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Jul 30. 2022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미래의 범죄들>(2022)

물질과 정신의 상호 진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미래의 범죄들>(Crimes of the Future, 2022) - 물질과 정신의 상호 진보     

“인간은 자신이 지은 기계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하인이 되었다.” -에리히 프롬-

어떤 미래, 여성들이 화장품 부작용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여성이 사용하는 화장품에서 발원한 질병이지만 이내 곧 남성에게도 여파를 미친다. 애드리안은 본 질병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피부의 집'의 책임자다. 그의 눈을 따라가는 영화에선 왜 여성들에게 국한된 질병이 남성에게도 퍼졌는지, 그 진상을 추적한다. 피부의 집에서는 발 페티시, 여성 속옷 집착 등 성과 관련된 문제를 겪는 환자들이 상주한다. 그들은 모두 남성들, 이들에 의해 발에 매니큐어를 칠하고 속옷을 입으며 화장하게 된 여성들은 병에 걸린 것일까. 이윽고 여성들이 사라진 세계에서 욕망은 외부를 바라볼 수 없어, 이내 곧 자기 폐쇄적으로 상상하며 남성들을 위협하게 된 것일까. 질병을 통제하는 피부의 집, 하지만 질병을 유발한 성애를 통제하지 못하고, 법을 관장하는 책임자들이 소아성애와 같은 해악을 합법으로 용인함에 질병은 유행한다. 권력자의 쾌락 때문에 약자의 몸은 변형되고, 그것이 구조를 주무르는 권력자에 의해 합법으로 규정되며 자멸하는 문명, 그것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1970년 발표한 <미래의 범죄>에서 비관한 미래였다. 그에게 열린 미래는 기술의 발전으로 고도로 통제되고 폐쇄된, 닫힌 미래였다. 이러한 크로넨버그의 1970년 작품을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2022년 그가 동명의 신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단지 이름만 같을 뿐, 1970년 작의 스토리를 공유하지는 않지만, 1970년에서 이어지거나 달라지는 크로넨버그의 미래에 대한 지론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우리는 작년 <티탄>이라는 작품에서 육체의 극단적 변형과 왜곡을 경험한 바 있다. 본 <티탄>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을 두고 마찬가지의 작품 색채를 보여주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기뻐하였으나, 사실 이 둘의 육체 변용은 지향점이 다르다. <티탄>을 연출한 줄리아 듀코나우의 변용은 씨앗처럼 존재에 잠재한 가능성이 변화한 환경에서 개화하는, 일련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실존이다. 그녀에게서 신체 변형은 나에 의해 이뤄지나, 크로넨버그의 것은 조금 다르다.     


1943년 토론토 태생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영화계의 프랜시스 베이컨이란 호칭이 아깝지 않은, 극단적인 신체 변화를 일삼는 SF와 컬트물로 유명한 캐나다의 영화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가능할 수 있는 미래, 도래할 수 있는 기술을 상상하며 항상 이를 경계한다. 일단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는 ‘기존의 자연’, 인간이 만들어낸 제2의 자연으로서 ‘문명’을 이탈한다. <플라이>에서 기존 세계는 백인 남성 편집장인 스테디스가 백인 여성 베로니카의 취재를 갈취하고 그녀의 집에 마음대로 들락날락하는 남성 우월적 세계, 백인 여성 기자가 비백인 과학자의 작업을 몰래 취재하고 욕구하는 백인 중심적 세계다. <네이키드 런치>의 도입부에서, 자신이 원치 않는 직업과 정체성을 갖고, 원치 않는 지시를 상부에서 받는 부조리함의 일상화다. 이러한 세계에서 기술은 자연, 문명을 넘어선 ‘제3의 자연’을 만든다. <플라이>에서 비백인 과학자인 세드에 의해 만들어진 전송 장치는 백인들이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는 발을 기술이 규정하고, 또 자연과 문명에 의해 형성된 몸과 정신을 기술이 세 번째로 변용한다. <엑시스텐즈>에서 새로운 기술은 게임이다. 새로운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서 포트를 몸에 연결해서, 현재의 육신을 가상현실로 옮겨야 하는데, 크로넨버그는 본 포트를 ‘탯줄’처럼 표현하여 흡사 인간이 기술에 의해 재탄생하는 듯한 상징성을 보여준다. 초기작 <비디오드롬>에서 오리엔탈리즘, 가학적인 포르노로 단순히 가상에 그쳤던 기술인 미디어는 이내 곧 현실에 뿌리를 내리며 제3의 자연이 되기 시작한다. <크래쉬>에서는 ‘자동차’다. 기존에는 고정된 장소에서 은밀하게 정사를 나누었다면, 이제의 인류는 움직이는 장소에서 위험천만한 자극을 느끼기 시작한다. 기술은 한때 브라운관, 게임기, 경기장에서만 머물렀지만, 인간은 필연적으로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는 존재이기에, 가상적 영역에서 경험했던 기억을 현실로 옮겨온다. ‘대본’을 바라보다 발생한 사고, 경찰의 눈을 피해 ‘합의된 사고’를 일으켰던 조직원들은 이제 일반 도로에서 쾌락을 즐기며, 기존의 법을 교란한다.      


<데드링거>에서 의사임과 동시에 의료 기구를 제작하는 발명가이기도 한 맨톨 쌍둥이는 처음에는 여성의 표준 신체와 각각의 의료 용도에 적합한 기구를 만들었으나, 이후 3개의 자궁을 가진 기형 클레어, 샴쌍둥이 수술에 맞춘 기구를 제작한다. 이를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며, 사람들이 기구에 맞출 것을 요구한다. 또 쌍둥이 형제 엘리의 곁에 항상 동행하던 베브가 클레어를 사귐으로써 하나였던 형제는 둘로 분리되고, 베브는 자신의 성애를 만족시켜주는 클레어의 기형 질과 약물에 노출된다. 분리된 상태에서 다시 서로를 그리워하게 된 쌍둥이들은 클레어에 의해 변형된 상대방, 서로의 병약함, 환각 증세를 닮아가다 끝끝내 죽음을 맞는다. 크로넨버그의 색채는 현실에서 가상을 만드는 시뮬라시옹과 이에 의한 결과물인 시뮬라크르가 현실에 시뮬라시옹되며 가상이 현실을 지배한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이론과 밀접하다. 보드리야르처럼 크로넨버그는 발전된 기술, 미디어를 경고하며, 특히나 그것의 현실화를 배격한다. 인간은 분명 전송기, 게임, 포르노를 만들고 지배하나, 이내 곧 기술이 인간을 변용하고 기존 세계까지 뒤바꾼다. 인간이 새로운 자연을 창조하지만, 그 자연에 인간이 속하며 역으로 뒤바꾸기에 크로넨버그의 육체 변용은 뒤쿠르노의 변신처럼 주체적이지 않고 수동적이며 체념적이다. 뒤쿠르노는 법에 속하지 않고, 법으로 변신하지 않으려 변용한다. 이러한 기술 지배의 결과는 <크래쉬>에서 사도마조히즘이 결부된 카섹스를 즐기다 생기는 흉터, 문신이 대표적이다. <네이키드 런치>의 주인공 빌은 상부에서 지시받는 기존 현실, 이성적인 세계, 살충제의 본래 역할을 뒤집는 일탈, 발전을 보여준다. 이후 소설가가 된 그는 타자기로 글을 쓰고, 그 타자기 또한 능동적으로 튜닝한다. 여기까지는 빌이 능동적으로 보이지만, 그를 지배하던 기존 상부, 현실에서의 지시가 새로운 기술, 그것의 영향을 받는 타인, 미국에서 망명한 ‘인터존’이란 국가, 타자기의 다른 언어, 이를 수용하는 무의식으로 옮겨간 것뿐이다. 인간이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발전시킨 기술이지만 이는 여전히 인류를 예속하는 '틀'이다. 이러한 기술은 만족스럽다. <플라이>에서 유전자 결합은 세드에게 힘과 본능의 해방, <엑시스텐즈>와 <비디오드롬>은 개개인들의 쾌락을 만족시켜주는데, 그래서 기술에 의해 변용된 인간은 이를 종교처럼 찬미하고 숭배하며 다른 사람들을 기술에 참여시키는 ‘선교’를 시도한다.   


<M. 버터플라이>에서 송이 르네를 만족시켜주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르네는 익숙한 백인들, 자신에게 지시하는 상사들, 남자를 모르는 여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군림하여 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고 싶지만, 백인들의 세계에서 이는 불발한다. 이러한 남성의 욕망을 잘 아는 남성 송은 남자의 쾌감을 만족시켜주는 기술을 구성한다. 어떤 것도 상상할 여지가 없게끔 꽉 들어차서 잘 아는 서구 세계가 아니라, 환상을 상상할 수 있는 추상적인 동양적 세계에서 남성이 듣기 좋은 말을 귀에 속삭이고, 그들이 바라는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연기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기술, 세계에 젖어간 르네, 애초에 동양을 잘 모르는 그는 이를 의심할 판단 능력을 잃고, 송을 위한 존재로 만들어진다. <크래쉬>에서도 기술이 만족시켜주는 것은 성애다. 오르가즘을 위해 필요한 자극은 힘이다. 그리고 한때 나를 자극하던 힘이라도 반복하면 둔감해진다. 그래서 더 강하고 거칠며 새로운 힘을 바란다. 그것이 간접적으론 다른 대상을 상상하는 정사이거나, 직접적으론 발전된 기술의 차가 가져오는 짜릿하고 재빠른 쾌감이다. 극의 결말에서 사고가 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에서까지 인간은 정사를 나눈다. <네이키드 런치>에서 새로운 카프카적 쾌감, 무의식이 지시하는 동성애, 사도마조히즘도 마찬가지다. 빌이 소설가가 되어 집필하는 새로운 세계도 거대하고 거룩한 이상, 혁명이 아니라 한갓 쾌락이다. 타자기는 그에게 자위 도구와 같으며, 글을 쓰며 조앤과 쾌락을 나눈다. 이러한 성애는 자기 폐쇄적이다. 외부 대상의 진실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수용하는지가 중요하다. <데드링거>에서 용모만 같지 다른 존재인 쌍둥이는 타인에게 같은 사람으로 인식, 수용된다. 구분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M. 버터플라이>에서도 그렇다. 영화는 르네가 남성인 송을 여성으로 인식하는 자기 내부의 환상에 갇힌 장면들만 편집으로 보여주고, 욕망의 외부에서 스파이짓을 하게 된 현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영화의 말미 자전적인 연극을 하는 그는 제 얼굴에 '나비 부인'처럼 분칠하며, 자신이 사랑한 것은 외부의 송이 아니라 제 욕정이 창조한 허구의 상, 곧 나르시시즘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가 죽어가는 와중에 이를 감상한 죄수들은 제 기분이 만족스러운지 손뼉을 치며, 그가 목을 그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네이키드 런치>에서도 현실이 외부의 일반적 입모양, 일반적인 얼굴에 위치해 있는 벌레의 씹는 입이라면, 그에게 환상을 말하는 텔레파시는 입 모양과 무관하게 그에게 인식되고, 벌레가 그를 유혹하는 입도 등에 달려있다.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무의식과 소설에 더더욱 탐닉하는 빌에 의해 외부가 어떤 형태를 띠는지를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욕망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은 내부로 향해 있으며, 외부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곧 개인의 표상을 이루는데, 크로넨버그는 프로이트적인 태도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하며,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충동으로 ‘성 충동’을 꼽으며, 그것을 인간의 사실상 모든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간 삶의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기술은 인류에게 종교, 숭배의 대상이 되는데, 이를 <크래쉬>에서 극의 비속한 분위기와 정반대인 '신성'한 배경음악으로 보여준다. 신성불가침 성애의 기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신성을 무너뜨리고 의심해야 한다. <플라이>에서 인간의 자아가 남아있는 세드는 기술 예찬을 그만두고, 기계에 지시하고 프로그래밍을 뒤바꾸어 인간으로 되돌아오길 시도한다. 또 세드의 아기를 가진 베로니카는 남성 백인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낙태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난관에 부딪힌다. <플라이>에서 세드의 기술을 좌절시키는 것은 베로니카가 아니라, 그녀를 다시 예속하려는 백인 남성 스테디스다. 스테디스의 승리는 또다시 타인을 수동적으로 지배하는 이념의 복권을 예고한다. 또 낙태를 진행하려던 그녀는 세드에 의해 좌절하고, 과거의 이념과 새로운 이념을 상징하는 두 남성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녀는 어떤 존재인지 모호하기만 한 세드의 아기를 품고 체념한다. <엑시스텐즈>에서 새로운 자연으로서 게임은 곧 기존 자연인 현실에 재현된다. <데드 링거>에서 기술을 버티지 못한 존재, <M. 버터플라이>에서 자신의 성을 규정하던 기술을 잃어버린 존재도 사망한다. 살려면 <네이키드 런치>에서처럼 무의식을 자신과 분리해 부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무의식과 의식, 육체를 일치시켜 기술에 순종하는 수밖에 없다. 무의식에 의한 지시를 제 뜻이 아니라 부정하던 빌은 극의 결말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으로 무의식의 지시를 긍정하며, 조앤을 다시 살해한다.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술에 의한 미래는 결정되는 것인가, 이에 크로넨버그의 작품에서 항시 기술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은 죽음으로 끝맺는다. <플라이>에서도 기술에 의한 육체 변용을 중지하고자 한 세드는 베로니카에게 죽여 달라고 요청하고, <비디오드롬>에서는 기술과 함께 인간은 파멸하며 비로소 해방을 맞는다. 이러한 크로넨버그의 작품 중 구성에서의 특징은 그가 펼칠 기술, 세계, 시간, 인물 등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로 온건하게 이행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대뜸 시작되거나 옮겨간다. <플라이>, <크래쉬>에서 시작과 동시에 크로넨버그의 탈관습적인 표상으로 인도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가 그려낸 세계나 존재는 더욱 낯설고 생경하며, 감상자의 인식이 포용하지 못해 역겹고 불쾌하게도 느껴진다. 항시 그의 영화에선 <엑시스텐즈>나 <플라이>의 신체 변용, <네이키드 런치>에서의 신체 합성과 거대 곤충 등 기존 현실에서 접하지 못한, 그래서 나의 유한한 인식에 충격을 주는 거대한 힘의 숭고가 대두된다. 이러한 그가 오랜만에 신체 변용 SF로 복귀한다. 앞서 적은 크로넨버그의 특징들은 모두 20세기의 경향인데, 2000년대 들어서 그의 작품 세계가 다소 진지하고 수다스럽게 뒤바뀌었기에, 20세기로 되돌아간 듯한 그의 <미래와 범죄>는 더욱 기대가 된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본 작품은 20세기의 파격적인 컬트, SF 경향과 21세기 진지한 크로넨버그의 색채를 상호 절충해놓은 분위기다. 크로넨버그는 20세기의 작품에서 현재의 우리가 감당하기에 역겹고 구역질나는, 생물체와 같은 미래의 신문물들을 주야장천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미래가 여전히 즐비해 있다. 이와 동시에 21세기의 작품들처럼 그는 말이 많다. 시각적인 충격은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이해되지 않을 때, 모호하고 낯설 때 강도가 높아진다. 20세기의 크로넨버그는 항상 불친절하게 설명을 단축했고, 거친 편집으로 세부를 축약하여 관객들을 낯섦, 모호함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충격은 덜하다. 단순히 그의 작품을 많이 봐서, 그가 만들어내는 생물과 같은 기기들이 익숙해서 그런 것 같지는 같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새로움'을 주절주절 대화로 설명하고, 이에 충격과 숭고는 까발려져 파격의 강도가 경감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21세기의 크로넨버그라면 파격적인 축에 속할지도 모르겠지만, 20세기의 크로넨버그를 기대했노라면 다소 심심한 편에 속한다. 또 본 작품의 대화가 크로넨버그의 미래를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아니니, 과연 이렇게 많은 대화가 필요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크로넨버그 나름의 미장센은 남아 있다. 본 작품은 아주 어둡고 혼탁하며 희끄무레하다. 바다와 하늘이 포착되는 도입부에선 누렇게 떠 있는 필터가 인상적이다. 크로넨버그는 혼탁한 색채를 구축하여, 동경과 이상적인 파랑으로부터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노랑이 뒤섞인 미래,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과거와 현실에 갇힌 미래를 비관한다. 또 촬영에 있어선 줌인 및 클로즈업과 줌아웃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영화의 카메라는 인물들을 바스트숏이나 풀숏 수준의 거리에서 포착한다. 그러다가 듀나가 브레켄을 죽이고 눈물을 흘릴 때는 클로즈업으로 육체 너머의 영혼, 감정에 집중한다. 이질적인 아들을 받아들이지 못해 살해한 어머니, 그 이질성은 인간의 본원적 감정이라기보단 통념에 들어맞지 않는 선입견에 의한 선택이 아닐까, 그래서 아들을 죽였다는 막심한 후회가 몰려들고 이러한 '인간적인 감정'을 클로즈업한다. 반면 줌아웃 될 때는 가까이 있던 인간이 멀어지고, 몸체 일부만 드러나던 기계를 확실하게 노출한다. 즉 인간은 소외되고 기계 및 기술이 중심이 될 때 줌아웃을 사용한다. 그렇게 기술에 의해서 규정되는 삶과 쾌락이 이어지다가 결말에서는 다시 인간, 사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마무리된다. 기술에 의해 자신이 규정되지 아니하고, 사울이 직접 플라스틱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장기를 가지게 됐을 때, 즉 기술에 의한 인간 소외에서 다시 주인이 된 인간으로 되돌아왔을 때, 카메라는 인간에게 가까워진다. 이러한 본 작품은 도심, 그리고 밤이라는 시공간이 반복된다. 그러나 본 작품의 시작은 도시가 아니라 바다였고, 밤이 아니라 아침이었다. 도입부, 듀나와 브레켄은 바닷가에 산다. 해변에서 놀고 있는 브레켄, 바다에는 배가 뒤집혀 있다. 이에 따라 그 주변에서 나오는 해산물들이 오염된 모양인지 듀나는 브레켄에게 거기서 주운 것들을 먹지 말라고 당부한다. 극심한 환경오염, 인간에 의해 파괴된 자연에 대한 은유일까, 더 이상 먹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소년은 먹는다. 바다가 가져다준 선물 대신, 플라스틱을 먹는다. 바다는 항상 요동치는 가능성의 원천, 그리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물의 근원이다. 인류가 오염시킨 바다에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지 몰라도, 대신 바다는 플라스틱을 먹을 수 있는 인류를 창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듀나는 이를 거부한다. 소름 끼치는 아들의 식습관을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베개로 질식시켜 살해한다. 바다가 아닌 집의 실내에서, 모든 것을 밝게 드러내는 오전이나 오후가 아닌 어두침침한 밤에. 광대한 바다가 펼쳐놓은 신인류의 가능성은, 폐쇄되고 컴컴한 실내와 어둠이 닫는다. 이후 사울과 카프리스가 있는 장소로 시퀀스는 이어진다. 도입과 더불어 본 작품의 유일한 아침이다. 괴이한 침구에서 자는 사울을 깨우기 위해 클로리스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빛이 들어오게 만든다. 어제와 결별한 오늘 아침의 빛은 신인류와 새로운 기술을 전시한다. 하지만 이후 아침은 사라진다. 대부분 밤만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오늘은 어제와 결별하고, 아침은 밤과 이별한다. 그렇게 새로운 하루를 맞고 새로운 시간을 생성한다. 하지만 영화 속 내내 지속되는 밤과 똑같은 풍경은, 분명 시간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별 차이를 느낄 수 없다. 홍상수의 <북촌방향>처럼 시간을 구분할 수 없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는 새로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신선할 것이 전혀 없다. 오늘의 아침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면, 밤에 꿈을 꾸는 우리는 미래를 예견하기보단 과거의 기억과 쾌락에 침잠한다. 니체적으로 말하자면 낮은 아폴론적인 것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조각가의 예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꿈의 세계를 낳는 창작의 중요한 전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음악 예술, 쾌락과 본성에의 도취, 근원적 쾌감, 신들린 듯한 흥분 상태다. 아폴론적인 예술가는 형상을 창조하며 즐기는 반면,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는 근원적 자신, 인간, 자연을 닮는다. 포도주를 마시며 소모적이고 파괴적이다. 아폴론적인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아침과 낮에 브레켄이라는 신인류와 현생 인류가 본 적 없는 신기술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이내 곧 새로움은 밤의 익숙함과 쾌락으로 뒤바뀐다. 기술을 인간의 쾌락에 이용하며 말이다.      


밤에 연속되는 것은 고통 없는 생활, '새로운 섹스'라 불리는 수술, 자기 살을 가르는 쾌감이다. 미래의 신기술로 인간이 탐닉하는 것은 과거나 현재에 본 적 없는 정신적 이상이 아니다. 인류가 언제나 그래온 성 충동,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신 디오니소스처럼 자기 살을 가르며 쾌감을 느끼는 성욕에 탐닉한다. 물론 이러한 퍼포먼스에 행위예술가 클로리스는 '의미'를 부여한다며 여러 현학적인 말을 얹는다. 하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이니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니, 그 모든 문장은 과거부터 줄곧 사람들의 입에서 되뇌어져 왔던, 별 의미 없는 겉포장일 뿐이다. 팀린은 사울과 카프리스의 행위를 두고 ‘섹스’라며 솔직하게 정의하지만, 카프리스는 단지 쾌감일 그들의 행위에 여러 변명을 덧붙인다. 카프리스를 맡은 레아 세이두가 자신의 퍼포먼스를 두고 현학적이고 무의미한 말들을 주절거림에, 마찬가지로 겉핥기만 중시하던 저널리즘을 비판한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작품, 자신의 행위를 밝히지 못하는 ‘어두운 말’이 악순환하며 영화 속 밤은 더더욱 밝아오지 않는다. 즉 기술의 시간은 앞으로 향하지만, 정신의 시간은 뒤로 향한다. 영화 속 위핏과 사울의 대화에 의거한다면, 기술이 보편화돼서 의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수술할 수 있다. 또 위펫이나 팀린은 장기에 문신한다. 코프 형사는 이를 통제하지 않는다. 또 살인도 만연하다. 브레켄도 죽고, 기계 정비공이 고객이나 랭도 죽이지만, 형사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바로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인류와 관련된 랭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기술은 진보하였지만 이를 가지고 하는 행위들은 과거와 별 다를 바 없거나 그간의 법이 두둔하던 것들, 그런데 신인류와 관련해선 법이 자신의 존재 당위성을 잃고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이를 통제하는 것일까, 진정 현재에 필요한 것은 쾌락을 위한 신기술이 아니라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신인류임에도 말이다. 그렇게 과거의 법을 위해 현재는 퇴행하는가? 물론 신인류를 위한 플라스틱 초코바를 기존 인류가 먹으면 파란 피를 쏟으며 사망한다. 그래서 플라스틱 소화 기술 또한 사회 혼란을 가중하긴 하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무질서함에 일조하는 예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술, 타투, 장기전시, 부검 쇼 등을 통제하지 않는 것도 모순이다.     


이러한 법의 이중성 또한 과거의 이어짐이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사회, 정치, 경제 등과 구별되는 가치를 지향하는 '상징 공간'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데, 예술계는 이러한 상징 공간의 대표적 예시다. 예술계는 외부 사회의 영향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굴절, 반항하며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생성하며 자율성을 고집한다. 예술계의 법이나 규칙을 두고, 외부의 법은 검열이나 탄압하지 않고자 미온한 태도를 띠곤 하는데, 여전히 그러한 경향이 이어지는 것인가. 작년 말 개봉한 <피부를 판 남자>처럼 말이다. <피부를 판 남자>처럼 본 작품에서도 사회와 유리되어 있던 독립적인 상징 공간인 예술은, 이제 사회나 법, 의료계가 개입해야 하는 수준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법의 눈에 예술은 여전히 예술인 것일까, 정의된 적 없는 신인류와 그들 관할인 플라스틱 음식만 통제하려 아우성인가. 상징 공간인지 사회 공간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법에 의해 예술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미래의 범죄는 범람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영화 속 기술은 두 유형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로 사울이 잠을 자고,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침구, 의자, 클로리스가 수술하는 기구의 유형이다. 이러한 기술은 씹고 삼키는 것을 도와주고, 수면의 질을 상승시킨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와 쾌감에 봉사한다. 또 카프리스가 리모콘을 작동하여 사울을 수술하기도 하지만 그녀가 사울과 함께 누워있을 때, 즉 리모콘이 그녀 손을 떠났을 때도 기기가 자율적으로 그들을 수술한다. 분명 팀린이 말하길 카프리스와 사울이 행하는 수술의 당위성은, '육체의 완전한 자기 통제'에 있지 않았었나. 하지만 크로넨버그의 그간 작품처럼 기술에 의해 몸에 선이 그어지고, 행동이 좌우되는 수동적인 종이 인간이다. 즉 첫 번째 유형의 기술은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면, 두 번째 유형은 인간이 능동적이다. 플라스틱 폐기물이 만연한 미래, 익히 예견되는 비관적인 미래, 거기서 플라스틱을 소화할 수 있는 아이들이 태어나거나 이와 연관한 기술이 탄생한다. 때로 플라스틱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본 기술로 완성된 초코바를 먹고 사망하기도 하지만, 보통 기술은 신인류가 미래에 적응하게끔 생존에 일조한다. 그리고 전자는 기술이 생물의 형태를 띠는 반면, 후자의 기술은 미동 없고 자율적이지 않은 명백한 사물이다.      


생물 같은 기술은 크로넨버그의 세계에서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불안을 내재한다. 무생물임이 명확해서 지배할 수 있는 사물과 달리, 물컹거리고 움직이는 생물은 우리에게 다가와 만지거나 파장을 미칠 것만 같다. 이러한 기술이 법도 지배하는 것일까. 쾌락의 기술을 통제하지 않고 오히려 범람시키는 법은 작년 간헐적으로 개봉한 예시카 하우스너의 <리틀 조>를 연상케 한다. 인류는 생존이 아니라, 오직 쾌락을 번식하는 것일까. 여전히 크로넨버그의 미래 기술은 사람의 쾌감을 만족시켜 준다. 대다수 사람이 할 수 있는 수술은 의학적으로는 효과가 미비하거나 오히려 질병을 방치한다. 영화의 중반, '천 개의 귀'를 형상화해서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귀를 합성한 댄서가 공연한다. 이를 두고 생물학 코디네이터는 저 귀들은 장식일 뿐,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몇 없다고 말한다. 즉 귀의 기능을 위해서 합성한 것이 아니다. 미용을 위해서다. 사울 또한 퍼포먼스하고 기술에 의존하다 보면 스스로 목 넘기고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 또 생존의 입장에서는 종양이고 혹인 것들이, 인간의 눈에 아름다움이 된다. 즉 영화 속 발전된 기술은 인간의 건강한 육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성적 만족을 위해 기능한다. 이러한 기술에 의한 인간 발전은 자연의 '성 선택'을 연상케 한다. 자연의 공작새나 극락조 등 인간의 눈에도 몹시 화려한 새들은 단지 눈에 띄고 아름답기 때문에 이성에게 선택되어 짝짓기를 맺는다. 선택된 새들은 다른 새들보다 단지 더 화려하고 세련됐을 뿐이지, 실상 거추장스러운 장식깃들은 생존에는 부적합하다. 다만 그 새들은 그럼에도 자연에서 생존하는 반면, 본 작품에서 성 선택에 집착하는 인간은 자족은 불가능하고 기술에 의존한다. 무수한 귀나 종양일 뿐인 장기, 모두는 생존에 부적합하지만 팀린은 이를 두고 새로운 섹스라 말하며 성적 자극을 받는다. 또 성적 자극은 힘이다. 인간의 피부, 표면, 특정 성감대에 가해지는 힘이 곧 오르가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처음에 짜릿했던 자극은 반복하다 보면 둔감해진다. 기존의 자극 이상을 바라며 힘을 가학적으로 더해야한다. 이러한 기술이 곧 피부를 열어서 장기를 보고, 그 내부를 자극하는 오르가즘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또 발전된 기술은 그간 성별에 따른 섹스를 뒤집어 여성 카프러스가 기계를 삽입하고, 남성 사울이 이를 받아들여 장기를 생산하여, 그간의 남과 여가 느끼지 못한 자극을 제공한다. 그래서 영화의 기술은 크로넨버그의 그간 작품들처럼, 인간의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성 선택과 성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진보한다.     


그리고 이를 예술로 포장한다. 역사 속 시각 예술의 주인공은 항시 인간이었다. 2차원적 캔버스부터 3차원적 시각 및 현실까지, 옷을 입고 있는 인간에서부터 누드 상태의 인간 등 다양하게 인간을 전시하였다. 그렇게 시각 예술이 인간의 표면을 전시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크로넨버그의 미래에는 표면 너머를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아름답기 위해서. 탐미적인 목적에 기인하는 기술, 그 '탐미주의'가 성욕을 포장하는 단어임을 크로넨버그는 까발린다. 그간 인간은 예술을 어떤 목적이 없이, 그저 무관심적으로 관조한다고 여겼다. 예술 그 자체는 인간의 어떠한 유용한 목적도 만족시켜 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저 아름다움을 위해 관조할만한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최근 진화심리학과 연관한 미학에선 아름다움의 해답을 성 선택에서 풀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은 성적인 의도가 내포된 상태로 아름다움을 힐끗거린다. 크로넨버그는 이러한 맥락에서 행위예술이라 떠들지만 실상 포르노와의 동의어인 사울과 카프러스의 공연을 비추며, 무관심적이라 주장하는 예술의 위선을 까발린다. 아름다움은 곧 성적 쾌감이요, 무목적한 예술은 단지 인간의 본능을 감추기 위한 포장일 뿐이다. 카프러스와 사울이 무목적한 예술을 주장한다면, 팀린은 아름다움과 예술의 실체를 까발리는 자다. 카프러스 또한 전시하지 않을 때는, 사울의 배에 달린 지퍼를 무관심하게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열어서 성적으로 애무하지 않던가. 이렇게 인간의 근원적인 성에 연관되기에 인간이 만들어낸 법은 성적인 기술에 관대한 것이 아닐까. 성적인 예술은 곧 브레켄의 주검까지 전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기술은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언뜻 새롭게 보이지만 사실 인간의 쾌감을 만족시켜주는 자극의 형태는 과거와 동일하다. 하지만 새로운 것처럼 기만하는 기술은 사람을 현혹시키며 생존한다. 새롭지 않으나 새로운 것, 이 또한 디오니소스적 미래처럼 과거의 계승이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문화산업과 결탁한 '독창성'을 비판한다. 독창성은 ‘존재하지 않았던 계기’를 뜻하고, 아직 존재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언제나 새로운 것은 없고, 항상 새로운 것으로 속여서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부르주아적 패권에 독창성이 봉사한다고 주장한다. 독창성은 무에서 일정한 예술적 존재자를 산출해가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에게 예술은 주어진 것에 무언가가 얹어지는 것이다.

     

분명 크로넨버그가 그려내는 미래의 기술 또한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을 흥분시키고 이를 해소하는 기존 쾌감에 단지 강도가 조금 더 얹어졌을 뿐이다. 새로운 장기를 가진 사울에게 홀딱 반한 팀린이 시도하는 것도, 지금껏 없었던 독창적인 섹스가 아니라, 사울의 표현으로 '철 지난 섹스'일 뿐이다. 또 몸에 귀가 많이 달리든, 오딜의 공연을 보고 카프리스가 얼굴을 변형하든, 이 모든 행위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가. 하지만 그들의 눈엔 여전히 새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기술에 방해되는 자들을 살해하는 정비공들과 법은 진정한 새로움을 방해하고, 원초적 인류로 퇴보한다. 그들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유산으로 먹고사는 부르주아적 존재, 하지만 과거와 현재는 달라졌다. 그들에게 현재, 우리로부터 미래에 플라스틱을 먹어야 한다면, 진정한 신인류란 과거부터 미래까지 결코 끝난 적 없는 원초적 쾌감이 아니라, ‘처음’으로 플라스틱을 소화하는 인류를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그 인류는 흑백 카메라에 담긴다. 현실에 놓일 수 없다는 듯, 그래서 영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듯, 신인류를 비추고 긍정하는 크로넨버그는 여전히 불안한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다. 이렇게 2022년에 ‘두 번째’ <미래의 범죄들>을 내놓는 크로넨버그, 1970년 동명 작품과 스토리, 배경 모두가 다르지만 정신은 올곧게 유지한다. 무려 50여 년 전부터 인간의 자기 폐쇄적인 쾌감에 의한 디스토피아를 예고한 크로넨버그는, 여전히 쾌락과 과거의 익숙함에 경도되어 새로이 도래한 현실을 외면하는 미래의 범죄를 경고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술 발전의 실체, 아름다움이나 예술의 민낯을 까발린다. 그에게 인간이 새롭게 발전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쾌락과 관련되어 있으니, 그렇다면 크로넨버그가 그려낸 미래의 불쾌함 또한 이러한 쾌감을 보여주는 장치일지 모른다. 프로이트에 따른다면 흥분은 불쾌에 상응하고, 이러한 불쾌가 해소될 때 우리의 쾌감은 증대되는데, 그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는 불쾌 및 흥분을 고조하니 말이다. 다만 해소로 나아가진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미래에 대한 쾌감 대신 불쾌를 영영 지니며 경계하길 바란다. 하지만 그 불쾌감이 20세기 크로넨버그와 달리 약하다. 길고 긴 장광설로 인해 늘어진 시퀀스와 느려지는 편집, 이에 경감되는 충격과 낯섦이 아쉽다. 크로넨버그의 말에 대한 강박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낯선 미래의 발목을 잡는 작품, 반가움과 아쉬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노장의 신작이다.

------

감상일: 220730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폴 슈레이더, <카드 카운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