게 빛을 쏟아내는 태양이 조명이 되어 빛과 어둠은 매우 엷게 퍼져나간다. 그래서 영화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빈곤하다는 인상을 준다. 빛과 어둠으로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희소한 빛과 어둠을 넓게 분배한 것만 같다. 그래서 영화의 흑백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한 공허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 이는 영화 속 인물들의 상황에 상응한다. 조니는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해 질문하며 인터뷰하는 저널리스트다. 조니가 아이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그들에게서 조니 및 성인들이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된다. 바로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다. 아이들도 분명 현재의 문제를 인식한다. 디트로이트, LA, 뉴욕, 뉴올리언스, 각각의 다른 환경에 놓이며 이민이나 기후, 교육 등 주목하는 문제가 달라지는데,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이러한 과제가 해결되어 더 나을 수 있다는 기대를 내던지지 않는다.      


특히 뉴욕의 한 아이는 동생에게 지금 처한 문제를 물려주기 싫다고 말한다. 맹랑한 아이들에게 미래는 백지장이자, 그들은 펜이요 물감이겠지만, 어른들에게는 다르다. 미래에 달라지기를 고대하기보다는, 현재에도 과거의 기억을 습관처럼 계속 재생산하는 그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흑백은 ‘결핍’이다. 아이들과 비교해서 어른들이 잃어버린 자유로운 사고와 가능성, 채색된 미래, 채워져야 할 앎을 기약하기 위한, 오늘날의 색이 채워지지 않은 흑백으로 말이다. 영화의 흑백은 어른에게 아이가, 현재의 문제가 미래에서 극복되고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영화의 연출은 운동감에도 집중해야 한다. 영화의 도입에서는 운동이 거의 없다. 대상을 인터뷰하는 고정된 카메라, 흡사 다큐멘터리의 촬영 양식을 빌려온 듯한 뻣뻣하고 딱딱한, 대상을 전시하는 것만 같은 숏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고정된 것은 카메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머물러 있는 것은 조니 또한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임종 이후 험악해진 여동생 비브와의 관계는 조금도 달라지거나 움직이지 않은 채, 그 당시에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미래는 바뀔 수 있다고 답변하는 내용을 들으며 영화의 카메라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녹음된 아이들의 답변을 다시 듣는 조니를 포착하는 패닝, 아이들의 답변이 파생된 공간을 광활하고도 숭고하게 촬영하는 드론 숏, 대상에게 집중해가는 줌인 등으로 말이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기대에 따른 움직임, 이렇게 영화의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과거에 멈추어 있던 인물들도 서서히 변화한다. 냉각되어 있던 조니와 비브의 관계는 1년 만에 통화하며 사르르 녹기 시작하고, 그렇게 비브에게서 굳어 있던 과거의 어느 한 국면이 녹자, 마찬가지로 얼려두고 방치하던 폴에게 향할 수 있는,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는 온기를 얻는다. 이렇게 현재의 움직이는 카메라로 나아가는 작품이기에, 이전 작들과 달리 플래시백은 드물다. 플래시백의 사용도 차이가 있는데, 제시의 눈에 조니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여서 질문한다. 조니는 제시가 질문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본인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것이 어른들에게는 정상이다.      


그런데 제시의 질문으로 곰곰이 돌이켜보니 행동의 근원은 과거 어머니의 병실, 비브와의 다툼 등이었고, 현재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당시에는 그럴 수 있었어도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영화의 플래시백은 현재의 '편집증'에 대한 답변이요, 이러한 기억에서 영화는 항시 줌 아웃으로 '멀어지는' 운동감이 특징이다. 이제 영화를 더 살펴보자. 영화 속 어른들은 과거로 순환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니는 비브와 어머니의 간병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이후 어머니는 세상을 하직하셨지만, 그런데도 남매의 불화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또 조니는 오래 사귄 루이사와 결혼하지 못했고 헤어졌는데, 그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국면에 멈춰있거나 퇴보한다. 그리고 폴은 교향악단에 섭외돼 다른 도시로 향하지만, 기존 자신의 완벽함에 대한 기준과 새로 변화한 환경의 이질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난항을 겪는다. 그런 폴에게 비브가 향해 제시가 어머니 품에서 멀어진 순간에도, 어른은 아이의 변화를 예상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듯, 제시를 뉴욕에 동행하지 말고 LA에 남기라고 말한다. 비브는 제시가 LA에서 함께했던 기억 및 습관을 그녀 없이도 재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니 또한 마찬가지로 제시가 집에 칫솔을 놓고 온 것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소유한 아집에 붙잡힌 어른들, 이와 달리 아이들의 사고는 유연하고 자유롭다. 일단 그들은 기억이 적다. 어른들은 그들의 갈망을 온당 채워주지 않는다. 제시는 분명 아버지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비브는 폴의 편집증을 구체적이거나 직접적으로 아들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또 비브가 제시의 뉴욕행을 처음 거절했을 때, 조니는 왜 뉴욕에 가면 안 되는지를 제대로 고백하지 않는다. 이러한 직접적인 사실 대신 채워지는 것은 동화다. 아이들은 항상 자기 전 머리맡에서 보호자에게 동화를 듣는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세계라기보다는, 추상적이고 공상적인 세계, 이러한 느슨한 기억과 앎에 대해 채워지지 않은 갈망으로 아이들은 미래를 이모저모 상상한다.      


제시는 비브 및 조니와 고아가 되는 역할 놀이를 한다. 또 항상 부모와 붙어 있는 시간이 잦은 제시는 복고적인 취향과 클래식을 선호하는 두 부모의 음악 취향을 자연스레 따르게 되었다. 제시도 토요일에는 LP판을 크게 틀어놓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호가 완전히 굳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부모가 알려준 음악과 청각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니를 만난 이후에는 과거의 음악을 듣기보다는, 조니의 녹음 장비를 자신이 들고 다니며 거리의 소음, 자연의 정취, 행인들의 발소리 및 말소리를 녹음한다. 그렇게 자신이 모르는 무한한 것들을 갈망한다. 그래서 제시는 질문한다. 아직 더 채워져야 마땅한 아이들의 뇌는 항상 배고프다. 잘 모르는 것을 갈망하는 자신은 질문을 하는 것이 정상이고, 질문을 의아해하는 어른들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편 이미 아는 것에 익숙하고 당연하게 재생산하는 어른들은 질문이 이상하다. 또 어른들은 항시 나타나 있어야 한다. 기억에는 있지만 현재에는 없는 어머니, 루이사 등은 사라지는 것이 죽음 및 이별이요, 생존은 항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조니에게 알려준다. 하지만 아이들은 죽음을 모른다. 그래서 칫솔을 사다가도 장난치려고 사라지고, 또 조니가 통화하던 사이 제시는 길거리에서 없어진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의 시야에서 항상 나타나 있어야 한다는 기억이 없다. 또는 제시는 곁에서 부모가 불현듯 떠난 기억이 잦지 않을까. 제시는 폴을 자신의 미래인 양 동일시한다. 그래서 후반부의 제시는 폴처럼 되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폴과 닮은 제시는 자신에게서 아버지가 떠나가는 기억을 답습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도 다른 기억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세대에 있어선 다 비슷한 아이들이지만 디트로이트, LA, 뉴욕, 뉴올리언스 등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문제의식도 달라지고, 또 어떤 인종, 민족인지에 따라서 중요시 여기는 사유도 다르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상호 간 교류가 없다면, 우리는 내가 아는 기억과 습관을 계속 지리멸렬하게 반복하며 과거는 현재, 그리고 미래와 전혀 다를 게 없으리.      


그러나 상호 교류한다면 변화한다. 1년 전 비브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망상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1년 후, 비브는 제시의 '고아 놀이'에 동조한다. 조니가 이후 깨닫는 것처럼, 이상한 것은 평범성 및 현실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게 벗어난 이상한 것들이 마냥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아 되기는 폴과 비브에게 멀어져 혼자될 수 있는 제시, 어머니가 임종한 남매의 상황을 되새길 수 있다. 조니도 상호 교류한다. 일단 디트로이트에서 LA로 향한 조니, 그는 제시를 돌봐주러 비브 집에 머물며 그간 경험하지 못한 아이와 관계 맺는 기억을 축적한다. 이후 뉴욕으로 향한다. 제시는 설탕을 많이 섭취하면 안 되는데, 실수로 설탕을 과다 섭취하여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다. 또 LA와 기존의 멀쩡한 정신에서 이탈하니 LA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느껴졌지만, 뉴욕에 와보니 당연하지 않은 ‘친구가 없는 처지’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LA에 자신의 칫솔을 놔두고 오니, 고요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을 깨트리는 수다스러운 전동칫솔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재생산되는 교우 생활, 자신의 일상을 중단하고 새로운 것을 침투시키며, 아이들이 답하는 진정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목도한다. 이후 뉴올리언스로 향한다. 공항에 가서 비브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제시는 이를 거부한다. 그렇게 뉴올리언스로 향하고 어머니와의 공백이 길어지자, 제시는 당연했던 어머니의 취향을 곱씹기 시작한다. 목욕을 좋아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스테이크를 와구와구 먹으며, 복고적인 음악 취향을 가진 작가 엄마, LA에서는 너무나 당연했지만 뉴올리언스에서는 당연하지 않은 어머니를 복기한다. 또 뉴올리언스의 퍼레이드에서 조니는 갑자기 쓰러진다. 플래시백이 반복되며 기억을 회고하는 도중에 그는 현기증을 느꼈다. 기억은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후 제시와 조니는 숲에 가서 고함을 치며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다고 고함치는 것이 합리적이라 말하며, LA나 뉴욕의 기억에서는 불가능했던 고함을 외친다.      


그렇게 현재의 나를 위해서, 그리고 과거 및 현재와 다른 미래를 기약하기 위해선 기억을 이탈하고 새로운 기억을 쌓아야 한다. 여행은 집으로 되돌아오기에 여행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행은 기억을 선물로 남기고, 여행을 마친 우리가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과거의 일상에서 수행했던 것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을 테다. 또 영화 속 조니의 인터뷰는 어른이 원하는 질문과 답변을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 질문은 통과하거나 싫다고 말하며 주체적으로 답한다. 그렇게 어른들의 생각과 다르게 답한 아이들의 얘기를 곱씹으며,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여행을 잠시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어른들 또한 일상의 전환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이렇게 네 번째 장편에서도 기억을 얘기하는 마이크 밀스는 여행과 새로운 기억의 미덕을 보여준다. 기억을 반복하는 어른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아이들과 새로운 환경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는 미래의 나를 발견할 수 있으리. 이러한 본 작품에서는 밀스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여성상도 눈에 띈다. <비기너스>에서의 상처받은 어머니, <우리의 20세기>에서의 미혼모, 본 작품에서도 폴과 제시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비브가 등장한다. 여성은 ‘희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인데, <우리의 20세기>도 그렇고 본 작품도 이러한 기억에서의 이탈, ‘남성의 어머니 되기’를 촉구한다. 어른은 아이가 되고, 남성은 어머니가 되며 그렇게 기존은 확장되고, 모두를 둘러싼 진창은 말끔히 정리된다. 그렇게 우리는 미래를 본다. 밀스가 미래를 엿보기 이전, 문제가 가득한 우리네 환경을 그려내는 상황은 가히 '카사베츠적'이라 할법하다. 미치지 않고선 못 배길 듯한 극단적인 환경, 하지만 이를 심리·내면에 상응하는 어두운 양식과 현실적인 인물로 풀어내던 카사베츠와 달리, 밀스는 언제나 낙관적이고도 이상적으로 해소한다. 그의 엷은 흑백처럼 다소 낙천적이고 느슨하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기억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일탈의 계기를 제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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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70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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