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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25. 2022

요아킴 트리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욕망은 나르시시즘

요아킴 트리에(Joachim Trier),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 욕망은 나르시시즘

“점차 나 자신을 새롭게 길들일 것이다. 사랑과 인내심으로 부단히 변화시킨다면, 종내는 두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두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지 피란델로-

선한 것은 주로 목숨에 이롭거나 좋다고 느끼는 것, 악한 것은 생존에 나쁘거나 싫다고 느끼는 것이다. 힘껏 달아오른 나의 육체는 사랑을 성취해야지만 선할 것이라고 줄곧 요구한다. 하지만 사람은 모름지기 사랑에 빠지면 최악이 된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나는 감성적으로 좋은 것, 이성적으로 선한 것을 균형 있게 고루 갖춘다. 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감성이 좋은 것으로, 이성을 마비시켜 합리적인 관점에서 해로운 것을 생각지 못하게 만들기에 사악하다. 사랑에 빠진 나는 광분한다. 그 빛깔은 흡사 노랑, 지칠 줄 모르고 끝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태양의 색채. 하지만 자신을 무한하게 불태워도 끄떡없는 태양과 달리, 인간의 삶은 유한하기에 노랑이 사람과 연관되면 죽어가는 지도 모르는 채 자신을 쇠진하는 광인과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나는 광기에 휩싸여 목숨을 불사하는 불나방처럼 연인에게 뛰어들며, 심지어 내게 선한 것을 저버리고 희생하여, 몽땅 연인에게 바친다. 당시에는 잃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 성취되어 광기의 환상에서 서서히 깨어나면 차가운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니, 내가 무엇을 얼마나 소진했는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런 뜨거운 최악이 때때로 필요하다. 합리적인 계산으로 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므로… 이러한 '최악'의 사랑 이야기를 요아킴 트리에가 신작에서 펼쳐낸다. 본 작품은 요아킴 트리에의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이다. 본 오슬로 3부작에는 그의 데뷔작인 <리프라이즈>와 대표작 <오슬로, 8월 31일>이 속한다. 1974년 덴마크에서 태어나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자란 요아킴 트리에는 동시대 노르딕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어머니와 사운드 디자이너인 아버지 밑에서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지금까지 그는 총 네 작품을 연출했으며,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봐야 오슬로 3부작의 마지막인 본 작품, 그리고 제목의 ‘최악’의 의미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트리에의 작품에선 다소 독특한 부모님의 영향이 묻어난다. <오슬로, 8월 31일>에서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아카이빙 푸티지, <라우더 댄 밤즈>에서 사진작가인 이자벨이 어머니의 영향이고, <라우더 댄 밤즈>에서의 강렬한 사운드가 아버지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영향과 연출 하에 그는 겉모습이 전부가 아닌, 그 이면의 결핍을 포착한다. <리프라이즈>에서 주인공 필립은 이른 나이에 성공하여 다른 청춘들의 부러움을 사지만, 타인이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결핍을 겪고, <라우더 댄 밤즈>에서 사진작가로서 명망 있는 업적을 쌓았지만 아내이자 어머니일 수 없었던 우울을 겪는 이자벨이 그렇다. 또 트리에의 작품에서는 <오슬로, 8월 31일>에서처럼 사회에서의 배태 및 부적응, <라우더 댄 밤즈>처럼 당연한 존재를 잃는 상실이 주요 사건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결핍과 상실로 인해 요아킴의 군상들은 우울해하고 방황한다. 그래서 <리프라이즈>나 <라우더 댄 밤즈>에서 대두되는 과거, 꿈, 현실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복합적인 연출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줄곧 붙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도망치고 방황하는 인물의 심리를 반영한다. <오슬로, 8월 31일>에서는 이 같은 심리를 품은 인물의 공허한 외피와 시선에 집중한다. 이들이 현실에서 방황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과 눈앞에 놓인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델마>에서 주체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을 마녀로 규정하던, 폐쇄적이고 억압된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또 <리프라이즈>에서처럼 공동체의 맹목적인 일원이 아닌, 타인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개인임을 바람과 동시에, 기성의 이데올로기나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욕망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은 특히나 <오슬로, 8월 31일>이 그러하듯 부유하고 배회하며 방황할 뿐인, 구체적으로 무언가가 실현되지 않는 공허함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그들은 항상 차갑고 건조한 미장센으로 포착된다. 또 <리프라이즈>에서 카운트다운을 세며 0, 즉 무의 영역으로 향하며 죽음을 도전하는 장면이나 <리프라이즈>, <라우더 댄 밤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는 자살 욕구 등 삶을 아예 중지하고자 하는 무기력함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태어나는 아기, 그런데도 하늘을 향해 체조하며 상승해가는 삶, 죽음에 도전하고도 여전히 살아있는 청춘의 성장통을 포착하며, 궁극적으로 삶을 제시한다.      


다만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슬로, 8월 31일>에서처럼 어떻게든 살아 있되 여전히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라우더 댄 밤즈>에서 아기 대신 노인을 긍정하며 어차피 죽을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삶 등, 트리에는 죽음과 삶 양자 모두를 함께 긍정한다, 죽음과 삶은 함께 공존한다. 이는 살아가는 시간인 현재와 죽은 시간인 과거, 앞으로 닥쳐올 시간인 미래를 함께 사는 <리프라이즈>의 복잡한 연출에서도 나타난다.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꿈과 현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부유하고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오슬로 청춘의 성장통을 <리프라이즈>와 <오슬로, 8월 31일>에서 포착하던 트리에는 이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을 통해 오슬로에 살아가는 청춘의 마지막 초상을 담아내려 한다. 일단 영화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요아킴 트리에는 본 작품을 35mm 필름으로 촬영한다. 분명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밝은 세계, 그러나 은근히 채도가 낮고 어두워 어딘지 병적인 인상을 풍기는 북유럽의 차가운 톤을 매체로 구현한다. 희멀겋고 불완전한 세계, 그것이 곧 우리의 몸도 좌우할까. 본 작품에서 율리에, 악셀, 에이반드의 '몸'도 우중충하면서 밝은 영화의 미묘한 톤처럼, 어느 한 측면에 온전히 머물러있지 않다. 경계선을 밟으며 변화하고 또 변화한다. 영화는 이러한 몸을 다채로운 연출로 보여준다. 율리에가 의학, 심리학, 사진학 등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두지 못해, 영화의 대사처럼 "대체 뭘 원하는 지 모를" 때, 영화는 율리에의 모습이 잠깐 나타났다가 빨리 다른 숏으로 이어져 사라지는 급박한 편집을 선보인다. 율리에는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다, 잠시 의대생, 심리학과 학생, 사진작가로 포착되었다가 다른 대상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이러한 율리에의 몸, 의식의 변화를 편집뿐만 아니라 푸티지나 애니메이션을 인서트하며, 즉 동시대의 영화와 다른 톤의 매체, 영화와 아예 다른 매체들을 활용하여 기존의 나를 위반하며 몸을 경계를 뛰어넘은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몸은 길게 머물러있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즉흥적이어서 변하고 또 변한다. 이에 따른 짧고 빠르며 탄력적이고 리드미컬한 편집은 개인의 변화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무수한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수한 사람들에게 정신 산만하게 둘러싸여, 질문 세례를 우수수 받는 나는 변화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연인을 만난다. 영화 속 사랑의 시작은 핸드헬드로 포착된다. 한편 이별도 마찬가지로 핸드헬드다. 이별하지 않더라도 2장에서 악셀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을 때, 이에 홀로 놓여 걸을 때도 핸드헬드다. 그와 함께 있을 때, 잠자리를 가질 때는 부드럽고 온후한 스테디캠으로 포착되었다. 사랑의 시작은 곧 이전 사랑의 종언이다. 그래서 사랑의 시작과 끝은 똑같은 핸드헬드다. 붕괴하는 흔들림, 새로운 것들이 건립되어 가는 흔들림. 이러한 사랑이 어느 정도 정착하였을 때는 숏과 시퀀스가 비교적 길어진다. 무수한 유랑 끝에서의 정착, 하지만 몸은 지리멸렬하게 머물러있는 권태를 과연 마냥 하릴없이 기다릴 수 있을까.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장, 흡사 12개월로 구성되어 사계절의 변화를 겪고 1년을 완성하는 지구처럼, 그렇게 겨울에서 봄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처럼, 그것이 삶인 것처럼 말이다. 율리에의 삶도 사랑과 시작의 봄, 만개하는 여름, 차가워지는 가을, 죽음이 발생하는 겨울을 거쳐, 다시 새로운 삶이 싹을 돋는 봄으로 되돌아간다. 12장의 역동적인 변화가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이전 프롤로그부터 인간 몸의 변덕을 아주 리드미컬하게 보여준다. 율리에는 처음에는 의사가 되길 희망하였다. 하지만 이윽고 심리학자로 꿈이 뒤바뀌었고, 이후 사진작가가 되길 희망하며, 끝끝내 작가가 되길 갈망한다. 정신은 분명 의사가 되길 예정해 놓지 않았을까. 하지만 3장에서 ‘미투 시대의 구강성교’라는 원고를 쓰는 율리에, 거기엔 여성의 의식이 구강성교가 분명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수치심을 유발한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몸은 정신과 상반되게 흥분한다는 내용이 담긴다. 우리의 몸과 정신이 그렇다. 분명 정신은 어떤 직업이 되기를 희망하고 도그마를 고정하지만, 몸은 절대 머물러있지 않는다. 율리에의 머리칼은 장발이었다가 단발로, 다시 장발이 되었다가 단발로 변화한다. 색채도 금발에서 적발로, 그리고 갈발로 자유롭게 뒤바뀐다.      


1장과 7장, 그리고 8장의 꿈에서 율리에는 임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고, 4장에서는 그 생각이 나이 30이 되면 무조건 어머니가 되고, 이혼하거나 과부가 되어 모든 책임을 홀로 떠안아야 했던 가족 내 여성들에게서 비롯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도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에이반드 또한 임신을 바라지 않았지만, 막상 율리에가 임신을 하니 예상치 못한 만감이 교차한다. 한편 44살이기에 더 늦기 전에 아이를 바란 악셀, 하지만 시한부 운명에 처한 이후 아이에 대한 생각은 복잡해진다. 몸의 변화가 정신을 좌우한다. 몸의 상태를 파악하길 희망했던 율리에는 자신의 전공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다. 이제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물질인 육체가 아니라, 비물질인 정신이자 영혼이다. 율리에의 몸이 충분히 물질을 탐식하자 이제는 정신을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심리학을 공부하자 다시 그녀는 우리의 눈에 비치는 외면, 피사체에 관심을 둔다. 그렇게 사진작가가 되고 나니, 다시 나의 비가시적인 내면을 글로 풀어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우리의 몸은 언제나 환상을 갈구한다. 정신의학자 카를 융이 말하는 환상이란 '한때' 현실적 타당성을 지녔던 불가능한 것, 마냥 유아적이지 않고 정신의 본능적이고 고태적인 토대에 의해 나름의 객관적인 소요성을 갖춘 것이다. 나름의 현실적 타당성을 갖추었다면, 환상이란 불가능하지만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욕망이 바로 환상이다. 1장에서 악셀과 율리에의 의견은 충돌한다. 44살인 악셀은 아이를 낳고 책임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워지기에 다소 조급하다. 그에게 아이는 환상이다. 하지만 30세인 율리에의 눈에는 도처에 모성에 휘둘리는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 가득하다. 더욱이 4장에서 밝혀지듯 그녀의 여성 선조들이 나이 30에 아이를 갖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모성을 가진 여성이나 아이가 가능한 것이라면, 그 반대가 불가능한 것일까. 그래서 그녀의 환상은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한 커플이 춤추다가 다쳐서 다투는 소리를 듣는다. 도처에 가능한 것이 불화라면, 불가능은 화목일까. 율리에는 악셀에게 아이를 갖는 것이 어떠냐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을 건넨다.      


이렇게 우리는 불가능한 것들을 바란다. 육체를 알고 싶었을 때는 의사가, 정신을 알고 싶었을 때는 심리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다시금 육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니, 이러한 육체를 포착하는 사진작가를 바라고,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니 내면을 풀어내는 작가를 바란다. 그리고 12장에서 영원한 악셀과의 이별, 아이 유산을 경험하니 율리에는 불가능한 것이 '영원'임을 확인하고, 이에 유한한 것을 반영구적으로 기록하는 사진작가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환상은 한때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것도 내포한다. 율리에는 가능한 악셀과 달리 불가능한, 이름도 몰랐고 하룻밤 만나고 헤어진 에이반드가 너무나도 허기지다. 그래서 5장에서 악셀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이별하고 나니 불가능해진 것은 이제 악셀이다. 악셀과 율리에는 권태로운 연인관계를 청산한 이별 단계에서 더는 불가능한 마지막 짜릿한 정사를 나눈다. 에이반드도 수니바와 옴짝달싹 달라붙어있었을 때는 지루했다. 시선이 자꾸 율리에 쪽으로 향하고, 6장에선 원치 않는 수니바의 삶이 자신에게 덧씌워지는 기분이다. 자신은 사미족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7장에서 에이반드는 이별한 이후에도 수니바의 SNS를 팔로우하고, 여전히 기후 문제에 대해 민감하다. 수니바와 이별하고 난 이후에 그녀와의 끈이 불가능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랴. 그리고 배려가 넘치고 동거하며 언제나 볼 수 있는 에이반드와 달리, 이젠 라디오에서만 볼 수 있고 자기주장이 강한 악셀이 율리에의 눈에 흥미롭게 비춰진다. 또 후반부 챕터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악셀에게 율리에가 더 많은 시간을, 불가능한 시간을 선택한다. 마지막으로 율리에가 유산한 이후 에이반드는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여성에게로, 이에 율리에와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으로 만든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함께 동침하여 성교를 나누거나 껴안고 잘 때, 줌아웃으로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연인의 기다림에 전전긍긍하던 율리에의 줌인과 달리, 그녀만 포착되지 않고 드넓게 확장되어 공간, 현실, 세계가 보인다. 연인이 함께 있자 드넓어진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멀어진다.' 가능한 것이 지겨워진다, 간절했고 소중했던 것이 따분해진다. 그래서 사랑하면 가능함을 저버리고,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히고 도전하며 위험을 선택하는 나는 최악이 된다.      


좀 더 이들에게 불가능했던 사랑의 요소들을 살펴보자.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시선을 오직 연인에게 바친다. ‘사랑받는 사람’은 이를 흠뻑 만끽한다. 율리에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랑받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않다. 도입부와 2장에서 출판기념회의 발코니에 머무는 율리에가 포착된다. 느린 줌인으로 그녀에게 접근해간다. 발코니 너머의 세계는 웅장한 롱숏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율리에는 아름다운 세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이로부터 유리된다. 오직 시선은 핸드폰과 악셀에게 고정된다. 그녀에게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 악셀을 기다리는 그녀의 시선이 중요하다. 영화는 오직 그녀만을 줌인으로 확대해간다. 율리에는 악셀을 바라보고,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기자, 추종자들도 율리에처럼 시선을 악셀에게 헌납한다. 하지만 그 무수한 사람 중에서 악셀은 율리에만을 바라봐주지 않는다. 이후 5장에서도 악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토론의 참석자들에게 향해있는 것이 내심 서운하다. 율리에의 바람은 소외된다. 2장에서 율리에는 출판기념회를 나와서 이름 모를 한 피로연에 참석했다. 그리고 거기서 당시 이름도 몰랐던 에이반드와 눈이 맞았다. 이후 5장에서 에이반드와 재회하고, 자꾸 둘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한다. 사랑 받는 사람은 아니었던 그들은, 지금껏 불가능했던 사랑 받는 사람이 서로의 시선을 통해서 실현된다. 율리에의 뇌리에 악셀은 잊혔고, 에이반드는 곁에 있는 수니바가 보이지 않는다. 수니바의 시선은 길을 잃는다. 이후 트리에는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모든 세계가 정지된 상황에서 율리에와 에이반드의 몸만 움직이는 마술적인 시퀀스를 펼쳐 보인다. 그들은 멈춰버린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고, 또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오직 보이는 것은 둘뿐이다. 시간 정지는 조명 스위치를 누르며, 즉 ‘무언가를 밝힘’으로써 발생했다. 그렇게 밝혀진 것, 율리에가 에이반드를 바라본다는 것, 에이반드가 율리에를 쳐다본다는 것, 두 연인은 타인의 시선에 관심 없고, 타인의 시선도 둘에게서 멈춰있어 관심이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랑에 빠진 존재는 나밖에 몰라서 최악이고 멈춘 것으로 여겨지는 타인에게 해롭다. 이후 무관심해진 악셀에게 이별을 고한다. 사랑에 빠진 존재의 시야는 좁아진다. 하지만 연인이 꽉 찬 표상에서 상대방이 떨어져나가면 2장에서 홀로 걷는 율리에처럼 드넓은 현실이 숭고한 구도로 개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시 좁아진다. 그녀는 악셀을 위해서 헌납했던 자신의 시선을 되찾아온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오직 저 자신을 바라본다. 천연덕스럽게 방문한 모르는 타인의 피로연에서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 즉 이타심보다 제 자신의 도전 욕구, 호기심이 더 중요하다. 독선적인 그녀는 아이 양육과 마약 중독의 인과성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설파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타인에게 최악이 된다. 또 우린 진정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필요에 따라 그 대상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5장에서 하나였던 연인이 둘로 나눠지는 과정에서, 너와 내가 얼마나 다른지 논쟁을 펼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악셀은 율리에의 과감한 창의성이, 그리고 율리에는 그의 시선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몸의 변화에 더는 악셀이 필요하지 않으면 그녀는 에이반드에게 향한다. 또 다른 최악의 관점도 있다. 2장에서 홀딱 사랑에 빠진 율리에와 에이반드는 서로의 악취를 맡고, 용변을 지켜보며, 자신의 폐에서 우러나온 담배 연기를 바꿔 마신다. 해로운 것, 더러운 것, 불결한 것, 하지만 사랑에 빠지니 오히려 이를 길게 붙잡고 싶은 듯, 슬로우모션으로 이는 아름답게 포착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랑한다는 것, 특히 성과 연관한 에로스는 온전한 합법이 아니었다. 노동의 시간에는 내쫓아야 할 것, 쾌락을 위한 사랑은 금기시되어야 하는 것, 이에 사랑은 언제나 불법, '추잡하지만 해야만 하는 위반'이었다. 더욱이 에로스가 접촉해야 하는 생식기는 불결하게 여겨지는 배설 기관과 필연적으로 친숙하다. 그래서 사랑하기 위해선 더러워야 하고, 더러운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 우리는 최악이 된다. 또 우리는 타인의 악취보다는 나의 악취에 비교적 너그럽고 관용이 있다. 친숙하고 익숙하므로, 그런데 사랑에 빠진 존재는 대상을 나로 생각하여 상대의 악취를 나의 악취처럼 친숙히 여긴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 것도 타인이 포용하기 어려운 내밀한 것을 상대방과 공유한다면, 그 대상을 나로 여기기 충분하리. 이에 타자를 자신으로 여기는, 최악의 환각이 발생하는 것이랴. 이제 율리에와 에이반드는 서로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무례해진다. 그들은 피로연에 참석한 타인의 외투를 도외시하다 못해 깔아뭉개고 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내가 투영된 욕망의 대상이므로, 이외의 타자성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가족과도 같아진다. 율리에가 달아나려고 하는 여성 선조들의 운명, 율리에의 아버지가 마치 자신의 아버지인 양 서운함을 토로하는 악셀, 유전자 검사에서 사미족 DNA가 발견돼서 풍습을 따르는 수니바처럼, 유사성은 타인을 나로 여기거나 그 반대도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상대방으로부터 나를 사랑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율리에의 사랑도 그랬다. 율리에가 전공, 직업 등을 뒤바꿀 때, 의대생, 모델, 교수 등 남자 친구도 항상 변화하였다. 그렇게 변화한 연인은 율리에의 현재 상태를 반영하였고, 이후 만난 악셀의 창조성, 에이반드와 유사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12장에서 악셀을 위로하러 병문안을 간 율리에, 하지만 이후 임신해서 복잡한 고민에 빠진 저 자신을 위로받기 시작한다. 너는 나고, 나는 나기에 그러한 나르시시즘에서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다. 8장에서 율리에는 에이반드가 지니고 있는 마약성 버섯을 먹는다. 거기서 비논리적으로 아버지, 악셀, 노쇠한 육체에 대한 공포, 젖가슴을 빠는 아기가 등장한다. 무의식은 억눌린 공포와 두려움을 제시하며, 욕망은 그것의 해소다. 율리에는 꿈을 방해하는, 현실에서 이미 쟁취한 에이반드의 손아귀를 뿌리친다. 그녀는 자신을 소스라치게 만드는 꿈 속 남자들을 도발하며 이를 해소하려 한다. 12장에서 악셀의 만화에 큰 영향을 준 채색 창문을 보게 된다. 색채에 의해 외부의 객관적인 시각은 왜곡된다. 어쩌면 우리의 눈이 곧 채색 창문과 같으리. 객관적인 세계를 본다고 착각하지만, 우리의 눈에 덧씌워진 색채와도 같은 몸과 욕망에 의해 여과된 주관적 대상을 좋아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 필터를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상대방의 저술조차도 객관적으로 접할 수 없다.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작가를 동경하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리프라이즈>에서의 청춘이 그랬고, 또 <오슬로, 8월 31일>에서 서점은 마약 중독자가 세상에 참여하려는 창구였다. 악셀은 자신의 만화책을 출판하며, 기자 및 추종자들과 대화하고 그렇게 서로의 표상을 교류해간다. 3장 율리에의 칼럼에서 보듯, 자신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언어로 옮겨온다. 앞서 언급한 카를 융은 우리는 단어를 통해 생각하고, 사고의 흐름은 언어의 형태 속에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언어는 현실에서 객관적, 실제적인 것들의 순서를 모방하고, 이를 엄격하게 인과적인 순서로 이어지게 만든 이후, 다시 현실에 배치·적용한다. 5장에서 악셀은 자신이 고양이에 그려놓은 항문 표식을 제작사가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지워버렸다고 분개한다. 항문 표식은 그에게 하나의 시각 언어, 세상의 추함과 솔직함을 모방하여 다시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사고를 집약한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언어가 타인의 손에서 곡해되어 버렸고, 이에 악셀은 자신의 사고가 현실로 되돌아가지 못해서 분개한다. 악셀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율리에가 제 혼란스러운 감정을 녹여낸 글처럼, 트리에의 작가란 자신이 바라보는 표상과 감정을 언어로 모방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이를 다시 현실로 불러오는, 실재를 보존하는 작업가다. 나의 감정, 삶, 세계가 모호한 청춘들은 그것을 제대로 모방할 수 없고, 인과를 밝힐 수 없기에 언어를 다룰 수 있는 작가를 동경하는 것이리. 한편 작가가 기록하는 것은 찰나이지 불변하는 보편, 절대적인 시간은 아니리라. 율리에는 자신이 쓴 글이 성에 차지 않아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고, 에이반드는 재활용을 하다가 이를 우연히 읽었다. 그리고 율리에는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이후 분개한다. 왜 마음대로 버린 글을 읽었냐고, 또 그 글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길 위해서 아첨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몸은 바람에 부대끼는 갈대처럼 시도 때도 없이 변화하고, 율리에는 변하기 전의 몸을 글로 기록한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과거는 현재에 부정당하기 일쑤거나 현재의 율리에로 되돌아올 수 없는데, 그것을 들춰내어 긍정하는 에이반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독해’도 율리에나 악셀의 저술을 객관적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과 몸의 주관적인 행위다. 9장에선 라디오에 출연한 악셀과 페미니스트 패널이 다툼을 벌인다. 악셀은 예술이 어떤 표현도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페미니스트는 악셀의 작품이 여성 혐오적이고 해롭다고 말한다. 서로는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상대의 무수한 의견에도 나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 이를 항변하기 위해 악셀은 '창녀'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을 비유하지만, 패널은 문장의 의도가 아니라 창녀라는 단어가 주는 불쾌감에 매몰된다. 그래서 아무리 작가가 돼서 널따란 세상에 참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제 몸의 기분에 갇혀있다. 율리에도 에이반드가 자신을 칭찬하고자 하는 의도를 외면하고, 그녀 자신이 에이반드와 무관하게 느끼는 불쾌감으로 그를 규정한다. 그렇게 상대방이 나로 보였던 환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1장에서 악셀과 잠깐 다투었을 때 율리에는 그가 자신과 유사한 것이 싫어진 모양인지 강요하지 말라고 말한다. 5장에서 악셀과 율리에는 우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인 이유를 쏟아내며 서로에게 흠집을 낸다. 에이반드에게 마음이 식었을 때도 율리에는 그가 야망 없는 사람임을 질타한다. 그렇게 향기는 악취로 변하지만, 그것은 냄새가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맡는 내 코가 변한 것이리라. 악취를 향기라 착각했던 내 코의 오류, 더 이상 그것을 향기로 느끼지 못하는 내 몸의 변화, 결말에서 이들은 또다시 변한다. 악셀은 세상을 떠나서 물질로 남지 않게 되었고, 율리에는 다시 사진작가가 되었으며, 에이반드는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여성을 선택했다. 모두 제 몸이 상실을 붙잡을 것을, 아이를 낳고 키울 것을 명령한 결과가 아닐까. 그 바람에 상대방은 언제나 일순간 맞아떨어질 뿐이다. 변화 속에서 불가능한 자신을 고집하는 사람은 사라진다. 변화한 현대에서 충돌하고, 그의 시그니처인 항문 표식은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으며, 또 췌장암에 걸려 더 이상 불가능한 과거를 오늘 그리워하는 악셀은 사랑하는 자신이 서있을 지대가 없어서 사라지는 것인지 모른다. <오슬로, 8월 31일>에서 사회에 놓일 수 없는 중독자, <라우더 댄 밤즈>에서 어디에도 소속할 수 없었던 이자벨 등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 변화한 오늘날에 발맞추어 따라갈 수 없는 존재는 사라진다. 태아도 그렇다.      


하지만 율리에는 과거에 사랑했던 자신이 아니라, 여전히 날이 밝아오며 변화하는 오늘의 자신을 긍정한다. 그녀는 여전히 현재에 남아있다. 그래서 사진작가가 되고 가정을 꾸리는 영화의 결말, 그것은 영영 멈춰있을 것 같지 않다. 다시 단발이 된 율리에의 머리칼은 자랄 것이요, 혼자가 된 율리에는 다시 둘을 바랄지도 모르며, 일순간 존재하고 사라지는 슬픔을 붙잡는 율리에는 이윽고 붙잡지 않는 존재로 변할지 모른다. 당장 사진을 정리하는 율리에에게서 카메라는 줌아웃으로 멀어지지 않은가. 지금의 율리에가 영속적이지 않다는 듯… 이렇게 영화는 사랑과 몸을 탐구한다. 그리고 이를 아주 현란한 연출로 보여준다. 트리에의 데뷔작 <리프라이즈>의 재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리드미컬하고 다채로운 프롤로그, 사랑에 빠진 사람의 의식을 보여준 마술적인 5장, 비논리적이고 불가능한 것들이 비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꿈과 환각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8장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렇게 다채로운 연출처럼 많은 가능성을 품은 변덕스러운 몸에 의해 정신도 절대적이지 않다. 또 정신과 몸이 서로 다른 방향을 띨 때가 있다. 12장에서 율리에는 악셀이 죽어감에 슬프지만, 태양은 뜨고 제 몸은 이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동시에 기쁘다. 또 그녀는 아이가 유산되자 심란해하면서도 언뜻 시원한 기분이다. 우리의 몸은 대상을 바라보지만, 이와 동시에 그 대상을 매개하는 내 몸과 눈을 함께 바라보기에 감정은 이타심과 이기심이 뒤섞여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후자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최악이 된다. 내 욕망을 사랑하는데 대상을 사랑한다고 착각하며, 나만을 사랑하는 욕망에 의해 시선이 인사불성이 되는 최악, 물론 우리의 몸은 언제나 환상을 추구하며 변화하니 최악을 가능이라 여기고 불가능한 최선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최악이 불가능으로 여겨지는 환상에 빠져 결국 사랑의 굴레에 휩싸인 인간은 끔찍할 수밖에 없으랴. 인간의 운명, 그 흉측하지만 달콤한 나르시시즘을 즐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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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2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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