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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19. 2022

에리크 그라벨, <풀타임>

노동의 이유

에리크 그라벨(Eric Gravel), <풀타임>(À plein temps) - 노동의 이유

“만약 최소한 가장 오래된 대부분 민족들의 범례를 북쪽 지역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인간은 곤궁함 때문에 짐을 끄는 가축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며, 자연이 제공하는 작은 것에 만족하며 돌아다닐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만약 아침 종소리가 울릴 때부터 취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힘겹게 일만 하는 게 삶의 전제 조건이라면, 온통 하자로 가득한 헌법과 국가 행정은 이에 대해 잘못이 있다.” -요한 페테르 헤벨-

노동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일단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 아렌트는 활동적 삶이라는 용어로 인간의 근본 활동을 주장한다. 인간의 근본은 총 세 가지 활동이 구성한다. 각각 노동, 작업, 행위다. 작업은 우리가 무언가를 만드는 것, 특히 만드는 것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 이에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을 극복하는 일이 작업이다. 그리고 행위는 언어와 깊이 관련한,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활동, 또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할 능력이다. 마지막으로 노동, 그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과정, 개인적 생존과 종의 삶을 보장하는 활동, 유한한 인간의 삶을 버티고 연장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적 삶은 고루 얽혀 있다. 노동을 함으로써 작업도 하고 행위도 한다. 사적인 행위를 보장받기 위해 노동을 한다. 하지만 사적인 것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공적영역에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비슷하게 행동하고 다른 행동을 관용하지 않는 ‘행동주의’에 빠진다. 공적인 노동만을 관용하는 사회에서 사적인 작업과 행위를 무시하고 억압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노동을 하는가, 자유, 사적인 삶은 어디로 갔는가? 또 다른 단상, 마르크스와 엥글스, 그들은 인간다운 생산이란 자연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진정한 생산이란 고유한 인간적 힘의 표현, 자기 바깥의 세계를 포착하는 것, 이를 통해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에게 생산과 노동은 개인이 세계에서 능동적 주체로 올라서는 수단이다. 하지만 나의 생산이 아니라, 보편적인 외부 생산 방식에 귀속된다면, 그때 인간은 소외된다. 인간의 자리는 없고 화폐가, 자본주의라는 이념이, 인간 없는 사회만 남는다. 그래서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한 노동을 할 때는 노동의 시간에 자긍심을 느낀다. 하지만 원치 않는 노동을 하는 인류에게 가장 적합한 시간은 오직 휴식 시간이다. 이에 우리는 주체적이기 위해서 노동을 그저 수단으로 삼아야 하고, 노동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노동으로 나를 표현하든, 노동 이후 작업과 행위를 추구하든, 노동의 이유를, 나의 자유를 깨우쳐야 한다. 하지만 풀타임 근무, 나의 사적 시간이 박탈된 인간 소외, 과연 노동자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에리크 그라벨은 <풀타임>에서 인간이 노동을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닌, 노동에 붙잡힌 인간의 비극을 첨예하게 포착한다.      

이를 연출하는 에리크 그라벨은 몬트리올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하는 불어권 시네아스트다. 불어권 감독이긴 하지만, 여러 도시, 국가를 유랑한 ‘여행자’로서 그의 경험은 '세계화'라는 방식으로 작품에 투영한다. 또 그는 데뷔작 <크러쉬 테스트 아글라에아>부터 노동에 관해 탐구했다. 그의 데뷔작은 감독의 빼어난 탐미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인물들의 얼굴이나 행동이 중앙에 배치되고, 또 각 숏의 안배가 천편일률적으로 질서정연한 편집이 인상적이다. 본 걸출한 연출은 단순히 ‘형식을 위한 형식’에 그치지 않는데, 그라벨이 탐구하는 노동의 속성에 상응한다. 주인공 아글라에아는 몸담은 회사에서 전근을 가장한 해고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일을 지속하고 싶다. 그녀는 어렸을 적 방탕하고도 무질서한 어머니 때문에, 자신이 추구하는 삶과 과거에 정립해놓은 질서를 연속하고 반복하려는 강박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플래시 포워드와 플래시백으로 강박의 근원을 비춘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인간은 공장의 기계와도 같은, 어떠한 오차도 없이 정밀하게 반복되는 인간이나 노동자가 아니다. 그래서 해고를 가장한 인도 전근은 노동을 이어가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경제력에 따르기도 하지만, 기업이 원하는 데로 순순히 해고당하지 않겠다는, 반복되는 지시와 착취에서 벗어나는 저항의 수단이기도 하다. 즉 그라벨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저항, 이탈이다. 영화 속 아글라에아와 동행하는 다른 동료들은 서로의 행복, 자녀계획을 위해 인도 전근 중 이탈한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 노동하고, 또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한다. 그래서 기업을 위해 자동차 안전 운전에서 파괴되어야 하는 마네킹의 위치에서 이탈하여 살아있는 인간이 된다. 아글라에아 또한 마찬가지다. 어떻게든 인도로 향하는 여정, 하지만 그 여정은 서서히 느슨해지고, 또 자신의 계획에 타인이 뒤섞인다. 러시아 유랑단과 동행하거나, 카자흐스탄 군인과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며, 인도에서 새롭게 눈이 맞았다. 아글라에아의 여정은 기업의 횡포를 고발하는 결과를 낳았고 공장이 폐쇄되지 않음에 그녀는 복직이 가능해졌지만, 정작 그녀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과거에 얽매인 자신, 기업이 규정한 노동자라는 즉자로부터 대자가 된다. 


그라벨이 보기에 이러한 실존이 곧 세계화다. 기업의 계산이 정확하게 실현되고 타국을 기업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의 삶과 문화에 내가 뒤섞이며 삶이 더욱 유연해지고 풍요로워지는 실존이 세계화다. 그래서 연출도 변화한다. 천편일률적인, 예측을 벗어나지 않던 공장의 생산 과정과도 같던 숏들은 이내 곧 무엇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자연의 익스트림 롱숏으로 뒤바뀌니. 이러한 그라벨의 노동과 실존에 대한 탐구가 <풀타임>에서 이어진다. 그라벨의 데뷔작은 가상성이 확실하게 명시된 영화였다. 전반적으로 아기자기한 영화의 미장센이나 색감은 현실의 칙칙함, 거칢과 분명 달랐고, 주역인 인디아 헤어, 욜랜드 모로에게 주문한 디렉팅도 꽤 과장된 편이었다. 전작의 연출은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저항하고 이탈하여 나아가야 할 어떤 이상향, 현실에 도래해야 할 가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 <풀타임>에서 저항과 이탈은 드물고, 핸드헬드나 디렉팅은 전작과 달리 현실과 흡사하다.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전작의 저항할 수 있는 자유로운 독신, 이에 반해 본 작의 식솔이 딸린 어머니라는 위치는 저항의 가능/불가능을 결정한다. 어머니는 저항과 이탈을 조금도 꿈꿀 수 없이, 그저 현실을 충실하게 책임지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한 어머니가 참여하는 끝없이 운행되는 거대한 기계장치 내지는 공장과도 같은 파리의 급박한 운동성을 그라벨은 연출로 가시화한다. 파리의 빠른 운행에 참여하며 노동자는 인간이길 포기하고, 자신을 기계와 같은 사물로 전락시킨다. 영화의 시작, 어둠 속에서 곤히 잠든 쥘리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이후 누워있는 그녀의 살갗이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누워있는 그녀를 카메라는 느리고도 부드럽게 훑는다. 휴식의 시간, 내 몸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는 여유로운 시간, 그 시간에 나는 내게 가까이 있다. 특히나 카메라가 밀착하는 것은 눈꺼풀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눈꺼풀은 제 육신의 요구에 따라 곤히 감겨 있다. 그렇게 잠든 동안 눈꺼풀은 쥘리에게 가까이 있다.      


그러나 이윽고 시끄러운 알람이 울린다. 새벽 4시가량이다. 동이 틀려면 아직 2시간은 더 남았다. 하지만 대중교통 파업 때문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직장에 지각한다. 그래서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일어난다. 우리는 출근하기 전까지는 노동자가 아니다. 집에서는 노동 대신 자유로운 사적인 행위를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시간표에 집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쥘리는 일어나자마자 노동을 시작한다. 그녀의 살갗을 부드럽고도 유유자적 포착하던 카메라는 이윽고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친밀하게 느껴질 정도로 쥘리에게 달라붙어 있던 카메라는 바스트숏, 풀숏 수준으로 멀어진다. 그렇게 멀어지는 것은 눈꺼풀이다. 피곤한 자신은 원치 않을 테지만, 시끄럽게 울리는 외부 알람의 지시에 의해서 눈꺼풀은 열어젖혀진다. 이렇게 눈꺼풀이 열리며 시작되는 노동은 그녀 자신의 육체가 갈망하는 행위가 아니다. 식사를 준비하고 목욕물을 받는 쥘리의 행동은 아이들을 위함, 이후 호텔의 청소는 투숙객과 매니저의 요구에 맞춘 타율적 행위다. 쥘리의 행동은 모두 ‘타인을 위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는 있는 그대로 수용되지 않고, 타인에게 얼마나 효율적인지 경제성이 평가된다. 그래서 쥘리는 짧은 시간 내에 본인이 맡은 일을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끝내야 하고, 근무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여유가 없는 노동자의 시간, 항상 효율적이어야만 하는 노동자의 시간을 그라벨이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쥘리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 뒤를 따라다니는 팔로우 숏은 매우 리얼리틱하다. 흡사 <사울의 아들> 같기도 하고, 본 작품을 배급하는 슈아픽처스에서 올해 초 개봉한 <그 남자는 타이타닉을 보고 싶지 않았다>의 달리 숏도 연상된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던 두 작품의 롱테이크와 달리, 본 작품에서는 쥘리의 뒤를 따라다니더라도 무수한 노동의 핵심만 보여준 이후 숏은 잘려서 다른 노동이 담긴 숏을 이어 붙인다. 더 보여주고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듯 말이다. 영화 또한 단 하나의 행위만 보여주기에는 비효율적이라는 듯이, 90분이 채 안 되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 최대한 많은 것들을 욱여넣어서 ‘효율적’으로 극을 구성한다. 쥘리가 신입 직원이 화병을 떨어트리는 계획 이탈·비효율성을 싫어하는 것처럼, 본 작품도 비효율적인 잠자는 시간은 편집으로 짧게 쳐낸다.     


이렇게 영화는 매우 재빠르고, 9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타임의 밀도는 매우 촘촘하다. 어지간한 120분짜리 영화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있다. 오랜 시간 언어와 작품에 몰입해야지만 대상을 이해할 수 있음을 180분이 넘는 러닝타임의 시간성으로 간접 체험시켜준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본 작품도 러닝타임을 활용하여 후기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효율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러닝타임과 편집, 이는 본 작품이 후기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 참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랴. 철학자 아도르노에게 형식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적 속박에 의해서, 예술적 주체와 작품 모두가 결국에는 사회에 속함에 마냥 사적일 수 없고, 끝끝내 사회적인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라벨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현실 그 자체를 옮겨오고, 영화에서도 쥘리는 고분고분하게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자신을 끼워 맞춤에, 영화는 이러한 현실의 여파를 고스란히 수용하는 것 외의 선택지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매우 급박한 영화,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빠른 카메라 워킹에 의해 쥘리의 행동은 가시화될지 몰라도, 그녀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빠르게 수행되는 노동은 포착돼도, 그것을 실행하는 노동자는 잠시 나타났다가 지나가고 흩날린다. 하지만 항상 급박하지만은 않다. 영화의 컷이 조금씩 느려지는 장면이 있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직장 내 점심시간, 해고당한 이후 밤에 느긋하게 불을 끄고 잘 준비하는 쥘리, 그토록 기다리던 기차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자가용을 타고 놀이동산에 가는 그녀를 포착할 때, 이전에 비한다면 숏의 길이는 길고 잘리는 타이밍은 느린 편이다. 또 쥘리의 얼굴, 육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카메라 워킹에 비해서, 똑바로 그녀의 초상이 담기는 장면이 있다. 바로 시장조사원 최종면접 때다. 그녀는 스스로 원치 않은 상황일 때 흔들린다. 알렉스에게 통화를 시도할 때,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 때문에 호텔을 향해 전력질주 할 때, 그렇게 도착했는데 실직 당했을 때 죌리의 얼굴은 더 불안하게 흔들린다. 원치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 그리고 원치 않는 상황에서 그녀의 삶은 뒤흔들린다.      


그러나 그녀가 주체적으로 갈망하는 시장조사원이 되고자 할 때, 그렇게 제 능력을 마음껏 선보이고자 할 때, 그라벨은 그녀의 얼굴을 적확히 담은 클로즈업으로 리버스 숏을 구성한다. 또 전화가 안 되고 멀리 떨어진 알렉스와 달리, 곁에서 그녀의 삶을 안정적으로 구성해주는 빈센트와 놓일 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급박한 카메라 워킹, 핸드헬드는 자본주의에 의한 인간의 지워짐이라면, 이에 반하는 안정적인 숏은 자유, 주체성 등에 상응한다. 그리고 이전 작품에서는 가상적인 양식에 현실 속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저항과 일탈을 담아냈다면, 본 작품에서 저항과 일탈은 가상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현실에서 추방된다.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나긴 하지만, 쥘리는 이에 관여하거나 참여할 여유가 조금도 없다. 파업으로 노동자들이 제 시각에 출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호텔 측에서는 출근 시간을 늦추거나 근무 시간을 조정하는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조금의 여명도 보이지 않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 기상해야 하는 노동자의 처우는 잔인하지만, 이를 항의할 파업은 쥘리와 분리된 매스컴에 송출되는 병원 파업과도 같은 일이다. 또 제 삶이 너무나 팍팍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근무 시간이나 업무량으로 계속 충돌함에, 기업이나 국가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다. 그들의 시선은 멀리 보지 못한다. 언제나 그들 앞의 미디움 숏으로 국한되고, 파업 장면은 포착되지 않거나 TV 화면에서 아주 조그맣게 포착될 뿐이다. 쥘리는 지긋지긋한 파업이라고 말하며 이를 지지하지 않듯 보이고, 라디오에서는 노동자들끼리 다투는 음성이 송출된다. 파업에 참석하거나 지지하러 나갈 수 있는 것은 은퇴한 빈센트 뿐이다. 그리고 쥘리는 욕조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 해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꿈을 꾼다. 그 아이들은 쥘리의 자식들일까, 아니면 어렸을 적의 자신일까, 이러나저러나 아이들과 순수하게 즐기는 유희, 어린 날에 가능한 우정은 모두 그녀 바깥의 어딘가에서 인서트되고 길어와야만 하는 것이다. 현재 현실에서 쥘리는 자유롭게 물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그녀에게 물은 적정 온도를 확인해야 하는 또 다른 노동이요, 잠시 욕조에서 휴식을 취하더라도 놀란이 그새를 못 참고 다가와 방해한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다. 쥘리가 점심시간까지 짜내서 일하고 조퇴하는 것과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게 간식을 찾는 장면은 대비를 이룬다. 또 아이들은 원하는 옷을 입고자 투정 부릴 수 있지만, 쥘리는 기업이 원하는 이미지를 위해서 정장을 구매하며 비싼 출혈을 감내한다. 놀란은 다치면 울 수 있지만, 쥘리는 눈물을 화장으로 감추며 억지로 웃는다. 왜 쥘리는 자유롭게 먹을 수도 입을 수도 표정 지을 수도 없는 존재인가. 영화 막바지에 그녀는 해고당한다. 시간은 있다. 하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없다. 심지어 그녀는 빌려온 미래에 붙잡힌다. 빚을 진 쥘리의 시간을 규정하는 은행은 그녀가 일해야 함을 강제한다. 그렇게 노동하면 시간이 없다. 노동자에게 시간 활용과 노동에의 참여는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택일해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쥘리는 노동을 선택한다. 시간을 선택한 아이들은 스스로의 지시에 따라서 놀고먹고 잔다. 하지만 노동은 내가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을 지시받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일부 포기한다. 그런데 누구나 다 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나자 노동이 가능한 요건은 더욱 까다로워진다. 더 일찍 일어나서 지각하지 않는 사람, 업무에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만이 남는다. 기업이나 국가는 노동자들과의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미루고 있고, 파업으로 발생한 사회문제에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재택근무는 현장에서 노동하는 쥘리에겐 해당사항이 없고, 대안으로 마련해놓은 대체버스 또한 부족하거나 끝끝내 중단된다. 구조는 이를 통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려는 것이 아닌가. 지각하지 않는 노동자들만 남기기, 또 연차가 쌓인 쥘리 같은 부담스러운 노동자들을 해고하기. 노동자로 남기 위해 자신을 더 많이 포기하는 과정, 파업 협상이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쥘리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수는 점점 더 줄어가서 불안정한 히치하이킹, 기계에 비해 턱없이 느린 다리에 의존한다.      


그렇게 호텔에 도착하니 실비가 쥘리에게 신입 교육을 지시한다. 쥘리는 업무가 과하다며 잠시 불평하지만 이내 곧 따르게 된다. 전남편 알렉스는 아들 놀란의 생일파티에 오지도 않고, 쥘리에게 양육비를 지급하지도 않는다. 혼자 벌어서 두 아이를 양육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나머지 그녀는 빚까지 졌다. 또 함께 아이를 책임져야 할 알렉스는 쥘리가 가진 시간을 빌려가고 갚지 않는 셈이다. 이렇게 빚을 지면 미래는 저당 잡힌다. 돈을 내가 활용하고 싶은 시간에 사용할 수 없고, 지금 여기에서도 내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없다. 빚은 곧 돈을 당겨서 쓴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대출받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시간을 빌린 대가는 타인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이다. 빚에 의해 노동자임을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쥘리에게 직장이나 기업이라는 ‘목적지’는 더더욱 견고해진다. 쥘리가 해야 하는 말과 행위도 마찬가지로 면접관이 듣고 싶은 말, 타인의 눈에 효율적인 행동을 철두철미하게 교정한다. 면접관이 듣고 싶은 말과 쥘리가 전 직장에서 가졌던 커리어는 서로 모순된다. 전자를 위해 후자를 포기한다. 그녀는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잠시 눈을 감을 수 있는 순간은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하는 동안의 찰나다. 눈을 감는다는 것, 그것은 잠시 동안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꿀물 같은 휴식, 또는 목적지 외의 풍경이나 타인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외면, 즉 익히 효율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이러한 효율적인 행위는 인간관계 전반으로 확장된다. 앞서 언급한 아렌트의 근본 활동 중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 복수의 인간이 지구상에 살며 거주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다른 것을 지각하는 활동이다. 하지만 오직 노동만을 강제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이념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다른 상대방, 비효율적인 대화나 행동을 관용할 여유가 과연 존재하는가. 뤼지에가 더는 아이들을 돌봐주기 어렵다는 말을 건넨 직후, 쥘리는 대중교통을 함께 기다리는 한 학부형을 만난다. 그에게 아는 돌보미가 있는지, 또 자신의 아이도 돌봐줄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후 거절 의사가 돌아오자 대화는 끊긴다. 내가 원하는 목적이나 이익 외에 더 할 말이 없다.    

  

이후 쥘리는 호텔에서 편법으로 조퇴하여 면접을 보러 간다. 거기서 면접을 보러 온 경쟁자들은 서로를 껄끄럽게 쳐다보고, 타인의 취업 가능성을 가늠하는 눈초리다. 순수하게 대상을 관용하지 못한다. 철학자 니체는 극단화된 노동이 '정신 결여증'을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오직 양심이 허용하는 것은 오점 없는 노동, 그 외의 명상, 기쁨, 휴식은 모두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분명 노동의 보상이 기쁨이나 즐거움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억제하는, 무엇을 위해 노동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정신 결여증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한 정신 결여가 곧 상대방을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는 태도, 재미와 즐거움으로 대화할 수 없는 관계로 이어진다. 쥘리는 영화 후반부에 실직한다. 그녀의 몸은 휴식을 바랄 것이지만, 정작 그렇게 마음을 놓고 쉴 수가 없다. 아이들은 정원에서 솔직하게 뛰어 놀지만, 그렇게 진실하게 행동할 수 있는 풍경은 쥘리와 분리된 '창문 너머'의 차원이다. 노동자를 인간으로 바라보면 연민이 느껴진다. 그러한 감정도 결여되지 않은 정신의 일부다. 리디아와 쥘리, 둘 다 두 아이들을 혼자 돌보는 여성 노동자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들이 규칙을 조금 위반했다고 해도 한 번쯤은 눈감아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들은 연민을 가질만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한다. 매니저나 기업의 규칙, 목적에 부응해야만 하는 사물로 전락한다. 쥘리의 시선에서 교통파업이 이어져 더더욱 탈 것을 찾기 어려워지자, 도로의 운전자들은 그녀를 위한 ‘운전기사’로 전락한다. 쥘리가 순수하게 서로의 삶을 공유할 수 있었던 은퇴한 빈센트, 그녀는 교통수단을 찾지 못해 자신이 요구받는 사물성에 부합하지 못하자, 빈센트에게 혹시 차를 태워줄 수 있겠냐고 연락한다. 친구는 곧 제 목적에 부합하는 마찬가지의 사물이 된다. 이러한 사물성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들은 쉽게 해고되고, 자본주의에 의한 양심은 노동에 실패한 패배자라고 자신을 문책한다. 쥘리는 해고당했다는 것을 뤼지에나 아이들에게 토로하지 못한다.      


이러한 쥘리의 시야에서 파리가 비친다. 발전소가 내뿜는 연기, 공사 현장의 거대한 기중기가 보인다. 또 무수한 사무실들이 즐비한 빌딩도 포착된다. 그 풍경은 숭고하고 아름답지만, 이러한 미적 속성은 결국 무수한 노동자가 자유와 미적인 삶을 포기한 거룩함이 아니던가. 파리는 여전히 게걸스럽게 발전되어 가는 와중에, 그 옆에서 노동자들은 히치하이킹을 하며 대도시의 발전을 누리지 못한다. 쥘리는 그러한 파리를 장식하는 건물 중 일부를 청소하는 사람, 그러나 그녀 자신은 깨끗한 방에서 채취와 흔적을 지우며 이를 누리지 못한다. 파리를 깨끗하게 만든 대가로 그녀가 돌려받는 건, 하룻밤 파리에서 묵는 동안의 성희롱, 불결하고 누추한 모텔의 방이다. 파리를 화려하고도 거대하게 바꾸는 노동자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추레함이다. 그러한 노동자 중에서도 여성은 더 많은 삶을 포기한다. 영화 속 여성 노동자들은 본인을 위해서 노동하지 않는다. 리디아와 쥘리에게는 딸린 식솔들이 있고, 뤼지에도 돈보다는 쥘리의 처지가 딱해서 아이들을 돌봐준 모양이다. 여성은 어머니라는 희생하고 포용하는 노동자가 강제된다. 리디아에게 남편은 언급되지 않고, 알렉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방종하고 양육비도 미지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들의 삶에 제도는 파업과 마찬가지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게 남편, 아버지들이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여성의 노동 강도, 근무 시간은 늘어간다. 호텔에서 노동이 끝나면 일반적인 다른 노동자들은 퇴근이지만, 쥘리에게는 또 다른 출근이다. 어머니로서의 노동은 잠들기 전까지, 소피의 말처럼 ‘끝이 없다.’ 쥘리의 동료는 주말을 즐길 것이라 말하지만, 어머니 여성은 주말도 없다. 주말의 평온한 침묵은 이내 곧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음으로 뒤바뀌고, 쥘리가 잠시 눈을 돌리면 놀란은 팔을 접질린다. 여성은 남성과 분유해야 하는 책임과 노동을 혼자 독박 쓴 형국이다. 쥘리와 리디아는 뤼지에가 말하는 ‘본인 아이’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지만, 책임을 다하는 남성은 빈센트를 제외하고 포착되지 않는다. 그렇게 책임을 짊어지다 여성은 경력이 단절돼서, 혼자서 아이들을 돌볼만한 양질의 일자리, 또 자신의 능력을 표출할만한 직장을 갖기 어렵다.   


쥘리가 전업 주부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이다. 현재 그녀는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지만, 실제론 경제학 학위가 있는 지식인으로 시장조사원이 되기 위해 면접을 본다. 뤼지에는 집에서 먼 파리로 출퇴근하지 말고, 동네 인근에서 계산원을 하라고 추천하지만 쥘리는 이를 거부한다. 그녀는 노동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학위와 능력을 활용하는 노동을 실현하고자 파리를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라는 자신은 연이어 좌절된다. 보호자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소음을 일으키는 반면, 쥘리가 비명을 지르고 고된 설거지에 참여하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외치고 즐거움을 누린다. 편집으로 이를 교차하여, 노동자 어머니로서 책임을 다하는 여성은 식솔을 위해 자신의 환호를 억누르며 비명을 대신 지름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렌즈플레어로 화사하고도 신묘하게 표현되지만, 이를 위해서 쥘리는 항상 어두침침하게 포착된다. 그런데도 그라벨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연대를 통해서 말이다. 뤼지에가 아이들을 돌봐주지 못하자, 쥘리의 친구 소피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준다. 그리고 그녀에게 술 한 잔을 권유하며 쥘리 자신을 위한 일말의 쾌감을 제공한다. 놀란의 생일파티에서 쥘리는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할 여유가 없다. 트램펄린의 안전장치를 조립하지 못했다. 그러나 빈센트를 위시한 부모들이 이를 도와준다. 부모들이 다 같이 도와준 생일파티에서는 다치는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모두 떠나고 쥘리 혼자 남고 안전장치는 느슨해지자, 놀란은 트램펄린에서 다친다. 마지막으로 빈센트는 그녀 혼자서는 고치기 어려웠던 온수기를 수리해주며 욕조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고, 그녀는 그에게 불현듯 입맞춤한다. 그렇게 우리는 대가 없는 도움, 순수한 대상과 내 마음에 몰입하며, 이로써 연결되는 연대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 내가 선택하는 시간과 노동을 회복해야 하리. 그간 쥘리의 시간은 모두 그녀 바깥에서 지시하고 요청해온 시간이다. 출근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지하철이나 버스 시간표에 맞춰 자신을 규정했고, 기업에서 요구하는 시간에 자기 다리를 조종했다.      


그렇게 노동자이던 시절 그토록 도착하길 바라고 또 바라던 기차가 정차하지만, 더는 기차의 시간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 기차 대신 자가용을 타고 아이들을 놀이공원으로 데려간다. 그렇게 아이들과 자신이 선택한 시간, 목적지를 되찾는다. 그리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여성에게 강요된 노동이 아니라, 진정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노동을 실현한다. 시장조사원이 된 쥘리, 여전히 노동은 자신을 일부 포기해야 하는 것임에는 변함없고, 또 알렉스에게 관대하고 그녀에게 냉정한 제도는 여전히 그녀를 쥐어짜리라. 그렇기에 결과를 들은 쥘리는 활짝 웃는 동시에 눈물을 흘리며 운다. 기쁨의 눈물, 한편 또다시 시작될 전쟁 같은 삶, 이에 따른 씁쓸한 눈물의 양면성. 그런데도 자신의 능력을 표출할 수 있는 노동이라는 점에서, 경력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될 수 있는 주체적 노동이라는 점에서 그녀에게 기적이리. 아렌트의 근본 활동의 3요소는 실현되지 못하더라도, 마르크스와 엥글스의 주체적 노동은 그렇게 실현한다. 이렇게 그라벨은 두 번째 장편에서 인간을 사물화하는 제도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담아낸다. 극단화된 자본주의 내의 여성 노동자를 탐구했다는 점에서 <아이카>나 <로제타>, 사측의 방관에 따른 노동자들끼리의 분쟁은 <내일을 위한 시간> 등과 이어질 수 있으리. 또 자국의 감독 중 항상 자본주의를 경계하는 작품을 연출하는 스테판 브리제, 로베르 게디기앙의 흐름을 잇는다고도 해석할 수 있으랴. 이윤을 극대화하고 인간을 사물화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를 이에 부합하는 효율적인 연출로 포착한다. 그리고 데뷔작의 낙관적인 자본주의 이탈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하고 싶은 노동과의 절충을 통해 가능한 희망을 엿본다. 다만 그 희망이 가상이 아니길 바란다. 후반부 도착하는 기차 앞에서 어떤 결심을 한 듯한 쥘리의 불길함, 운전하는 그녀의 얼굴을 나무 그림자가 어둡게 가리고 이후 눈이 감기는 듯한 연출이 죽음을 연상케 하며 괴기하기 때문이다. 부디 그녀의 기적이 죽음 이후가 아니길, 끝없는 노동이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탄탈로스의 지옥이 아니길, 현실에서 성취된 여성 노동자의 꿈이길, 그것이 스크린 바깥을 반영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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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19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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