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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21. 2022

폴 슈레이더, <카드 카운터>

회오와 책임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 <카드 카운터>(The Card Counter) - 회오와 책임    

“개별 인간은 매우 복잡하게 뒤얽힌 인과율에 복속할 수밖에 없으며, 내적 모순으로 가득 찬 거대한 집단의 일원으로서만 자기 운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운명처럼 드리워져 있는 인과율의 어슴푸레하고도 희미한 인상들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일의 철학자 테어도어 아도르노는 나치즘의 패배 이후에도 사회 전반에 잠재된 파시즘의 징후를 연구하며, 본 암담한 물결에 '권위주의적 인격'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힌다. 파시즘은 오늘로부터 연속하는 내일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를 강조한다. 현재를 미래로 계승하려는 이념과 달리, 파시즘은 존재했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도 영광스러운 과거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파시즘의 ‘어제’ 선동에 가장 쉽게 젖어 드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적 인격이다. 권위주의적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는 권위가 없다. 이들은 현실에서는 조금의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현실 바깥으로 눈을 돌린다. 자신의 노동력은 교환 가능‘했고’ 여전히 그러한데, 모종의 이유로 오늘 교환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망상에 치닫는다. 여기서 모종의 이유는  제노포비아, 호모포비아, 여성혐오 등에 해당한다. 그들은 변화한 오늘을 혐오하고, 과거에 적합한 자신을 망상적으로 찬미한다. 망상 체계 속에서 권위를 얻고 기세등등해진 그들은 파시스트들의 정책이 실제로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가상적 인격과 권위를 위해서 이를 지지한다. 권위주의적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에서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고 어떤 교감도 불가능하며, 비공식적인 여론에 너무나 쉽게 휘말려 민주주의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권위주의적 인격을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폴 슈레이더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본 유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946년 미시간 태생의 폴 슈레이더는 미국의 각본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각본가로서 그는 마틴 스콜세지와 협업한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으로 유명하다. 그는 아주 독실한 칼빈교 부모 밑에서 자라난 유년 시절을 영화에 투영하곤 하며, 또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유롭게 영화를 감상할 수 없었던 탓에 학구적으로 영화에 접근하는 것도 유명하다. 부모님에게 강요받은 정신과 제 육체의 괴리, 이는 항시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고민이다. 그가 각본으로 참여한 <택시 드라이버>는 퇴역군인 트래비스의 삶과 심리를 추적한다. 군인으로서 그는 국가가 요구한 책무가 뇌리에 여전히 새겨져 있지만, 실상 그의 육체는 현재 택시 운전사로 정신과 까마득히 멀다. 영웅으로서 현실에 뿌리내리고 싶은 트래비스의 정신은 계속 불발하여, 그는 망상으로 도피한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절대자로서 정신을 가진 그리스도가 짊어져야 할 신앙적 의무, 이에 반하는 인간 그리스도로서 육체가 지향하는 욕망 사이의 고뇌를 다룬다. 스콜세지와 함께한 작품에서는 <택시 드라이버>처럼 바라는 정신이 현실에 뿌리를 내리거나(여전히 망상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처럼 인간으로서 예수를 포기하고 정신성, 신앙을 선택하는 등 정신성의 승리가 도드라진다. <레이징 불> 또한 그를 지배하던 물질적 아메리칸드림, 육체 혹사로 얻어낸 욕구나 욕망에서 정신적, 신앙적 구원을 받지만, 슈레이더 연출작에서는 항상 낙관적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그의 작품에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육체의 승리가 도드라진다. 일례로 그의 초기작 <블루 칼라>에서는 이론 속의 노동자가 아니라, 현실의 노동자를 그린다. '엉클 샘'에 충성한다는 국세청 직원의 신념과 달리, 노동자들은 따르는 정신성이 없다. 가장으로서 힘의 만족, 남성적인 쾌락의 해소, 넉넉하고 안정적인 생계, 즉 물질에 굴복한다. 노조에 참여하는 목적 또한 물질적인 효능을 느꼈기 때문인데, 그래서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노조'라는 정신성으로 묶이지 아니하고 언제나 개인의 이기심을 좇기에 조합은 분열된다. 이에 물질을 갈구하는 자본주의, 부르주아적 권력은 존속되고, 노동자는 물질적 만족을 느낀다는 착각 속에서 끝없는 물질적 착취를 당하게 된다. 슈레이더의 자전적 요인이 묻어난 <하드코어>도 마찬가지다. 슈레이더는 눈이 잔뜩 내린 순백의 설경을 신성한 정신적 세계로 설정하는 반면, 원색이 반짝거리는 환락가를 속된 세계로 설정한다. 그리고 신실한 세계에서 질식할 것만 같아 속된 세계로 뛰쳐나간 크리스틴이 곧 슈레이더의 자화상이다. 슈레이더는 극단적인 성과 속 모두 경계한다. 정신을 중심으로 기존 현실을 동일시, 곡해, 폭행하는 것도, 육체의 욕심에 끝없이 물질을 착취하는 속된 세계의 욕망도 모두 배격한다. 참된 구원은 아버지 제이크가 바라는 크리스틴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틴이 바라는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다. 슈레이더는 순백의 세계에서 탁한 세계로 내려오는 한편, 진창 같은 소굴에서는 아버지의 손을 잡으며 위로 올라오는, 정신과 육체의 중간, 이상과 현실의 절충, 조화를 강조한다.     

 

<하드코어>의 특징인 설원이란 배경은 향후 <어플릭션>에서 반복된다. 독단적인 도그마나 신앙을 추구하는 가장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어플릭션>에서 슈레이더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전형을 그려낸다. 현실 속 웨이드는 이혼 후 딸에 대한 양육권을 잃었고, 경찰로서 무능력하며, 고위층에 저항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장이자 사회의 우직한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젖어 산다. 그는 현실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가장이자 권위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가상의 자신을 사랑한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사랑하지 못한다. 주변인들은 그의 가상적 이미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슈레이더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원인을 가부장제와 그것의 트라우마로 고찰한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는 무기력한 아들이 가상적 자아에 탐닉하거나,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로 억압됨을 추적한다. 실상 성인이 된 아들이 맞선 아버지는 유약했는데 말이다. 하얀 설원에서 현실 대신 가상적 이미지, 이미 지나간 기억을 소환하여 잘못된 선택을 내리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비극을 고찰한다. SLA에 납치되어 세뇌된 상속자 패티 허스트의 실화를 담은 영화, <패티 허스트>에서도 슈레이더의 관점은 여전하다. 후기 자본주의의 혜택을 톡톡히 본 패티, 그녀가 납치된 직후에도 그녀의 목숨과 돈을 저울질한 가족들을 비추며 극심한 배금주의가 기존 현실임을 드러낸다. 이후 SLA 테러범들이 그녀를 납치하여 눈을 가린다. 기존 자본주의를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시야가 차단된 상황에서 그녀에게 극단적 사회주의 성향을 주입한다. 이후 눈가리개를 푼 패티는 SLA에 세뇌된 정신성을 기반으로 세상을 본다. 도그마를 실현하고자 테러를 일으키며 왜곡하지만, 그것은 육체와 현실을 괄시하고 배제한 도그마이기에, 이들은 지상에서 항상 도망치고 은거지는 방화된다. 한편 슈레이더는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물질성 또한 배태한다. 패티를 체포한 현실은 기존의 법과 자본주의에 맞춰 그녀를 심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찬가지의 '개조'를 감행한다. 폴 슈레이더는 이분법적인 극단으로 치닫는 물질성, 정신성의 비극을 현실적인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현실의 시간과 같은 롱테이크에서 어색하고 유치하게 보이는 광신도들, 또 기존 현실에 편입시키려는 심문을 숨 막히게 담아내며 말이다.     


<라이트 슬리퍼>에선 마약 밀매상 라투르가 등장한다. 그는 마약을 직접 하지는 않지만, 고객들에게 속세 너머의 쾌락을 제공한다. 고객 중 한 명은 종교, 신성을 논한다. 현실 너머의 것, 비현실을 위해 현실은 희생되고 있는 와중 그는 메리앤이란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속세 너머가 아닌, 더 나은 속세를 위한 병원에서 만나고, 이후 두 육체가 부대끼는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그녀가 밀매상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는 현실 너머의 선택이 아니라 현실을 위한 선택을 내리고 이에 책임을 진다. 슈레이더는 현실과 전면 유리된 정신, 신성을 바라지 않는다. 더 나은 속, 우리가 발붙인 현실에서의 책임을 역설한다. 그의 근작 <퍼스트 리폼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절망적인 세상에 염세주의를 느끼는 목사 톨러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순교'한 환경운동가에게 동요된다. 세상에 경각심을 보여주기 위한 마이클은 제 몸을 불사르고 자살하지만, 그의 부재로 임신한 아내 메리가 홀로 남는다. 마이클처럼 현재 현실에 없는 정신, 이상, 우주를 바라보는 톨리는 그에게 감화되어 순교를 결심하나, 이윽고 마음을 고쳐먹고 제 옆에 있는 임산부 메리를 끌어안는다. 현실을 저버리고 정신으로 도피하거나 무책임하게 죽는다면, 현실에 바라는 이상, 정신성, 신앙은 조금도 뿌리내릴 수 없을 것이기에. 즉 슈레이더는 현실 너머를 사랑하지 않고 현실을 사랑할 것을, 무엇보다 욕망으로부터 사랑을 구분하여 정신성과 물질성의 조화를 이룰 것을 당부한다. 그가 바라보는 가장들은 언제나 물질적 욕망, 정신적 욕망이란 양극단으로 치달아 있다. <블루 칼라>가 지나친 물질, 육체에의 탐닉이라면, <하드코어>나 <어플릭션>, <퍼스트 리폼드>는 극단적 정신에 집착하는 가장이다. 그렇게 구원은 현실 저편의 정신성이 아니라, 현실 속 존재를 구원하고 그럼으로써 나의 정신도 구원하는 <택시 드라이버>, <퍼스트 리폼드>의 형태다. 정신을 실천해가며 찾아오는 육체의 구원 그리고 마찬가지의 반대, 과연 신작 <카드 카운터>에서는 어떤 육체와 정신의 구원이 이어지고 있을까.      


앞서 언급한 폴 슈레이더의 20세기 작품 연출은 존 카사베츠의 거친 리얼리즘을 연상케 할 정도로 건조하고 거칠며 담담했다. 하지만 21세기 슈레이더의 경향은 <퍼스트 리폼드>에서 나타나듯 베리만이나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탐미주의를 조금씩 뒤섞고 있는데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도입에서 카드놀이와 교도소의 일상, 양자의 상반되는 속성을 아름다운 형식의 대비로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가장 먼저 카드와 칩이 오가는 카드 카운팅을 포착한다. 카드 테이블의 색채는 녹색이어서 조화로움과 생명력이 느껴지고, 카드와 칩이 교환되며 발생할 즉흥, 우발, 우연을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한다. 천편일률적으로 균일하게 흘러가는 일반적 시간과 다른, 변형되고 달라진 시간성으로 말이다. 이후 카드 테이블의 녹색과 상반되는 잿빛 교도소로 카메라가 향한다. 추상화가 칸딘스키는 ‘시작하기 전의 무와 가능성을 띤 하양’, ‘해가 진 이후의 미래, 희망, 영원한 침묵에 상응하는 검정’이 뒤섞여 탄생한 ‘회색’을, 시작과 끝의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절망적인 부동 상태의 불길한 색채로 여기곤 하였다. 본 작품의 잿빛 교도소도 마찬가지다. 색채에 더해 카드 카운팅의 연출이 슬로우 모션이었다면, 교도소는 디졸브다. 교도소의 어제는 오늘을 향해 중첩되고, 별 차이 없이 이어진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 움직임은 사실상 부동이다. 그런데 이렇게 멈춘 삶은 교도소에만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 텔은 카드 카운팅을 설명하며 '인과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과거의 업보나 결정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어지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그래서일까, 교도소에서의 삶이 석방된 텔의 오늘과 내일을 규정한다. 카지노에서 반복되는 카드 게임은 교도소에서 카드 놀이를 즐기던 숏과 매치 컷되고, 또 텔이 하룻밤씩 묵는 숙소는 교도소의 방처럼 어두침침하다. 심지어 텔은 어둠이 꽉 들어찬 방의 사물에 흰 천을 씌워 사실상 '회색'과 같은 상태로 만든다. 수감 경험이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성뿐만 아니라, 사소하고도 많은 '일상적 이어짐'을 영화는 연출로 보여준다. 일례로 라 린다가 텔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한 것이 게임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의 디졸브, 그리고 텔이 게임을 마치고 환전하러 갈 때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숏에 고스란히 함께 보존된 롱테이크가 그렇다.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인과성에 상응하여 잘리지 않는 롱테이크이지만, 본 작품은 항시 롱테이크만 강조되진 않는다. 게임을 끝내고 칩을 땄으면 당연히 환전하러 가리라는 인과성은 이윽고 텔이 고르도의 강연을 들으러가며, 롱테이크는 잘리고 다른 숏으로 분절되어 인과적이지 않거나 덜 인과적인 우발적인 미래로 이어진다. 맹목적으로 이어지는 인과성을 중단하는 것이 영화에서 곧 컷이 아닐까. 텔이 카드 카운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손에 의해 숏이 잘리고 이어지는 편집, 흡사 브레송의 <소매치기>를 연상케 하는 계속 잘리는 숏들은 텔이 예상한 롱테이크라는 인과성에 예기치 않은 불확실성이 침투할 수 있음을 의미할지다. 그러나 시선과 손의 방향에 따라 이어지는 편집은 매우 규칙적이다. 다른 게임에 비해 우연보다 인과가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게임이 카드 카운팅이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텔은 시선과 손의 방향에 따라 새롭게 갱신된 인과성을 계산한다. 이러한 이어짐은 롱테이크만큼이나 매끄럽다. 한편 매끄럽지 않은 인과도 있다. 바로 푸티지 인서트다. 슈레이더는 <어플릭션>에서 웨이드의 트라우마를 가리키는, 화질은 흐리며 그레인이 자글거리는 조악한 홈비디오 푸티지를 인서트하며 ‘과거’의 속성을 상기하였는데,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CCTV를 연상케 하는 볼록렌즈와 카메라의 조야한 화질로, 텔이 복역을 하게 된 과거, 현재의 삶을 규정한 인과를 보여준다. 텔은 이를 꿈에서 본다. 그는 악몽을 꾼다. 그의 동공은 뇌리에서 마주하는 악몽을 보고 싶지 않은 듯, 꿈이 아닌 현실을 보고 싶은 듯 눈꺼풀을 계속 밀어내지만, 눈꺼풀은 미동이 없고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과거의 인과를 당연히 감당하고 마주해야 한다는 듯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고르도와 달리 본 기억에 대한 책임을 수감으로 짊어졌고, 또 고문 기술자의 기억이 있다고 해서 커크를 고문할 이유도 없으며, 교도소의 일상을 석방 이후에 고스란히 답습할 필오도 없다. 그래서 평평한 현실과 다른 볼록함, 매끄러운 디지털과 다른 거친 질감은 현재로 매끄럽게 이어질 필요가 없다는 듯 ‘지금 여기’에 부조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매끄럽지 않은 이어짐은 과거와 현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바로 나와 타인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기억을 자극하는 커크와 만나지만, 커크는 텔의 기억 속 죄책감의 거친 질감과 무관한 듯, 그의 생각에서 항시 멀어진다.      


<하드코어>에서 아버지의 독실함이 딸의 자유를 구원할 수 없고, <퍼스트 리폼드>에서 목사의 순교는 세상과 바로 옆의 임산부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들이 타인이나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에 진정한 '타인', '세상'은 없다. 모두 내 표상이 그린 환상의 대상들이다. 본 작품에서는 텔이 커크를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커크는 항상 텔이 놓인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텔이 게임을 하다가도 나가고, 또 텔이 라 린다와 대화를 하는 중에도 커크는 항시 텔이 놓인 프레임 중앙에서 멀어지며, 텔과 감상자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커크라는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텔은 그를 생각하고, 라 린다와 그를 논의한다. 텔은 커크가 잠시 그의 곁에 머문 순간만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커크를, 내면을 꿰뚫어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을 구원하려 한다. 이러한 구원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커크뿐만이 아니다. 텔이 게임을 하는 도중 라 린다와 커크가 텔을 논의하기도 하고, 또 라 린다와 텔은 서로를 흠모하지만 항시 두 사람은 곁에서 줌아웃, 롱숏으로 멀어진다. 서로의 곁에서 줄곧 멀어져서 그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과연 그 구원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상의 빈자리를 위한 것인가? 심지어 텔은 자신의 구원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초반부에 숙소에 들어가 모든 사물에 천을 씌울 때, 텔은 물건을 치우고 천을 펼치는 과정에서 항상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다. 이윽고 그 행위가 고르도의 행동을 따라 한 것임이 결말, 고르도의 집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영화 결말에서 텔은 고르도를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프레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살해한다. 고르도의 행동을 반복하고 그를 살해하는 것 또한, 텔이 자신에게 멀어져 고르도나 커크를 위한 행동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결말에서 자신이 아닌 커크를 위한 살인을 저지른 텔은 카메라 앞으로 돌아와 자수한다. 그리고 살인죄로 다시 교도소에 수감된 텔은 항상 카메라 안에 머문다. 그리고 허구의 대상이 아닌, 눈앞에 면회를 온 라 린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녀와 자기 손가락을 맞댄다. 그렇게 교도소 안에서 나 자신을 얼굴과 손가락을 자각하고, 또 왜곡되지 않은 상대방과 교감하며 구원받는다.   


텔은 지금껏 상대방을 부정하고 지배해야 하는 인과를 현재로 이어왔다. 그런 인과로 이어진 나는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인과를 끊어내는, 서로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사랑'이란 새로운 사건이 라 린다로부터 촉발된다. 그렇게 기존 인과는 중단되고 사랑이란 새로운 인과가 이어질 것이며, 이것이 곧 슈레이더의 구원이다. 인과를 강조하는 텔은 기억력이 좋다. 카지노에서 얼굴만 힐끗거리며 마주한 라 린다나, 복무 중 만난 커크의 아버지를 또렷이 기억한다. 이러한 기억들이 곧 현재의 게임, 관계로 이어지고, 이렇게 과거의 선택이 현재와 미래를 규정하기 때문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선 기억해야 한다. 혹 구원이 개방성이라면, 미래에 여지가 있게끔 인과를 계측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개방적인 인과’를 책임지라는 것이 슈레이더의 지론이다. 그래서 텔은 많은 돈을 걸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인과로 이어지는 세계는 사람들을 통성명하게 만든다. 본 작품에선 유달리 풀네임을 소개하고, 부모의 삶이나 과거 배경까지도 구구절절 풀어내는 통성명 눈에 띈다. 그러한 부모의 삶과 선택이 곧 커크의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랴. 하지만 부모의 업보가 자식에게로 이어지는 인과는 '내게' 정당한 인과가 아니다. 그래서 텔은 커크의 원죄적 인과를 해소시켜주려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텔이 제일 싫어한다는 '빚'을 커크에게 물려줘야 한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수준으로, 하루 벌고 하루 먹고 살 정도로만 카드 카운팅을 하는데, 바로 그 이유가 빚의 거부다. 빚은 미래를 끌어다 쓰는 행위다. 빚을 지면 열려있던 미래는 과거에 의해 제한되어 닫히게 된다. 텔은 과거에 의해 일련 닫힌 결과가 있는 삶을 수긍하면서도, 아예 과거에 의해 가능성 없어진 지지부진한 폐쇄적 미래를 긍정하진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일회적으로 묵을 방을 잡고, 거기서 자신의 미래를 위협할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게끔 모든 사물에 천을 덮어씌우며, 항시 자신의 '과거이자 증거'를 품에 지고 다닌다. 그렇게 자신의 흔적을 타인이나 과거에 빚지거나 저당 잡히지 않는다. 텔에게 카드놀이는 교도소의 일상을 맹목적으로 반복하다 이윽고 습관, 노동이 된 인과처럼 보이면서도, 이와 동시에 인과에 덜 얽매여 매우 자유롭게 시간을 유용하는 유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유희하는 노동’이다.      


외에도 카드 카운팅의 인과성을 강조하면서도, 과감한 결정으로 과거에 구애받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홀덤의 '리버'를 긍정한달지, 커크와의 만남으로 기존 자신의 거무튀튀한 내면을 이어가지 않고 이와 상반되는 빛을 피우기도 한다. 암담하고 피로 얼룩진 과거를 살아온 텔, 이러한 과거에 따른 인과를 강조하면서도, 텔은 여전히 미래에 여지와 희망이 남아있는 인과를 계산하여 자신의 자유를, 희망을 구원한다. 희망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른스트 블로흐는 희망의 정서가 가능하려면 미래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을 거란 충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재의 인습이 미래에 유사하게 이어진다면 우리의 희망은 불발한다. 희망찬 미래를 그려내는 동화는 항상 하늘, 바다, 산 너머에 환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처럼, 미래는 나름의 추상을 띠어야 한다. 물론 블로흐의 희망은 무의식과 본능의 충동으로 전개되는 밤꿈이 아니라 이성이 작용하는 낮꿈이기에, 이러한 추상에 그려지는 것은 텔처럼 과거나 현재의 인과가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 달리 여백이 있기에 인과는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렇게 항시 미래의 여지를 남기며 인과를 계산하는 텔은 커크와 만나서 기존 생활환경을 떠나 드라이브, 여행을 즐긴다. ‘기존 생활환경의 떠남’이 바로 본 작품에서 희망, 여백의 미래를 가능케 하는 ‘비우는 태도’다. 카지노에선 빛과 색채가 꽉 들어찬 휘황한 광고판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사람들은 기존의 일상을 뛰어넘어서 현실 너머의 더 많은 것, 풍요로운 것을 갈망하고 소유한다. 그래서 광고판에 매료되지만 과연 카지노 광고는 그들이 바라는 꿈을 보장해주는가.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그만큼 많이 착취하고 희생시키며, 무수한 제약과 무거운 인과를 부여한다. 현재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희망은 후퇴한다. 슈레이더는 <하드코어>에서 휘황한 섹스 산업의 이면에 만연한 착취, 폭력을 고발한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호화로운 도박, 명예로운 군대 이면의 야만을 폭로한다. 텔과 커크 아버지의 상사 고르도, 그는 고문 기술자로 미군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문제에 큰 책임이 있다. 그는 책임을 텔 및 커크 아버지에게 전가하고 개명한 후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 개인으로서 성취하기 어려운 욕망을 위해선 무수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분유해야 하고, 텔처럼 전쟁에 동원되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희생당하고 착취당한 커크와 같은 이들이 고르도의 숨통을 노리는 것처럼, 많은 것을 누린 사람은 그에 따른 많은 시간이 인과로 가득 차 제약이 빽빽하다. 그래서 텔도 ‘푼돈을 많이 걸지 않은 익명의 상태’를 유지하여 과거나 타인에게 저당 잡히지 않고, 미래나 자유에 여지를 남기는 인과를 이어간다. 그러나 텔은 커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수완을 남기기 시작한다. 커크를 위해서 라 린다의 제안을 받아들여 투자자의 후원을 받는다. 라 린다의 제안 전에는 자유롭게 커크와 옮겨 다녔지만, 라 린다의 제안 이후에는 그녀가 텔의 발·다리를 규정한다. 게이머들에게 미지의 존재였던 텔은 이제 서서히 아는 존재가 되어가며, 타인의 기억이나 시선에 붙들린다. 또 텔은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고르도가 책임지지 않은, 상관으로서의 책무를 마땅히 지며 이를 반성하고 싶다. 그는 커크를 구원함과 동시에, 자신이 커크의 학자금을 갚아주고 어머니의 삶을 구원하는 상사, 즉 ‘가장’이 되기 위해서 돈을 많이 번다. 이러한 연유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만큼, 텔은 커크에게 많은 돈을 쥐여주고 고문 및 협박하며, 고르도를 복수하는 계획 대신 어머니와 화해하고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라 강요한다. 이렇게 구원을 명목으로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텔은 슈레이더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의 전형이다. <하드코어>에서 아버지의 신앙을 딸에게 강요하고, <어플릭션>에서 트라우마 극복과 위신을 위해 폭압적으로 구는 웨이드처럼, 텔 또한 자신이 반성하고 싶은 '상관의 책임', ‘가정의 화해’를 커크에게 투영하고 동일시한다. 하지만 반성해야 할 것은 상관이 부하들의 책임을 대신 짊어져 주는 가장의 태도가 아니라, 상사와 그를 따르는 군인들 모두가 각자 자신의 책임을 짊어지는 마땅한 인과다. 그렇기에 텔은 커크의 가장이 되어 그에게 군림하고, 그의 빚을 대신 짊어질 것이 아니라, 커크와 자신이 마땅한 제 책무를 짊어지는 존중으로 나아가며 반성해야 했었다. 더욱이 커크와의 만남은 텔이 커크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커크에 의해 텔 내면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즉 텔 자신의 구원이었다. 또 <하드코어>에서 손을 내미는 딸을 양지로 이끌어주고, 반면 눈에 밟히지만 자신 곁에서 떠나가는 화류계 여인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텔 또한 커크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단지 아들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랑 너머의 독선적인 동일시, 자기 투영이 곧 권위주의적 인격이다. 커크나 그의 어머니에게 그럴 자격이 없음에도 흡사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오만함, 자신이 타인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오판이 똘똘 뭉친 권위주의적 인격, 이는 과거 군인으로서 의무와 자본의 인과가 만들어냈다. 텔이 돈을 지배하며 주체적으로 사용할 때, 그는 현실의 인과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이 그를 '위대한 도박꾼'으로 규정하고, 이에 타인의 내면까지 꿰뚫어 볼 수 있다는 아집에 사로잡히자 권위주의적 인격이 파생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커크를 좌지우지할 수 없고, 또 지금 그는 규율을 강요할 수 있는 군인이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와야 한다. 슈레이더가 비교적 희망찬 결말로 마무리하는 <하드코어>, <퍼스트 리폼드>에서처럼 우리는 망상적인 욕망이 아니라, 현실의 사랑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하드코어>의 질식할 것만 같은 독실함의 강요, <어플릭션>의 과도한 억압은 마찬가지로 피해 대상의 극단적 인과로 귀결되고, 이러한 영향을 쏟은 주체가 인과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처럼, 고문과 억압으로 커크의 반발심을 더욱 부추긴 셈이 된 텔은 고르도를 몸소 살해하고 자수하며 인과를 책임진다. <라이트 슬리퍼>에서 연인에 대한 책무를 다하지 못함에 복수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권위주의적 인격은 깨어지고, 이제 현실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한다. 권위주의적 인격을 형성하던, 그리고 형성할 요인들을 모두 잃고 이렇게 선명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니, 내가 좌지우지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상대방을 욕망하지 않고, 라 린다처럼 불쾌한 것도 수긍하며 존중하랴, 그 사랑이 곧 나의 구원이자 상대의 구원일지니,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손가락과 손가락의 맞댐에 우리의 희망과 미래는 창조될지니. 퇴역 군인의 권위주의적 인격, 가부장제의 탐구, 망상적 욕망이 아닌 현실에 뿌리내린 사랑 등 슈레이더의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 이를 카드 카운팅의 '인과성'으로 풀어낸 작품, 하지만 위대한 정신은 훌륭한 형식으로 승화되진 못한다. 21세기 그의 어설픈 탐미주의는 싱거운데 서투르게 과시적이어서, 20세기 리얼리즘의 현실 속 인과라는 효과를 창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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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721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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