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Aug 22. 2022

유호 쿠오스마넨, <6번 칸>

선로와 방랑

유호 쿠오스마넨(Juho Kuosmanen), <6번 칸>(Compartment No. 6) 

- 선로와 방랑  

“나는 그때부터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들이 때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에 가고 싶으면서도 영원히 떠돌기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딘 고디머-

1991년 12월 26일 142-Н선언으로 소련 내 모든 공화국은 독립하고, 웅대했던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된다. 공화국들의 '독립', 하지만 소련에 속했던 국가 다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소련의 중심이었던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해체 직후 대대적으로 국책사업들을 축소 및 재검토함에 많은 실직자가 발생했고, 소련의 경제력을 구성하던 공화국들이 떨어져 나감에 러시아의 경제력은 급감하여 복지도 후퇴했다. 이에 90년대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올라탄 여행의 풍경은 잿빛이었노라고 회고된다. 1991년 12월 26일에 그대로 멈춰져 방치된 풍경, 무수한 부랑자들과 실직자들, 도시를 가득 채운 침울함과 낙담… 이러한 우울증은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소련 해체의 여파는 주변국들까지 뻗쳐서 우울증을 전염시켰다. 핀란드는 사실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사이가 썩 좋은 국가는 아니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소련 초기까지, 러시아는 호시탐탐 핀란드의 영토를 노렸다. 하지만 20세기 중후반의 핀란드는 소련과 외교가 국가 경제의 큰 축이었고, 이에 소련 붕괴 이후 핀란드의 경기도 침체되어 우울감에 휩싸인다. 이 시기의 청년들은 한때 바랐던 그들의 꿈과 계획들이 모두 좌절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했으리라. “어떻게 살 것인가”, 이에 답하던 거대한 이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뒤바뀐 현실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드물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살아왔으니, 역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일련의 힌트를 가져다줄지 모른다. 더욱이 내가 기대했던 것이 언제나 당연한 것은 아니니, 낯섦과 생경함에 참여하는 여행 속에서 우리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출구를 목도할지 모른다. 유호 쿠오스마넨의 <6번 칸>은 이러한 90년대의 핀란드-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핀란드의 학생 라우라는 시베리아의 고대 암벽화를 보기 위해 세계 최북단 도시인 무르만스크로 여행을 떠나고, 자신과 다르지만 한편 유사한 감정을 공유하는 료하와 만난다.      


본 여행 이야기를 펼쳐내는 1979년 코콜라 태생의 유호 쿠오스마넨은 아키 카우리스마키 이후를 보여주는 핀란드의 영화감독으로 평가된다. 그의 신작 <6번 칸>은 두 번째 장편이며, 그는 첫 번째 장편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을 통해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대상을 받으며 국제적으로 귀추를 주목받았다. 카우리스마키의 연출은 대단히 개성적이다. 촬영과 디렉팅 모두 미니멀하며, 그 건조함은 핀란드의 현재나 민족성, 계급의식을 관통한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2010년대에는 난민 문제에 관한 <르 아브르>나 <희망의 건너편>을 내놓기도 하는 등, 영화의 연출은 느리고 변화 없지만, 동시대에 참여하는 사회성만큼은 재빨랐다. 이렇게 카우리스마키가 독창적인 양식으로 핀란드의 현재를 비추었다면, 쿠오스마넨은 복고적인 연출로 과거를 소환하였다. 그는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16mm 필름을 사용하여 1962년이라는 시대상을 효과적으로 그려냈다. 흑백 영화라는 점도 과거를 지칭하는데 탁월했으며, 이를 통해 역사적이고 시간적인 매체에 대한 고심을 보여줬다. 그리고 멜로를 다룸에 있어 고전의 우아한 무드를 차용하는 등, 당대의 분위기를 2010년대에 효과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시도가 역력했다. 이러한 연출을 바탕으로 인물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선 롱테이크나 긴 호흡의 시퀀스를 지향하여 실존 인물인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짧은 시간'을 손실 적게 여실히 담아내고, 그 영웅적 인물을 이상화하지 않고 오히려 결함이 존재하지만 그걸 이겨내려 노력하는 ‘초인적 의지’를 숭고하게 부각하였다. 올리 마키는 복싱 선수이긴 하지만, 직업적 정체성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복싱 선수가 그의 가장 큰 조각일 수 있어도, 이외에 무수한 다른 조각들도 그를 함께 구성한다. 그리고 가장 큰 조각은 자기 자신만의 바람은 아니다. 그를 바라보며 기대하는 다수의 시선이 투영된 공동의 열망이자, 어쩌면 타율적일지도 모르는 바람이다. 쿠오스마넨은 작지만 강인한 초인을 포착하기 위해 광대한 세계가 극적으로 강조되는 구도와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한다.      


이는 매우 숭엄하지만, 대단히 딱딱하다. 오히려 자유분방하게 잘려 나가고 구도가 즉흥적이어서 경쾌한 숏은 연애를 즐기는, 즉 원하는 감정을 누리는 순간을 담는다. 쿠오스마넨은 후자를 자유의 덕목으로 본다. 올리 마키는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과정에 후회 없었고, 무엇보다 그가 더 뛰어난 존재로 평가받지 못해도 그의 연인은 여전히 곁에서 자리를 지킨다, 그가 ‘어떤 모습’이든. 그래서 올리 마키는 생애 최고로 행복한 날을 누린다, 어떤 모습이든 상대방이 숭고하게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도 후회 없음에. 이처럼 쿠오스마넨은 올리 마키라는 실존 인물이 살아온 시대를 여실히 녹여내는 양식과 타인이 바라는 정체성과 내가 바라는 주체성 중 후자가 진정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존재론적 고찰을 선보인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선명했던 그의 작가적 색채는 신작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핀란드에서 모스크바로, 이후 무르만스크로 여행을 떠나며, 영화에 삽입되는 배경음악 <voyage voyage>처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핀란드어에서 러시아어로 빠져들고 침잠해가는 여정을 <6번 칸>이 담고 있다. 이러한 여정에 따라 연출도 핀란드풍에서 러시아풍으로 젖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본 작품에서의 핸드 헬드와 롱테이크의 결합, 이로써 파생되는 리얼리즘 내지는 연극적 효과가 90년대 소련을 비춘 알렉세이 게르만의 연출과 유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비선형적이고 혼란한 전개를 추구한 게르만에 비한다면, 본 작품은 분명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직관적인 서사를 취하지만, 촬영 자체는 게르만과 그 이후 그를 따르는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 등이 연상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연출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보여준 쿠오스마넨의 회화적이거나 사진적인 연출로부터 분명 바뀐 것이다. 이렇게 연출 또한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쿠오스마넨, 러시아적이라는 말을 나오게 만드는 그의 형식적 요소를 더 깊게 살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핸드 헬드다. 영화의 시작, 화장실에 있던 라우라는 마지못해 바깥으로 나온다. 이후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언제나 세차게 흔들린다. 외에도 기차 안에서 인물들이 걸어갈 때, 잠시 기차에서 하차하여 바퀴 대신 발과 다리로 움직일 때, 영화 중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료하를 따라나설 때 카메라는 떨린다. 이렇게 인간의 발과 기차의 바퀴가 운동감에서 약소한 대비를 이루는데, 사람의 주체적인 발에 상응하는 형식이 핸드 헬드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내가 기대하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발생하는 핸드 헬드는 충돌 내지는 균열의 진동으로, 충격에 따른 심리 또한 가시화한다. 즉 핸드 헬드는 인물의 물질적·비물질적 영역 모두를 반영한다. 이러한 핸드 헬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롱테이크와 결합한다. 핸드 헬드와 롱테이크의 결합은 현실의 시간과 움직임을 재현하며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형식이다. 네메스의 <사울의 아들>이나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처럼 말이다. 현실의 시간처럼 덜 잘리는 롱테이크에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를 연상케 하는, 소련 붕괴 이후 너절하고 궁핍해진 러시아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며 현실을 반영하기에, 형식과 내용은 서로 현실에 신빙성을 더한다. 롱테이크는 라우라가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았을 때도 활용됐지만, 여행을 떠난 열차 내에서 더욱 강조된다. 열차에 타기 전이나 내렸을 때 편집의 잘림이 더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롱테이크는 선로 바깥, 즉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이 고정되어 쭉 이어지는 여정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롱테이크로 이뤄진 원쇼트원씬은 하나의 시공간만 허용하지만, 여러 숏으로 이뤄진 시퀀스는 다층적인 시공간이 뒤섞일 수 있다. 여러 숏으로 구성된 시퀀스는 하나의 숏이 전혀 다른 숏과 연결되며 자아낼 색다른 운동을 기대할 수 있지만, 롱테이크는 오직 숏 내부에서의 운동만 기대할 수 있다. 대신 롱테이크는 그만큼 깊다, 길고긴 시베리아 횡단열차처럼, 끝이 없는 철로처럼…      


즉 롱테이크는 '하나이지만 깊은 것'인데 형식의 속성은 라우라의 의식에도 상응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우라는 혼자 화장실에 놓였고, 열차에 올라탄 이후에는 이리나와 연락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폐쇄적인 '공중전화박스'에 갇혔다. 이때는 롱테이크다. 외부의 다원성, 우연, 우발에서 유리된 채로, 오직 그녀만의 기대와 욕망에만 깊고도 깊이 침잠하는… 그러나 라우라만이 기대하는 주관적인 표상에서 그녀의 몸이 실제로 속한 외부의 객관적 세계로 빠져 나와야 한다. 나온 이후에는 롱테이크가 나뉜다. 이리나의 집에선 여러 인물들의 얼굴이 담긴 숏과 그녀가 담긴 숏이 교차되고 이어지며 시퀀스를 구성한다. 그녀만 담겼던 롱테이크가 분절되며 여러 인물들이 담긴 숏이 붙여지고, 이후 그녀는 불쾌해진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러시아어와 문학 퀴즈가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눠야만 한다. 영화는 단 하나의 선로, 나만의 선로를 이탈하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표상에서 다양성과 우연으로 충만한 세계로의 여정은 35mm 필름에 담긴다. 이는 쿠오스마넨이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흑백과 16mm 필름을 선택하여 1962년을 재현하고 가리킨 것처럼, 35mm 필름은 디지털카메라가 탄생하기 직전인 1990년대를 구현하기 위한 매체로 볼 수 있다. 쿠오스마넨은 35mm 필름을 사용하되, 디지털에 가까운 완전성, 선명함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매체는 시대상을 지칭할 뿐, 특유의 아스라한 효과나 색감은 덜 강조된다. 35mm 필름의 선명함은 다른 매체가 인서트되며 대비를 이루는데, 바로 8mm 필름이다. 8mm 필름은 라우라가 휴대용 카메라로 촬영한 푸티지에 사용되는데, 35mm 필름보다 더욱 조악하기에 흐릿하고 아스라하며 그레인도 많아서 거칠거칠하다. 35mm 필름으로는 영화의 현재를 포착하지만, 8mm 필름은 영화 내의 과거를 기록한다. 이미 지나가 버린 모스크바의 기억, 지금 곁에 없는 연인 이리나의 흔적을 더듬게 해주는 증거, 하지만 이는 무심하게 앞으로 진력하는 시간에 의해 구멍이 숭숭 뚫리고 빛이 바래며 현재에 더는 온전치 않다.  

    

심지어 라우라는 이를 알로하에게 도난당해 잃어버린다. 이렇게 35mm 필름 그 자체로는 매체의 효과가 덜 도드라지지만, 인서트된 8mm 필름 푸티지의 희멀겋고 흩날리는 듯한 매체성과 대비를 이루며, 선명한 편인 매체성이 도드라진다. 35mm 필름은 라우라가 바라지 않지만 선명하고 명확하게 펼쳐져 있는 현재를 비추고, 반면 8mm 필름은 간절히 바라지만 유실되어가는 과거를 담으며 대비를 이룬다. 그렇지만 바라든 바라지 않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전자에 속해야 한다. 또 35mm 필름은 대체로 안정적이지만 때때로 그레인이 자글거린다. 특히 라우라가 이리나를 위해서 횡단 열차의 풍경을 촬영할 때 말이다. 그레인은 필름이 훼손될 때 발생하기에 매체의 불완전성을 환기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계획 및 기대를 열망하는 상황에서 동반되는 그레인은 라우라의 꿈이 불완전하고 현실과 불일치하여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다시 소환하고자 하는 기억은 묵묵히 앞으로 흘러가는 기차와 같은 시간 속에서 멀어지고 박살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레인이 동반되지 않은 35mm 필름으로 포착된 숏에선 대체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8mm 필름으로 포착된 숏들은 화질이 조악하고 흐려서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그래서 당시의 애틋한 감정은 지니되 이미 구체적인 빛깔은 바래버린 경험이라면, 현재에 라우라가 료하와 좋은 시간을 보낼 때 쿠오스마넨는 태양의 충만한 자연광과 신묘한 렌즈플레어를 적극 활용한다. 마지막으로 형식에서 주목할 점으로는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클로즈업이다. 본 작품은 라우라의 그림자가 되어서 그녀의 시선과 의식을 반영하는 팔로우 숏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녀와 친밀한 클로즈업이 동반되지만, 료하나 타인이 참여할 ‘헤드룸’이 남아있는 클로즈업과 미량의 개입도 불허하며 프레임을 꽉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밀도에서 차이가 있다. 후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잠시 내려 이리나와 통화할 때 사용된다. 그녀는 그리운 연인 이리나에게 전화를 걸지만, 상대방의 마음은 자신과 같지 않다.      


이로써 낯선 땅에서 연인의 목소리에 기대고 싶고, 또 모스크바로 돌아갈 계획이던 라우라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저 ‘혼자’ 프레임을 가득 채워야 함을 깨닫는다. 또 낯선 러시아 남성이 불쾌하고 두려우니 그를 방어하고 자신을 보존하려는 듯, 라우라는 그녀 자신에게 더더욱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밀착한다. 하지만 프레임을 언제나 자신만으로 가득, 커다랗게 채울 수 없다. 영화는 세계를 강조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우라는 화장실에서 나가기 싫어도 나가야 한다. 나가서 보니 이리나와 다른 손님들이 일방적으로 라우라는 잘 모르는 작가, 단어들을 내뱉는다. 러시아어가 미숙한 라우라는 낯선 상황이 불쾌하다. 라우라는 이리나하고만 있고 싶다. 그날 밤, 라우라는 이리나와 정사를 즐긴다. 라우라는 찰싹 달라붙어 부대끼는 이리나의 몸이 더 함께 있어 주길 바라기에, 이리나의 육체가 라우라의 곁에서 가볍게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쉬운 눈치다. 타인은 내 마음과 일치하지 않은 채 머물거나 떠나간다. 앞서 이리나의 파티에서 문학퀴즈를 맞출 때, “우리의 일부만이 다른 이의 일부에 닿을 수 있다”라는 문장이 언급된 것처럼, 오롯이 나와 일치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요소만 일치하거나, 간헐적이고 찰나적으로 함께할 뿐이다. 그래서 혼자서 베란다에서 아쉬움을 달랜다. 이후 열차의 6번 칸에서 행동이 거칠고 성별, 국적이 다른 료하는 라우라의 불쾌감만 자극한다. 너무 다르고 이질적이며, 그것을 이해하거나 수용하기에 라우라는 버겁다. 한참 지나 핀란드인 알로하가 '료하와 같은 자들을 만드는 공장'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을 보건대,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의 거친 어투와 행동을 못 견뎌 하는 계급 차이도 느껴진다. 이외에도 잠시 밖에 나갔다 오니, 두 아이와 동행하는 여인이 자리를 차지해버렸고, 식당에 홀로 앉아 있을 때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합석해야 한다. 칸을 바꿔달라며 직원에게 요청하지만 불발되어, 결국 낯설고 불쾌한 이들과 동석하는 부대낌이 강제된다.      


즉 세계에 참여하는 우리에게, 프레임을 나 혼자 가득 채우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필연적으로 불가능하다. 홀로 있다가도 료하가 장난을 치고 놀래키며, 스르륵 잠입하는 것처럼 세계에 머무는 나는 결코 나 혼자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개입은 분명 내가 바라는 것을 깨트린다. 료하와 라우라, 양자 모두에게 세계는 자신이 바란 풍경이 아니다. 라우라가 료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보드카를 연거푸 들이켜서 취한 상태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러시아는 에스토니아보다 위대하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소련 해체로 러시아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시기에 이는 진실이 아니다. 료하가 멀쩡한 의식으로 바라보는 러시아는 어릴 적 자신이 꿈꿨던 세계가 아니다. 자신이 꿈꿨던 표상으로 가득 차는 것이 익스트림 클로즈업, 곧 공상으로 꽉 차는 프레임, 그것이 멀쩡한 의식으로 불가능하다면 주정뱅이가 되어 위대한 러시아, 바랐던 러시아를 상상하고 대체한다. 이후 라우라와 자기소개하며, 무르만스크의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서 기차에 올라탔다고 말한다. 라우라는 왜 돈을 버느냐고 질문하지만, 료하는 추상적으로 사업체를 꾸릴 것이라 얼버무릴 뿐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 즉 그의 노동에는 자신을 위한 목적이 없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노동을 해야만 해서, 일을 강제하는 외부의 이데올로기가 료하에게 일방적으로 새겨진다. 이렇게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이 프레임에 침투한다. 라우라는 앞서 언급했듯, 료하와 함께 놓이는 환경이 불편하고, 남성에 의해 여성 여행자가 매춘부로 규정되거나 그가 그녀의 '남자 친구'를 묻는, 즉 레즈비언임을 부정당하는 것이 불쾌하다. 알로하에 의해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소중한 카메라를 잃어버린 것, 무르만스크에 겨우 도착했더니 겨울에는 출입 금지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등 외부에 의해 내부의 꿈이 좌절되는 것이 유쾌하진 않다. 이렇게 료하와 라우라는 외부 세계에 자신이 바라는 상태로 속할 수 없는 외로움과 소외를 경험한다. 즉 외부가 혼자서 보존하고 싶은 자기 세계에 침범하기에, 그렇게 나만의 표상을 공동으로, 타인의 것으로 변용함에 내가 소외된다.      


그래서 영화의 첫 번째 외로움은 ‘자기 소외’다. 또 다른 외로움은 이리나가 자신의 곁에 없고, 이기적으로 여행 취소를 통보하는 것처럼, ‘상대방에 의한 외로움’이다. 내가 기대한 상대방은 현실에 없다. 객관적인 타자는 내 기대와 정 반대다. 이리나는 여행에 동참하지 않고, 그녀의 외도를 추측할 수 있는 심증들이 라우라의 귀를 관통한다. 같은 언어와 국적, 계급에 놓인 줄 알았던 알로하는 그녀의 카메라를 훔치며 예상을 배반한다. 나라면 안 그랬을 텐데, 당연히 상대는 내가 아니니 예상과 정반대로 행동한다. 기대가 곁에 부재하는 라우라는 외로운데, 자신을 소외시키는 료하, 승객들이 항시 그녀의 표상에 침범해온다. 쿠오스마넨는 거대한 세계를 기차라는 소우주에 응집해놓고, 표상과 충돌하는 외부 세계 사이에서 발생하는 외로움과 소외를 느끼는 인간의 초상을 탐구한다. 모두는 각자의 표상에 머물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의 기차, 곧 하나의 세계에 머물며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이에 주관적인 표상이 전체적인 하나로 통합되는 불편한 경험을 접한다. 이 와중에 모두가 제각각의 목적지에 내리고, 이로써 다시 표상을 회복하며 인간의 여정은 객체/주체, 즉자/대자 사이에 놓인다. 인간은 ‘나의 길’에 놓이기도 하고, 모두가 함께 향하는 ‘공동의 선로’에 놓이기도 한다. 그 공동의 선로, 타인의 선로에 참여할 때 즐겁다. 앞선 문학퀴즈에서 "탈출은 어디로 가는지 보다 어디서 가는지가 중요하다"라는 문장이 언급된다. 그 문장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출발이나 시작이 중요하다는 태도를 부각한다. 철로의 목적지는 정해져서 벗어나지 않는다. 본인들이 기대하는 표상이나 각자에게 부여된 즉자도 그렇다. 료하는 노동자가 되어 광산으로 향해야만 하고, 라우라가 맞닥뜨릴 암각화는 1만 년 전부터 변화가 거의 없으며, 그녀가 바라는 이리나와의 행복은 비디오카메라에 담겨서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이요, 사시사철 운영되는 무르만스크 투어도 참 뻔하다. 또 라우라는 핀란드어를 사용하는 동향 사람 알로하를 만나서 반가웠지만, 정작 그의 기타 연주는 권태롭고, 밖에서 광대짓을 하는 료하가 더 흥미롭다.      


라우라의 탈출은 나를 찾기 위한 탈출이었다. 이리나와 함께하기, 암각화에서 인류의 근원을 보기, 이러한 나를 찾는 탈출은 목적지가 아니라, 아집에 붙잡힌 과거의 자신에서 멀어지는 출발에서 발견한다. 영화에선 뒤를 돌아보는 숏이 등장한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할 때 멀어져가는 기차역을 뒤를 돌아 바라보고, 또 알로하가 카메라를 절도한 이후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이리나와의 기억, 라우라의 추억이 남겨져 있다. 그러나 과거에서 멀어져가고 현재로 출발하며 료하가 일으킨 농담에 웃음을 터뜨린다. 즉 과거로부터, 기대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익히 아는 내가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자신과 마주한다. 또 우연한 일탈을 긍정하여 나를 회복하고, 나의 유한한 기대만으로는 알 수 없었을 무한을 경험한다. 우연과 무한은 더한다. 반면 익숙한 기존 언어는 더 더할 수 없고, 지지부진하며 오히려 앗아간다. 라우라는 과거의 좋았던 기억에 천착한 나머지, 현재 식어가는 이리나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 처음 만났지만 핀란드인으로서 익숙한 알로하가 카메라를 절도한 것처럼 말이다. (한편 알로하의 새로운 모습이 익숙한 과거를 송두리째 앗아간다) 영화에선 라우라가 이리나와 통화할 때의 연출에 주목할 법하다. 바로 라우라가 이리나와 통화하는 '청각'의 시간과 눈에 보이는 '시각'의 시간을 불일치시키는 편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시 정차했을 때, 또 무르만스크에 도착한 이후 연락했을 때, 시각이 한 박자 느리거나 앞서거나 하는 식으로 이탈한다. 청각에는 라우라의 기대나 소망이 담겨있다. 그러나 청각이 시각으로 실현되진 않는다. 또 라우라가 청각에 갇혀있음에 현재 펼쳐진 시각을 볼 겨를도 없다. 즉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다, 아집에 갇힌 사람은 '무'를 본다. 즉 익숙한 것, 친밀한 것, 기대한 것에의 집착은 권태롭고, 새로운 것을 가져다주는 현재를 앗아간다. 그러나 료하와 라우라는 각자의 언어로 번역하며 새로운 언어를 더한다. 모르는 언어는 새로운 앎을 불러온다.      


이후 페트로스코이에서 기차가 하룻밤 정차했다. 그녀는 료하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기차나 전화 부스에서 하룻밤 보낼 생각이었다. 만약 이를 고집했다면 ‘남성에게 위협당하는 여성’, ‘대답 없는 상대방을 향한 독백’, ‘무의미한 소화기’, 즉 기존 라우라와 ‘일반적 여성상’이 되풀이되었으랴. 그 ‘기존 라우라’는 현재에 불가능하기에 사실상 무로의 귀결이다. 그러나 료하와 동행하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료하는 자욱한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를 거친다. 료하가 통과하는 무는 기존 라우라를 지우는 무, 이 어둠을 감내하고 나니 라우라에게 새로운 '유'가 더해진다. 바로 지지부진한 자신만의 주관성으론 알 수 없는, 독특한 타인의 주관성과 접한다. 료하의 양어머니는 주관적인 통계법에 대해서 역설하고, 또 당대 일반적인 수동적 여성상에 얽매이지 않고 여성 안의 '작은 아이', 곧 내면의 소리를 듣고 따르라고 조언한다. 나와 전혀 다른 타인과의 접촉은 불쾌하고, 또 내 취향에 맞지도 않는다. 료하가 가져온 밀주는 양어머니의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밀주라는 불호를 감내하니 양어머니에게 료하와 라우라가 찾아와 즐거움과 새로운 경험을 가져다주고,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라우라는 료하의 양어머니에게서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을 깨우친다. 료하 또한 생물학적 어머니에게서 이탈하여 양모에게 길러졌기 때문에 지금의 그가 있다. 즉 유한한 기억에 집착하지 않고, 무한한 현재와 새로움을 긍정하면 더할 수 있다, 삶과 성장을.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피클’을 선물 받는다. 이후 알로하와 산책할 때, 낯선 강아지를 우연히 따라간 곳에서 러시아 아저씨들이 ‘술’을 선물한다. 어둑한 길과 눈, 아무것도 아닌 것들과 춥고 으슥하여 불쾌한 것을 기꺼이 감내하여 내 삶에 새로운 유를 더한다. 여행의 우연은 라우라에게서 이리나를 앗아갔지만, 이리나가 담긴 카메라가 비워진 빈자리에 료하나 선물을 채워준다. 일탈하는 여행은 잠시 동안 ‘그간의 나’를 포기하는 것, 달리던 자신의 선로를 중지하여 ‘휴식’을 갖는 것이다.      


라우라는 레즈비언이라는 기존의 성 지향성을 내려놓으며 그와 키스한다. 나를 유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나를 포기하고 상대를 긍정하는 사랑을 더한다. 그것이 라우라의 꿈이었다. 그녀는 이리나에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 카메라로 촬영하여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일방적으로 계획을 파기하고, 잠시 통화하는 순간에도 라우라가 무엇을 보는지 관심조차 없고, 제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반면 료하와는 서로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과하게 지출하고, 항시 클로즈업으로 자신에게 집중하던 라우라는 료하의 얼굴에 길게 집중하여 드로잉을 남긴다. 한편 료하는 처음에는 라우라를 친밀하게 여겼다. 그러나 6번 칸에서 내릴 시간이 다가오자 그녀가 낯설어진다. 이성애자/레즈비언,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노동자/지식인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키스를 짧게 끊고, 무르만스크에선 먼저 하차한다. 그러나 라우라가 무르만스크의 여행자임을 포기하고 광산으로 향하는 것처럼, 료하 또한 노동자임을 잠시 내려놓고 하루 동안 여행자가 된다. 엄동설한의 겨울에는 암각화를 보러 가는 길이 막히고, 또 강풍으로 인해서 배조차 뜨기 어렵다. 그러나 료하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유한을 무한으로 넘어선다, 내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물론 성 지향성과 계급의 선로에서 잠시 이탈한다 한들, 우린 본래의 기차에 다시 올라타야 한다. 영영 상대의 눈으로 바라볼 순 없다. 하지만 헤드룸에 끼어든 타인과 우연의 기억에 우리는 여행 이후에도 충만하고 빛난다. 결말에서 라우라는 씁쓸하고 아쉬움이 남는 표정이지만, 료하가 그녀를 그려준 그림과 거기에 적힌, 료하는 ‘사랑해’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엿 먹어'를 의미하는 ‘하이스타 비투’를 보며 낄낄댄다. 과거부터 이어져 온 기표/기의의 지리멸렬한 결합이 아니라, 언어를 잘 모르는 러시아인이 핀란드어의 기표/기의를 새롭게 조합한 것이 신선하다. 이러한 감각을 느끼고자 우린 여행을 떠난다. 암각화를 보고 싶던 라우라, 정작 도착해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끊임없이 요동치며 바위를 깎는 ‘파도’와 정해진 근무를 마다하고 충동적으로 달려와 준 료하다.      


그것이 인간의 해답, 나름의 선로를 운행하되 철로에서 잠시 하차하는 일탈과 우연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렇게 삶에 새로움을 더하고 또 더하는 존재, 외롭지만 충만하고 불쾌하지만 기쁜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이렇게 쿠오스마넨은 유한에 무한을 더하는 우연, 그간의 자신을 포기해야 하지만 한편 새로운 나와 조우하는 일탈, 이로써 인간을 고양시키는 여행을 탐구한다.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에서 복싱 선수로서 기대하고 바란 자신이 좌절되어도, 타인과 사랑하며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지론을 이어간다. 자신만의 익숙함을 위해서 귀에 헤드폰을 끼고, 눈을 닫고 잠자면 유리된다, 삶과 현재로부터. 그래서 우리는 눈과 귀를 연다. 그 새로운 경험을 위해서 2020년에서 1990년대로 떠나 당대의 유행곡들을 총망라하며 핀란드어에서 러시아어, 심지어 불어로도 떠나고, 러시아 영화의 흔한 배경이 되어왔던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외곽의 새로운 시청각을 펼쳐낸다. 즉 쿠오스마넨은 연출하며 자신도 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미시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또한 핀란드-러시아 양국의 관계에 대한 상징으로도 읽을 수 있다. 핀란드인 라우라에게 이리나는 기대하던 러시아 내지는 소련이라면, 료하는 기대에서 벗어난 소련 붕괴 이후 추하게 몰락한 러시아의 몰골이다. 기대한 소련 혹은 러시아는 라우라에게서 더더욱 멀어지는 한편, 기대하지 않은 러시아는 라우라를 불쾌하게 하지만, 다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각자의 길로 향하며 서로를 이롭게 하리라. 즉 서로의 다름, 이질성, 이상함을 이겨내는 끈기 뒤에 개인에 있어서도, 국가에 있어서도 환한 태양이 기다릴 것이니.  

-----------

감상일: 220822 집에서(MUBI 스트리밍), 230313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에리크 그라벨, <풀타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