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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11. 2022

안드레아 아놀드, <카우>

젖소 엘레지

안드레아 아놀드(Andrea Arnold), <카우>(Cow) - 젖소 엘레지    

“너무 친숙한 것은 더 이상 현실화될 수 없다. 그러한 경험들은 거기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사멸된다. 긴장 없이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경험들의 끝장을 의미한다.” -테어도어 아도르노-

인간의 곁에는 반려동물과 가축이 공존한다. 반려동물 중 가장 인간에게 충성하는 강아지는 목줄 없이도 인간과 우정으로 묶인다. 설령 목줄이 있더라도 이는 비교적 느슨하다. 늑대는 스스로 인간에게 접근해서 개가 된다. 하지만 가축은 다르다. 말은 묶여있다. 양은 도축된다. 닭은 알을 낳고 또 낳아 최후까지 육계로 소비되고, 소 또한 살아선 우유를 죽어선 고기를 내어준다. 그들은 묶여있고 인간에게 실려 있다. 자연의 동물들만이 인간에게서 자유롭다. 하지만 인간의 눈에 띈 물고기, 붉은 뇌조, 토끼는 사냥감이 되어 잡아먹히고 박제된다. 인간의 시선에 붙잡히지 않아야 자유로운 동물들, 붙잡히면 얼어붙는 동물들, 이는 안드레아 아놀드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의 사례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주로 가축이었고, 이는 선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유를 억압받는 인간 주인공들을 상징했다. 1961년 다트퍼드 출생의 안드레아 아놀드는 영국의 시네아스트다. 2006년 장편 데뷔한 늦깎이 감독인 그녀에겐, 먼저 데뷔한 무거운 선배의 이름이 항시 뒤따른다. 바로 켄 로치다. 그 이유는 아놀드가 영국 하층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리얼리즘 영화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레드 로드>의 경우 도그마 95를 따른 작품으로, 영화에서 등장하는 CCTV처럼 현실에 객관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이후 <피쉬 탱크>나 <아메리칸 허니: 방황하는 별의 노래>와 같은 작품에선 도그마 95와는 결별했지만, 여전히 핸드헬드와 롱테이크가 결합된 리얼리즘은 이어간다. 심지어 소설 원전이 있고 과거로 향한 <폭풍의 언덕>에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아놀드의 연출은 다르덴 형제와도 닮아있다. 하지만 마냥 리얼리틱하지도 않은데, 때때로 그녀는 담아내는 대상이나 상황에 적합한 매체를 선별한다. <피쉬 탱크>부터 <폭풍의 언덕>, <아메리칸 허니> 모두가 좁다란 화면비로 인물을 갑갑하게 담아낸다.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된 너절한 구조를 매체로 보여준다.  


다시 켄 로치로 돌아가서, 영국 하류층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로치와 유사하나, 로치의 영화가 당파적이고 사회적인 함의가 짙은 반면, 아놀드는 개인과 젠더에 주목한다. 또 아놀드가 인터뷰에서 밝히듯, 그녀는 단지 켄 로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유사한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영화를 만들 뿐이다. 그녀의 젠더적 관점, 일단 남성은 권력에서 우위에 선다. <레드 로드>에서 남성은 먼저 볼 수 있었다. 재키의 남편과 딸을 앗아간 남성은 약에 취한 채로 그들을 보았고, 그를 보지 못한 남편과 유약한 딸은 가만히 당했다. 남성은 여성을 폭행하는 가해자로 그려지고, 정력적인 남성에게 여성은 그들의 욕구를 해소할 노리개로 전락한다. 그렇게 남성이 가해하면, 여성들은 피해사실이 잊힌다. <피쉬 탱크>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너는 미아 엄마의 연인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들의 집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그는 그녀들을 볼 수 있지만, 그녀들은 그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볼 수 없다. 그의 집에 접근할 수 없다. 서구권에서 남근, 욕망을 상징하는 물고기를 잡고 이를 잡아먹듯, 코너의 거짓말에 그녀들은 사로잡히고 농락당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백인 남성은 가장, 지배자다. 흑인을 종으로 부리고 그들의 구원자임을 강제한다. 종교를 규정하고 옷을 입히며 특정한 공간에 가둔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그들을 꾸미거나 배치한다. <아메리칸 허니>에서는 젠더와 경제를 뒤섞는다. 지금까지 남성과 권위는 가부장제 내에서 동의어였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여성을 소유하고 착취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성 또한 경제활동에 뛰어드는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이념에 의해 남성과 권위는 동의어가 아니다. 자본과 권위가 동의어다. 이에 여성이 돈으로써 권위를 챙긴다면 충분히 우위에 선다. 그래서 가난한 소녀 스타, 마찬가지로 궁핍한 남성 제이크, 그리고 부유한 여사장 크리스탈의 관계는 젠더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제이크와 크리스탈의 관계는 돈에 의해 가부장제의 남과 여의 관계가 뒤집힌다. 남성은 이러한 변화의 갈림길에서 현실을 부정한다. 제이크는 스타를 소유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성으로서 여전히 우위라고 생각한다. 제이크에게 수단인 여성, 이러한 수단이 제멋대로 행동하자 분개한다.      


이러한 남성들로부터 아놀드는 여성의 권리를 복권한다. <레드 로드>는 도그마 95처럼 현실을 '보는' 것을 영화에서도 주요한 소재로 삼는다. CCTV 감시반인 그녀는 일방적으로 사람을 내려다본다. 지금까지 남성에 의해 선택되고 바라봐지던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을 내려다보며 그들을 규정한다. 재키는 알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사람들과 '그'는 그녀를 모른 채, 일방적으로 형성된 관계를 통보받고, 그녀의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바라봄은 그를 속수무책으로 범죄자로 만든다. 그녀의 바라봄은 또한 욕망을 선택한다. <피쉬 탱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아는 코너를 은밀하게 바라본다. 그녀가 잠든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에도, 미아는 코너를 바라본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코너를 바라보며 자신을 선택하게끔 유도한다. 코너를 바라보며 자신의 욕망에 걸려들게 만든다. 그리고 그간의 여성들이 볼 수 없었던 코너의 가정까지 엿본다. 또 코너의 눈이나, 미아와 불화가 있는 또래 소녀들 및 가족의 시선으로 자신을 가늠하지 않고, 카메라로 자신을 직접 촬영하여 능동적으로 나를 확인한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춤추는, 즉 자유롭게 표현하는 몸이다. 아놀드는 여성의 자유로운 바라봄, 몸을 강조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해방의 대상은 여성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고운 옷이 입혀지지만 자유를 억압받는 흑인 히스클리프도 마찬가지로 해방의 대상이다. 아놀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을 자유로 본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이를 가능케 하는 공간에 집중하여, 백인의 공간과 그들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초원을 대비한다. 그곳에서 강제혼 대신 자유롭게 사랑을 나눈다. 한편 시대는 이를 좌절케 하여, 도그마 95의 영향으로 전진하는 현재만을 포착하던 아놀드는 자유롭던 과거를 오직 회고밖에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시대를 플래시백으로 강조한다. 반면 <폭풍의 언덕>과 달리 갑갑한 공간에서 떠나가는 <피쉬 탱크>에서 미아는 붙잡히지 않은 채 자유로운 현재로 나아간다, 오늘날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미국으로 향한 <아메리칸 허니>도 그렇다. 주인공 스타의 곁에 더 어린아이들이 있다. <피쉬 탱크>에서도 미아의 동생이 있던 것처럼 바글거리며 딸린 식솔이 강조된다. 아놀드는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은 삶과 태어남, 그 이후의 방치를 포착하지만 스타가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아도 빛나야 함을 역설한다. 가축화된 늑대가 아니라, 자연에서 스스로 우직하게 서있는 곰과의 유대를 통해 자유를 유비한다. 그리고 그간의 자신을 씻어내고 다시 솟아오르는 주체적인 태어남을 긍정하고, 로드무비라는 장르를 통해 초원과 광야를 비추며 이곳저곳을 떠도는 자유, 실존을 가시화한다. 또 그녀의 영화에선 남성의 특권적인 바라봄을 여성이 되찾아오고 그녀들은 복수를 시도하나, 아놀드는 복수는 긍정하지 않는다. 복수 시도는 언제나 좌절된다. <레드 로드>도 그렇고, <피쉬 탱크>에서도 코너의 딸에게 복수하려던 계획도 철회한다. 용서하진 않더라도, 일방적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양자 모두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놀드의 바람이랴. 이렇게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작품 세계를 줄곧 선보인 아놀드, 그녀가 이젠 진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그녀의 작품에 줄곧 등장하는 동물 중 '소'를 향해 카메라를 돌린다. 과연 그녀의 리얼리틱한 연출은 다큐멘터리에서 어떻게 발휘될까. 본 작품에서는 아놀드가 그간의 작품에서 사용하던 연출이 총망라되지만 <카우>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픽션에서 사용된 연출과는 일련 맥락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놀드는 본 작품이 픽션이 될 수 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한다. 그 이유는 촬영본 그 자체를 어떠한 왜곡 없이 펼쳐놓는 것이 아니라, 편집을 가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만하고 복잡한 현실에 비해서, 본 작품은 가축으로서 소의 탄생과 죽음을 개연적인 서사로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그래서 편집에 의해 서사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픽션이 될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촬영 자체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로서 아놀드의 연출은 꾸며지지 않은 대상에서 발원한 진실한 형식이 특징이다. 아놀드는 본 작품에서 cctv처럼 소에게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클로즈업으로 그들에게 밀착한다.      


그렇게 가까이서 포착하는 것은 그간 우리가 접하지 못한 적나라한 소의 출산 장면, 불결하게 느껴지는 축사의 바닥이다. 산업 동물로서 인간에게 보기 좋게끔 미화되는 소, 그러나 이러한 미화를 모두 걷어내고 불결한 환경에서 시작되어 참혹하게 끝나는 소의 노골적인 진실을 감상자에게 전달한다. 이를 포착하는 영화의 연출은 핸드헬드다. 그간 아놀드의 작품에서 핸드헬드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다큐멘터리 및 현실의 불완전성을 빌려온 것이다. 핸드헬드로 포착된 배역들도 현실 속 불안정한 소시민들을 모방한 것이지, 진짜 현실의 소시민은 아니었다. 아놀드는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하기도 했지만, 영화 속에서 허위임이 명확한 전문 배우들 또한 기용했고, 그들의 실제 삶은 아놀드가 다루는 빈곤하고 너절한 지위, 경제력에서 유리되어 있다. 그래서 소시민들에게서 근원하는 핸드헬드라 하더라도 픽션에서 기성 배우는 '그럴듯한 것을 그럴듯하게 모방'하는 것뿐이다. 즉 픽션의 핸드헬드는 현실에 밀착하고자 하는 시도이지, 온당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카우>에서 아놀드의 핸드헬드는 현실 그 자체를 반영한다. 그 이유는 본 작품의 피사체인 소는 배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평론가들이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속 당나귀의 표현이 세상에서 가장 꾸밈없는 순일한 연기라 칭한 것처럼, <카우> 속 소도 꾸밈이 없다. 물론 영화에서 소는 카메라를 의식한다. 인간에 의해 송아지를 낳자마자 착유하러 가는 루마가 카메라와 촬영 감독에게 뭐라고 말을 건넨다. 반사적으로 사람의 습관을 투영하여 카메라가 있음에 특정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새끼에게 향하고 싶은 호소, 고통스러운 착유의 절규이지, 카메라에 어떻게 담기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루마는 카메라 앞에서 잘 보이려고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제 호소를 들어줄 것이라 판단한 대상 앞에서 솔직하게 울부짖는 것뿐이다. 이렇게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소로부터 형식은 발원하며, 이를 위해 본 작품의 촬영 감독인 막달레나 코발치크는 촬영하며 자신을 포기한다. 영화 속 핸드헬드는 코발치크의 뛰어다니는 발이나, 카메라를 들고 있는 불안한 팔과 손에서 1차적으로 비롯하지 않는다. 코발치크의 흔들리는 카메라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소들을 뒤따라감에, 즉 소의 운동에 의해 발생된다.      


예로 영화의 도입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암소 루마가 진통을 겪고 있다. 진통 및 사육사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루마를 담아내는 카메라는 거칠게 회전한다. 루마의 거친 몸동작에 맞춰서 말이다. 이후 루마에게 새끼가 탄생하고, 송아지의 태반을 핥는 루마 혀의 방향이나 새끼의 호흡을 따라가며 핸드헬드의 움직임이 동요한다. 이후 인식표를 달기 싫은 소의 발버둥, 낯선 공간으로 향하게 된 송아지들의 펄떡거림, 방목이 허용되자 경쾌하게 질주하는 소떼 등 카메라는 소의 움직임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소들이 움직일 수 없을 때, 카메라 또한 멈춘다. 루마는 새끼와 분리된 이후 식음을 전폐하며 잘 움직이지 않는데, 그런 루마를 두고 카메라는 굳이 기교를 부리며 운동하지 않는다. 또 기계에 붙잡혀 발버둥이 소용없어지는 소를 포착할 때, 부푼 젖에 의해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워진 루마를 포착할 때, 늙어서 축사에서 더는 유용하게 소모되지 못하는 루마를 바라볼 때 카메라는 마찬가지로 얼어붙거나 느려진다. 이는 촬영감독 본인을 포기하여 숭고한 순간에 감회 및 동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후에도 비틀거리며 걷는 새끼나 늙은 루마를 포착할 때, 새끼와 분리되어 날카롭게 행동하는 루마를 담아낼 때, 인간에 의해 삶의 최후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시를 무시하고 잠시 흙내음을 맡는 루마를 포착할 때 등 핸드헬드는 솔직하고도 순수하게 대상의 심리 및 행동을 반영하며 흔들린다. 이렇게 클로즈업으로 가까이서 꾸밈없는 소의 순수한 얼굴을 비추고, 핸드헬드로 그들의 움직임까지 형식으로 반영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촬영된 바에 있어선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하게 소의 실재를 보여준다. 소의 실재를 보여주는 본 작품은 초반에 포커싱이 매우 흐리다. 인간에 의해 어미 소와 송아지를 강제로 분리하자,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루마의 몸부림을 포착하는 카메라는 포커싱을 맞출 여력이 없다. 그것 또한 진실이다. 루마와 송아지, 서로에게서 멀어져가 흐릿해져가는 진실, 이를 두고 안정적이고도 명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촬영 현장을 반영한다.      


영화를 기대하는 감상자는 무언가를 '보고 싶은' 욕망이 차오르지만, 본 작품은 이러한 욕망에 온당 부합하지 않는다. 영화의 포커싱은 감상자를 위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소를 향하고 있기 때문에, 소가 흐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굳이 감상자를 위해서 이를 선명하게 조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숭고하다. 그간 상품으로서 소는 소비자에게 간택될 수 있도록 보기 좋은 이미지로 제시되었다. 초원에서의 목가적인 이미지, 모질이 깔끔하게 반들거리는 이미지, 어미 소가 송아지에게 유대감을 보여주는 이미지 등 인간의 기대에 부응하는 이미지, 자본주의의 포르노로 전달되었다. 하지만 본 작품은 그렇게 정돈되기 이전, 아름다워지기 위해 잘려나간 것들을 폭로한다. 본 작품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진정 소를 위한 아름다움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에게 'good girl', '거의 다 왔어', '자궁이 잘 닫혀가네' 등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 또 인간에게 듣기 좋은 노래가 소들의 분리, 교미, 크리스마스에 배경음악으로 활용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심미적인 것들은 정작 소들에게 불쾌한, 심지어 절망적인 상황과 연결된다. 인간중심적 아름다움은 오직 인간을 위한 것, 이에 반해 아놀드는 적나라한 태반과 양수, 그리고 핏덩이들, 비 오는 날 축사에 널브러져 있는 소와 영화 결말 루마의 최후 등, 보기 좋거나 먹기에 좋아 보이는 이미지 너머의 진실을 비춘다. 그렇게 아놀드의 형식은 소에게 속한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사회적으로 결정적인 것이 내용을 빌어 형식구조로 말해진다”, 즉 형식에 사회적 내용이 들어선다고 말한다. 형식이나 언어적 총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속박의 매개체다. 예술적 주체는 마냥 사적일 수 없는 사회적인 구성원이다. 본 작품의 형식도 사회를 반영한다. 그러나 아놀드는 기존 자본주의, 언어를 사용하는 문명에만 속하지 않는다. 축산산업이 은닉하는 것들, 우리의 언어로 해석할 수 없는 소의 언어에도 참여하여 그것을 형식화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불쾌감, 기존 인식 저 너머의 경험을 제공하기에 본 작품은 숭고하다. 숭고는 이후 상세히 후술할 것이다.      


그리고 본 작품에서는 '사람의 얼굴'에도 주목해야 한다. 본 작품에서 소를 사육하고 통제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은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롱숏에서 포착되거나 그마저도 짧게 드러나며, 프레임 바깥으로 잘려나가기 일쑤다. 하지만 모자이크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며, 목소리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그들의 얼굴은 드러나고 노출됨과 동시에 은닉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익명적 상태다. 영화에서 나타나는 소의 착취는 가히 야만적이라 할법하다. 하지만 신분이 적시되지 않은, 익명적 얼굴 중 어느 하나 이 야만을 책임지고 있는가. 축사에 어렴풋이 존재하는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이러한 구조를 이루는 권력자들과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 모두가 얼굴을 감춘 채, 본 야만에 눈을 감는다. 명확하지 않고 희미하여 누구로든 대체 가능한 얼굴이 모두가 야만적일 수 있음, 이에 책임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 영화 속 루마를 제외한 소들은 이름도 없고 형체도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루마의 새끼마저도 어느 순간 카메라에서 포착되지 않는 것처럼, 거대 산업의 일부로 녹아들어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서 기능한다. 어쩌면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다. 소가 태어나자마자 착취되고 살해되는 여정에 몸을 실어야하는 것처럼, 축사로 이끌려가서 그들을 관리하는 노동 또한 맹목적으로 재생산되었을 뿐, 주체적인 인격이 지시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거대산업의 일부가 된 익명적 소들과 익명적 사람은 과연 얼마나 다를까. 이제 가축으로서 소의 생태를 살펴보자. 우리가 자유를 누릴 때는 자유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유가 희소하거나 불가능할 때는, 자유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빛나는 법이다. 본 작품도 그렇다. 자유로운 순간은 일순간이요, 착취·굴레·속박의 시간이 다수이니만큼, 자유는 영화에서 유달리 빛이 난다. 소를 통해서 바라보는 자유, 그것은 ‘나의 이목구비가 획일화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 속 소들의 자유로운 순간은 태어난 직후와 며칠간 초원에 머무는 순간뿐이다. 그 순간에 아기 소는 능동적으로 입과 코를 활용해 어미의 젖을 찾고, 어미의 입은 송아지의 태반을 핥아준다.      


초원으로 향한 소들은 오만 것을 킁킁거리고, 지평에 널려있는 다양한 풀들 중 자신이 먹을 것을 선택한다. 우리에 마구잡이로 섞여서 부대끼는 사육이 아니라, 진짜 제 친구를 찾는 듯 다른 소들과 얼굴을 부비며 교감한다. 자유로운 순간에 소들은 제 육신이 진정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인간은 소의 행위를 획일화한다. 인간은 소의 입을 오직 그들이 부여한 사료, 건초, 약이 들어간 우유만 마실 수 있게끔 강제한다. 인간은 소를 소유한다. 소를 소유한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고자 소의 몸에 낙인을 새긴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귀에 구멍이 뚫린다. 인식표를 달아야한다. 이후에는 뿔이 더 자라나지 못하게끔 불로 지진다. 혹시라도 서로 얼굴을 들이받으며 다툴 때 ‘상품가치’를 덜 훼손하기 위함이다. 안드레아는 송아지의 뿔이 지져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포착한다. 텍스트로 읽을 시, 충격을 경감하여 수용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축약·상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 듯, 인간의 야만적인 지배를 고스란히 폭로하기 위함인 듯 말이다. 그렇게 소를 착취하며 인간의 배를 불리고, 그들을 소유함으로써 인간의 힘을 과시한다. 소는 인간의 부르주아적 위신을 드높이기 위한 수단이 된다. 부르주아가 자신의 탄생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들을 소유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듯, 인간에게 소는 말끔한 상태로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어야 하는, 그럼으로써 인간의 편의와 쾌락을 위해서만 기능해야 한다. 소는 인간이 ‘잘한다’라는 말에 맞춰서 다리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소의 거친 움직임은 인간의 눈에서 '춤을 춘다'라고 읽혀지며, 인간의 자의적인 욕망이 투영된다. 소의 탄생은 있는 그대로 축복할만한 것이 아니라 상품가치가 있을 때, 인간이 소유하지 않은 털 색깔이나 무늬일 때 찬미된다. 그렇게 인간에게 기쁘고자 젖소를 개량한다. 죽기 직전의 늙은 루마는 지나치게 유방이 부풀어 땅에 질질 끌리고 쓸릴 정도다. 무거운 젖과 깎여나간 굽에 의해 걸음걸이도 불편하다. 소의 삶에 인간의 소유와 개량은 적합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소의 기준에서 판단하지 않고 자신의 눈높이에서 소를 내려다본다. 루마는 우울증을 앓는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지만 6회의 출산 내내 낳자마자 곧바로 송아지와 결별한 악몽이 있는 루마는 분리불안을 겪는다. 이윽고 수의사가 루마를 검진하러 오지만, 식음을 전폐하는 루마의 심리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의 관심은 소의 자궁, 즉 생산성과 경제력이다. 인간은 오직 루마의 자궁 상태에만 관심을 갖고, 이 또한 소의 질에 인간의 손을 강제로 삽입하는 소에게 불쾌한 경험이다. 인간에게 루마는 문제가 없다고 진단되는데, 인간에게 소의 문제란 상품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윤에 좋은 것은 소의 삶에는 좋지 않다. 사회화가 덜 이뤄진 송아지들도 마찬가지다. 어미와 너무 빨리 이별한 송아지들은 자기들끼리 격리된 사육장에서, 서로의 배에 얼굴을 들이민다. 이는 친밀함의 표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소의 다리 사이, 배 부근으로 파고드는 것이 습관으로 각인된 송아지들이 어미를 그리워하는 행동이랴. 하지만 송아지들도 인간의 눈에선 문제없다. 뿔을 부드럽게 마모해뒀기에 얼마든지 배 사이로 파고들어도 상품성에는 역시나 지장 없다. 소의 물질만이 인간에게의 가치를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공간을 통제한다. 널따란 공간에서 소는 여러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대지의 냄새를 킁킁 맡을지, 목초를 즐길지, 다른 소들과 소통할지를 말이다. 하지만 좁게 구획된 공간, 서로를 가로막고 행동을 차단하며 제한하는 딱딱한 철제는 소들의 행동을 강제한다. 소는 인간에 의해 착유, 교미, 취식만 가능하다. 이에 영화의 편집도 차이가 있다. 축사 내에서의 편집은 매우 재빠르다. 루마가 탯줄과 태반이 주렁주렁 달린 채로 젖을 짜러가는 숏에서 여지란 없다. 비윤리적이나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효율적인 본 장면의 편집은 재빠르고 탄력적이다. 시간은 무의미하게 지체되지 않고, 빠르게 제 할 일만 강제한다. 이와 달리 소들이 초원으로 향했을 때, 편집은 매우 유유자적하다. 소를 닦달하지 않는 초원은 여유로운 시간이 허용함에, 편집은 느려지고 유유자적해진다. 루마가 더 이상 축사에서 효율적일 수 없을 때도 영화는 느려지고, 자본주의에 의한 내용은 비어만 간다.      


이러한 편집은 앞서 언급한 핸드헬드처럼 대상에 따라 강제된 것이랴. 핸드헬드가 소를 반영한다면, 편집은 이러한 소를 담아내는 축사에 상응할까. 아놀드는 축사에서의 획일화되고 규격화된 행위 외에 더 포착하고 넣을 것이 없었던 것이랴. 어떠한 우연도, 여지도 없이 탄생하고 공간으로 인도되어 거기서 또 낳고 죽고, 이에 공간은 획일화된 존재들을 재생산한다. 영화 결말 루마의 죽음, 하지만 그 자리는 다른 이름 없는 소와 그녀의 자손들이 대체할 것이며, 영화 속 익명적인 사람들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으랴. 존재 그 자체로 필요하지 않다. 공간의 목적에 따른, 쉽게 대체될 수 있는 존재들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강제한 공간에서 원치 않은 상대와 교미하는 두 소가 포착된 이후, 아놀드는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숏을 이어낸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정사를 하고 폭죽이 터진다면, 이는 뜨거운 열정이 폭발하고 해소되는 사랑의 찬란한 결실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으랴. 하지만 인간에 의한 강제 교미 이후 인간이 발사한 폭죽의 아름다움이 포착되니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하다. 인위적인 폭죽처럼 작위적으로 강제된 교미를 아름답게 포장하겠다는 듯 느껴진다. 아놀드가 포착한 폭죽은 소들의 사랑을 심미적으로 승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이 아름답게 오독하는 심리를 폭로하는 장치다. 진정 아름다운 것은 초원에서 소들이 하룻밤을 보낼 때, 인간의 통제 바깥에 놓여있는 저 하늘의 별들을 감상하는 숏이다. 진정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누군가가 강제한 질서에서 벗어나 진정 제 자신이 질서를 수립하며 자유로울 때, 통제에서 벗어나 스스로 찬란하게 빛날 때다. 밤의 초원에서 소들이 자유롭게 풀을 씹을 때, 그들 얼굴 뒤편으로는 우아한 달빛이 후광처럼 비춰진다. 소는 신성하고 경건하게 보인다. 아놀드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추를 왜곡하는 인간중심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정 자유로울 때의 아름다움이다. 전자의 경우 아름다운 형식이 가리키는 추한 대상과의 간극에 역겨움이 들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철조망 바깥으로 고개를 빼 우정을 나누는 소를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러운 질서를 되찾은 듯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본래의 아름다움을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왜곡하고 선전하는 세계, 이에 아름다운 자유를 되찾기 위한 소들은 저항한다. 영화는 이러한 저항을 숭고하게도 그린다. 숭고는 아름다움과 다르다. 아름다움이 현실의 추한 무질서, 혼란함을 질서와 완전함으로 뒤바꾸어 우리에게 만족감과 안정감을 준다면, 숭고는 우리의 심리를 공포스럽게 뒤흔들어놓고 인간 존재를 하찮고 보잘 것 없게 만든다. 거대하고 위험천만한 대자연, 재해, 우주, 인간 존재를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 생명체를 마주했을 때 드는 감정이 바로 숭고다. 숭고는 대상을 마주하는 자신에 비견하여 너무나도 거대한 '에너지'를 마주할 때 생겨나는 미적 속성이다. 그런 점에서 일단 숭고한 것은 소와 익명적 사람들을 지배하는 축사다. 인간조차 행동이 강제되는 공간, 거대하고 무거운 소의 육체를 힘들이지 않고 들어 올리는 기계, 심지어 그 거대한 동물의 죽음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결정하는 '구조'의 힘이 숭고해 보인다. 소나 우리가 위해한 공간의 힘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기에 더더욱 그 힘은 거대해 보인다. 자본주의가 만든 구조는 송아지를 다급하게 옮겨가고, 출산한지 얼마 안 되어 태반과 탯줄을 미처 다 정리 못한 어미 소까지 착유하러 데려간다. 기계에 반복되고 강제되는 행동에 의해 루마는 어느 순간 인간에게 저항하던 울부짖음을 잊게 된다. 루마의 삶이 삭막하게 끝난 이후에도, 루마의 자손은 인간의 음악이 인도하는, 인간에게만 좋은 삶을 향해 달려간다. 인간과 기계의 힘은 비자유를 강제한다. 그러나 좁다란 공간의 강제성을 거스를 수 없고, 구조 내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도, 우리는 자유롭고자 나를 거대하게 드높여야만 한다. 영화의 두 번째 숭고, 우리는 소에게서 자유의 숭고를 본다. 시스템이 루마의 곁에서 송아지를 앗아간다. 그러나 루마는 사료를 거부하고 울부짖으며 사육사에게 고함을 치는 등 생이별에 저항한다. 우리는 루마에게서 존재를 구속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에 대항하여 자신의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거대한 의지를 목도한다. 그리고 이를 포착하는 영화가 숭고하다. 우리에게 너무나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인간과 의식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아름다울지 모른다. 언뜻 보기에는 완전하고 정교하게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에 안주하지 않는다. 인간과 자본주의를 넘어선, 반자본주의와 소에게로 향하며 기존 인간의 앎이 유한하다는 것을 까발리는, 인간 너머의 숭고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본 작품의 아름다움은 처음에 불가해하게 보였던 소를 이해하게끔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았다. 소들의 행동과 심리의 당위성을 편집으로 이어냄에, 그렇게 모호하고 이해 불가능한 소들이 우리에게 밝혀지고 감상자와 소통함에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게 숭고와 아름다움의 여정에 동참하는 우리는 인간 너머의 존재로 향해 눈물을 흘리고 씁쓸함을 느낀다. 즉 안드레아 아놀드는 우리에게 탈인간적, 탈자본주의적인 숭고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간의 작품에서도 인간에 의한 자연물과 가축의 비애에 주목하던 아놀드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과 인간의 손아귀에 포섭되어버린 소의 삶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작지만 거대한 자유의 숭고를 포착한다. 그간 바라볼 수 있는 권력을 강조하던 아놀드는 자본주의가 은폐하던 불편한 진실을 과감하게 응시하며, 진실하고 동등한 시선으로 나아가는 자신의 영화 동향도 이어간다. 그 동등함이란 인간의 시선에 의해 왜곡되는 소의 이미지가 아니라, 소에 의해 발원되는 시선이다. 다만 암담한 것은 아놀드의 픽션에서 인간의 숭고는 불가항력적인 탄생을 극복하는 미래까지 연결되었다. 아놀드의 영화 속 아이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된 태어남과 삶을 자신의 것으로 거머쥔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태어나는 <카우> 속 소들의 저항은 비가축화까지 미치지 못하고 망각되고 체념하며 좌절한다. 결국 변화는 현실에서 일어나야 한다. 엄연히 삶의 영역에서 발생한 착취와 죽음이니, 축사 속 인간의 얼굴은 언제나 감상자의 얼굴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흐릿하니 말이다. 흡사 작년 개봉한 <아이카>의 적나라함을 축사로, 암소로 옮겨온 듯한 작품, 심미성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채 <옥자>보다도 더욱 강렬한 불쾌감과 경각심을 제공하는 작품, 맹목적인 육식 쾌락의 시대에서 돌이켜 봐야할 소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을 상기시켜주는 작품으로 <카우>를 정리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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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1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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