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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04. 2022

조나스 카피그나노, <키아라>

가족과 나, 지역과 나

조나스 카피그나노(Jonas Carpignano), <키아라>(A Chiara) 

- 가족과 나, 지역과 나     

“우리 모두는 외부 환경의 노예다.” -페르난두 페소아-

지중해를 끼고 있는 이탈리아의 남부 칼라브리아는 대표적인 난민의 환승구다.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정세 또한 매우 험악한 아프리카, 중동의 삶을 피해서 지중해로 떠난 난민들은 주로 이탈리아 남부에 도착한다. 하지만 칼라브리아는 난민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유럽이 아니다. 한때는 피렌체 르네상스 운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찬란한 문예를 꽃피우기도 했지만, 작금에는 북부에 비해 낙후된 남부 이탈리아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주 중 하나이며, 더욱이 마피아에 의한 정경유착, 부패가 매우 심각하다. 이민자들은 분명 그려본 노동에 참여할 ‘순’ 있다. 하지만 마피아 및 그들과 결탁한 부르주아에게 고용된 난민들은, 착취의 여파에서 도망치고자 자국을 등졌음에도 다시 착취당한다. 더욱이 2000년대 10% 정도에 그쳤던 칼라브리아의 실업률은, 2010년대에 이르러 20%가량으로 치솟았다. 이러한 실업률의 원인을 모두 난민의 탓으로 돌릴 수 없지만, 분노와 혐오의 가장 쉬운 타겟인 난민에게 실업률의 불만을 돌려 내지인들과 외지인들의 갈등도 심각하다. 이에 난민들은 범죄의 표적이 되거나, 더욱이 정부에서 난민들에게 책정된 예산을 마피아가 횡령하기도 하니, 이에 칼라브리아는 언제나 환상이 무너지는 실낙원, 오직 극소수를 위해 내지인, 외지인 모두를 쥐어짜는 공간이다. 이러한 칼라브리아의 지역성,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삶을 탐구하고, 이를 리얼리즘 영화로 승화하는 감독이 있다. 바로 1984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인 감독 조나스 카피그나노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로마의 교수였기에 이탈리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였지만, 그 지식은 언제나 칼라브리아를 영화화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본 <키아라>는 칼라브리아 연작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각각 첫 번째,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지중해>, <치암브라>와 단절되지 않는다.     


난민의 유럽 이주를 담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로 향한 아이바는 <치암브라>와 본 작품에 이어서 등장하고, <치암브라>의 주인공이었던 집시 소년 피오 또한 본 작품에서 다시 등장한다. 배역과 배우의 이름이 일치하는, 현실과 픽션이 구분되지 않는 비전문배우들의 생생한 표현과 현실 속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연작의 형태는 카피그나노가 지향하는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그의 영화의 테마는 언제나 디아스포라다. 그의 강렬한 데뷔작 <지중해>에서는 부르키나파소에서 알제리, 리비아의 험난한 사막을 거치고, 역병이 창궐하는 지중해를 넘어서 겨우겨우 로사르노에 도착한 난민의 처절한 삶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카피그나노는 그간의 영화에서 비추지 않거나 안일하게 접근하는 난민의 삶을 아주 상세히 탐색한다. 이는 리얼리즘과 장르성을 얼토당토않게 절충하여, 마냥 낙관적이고 대책 없는 희망을 제시하던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과 같은 장르물과 다른 것이다. 아이바는 혼란한 국가에 얽매이지 않는 경제적 자립과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하지만, 그렇게 힘겹게 도달한 이탈리아에서도 난민이라는 신분과 경제적 열악함은 자국에서처럼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루마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한 집시 공동체의 삶을 다룬 <치암브라>는 베네덱 플리고프의 <바람처럼>과 함께, 집시의 삶 그 자체에만 주목한 몇 안 되는 작품이다. <지중해>의 아이바가 떠나온 것이 자국이라면, <치암브라>의 집시들이 떠나온 것은 유랑하며 목축하는 전통적인 집시의 민족적 문화요 삶이다. 카피그나노는 <지중해>의 리얼리즘에, 과거를 그리워하는 환상과 유령을 가시화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더해, 과거와 현재를 떠도는 난민이 되어버린 집시의 디아스포라를 그려낸다. 이러한 그들은 착취당한다. <지중해>에서 아이바는 이탈리아의 대지주들에게 고용된다. 값싼 노동력이 장점이기에 내지인 노동자들의 자리를 그들이 차지한다. 이에 백인의 분노를 위해서도 착취된다. <치암브라>에서 집시 공동체는 마피아와 결탁한다. 전통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달리, 도시화된 삶과 어울리지 않는 집시들은 불법적인 일, 주변부의 일에 동원된다. 하지만 마피아들은 그들과 공모한 이후, 이들을 밀고하여 배신한다. 줄곧 아버지, 형제가 잡혀가지만, 가장 중심으로 꾸려지는 집시 공동체는 언제나 빈곤하다.      


이러한 두 작품의 정체성은 집단적이다. <지중해>에서 아이바는 난민 공동체나 자국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가족과 끈이 이어지고, 그들을 위해 노동과 인내는 불가항력적으로 착취당한다. <치암브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본인들을 아프리카인, 이탈리아인과 명백히 구분하는 집시 공동체는 여전히 대가족을 고수하고, 개인은 가족에 귀속된 구성원으로서 단체를 위한 삶을 산다. 아직 미성년인 피오는 가장들의 부재에 어려서부터 불법적인 노동에 동원된다. 그들의 구조는 절대적이고 폐쇄적이어서, 아이들은 교육·복지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줄곧 담배, 불법, 술에 노출된다. 집시로서 이들은 선대의 영향에 미래가 묶인다. 하지만 <지중해>의 결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도, 난민도 아닌 그저 '인간'으로서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이민자들이 펼친 무력 시위, <치암브라>에서 본인에 의해 함께 불법적인 과정에 동참한 동생을 보고 반성하며 성장하는 피오를 보며, 마냥 집단을 위해 희생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권리와 삶을 되찾을 것을 역설한다. 이를 풀어내는 그의 연출은 거칠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현실의 시간과 유사한 롱테이크를 결합하여 다르덴 형제와 유사한 느낌을 주곤 하는데, 이렇게 처절한 칼라브리아 연작 세 번째 작품인 <키아라>가 펼쳐진다. 카피그나노는 항상 칼라브리아와 그 안의 구성원들을 16mm 필름에 담아냈었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16mm 필름과 35mm 필름을 상호 교차해서 사용한다. 항상 필름을 선택하는 카피그나노는 필름의 매체성 중 낡고 쇠락한 느낌, 다소 조야하고 거친 질감에 주목한다. 물론 <지중해>의 시위 시퀀스, <치암브라>의 야경을 포착한 숏, 본 작품의 파티 시퀀스처럼 필름의 풍부한 색감을 폭죽, 불꽃놀이처럼 탁월하게 뽑아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카피그나노의 영화에서 색채는 제한된다. 어둡고 채도도 낮다, 폐쇄적이고 절망적인 공동체에서 선택이 제한된 인물들의 삶처럼. 그래서 필름 특유의 풍부한 색감은 활용되지 않고, 그보다는 필름의 불투명한 질감, 모호하고 혼탁한 느낌을 어둠과 결합하여 강조한다. 이러한 매체적 특성을 칼라브리아의 낙후된 경제성, 암담한 현실에 상응시킨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키아라 가족은 앞선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경제적으로 그리 낙후되어 있지 않다. 차량 테러 사건과 클라우디오 도주가 발생하기 전까지 분명 이들의 생활은 꽤나 윤택했다. 그렇다면 필름의 거칢은 또 다른 맥락과 유형에 상응하리.     


영화 초반 키아라 가족은 매우 화목하고 안락해보였다. 하지만 줄리아의 생일파티를 기점으로 어딘지 모를 꺼림칙함이 감상자와 키아라를 따라다닌다. 생일파티에 마피아로 추정되는 우락부락한 남성들이 참석했고, 또 아빠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수상하다. 매끄럽던 키아라의 의식은 서서히 불쾌하고 삐걱거리는 의심이 가득 차기 시작한다. 이러한 키아라의 의심에 필름의 매체성이 상응하는 것만 같다. 그녀의 시선에 상응하는 카메라, 가족들이 하는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어 모호하고 혼탁해진 키아라의 시야가 곧 필름의 질감으로 가시화된다. 이후 키아라는 아버지, 클라우디오의 진실을 알게 된다. 키아라는 남부럽지 않게 살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했지만, 이를 가능케 한 재산을 마피아인 아버지가 부정 축적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필름 특유의 거칠고 더러운 느낌은 불법으로 쌓아올려진 백인들의 칼라브리아를 보여주는 하나의 양식이라 생각한다. 이러나저러나 카피그나노의 칼라브리아는 어떤 인종을 포착하든, 그레인 자글거려 거칠고 아스라하며 희미한 필름을 피할 수 없다. 반강제된 노동과 자본에 누군가는 개인임이 지워지는 도시, 이러한 그들을 누군가는 불법적으로 착취하여 피 묻은 돈을 불려나가는 도시이기에 말이다. 이러한 필름으로 카피그나노는 본 <키아라>에서 칼라브리아의 백인을 포착한다. 이러한 백인의 얼굴을 조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개인으로서 백인, 다른 하나는 혈연, 지연으로 묶인 대가족 내의 백인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의 얼굴을 포착하는 방식에 따라서 영화의 연출도 뒤바뀐다. 영화는 분명 움직임이 잦긴 하다. 하지만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선 팔로우숏으로 얼굴을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각각의 얼굴을 담은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숏들을 컷으로 이어 붙이는 이동이 도드라진다. 흡사 식구들을 콜라주해서 가족을 구성하는 것 같고, 또 식구들 간의 시선이 다른 얼굴들로 옮겨감에 가족의 영향력을 반영하는 것만 같다. 즉 컷에 의한 이동은 수동적이다. 한편 키아라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바깥으로 나오거나 홀로 움직일 때, 영화는 컷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컷 대신 롱테이크, 짧은 카메라워킹이 아닌 더 길게 유지되는 달리 숏으로 그녀의 뒤를 밟아가며 팔로우숏을 이룬다.      


보통 무수한 얼굴들은 화목한 가족의 온상, 줄리아가 생일파티를 하는 호사스럽고 반짝거리는 조명 밑에서 포착되었다. 한편 이러한 공간에서 클라우디오는 마피아라는 진실, 키아라는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개인을 포착하는 달리 숏 롱테이크로 변환되었을 때 드러나고, 이러한 사실이 폭로되는 장은 아름답고 미적인 환경이 아니라 추접하고 너절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거리, 벙커, 어둠 속에서다. 또 전자의 연출은 흔들림에도 제법 안정적으로 느껴지지만, 후자의 연출은 핸드헬드가 심하다. 핸드헬드, 그것은 지금껏 믿어왔던 거짓이 추악한 진실로 뒤바뀌는 '흔들림', 거짓이 폭로되고 의심이 시작됨에 도주하는 클라우디오, 도주한 가장에 의한 풍파로 세차게 흔들리는 가정의 곤궁한 흔들림이랴. 또 각자의 핸드헬드를 닮아가는 식구들은 가족으로서 유사성 또한 보여준다. 물론 핸드헬드는 마냥 부정적인 심리에만 상응하지는 않는다. 카피그나노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남성 가장의 실종, 이에 의해 홀로 놓이게 된 여성 가정의 흔들림이 핸드헬드로 가시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핸드헬드는 자유로운 생동감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헬스장에 들려 러닝머신을 타는 키아라가 반복 포착된다. 분명 움직임은 경쾌하게 통통 튀지만, 이러한 그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가만히 정적으로 머물러있다. 운동 자체는 거칠더라도, 언제나 똑같이 일정하게 러닝머신을 타는 것은 고정되어 있다는 듯이, 한편 키아라가 법을 위반하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달아나고자 할 때는 핸드헬드가 동원된다. 핸드헬드는 어쩌면 끓어오르는 삶의 박동, 고정되지 않은 자유인 것이랴. 이렇게 핸드헬드로 통통 튀고 끓어오르며 표현되는 얼굴들은 보통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영화의 도입에서부터 러닝머신을 타는 키아라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포착되지 않았었나. 그 이후에도 식구들의 얼굴, 키아라 친구들의 얼굴은 모두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그리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가족, 백인 친구, 그리고 자신뿐이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꽉 찬 얼굴들의 발화는 항상 '당연'하다. 백인 친구들끼리 모이기로 한 장소에서 <치암브라>에서 등장한 집시 소녀 파타티나를 내쫓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이러한 집시를 백인이 규정하고 깎아내리는 것도 확고하다. 백인의 타성에 젖은 주장, 10대 소녀들의 관심사인 ‘외모’ 이외의 요인은 그 확고한 얼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한때 가족들의 얼굴도 내게 클로즈업으로 다가오며 안정감을 부여했다. 소파에서 서로 뒤엉켜 있는 부녀는 얼마나 안락하게 보이는가. 하지만 키아라에게서 클라우디오, 카밀라가 롱숏으로 멀어진다. 조명 아래서 포착되던 그들이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간다. 그렇게 클로즈업으로 내 시야를 가득 채우던 가족이 사라짐에 서서히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간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던 치암브라, 신경 써 본 적 없는 길거리의 노동자 아이바, 비밀통로로 추정되는 문 등이 말이다. 또 가족의 확고한 영향이 줄어들고, 제 자신의 의심이 커져만 감에 더욱 단단해지는 것은 스스로의 클로즈업이다. 영화 중후반부, 클라우디오를 만나게 된 키아라는 아버지의 제안이나 회유에도 굴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불붙은 의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 의지가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결연한 얼굴로 전달된다. 이러한 연출 외에 인상적인 형식으로는 아버지의 불길한 앞날을 감지한 키아라가, 조금이라도 그의 잔상을 더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슬로우 모션으로 승화한 것, 이후 더 이상 앞으로 걸을 수 없고 오직 뒤로만 걸을 수 있게 된 키아라를 포착한 되감기다. 기소되어 도망친 아버지와 그에 의한 삶의 그리움을 현재를 뒤로하고 영영 붙잡게 되리라는 듯이. 그래서 이후 키아라의 의식은 믿고 싶은 꿈과 믿기 싫은 현실이 교차된다. 가족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 본 작품의 도입에서 조르지아의 꾸밈없는 표현, 말, 장난을 보라. 아이들은 숨김이 없다. 솔직한 아이에게 키아라와 줄리아는 시달린다. 아이가 장난을 치면 그것을 고스란히 수용하는 식구들, 그래서 그들의 육신 또한 진솔하고 솔직해 보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비밀을 품고 있는 부모님은 클로즈업에서 롱숏으로 키아라의 곁에서 멀어진다.      


이렇게 모호해지는 것은 시각에만 그치지 않는다. 키아라는 카멜라, 줄리아, 사촌 안토니오에게 계속 질문한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키아라의 입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차 안에서 볼륨을 높이거나 아예 침묵하며 어떠한 의심, 진실도 새어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다른 장소에서는 시끄럽게 커피추출기를 틀어 키아라의 입을 봉쇄한다.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도 칠흑 같은 어둠에 뒤덮이지만, 키아라는 손전등을 들고 벙커 밑으로 내려가고, 안개 너머로 나아간다. 그렇게 빛을 비추며 침묵이 감추고 있는 시끄러움, 어둠이 감춘 불쾌와 마주한다. 식구들이 생일파티에서 과거의 사진을 보며 즐거워했던 것처럼, 과거에는 그랬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않은 거짓을 마주하며 호사를 누린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클라우디오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지만, 이와 동시에 가족끼리의 유사성도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생일파티에서 생일을 맞아 즐거운 줄리아를 위해 클라우디오와 키아라는 양보한다. 아버지와 여동생의 마음은 곧 줄리아의 마음과 일치한다. 한편 이렇게 일치되는 유사성이 곧 배려에만 상응하지는 않는다. 키아라는 클라우디오의 흔적을 찾는 와중에 마찬가지로 법에 불응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하는 등 그의 마피아인 아버지와 닮아간다. 아버지가 축적한 부정한 재산 덕분에 다닐 수 있었던 헬스장, 반복 포착된 헬스장의 러닝머신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는 움직임으로 아버지의 전철을 닮아갔는지 모른다. 부녀는 똑같이 전자담배를 피우고, 똑같은 구도의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또 이러한 유사성이 강제되는 수동적인 여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클라우디오 외의 다른 식구들은 전부 여자다. 학교에 가는 것 외에 여성들은 모두 집에만 놓여 클라우디오의 영향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클라우디오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하여 일궈낸 영향도, 부조리의 대가인 몰락도, 가장 남성에게 종속되어 수동적인 여성들은 저항할 수 없다. 가장에 의해 집시를 몰아낼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키아라는, 아버지의 몰락으로 학교나 광장에서 본인이 소외당하고 배태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장의 손아귀나 집에서만 지배되지 않는다. 칼라브리아라는 거대한 지역에도 소속하며 지역적 색채로 통제받는다. 키아라가 집시 무리에게 폭죽을 던지는 것은 차량 테러에 대응하여 복수하는 아버지를 답습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집시를 치암브라로 몰아내는 칼라브리아 백인의 관습을 따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카피그나노의 칼라브라아 사람들은 언제나 공간적·민족적 공동 존재다. 본 작품에서까지 여전히 노동자로 등장하는 <지중해>의 아이바, <치암브라>에서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머물러 있는 집시 가족들처럼, 이들에게 집단을 넘어서는 개인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키아라는 서서히 변화한다. 본 작품에서 유사성은 문자 그대로의 가족이나, 더 폭넓은 의미의 가족들이 가한 시선과 말이 일으킨 파동이 미치며 발생한다. 하지만 키아라는 나를 그들과 유사하게 만드는 외부 소음을 차단한다. 검문당하기에 앞서 키아라에게 '자연스러움'을 요구하는 안토니오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후 집에 돌아가서도 잠을 곤히 자는 다른 자매, 어머니와 달리, 키아라는 '수면'에 동참하지 않고 집을 나온다. 불법을 저지른 아버지에게 실망하면서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불법이란 전철을 똑같이 밟아가던 키아라는 가족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합법의 굴레 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를 닮았던 자신이 한때 거부했던 입양을 이젠 받아들인다. 물론 입양을 가도 여전히 가족의 그림자, 유사성의 그늘은 기억으로 따라다닌다. 하지만 키아라는 러닝머신 대신, 클로즈업에서 점점 더 멀리 사라져가는 롱숏으로 변해가는, 야외에서의 '달리기'를 한다. 키아라는 가족의 그림자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자신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감상자에게서도 달아나며, 서로는 유사성 대신 독립성을 쟁취한다. 이렇게 카피그나노는 칼라브리아 3부작의 끝에서 분리를 외친다. 한편 3부작의 끝은 다소 서글프다. 난민의 역할, 집시라는 민족, 가족과의 분리가 불가능했던 <지중해>의 아이바, <치암브라>의 피노는 여전히 본 작품에서도 일하고 가족들과 동행하며 이전 작과 똑같은 장소에 머무르지 않던가. 그들에게는 개인으로 분리하는 제도의 수혜가 불가능하지만, 이탈리아 백인인 키아라에게는 이러한 법의 세례가 머리맡으로 부어지고 있으니. 마피아, 불법, 남이탈리아로부터 북이탈리아로 분리되는 특권을 말이다. 그래서 카피그나노의 칼라브리아 3부작의 끝은 결코 온전한 희망이 아니다. 난민과 집시는 <지중해>, <치암브라>라는 지역과 함께 묶여서 불리지만, 백인은 <키아라>라는 개인의 이름을 특권적으로 가질 수 있기에, 그것은 아이바와 파타티나와 피오에게 불가능한 씁쓸한 뒷맛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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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904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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