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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r 04. 2022

마리아 스페트,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

교육과 사회

마리아 스페트(Maria Speth),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Mr Bachmann and His Class) - 교육과 사회   

“이질적인 것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그것과 친숙해지는 것은 정신의 기본운동이다.”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일반적으로 ‘계몽’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단어로 여겨진다. 계몽은 자유와 함께 근대적 사유의 한 쌍이었고, 이전 시대의 야만을 몰아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계몽을 야만으로 여겼다. 우리가 x를 y로 보는 것은, x를 하나의 구조, 구도 속에 배치하는 일이다. 하나의 대상은 보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고, 그렇게 해석된 결과물은 보는 사람이 어떤 체계에 속해있는지를 반영한다. 계몽 이전에 우리는 대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계몽은 오직 기술적, 반자연적, 이성, 합리주의, 주인의 관점에서 대상을 보게 만든다. 주인의 관점에서 자연은 오직 객체로 전락하였고, 심지어 주인인 유럽 백인들에 의해 비서구인들은 식민주의의 객체로 전락하였다. 계몽은 모든 것을 계산 가능성, 유용성,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여, 바라본 것을 숫자로 획일화시켰다. 또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의 존재, 사건을 말소한다. 계몽에 의해 마땅히 보여야 할 것이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폐기되었다. 계몽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미지의 것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다원적 체계를 붕괴시켰다. 신화는 미지의 것, 그리고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여기며 그 존재를 인정한다. 하지만 계몽주의는 이를 마냥 없는 것으로 치부하며, 산 것조차도 계몽과 이성 저편으로 추방한다. 그리고 계몽주의를 만들어낸 서구가 유럽 바깥으로 뻗어 나가 무수한 대륙과 국가를 식민화함에, 유럽인이 아니고 백인이 아님에도 그들처럼 바라보고 사고하게 되었다. 본래 그 대상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는 서서히 잊혔다. 그렇게 잊힌 것은 그 땅의 원주민들이 특유한 지리적 환경에서 발전시켜온 문화, 그 땅에서 가장 적합한 생활사다. 또 계몽은 전통 또한 부정한다. 전통은 이어지는 세대들 간의 연속성과 정체성,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나와 타자, 과거와 현재의 연속이다. 이러한 연속을 계몽이 끊어놓는다.     


그래서 계몽에 입각한 교육은 오늘날,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부대끼는 다원주의의 시대에 재고될 필요가 있다. 마리아 스페트는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에서 계몽을 반성하는 교육, 오늘날에 필요한 교육을 고찰한다. 1967년 티팅 출생의 마리아 스페트는 독일의 영화감독이다. 그녀의 신작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은 너무나 다양하고 때론 상충되기도 하는 입장과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 경향이 초창기부터 나타난다. 장편 데뷔작 <나날들>에서의 주요한 탐구가 바로 '관계'다. 서로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린, 코지, 데이비드를 편집으로 이어낸다. 응답 없는 전화벨 소리, 이해되지 않는 언어, 자신의 목적을 상대방에게 투영함에 서로는 고립되어 있다. 같이 하나의 숏에 놓이더라도 린은 깨어있지만, 섹스라는 목적을 달성한 데이비드는 잠든다. 또 서로의 관계는 곧 충돌이다. 영화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린이나 코지가 상대방과 충돌하여 상자 더미를 무너뜨리거나, 사이드미러를 깨트리는 장면이 반복된다. 멀리 떨어져 있다가 만나더라도, 이내 곧 충돌하여 서로의 눈에서 멀어진다. 이러한 <나날들>과 달리, 그녀의 또 다른 작품 <도터스>에서는 여러 시점이 등장하진 않는다. 떠난 딸 리디아를 찾는 엄마 아그네스의 시점이 중심이 된다. 그녀가 찾고자 하는 사진 속 리디아, 엄마가 바라는 리디아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로부터 떠나길 원하는 리디아, 즉 실재를 인정하지 않음에 아그네스는 세상으로부터 유리된다. 그녀가 차창 밖으로 보고 있는 사람, 동물, 풍경 등으로부터 아그네스는 고립되어 있다. 그리고 여전히 충돌도 반복된다. 나는 관계를 원하는데 상대방이 원치 않을 때 접촉, 충돌 사고가 발생한다. 이렇게 구축된 스페트의 그물망, 지도와도 같은 관계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이방인이다. <나날들>의 린은 집시, 코지는 독일로 유학 온 일본인 청년이다. 코지는 독어를 배우고, 린은 끝없이 노동한다. 영화는 이들의 얼굴을 어둡게, 개성과 신원이 덜 드러나게 처리한다. 익명적으로, 노동과 언어에 의해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끝없는 노동 속에서 자기 소외, 저 자신의 일어를 잃어버림에 그들은 자신으로 머물 수 없다. 하지만 스페트는 이러한 과정에서 진정한 이해를 강조한다. 마냥 독어로 편입되는 이해, 나의 욕망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실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청취, 포옹을 말이다. <도터스>에서도 아그네스는 자신과 이름이 유사한 이네스를 보며, 딸에게 집착하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딸의 주체성을 일련 이해해보고자 한다.      


또 스페트는 여성 감독으로서 여자를 탐구하는 시선이 도드라진다. <나날들>의 도입은 린이 화장을 닦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맨 얼굴, 그리고 자신의 발로 자전거를 운전하기, 하지만 이후 남성의 차에 올라타거나 그들에게 이끌려 다니는 등의 타율에 좌우되는 여성, 이에 자유롭지 못한 강요된 여성성을 고찰한다. 또 린은 코지를 더 사랑하지만, 독일인인 데이비드를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마음은 코지에게 이끌리지만, 그녀가 주체적으로 데이비드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어렵다. 스페트는 독일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전락하는 여성을 탐구한다. <도터스>에서 이네스는 아그네스와 만나기 이전에도 자해공갈을 해서 상대방과 관계를 맺은 바 있다. 젊은 여성인 이네스가 차를 타고 다니는 중년 남성, 부르주아지 여성과 관계를 엮고자 하는 이유도 <나날들>과 유사하게 떠돌아다니는 여성,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의존적인 여성상에서 기인할 지다. 이러한 스페트가 이제 학교로 향한다. 있는 그대로의 학교, 교육이 이뤄지는 학교임과 동시에, 현 독일의 축소판과도 같은 학교에서 그녀는 과연 무엇을 포착할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약 3시간 40분가량이나 되는 긴긴 러닝타임 동안 포착되는 바흐만 선생님의 수업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감독이 한 명 있다. 바로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다. 영화는 여러 면에서 와이즈먼과 유사한 연출을 보이고 있다. 일단 영화 중간중간 세계를 포착하는 롱숏, 필로우숏이 도드라진다는 점이 그렇다. 고정된 카메라로 구축한 롱숏에 담긴 건물, 풍경 등을 이어내며 사회를 구성한다. 하지만 이러한 필로우숏이 와이즈먼과 마냥 똑같지도 않다. 와이즈먼의 필로우숏은 다루는 대상 그 자체이거나, 대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스페트의 필로우숏은 학교와 유리되어 보이는 공장, 발전소, 예배하는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스페트는 학교와 관련 없어 보이는, 와이즈먼과 다른 방향의 필로우숏을 중간마다 교차 편집하여, 학교가 향후 이러한 필로우숏으로 이어지거나, 또 학교가 필로우숏의 축소판임을 보여준다. 와이즈먼의 필로우숏이 그것 자체라면, 스페트의 필로우숏은 더 상징적이다.     


이러한 필로우숏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마도 건물이, 대지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랴. 하지만 사람들은 움직인다. 물론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서 토론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연주하거나, 또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요리를 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영화의 운동감은 포착하는 대상에 부응한다. 영화의 운동감이 자아내는 감각이 대상에 호응하기도 한다. 음악을 연주할 때 카메라는 미세한 핸드헬드로 떨리며 우리 눈에 파장을 일으키니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전체가 아니라 세세하게 개별에 접근하는 섬세한 연출이 도드라진다. 일단 영화의 도입부에선 롱숏으로 교실 전체를 포착하여, 다양한 민족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독일을 축소한다. 하지만 이후의 연출은 롱숏이 적다. 영화는 클로즈업, 바스트숏 등으로 학생 개개인이 감정을 표현하고 발화하는 얼굴에 집중한다. 그렇게 영화는 롱숏, 전체를 위해 학생 개개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학생들은 본인들이 포착되는 클로즈업, 바스트숏에 걸맞게 자유롭게 발화하고, 영화는 이를 롱테이크로 잡아내어 그들의 언어, 고충, 의견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그리고 영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다. 그래서일까, 때때로 통제되지 않는 아이들은 카메라에 눈을 마주치기도 하고, 또 카메라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부산스럽게 주위를 돌아다녀 시야를 흐리기도 한다. 오히려 이렇게 제어되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스페트가 생생한 현실을 담아냈다는 믿음, 포착하는 현실을 조작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거둘 수 있다. 이제 영화를 본격적으로 살펴보자. 가장 먼저 본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밝힘'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밤’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으나, 어른들은 스스로가 빛이 되어 여명에 출근을 준비하고, 또 아이들의 등교를 돕는다. 그리고 아침을 밝히기 위해 베이글을 만드는 등 어른들은 밤, 어둠에 안주하지 않는다. 노동과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어른들, 밤의 어둠에도 굴하지 않고 부산스럽게 빛을 비추는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의 여명이 밝아온다. 이윽고 아침이 되어, 수다스럽게 등교하는 아이들을 포착하는 숏으로 이어진다.     


도입부에서 나타나는 어른의 덕목은 밤을, 어둠을 몰아내고 아침을 불러오는 의무다. 영화의 도입부가 밤이었다면, 영화의 결말은 환한 낮이다. 아이들은 이제 학기를 끝마치고, 쨍한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바깥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아이들과 작별하는 것이 내심 서운한 바흐만 선생님은 카메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친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서서히 페이드아웃이 내려오며 어둠이 깔린다. 어른이란, 그리고 선생이란 자신에게 어둠이 닥치고 텅 빈 공허만 남더라도, 빛으로 나아갈 아이들의 충만한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자다. 그렇게 어른들은 자신을 어둠에 맡기고, 아이들을 빛을 향해 내보낸다. 영화의 첫 번째 밝힘, 그것은 바로 어른이 아이를 빛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밝힘은 바로 이성의 밝힘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영화처럼, 본 작품도 무수한 대화가 오간다. 수없는 대화에서 눈여겨볼 것은 바흐만 선생님의 질문이다. 바흐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쏟아내며 강의하지 않는다. 바흐만 선생의 교육은 '질문'이 주를 이룬다. 하나의 단어, 또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거나,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두에게 묻는다. 그리고 특정한 단어, 개념을 가르쳤더라도, 이를 학급에 존재하는 무수한 민족들이 어떻게 부르는지를 물어본다. 터키어, 러시아어, 불어, 불가리아어 등으로 말이다. 철학자 레비나스에게 이성이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유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 그것은 나와 동일자가 아닌, 전적으로 '타자'인 상대방이다. 바흐만 선생님의 교육은 이러한 타자를 밝히고, 또 이를 사유하게 만드는 이성을 연이어 자극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는 상대방이 나와 보편과 단일하지 않고, 전체의 익명이 아니며, 보편에는 언제나 잉여와 과잉이 있음을 확인 시켜 준다. 이와 관련하여 초반부의 '사물 이야기'에 주목할 법하다. 바흐만 선생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기타, 탁자 등의 사물이다. 이러한 사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규정된, 보편적인 목적으로만 작용하고, 또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들을 특정한 상황에 놓이게 만든다. 그리고 표정과 얼굴이 없는 사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를 유추하게 만든다.     


이를 통해 나의 일반적인 상식, 편견, 통속, 보편에 얽매이지 않는 상대방,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상대방, 결코 동일자가 아닌 상대방을 알게 되고, 피상을 넘어서 이면을 헤아리고 현재로부터 과거를 살피는 법을 깨우친다. 그리고 바흐만 선생님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시키는 문장은 다름 아닌 '사랑해'다. 다양성과 더불어 바흐만 선생님은 타자를 사랑하고 포용하는 관용, 이를 통해 개개의 자유를 밝힌다. 세 번째로 바흐만 선생님이 밝히는 것은 지식이다. 바흐만 선생님은 따분하게 강의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가 가르치는 것에 참여를 촉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참여는 지식에의 참여임과 동시에, 현실에의 참여이기도 하다. 바흐만 선생님은 언제나 학생들의 일상에서 예시를 찾으라고 요구한다. 어떤 지식은 절대적으로 타당해서 어떤 상황에서든 부합한다. 하지만 어떤 지식은 특정한 상황에서만 타당하여 맥락을 읽어야 하고, 또 타자의 태도를 취하며 지식을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특정한 맥락, 타자, 생활 세계에 지식이 적용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배운 지식이 ‘타당’하다고 판별한다. 바흐만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치는 문법, 개념 등이 모두 현실에서 타당하길 바란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자신의 주변에서 작문하기를 요구하고, 거기서 문법이 틀렸으면 일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기에, 지식이 타당하지 않음을 바로 확인시켜준다.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흐만 선생님은 지식을 비추고, 이로써 현실을 비춘다. 마지막으로 선생들이 비추는 대상은 그들, 학생이다. 복싱을 배우는 학생은 너무 열정적이어서 자신이 어떻게 샌드백을 때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심리학자 카를 융이 말하는 열정, 그것은 자신조차 넘어서게 만드는 것, 스스로조차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 자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알 수 없는 위험을 품고 달려가는 것이다. 그에게 열정은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불타서 사라지는 불나방과 같다. 이러한 열정적인 자신을 코치, 즉 선생이 보게 한다. 자세가 잘못되었으니 폼을 교정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또 어떤 학생은 완고하게 동성애자들이 역겹다고,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바흐만은 학생이 주장하는 정상이 그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이상하다거나 '나 같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이 편협한 것임을 밝힌다.     


선생은 자신을 기준으로 파생된 정상이 절대 참이 아님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수학여행에 가서 학생들끼리 다툼이 났다. 장난을 친 학생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었기에 친구를 때렸지만, 그 친구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고통이었다. 선생은 각자가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강도에 차이가 있음을, 본인은 장난이었어도 상대방에게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곧 익숙한 자신이 언제나 진리가 아님을 강조한다. 선생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 학생들을 비추고 바로 세우는 밝힘의 의무도 지닌다. 이러한 다양한 밝힘 속에서 개개인의 얼굴이 드러난다. 개개인의 얼굴, 개개인의 자유를 밝히는 바흐만 선생님의 교육법에 더 주목해보자. 바흐만 선생님의 수업에선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하나의 주제·질문이 학급에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것은 이윽고 다양한 의견과 답변으로 뻗어 나간다. 모두가 책을 읽어야 하는 '독서 시간'도 구성원 모두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동일하나,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책은 자유분방하게 열어둔다. 또 바흐만 선생님은 다양한 나라에서 이민을 왔고, 또 이민을 온 시기도 모두 제각각인 학생 개개인을 면담한다. 학생들 스스로가 대화의 주체가 되어 자신을 터놓게 만든다. 더불어 이러한 학생들을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평가하지 않는다. 바흐만 선생님과 다른 교사들은 한데 모여서 학생들의 성적에 관해 토론한다. 그들은 학생이 언제 독일에 왔는지, 또 어느 환경에 놓였는지를 고려하여, 그들이 처음에 주어진 맥락·조건으로부터 얼마나 성취·발전했는지를 가늠한다. 능력은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그들이 놓인 조건과 환경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은 이러한 상대성을 고려하고자 머리를 싸맨다. 그리고 이러한 서로의 성적을 상대방 또한 납득하게끔 그들이 놓인 상황을 설명한다. 이러한 교육은 영화로 담겨 학생과 학생, 교사와 학생 간 서로를 알 기회뿐만 아니라, 감상자가 학생을, 난민을, 타자를 알게 해주는 기회 또한 제공한다. 지금 독일의 학교에 머물지만 언제 또 떠날지 모르는 디아스포라, 자신이 선택한 떠돎이 아닌 수동적인 방황, 이에 따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그리움'이 학생들 곁을 따라다닌다.     


이러한 그들의 문제를 밝혀내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바흐만 선생님은 학생들 개개인에게 면담을 하고 이에 따른 해결책을 부모와 상담하며 논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상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바흐만 선생님이기도 하다. 불가리아인, 터키인, 카자흐스탄인 등 우리의 주변에 드문 이민자들만 타자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선생’, 하지만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다 똑같지 않으며, 또 선생 이전에 '바흐만'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페트는 바흐만이라는 타자, 개별자에게도 집중한다. 베를린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아내와의 논의 끝에 본인이 밥벌이를 하는 방향으로 선생이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또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폴란드인 개명 정책에 따라, 코왈스키라는 성을 잃었음이 밝혀진다. 우리가 아는 바흐만이라는 이름이 그들의 선조가 바라거나 선택한 성이 아니었음이, 우리가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통속적으로 접근해서는 파악할 수 없었던 정보가 드러나며 그의 맨얼굴을 밝힌다. 코왈스키를 바흐만으로 개명시킨 사회는 야만적이다. 이러한 야만적인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학교는 축소된 ‘작은 사회’다. 이러한 작은 사회에서 영화는 공동체, 사회의 덕목을 탐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학급 구성원들의 보호자들은 대다수가 바쁘다. 다른 나라에 있기도 하고, 또 생계를 위해 노동자 신분으로 이민을 온 만큼 일하느라 정신이 없다. 내지인들이 다니는 학교와 다르게, 이민자들로 구성된 슈타트알렌도르프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보완해야 할 것은 부모의 빈자리도 포함된다. 그래서 교사들은 더 깊게 아이들의 삶에 접근한다. 다른 학교 같았으면 보호자와 학생이 알아서 잘 결정했을 진학 문제에 대해, 선생이 보호자의 자리를 채워준다. 그리고 바쁜 부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전달하여 아이들의 진학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한다. 또 학교는 아이들만의 소우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들을 통해 보호자들도 서로 관계를 맺고, 이웃이자 친구가 된다. 일로 바쁜 부모들은 서로 만날 시간조차 넉넉하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행사를 개최하고, 최대한 참여를 독려하여 아이들의 부모들도 지연공동체에 편입시켜준다.      


이로써 소외된 구성원들을 편입하고 포용하는 사회의 역할이 강조된다. 단순히 서로 만날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의 보호자들은 사용하는 언어가 각기 다르다. 특히나 이들은 독어에 서툴러서, 자식들과는 소통이 될지언정 다른 구성원들과는 대화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영화에서 강조하는 숏 중 하나는 보호자와 선생이 면담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양자의 ‘통역사’가 되는 장면이다. 학교에서 이뤄지는 사회화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노동 외의 여유가 없는 구성원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이해의 장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공동체는 나의 ‘희생’을 일련 필요로 한다. 바흐만 선생님의 교육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다수가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확인시킨다. 모두가 침묵을 잘 지키면 빨리 하교할 수 있지만, 이기적인 누군가가 그 ‘규칙’을 어기면 모두 늦게 하교한다. 또 나만의 공이 아니라, 다른 구성원의 공을 공동체에서 함께 누리기도 한다. 이들이 일찍 하교하는 이유는 한 학생이 문제를 맞췄기 때문인데, 내가 맞출 수 없는 문제를 다른 학생이 맞춰줌에 일찍 하교할 수 있다. 또 조별 과제에서 파트너에 대한 책임, 그리고 서로를 더 잘 보완할 수 있는 관계를 논하기도 한다. 우리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렇기에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나의 장점이 타인의 단점을, 또 나의 단점을 상대방의 장점이 채워준다. 그렇게 서로를 일부 희생하고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며, 삶은 더 풍요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 속 강조되는 협연, 초반에는 너무나 소란스럽고 정신 사나웠다. 기타, 드럼 등의 다양한 악기들을, 모두 각자의 마음대로 연주했기 때문에 음악은 불쾌만 자아냈다. 하지만 내가 연주하고 싶은 것을 잠시 미뤄두고, 협연을 위해서 양보하면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앞서 개인들의 얼굴을 밝힌 바흐만 선생님은 공동체, 협연을 위해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규칙을 지키기, 조금만 양보하기, 나의 감정만 중시하지 않고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기, 애도에 동참해주는 약소한 희생만을 바랄 뿐이다. 불협화음과 조화로운 협연, 이처럼 영화에서는 음악이 강조된다. 바흐만은 선생이기도 하지만, 노래를 좋아하는 자칭 가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업에 음악을 자주 활용한다. 바흐만은 각자가 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들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며, 즉 자유와 희생을 절충하며 조화로운 연주를 낳는다. 협연에 끼지 못하더라도, 친구들을 위해 차를 끓이는 학생의 모습이 강조되는 등 각자는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참여하면 그만이다.     


이러한 음악은 예술이다. 특히나 가장 직관적인 예술이다. 해설이나 통역이 필요하지 아니하고, 직관적인 감각 그 자체가 내 몸에 파장을, 심지어 귀를 타고 내 몸을 관통한다. 영화에선 언어를 배우는 숏들이 강조되긴 하지만, 독어를 배우기에도 바쁜 서로가 상대방의 언어를 상세하게 배우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러한 와중에 서로가 이해하는 가장 큰 방식이 다름 아닌 감각이다. 음악, 음식, 문화를 통해 말이다. 아이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사회화를 배우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태어난 고향의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청취하는 상대방은 언어를 이해하긴 어렵지만, 직관적인 느낌과 감정으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행사를 위해 학교에서 가족이 즐겨 만들었다는 음식을 조리한다. 음식 또한 해석이, 이해가 필요하지 않다. 혀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즉각적인 미각으로 상대방의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또 무슬림 친구의 히잡을 써보기도 한다. 밖에서는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것들이, 직접 써보니 그리 이상하지 않다. 이렇게 영화에서 강조되는 예술, 감각 매체는 배우고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는 언어를 극복하여, 까마득한 다른 민족의 삶을 가장 쉽게 느끼고 이해하는 교육이 된다. 한편 영화는 언제나 조화롭지만은 않다. 영화의 절반까지만 해도 학급은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중반부부터 아이들의 다툼이 서서히 고조된다. 종교, 성별, 민족의 차이, 또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을 파악하기 어려움에 말다툼이 벌어진다. 내가 느끼는 감각과 판단은 절대적인 것 같아서, 다른 것들은 비정상으로 이상하게, 역겹게 보인다. 또 남자아이라면 아버지의 삶, 여자아이라면 어머니의 삶을 긍정하고, 친밀한 각자의 성별만을 긍정하기에 성별이 다른 상대가 까마득하다. 우리는 이러한 분열이 초반이 아니라 중반부에 나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 속 서로 간 이해를 위한 많고 많은, 그토록 무수한 교육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노력을 모두 배반하듯 번져간다. 인간의 본성이 나로부터 다른 사람을 환대하기 어렵고, 보편으로부터 다른 사람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듯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만 선생님은 여전히 서로의 밝힘을, '앎'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젠더, 사랑, 성교에 대해 토의하는 장면에서, 바흐만 선생님은 심리학자인 아내의 지식을 빌려 이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려준다. 서로가 잘 모르기에 까마득하고, 또 본인들에게 익숙한 관념을 투영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말이다. 하지만 대상을 안다면, 더 이상 내가 보는 것이 까마득하지 않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서로가 배타하지 않고 사과하게끔, 또 이성애와 동성애의 다르지만 같은 사랑을 알게 만들어 포용하게끔 말이다. 이는 단번의 교육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야 할지다. 내가 모르는 것, 내게 이질적인 것은 계속 차오르는 법이므로 말이다. 영화의 중후반부에는 아이들이 역사를 배우는 장면이 포착된다. 아이들이 감상하는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조부모, 부모 세대들이 어떻게, 또 어째서 독일에 왔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아이들은 사진에 담긴 2차 대전의 기록을 마주하고, 부역의 현장으로 견학을 간다. 다름을 관용할 수 없었던 과거, 개인은 없고 노동자여야만 했던 집단적 정체성이 여전히 편견과 동질성, 보편성이란 이름으로 이어지지 않던가. 하지만 이제는 과거를 알 수 있어서 억제할 수 있다. 당대의 강제되고 강요된 삶은 오늘날 학생들의 초상을 보건대 자유로, 개별로 나아가며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학생들이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이유는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중후반부에 다툼이 고조되지만 그 와중에도 바흐만 선생님은 사랑을, 관용을, 이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 무지하고 모호하여 이상한 것을 배타하는 무지를 앎으로 몰아내고, 배척을 포용으로 전환하기 위해 멈추지 말아야 할 교육, 그리고 사회의 역할이 드러난다. 이렇게 발전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선생님들은 극의 초반부터 단순히 현재를 잘 넘기고 무마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다. 선생들은 현재의 영화가 담아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추상적으로 그려나가야 할 진학과 관련한 미래에도 열을 올린다. 영화의 후반부,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나무에 올라타서 하늘을 바라보고, 추상적이고 널따란 초원에서 바흐만 선생님과 얘기를 나눈다. 학교의 실내가 모든 것이 빼곡하고 할 수 있는 것이 일련 정해져 있다면, 외부는 이제 아이들이 직접 그리고 선택해가야 할 공간이다. 너무나도 널따랗기에 모르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외부와 다른 지역으로 수학 여행가는 이들을 포착하는 후반부는 선생들의 교육이 작고 유한한 한 사람이 끌어안기 어려운 광활한 세상에서, 이를 환대하고 이해하기 위한 교육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사진과 영상에 기록된 과거로부터 아이들은 발전해간다. 생산적으로 가구를 만들고, 새로운 아이들이 입학할 열린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이들의 성장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아이들이 문제를 목도하고 해결해나감에 사진에 담긴 2차 대전, 영상에 담긴 이민자들의 문제는 한 발짝 개선될 수 있으랴. 성장한 아이들은 만삭의 선생님이 낳을 아이의 빛나는 미래 또한 밝혀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본 작품도 2차 대전을 담은 사진, 이민자 다큐멘터리처럼, 무언가를 기록한 매체이자 영상이다. 아이들이 알고 극복해야 할 과거는 2차 대전과 이민자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상으로서 본 작품이 담은 호모포비아, 종교 간의 장벽 또한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으니, 밝히고 안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영화 말미의 길을 걸어가는 가족, 질주하는 기차 등은 이러한 과거를 극복하며 나아갈 미래를 기대하듯 희망적이다. 이렇게 스페트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방법론으로 슈타트알렌도르프의 어느 한 학교를 기록한다.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편집으로 대상이 스스로 보여주는 광휘와 감독의 조심스러운 시선을 뒤섞는다. 영화가 다루는 대상은 평범한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들이지만 그 대상이 너무나 빛난다. 특히 바흐만 선생님의 교육이 말이다. 이러한 바흐만의 교육이 특유한 빛남이 아니라, 계몽의 야만을 극복한 하나의 통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다양하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더 진보한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니. 일상 속에서 찾아야만 하는 아름다움을 고귀하게 붙잡은 작품, 국내에 추가로 상영 기회나 개봉 소식이 들려오길 바라는 작품이지만, 프레더릭 와이즈먼과의 다소 과한 유사성이 본 작품의 유일한 흠이다. 접근 태도뿐만 아니라, 필로우숏과 같은 와이즈먼의 전형성까지 엿보인다는 측면에서, 감독의 개성이 다소 아쉽다. 그런데도 동시대에 너무나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는, 오늘날을 비춤과 동시에 스스로 빛나는 작품으로  <유쾌한 바흐만 선생님>을 요약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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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304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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