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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16. 2022

매기 질렌할, <로스트 도터>

여자의 강박: 지금 내게 없는 것들

매기 질렌할(Maggie Gyllenhaal), <로스트 도터>(The Lost Daughter) 

- 여자의 강박: 지금 내게 없는 것들

“발견해낸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다시금 절망의 한계에 이르는 그는 영원히 찾아 헤매는 자이다.” -미하엘 립만-

1943년 나폴리 태생의 엘레나 페란테는 '나폴리 4부작'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이탈리아의 작가다. 한편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리 4부작에서 발견되는 작가의 색채, 그리고 태생과 여성이란 성별 외의 많은 편린은 베일에 싸여있는 미지의 작가다. 어쩌면 가장 순수하게 책으로만 독자와 소통하는 작가의 모습을 지향한다고 읽을 수 있으나, 여하튼 외부에 노출을 꺼리는 페란테의 의중은 여전히 모호한 안개에 덮여있다. 이러한 그녀의 작품은 20세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나폴리, 또 화산 폭발과 지진이 잦은 나폴리의 불안한 지리적 환경을 녹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주인공들은 언제나 여성이요, 그녀들은 권태롭다. 페란테의 여성들은 '젠더 여성'이 강요하는 어머니·아내라는 역할에 염증이 나고, 항시 주체적인 정체성을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한다. 주로 페란테의 여성들이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삶의 이상은 작가이자 교수다. 하지만 그녀들은 돌아온다. 나폴리로 돌아오고, 아내임은 포기할지언정(그녀들은 기존 남편의 아내로는 돌아가지 않으나, 사랑을 향해 일탈한 대상의 아내로 되돌아온다) 어머니로 되돌아온다. 다시 임신을 하거나 자녀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머니를 직간접적으로 수행한다. 그렇게 남편과 고부관계에서 달아나는 여성의 자유를 그림과 동시에, 떠났다가 훗날 어머니로 되돌아오는 '떠나고 돌아오는 여성'이 페란테 작품의 핵심이다. 이렇게 서두에 엘레나 페란테를 언급한 이유는 1977년 뉴욕 출신의 배우인 매기 질렌할이 페란테의 『잃어버린 사랑』을 영화화하며 감독으로 데뷔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 작품으로 감독 데뷔하기 이전 이스라엘 감독 나다브 라피드의 <시인 요아브>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한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제작 및 주연 배우로 참여하여, 어머니와 시인 사이,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성의 초상을 표현한 바 있다. 과연 <로스트 도터>에서 매기 질렌할은 어떤 여인을 표현할까.      


일단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도입부, 밤의 해변에 놓인 레다의 얼굴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그녀의 뒤를 쫓는다. 그녀는 방황한다. 혹 무언가를 찾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레다도 감상자도 볼 수 없다. 황망한 바다는 레다가 찾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고, 또 감상자는 레다의 얼굴만이 꽉 찬 스크린에서 레다 외의 다른 것, 즉 레다가 찾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감상자가 느끼기에 얼굴만 포착되는 레다는 그녀만의 표상, 심리, 내면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이후 숏은 낮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다음날이 아니다. 영화는 플래시포워드 구성을 취한다. 어째서 레다가 밤의 해변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다시 거슬러 올라오며 추적한다. 이러한 플래시 포워드 구성에, 중년 레다가 젊은 날의 자신을 회고하는 플래시백도 침투한다. 그나마 영화의 초반에는 중년 레다를 중심으로 플래시 포워드가 펼쳐진다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젊은 레다가 침투하는 플래시백 비중이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어제를 바라보던 중년 레다는, 어제를 넘어서서 더 먼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것을 자신으로 여기는 것일까. 영화는 과거에서 또 과거로 향하는 편집으로 그녀가 찾는 것이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에 있었을 것이란 단서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시간과 맥락을 오가며 사용되는 핸드헬드 또한 언제나 하나의 역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도입의 핸드헬드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레다의 방황을 가시화했다면, 이후 플래시 포워드로 휴가 첫날의 레다를 포착할 때는 모든 일상을 중단하여 들뜬 발걸음을 형상한 듯 보인다. 이후 안정적인 연출이 이어지다가, 과거 딸들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에 대한 갈망으로 심리가 불안해질 때 다시 핸드헬드가 사용되는데, 이때는 육체가 놓인 현재와 정신이 바라는 과거가 충돌하며 불안해하는 심리를 드러내는 것만 같다.      


다시 낮으로 되돌아가 보자. 레다는 여행지로 향한다. 연출은 밤에 그녀를 포착한 형식과 상반된다. 비교적 안정적인 스테디캠, 그리고 클로즈업으로 이전 숏에선 보이지 않던 배경이 조금이나마 눈에 띈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숙소에 들어오니 다시 폐쇄적이고 빡빡한 연출로 회귀한다. 그렇지만 유지되진 않는다. 이제는 그녀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계속 방문하여 조명을 켜주고, 또 창문 너머로는 등대의 빛이 새어 들어온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어두운 내면에 침잠해있었다면, 여행지에 도착한 그녀는 줄곧 외부로, 바깥으로, 세계로 나아난다. 그래서 이후 연출은 클로즈업보다는 바스트숏이 반복되고, 또 먼 거리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포착함에 풀숏, 롱숏이 대두된다. 하지만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항상 재사용되곤 하는데,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보여준다. 일단 레다는 휴가를 왔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제 자신에게 집중하며 쉬고 연구하러 여행을 왔다. 그녀는 자신에게만 골똘히 집중하여 육신의 모든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길 바란다. 그녀의 휴가가 비교적 완벽하게 통제되는 장면을 질렌할은 매우 탐미적으로 구성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바다 위를 부유하는 레다의 육체 곳곳을 시원하고도 육감적으로 촬영하고, 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배경음악을 사용한다. 매우 탐미적으로, 흡사 뮤직비디오처럼 감각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타인이 다가온다. 음악은 달아나고 외부의 소음이 빈자리를 채우며, 내게 밀착한 익스트림 클로즈업도 멀어진다. 자신이 바라는 계획대로 흘러가길 바라는 휴가, 잡다한 번뇌와 근심·걱정에서 달아나길 희망한 자신, 하지만 서서히 본인이 바라지 않는 자신이 깨어난다. 그러다가 다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사용된다. 레다의 젊었던 시절을 보는 듯한 니나, 그녀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엘레나, 두 모녀의 관계를 포착할 때 아주 감각적인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는 레다의 육체를 비추던 촬영과 느낌이 다르다. 이는 둘의 관계나 상황을 제시하는 것만 같다. 홀로 여행을 와서 자신이 전부인 레다가 익스트림 클로즈업인 것처럼, 니나와 엘레나 서로는 세상의 전부, 딸을 딸이게, 어머니를 어머니이게 만들어주는 존재다. 그렇게 두 모녀는 딸임을, 어머니임을 가졌다, 프레임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이후 그녀를 보고 레다는 회고하고, 이에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녀의 젊은 시절을 비추는데, 두 딸과 함께 하는 젊은 레다의 얼굴 또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젊은 레다는 어머니임을 지졌고, 딸들 또한 가졌으며, 그것이 니나처럼 곧 세상의 전부와 같았다. 물론 탐구욕이 넘치는 레다이기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은 핸드헬드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여하간 엘레나와 니나, 젊은 레다를 프레임을 가득 채우다 못해 바깥으로 잘려 나갈 듯 거대하게 포착한 이후 다시 현재의 레다를 촬영한다.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앞선 익스트림 클로즈업만큼 가깝지는 않게 포착한다. 앞선 연출에 비한다면 공허해 보인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어린 딸들의 어머니일 수 없고, 딸들은 친밀하긴 하지만 그녀의 품에서 달아난 성년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자신과 동떨어진 니나는 레다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롱숏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물론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자신에게 어머니, 아내라는 책무를 부여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귀찮고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영화의 후반부, 토니는 니나에게 사실상 육아를 독박 씌운다. 니나는 엘레나와 함께 있는 것이 지겹고 짜증난다. 엘레나가 니나에게 치근덕대며 귀찮게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인데, 이런 밀착한 시야에서 그녀는 달아나고 싶다. 딸들을 떠난 경험이 있다고 하는 레다, 그녀의 풀숏이나 롱숏을 바랄지다. 이러한 형식으로 승화한 서사를 살펴보자. 일단 레다는 왜 해변에 홀로 있기를 바랐을까. 이는 휴가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여행이란 언제나 책임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다. 플래시백에서 레다가 휴가 중 만난 하이커 부부는 아이들이라는 책무를 뒤로 하고 외도하며, 살던 곳에서 도망쳐 그들끼리 사실상 '밀회'를 떠났다.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 기존 일상은 파괴되어야 했다. 또 여성들에게 가정은 사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다. 젊은 레다와 그녀의 남편 조, 모두 연구자다. 둘 다 집에서 연구를 하지만, 육아는 사실상 레다가 독박을 쓴 상태다. 레다가 떠난 이후 잠시 돌아온 순간에도 조는 아이들을 양육할 생각이 없다. 장모님에게 맡긴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온다면 여성은 자신이 바라는 여성일 수 없다. 떠나야만 자신이 바라는 여성일 수 있다.      


젊은 레다의 기억과 자꾸 겹치는 니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가족의 구속, 토니의 집착에 신경질이 날 지경이다. 그래서 니나는 윌과 함께 외곽으로, 레다의 집으로 잠깐, 것도 찰나의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이기적인 나를 회복하고 싶다. 해변에서 레다에게 접근하는 윌은 그녀가 휴가를 잘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 왁자지껄한 칼리 가족이 찾아온다. 해변에서 시끌벅적하게 걸어오고, 바다에서는 소란스러운 물거품을 일으키는 요트를 타고 나타난다. 그리고 칼리가 생일 파티를 위해서 레다에게 비켜주라 요구하고, 레다 역시 자신의 휴가를 위해서 좋은 자리에서 물러날 마음이 없다. 여행을 온 그들은 일상의 무거운 책무, 공공의 배려를 조금도 이행할 생각이 없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긴장감이 촉발된다. 후술하겠지만 레다는 제 자신의 죄책감과 강박증에 의해 엘레나의 인형을 훔친다. 인형이 없어짐에 엘레나는 계속 불안해하고, 니나와 가족들도 곤경에 처한다. 하지만 레다는 돌려줄 마음이 없다. 또 실종된 엘레나를 찾아주어 잠시 동안 관계가 좋아진 칼리와 레다였지만, 이후 불쾌한 마찰로 다시 칼리 가족은 레다를 경멸한다. 바라지 않는 일상에서 멀어져, 바라는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휴가에 함께 참여한 타인들 또한 ‘바라는 형태’로 만들려고 한다. 니나와 윌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불륜을 위해 레다에게 집을 빌려 달라고 요구한다. 레다가 영화관에 갔을 때 소란스럽게 떠들며 영화 관람을 방해하는 청년 무리도 마찬가지다. 한편 그들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레다도 제 감상을 위해 다른 관람객의 감상을 방해한다. 또 레다는 그들에게서 바라지 않는 자신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소란스럽고 무례한데도 불구하고 직원이 오면 갑자기 숙연해져 기만하는 청년들, 그들의 얼굴로부터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시치미 뚝 떼는 자신, 보기 싫은 기억을 봐버린 것인지 모른다. 이런 식으로 본인이 바라는 나, 자신이 바라는 휴가는 각자의 이기심으로 불발한다.      


라일과 윌은 서비스가 곧 노동이기에 레다를 배려하나, 이들을 제외한 타인은 레다처럼 휴가를 와서 이기적으로 행동하기에, 레다를 특별하게 간주하지 않고 그녀를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명백한 타자, 이러한 타자들과 접촉함에 나는 변형된다. 일단 따라 한다. 엘레나는 니나가 보여준 행위를 소꿉놀이하며 인형과 엄마에게 답습한다. 또 레다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어서, 이를 바라보는 엘레나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진다. 세계와 접촉하며 나는 따라 하거나 강제로 따라하게 된다. 레다의 부유는 그래서 끝났다. 바다위에서 아무것에도 구속당하지 않고 두둥실 떠 있는 기분, 하지만 세계 및 타자와 접촉함에, 이제는 곧 그들에게 예속될 것이다. 니나와 토니를 본 이후, 라일에게 접촉하는 것은 그들의 영향이 과연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레다의 기억에서도 그렇다. 두 딸이 난폭하게 행동하고, 레다 또한 거칠게 행동하며 서로 행동을 모방한다. 또 레다는 변한다. 그녀는 한때 어머니였다. 지금도 어머니이긴 하지만 딸들은 성인이 돼서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치 않으니, 그녀는 교수로서 정체성이 더 크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자신을 타자화하며 기억을 부정한다. 작금에는 더 이상 어머니일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과거에 어머니로서 후회, 죄책감이 가득하여 부정한다. 그 당시에는 아이를 키우는 게 너무 벅찼다. 레다는 어머니로서 자신, 교수로서 자신 둘 다 양립하고 싶었으나, 전자에 의해 후자가 불발되었다. 마찬가지로 연구자인 조는 아버지와 교수임이 양립가능 하지만, 여성은 허용되지 않고, 또 무리하게 양자 모두를 책임지려니 신경질이 나고, 더욱이 자신과 닮은 타자인 아이들은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도통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행동은 난폭하게 변한다. 니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엘레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를 위하는 자신이다. 그래서 토니와 말다툼을 하며 제 의견을 피력하는 도중 엘레나를 잃어버린다. 그리고 레다는 타자화하려던 어머니로서의 자신이 깨어난다. 자신의 불찰로 비앙카를 잃어버린 기억, 이후 딸을 되찾은 기억도 레다가 엘레나를 되찾아줌으로써 오버랩된다. 더 이상 유유자적한 휴식을 즐기는 교수는 없다.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또 바로잡고 싶은 어머니로서 자신이 깨어난다.      


이렇게 접촉하면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된다. 한때 롱숏, 풀숏으로 멀었던 서로, 하지만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서로는 가까워져, 상대방의 얼굴에서 내가 비춰진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접촉함에 레다가 직접 볼 수 없는, 솔방울을 맞아 시뻘게진 레다의 등을 니나가 대신 봐주기도 한다. 또 레다의 회고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하이커들은 '도망'쳐야 한다는 바람을 레다에게 불어넣는다. 레다는 회고하며 딸들 덕에 자신이 과일 껍질을 길게 잘 깎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타인은 어둠이 감춰버린 나의 진실을, 영화 도입부의 창문 열기, 조명 켜기, 등대 등의 상징처럼 '밝혀낸다.' 내가 볼 수 없는 나를 타자가 봐준다. 한편 타자에게서 나와 닮은 요소가 있기에, 그것을 마주한 나의 눈이 번뜩인다. 그래서 서로는 닮아가거나, 닮은 것을 확인한다. 딸을 잃을 뻔한 것,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 날의 초상, 레다는 니나에게 자신을 투영하기 충분하리. 그래서 레다의 어머니가 그녀의 머리를 장식해주었던 방식으로 니나의 머리를 꾸며주고, 또 조와 권태로워 하디에게 향했던 만큼, 윌과 바람을 피우는 니나를 눈감아준다. 니나 또한 자신의 미래와도 같은 레다에게 자신을 투영하지만, 한편 니나에게 레다가 낯설어진다. 니나는 강박증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레다가 인형을 훔쳐 간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레다가 자신에게 건네준 머리핀으로 그녀의 배꼽을 찌른다. 레다가 니나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흡사 배꼽에 이어진 탯줄처럼 이어진 연을 자르는 것이랴. 이렇게 사람은 이기적이기에 닮은 상대방을 지레짐작 나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는 상대의 자유에 해롭다. 결국 레다가 돌려주지 않은 인형 때문에 니나가 많은 고초를 겪은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분리해야 한다. 레다 어머니와 레다, 그리고 딸들의 외모처럼, 상대는 나와 닮았지만 닮지 않았다. 상대방이 나와 닮지 않은 것,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 갖지 못한 것. 우리는 나와 닮은 존재에게 자신을 투영하기도 하지만, 또 내가 갖지 못한 요소를 가진 대상에게 나를 투영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 레다는 자신의 인형을 딸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아이가 싫증을 내고 투정 부리자, 그것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자신의 소중한 인형을 영영 잃어버렸다.      


그래서 작금에 레다는 엘레나의 인형이 눈에 띈다. 아이에게 줬던 인형을 돌려받고 싶고, 파괴했던 인형을 보존하고 싶다. 내게 없는 것, 한때 있었지만 없어진 것을 우리는 갈망하고 그리워한다. 칼리 일가가 아이스크림을 구매하는 것도 저번 주에 해변에 방문했을 때는 본인들이 아이스크림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요, 엘레나는 과거에 존재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는 멸종한 공룡들을 궁금해 한다. 우리는 기존 환경에서 여행을 떠나며 도망치지만, 달라진 것은 환경뿐이고 여행을 떠난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 나는 기억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기억은 항상 완결된 게 아니어서 후회가 일거나, 책임이 있는 기억이라면 죄책감에 전전긍긍한다. 또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억에서는 갖고 있었는데, 여행을 떠난 이후의 의식에선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그래서 레다는 현재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불안해하고 어색해하며 현기증을 앓는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 했어야 하는 일을 현재에 무의미하고도 맹목적으로, 니나의 표현대로라면 '미친' 것처럼 답습하는 프로이트적인 강박증에 빠진다. 레다는 과거에는 두 딸의 어머니인 자신보다, 비교문학을 연구하는 자신을 지향했다. 작금에도 휴가를 시작한 날까지는 그랬으나, 니나와 엘레나에 의해 어머니인 자신, 과거에 결핍이 있고 지금은 어머니가 아닌 자신이 떠오른다. 이제는 어머니가 되고 싶고, 어머니였던 자신을 되돌리고 싶다. 또 과거 그녀의 배 위에는 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해변의 그녀, 배 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라울, 윌 등을 바란다. 또 당시에는 하디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사랑‘하고’자 하는 존재인 것일까. 그것도 식자에게 사랑받았다면, 이제는 젊은 학생을 사랑하며 지식을 내어주고 싶다, 지식과 집. 내게 없는 것을 열망하느라 기존에 가진 딸을 괄시한다. 당시에는 너무 당연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특별하지 않았지만, 잃고 나니 그립고 특별한 딸, 그것도 5세와 7세였던 어린 딸이 말이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유급한 윌은 교수로서 지식이 풍부한 레다를 필요에 따라 동경하고, 또 어머니나 아내라는 의무에서 달아나고 싶은 니나는 윌을 사랑한다. 토니가 일정보다 일찍 찾아오는 것이 지긋지긋한 눈치다.      


아직 어머니이지 않은 칼리는 어떻게 자식들의 기억을 잊어버릴 수 있냐며 의아해하지만, 정작 레다처럼 어머니가 되고 아이를 갖게 되면 가진 것은 등한시하고 잃어버린 것, 갖지 못한 것을 바라게 되리. 그렇게 갖지 못한 것, 잃어버린 것은 레다에게 젊음도 포함한다. 영화 초반은 상징이 많다. 레다가 처음 숙소에 왔을 때, 탁자에는 파릇파릇한 과일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곧 생기를 잃고 짓물러서 썩어간다. 그리고 자고 있는 레다의 옆에 왕성하게 울어대며 짝을 찾는 매미가 날아든다. 깨어있는 젊음, 잠든 늙음은 대비를 이루고, 또 젊음이 미래를 보는 것이요, 늙음이 과거를 보는 것이랴. 늙음은 젊음인 매미를 바깥으로 보내버린다. 붙잡아둘 수 없다. 또 매미가 짧은 성체기간 동안 짝을 찾으며 활발히 울기에, 매미는 구애나 성욕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욕을 쫓아내버린다. 구애와 유혹이 올라타 있던 베개, 그녀 곁을 채워줄 베개도 치워버린다. 이후 레다는 라일이나 윌에게 야한 농담을 하지만, ‘구애’를 내쫓은 그녀에게 성이란 영 어색하기만 하다. 젊음과 육욕이 부재한 그녀는 이를 여러 각도에서 동경한다. 라일보다는 윌이 끌리는 눈치, 즉 직접적으로 젊음을 갈구한다. 또 젊은 날에 어린 두 딸을 저버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억지로 니나와 자신을 탯줄로 잇고, 또 잃어버린 인형과 엘레나의 인형, 기억 속의 어린 두 딸을 현재의 자신에게 이어선 안 된다. 그렇게 니나와의 끈, 기억으로부터의 끈이 배꼽을 찔리며 끊어진 레다는 그리스를 떠난다. 기억을 목적지로 삼다가 갑자기 현재로 추방되어 떠나려니 목적지가 불분명하다. 그녀는 과거에는 많았지만 현재에는 부재한 기억과도 같은, 무의 어둠으로 꽉 찬 밤에 놓여있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에서 그녀는 후자를 향해 졸기 시작한다. 이윽고 사고가 나서 도입부의 숏으로 되돌아간다. 그녀가 찾던 것이 밝혀진다, 바로 잃어버린 과거, 상실되어 버린 갈망이랴. 그녀는 파도 앞에서 스르르 잠이 든다. 육지로 밀려들고, 다시 바다로 쓸어내는 파도, 이러한 파도처럼 시간은 기억과 늙음을 남기고, 젊음과 찰나를 앗아간다. 하지만 후자로 돌아갈 수 없으니 우린 플래시백, 플래시 포워드가 아니라 현재로 나아가야 한다.      


어둠에 침잠한,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황망한 밤은 끝났다. 날이 밝았고 아침이 찾아왔다. 레다는 더 이상 잃어버린 두 딸, 인형에 집착하지 않는다. 더는 기억을 소환하려 하지 않고, 장성한 딸과 통화하며 과일을 깎는다. 어린 두 딸의 어머니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임은 변하지 않는다. 파도는 젊은 딸을 가졌던 어머니를 앗아가지만, 다시 되돌아오며 이제 장성한 두 딸을 가진 어머니임을 안겨주고 남겨놓는다. 과거에 그랬어야 하는 일, 하지만 현재에 이는 보통 수행할 수 없다. 그렇게 잃어버린 선택과 기회를 인정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선택에는 희생이 따른다. 연구와 사랑을 바란 여성은 남성과 불평등하게도, 어머니임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파도와 시간이 쓸어내고 앗아간 당시는 복권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잃어버린 과거와 후회하는 현재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러나 방황은 끝나야 하고 우리는 칠흑 같은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의 아침에 참여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과거의 상이 아니라, 현재의 달라진 타자를 마주하며 말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서 어머니/자신, 교사/시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양자를 양립할 수 없는 여성을 연기한 매기 질렌할, 본 작품에서도 어머니와 교수를 양립할 수 없었던 여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연상되는 작품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줄리에타>, 미셸 프랑코의 <에이프릴의 딸>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남성 감독이었고, 특히나 미셸 프랑코는 딸의 자식을 납치하는 어머니의 뒤틀린 모성, 강박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관조했다. 매기 질렌할은 여성의 시선에서 육체에만 그치지 않는, 내면과 심리로 향하는 통찰을 보여주며 여성의 강박을 상세하게 비춘다. 이를 대단히 기본적인 편집과 카메라의 거리감으로, 또 비전문배우들이 흥에 들뜬 현실을 재료로 삼아 연출한다. 그녀의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증명하는 작품이지만, 초반부의 팽팽한 긴장감과 상징성에 비해 중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느슨해지는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나의 작은 시인에게>에 비한다면 충분히 충실한 각색을 보여주고, 과거와 현재의 관계, 현실과 이상에 대한 질렌할의 지론이 풍부하게 드러나는 미명을 품은 데뷔작이라 할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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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71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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