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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Aug 31. 2022

미셸 프랑코, <썬다운>

일몰을 앞두었다면 볕을 회복하리

미셸 프랑코(Michel Franco), <썬다운>(Sundown) 

- 일몰을 앞두었다면 볕을 회복하리     

“그러니까 표면상으로는 어떠했든지 간에, 무죄나 정의를 위해 직업적 대활약을 펼칠 때보다 나는 사생활에서 오히려, 지금 이야기 한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을 때라도, 아니 특히 그런 때일수록 더 인간다웠던 셈이지요.” -알베르 카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뫼르소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와닿지 않는다. 어머니의 삶에서, 어머니가 살던 지역에서, 어머니가 향한 죽음이란 차원에서 뫼르소는 ‘이방인’이다. 그는 그곳에 소속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이방인인 그는 자신의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어머니의 죽음이란 곧 돌이킬 수 없는 일상, 거기로 나아가는 일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 나의 포기다. 누군가의 대체품, 원하지 않은 것도 그렇다고 원한다고 하기도 애매한 그 사이에 있는 것, 뫼르소는 나의 존재를 희뿌옇게 만드는 현기증을 이겨내고 선명한 상태로 나아간다. 그런 선명한 상태에서 뫼르소는 상중에 사랑을 나눴고, 휴가를 즐기다가 아랍인을 죽였다. 그는 이 진실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러나 뫼르소가 어머니의 세계에서 이방인이었듯, 그의 사건을 판결하는 배심원단 또한 ‘이상한 뫼르소의 표상’에서 이방인이다. 배심원단은 그가 아랍인을 죽인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백인들에게 아랍인 살해는 익히 이해할 수 있는 가능한 것, 소속의 요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장례 기간에 여행을 다니고 사랑을 나눴다는 것, 그것은 소속의 요건으로서 관습이나 윤리가 아니다. 이에 배심원단은 이방인 뫼르소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더는 소속할 수 없고 살 수 없음을 의미하는 '사형'을 선고한다. 하지만 뫼르소는 이에 항소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모름지기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곧 진실이므로, 내가 이방인으로서 세계에 타협하기보단, 타인이 이방인이 되어 내 세계에 초대받기를 바라므로, 그렇게 나의 인생을 생생히 느끼기를 바랄 뿐이므로. 이는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이를 서두에 언급한 이유는 미셸 프랑코의 신작 <썬다운>의 서사,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하지 않고 휴가를 즐기는 아들, 누명을 쓰는 등의 구성이 『이방인』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빌려오는 프랑코는 부르주아지의 휴가를 다룬다. 『이방인』에서 타자여야만 가능한 자유(혹은 방종)를 고찰함과 더불어, 멕시코 아카풀코로 휴가를 떠난 백인 부르주아 가족의 계급 및 인종 재생산을 포착한다. 이러한 진실은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기존이 붕괴하고 또 다른 영역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애매한 경계선인 '일몰'의 순간에 드러나며, 본 작업을 <크로닉>에서 협업한 팀 로스가 ‘일탈’을 연기하며 함께한다. 1979년 멕시코시티 태생의 미셸 프랑코는 자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활동하는 시네아스트다. 그의 근작 <뉴 오더>에서 숏의 짧고 빠른 잘림,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으로 연출 경향이 일련 변화하긴 했지만, 그 이전까지 미셸 프랑코의 연출은 매우 정적이었다. 고정된 카메라로 구현한 사진적이고 회화적인 프레임, 이에 따라 수동적으로 감상하고 추측할 수밖에 없는 구도, 적극적으로 파고들지 않는 카메라에 자욱한 침묵과 여백을 더하며 세태의 실상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이러한 연출로 프랑코는 현실 그 자체를 비춘다. 연출이 변모한 <뉴 오더>에서 조차 우려되는 디스토피아를 예측하고, 그 이유가 될 현재를 적확히 묘사한다. 묘사 이후 다시 과거로의 퇴보를 비추는 <뉴 오더>의 프랑코는 그의 개성인 정적인 연출로 복귀한다. 그의 연출이 흡사 죽음, 적막, 침묵, 부동에 상응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미셸 프랑코는 가족, 특히 역기능가정을 주로 다룬다. 영화 속 자욱한 침묵은 곧 친숙함과 익숙함으로 오해된 개개인 간의 단절, 무지에 상응한다. <애프터 루시아>에서 아버지에게 딸아이의 비밀은 영화 후반부에 겨우 폭로된다. 프랑코의 가정은 대체로 부모들이 이혼한 상태다. 그래서 <크로닉>처럼 서로는 유리되어 있고, 세상에서 가장 친숙해야 할 가족은 무지에 가득 차 있다. <에이프릴의 딸>처럼 가족이라는 이유로 허용해 주리라는 믿음 하에 욕망과 방임이 판을 친다. 보통 이러한 역기능가정은 과거의 부채 및 죄의식으로 인해 발생한다.      


<애프터 루시아>에서 아버지는 딸의 학교폭력을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가해자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한다. 하지만 복수가 해결책은 아니다. 이윽고 복수를 말할 수 없음에 비밀이 이어지고, 또 누군가의 복수가 아버지에게 칼날을 겨누며 역기능가정은 지속되리라. <크로닉>의 데이비드는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존엄사한 과거가 외상처럼 현재를 붙잡는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죄의식이 딸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직접 다가가서 얘기를 나눌 수 없다. 아들에 대한 죄의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내와는 이혼했다. 더욱이 데이비드는 호스피스로서 누군가의 대리인이다. 그의 뿔뿔이 흩어진 가정에도 대리인이 대신 자리할 것이고, 그가 방문하는 환자들도 데이비드가 그들 가족의 대리인이다. 그들 자체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결여되어, 궁여지책으로 틀어막아 둔다. 이에 가족은 회복되지 않고, 언제나 대리인이 되는 데이비드 자신도 복권될 수 없다. <에이프릴의 딸>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뒤틀린 욕망은 지난 시절의 과오, 부채 의식으로 추측된다. 딸에게 정성을 쏟지 못한 어머니는 당시의 과거를 바로잡고자 손녀를 납치하지만, 그것은 현재에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이자 강박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주체들이 현재를 직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과거의 어긋난 소환, 매개물, 대리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마주함에 오해가 증폭된다. 이에 프랑코의 작품은 비관적이다. 프랑코의 작품은 아주 불편한 부조리극의 경향을 띠는데, 일단 폭로된 진실이 부조리하다. <에이프릴의 딸>에서 드러난 괴기한 모성, <크로닉>에서 방치된 환자들의 삶, <뉴 오더>에서 진단한 멕시코의 풍경 등이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조리한 진실에 따라 현실은 집행되지 않는다. <애프터 루시아>의 침묵, <에이프릴의 딸>에서의 위선, <뉴 오더>에서 누명을 써서 체포되는 등 부조리에 부조리가 더해진 곳이 바로 이 세계다.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설 자리가 없다. <뉴 오더>나 <크로닉>에서 결말이 죽음이듯, <에이프릴의 딸>에서의 도망침이듯 말이다. 이러한 프랑코는 대체로 현재에 소환된 과거를 비추다가 <뉴 오더>에서는 과거가 소환된 미래로 향했다.      


그리고 프랑코는 다시 현재의 가족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이에 더해 전작 <뉴 오더>에서 멕시코의 실정을 다룬 사회성 또한 일련 남아있는 작품이 바로 <썬다운>이다.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의 화면비는 2.39:1로 매우 널따랗다. 본 화면비는 처음에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널따랗게 펼쳐진 휴양지의 광활함과 아름다움을 품어내는 데 활용한다. 하지만 단순히 호화로운 그들의 삶에만 상응하는 널찍한 화면비는 아니다. 이윽고 공간은 백인 부르주아만을 위한 휴양지에서 멕시코의 일반 시민들이 즐기는 칼레티야 해변으로 뒤바뀌고, 이 또한 널따란 화면비로 최대한 많이 품어낸다. 똑같은 해변이지만 다른 함의를 지닌 칼레티야 해변, 이후 교도소, 길거리로 공간이 옮겨감에 영화의 널따란 화면비는 공간 속의 개인, 부르주아의 휴가에서 볼 수 없었던 멕시코의 진실을 널리 담는 형식이 된다. 즉 화면비는 그대로 머물러있지만 담기는 공간에 따라 그 함의가 조금씩 변한다. 호사스러운 형식미로부터, 진실을 좌우로 빼곡히 담아내려는 널따란 형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다양한 공간으로 이동하지만, 한편 영화의 움직임 자체는 매우 더디다. 프랑코는 그의 개성인 정적인 카메라로 전면 회귀한다, <뉴 오더>로부터. 이는 휴양지, 호텔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부르주아지의 '고정'을 보여주는 형식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항시 머물러있고, 원주민 공연자, 노동자들이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술이나 고기를 들고 찾아온다. 휴양지에 몸이 달라붙어 고개만 까딱거리는 그들의 시야는 영화의 패닝처럼 매우 얄팍할 수밖에 없으리. 그래서 영화는 3차원적인 움직임은 거의 없고, 언제나 2차원적으로 움직인다. 또 평평하게 피상만 훑는 형식은 닐의 기이한 심리를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와도 상응한다. 닐의 이해하기 어려운 괴기하고 뒤틀린 감정을 그저 전달할 뿐, 그 무심한 얼굴 너머를 탐색하지 않는다. 상대의 감정과 속내는 영화라는 매체가 포착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감정의 근원으로 파고 들어갈 수 없을지언정, 외부로 드러나는 태도는 볼 수 있고 포착할 수 있다. 프랑코는 단지 영화의 시각성에 충실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카뮈의 『이방인』과도 맞물리지만, 프랑코는 <크로닉>이나 <에이프릴의 딸>에서도 단지 얼굴만 비출 뿐, 마음과 심리를 굳이 들춰내지 않았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움직임이 언제나 평면, 2차원, 수평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칼레티야 해변으로 옮긴 순간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관계는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계급과 계급, 인종과 인종, 민족과 민족, 즉 각 개념에 따른 선입견, 편견을 뛰어넘지 못함에 카메라는 여전히 무기력하게 피상만 전시할 뿐이었다. 하지만 닐이 교도소로 옮겨져 계급이나 인종에 따른 특권이 모두 말소되고, 휴양지에서 볼 수 없는 부랑자, 매춘부 등이 즐비한 결말의 길거리로 나아갔을 때, 카메라 워킹은 닐의 뒷모습을 깊숙하게 따라가는 수직적인 팔로우 숏으로 변한다. 흡사 그것이 피상적이고 얄팍한 개념을 뛰어넘은 세계, 삶의 진실이라는 듯이. 이렇게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움직임이 매우 더딘 작품이다 보니, 보통 공간 이동은 카메라가 온전히 뒤따라가지 않는다. 수동적이고 정적인 카메라 대신, 편집을 통해서 뻣뻣하고 투박하게 연속되는데, 이러한 편집에도 눈여겨볼 법하다. 영화 자체는 느린 편이지만 편집 자체는 성급한 편이다. 하나의 숏에 담기는 행위가 온전히 종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행동이나 사건이 미처 완결되기도 전에 조급하다는 듯 빠르게 잘라낸다. 휴양지에서도 마찬가지고, 닐이 베레니세와 데이트를 즐기며 몸을 섞을 때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들의 휴가는 휴가임에도 휴가가 아니다. 앨리스는 항시 손에서 핸드폰을 떨어트리지 않는다. 이름은 휴가이지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일상의 근무가 연장된다. 일상과 여행, 노동과 휴양 어느 하나 제대로 이어지지 않음을 언제나 거칠게 잘려 나가는 편집으로 보여준다. 또 이러한 편집은 인물의 기대나 예측을 비연속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배반한다. 숏의 이어짐은 유기적이지만은 않고 오히려 갑작스러워 전/후가 잘 맞물리지 않는다. 이러한 편집이 내용을 승화한 형식이라 여길 수 있으랴.      


예를 들어 휴양지에서 남매의 어머니가 사망할 것이라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닐이 머무는 호텔에 앨리스가 급습한달지, 이후 앨리스가 호르헤의 총격에 사망한다는 것도 매우 갑작스럽다. 이러한 열려있는 상태에서의 우연, 우발성에 의해 현실은 이전으로부터 항시 불연속적인데, 거칠고 투박하게 자르고 이어내는 편집은 과거에 상정한 계측이 현재로 온전히 이어지지 않는 현실의 특성을 구현하는 것이리. 또 이러한 편집은 항상 세습하고 보존하며 이를 현재·미래에 기투하는 부르주아적 특징에 반하는데, 앨리스에게선 어머니, 조카들에게는 앨리스라는 세습할 원형이 사라지며 부르주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으리. 한편 닐은 이를 바란다. 부르주아 가족의 인습과 양식이 자신에게 불연속적이길 바라므로. 영화는 편집뿐만 아니라 거리로도 탐구하는 소재를 가시화한다. 영화에서는 팀 로스, 샬롯 갱스부르라는 매우 유명한 배우들이 등장한다. 저명하고 인기 있는 배우이기에 감상자는 그들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실상 영화에서 그들의 초상을 제대로 직면할 기회는 드물다. 그 이유는 초반부에는 항상 이들을 롱숏으로 포착하기 때문이다. 롱숏으로 포착된 그들은 가만히 기다리고 멀리서 바라본다. 다이빙을 하는 사람도, 음식을 나르는 사람도 그들이 아니다. 이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라, 원주민과 노동자가 가져다준 것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한다. 노동 및 직접적인 행동에서 유리되어 있는 그들을 멀찌감치 떨어진 롱숏이나 풀숏으로 가시화하는 것일까. 멀리서 다이빙을 지켜보는 그들의 위치를 가시화하는가. 이윽고 본인들의 손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어머니의 부고 소식이 전해오고, 영화는 바스트숏으로 그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포착한다. 롱숏 속 그들은 멀리서 포착되어 감정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움직임도 역동적이지 않아서 부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까워진 카메라로 포착된 그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맺히고, 여권을 챙겨오지 못한 닐에게 앨리스는 신경질을 부리는 등 '인간적'으로 보인다.      


이후 앨리스와 조카들이 먼저 떠나고 홀로 남은 닐의 얼굴을, 프랑코는 바스트숏보다 더 가까운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계급, 가족으로부터 비로소 나 자신을 회복했다는 듯이, 이후 베레니세와 섹스를 나눌 때도 클로즈업으로 포착했다가, 앨리스가 급습한 순간이나 조카들이 찾아온 순간에 다시 멀어진다. 영화의 거리감은 자신이 직접 행동하거나 성취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소유, 타인의 노동력에 의존할 뿐인 부르주아 삶의 소외랄지, 계급·가족에 의한 멀어진 주체성 등을 보여주는 형식이라 할법하다. 그리고 배우에 대해서 조금만 더 첨언하자면, 앨리스와 닐이 남매인 것이 드러나기 전에 감상자는 아마도 이 둘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다. 부모·자식이 있는 일반적인 도식 내지는 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은 남매다. 그렇게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반적인 남매로 보이진 않는다. 앨리스는 닐이 조카를 돌보고 사랑해줄 것을, 휴가에 동행할 것을, 집에 돌아가서 이전처럼 자신들과 지낼 것을 부탁한다. 닐이 상속을 포기하고 오직 연금 형태의 월급을 선택한 순간에도 앨리스는 가족과의 연락을 조건으로 덧붙인다. 앨리스는 닐에게 흡사 아이 친부의 역할, 또는 기업을 관장하는 자신 대신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부여하듯 보인다. 부부로 오인되는 남매, 남편 및 친부의 자리를 대체한 닐은 부르주아지의 근친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스스로를 우월하다 여기는 본인들만의 폐쇄적인 원리에 갇히는, '합스부르크'적인 성격을 말이다. 앨리스는 조카들에 대한 책임이 없고 가업에도 미련이 없는 닐을 과하게 집착하지만, 닐은 이러한 인습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외에 영화는 멕시코 감독들에게서 반복되는 수위 높은 폭력성이 특징이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 사망한 앨리스의 적나라한 주검, 해변에 갑자기 울려 퍼지는 총격 등 아마트 에스칼란테, 카를로스 레이가다스 등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폭력성을 이어간다. 이는 멕시코의 불안정한 치안, 활개 치는 카르텔, 이에 따른 일상이 되어버린 폭력성을 반영한 멕시코 감독들의 특징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프랑코는 지금까지 다뤄온 역기능 가정을 백인 부르주아를 통해서 탐구한다. 휴가가 권태로운 닐, 그 이유는 앨리스의 부탁으로 휴가에 끌려왔기 때문이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했기에 마땅히 장례식을 치러야 하고, 이후 앨리스가 닐을 찾아 멕시코로 다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느냐며 따진다. 앨리스가 요구하는 의무나 감정은 닐에게 진심이 아니다. 런던에서 닐을 기다리는 앨리스는 그를 재촉한다. 그녀와 통화하는 닐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거짓말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싶지 않고 칩거하고 싶은 자신의 속마음 대신, 거짓말로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전전긍긍하는 태도로 둘러댄다, 단지 가족들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으려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식구에게 건넨 이후 돌아오는 것도 감정이나 진심은 아니다. 돈이고 서류다. 닐이 유산을 포기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하자마자 앨리스는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자리를 뜬다. 앨리스가 총격으로 사망한 이후, 호적상 가족이기에 닐은 사건과 무관함에도 도식적으로 의심당하며, 법과 제도는 도식이나 관행 너머의 실존을 파악하지 못한다. 남겨진 조카들과의 대화도 진심 어린 위로나 헤아림은 적다. 항상 변호사가 동석하여 대신 매개하는 자리, 조카들도 서류에 서명하고 재빨리 자리를 뜬다. 이렇게 프랑코가 <썬다운>에서 폭로하는 역기능 가정은 서로가 목적이자 수단이자 이익이 된 부르주아의 형식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다. <썬다운>의 가족은 자유로운 유대가 아니라 강제된 역할로 묶인 관료 체제다. 이러한 가족 내에 자신이 맡은 역할, 이를 대변하는 돈과 서류에서 닐은 멀어지고 싶다, 흡사 '여권'을 내팽개치듯. 서류, 계약서, 의무 등에 붙잡힌 자신, 그것을 가리키는 돈을 멀리하며 비로소 스스로의 감정을 회복한다. 그런데 진심 없는 부르주아의 형식적인 관계 및 진실을 파헤치지 않는 도식적인 제도 못지않게,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반사회적이고 원초적인 닐의 감정도 부조리하긴 매한가지다. 닐과 더불어 칼레티야 해변의 휴양객들과 원주민들의 비인간성, 타인에 대한 심드렁함을 마냥 긍정할 수 있는가. 그 끝은 결국 교도소, 죽음, 너절한 길거리가 아니던가. 동물로서 인간의 말초적 진실/소속을 위한 가식적인 거짓, 그 어디에도 인간이 바라는 인간다움은 없다. 카뮈의 원전처럼 프랑코는 인간의 가망 없음을 폭로하는 부조리극을 이어간다.     


본 가족을 계급론과 함께 탐구한다. 앨리스와 닐은 육류기업 재벌의 자녀들이다. 부유한 남매, 이들을 향해 멕시코의 하층민들은 아첨하고 좋은 것을 가져다주며, 다이빙을 보여준다. 부르주아는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을 위해 공연하는 가수가 자신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고 착각한다. 펼쳐진 세상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것만 같다. 이후 닐은 가족에게서 자신을 분리한다. 그리고 멕시코의 일반 군중들이 모여 있는 칼레티야 해변과 호텔로 향한다. 이전에 머물던 휴양지에 비한다면 너절하고 낙후되어 있지만, 인위적으로 가둬진 수영장의 물이 아니라, 항시 유동하고 움직이는 파도가 닐의 발을 간질인다. 그전까지 부르주아인 자신은 가만히 머물러있었고 모든 일은 노동자들이 대신 집행했다. 닐이 벗어나고 싶은 것은 이전의 뻣뻣함과 규정된 자신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이 아니었을까. 돈이 결정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결정하는 삶, 곧 실존 말이다. 가족들과 함께한 호텔에서 닐은 권태로웠고, 앨리스가 "와줘서 고마워"라고 말하듯 타인의 부탁에 따른 마음에 없는 여행이 영화의 도입부였다. 반면 칼레티야 해변에 놓인 그는 진정 자유롭다. 거기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특정한 민족성, 계급을 기대하지 않는 베레니세와 사랑을 나누며 본연의 자신을 회복한다. 칼레티야 해변에서 도덕, 윤리, 인습, 그 모든 것을 집어던진 닐은 앨리스와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 먹을래", 조카를 보러 가야 할 상황에서 "호텔로 가자"고 말하는 등 오직 자신만을 위한 말초적인 발화만 내뱉는다. 이렇게 변화한 이유, 닐이 머무는 칼레티야 해변에서 춤추는 사람들은 제 기분에 맞춰서 몸을 들썩인다. 또 백인 부르주아를 위한 휴양지에서는 멕시코 시민들의 실제 삶은 원천 봉쇄된다. 하지만 해변에서는 총을 든 군인들이 불길하게 경비를 서고, 또 평범한 서퍼처럼 보였던 이들이 해변을 급습하여 한 사람을 살해한다. 닐은 부르주아지를 위한 세계로부터, 그를 위하지 않는 죽음과 우연이 일반적인 진실한 세계, 곧 날것의 자연을 마주한다.      


백인, 부르주아 세계에서 계획이 불발된 것은 경악스러워야 하고,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비통한 것이다. 그러나 해변에서 죽음은 일반적이다. 전자가 인위적인 문명이요, 그곳에서는 마땅한 과정과 인과성이 일반적이다. 반면 후자는 작위의 끈이 아주 느슨한 자연이요 여기선 비유기적인 우발, 우연, 죽음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가 달아나고 싶던 민족과 계급에 따른 도식은 다시 찾아온다. 앨리스는 계속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르주아 가족의 일원이자, 어머니의 장례식을 집행하는 역할을 부여하려 한다. 또 택시 기사 호르헤나 호객행위를 하는 원주민들은 그가 백인이기에, 즉 부유할 거라 지레짐작해서 그의 주위를 계획적으로 맴돈다. 닐의 방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한다. (혹은 닐은 계급, 인종에 따른 형식적 관계에서 달아나고 싶어 하면서도, 앨리스의 전화에 짜증이 나자 원주민 매니저에게 당연하다는 듯 화풀이하며, 민족적 위계를 재생산하는 것일지 모른다) 닐에게 접근하던 호르헤는 그의 부유한 남매인 앨리스가 아카풀코를 떠나려 하자 그녀를 납치하려하다 끝끝내 살해하지 않던가. 즉 원주민이 백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 스페인어와 영어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그렇기에 진실한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인종과 계급, 민족에 따라 상대방을 가늠하여 목적과 수단으로 관계는 규정된다. 가족 내의 닐처럼, 원주민들도 계급이나 인종의 일반성으로 닐을 본다. 하류층은 서구와 백인의 종이요, 백인은 하류층이 물질적으로 전복해야 하는 범죄의 대상, 주검으로 전락한다. 프랑코는 <뉴 오더>에서 비판했던 극빈층의 속물성, 물질에의 집착, 아첨과 불법을 비판한다. 앨리스의 감정이나 반응이 인습에 따른 것이라면, 하류층들에겐 역으로 관행에 따라 감정이 없다,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죽음에 전율하지 않는다. 그리고 백인들은 휴가지에서 일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하여 약을 먹고, 전화가 안 되면 마땅히 걱정하는, 자본주의와 서구 문명 내에서의 관성적인 행동과 반응을 답습한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는 상징이 인상적이다. 가장 먼저 도입부에서부터 눈에 띄는 '물고기'다. 파도치는 소리와 갈매기의 지저귐이 들려오고, 인간에 의해 지상으로 건져져 숨을 헐떡거리는 물고기가 포착된다. 물 밖에 있는 닐은 죽어가는 물고기를 애잔하게 쳐다본다. 이윽고 수영장에 들어가 있는 조카들이 그를 부른다. 물고기는 물속에 머물고 있지 않은 닐, 있어야 할 곳에서 멀어진 닐을 보여주는 상징일까. 또 이후 시한부 판정을 받는 닐은 지상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것일까. 죽음의 징후를 느낀 닐은 덧없는 인습을 더는 따르지 않고, 죽음에도 유별나게 굴지 않은 것일까. 이후에도 물고기는 반복 포착된다. 닐이 거짓말로 앨리스와 통화한 이후, 바싹 구워진 물고기 요리를 포착한 숏으로 이어진다. 뼈와 살이 발라지고 있고, 접시에는 가시가 훤히 드러난다. 물고기에게 살과 생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취한다. 자신이 바라지 않은 가족, 계급, 인종에 의해 타인에게 먹히고 있는 닐(혹은 그 반대로 영위해온 닐)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렇게 물고기가 두 차례가량 포착된 이후에 상징은 뒤바뀐다. 바로 ‘살인’으로 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해변에서 살인이 발생하는데, 투명한 바다를 시뻘겋게 수놓는 피와 주검을 다들 무신경하게 쳐다본 이후 이어진 숏은 고기가 프라이팬 위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숏이다. 또 앨리스가 도로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이후, 시큼한 레몬즙이 뿌려진 굴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숏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죽음 이후, 우리의 혀를 심미적으로 감싸는 숏으로 이어지는 상징, 편집이 두 차례 등장한다. 닐은 도축으로 삶을 영위하면서도, 그간 제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따르는 대가를 몰랐던 것일까. 생굴이 포착되며 경찰에게 체포되기 이전, 베레니세와 함께 샤워를 나누던 그는 비로소 기쁨과 만족에 대한 대가를 직면하는 것일까. 그 이전에도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공항으로 향하던 그들은 휴양지의 찬란한 햇빛이 아니라, 나무들이 만들어낸 차갑고 어두운 그늘을 거치지 않았던가. 찬란한 생에는 다른 생의 죽음이란 어두운 대가가 따르고, 그것을 외면하던 부르주아는 기존 삶을 중단해야지만 그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 영화는 상징과 노골적인 편집으로 이를 보여준다.     


이후 교도소로 장소를 옮긴 이후에는 닐의 눈에 ‘돼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기업에서 도축될 돼지와 달리, 교도소에서 돼지는 다른 수감자들과 샤워하고, 또 풀려나서 해변을 질주하는 모습이 닐에게 착란처럼 등장한다. 해변을 돌아다니는 돼지가 포착되기 전에 팔의 피부 껍질을 벗기는 닐이 포착되었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과 가축을 착취하던 기존의 자신을 벗는다. 그 자신은 닐이 마음대로 통화조차 불가능한, 백인의 특권이 말소된 교도소이자 악한 인간의 실체가 드러나는 교도소, 즉 세계의 맨살 위에 놓여있다. 이후 결말에서 그가 뇌종양으로 죽어간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자기 삶을 위해 착취하던 돼지들이 그의 수감과 죽음으로 해방된다는 것을 예지하던 상징일까. 그리고 석방된 이후 베레니세와 나날을 보내다 이윽고 그녀 집으로 돌아오니, 적나라하게 도축된 돼지가 닐의 눈에만 보인다. 이후 그는 실신하여 쓰러지는데, 베레니세의 집에 놓인 돼지는 죽어가는 그 자신인가, 혹은 그를 위해서 희생될 그녀를 가리키는가. 닐은 결말에서 자신을 간병하는 베레니세를 제 침대에 누이고, 자신은 병원을 떠난다. 내 삶을 지탱하는 고기를 먹기 위해서 도축이 필연이라면, 내 삶을 중단하여 누군가가 죽는 희생을 막겠다는 듯이, 지금껏 장례식과 가족을 위한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던 닐은 베레니세를 '간병인'이란 역할로 고정하지 않기 위해서 그녀 곁을 떠난다. 맨 마지막으로 태양을 바라보는 숏과 현미경에 가까운 클로즈업이다. 초반부에 현미경으로 잘 알 수 없는 것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서 보는 숏이 포착되더니,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숏이 닐의 암세포를 밝혀낸다. 지금까지 언급한 상징 또한 부르주아를 비추는 롱숏이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포착되곤 하였는데, 흡사 가까이 다가가서 봐야 할 진실이라는 듯 말이다. 그리고 닐은 가족과 멀어진 이후, 해변에서 중천의 뜨거운 태양을 응시한다. 부르주아지의 폐쇄적인 세계에서 가식적인 나를 재생산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서 태양에 비친 뫼르소처럼 선명한 제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듯이, 태양처럼 타오르고 죽어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듯이, 그렇게 태양열에 비친 닐의 얼굴을 영화는 강조한다.     


영화 결말에 닐은 환자복을 벗고 길거리로 나간다. 칼레티야 해변과 교도소에서 그는 감정대로, 심지어 원초적으로 행동하는 본연의 인간을 회복하지 않았던가, 길거리도 마찬가지다. 너절하지만 진정 자유로운 노숙자가 있고, 쾌락에 솔직한 이들이 돈과 성을 교환하는 공간, 이에 가장 추하지만 인간을 드러냄에 있어 어떠한 가식도 없는 공간으로 닐은 사라진다. 이후 햇볕은 닐의 비어있는 안락의자와 테라스를 포착한다.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 필연인 진실을 오후가 밤으로 넘어가는 일몰에 밝힌다. 떠나며 우리는 진실을 회복한다. 당연하게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장례식에서 이탈하여 닐이라는 개인을 회복하고, 앨리스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에게 심드렁하던 제 자신을 중단하여 죄책감이란 감정을 잠시 회복한다. 한편 교도소 바깥으로 나오자 다시 죄책감은 중단되고 상황이 뒤바뀌어 호텔에 가고 싶은 닐이 돌아온다. 기존의 상황, 새로운 상황에도 부여되는 관습에서 떠날 때 우리는 ‘실존’이란 진실을 본다, 비록 흉측하더라도. 프랑코는 불연속적인 편집을 이용해 고정되어 평온하게 머무는 부르주아적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서 새어 나오는 역기능 가정의 실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부르주아적 삶의 양식, 백인들이 보지 못하는 멕시코의 진실을 까발린다. 그렇게 폭로된 가족·계급·인종을 위한 삶, 이에 의한 개인의 소외는 부르주아 계급의 특징인 모든 세습을 거부함으로써, 인종과 계급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개인 대 개인으로 베레니세를 바라보는 ‘사랑’으로 극복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한 연인의 도축과 희생을 막기 위해 닐은 삶을 포기한다. 기업과 가족을 위한 삶, 그 이후 나만을 위한 삶, 비로소 죽음과 맞닿을 때 나를 도축하여 상대를 살게 하는 이타적 사랑을 배우리니, 더 이상 성장을 써먹을 수 없을 때 성장하는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이니. 이렇게 프랑코는 기존 삶이 죽어가며 드러나는 가정과 사회의 진실을 형식으로 보여준다. 원전 『이방인』에다가, 기존 자기 작품에서 연속되는 역기능가정, 계급 및 민족적 탐구를 덧붙인다. 물론 그 묘사가 <뉴 오더>에 다소 의존적이지 않은지, 이를 위한 상징이 지나치게 노골적이진 않은지, 조금은 의구심이 들긴 하지만 파격성에만 안주하던 부조리극인 <에이프릴의 딸>에 비한다면 충분히 깊어진 작품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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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83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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