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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05. 2022

미아 한센-러브, <베르히만 아일랜드>

나를 나누기, 나를 돌려받기

미아 한센-러브(Mia Hansen-Love), <베르히만 아일랜드>(Bergman Island) 

- 나를 나누기, 나를 돌려받기    

“우리가 현재의 번잡하고 덧없는 분망함에 완전히 빠져 있다면, 바로 그때 우리에게는 다른 질서를 지닌 사물에 시선을 돌리게 하는 매우 아득하고 낯선 어떤 것이 나타난다.” -카를 융-

스웨덴의 전설적인 명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에선 항상 두 가지 요소가 반복된다. 가장 먼저 베리만은 ‘시계 초침 소리’를 선호하였다. 이는 그를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베리만 아일랜드>에서 언급되며, 그의 후기 대표작인 <화니와 알렉산더>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초침 소리는 우리에게 시간을 환기한다. 우리의 도처에서 시간이 얼마만큼 흘러가는지, 그 흔적이 느껴짐에 청자는 시간을 자각한다. 인간은 특정 시간에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 자율적일 수도 있고, 타율적일 수도 있지만, 특정 시간에 무엇을 하는 존재가 바로 나다. <화니와 알렉산더>는 베리만이 자신의 과거를 담아낸 극으로, 베리만의 시계 초침 소리는 과거에 무엇을 하던 존재인지를 환기하고 각인시킨다. 베리만은 이러한 시계 초침 소리와 더불어 ‘섬’을 선호하였다. 그는 사적으로도 발트해에 있는 포뢰섬에 자신만의 거처를 세우고, 고독한 최후의 여생을 이어갔으며, 그의 대표작 다수는 포뢰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섬에서 촬영되었다. 그의 초기 대표작 <모니카와의 여름>의 배경도 섬이고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페르소나>, <결혼의 풍경> 등도 모두 섬에서 촬영되었다. <모니카와의 여름>에서 섬은 자유로운 공간이다. 육지가 현실의 제약·구속이 가득하다면, 이로부터 단절된 섬은 허무맹랑한 꿈이 실현되는 하나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섬은 고립되어 있다, 좁고 익숙한 것들이 반복되는 공간이다, 이윽고 지루해지고 언젠가는 육지로 되돌아가야 한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의 섬은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에 대해 무지하고 각자의 이기심만 추구하는 식구들 간의 괴리와 간극이 반복 속에서 폭로되는 장소다. 또 섬은 곧 인류와 같다. 나와 타인은 이어진 하나의 육지가 아니라, 띄엄띄엄 서로 멀리 있는 군도다. 이후 <페르소나>에서 나타나는 섬은 이러한 '나 자신'을 향해 고독하게 침잠해가는 과정의 장소다. 육지에서 진정한 나를 타자화하고 타인에게 투영되며 스스로가 부정되었다면, 오직 나만의 공간인 섬에서 모든 형태의 나는 합치되어 간다.     


즉 잉마르 베리만은 시계 초침과 섬이라는 시공간에 참여하며 규정되는 인간을 탐구한 감독이다. 그리고 2020년대를 살아가는 감독, 미아 한센-러브는 베리만이 거주하고 영화를 촬영하던 포뢰섬으로 향한다. 20세기의 시간과 21세기의 다른 시간이, 그가 살았고 그녀가 방문한 하나의 공간에서 교차한다. 1981년 프랑스 태생의 미아 한센-러브는 배우로 데뷔하여 감독으로 전향한 케이스의 영화감독이다. 주로 파리의 생생한 풍경을 무심한 듯 담아내는 그녀의 촬영은 에릭 로메르가 연상되기도 하고, 또 관계, 가족, 철학에 대한 사유는 그녀의 남편이었던(2017년 이혼)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여름의 조각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등을 연상케도 한다. 가족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은 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 관계를 탐구한다. 국내 개봉한 <다가오는 것들>에서부터 그녀의 데뷔작 <모두 용서했습니다>, 두 번째 장편 <내 아이들의 아버지>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물학적으로 일련 구분되는 역할이 부여된다. 그녀가 탐구하는 아버지는 주로 공적 영역을 누비는 자, 그것의 실패가 곧 삶의 실패로 귀결되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자, 외부에서 무수한 유혹에 흔들리며 변하는 자로 그려진다. 특히 창과 같은 남근으로 누군가를 찌르고자 하는 남성들의 욕망이 <모두 용서했습니다>와 <다가오는 것들>에서 반복된다. 반면 여성은 하나의 집으로서 머무는 자, 보호하는 자, 무성한 생활력 그 자체로 그려진다. 여성의 이미지는 남편의 죽음이나 떠나감 이후에도 삶을 유유히 지속하는, 거대한 생명력의 원천인 강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부모의 그늘에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간다. 한센-러브의 초기 3부작은 부모 밑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느슨하게 이은 연작이라 말한다. 또 한센-러브는 시간을 탐구하는데, 그녀는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야, 즉 실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곧 슬퍼하면서도 현재에 다시 일어나서 참여하는 어머니나 청년의 저력으로 그려진다. <다가오는 것들>에서처럼 중년이 된 여성, 변치 않는 시간 속에 머물던 나탈리는 변화에 취약하지만, 그럼에도 변화에 적응해간다. <내 아이들의 아버지>에서 어머니는 남편이 남긴 과제들을 모두 수행하며 적응하는 자로 그려지고, <모두 용서했습니다>에서의 자녀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현재에 참여하며 성장한다.     

 

또 <안녕 첫사랑>에서처럼 과거는 재연될 수 없다. 현재의 설리반은 과거와 달리 '다가오는 자'인 것처럼, 이제는 서로 위치가 뒤바뀌어 결별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현재다. 이는 음악 영화 <에덴: 로스트 인 뮤직>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기조다. 과거에 천착해서는 안 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우리가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것들도 과거처럼 쓸려갈 수 있기 때문에 실존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모두 용서했습니다>에서 재회 이후 사망한 아버지, <다가오는 것들>에서 무럭무럭 성장하여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이미지를 지워내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한센-러브의 영화에서 반복해서 포착되는 강은 역행하지 않는다. <안녕, 첫사랑>에서처럼 주인공의 모자를 빼앗아 돌려주지 않고, 유유히 앞으로 흘러갈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르히만 아일랜드>는 베리만을 여행하면서도 그 이후의 현재, 한센-러브의 현재에 참여하는 작품일 것이다. 특히 베리만이 머물렀던 섬으로의 '여행'은 한센-러브의 작품에서 줄곧 반복되는 소재이기도 하다. <안녕, 첫사랑>의 일상에서 친숙하게 여겨진 상대방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생경한 체험, <다가오는 것들>에서 새로운 세기로 진입한 나를 발견하는 경험이 여행이었던 것처럼, 여행 속에서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두 연인은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랴.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한센-러브는 본 작품에서 35mm 필름을 사용한다. 과거에도 때때로 디지털 대신 필름을 사용했던 감독이다. 그녀가 탐구하는 것이 아버지를 바라보던 시선 및 기억, 첫사랑에 대한 아스라한 향수였기 때문에, 과거라는 시간성에 상응하는 빛바랜, 지난 세기의 필름을 선택하곤 하였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시간은 현대, 특히 과거의 자신과 별거, 분리하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35mm 필름을 사용한다. 이는 극의 주인공 크리스와 토니가 35mm 필름이 영사되고, 베리만이 35mm 필름으로 담아낸 포뢰섬으로 향하였기에, 필름 시대를 살아온 감독의 세계에 참여하기 때문이랴. 또 토니의 아내, 준의 엄마로서 크리스는 과거와 잠시 이별하지만, 그렇게 이별한 크리스가 되찾는 것이 아내이자 어머니 ‘이전의 여성’이므로 이러한 과거성에 상응하는 것인지 모른다.    


더불어 현실을 선명하고 정확하게 비추는 디지털과 달리, 아스라하고도 희미하게 담아내는 필름은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상을 풍긴다. 그런 점에서 필름의 선택은 현실에서 허구로 줄곧 이탈하는 영화의 구성에 따르는 것이랴. 영화는 포뢰섬으로 향한 크리스와 토니를 포착한다. 이윽고 중반에 이르러 크리스가 토니에게 각본 얘기를 하기 시작하며, 영화는 현실과 분리된 크리스의 픽션, 즉 허구를 포착한다. 크리스의 각본 속 에이미와 조세프에겐 분명 크리스의 욕망이 담겨있다. 하지만 현실 속 벨소리에 의해 가상과 현실은 분리되고, 에이미가 아닌 크리스가 환기되듯, 픽션은 현실에서 유리된 별개의 차원이다. 그래서 이러한 픽션의 성질을 35mm 필름의 허구성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하지만 이후 에필로그에선 크리스가 자신이 에이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더 이상 에이미라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지 않고, 조세프가 아닌 앤더슨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에이미를 맡은 배우는 배우 그 자체로 존중한다. 그렇게 현실에서 분리된 예술은, 이윽고 현실에서 참이라 고개를 끄덕이지만, 여전히 예술은 온당 현실도 아니다. 애매하게 겹치면서도 분리되는 현실과 예술의 경계성은, 분명 현실을 비추면서도 혼탁하고도 오묘하게 현실을 승화하는 필름의 비현실적인 매체성과 조응한다. 이렇게 어떤 경계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필름은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한센-러브의 시선에서 재해석하는 구성을 가시화한다.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나,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나, 양자 중 어느 하나만 진정한 자신으로 택할 수 없는, 양자가 오묘하게 합치되고 계속 서로를 잡아먹는 상태가 곧 ‘자아’였던 <페르소나>처럼, 본 작품도 현실 속의 나, 예술에 투영한 나를 명쾌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한센-러브는 베리만을 빌려와서 자신을 탐구한다. <페르소나>뿐만 아니라 베리만의 섬도 한센-러브는 빌려온다. 베리만에게 섬은 마냥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흑백으로 촬영되어 괴괴하고 위협적이며 고립된 공간인 섬, 또 신이 인간을 고립시켜 믿음이 흔들리는 불안한 심리가 그려지는 공간이 섬이었다. 이는 <모니카와의 여름>이나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에서 강조되는 공간성이다.  


또 섬으로 여행을 떠나며 육지의 인간, 타인과 합치된 인간은 비로소 솔직한 하나임을 확인하는데, 한센-러브도 베리만처럼 섬으로의 여행을 떠나 자아를 성찰한다. 육지에서 토니와 크리스는 하나가 된 둘로서, 마냥 서로를 동일시한 모양이다. 하지만 일상, 가정, 준에게서 저 멀리 떨어진 섬으로 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섬에서 자신이 아닌 베리만으로의 여행으로 더 멀리 떠난다. 언제나 35mm 필름으로 촬영되는 베리만의 35mm 필름에 퐁당 빠져든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니, 이전의 일상을 고스란히 반복하지 않는다. 서로 베리만의 사생활, 영화에 대해 토론하니 각자가 생각보다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다. 부부가 베리만을 토론할 때 한 명은 침실에 놓이고, 다른 한 명은 화장실에 놓인다. 베리만뿐만 아니다. 이제는 부부가 아니라, 감독으로서 서로는 동지다. 그런데 크리스는 토니가 덜 격려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고, 무심한 것이 서운하다. 또 토니는 나름대로 격려를 해주는데 그녀가 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 자신의 징크스를 계속 건드리는 것이 거슬린다. 이렇게 섬, 베리만으로 여행을 떠난 영화의 내용 자체가 ‘하나면서 둘’인 부부를 가리키고, 형식도 이에 일조한다. 영화는 하나의 숏에 둘이 함께 놓이거나, 각각이 하나의 숏을 점유하는 편집을 통해 이를 보여준다. 베리만에 대한 각자의 이견으로 토니와 크리스는 각각의 숏에 놓이기 일쑤며, 하나의 숏에 놓이더라도 토니는 바깥을 바라보는데 크리스의 시야는 책으로 덮여 있거나, 토니는 정면인데 크리스는 뒷모습으로 포착하는 등, 하나로 묶이지만 각각의 둘인 부부를 형식으로 분리한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연작으로 치부되는 베리만의 영화들을 개별로 접근해야 한다는 관광객의 주장처럼 말이다. 크리스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각본을 얘기하는 도중에 민감한 내용이 튀어나오면, 항상 휴대폰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크리스의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지는 토니도 마찬가지다. 한편 서로 마음이 일치한다면 숏 안으로 찾아온다. 햄퍼스는 크리스의 영화가 좋았다. 하지만 그의 여자 친구는 크리스의 영화가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둘은 다투었고 헤어졌음에 햄퍼스의 숏에 여자 친구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크리스의 영화가 좋은 햄퍼스는 크리스가 있는 숏 안으로 찾아오고 다가온다. 크리스는 각본에 이를 반영한다. 에이미는 베리만이 좋지만, 결혼을 하는 친구는 베리만을 잘 모르면서 마구 폄하한다. 그 말이 불쾌해진 에이미는 그 친구가 놓인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진다. 이렇게 베리만의 섬에서 각각이 섬으로 전락하는 인물 배치와 편집을 선보이는 한센-러브는 베리만의 또 다른 요소도 인용한다. 바로 ‘시계 초침 소리’다. 베리만의 시계 초침 소리는 똑딱거리는 소음이 지금 몇 시인지, 이러한 시간에 참여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는데, 이를 크리스가 글을 쓸 때 사용한다. 크리스가 글을 쓰는 시퀀스에서 토니는 크리스에게 자신과 함께 나갈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투어에 참여하는 것은 토니가 자신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지, 크리스가 제 시간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똑딱거리는 시계 초침 소리 속에서 토니가 해야 할 것과 크리스가 해야 할 것이 구분된다. 크리스는 똑딱거리는 소음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것을 자각한다. 한편 그러한 시계 초침 소리가 육지로부터 이어진 것일까 영화 중반, 각본을 쓰기 시작한 크리스는 시계의 건전지를 모두 빼서 초침 소리를 들리지 않게 만든다. 그간 자신이 시계 초침 소리로 반복해왔던 것은 수동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크리스일까, 그러한 크리스를 지시하는 시간에 따르지 않고, 능동적으로 시간을 활용하는 크리스가 되겠다는 선언일까. 이후 크리스는 토니를 유혹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바깥으로 나가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에 등장한 집을 찾아 나서며 능동적으로 길을 떠난다. 이렇게 베리만의 특징을 오마주한 형식이 눈에 띄지만, 베리만에만 기대지 않는 한센-러브의 고유한 요소로 일단 편집이 눈에 띈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아무리 아름다운 순간이라도 다른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는 숏의 균일한 길이가 인상적이었다. 나탈리가 광대한 풍경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말이다. 숏의 시간을 균일하게 배분하는 구성이 본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크리스의 각본 속 에이미와 조세프, 그들은 둘만의 황홀한 시간을 붙잡고 싶지만, 시간은 애석하게도 다른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가 이윽고 이별의 순간이 닥쳐온다. 내겐 특별해도 시간 그 자체는 다른 시간과 다르지 않게 똑같이 흘러간다는 듯이 말이다.      


카메라 워킹에도 주목할법하다. 영화의 시작은 핸드헬드다. 비행기가 몹시도 흔들리는 것을 거친 핸드헬드로 표현하여 크리스의 공포를 가시화한다. 과연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을까. 이후 비행기에서 내려서 차에서 물건을 꺼내는 순간까지도 핸드헬드로 포착된다. 그러나 이후 차에 탑승하여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운전하기 시작하며 영화는 안정적인 스테디캠, 패닝으로 뒤바뀐다. 이후 버스에 타거나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베리만의 세계를 알아가는 장면도 안정적인 스테디캠이다. 네비게이션의 목적지, 사망하여 더 이상 새롭게 갱신될 것이 없어 닫힌 베리만의 세계는 안정적이라는 듯이 말이다. 또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크리스가 자신의 욕망을 예술로 분리한 순간도 안전하다는 듯 카메라 워킹은 부드럽고 매끄럽다. 하지만 크리스가 자신이 에이미임을 인정하고, 에이미가 쥐고 있던 쪽지에 적힌 라우테르로 향할 때 영화는 핸드헬드로 뒤바뀐다. 흡사 예술로 분리된 자신을 목도하는 것이 두렵다는 듯이, 그 결과는 안전하지 않은 것, 만나본 적 없는 것이라는 듯이, 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이라면 기꺼이 끌어안아야 하리, 예술이라며 부정해서는 안 되리라. 외에 아사야스의 작품에도 참여한 음악 감독 로빈 윌리엄스의 서정적인 배경 음악에 더해, 크리스의 정서를 대사 없이 적적하게 포착하여 전달하는, 무성영화적인 감각 내지는 영화의 서정성이 흥미롭다. 영화 속 가득한 베리만에 대한 부연 설명이 이미 만들어진 것과 텍스트에 기대는 의존성이 짙었다면, 어떤 대사도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음악과 이미지의 조화는 감각을 다루는 예술 고유의 창조성으로 크리스의 정서를 전달한다. <다가오는 것들>의 시작은 페리에 탄 나탈리의 가족을 포착하는 숏이었다.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후 나탈리는 기존의 종언, 새로운 세기로의 이행을 경험한다. 본 작품의 시작도 비행기와 페리에 탑승하는 여행 시퀀스다. 그들이 향하는 스웨덴의 포뢰섬은 영화 속 언급처럼 베리만의 동의어다. 그들은 자신의 표상에서 베리만의 표상으로 이행한다. 특히 베리만의 표상은 육지로부터 단절된 섬, 그래서 인물들은 그간 육지에서의 삶과 아예 단절돼서 변화한다.    

  

그렇다면 베리만의 표상은 무엇인가. 베리만의 여러 영화 중 본 작품에서 언급하는 이성/몸, 가면/본질의 분열과 합치를 보여준 <페르소나>, 하나로 묶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부가 다시금 둘로 멀어지며 개별을 회복한 과정을 그린 <결혼의 풍경>이 본 작품 속 베리만의 표상을 구성하는데 중추적이다. 이러한 영화들을 통해 타인의 페르소나로 구성된 나로부터 진정한 자신을, 그리고 둘이 합쳐진 하나를 다시 둘로 분리할 수 있다. 그들은 분명 베리만도 아니고, 베리만의 작품과 마냥 같지 않다. 예술은 현실과 분리되어 있다.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의 세트장이 지도라는 이미지에는 등장하지만, 이미지일 뿐인 지도가 현실을 가리키지 않아 집은 지도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는 별개의 차원이다. 토니와 준이 포뢰섬으로 오는 과정에서 허무맹랑한 좀비 이야기를 하자 한 행인이 얼토당토않다는 눈치로 자리를 피하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현실에서 발원하는 예술은 현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베리만의 작품 속 통찰이 부부를 가리키고, 크리스가 자신의 자전적 각본을 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는 포뢰섬에 왔던 타임라인을 각본에 반영한다. 크리스와 토니가 갔던 장소, 경험이 에이미, 조세프에게 되풀이된다. 크리스는 자신과 감정을 에이미와 조세프에게 투영한다. 에이미가 두고 온 연인, 자녀를 계속 신경 쓰는 심리, 조세프를 투영한 앤더스에게 크리스가 느끼는 묘한 기류가 현실을 닮아있다. 처음에 이는 분리되어 있었다. 크리스는 에이미를 분리하였고, 에이미 또한 자신의 감정을 계속 억제했다. 하지만 에이미와 조세프는 분명 잘못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몸은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크리스는 에이미임을 인정한다. <페르소나>에서 섬에서 부상한 의식이 기존 자아를 잡아먹는 것처럼, 크리스 또한 섬에서 생겨난 감정, 예술로 분리시킨 자아가 현실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그 경험이 곧 베리만의 표상, 곧 <페르소나>가 제공하는 경험이랴. 그러나 인정한다고 해도 예술과 현실은 다르다. 온전한 <페르소나>의 경험, 즉 기존 자아의 완전한 분리는 크리스의 곁에서 토니까지 사라졌을 때 가능하고, 이후 토니와 딸 준이 되돌아오니 기존 환경에서의 자아 또한 되찾아야 한다. 예술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지 않는다.     


베리만의 작업실로 향한 크리스는 황홀한 배경음악에 빠져드나, 햄퍼스가 이를 중지하고 현실로 복귀시킨다. 그런 현실에서 크리스는 앤더스와 ‘에이미를 맡은 배우’가 떠나게 내버려두고, 각본의 여러 결말처럼 자살하지도 않는다. 예술을 통해 불가능하던 자아 일부를 확인하고 그것을 돌려받았지만, 한편 그 자아의 향방이 예술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이를 위해 내가 살아가는 현실의 자아를 희생할 순 없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현실이고 거기서 실존하므로, 베리만의 포뢰섬이 아니라 해파리가 있고 양가죽을 팔며 실거주자들이 베리만에 심드렁한 포뢰섬이 더 우선이므로. 즉 공간과 예술 속에서 자아는 실존한다. 크리스가 집필한 각본에서도 공간을 탐구한다. 청소년 시절, 에이미와 조세프는 이별했다. 다른 공간이 서로를 찢어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좁고 고립된 섬으로 향한다. 광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육지가 두 연인 외의 무수한 접촉·시선이 오갈 수 있다면, 좁고 고립된 섬은 오직 단 둘만 바라보기 용이하게 만들어준다. 즉 에이미와 조세프의 재회는 서로가 반복해서 만날 수밖에 없는 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육지로 되돌아가야 하니 재회는 유한적이다. 또 친구의 결혼식이 열리는 예배당이, 조세프를 마냥 사랑할 수 없는 에이미의 울적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현실에서도 공간에 따라 실존은 각기 다르다. 토니에게 포뢰섬은 베리만 사파리로 규정된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베리만의 신화에 맞춘 포뢰섬의 지도에서 크게 엇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크리스는 이를 이탈한다. 스스로 포뢰섬을 여행하다가 길을 잃고 우연히 햄퍼스라는 학생을 만난다. 그는 베리만의 포뢰섬을 소개함과 동시에, 베리만 이전 선조들이 포뢰섬에 거주하며 상상했던 전설 이야기를 들려주며 유적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해파리가 많은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주민들이 판매하는 양가죽을 구매한다. 그들은 포뢰섬에 베리만과 무관하게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베리만은 그저 평범하거나 까탈스러운 주민 한 명에 지나지 않았고, 무관심하다. 그래서 공간의 어떤 측면, 베리만의 신화에 주목할 것이냐, 아니면 베리만의 영향을 걷어낸 포뢰섬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토니와 크리스에 대한 인식은 차이가 있다.      


토니는 가이드의 투어를 그대로 따라갔다면, 크리스는 지도를 이탈하거나 또 지도가 가리키는 베리만의 세트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다. 그녀는 소통이 어려운 스웨덴어 때문에 난항을 겪고, 전파가 잡히지 않는데 심지어 갑작스러운 비까지 쏟아져, 기대와 상반되는 우발적인 공간을 경험한다. 그것이 베리만에 대한 다른 인식을 불러온다. 베리만을 두고 아버지와 감독의 시선에서 접근하는 토니, 그리고 어머니나 아내의 시선에서 접근하는 크리스, 즉 성별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베리만이 살던 공간의 어떤 측면을 경험하느냐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섬은 동떨어져 있다. 토니와 크리스는 기존 육지의 거주지, 그리고 딸에게서 동떨어져 있다. 또 각자가 경험한 섬이 다르기에, 토니와 크리스가 느낀 각각의 섬, 그것이 구성하는 각자의 표상도 군도처럼 고립된다. 이렇게 육지에서의 하나는 섬의 두 사람이 되고, 이후 각자의 섬에 대한 다른 경험에 하나의 섬도 둘이 되는 분열이 시작된다. 부부는 서로에게 페르소나를 요구하고 덧씌운다. 영화의 도입부, 불안정한 기류에 의해 비행기가 흔들린다. 더욱이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크리스는 토니의 어깨에 의존한다. 이후 선글라스를 잃어버려서 토니가 크리스에게 자신의 선글라스도 내어준다. 토니의 것과 크리스의 것은 구분되지 않고, 특히 의존적인 크리스의 것이 모호하다. 토니에 의해 핸드헬드는 잠잠해진다. 하지만 섬에 도착하자 이들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베리만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이전 작품에서처럼 생물학적인 갭, 젠더에 따른 남과 여의 차이가 발생한다. 또 포뢰섬에서 부부는 각자의 작업실이 다르다. 이들의 작업실은 다르지만, 항상 창문이 있는 책상에서 집필을 한다는 점은 같다. 창문이 있다는 점은 같지만, 그것이 매개하는 풍경은 제각기기에, 크리스와 토니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각본에 묻어나고, 크리스는 눈으로 토니의 각본을 보며, 토니는 귀로 크리스의 각본을 듣는다. 그렇게 서로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하나인 존재는 둘로 나뉘어야 하고, 동일시시키거나 덧씌워진 시선이 아니라 각자의 시선을 되찾아야 하리.  


크리스는 토니가 빌려준 선글라스 대신, 기념품 가게에서 <페르소나>의 비비 안데르손이 착용한 선글라스를 구매해서 착용한다. <페르소나>에서 자신을 되찾는 비비처럼, 크리스는 자신이 선택한 <페르소나>의 선글라스를 쓰고 잃어버렸던 자신을 되찾기 시작한다. 크리스는 토니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내려두고, 주체적인 감독으로서 자신을 되찾는다. 크리스가 각본을 쓰는 도중 잉크가 다 떨어져 토니의 것을 빌리러 간다. 본 과정에서 크리스는 토니의 각본을 접하는데, 종이에는 토니가 여성을 성적으로 속박하고 지배하는 삽화가 그려져 있다. 이후 토니가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불편하게 느껴진다. 각본을 토니에게 말하는 크리스는 흡사 그의 눈치를 보며, 그의 견해에 의존하며 각본을 끝마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토니가 자리를 비워야만 크리스의 각본은 에필로그로 향한다. 또 토니의 영화 속 남성의 욕망에 의해 비극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지나라는 여인과 눈동자가 마주친다. 스크린 속 지나와 현실의 크리스는 같은 존재인가, 허구 속 지나의 시선이 현실의 크리스를 자신처럼, 토니의 의도대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 그러나 크리스는 토니의 여성상을 자신과 분리한다. 이제 욕망을 토니에게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달아나던 크리스, 곧 한센-러브는 아사야스와 2017년 이혼을 한다. 이러한 ‘달아남’은 크리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섬이 요구하는 결혼식에서 달아나는 에이미나 조세프, 자신의 각본의 마무리를 도와달라는 크리스의 요구에서 도망치는 토니도 모두 타인의 페르소나임을 거부하는 움직임이다. 타인의 요구보다 자신이 받아야 하는 '통화'가 우선이다. 토니는 포뢰섬에 도착하는 순간에도 베리만의 표상에 잠식되기보다는,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통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달아나는 것은 타인과 합치된 나의 분리, 그리고 예술이다. 토니나 크리스가 각본에 적은 욕망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경계들은 혼탁하게 뒤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포뢰섬과 베리만의 세계, 그리고 토니와 크리스, 그 모든 차원이 불분명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후 공간, 상대방의 요소를 확인한 그들은 현실에서 달아나 각본에 본인이 바라는 자아를 투영하여, 이내 곧 각본과 자신을 합치한다.      


혼탁한 현실에서 자신을 끄집어내 예술로 옮겨내어 스스로를 타자의 차원과 구분하니, 더는 그들 곁에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나와 타자를 분리하면, 그 경계를 존중하면 각본의 조세프, 현실의 앤더스가 달아나는 것을 붙잡을 수 없고, 그들에게 머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되, 떠나는 그들의 실존도 인정하리. 그리고 예술과 현실을 다시 분리, 그렇게 현실에 참여하는 자신도 인정하여, 당시에는 아내였던 자신, 그리고 여전히 어머니인 크리스로 되돌아온다. 예술은 크리스가 각본에 에이미와 조세프를 상정하여 자신을 탐구하는, 자신이나 타인의 표상을 가늠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이렇게 미아 한센-러브는 그간 부녀 관계, 연인 관계에 대한 선형적 드라마로부터, 베리만의 영화 세계를 인용한 여러 차원이 비선형적으로 뒤섞이는 실험을 선보인다. 육지에서 섬으로, 섬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다시 현실로,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명확히 실존해간다. 본 과정에서 기존 자아로부터 실존하는 새로운 자아, 내지는 잊힌 자아의 부상은 <페르소나>와 <결혼의 풍경>을 닮아있으나, 사실 한센-러브가 그간 사유한 실존으로의 여행, 머물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자연스런 인간사에도 해당한다. 베리만을 인용하여 제 예술관을 강화하고, 이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작가로서 시선을 드러낸 작품, 한센-러브 또한 크리스처럼 자아 여행을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통해 떠난 것이다. 이는 미아 한센-러브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도 느껴지며, 이를 비선형적으로 비틀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베리만의 설명에 지나치게 할애된 시퀀스들은 포뢰섬 관광 영상처럼 느껴질 정도로 통속적이나, 베리만에서 궤를 틀어 자신의 시야에서 포뢰섬을 바라본 한센-러브의 이야기는 꽤 절륜하다. 그간 부녀 관계, 부모의 삶을 바라보던 한센-러브가 아사야스와의 결혼과 이혼 이야기로 옮겨가는 ‘성인의 이야기’, 배우자와 예술의 페르소나가 뒤섞인 상태에서 이를 벗을 수 있는 여행을 떠나 타인과 허상을 분리하며 자신을 회복하고 발굴하는 ‘비선형적인 구성을 거친 실존’, 이는 그간 ‘선형적인 연출’로 ‘딸’의 이야기에 주력하던 한센-러브에게 또 다른 이야기와 연출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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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0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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