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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10. 2022

오드리 디완, <레벤느망>

여자의 실존

오드리 디완(Audrey Diwan), <레벤느망>(Happening) - 여자의 실존  

“정의로운 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매번 ‘모든 게 끝났다.’라는 명목으로 이전 희생자들에게 입 다물 것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 이전과 똑같은 침묵을 일어나게 하는 일들을 다시 뒤덮어 버려도 말이다.” 

-아니 에르노-

그녀는 병원으로 향한다. 그녀는 병원으로 향하는 과정을 상세히 글로 남긴다. 그녀는 평소라면 의식도 안 했을 행인들의 시선이 민감하다. 신경이 예리하게 곤두선다. 자신의 병명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단계, 더욱이 성병에 대한 공포가 사회 전역에 팽배했던 시기, 그녀는 비로소 음성 판정을 받자 안심한다. 하지만 또 다른 불안이 그녀에게 찾아온다. 그녀에게 음성 판정과 함께 임신이란 검진 결과가 도착하여 불확실성을 해소함과 동시에, 내 몸이 변화하는 불확실성이 새롭게 부여된다. 배에서 자라나는 아이를 홀로 돌봐야 한다는 공포, 내가 원치 않는 몸과 삶으로의 전환, 이는 그녀 외부의 어떤 사건들보다도 더욱더 무섭게 엄습한다. 외부에서 발생하는 크나큰 추문은 그녀의 이목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중절을 결심하지만, 이와 관련된 어떠한 책과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금기시되는 행위, 쉬쉬하는 입, 말소된 경험, 그래서 그녀는 중절 경험을 상세히 기록하고자 한다. 그녀는 중절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이는 둘이서 만든 것이지만, 그중 하나는 신념, 윤리관을 들어 발을 빼려 한다. 또 중절 경험이 있는 다른 여성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낙태한 여성들은 당시 범법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침묵한다. 병원에 방문하더라도 '임신 중절'이란 단어를 직접 언급할 수 없고, 의사들도 다만 처지를 연민해줄 뿐 감히 나서지 못한다. 그녀는 어머니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논문을 쓰는 학생이길 바란다. 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중절하지 못하는 상황보다 더욱 암담하게 느껴진다. 시대는 60년대, 공간은 프랑스, 2차 대전 이후로 전쟁 이전 쌓아왔던 모든 도덕과 윤리관의 신화가 무너진 시대,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국가의 토대를 이루었던 구시대의 잔재를 다시금 엄격하게 강화하던 시대가 곧 60년대다. 이에 감시를 피해 신뢰할 수 없고, 신분도 파악하기 어려운 업자에게 그녀의 몸을 맡긴다. 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두려움을 임신의 공포가 압도한다. 그녀는 오직 수술 날짜가 다가오기만을 절실히 기다린다.     


수술은 끔찍했다. 고통은 극심했고, 바로 일상을 회복할 수 없었으며, 자궁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가기까진 이틀 정도가 더 소요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극히 일부에게만 공유한 그녀는 수술 이후에 닥쳐오는 고통조차도 철저하게 은닉하고 참아내며 ‘합법을 연기’한다.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당대의 불법을 세세하게 기록한다. 수술 이후의 상태, 빠져나온 태아의 용모… 이 사건은 그녀가 벌인 것이 아니라, 닥쳐온 것이었다. 임신부터 중절까지, 그것은 언제나 나만의 선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언제나 타인이 있었고, 제도가 있었기에 닥쳐온 사건이었다. 이는 프랑스의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인 이야기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이를 서두에 옮긴 이유는, 1980년 레바논 태생의 프랑스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인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이 본 『사건』을 영상화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1950년대 영국 런던의 뒷골목에서 임신 중절을 시술하던 베라 드레이크라는 여인의 선량한 내지는 평범한 얼굴을 포착한 마이크 리 감독의 <베라 드레이크>와 2차 대전 이후 무너져버린 남성의 신화를 재건하기 위해, 불법으로 낙태를 시술하던 여인에게 과한 사형을 선고한 법과 제도의 위선을 까발린 끌로드 샤브롤의 <여자 이야기>, 그리고 피임과 낙태가 불법화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체제에서 낙태를 시도하는 여성의 뒤를 치열하게 따라나선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계보를 이어가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몸의 변화와 임신의 공포를 직접 경험하는 여성 감독의 시선에서 말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1.37:1의 화면비다. 보통 좁다란 화면비는 시대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산하고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등이 이에 적절한 예시다. 하지만 자비에 돌란의 <마미>처럼 개인의 내면이나 심리, 상황을 가시화하는 형식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본 작품에서의 맥락은 후자에 가깝다. 1960년대를 다루는 작품으로, 당시 1.37:1의 화면비는 사양된 매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TV 브라운관이란 매체성에 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당시에 사용되는 매체라기보다는, 영화의 주인공과 당대 여성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화면비로 1.37:1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영화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여자 이야기>와 시공간이 유사하다. 그래서 아이를 원치 않는 여성들은 낙태함으로써 제 삶을 돌려받기가 쉽지 않았고, 심지어 징역형에 처해 제 삶을 어떻게든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차별적인 법, 남성 중심적인 제도에 의해 여성의 삶이 조여지는 갑갑함을 가시화하기에 1.37:1의 화면비는 효과적이다. 그런 점에서 1.37:1의 화면비가 시대상 자체에 상응하는 매체는 아니더라도, 1960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체감을 환기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 또 영화는 주(week) 단위로 전개된다. 낙태를 할 수 있는 방법, 시설을 수소문하지만 해답은 나오지 않고 배는 불러오며, 낙태가 쉽지 않은 시기가 점점 다가온다. 안느의 경우에도 낙태가 위험한 시기에 걸쳐서 시술하지 않던가. 그래서 시간이 진척됨에 따라 점점 더 조여 오는, 숨 막히는 임신의 공포를 가시화하기에도 화면비는 적절하다. <마미>의 갑갑한 마음과 상황처럼, <사울의 아들>의 헤어 나올 곳 없는 시대의 비극처럼 말이다. 이와 더불어 영화는 핸드헬드가 사용된다. 그것은 롱테이크와 결합하여 리얼리즘을 구축한다. 1.37:1의 화면비가 당대의 감각과 심리에 상응할 수 있다면, 이러한 형식들의 결합은 흔들리는 인간의 시야, 덜 잘려 나간 실제의 시간을 구현하며 현실에 상응할 수 있다. 외부로 새어 나가지 못한 비명, 하지만 그것이 분명 시대의 현실이자 진실이었으니, 영화는 이를 현실적인 형식으로 담아낸다. 이와 더불어 핸드헬드도 화면비처럼 심리적인 효과 또한 지닐 수 있다. 안느는 임신이 진척되면 될수록 바라는 나를 잃는다. 그렇기에 조급하다. 영화의 떨리는 핸드헬드는 갈급한 상황에 놓인 안느의 심리를 드러내기에 효과적이다. 또 그녀는 1960년대의 타자다. 안정적인, 보편적인 여성임이 포기됨에 공동체와 충돌을 겪는 상황을 저돌적인 핸드헬드가 가시화한다. 또 안느 스스로가 바라는 자신과 바라지 않는 자신이 겹치고 충돌함에 발생하는 흔들림으로도 여길 수 있으리. 이러나저러나 당대의 여성은 ‘흔들린다.’ 법이 그녀들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오히려 절벽으로 내몲에 말이다.     


영화는 이러한 안느를 아주 가까이서 포착한다. 카메라는 거의 언제나 익스트림 클로즈업, 클로즈업, 바스트숏 정도로 가까이 밀착하여, 흡사 그녀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타인이, 그리고 제도가 재현하지 않는 실제의 여성, 카메라는 그 생생한 날 것의 여성을 놓치지 않는다. 한편 그렇게 가까이서 안느를 포착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때로 영화는 흐리다. 안느가 샤워실에 갈 때, 전화 부스로 향할 때, 그리고 낙태 여파로 화장실로 향했을 때 말이다. 이는 자신을 잃을 것만 같은 두려움, 불안, 현기증에 상응하리라. 한편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지며 마땅히 드러나야 할 것을 밝히는 연출이라 할 수 있으리. 안느는 학생들의 방해에도, 막심의 회피에도, 남성 중심적 법에도 불구하고, 이를 넘어서 낙태를 끝마치고 자신을 밝히니 말이다. 이렇게 디완은 빛과 어둠의 대비, 진실과 거짓의 대비 등을 통해서 숨겨져야만 했던 안느, 보일 수 없었던 안느를 밝혀낸다. 도입부, 아직 크레딧이 끝나지 않아 어둠만이 꽉 찬 숏에서 여성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진다. 어둠 속에서 그녀들은 치장하고 있다. 이윽고 그녀들이 시각으로 펼쳐진다. 그녀들은 어떻게 보일지 스스로 선택하고, 남성들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는다. 안느는 어떻게 쳐다보든 뭔 상관이냐며 남성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어떻게 보일지를 자신이 선택하고, 파티장에 가서 자유로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한때 여성들이 자유롭게 치장하는 것은 ‘어둠’이어야만 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드러난다. 치장뿐만 아니라 음악에 맞춰 꾸밈없는 솔직한 몸을 표현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대상을 그녀들이 선택한다. 그저 뻣뻣하게 따라다니던 카메라는 춤추는 그녀들을 유려하게 회전하며 포착한다. 남성의 시선에 간택당하지 않는다. 넥타이를 맨 남성이라는 자신의 취향을 선택한다. 하지만 남성들과 관계가 잦았던 안느를 두고, 다른 여학생들이 ‘헤픈 여성’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자유롭게 꾸미고 춤추고 욕망을 선택하는 자는 다시 어둠으로 향할 수밖에 없으랴.      


그래서 영화는 자유롭지 못한 ‘참여’를 고찰한다. 대학생만 참석이 가능한 파티에 소방관인 가스파르가 ‘위장’하여 들어오는 것도 그렇다. 자유분방한 여성을 거부하는 기숙사의 ‘정숙한 규칙’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자신의 욕망에 참여하는 것도 남성의 승낙에 의해 가능한 시대다. 쟝은 가스파르와 함께하는 안느를 방해한다. 막심은 자신이 선택한 옷을 안느에게 입혀 모임에 데려간다. 하지만 여성은 달아나야 한다. 영화 후반부에 가스파르와 ‘알몸’으로 정사를 나누는 안느는 모든 규칙과 굴레를 벗어던진, 여성이 진정 향해야 할 자유로운 육체를 보여준다. 다시 영화의 도입으로 돌아가서, 몸 상태가 이상해서 병원에서 임신임을 확인한 안느, 그녀는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다. 하지만 학교에 다시 돌아간 그녀는 이 사실과 감정을 밝힐 수 없다. 미혼 여성의 임신, 학생의 임신, 그리고 아이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은 어둠에 파묻힌다. 빛이 화사한 캠퍼스의 공원에서는 오직 시험 준비하며 단어를 외우는, ‘학생 여성’만이 허용된다. 이후 도서관에서 임신 서적을 찾아보지만, 흡사 그것은 금기시되고 정보가 쉽게 노출되면 안 된다는 듯이 아주 구석진 곳에 꽂혀 있다. 화장실에서 입덧하지만, 나와서 손을 씻을 때는 아무렇지 않게 보여야 한다. 아이의 친부 막심에게 낙태를 상의하기 위해 그의 고향으로 향했지만, 평범한 연인인 척 진실은 나의 후미진 곳에 가둔다. 그녀는 이윽고 ‘수영’한다.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대지, 온갖 법으로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는 지상에서 떠나고 싶다. 막심이 불러도 그녀는 대답 않고 수영한다. 그렇게 달아나는 안느는 임신에 순응하지 않고 어떻게든 선택하여 제 삶을 되찾고자 한다. 하지만 막심은 무책임하게 외면하고 고민하지 않는다. 제 일도, 제 책임도 아니라는 듯, 낙태를 함께 논의할 줄 알았던 빛으로부터, 다시 어둠으로 안느는 향한다. 이윽고 쟝이 낙태 관련한 정보를 알고 있는 래티시아를 소개해준다. 그녀들은 공원에서 아주 태연하게 산책하는 척, 미소를 띠고 정보를 공유한다. 낙태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그녀들의 밝고 태연한 연기에 의해 가려진다. 그렇게 낙태를 시술하는 라비에르 부인에게 향한다.        

카라바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598~99

시술소는 매우 어둡다. 라비에르 부인을 연기하는 아나 무그리리스 특유의 발성도 매우 둔탁하다. 아나 무그리리스의 어둡고 날카로운, 음모가 숨겨져 있는 듯한 분위기는 당대 낙태 시술자들에 대한 통념을 드러낸 것이랴. 당대에 라비에르 부인과 같은 이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흡사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게끔 유도하는 악한 ‘노파’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녀들의 피상이 어둡고 쾌쾌하게 묘사될지언정, 그녀들의 행위가 실로 악하다고 할 수 있는가? 낙태는 라비에르 부인이 회유한 것이 아니라, 안느와 같은 그녀들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또 그녀들의 주체적인 삶, 자유를 되찾게 만드는 구원자가 시술자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를 어둡고 괴괴하고 흉하게 묘사하였기에 그녀들은 드러날 수 없는, 숨겨지고 밑으로 가라앉는 모습이어야 했으리. 그래서 시술소로 향하는 계단이 어둡더라도, 이후 어둠이 지나면 충만한 빛이 쏟아지는 창문이 나타난다. 반대로 합법적인 병원의 만연한 빛과 선량한 얼굴을 가진 의사는 그녀들을 구렁텅이에 빠트리는 처방을 내리지 않던가. 디완은 법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의 양면성을 까발린다. 두 차례의 시술 이후, 겨우 올리바아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어둔 방과 화장실에서 낙태를 끝마치니, 이윽고 병원의 쨍하고도 차가운 빛으로 이어져 유산이라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들의 몸은 가스파르와 자유롭게 정사하고 공부할 수 있어야 하며, 빛은 그녀들이 바라는 자유란 진실을 밝혀야 한다. 내가 밝히고 싶은 나, 빛을 발산하고 싶은 나를 위해, 1960년대의 그녀들은 법에 반하는 어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둠으로 향하고 연기하는 이유, 그것은 본 작품에서 언급되는 사르트르와 관련이 있다. 문학전공인 그들은 시험을 보기 위해 당대의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나 카뮈의 이름을 나열한다. 먼저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부끄러움이나 야비함을 느끼는 나’를 논한다. 부끄러움이나 야비함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타인에게 평가받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자신의 육체를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어떻게 보일지를 더욱 신경 쓴다. 하지만 그 시선이 타인이 주인 되고, 내가 그 타인의 노예 되게 만든다. 이러한 시선이 나를 비반성적으로 만든다. 사르트르에게 반성이 스스로 과거의 나를 부정하고 초월하는 것이라면, 타자에 의한 비반성은 내가 나에 대해 사유하여 반성을 할 수 없게끔 만든다.     


본 작품도 이러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단 영화의 초반부, 안느는 교사의 질문을 받는다. 배우고 있는 시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느냐고, 안느는 그 시가 사랑과 성을 정치화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가 성이 정치화된 여성을 예고하는 것일까. 이후 학생들의 발화에서 타인에 의해 정치적으로 규정된 젠더(사회적인 역할을 좌우하는 성, 생물학적인 성별 섹스와 구분) 여성의 사례가 나열된다. 결혼에 의해 반강제로 자퇴하여 학교에 여성들은 서서히 남지 않는다. 또 낙제해서 농부가 되거나 공장으로 향하는 천편일률적인 여성의 여정에는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의에 의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 안느의 언니처럼 당대 여성들의 삶은 내가 바라지 않는 '변색된 손'이다. 이러한 젠더는 곧 남성 중심적인 법에 따라 만들어진다. 법은 낙태를 악마화한다. 여성들은 오직 신성시된 임신, 추상화된 임신을 논할 수 있을 뿐이며, 상세한 임신, 솔직한 임신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을 수 없다. 낙태를 금기시하는 법이 임신과 낙태에 관한 여성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억제한다. 남성 중심적 법에 따라 남성 의사는 여성이 원치 않는, 태아를 강하게 만드는 약을 처방한다. 성에 개방적인 브리지트 또한 임신은 극도로 쉬쉬한다. 이론에 따라 애무와 오르가즘을 묘사하지만, 낙태에 대한 이론은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을 위한 이론은 있어도, 여성을 위한 이론은 없다. 또 남성에 의해 요구된 순결, 정조를 지키는 여성상이 곧 공동체의 보편을 차지한다. 올리비아와 그녀의 친구는 안느의 몸에 있는 반점이 불결하다며 샤워실에서 그녀를 내보내려 한다. 그리고 남성 쟝은 안느가 임신을 하였으니 더 이상 걱정이 없다며 관계를 맺자고 치근덕댄다. 또 가스파르와 관계를 맺으려는 안느를 방해한다. 여성의 욕망과 삶을 수동적으로 객체화 하는, 남성들의 방종하고도 지배적인 시선이 따갑다. 그래서 안느는 샤워실에 들어서기에 앞서서 불안해하며 몸을 감춘다. 타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신경 쓴다. 하지만 그런데도 시선에서 달아나 자유를 갈망한다. 그렇게 추구하는 그녀의 자유, 이는 사르트르와 함께 언급된 알베르 카뮈와 엮어낼 수 있으리. 카뮈는 『전락』이라는 작품에서 ‘진실’은 아찔한 빛, ‘거짓’은 아름다운 황혼이라 말한다. 또 더 불량한 놈들에게 복종하는 연쇄와 순응으로부터 달아나는 ‘자유’가 고역, 진력나는 장거리 경주라 말한다.     


또 『이방인』에선 다른 사람과 똑같아지는 것, 모나지 않고 소속되는 것, 누군가의 대체품, 이로 인한 타인과 나, 어제와 오늘, 내일의 비구분이 곧 세계에 타협하는 슬픈 자화상이라 말한다. 그래서 세계에 타협하기보단, 이방인으로서 타인들이 나의 세계에 초대받길, 그렇게 나의 인생을 느낄 것을 역설한다. 즉 카뮈의 자유란 내 삶을 내가 쥐고 흔들고 운명을 결정하는, 다만 그것이 세태와 저항하는 것이기에 고역이다. 안느가 되돌리고자 하는 그녀의 여정도 그렇다. 그녀는 미혼모가 되면 대입을 자동 포기하게 되어 바라는 자아가 사라진다. 반면 낙태가 성공할 경우 자아는 되돌려 받지만,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그녀는 벌써 두 차례나 시도했기 때문이다. 낙태도 내가 포기될 여지가 있지만, 한편 나를 돌려받고 대입을 준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 남아있다. 그래서 안느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것에 따르는, 자유에 뒤따르는 고역을 감내한다. 전자의 정해진 철로에 순응하지 않는다. 자유는 마냥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다. 자유롭기 위해서 자신이 그간 소유하고 있던 책과 보석을 판다. 한편 이는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자유를 암시한다. 여성은 임신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여행’하기 위해서, 기존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포기하고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막심은 자유를 위해 책임질 몫이 없는데 말이다. 다시 자유로 되돌아가서, 래티시아로부터 낙태 정보를 확보하니 세찬 바람이 몰아친다. 변화의 예고, 그것은 매우 불길하고도 괴괴하다. 이러한 돌바람처럼 낙태는 쉽지 않다. 안느 스스로 낙태를 시도해봤을 때도, 디완은 선택에 따라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롱테이크로 불쾌하게 보여줬다. 또 두 차례의 시술 이후 비로소 체내에서 태아가 떨어져 나가고, 그녀 자신을 되돌려 받지만, 이에 따른 죄책감, 경악을 포착하고, 부작용과 변기의 적나라함 또한 짧게 포착한다. 그리고 낙태에 의해 시험을 칠 수 없었던 그녀는, 다시 시험 기회를 얻기 위해 교수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남들과 같지 않았던 자신, 당대에 불법적인 자신을 말이다. 이렇게 자유를 위해선 기존·보편을 거슬러야만 하고, 이에 따른 결과는 가볍고 해방감을 느낄 수 있더라도, 책임은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렇게 계속 변화하는 자유가 바로 사르트르, 카뮈 양자 모두를 관통하는 실존주의다. 실존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은 즉자와 대자다. 즉자의 존재에는 근거가 있다. 즉자에 해당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과거, 목적이 존재하는 사물 등이다. 그리고 대자는 근거가 아닌 사건으로 존재한다. 사건은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현재의 것이지, 과거의 본질이 아니다. 과거에 이러저러한 사람, 어떤 본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 상태에 항상 머무르지 않는다. 현재는 언제나 지나가 버리는 것, 과거에 있었으나 미래로 있게 만드는 것, 그래서 과거와 다른 현재에 나는 과거의 즉자일 수 없다. 현재의 대자는 규정된 본질이나 근거로 먼저 살지 않고, 우연성 앞에서 자신을 되찾고 현재의 '나'로 먼저 존재한다. 이러한 대자가 진정한 자유인, 회복한 주체라 말할 수 있다. 즉자는 과거, 타인이나 제도로부터 근거가 비롯한다. 안느에게 태아도 타인이다. 아이가 폭식하게 만들고, 타인의 음식에 손대게 만든다. 그녀의 의식과 몸을 변화 시켜 생리를 멈추게 만든다. 열이 나게 만들고, 몸은 부풀어 오른다. 공부하고자 하는 안느의 집중을 방해하는 태아에 의해 산모라는 즉자가 된다. 그녀가 원치 않는데, 준비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준비되지 않은 임신, 그것은 '유령'처럼 창백해지는 것, 현기증 나는 것이다. 유령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안느는 존재하지만 그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법도 어머니라는 즉자를 안느에게 강요한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에 엄마가 되는 것을 바라진 않는다. 아이를 언젠가 갖고 싶으나, 그것은 준비가 되었을 때, 지금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은 공부하고 시험 보는 ‘자신’이 되는 것이다. 또 결말에서는 선생님이 아니라 작가가 되기로, 자신이 겪은 경험과 변화한 상황에 따라 미래에 기투할 자신도 변화시킨다. 그래서 안느는 즉자로 규정된 임산부에서 벗어난다. 더 이상 남성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쟝에게 규정된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현재에 자유분방하게 욕망을 선택하고 실현하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드러나야 하는 것이 스스로 실존하는 여성이다.     


브리지트는 남성에 의해 야한 사진이 찍힌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에서 규정된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보란 듯이, 남성들의 카메라로 재현되고 규정되지 않겠다는 듯이, 자신의 자위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영화는 이러한 자유로운 여성의 몸을 매개한다. 자유로이 욕망하는 몸, 어머니임을 바라지 않는 몸을 말이다. 그리고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낙태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서술한다. 라비에르 부인의 입을 빌려 하혈을 체크하고, 어떤 약물이 낙태에 위험한지를 밝히며, 카메라는 어떤 기구가 사용되는지를 포착한다. 이렇게 영화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을 포착함과 더불어, 책임이 면피 되어 드러나지 않은 남성 또한 드러낸다. 남성은 여성에게서 떠나간다. 브리지트는 축구를 하다 무릎에 피가 난 가스파르의 생채기를 닦아준다. 이윽고 가스파르는 떠나고 브리지트에겐 피 묻은 손수건만 남는다. 안느는 피 묻은 손수건이 남성이 여성에게 남기는 것이라 말한다. 남성은 잠깐 머물렀다가 상처만 남기고 떠나가는 존재인가. 또 임신은 두 남녀의 결과물이다. 이를 여성만 짊어지고, 여성 혼자 낙태를 책임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데 남성은 성교 이후 사라져버린다. 이름도 목소리도 얼굴도 모른 채, 영화는 그 남성의 이름, 목소리, 얼굴을 드러나게 만들어 책임을 알게 한다. 그 남자 또한 안느의 '사건'에 책임이 있으므로, 그간 사건을 책임지지 않았던 남성을 되돌린다. 이렇게 밝혀지는 여성의 사건과 남성의 책임, 하지만 지금까지 낙태는 새어나가선 안 됐다. 라비에르 부인은 벽이 얇으니 비명을 지르면 새어나간다며, 꾹 참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당시에 비명은 존재했다. 그리고 벽이 ‘얇다’는 것은 제도는 이를 감추고 쉬쉬하지만 여성들이 도처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불법을 아주 살짝 가리는 얇은 벽을 넘으면 낙태는 존재했다. 물론 언제나 실존할 수는 없었다. 법이 그녀들을 굴종하게끔, 다시 즉자화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실존을 위해선 법이, 그리고 시선이 변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법에 의한 시선은 서슬 퍼렇고 매서웠다. 하지만 엘렌이 어떤 여성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이라며 안느를 이해한다. 그녀를 샤워실에서 타박하던 올리비아가 위독한 안느를 돕는다.      


법에 따라 특정 여성을 강요하던 시선들, 하지만 그 시선은 관용의 시선으로, 존중의 시선으로 더 이상 실존하는 타인을 가두지 말아야 하리. 남성적 법은 여성의 솔직한 임신, 낙태에 대한 생각을 억제하고, 자유로운 여성 공동체를 와해되게 만든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우린 연대해야 한다. 선입견, 도덕, 윤리에 우선하는 죽어가는 인간, 피를 흘리는 인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봐야하리. 비로소 그 순간, 개인은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빛을 발하리. 그때 비로소 여성의 자유는 남성적 법에서 벗어나 '사건'이 되리.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역사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래서 사실적이지 않은 것, 독특한 것, 기존의 질서를 벗어난 것, 유사성의 가면을 벗는 것이 '사건'이라 말했다. 낙태와 자유로운 여성은 역사에서 드러날 수 없었으니, 그래서 시행되고 드러나면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사건이어선 안 된다. 개인적이고 미시적으론 사건일 수 있어도, 역사와 법에서 익히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하리. 이렇게 오드리 디완은 아니 에르노의 『사건』을 영상화하며 1960년대에 낙태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실존하고자 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다. 이러한 작업은 영화 말미에 안느가 대학에 가려는 목적이 '글을 쓰고 싶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안느가 글을 통해 드러날 수 없었던 자신을 재현하고 보존하고자 한다면, 본 작품 또한 들을 수 없었지만 존재했던 '비명'을 포착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수한 시선과 제도로 만들어진 여성이 아니라, 생생한 여성을 보존한다. 이러한 여성의 초상을 당대를 살아간 그녀들의 심리에 상응하는 형식에 담아내고,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와 카뮈를 언급하며 숭고한 자유의 여정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부당함을 느낀다. <베라 드레이크>, <여자 이야기>,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서처럼 법은 낙태하고자 하는 주체적인 여성을 악마화한다. 하지만 자유를 천성으로 타고난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아 비인간화하고, 임신과 낙태의 책임으로부터 남성을 면피하는 법이야말로 실로 악마적이지 않은가. 더 이상 어둠은 없어야 한다. 빛을 위해 어둠을 선택하지 않고, 이제는 빛만 남아있어야 하리. 자유롭게 드러내고 발산하는 실존과도 같은 빛, 법은 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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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310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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