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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08. 2022

클라이오 바나드, <알리 앤드 에이바>

인습과 사랑

클라이오 바나드(Clio Barnard), <알리 앤드 에이바>(Ali & Ava) - 인습과 사랑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 혹은 미지에 준하는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면 달리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마르셀 프루스트-

유럽에서 무슬림과 백인의 관계를 다룬 세 개의 영화, 일단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열망>이 있다. 터키에서 독일로 이주한 알리는 여러 상가를 운영하는 탁월한 수완가로, 로라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게르만족과 생김새가 다른 알리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빚을 탕감할 목적으로 결혼한 로라는 절대 그에게 마음 내어주지 않는다. 그는 원리주의적 무슬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히 과격해진다. 로라에게 폭력으로 힘을 과시하고, 상가를 운영하는 하청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독일에서 아무리 고군분투해도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어떻게든 무시당하지 않게끔 힘을 키운다. 그래서 알리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무슬림으로서 자신을 지키고자 과격해진다. 본 <열망>은 2008년에 나온 작품으로, 2010년대에 무슬림과 백인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론 조아생 라포스의 <아워 칠드런>이 있다. 벨기에로 이민을 온 무슬림 무니르와 벨기에의 교사 뮤리엘은 서로 첫눈에 반해 금세 결혼한다. 하지만 서로는, 특히 뮤리엘은 무니르를 몰랐다. 결혼하자마자 자신과 다른 무니르의 가정환경이 눈에 띈다. 무니르 가족의 남아 선호 사상이 곧 무니르와의 관계에서 딸만 내리 낳은 뮤리엘의 삶을 조여 온다. 또 남과 여의 엄격한 분리, 특히나 육아를 독박 쓰는 뮤리엘은 지쳐간다. 경제 활동도 가사 활동도 모두 뮤리엘이 도맡는다. 이에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열망>이 유럽으로 넘어온 무슬림 이민자의 비애를 담는다면, <아워 칠드런>은 시대착오적인 무슬림의 독선을 적나라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이들보다 현저하게 앞선 1974년에 발표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진정한 사랑을 논한다. <열망> 속 돈으로 쟁취한 무슬림의 욕망, <아워 칠드런>의 백인에게 무슬림의 삶을 주입하려는 세뇌 및 폭력 대신 말이다. 노파인 에미와 모로코 출신의 알리는 나이, 인종, 민족적 차이가 현저하게 차이난다. 하지만 외로운 두 남녀는 서로의 애환을 어루만진다. 단순히 나의 외로움이 아니라 진정 상대방의 삶을 헤아린다. 그렇게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지만, 이를 방해하는 것은 세간의 시선이다. 하지만 시선이 주입하는 거짓을 이겨내고, 진실한 사랑을 이룩하는 숭고한 힘을 파스빈더는 긍정한다.      


이렇게 다른 나라로 향한 무슬림 남성과의 사랑을 다룬 작품에서는 ‘시선’이 강조된다. 배타적인 시선, 사상을 주입하려는 교조적인 시선, 이질적인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편협한 시선… 이러한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랑 내지는 욕망이 다시 한번 스크린에 펼쳐진다. 아일랜드계 영국 여성과 무슬림 남성의 사랑을 클라이오 바나드가 <알리 앤드 에이바>에서 그린다. 1965년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태생의 클라이오 바나드는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언제나 영국 노동계층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쥐잡이> 시절의 린 램지, <피쉬탱크>와 <레드 로드>를 연출한 안드레아 아놀드와 함께 언급되는 영국의 여성 감독이며, 마이크 리나 켄 로치의 '키친 싱크 리얼리즘' 전통을 이어가는 감독이기도 하다. 바나드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하였다. 영국의 여성 극작가, 안드레아 던버를 그녀의 딸들의 기억으로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아버>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으며 영화계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아버>는 일반적인 관습, 문법을 따르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안드레아 던버가 자신의 연극을 자신이 사는 동네인 '아버'라 칭한 것처럼, 그렇게 아버가 ①삶의 터전임과 동시에 ②연극, 가상의 의미를 함께 지니는 것처럼, 바나드 또한 픽션과 현실을 오가며 그녀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그녀는 아버라는 동네이자 연극 무대에, '각본'으로 반복되는 여성들, 특히 노동계층 유색인종 여성들의 각박한 삶을 포착한다. 이후 바나드는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축적한 현실을 픽션으로 승화한다. 동물 '말'을 상징으로 삼은 점이 특징인 <이기적인 거인>은 그녀의 첫 번째 픽션으로, 하층민 청소년들의 핍박받는 삶을 키친 싱크 리얼리즘으로 풀어낸다. 영화 속 아버와 스위프트는 케이블선을 절도하는 철도공사 직원들, 자신을 착취하는 고물상 사장을 모방한다. 아이들은 횡령하고 절도하며 말을 착취한다. 영화 속 반복되며 깔리는 케이블선, 하지만 노동계층 다수는 케이블선의 본래 기능과 혜택을 누릴 수 없다. 궁핍한 그들은 사회에서 고립·배태되어 있고, 아이들은 교육을 받는 것보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들에게 케이블선은 생계를 위해서만 절도되며 기능한다.     

 

이렇게 청소년들은 상위 계층을 모방하며 노동에 참여하지만, 그들과 하류층이 같지 않은 것은 면책이다. 상위 계층은 횡령, 절도에 대한 책임을 청소년, 하위계층한테 일임하는 반면, 청소년들은 그들의 책임을 옮길 대상이 없다. 분명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먼저 스위프트와 아버를 혐오한 상황에서도, 정학 및 퇴학은 높은 계층에게 저항한 낮은 계층의 두 아이들만 당한다. 착취당하는 청소년들은 아무리 일해도 돈을 벌수가 없으며, 그들보다도 밑인 조랑말이 희생되거나, 스위프트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나드는 자신의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는 착취의 종언, 고립된 노동계층끼리의 '화해'로 암담한 세상을 반성한다. 바나드의 세계는 영국 대도시로부터 외곽, 주변부인 소도시, 농촌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등장인물들은 동물, 특히 가축과 공존한다. 노동에 편입된 가축들은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항상 착취다. 앞서 언급한 <이기적인 거인>에서도, 끝없이 털이 깎이고 인간의 계산에 의해 머묾과 처분이 결정되며, 심지어 <어두운 강>의 사냥당하는 양들도 마찬가지다. 본 <어두운 강>에서는 젠더를 탐구한다. <이기적인 거인>에서도 홀로 책임이 떠맡겨진 아버의 어머니, 남성에 의해 임신과 출산이 중단되지 않는 스위프트의 어머니 등 여성의 비참한 삶이 간접적으로 제시되었는데, <어두운 강>에서는 앨리스라는 여성 주인공을 상정하여 남성에 의해 '소유'되는 절망을 직접 비춘다. 바나드는 아버지에 의한 성적 트라우마가 현재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분리되는 컷으로 보여주지만, 한편 과거의 숏들이 현재에 매치 컷되며 지속적으로 남성에게 예속되고, 응당 가진 것조차 남성에게 빼앗기는 여성의 비애를 다룬다. 바나드는 남성에 의해 촉발된 사건에 남성이 책임질 것을, 남성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서 여성의 제한된 움직임이 능동적으로 변할 것을, 불안하고 경직된 얼굴로부터 유연한 감정 표현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바나드가 <어두운 강>에서처럼 다시 한번 여성의 사랑을 다룬다. <어두운 강>에서 아버지에 의해 불발된 딸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과 뜨거운 연인 관계, 그것은 무슬림과 백인 여성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어질까.     


또 <어두운 강>의 사랑에 정치적 젠더가 뒤섞이는 것처럼, <이기적인 거인>의 키친 싱크 리얼리즘처럼 바나드는 사랑하는 인물들이 속한 시의성,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카메라는 몹시도 흔들린다. 바나드의 작품이 항상 흔들리긴 했다. 전작 <어두운 강>에서는 핸드헬드의 움직임이 줄어들긴 했지만, <이기적인 거인>에서의 거친 흔들림이 언제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소시민, 노동계층의 삶을 포착하는 바나드의 태도를 형식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카메라는 어째서 흔들려야만 하는가. 영화 속 영국의 날씨는 언제나 안 좋다. 비가 잦고 바람도 세차게 분다. 문자 그대로의 날씨만 어둡지 않다. 이들의 가정도 항상 우기다. 이러한 악천후에 그들은 혼자다. 언뜻 보기에 이들은 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에이바에겐 자랑할 만한 많은 자녀가 있고, 알리의 곁에 루나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피상일 뿐이다. 에이바는 자녀들을 성년으로 키웠지만, 그렇게 다 자란 아이들이 손자, 손녀를 낳고 에이바에게 떠맡긴다. 또 알리는 루나와 이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별거 상태이니, 이들은 세찬 환경에서 홀로 서있기가 어려운 상태라 할 수 있다. 외롭고 힘겨운 소시민들의 삶,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개인으로도 빈곤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삶, 이에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그들을 포착하는 영화는 핸드헬드일 수밖에 없으리. 또 영화는 <이기적인 거인>의 아주 느슨한 시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기적인 거인>에서 스위프트를 맡았던 숀 토마스가 본 작품에 재등장하여 에이바의 아들 캘럼을 맡는다. 그리고 캘럼과 스위프트는 가정환경이 꽤 유사하다. 스위프트는 폭압적인 가장, 이에 임신과 출산에 선택권이 없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알리 & 에이바>에서도 에이바는 폭압적인 남편의 가정폭력 때문에 사실상 이혼했고, 그와 총 네 명의 많은 아이를 낳았다. 물론 스위프트는 <이기적인 거인>에서 사망하였기에 캘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돌아올 수 없겠지만, 최소한 가부장제에서 억압받은 어머니들의 자유를 추적하는 극으로서 희망적이고 이상적인 시퀄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핸드헬드는 이전 작들처럼 마냥 비관적이지 않다. 노동에 의한 흔들림, 남성에 의한 여성의 흔들림처럼 외부의 영향력에 의한 멀미만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거친 연출로 거친 삶을 포착하기도 하지만, 역동적인 연출로 역동적인 해방, 자유를 포착하기도 한다. 일례로 영화 중반부와 수미상관을 이루는 도입부에서 핸드헬드는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는 알리의 몸동작에 상응한다. 이후 중반부에 되풀이되는 시퀀스에서도 노래에 음악은 결합되고,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그림 그리는 장면과 교차 편집되어, 핸드헬드는 노래를 듣고 솔직하게 리듬을 타는 해방된 몸의 움직임과 연관한다. 하지만 이러한 핸드헬드는 영속되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에선 크레딧이 교차 편집되며, 알리가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는 숏들은 계속 불안정하게 잘려나가고 점프컷의 형태를 띠지 않았던가. 이러한 연출 외에도 이들의 사랑은 캘럼, 알리의 가족, 세간의 시선 및 인식 때문에 계속 불연속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데도 이들은 사랑, 그리고 자유를 추구한다. 바나드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하여 가장 달라진 면은 노래를 적극 사용한다는 점이다. 에이바는 아일랜드 출신답게 포크송과 컨트리를 좋아하고, 알리는 랩과 댄스를 선호한다. 이들은 항상 이어폰을 끼고 흥얼거리며 일터로 향한다. 분명 이들의 노동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또 세계는 음악처럼 낙관적이거나 목가적이지 않다. 돌팔매를 하는 아이들이 있는 동네에서 이어폰을 끼면 나의 의식에 아름다운 청각이 뇌리를 지배하긴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침묵이나 소음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캘럼은 알리와 에이바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접할 수 없고, 이어폰 바깥은 여전히 암담함에 노래를 듣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지 않던가. 그런 현실에서 음악으로의 도피와 갈망은 나름의 희망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음악의 사용은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무감하고 건조한 인물들의 표현, 노동이 반복되는 딱딱한 세계에서 카우리스마키의 노동자들은 항상 음악으로 나아가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빼곡하게 들어차 어떤 희망도 꿈꿀 수 없는 현실이 아닌, 새롭게 가능성을 도모해볼 수 있는 악보의 세계에서 미래의 자신, 더 나은 현실의 자신을 꿈꾸지 않던가.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보육교사이자 어머니로서 불가능한 사랑을 추구하는 에이바, 기혼자이자 무슬림으로서 불가능한 연인 알리의 상은 모두 음악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알리와 에이바는 음악으로 친해지고 사랑에 빠진다. 그렇게 이들은 더 가까워진다. 우리 주변의 이웃이자 어머니인 에이바, 그리고 친숙한 노동자인 알리는 결코 우리에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영화는 항상 바스트숏 수준으로 그들을 포착한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바스트숏 정도의 거리에서 식구, 친구, 지인, 이웃들을 만나지 않던가. 그런 친숙함이 느껴지지만, 실상 바스트숏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몇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어머니, 노동자라는 객체를 재생산하는 그들을 알 뿐이다. 오히려 어머니, 노동자의 모습을 이탈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이자 춤꾼이 된 그들은 클로즈업으로 더 가까워진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영화는 거리감으로 익숙한 이미지와 진정 추구하는 주체적인 그들의 모습을 대조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감상자와 영화의 거리뿐만이 아니다. 분명 친구사이였던 알리와 에이바도 한층 더 가까워진다. 서로의 헤드폰을 공유하며 말이다. 그렇게 솔직한 나의 감정, 취향을 이해받으니, 비로소 각자의 몸에 일어나는 전율이 느껴지고, 몸이 반응하고 요구하는 동작을 과감하게 실행한다. 그렇게 클로즈업으로 다가선 그들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가까워져 알리는 루나와의 유산 혹은 사산 경험을, 에이바는 전 남편의 가정 폭력을 털어놓으며 제 자신에게 더욱 진실해진다. 이러한 클로즈업에서의 핸드헬드는 내 몸에 솔직한 전율, 박동은 아닌가. 알리와 에이바는 왜 서로를 만나야지만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가족은 왜 연인에 비해서 몰랐을까. 영화의 도입으로 되돌아가보자. 밤의 춤판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된다. 노동자들은 일어나서 출근을 시작하고, 노동자들이 일을 시작하니 말들도 마차를 끈다. 그들은 집에서 바깥으로 나간다. 노동은 해야 하지만 하기는 싫은 것이다. 아직 이혼하지 않았기에 결혼이라는 의무 상 ‘쇼윈도 부부’를 훌륭하게 근무해야 하지만, 서로 부부로서 애착이 식어버린 알리와 루나가 노동을 이탈하여 새로운 연인과 만나고 교류하며 감정의 해방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알리와 루나는 집에서 각방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비좁은 감정을 느끼지만, 그나마 밖에서는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에이바는 그렇지 못하다. 캘럼의 여자 친구는 아직 미성년자인지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캘럼과 여자 친구 사이에는 아기가 있다. 캘럼과 여자 친구는 본격적인 노동이 시작되지 않은 아침을 여유롭게 보낸다. 육체와 무의식이 지배하는 꿈의 시간, 그리고 이성과 의식이 깨어나는 노동의 시간 사이에 낀 아침, 전자에서 덜 깬 채 후자를 준비하는 아침에 그들은 TV에서 송출되는 체조를 따라할 여유가 있다. 이들은 마땅히 꼭 해야만 하는 직책이 무겁거나 갑갑하지 않다. 하지만 에이바는 아니다. 자식들의 여유로운 아침을 위해 그녀는 바쁘다. 그녀가 낳지도 않은 손자가 에이바 품에 안겨 있다. 이후 학교로 출근한 그녀는 보육교사로서 아이들을 훈육한다. 그런데 퇴근한 이후에도 딸이 무려 세 명의 자식들을 자신의 집에 맡기며, 그렇게 에이바는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보육교사' 및 '유모'로서의 노동이 끝나지 않는다. 알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세입자들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현재 루나와의 관계가 그저 그녀의 집을 관리하는 노동의 연장선이 되었다. 더욱이 양자 모두 가족들이 그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이 있다. 아버지에 대해 왜곡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캘럼은 에이바가 알리와 친밀해지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된 캘럼이지만, 그는 여전히 아들로서 '어머니'의 특정 상을 요구한다. 대가족과 살고 있으며, 항상 정기적인 저녁 식사 모임을 갖는 알리도 마찬가지다. 조카 아이샤나 여동생 우스마는 알리가 에이바와 함께 있는 것을 보면 항상 궁금해 하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이후에는 그녀와 만나지 말라고 당부한다. 직업을 가지면 주어진 업무를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시간표대로 계속 반복해야 한다. 그것이 곧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어머니임과 동시에 배우자이랴. 심지어 에이바는 이러한 직업을 사별로써 내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캘럼이 아버지의 부츠를 '계승'하고 에이바를 구속하는 '직업'을 물려받으며, 타인에 의해 일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불연속적이다. 내 마음이 변치 않더라도 타인의 방해와 간섭에 의해.       


이렇게 직업을 부여받은 그들은 타인이 원하고 바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분명 자의도 포함한다. 에이바는 남편과 결별 이후, 학위를 따고 보육교사가 되었다. 남성에게 구속받는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주체적으로 극복한다. 또 이웃 던의 조울증을 신경써주는 것도 그녀의 의무가 아니라 자의의 선행이랴. 하지만 그런데도 나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행위를 하지 않는 이들은 항상 외롭고 결여를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다른, 그래서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지닌 상대방과의 관계가 각자의 구멍과 균열에 땜질을 한다. 언뜻 보기에 에이바는 일반적인 잉글랜드계 여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리와 만난 이후 그녀는 아일랜드계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이 좋아했던 컨트리, 포크송을 함께 듣고 춤을 추며, 알리와 만난 이후 아기 이름을 '아일랜드식'으로 작명하려 한다. 에이바는 분명 아일랜드계임을 고백하지 못하는 것에 염증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일랜드계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자신에게 '개종'을 시도하지 않는 알리를 통해 진실의 결핍을 충족한다. 알리는 항상 농담을 많이 한다. 그녀를 웃게 한다. 아일랜드계인 그녀도 긍정한다. 그녀가 가정폭력을 당한 사실도 묵묵히 들어준다. 바나드는 서로 간의 보완은 대사나 서사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시적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바로 '비'다. 영화에선 비가 잦다. 이렇게 비가 내릴 때 알리는 에이바를 차에 태워 퇴근시켜주며, 에이바에게 닥친 시련을 함께 극복해준다. 에이바 또한 마찬가지다. 비가 오는 날 밤, 알리를 집에 보내지 아니하고 캘럼의 방에서 하룻밤 묵게 하여 그를 시련에 던져두지 않는다. 영화는 비가 아니어도 어둡다. 명도가 많이 낮아서 음침하고 우울하다. 영국의 기후와 환경을 형식으로 승화한 것 같기도 하고, 또 바나드의 작품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어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어두움을 타자와의 우정, 사랑으로 보완해간다. 에이바가 가르치는 소피아는 멋모르고 높은 놀이기구에 올라갔다. 소피아는 내려가길 시도하지만, 떨어질 걱정에 시야가 아득해진다. 이 때, 경험이 많은 에이바는 내려올 수 있다며 용기를 주고, 높은 곳에 올라갈 때면 내려갈 용기를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에이바는 알리에게도 높은 곳에 올라가고 내려올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한다. 알리의 헤드폰을 공유하며,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하여 춤을 춘다. 그것이 들리지 않는 사람인 캘럼에게는 위협적으로 보인다. 무슬림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을 보여준다. 하지만 에이바는 통념 너머의 사실을 인식하고 포용한다. 그렇게 존재 그 자체의 알리를 긍정하며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부여한다. 알리가 에이바와 소피아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교통체증이 너무나도 심하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내게 부합하지 않는 상대방이 멍청하게, '바보'처럼 보인다. 어쩌면 교통체증은 내가 나대로 나아갈 수 없는 불만이랴. 하지만 에이바는 알리가 자신대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 랩이 좋으면 랩을 하고, 남들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유산 사실도 고백하게끔 말이다. 그리고 에이바가 돌봐주는 던이 그녀에게 알리와 만날 용기를 자극하고, 알리와 에이바가 도움을 주는 소피아네 가정 또한, 에이바의 편지를 알리에게 전해주며 '큐피드'가 되어준다. 영화 속 타자와의 우정과 사랑으로 충족되는 보완은 거짓, 은닉, 통념 너머의 생략된 진실에 목말라있는 우리의 갈증을 촉촉하게 적셔준다. 그렇게 보완한 그들은 여행을 떠나고 이혼을 한다. 알리와 여행을 가는 것이 에이바는 두렵다. 세간의 인식에서 여전히 알리는 기혼자다. 더욱이 '백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캘럼의 시선도 있다. 하지만 일상이 거짓이라면, 그들만의 여행이 감정에 솔직한 진실이라면, 이들은 마땅히 일상을 중단할 용기가 필요하다. 또 루나는 알리가 자신의 곁에서 멀어지고, 쇼윈도부부로서 집착을 멈추니 이제 그가 달리 보인다. 다시금 애착이 형성되지만, 이들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표출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혼한다. 이러한 솔직한 관계는 영화 속 밤에 형성된다. 밤은 어둡다, 모든 존재를 가린다. 하지만 의외로 가장 자유로울지 모른다. 어찌됐든 노동이 끝난 시간이자, 에이바에게 캘럼이 들이닥치는 시간은 낮이나 아침이고, 밤이면 여자친구네로 향해 자리를 비운다. 어머니임을 내려놓을 수 있다. 다만 어둡기에 존재는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     


그런 밤에 알리는 전등 옆에서 에이바의 편지를, 에이바는 라이터를 비추어 던과 얘기를 나눈다. 감춰진 서로의 솔직한 속내를 ‘밝힌다.’ 또 이들은 밤에 만난다. 밤에 만나 관계를 진척시켜간다. 알리는 초승달을 바라보는 무슬림의 전통을, 에이바는 남편의 무덤과 결혼 생활을 공유한다. 그들은 결혼 제도 너머, 서구 기독교적인 세계 너머를 밤에 본다, 간섭하는 이들이 잠들었으므로. 그렇게 자유롭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폭죽을 터트리며 솔직한 감정을 밝힌다. 알리와 에이바 서로에게 제 존재를 찬란하게 과시한다. 물론 밤의 진실은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다. 에이바는 저녁 무렵 알리와 루나의 관계가 나아졌음을 확인해서 마음이 쓰라리다. 또 밤에 모닥불을 앞에 두고 캘럼과 에이바는 다툰다. 각자의 절충할 수 없는 솔직한 감정이 충돌하다 못해 불타오른다. 하지만 이러한 진실의 밤을 거쳐야지만 거짓은 진실로 한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루나와 알리, 캘럼과 에이바의 관계, 그리고 한 평생 가사노동자와 보육교사였던 에이바가 사랑에 몸져누워 제 몸에 솔직해지듯 말이다. 그렇게 밤을 거쳐 제 마음에 솔직하다보면 각자의 숏은 분절된다. 숏을 나를 위해서 가진다. 하지만 서로의 진실을 긍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알리와 에이바는 교차편집으로 이어진다. 하늘과 같은 풍경에서 춤추는 알리,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에이바, 서로는 연결된다. 이윽고 편집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어지던 서로는 비로소 하나의 숏에 놓인다. 다시 재회하여 서로가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바라보는 눈길을 포착한 직후 영화는 끝난다. 더 이상 바나드는 두 연인을 쏘아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서두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그렇고, 본 작품에서도 세간의 인식, 제도, 타인이 바라는 객체로서의 나를 위해, 제 자유는 좌절됐기 때문이다. 바라보면 구속하고 제한한다. 그렇기에 시선을 거둬야만 한다. 우리가 보지 않을 때 알리와 에이바는 진정 자유로우리, 그들은 진정 진실하리. 이렇게 바나드는 이민자와의 사랑 이야기의 계보를, 특히 인종을 뛰어넘은 순수한 사랑으로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2021년에 이어낸다. 서두에서 언급한 작품들과 더불어 연상되는 작품은 2020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된 벤 샤록의 <림보>, 감독의 탐미주의에 이민자들의 삶을 끼워 맞춘 듯한 <림보>에 비해, 그들의 생생함을 있는 그대로 가시화한 바나드의 <알리 앤드 에이바>가 더 진실한 삶에 근접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여자로서, 무슬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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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08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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