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08. 2022

프랑수아 오종, <다 잘된 거야>

선택은 자신의 몫, 최후까지도

프랑수아 오종(Francois Ozon), <다 잘된 거야>(Everything Went Fine) 

- 선택은 자신의 몫, 최후까지도       

“사랑은 삶이 좀 더 편히 죽음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 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우리는 살다가 문득 ‘내가 죽는 상상’을 해본다. 이러한 상상에서 제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다른 유형의 불안이 더 위협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바로 내가 떠나간 이후 남겨진 타인들을 상상하는 무서움이다. 젊은 사람이라면 먼저 떠나가는 것에 대한 이유 없는 죄책감, 자손들이 있는 중장년층이라면 아직도 유약하게만 보이는 자신의 '씨앗들'을 남겨두고 간다는 미안함이 차오를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는 이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더라도, 나의 상실을 비통해하는 친지들이 남겨진 미래를 상상함에 우리는 떠나기가 문득 망설여진다. 하지만 떠나는 것은 숙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승에서 나의 죽음을 상대방에게 설득하고, 그들의 슬픔을 달래줘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편하고 그들도 마음을 놓으리라. 이러한 주제를 탐구한 영화들의 계보로 일단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를 꼽을 수 있다. 몸이 마비되어버린 안느를 두고 딸 에바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좌절하고, 남편 조르주는 어떻게든 아내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한다. 말할 수 없는 안느, 하지만 처절한 죽음 의지를 인간의 최초이자 최후의 언어인 몸부림으로 표현하고, 조르주가 이를 읽어냄에 비로소 서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책임에서 해방된다. 빌 어거스트의 <사일런트 하트>도 이러한 맥락의 작품이다. 예수의 탄생 축일인 크리스마스에 어머니 에스더는 가족들에게 자신의 시한부 판정과 안락사 결정을 담담히 고백한다. 탄생이 있다면 죽음도 언제나 필연적인 법, 그러나 언제나 아쉬움으로 가득한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는지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둔 작품이었다. 남겨두고 떠나가기 어렵지만 떠나야 하는, 무의미한 삶을 유지하기보단 내가 보존되어 있을 때, 그 삶 주체적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 안락사에 대한 논의, 프랑수아 오종은 이러한 죽음 직전과 안락사를 둘러싼 국면을 신작 <다 잘된 거야>에서 펼쳐낸다. 떠나고자 하는 아버지와 그 부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딸의 심리를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1967년 파리 태생의 프랑수아 오종은 꾸준하게 거의 매년 작품을 공개하는 정력적인 다작 감독, 이제는 중견 감독으로 접어든 프랑스의 대표적 시네아스트다. 그간 욕망의 시네아스트로 불린 오종이 죽음을 탐구하는 것은 그리 이색적이진 않다. 오종은 줄곧 죽음 그 자체,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탐구해왔기 때문이다. 오종은 인터뷰에서 죽음에 대해, '인생의 커다란 신비', ‘죽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죽음을 매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오종이 ‘특별하거나 의미 있는 일이 아닌, 평범한 순간들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죽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야 하는 당연한 것, 그럼으로써 떨쳐 버려야 할 두려움이다. 오종의 근작이자 죽음으로부터 유리된 것만 같은 청춘들이 주인공인 <썸머 85>에서까지 죽음이 등장하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죽어야 하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절대적인 보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 장례식이 주인공에게 새로운 정체성, 우정을 남긴다.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렇다. 그가 죽음을 전면 탐구한 첫 번째 작품인 <사랑의 추억>에서 주인공 마리는 남편 쟝의 죽음을 경험한다. 오종은 죽음을 외면하며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심리와 그러면서도 인정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야 하는 마리의 내면을 섬세하게 비춘다. 죽음은 이사, 새로운 취미와 연인을 불러오지만, 한편 묘지를 눈앞에서 마주하며, 그의 부인으로서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진실이 눈앞에 있음에도 고개를 휘젓는 것은 기존의 익숙한 자신, 정체성을 포기하기 어려운 변화가 두려운 나약한 인간의 태도다. 하지만 그런데도 마리는 남편의 망령이 아닌, 드넓은 모래사장으로,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죽은 연인은 곧 상대의 일부이던 나 또한 데려간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새로운 나를 불러온다. 마찬가지로 죽음을 전면 탐구한, <사랑의 추억>과 더불어 오종의 가장 진지한 작품인 <타임 투 리브>는 어떠한가. 젊은 나이에 시한부판정을 갑작스럽게 받은 로맹이 주변을 정리하는 작품, 죽음은 <썸머 85>에서도 <타임 투 리브>에서도 청년들에게도 언제나 닥쳐올 수 있는 것이기에 인간은 사진을 찍는다. 기록하고 보존한다. 죽어가는 자는 곧 시들어가는 꽃, 채우지 못하고 게워내는 도자기다.      


하지만 죽어가는 존재는 자꾸만 소년, 아기들을 바라본다. 자기 얼굴에서도 죽음과 무관해 보이던 유년기의 모습이 환각처럼 나타난다. 부패해가는 그는 씨앗을 남겨 아이를 갖지 못하는 가정에 새싹을, 자신의 유년 시절의 얼굴을 갖게 될 맹아를 돋운다. 그렇게 모든 여정을 끝마치고 기력이 쇠한 존재는 바다로 향한다. 오종에게 ‘바다’란 죽음으로, 무(無)로 되돌아감이지만, 이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으로 돌아오는 장소다. 마찬가지의 바다가 강조되는 <레퓨지>는 죽음 앞에서의 극단적인, 심지어 이기적인 삶을 향한 의지를 보여준다. 삶이란 똑같이 마약을 오남용해도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 나의 허기와 갈증을 '금단'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줄곧 채워 넣어야 하는 것, 각자가 바라는 목적지로 향함에 상대로부터 줄곧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불가능 대한 환상으로 더욱 배가 된다. 어두운 밤이 운명이라면 그 속에서 불을 켜며 극복하는 사람들이 도입부에서 나타난다. 이후 장례식이 땅 밑에의 파묻힘이라면, 삶은 바다에서 두둥실 유영하는 것, 임신을 할 수 없게 된 중년 여인은 입양하거나 임산부를 보고 즐거워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대신 조언하고, 이성애자 여성과 동성애자 남성은 지금껏 하지 못한 서로 간의 관계에 흥미를 느낀다. 어머니가 된 무스는 '어머니가 아닌 자신'에 이끌리는 반면, 아버지가 될 수 없는 게이 폴은 무스로부터 남겨진 루이스를 기꺼이 보듬는다. 숙명과 죽음에서 달아나고 더더욱 집착하는 삶, 생명을 낳는 임산부는 바닷가에서 강조된다. <레퓨지>에서 죽음은 숙명적인 속박이다. 마지막으로 <프란츠>에서도 화두는 죽음이다. <프란츠>에서 죽음은 곧 영화의 흑백에 상응한다. 전쟁이 앗아가 버린 색채는 플래시백이 비추는 과거, 동굴이라는 과거의 그늘을 통과했을 때, 그리고 결말에 간헐적으로 회복된다. 죽음은 살아생전의 비밀을 영영 가져간다. 이에 그것을 궁금한 유족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안나는 진실을 파헤치고자 그의 죽음을, 과거를, 수렁을 헤엄친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바라보며 삶을, 행복과 기쁨을 사랑한다. 그래서 거짓말한다. 어쩌면 색채는 거짓일지 모르지만, 삶은 애초에 죽음을 면피하기 위해 쌓여 올라가는 거짓말이 아닐까. 죽음은 삶을 애착하게, <레퓨지>처럼 최우선으로 삶을 사랑하는 우리는 <프란츠>에서처럼 삶을 위해 진리조차도 넘어선다.     


이러한 오종의 ‘죽음 영화’ 계보를 <다 잘된 거야>가 이어간다. 프랑스의 작가, 엠마뉘엘 베른하임의 원전을 옮겨오는 작품, 동시대에 새로이 급부상한 죽음의 화두인 안락사를 논의하며 말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밀접한 누군가의 죽음은 분명 나에게도 적지 않은 삶의 파문을 불러온다. 그것은 덧붙이기보단, 기존에 갖고 있던 것을 앗아가는 파문이다. 도입부, 죽음의 징후나 위기가 없던 엠마뉘엘은 자신의 서재에서 한적하게 글을 쓰고 있다. 고정되어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구도와 카메라로 그녀를 포착한다. 하지만 아버지 앙드레가 쓰러졌다는 위급한 소식이 들려온다. 이후 영화는 핸드헬드로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소설가인 엠마뉘엘, 하지만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에만 침잠할 수 없다. 이제 아버지 앙드레를 바라보기 위해 급변하는 외부에 뛰어들어야 하고, 또 아버지와 딸의 국면이 달라졌음에 카메라는 거칠게 흔들린다. 이리저리 회전하는 패닝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행한다. 색채가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의 이행, 또 안락사를 요청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여러 복도를 통과하는 엠마뉘엘이 여러 숏에 거쳐서 포착된다. 죽음을 고백하는 아버지에 의해 엠마뉘엘이 지금껏 지속해온 삶이 이전으로부터 분절되리라는 듯이, 어찌됐든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듯이. 그리고 죽음은 운동은 곧 하강이다.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엠마뉘엘이 하강하며 포착되듯 말이다. 죽음의 당사자는 앙드레인데 엠마뉘엘이 하강하는 것처럼, 죽음은 남겨진 자들도 끌어내리는가. 이러한 본 작품은 오종의 <사랑의 추억>이나 <신의 은총으로>처럼 리얼리틱한 축에 속하는 작품이다. 공간들은 크게 튀지 않는, 현실 속 평범한 색채를 띠고 있다. 하지만 오종은 일상적인 공간에 상징적인 색채를 물들여 자신의 의도를 강화한다. 일단 빨강이다. 에마뉘엘의 집의 가구 일부, 커튼, 그리고 죽어가고 죽음을 결심한 앙드레 앞에 선 손자 라파엘, 그와 마지막 식사를 하는 딸 엠마뉘엘이 입고 있는 의상의 색채가 빨강이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에서처럼 알모도바르의 영향으로 보이는 색채, 이는 앙드레가 엠마뉘엘에게 빨간 옷을 입은 것을 언급하며 더더욱 강조된다. 또 엠마뉘엘이 간병을 잠시 내려두고 전시회에 가서 감상한 작품도 피가 흘러내리는 듯한 회화다.     


인도-유럽권에서 빨강은 삶을 부여하는, 뜨거운 피와 같은 탁월한 색이다. 또 빨강은 물질에 상응한다. 죽음을 앞둔 앙드레와 달리, 비교적 최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딸과 손자는 아직 육체, 즉 물질로 남을 수 있기에 따뜻하다. 그들에게선 생명의 징후가 감돈다. 한편 엠마뉘엘은 전시회에서 빨간 회화를 보다가, 흡사 '백골'을 연상케 하는 하얀 회화를 본다. 빨강에서 하양으로 이어짐, 그것은 하나의 필연이라는 듯이, 하지만 물리적 상태의 백골에만 머물지 않는다. 죽음은 물질을 넘어선 초월이기도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앙드레를 진단하는 검사실, 안락사를 말하는 그의 병실에서는 파란색이 도드라진다. 파랑은 울적하기도 하지만, 낭만주의자 노발리스가 말하듯 '우리를 끌어당기는 최상의 것', 루마니아의 심리학자 스페타네스쿠-고안가가 말하듯 ‘평화롭고 고요한 색채, 꿈꾸는 색채’이다. 앙드레는 필연적으로 빨강이 하양이 될 수밖에 없는 죽음의 여정을 거부하지 않고, 그 이후의 파랑을 꿈꾸는 것일까. 그럼으로써 고약한 삶으로부터 평정을 찾고, 물질적 세계를 뛰어넘음으로써 무욕, 영적인 세계로 향하고 싶은 것이랴. 하지만 여전히 빨간 피를 애착하는 우리는 파랑으로의 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빨강의 여정, 그것은 곧 감각의 여정이다. 영화에서 빨간 존재인 자매는 파랑을 말하는 아버지를 못 견디겠다는 듯, 항상 문을 박차고 나간다. 오종은 삶과 죽음을 감각으로써 대비한다. 앙드레는 극의 후반에 “숨만 쉰다고 사는 게 아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 단락 위기가 지나간 앙드레는 단 맛이 아니라 ‘짠 맛’을 고르며 엠마뉘엘이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먹는다. 이후 회복한 앙드레는 제 선택에 따라 간식을 집어 먹고, 또 즐겨 가던 식당에서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 삶은 살과 피부가 느끼는 감각의 즐거움으로 지탱된다. 영화의 중반부, 엠마뉘엘이 앙드레의 염세적인 발화에 지긋지긋해져 약 3일가량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쌀쌀한 10월임에도 엠마뉘엘은 수영하며, 제 몸에 부딪히는 차디찬 날카로운 감각, 대지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며 즐거워한다. 앙드레의 미각, 엠마뉘엘의 촉각처럼 삶이란 감각하는 즐거움이다. 그냥 산 채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특정한 힘이 가해지고, 또 다른 감각이 뒤섞이는 것이다. 엠마뉘엘과 세르주의 사랑도 그들이 삶을 이어가야 할 하나의 이유, 즐거운 감각이다.     


본 작품에서는 엠마뉘엘이 세 번 정도 과거를 회고하는 플래시백이 침투된다. 그중에서 엠마뉘엘이 클로드에게 “왜 엄마는 색을 사용하지 않아요?”라고 질문하는 장면에 주목할법하다. 작품에 삶을 투영하는 클로드는 "회색도 색이고, 회색에는 수많은 색이 있다"라고 답한다. 회색은 하양과 검정이 그들 자체로 머물지 않고 서로 뒤섞인 색, 다양한 원색의 혼합이 최후의 검정으로 귀결되기 직전, 과정을 나타내는 색이다. 이러한 회색의 뒤섞임이 감각의 속성과 유사하지 않은가. 내 몸에 특정한 힘이 가해지며 발생하는 감각, 내 몸과 외부의 충격의 뒤섞임, 이러한 경험을 유지하고자 집착하는 삶… 우리는 그렇게 감각하며 즐거워한다. 앙드레가 쓰러져 내내 암울해하다가, 그가 어느 정도 회복되자 딸과 아버지는 농담으로 즐거워한다. 웃음조차도 타인과 뒤섞이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다. 상황이 현실과 부조화하여 발생하는 웃음이든, 나의 기대가 해소되어 발생하는 웃음이든, 현실에 뒤섞인 상황에서 불일치하거나 해소해야지만 웃음이 발생하기에, 감각은 필연적으로 현실, 힘, 타인에의 참여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이 좌절된다. 앙드레는 스스로 걸을 수 없고, 회복되기 전까지는 겔화된 음식물만 섭취 가능했다. 흐리멍덩한 불명확한 감각, 내가 바라지 않고 선택하지 않은 불쾌함이 앙드레를 좌절케 한다. 엠마뉘엘이 심란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길에서 그녀는 한 외국인에게 길을 알려준다. 그런데 과거에는 어린 그녀가 지도를 볼 수 없었고 어딘가로 향하는 차 안에서 멀미가 났으며, 대신 앙드레가 지도를 볼 수 있었고 어디론가 데려갔다. 그렇게 앙드레가 능동적으로 세계에서 목적지를 찾으며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제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용변 실수를 하는 것이 치욕스럽다. 그리고 딸들에게 위임장이 전가되며 주체적으로 세계에 참여할 수 없다. 그나마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지만, 더 이상 외부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앙드레는 라파엘의 연주회를 보고 떠나기 위해 안락사 일정을 미뤘다. 하지만 그렇게 참석한 연주회에서 외부의 청각과 앙드레의 귀, 몸은 뒤섞이지 못한다. 그대로 잠이 든다.      


이는 앙드레의 아내, 클로드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파킨슨병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눈치다. 또 조각가로서 그녀는 현재는 작품 활동을 멈췄다. 영화는 미완된 듯한 혹은 질료 상태의 조각으로 시선을 옮긴다. 질료가 조각되거나 회색을 띠려면 뒤섞여야 한다. 질료는 앙드레가 말하는 '숨만 쉬는 상태'라면, 조각은 비로소 '사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조각하기를 멈췄다. 스스로도 질료 상태에 멈췄는지 모른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외부와 뒤섞일 수 없음에, 내 몸에 감각을 자아낼 파장을 감당할 수 없음에 그들은 삶을 포기한다. 노인은 구토와 건망증으로 더 이상 무언가를 채울 수 없고, 재발 우려가 있는데 이를 극복할 수 없다. 삶이란 곧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엠마뉘엘에게도 죽음의 징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시력도 이전만큼 좋지 못해 시각의 즐거움은 어린 시절만 못하고, 또 체력도 젊은 날에 비하면 모자라 추운 날에 수영을 하니 바로 몸에 이상이 생긴다. 감각을 즐기기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지만, 고통에 따른 위험이 바로 닥쳐오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엠마뉘엘은 굴하지 않고 끝끝내 털어내며 극복하지만, 앙드레에겐 더 이상 그러할 힘이 없다. 앙드레의 좌절, 이는 과거와의 비교에서 발생한다. 쓰러지기 전만 하더라도 앙드레는 스스로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없었다. 또 직접 사람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타인에 의해 움직여지고 먹여지며 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방문해야 하는 수동적인 관계가 이어진다. 천성이 자유로운 인간, 이를 여전히 기억하는 정신을 변화한 육체가 배반한다. 그가 핸드폰을 스스로 누를 수 있게 되자 기뻐하는 것도 과거와의 일치, 클로드가 앙드레를 보고 외면하는 것도 사랑하던 그의 모습과의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엠마뉘엘이 앙드레의 부탁을 들어주기 어려운 것도 그녀의 과거에서 비롯한다. 그녀의 플래시백에서 어렸을 적 그녀가 아버지를 증오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현재에는 그렇지 않다. 중년의 그녀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부탁으로서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어린 날에 상상한 살인이 보인다.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다. 그렇게 보고 싶은 기억이 현재에 보이지 않고, 보기 싫은 기억이 현재에 보임에 이들의 삶은 방해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객관적인 '보기'를 강조한다. 영화의 도입부, 계단을 바쁘게 내려가던 엠마뉘엘이 갑자기 되돌아온다. 렌즈를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 렌즈 끼는 과정을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엠마뉘엘의 시력이 낮다는 정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흐릿한 것, 보기 싫은 것, 외면하고 싶은 것에 상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봐야만 한다, 죽음을. 이후에는 앙드레의 검진 결과 클로즈업, 검사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굉음을 커다랗게 강조한다. 또 엠마뉘엘은 거울을 보며 앙드레가 자신에게 부탁한 것을 따라한다. 그간 엠마뉘엘은 아버지의 부탁과 자살이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바다에서 만난 지인은 엠마뉘엘에게 '아버지의 부탁'을 들어주라고 말한다. 우리가 렌즈를 끼고 봐야 할 것은 상대, 거울에서 상대방을 따라 하면서 봐야 하는 것도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말한 것’이다. 안락사는 살인이 아니다. 엠마뉘엘이나 파스칼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앙드레가 엠마뉘엘의 도움으로 제도의 절차를 스스로 밟는 것, 자신이 약을 먹고 ‘자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 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은 없거나 가볍다. 안락사라는 선택의 몫은 앙드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다. 요양사에 의해 이동·조종되는 앙드레, 그의 삶은 병원, 딸들, 요양사들에 의해 객체로 전락함에 더 이상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안락사를 결정하고, 스위스에서 이를 상의하러 온 부인과 ‘독어’로 대화를 나눈다. 독어를 모르는 엠마뉘엘은 대화에 참여할 수 없다. 오직 앙드레와 여인, 둘이서 독어로 안락사를 상의하고,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주체적인 얘기를 함에 즐겁다. 또 엠마뉘엘에게 죽기 전날의 일정을 얘기하고, 연인 제라르나 주변 인물들에게 직접 작별 인사한다.      


나의 인생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는 죽음을 자신이 직접 결정하고 짊어지는 과정을 강조한다. 스위스에 도착하기 직전, 휴게소에서 요양사들에게 앙드레가 말을 잘못 꺼낸 모양이다. 요양사 중 한 명은 종교적 신념으로 그를 이송할 수 없다며 반발한다. 앙드레는 이 문제를 딸들에게 해결해달라고 연락하지 않는다. 딸들이 결정한 안락사가 아니라,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외에 스스로 공증하고, 묘지와 유언도 자신이 결정한다. 앙드레가 엠마뉘엘에게 처음 죽여달라고 부탁했을 당시, 앙드레의 목숨에 관한 결정을 도무지 타인인 엠마뉘엘이 내릴 수 없으니, 그녀는 자신의 ‘목적지’에 가지 못한 채 밤이고 낮이고 길거리를 떠돌았다. 타인의 삶에 대한 선택은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것, 그 여파를 자신이 감당할 수 없기에 까마득한 것이다. 또 앙드레를 사랑하는 제라르는 그를 위한답시고 안락사를 당국에 신고한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제라르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는 것은, 연인이 대신 감당해주지 못할 앙드레의 시름만 늘린다. 엠마뉘엘은 아버지의 이빨 자국이 남겨진 샌드위치를 보관했었다. 그가 다시 먹을 수도 있고, 또 그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붙잡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부패하고 썩는다. 그것을 붙잡으면 대상에게만 해롭다.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분리하여, 자신의 몫은 자신이 결정해야 하리. 앙드레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D-DAY가 다가오자, 오히려 더 즐거워한다. 인간은 타인의 노예 되는 것이 천성이 아니므로, 자유로운 것이 천성이므로, 이를 위해 때로는 스스로 죽음을 짊어져야 하므로. 그렇게 떠나가는 사람을 보며 우리는 왜 슬픈 것일까. 진정 대상을 헤아리며 슬픈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상대방과 함께할 수 없는 내가 슬픈 것일까. 딸들과 제라르가 느낀 앙드레에 대한 감정은 후자에 가깝다. 오히려 그를 사랑한다는 클로드는 앙드레가 제라르와 사랑하게 내버려 뒀고, 그의 최후까지도 개입하지 않는다. 상대를 위해 나의 욕망을 기꺼이 철회한다. 그것이 곧 진정한 사랑 아닐까. 본인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의 자유를 사랑해야 한다.      


영화 속 아침에 뇌졸중 소식이 들려오며 '시작'되고, 이후 새벽녘에 마무리된 앙드레의 여정,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밤을 겪고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 커튼을 열고, 샤워를 하며 몸에 묻은 것을 씻어내고, 침구를 정리하며 새로운 오늘을 맞이한다. 그렇게 어제 존재했던 상대방을 떠나가게 두고, 살아있는 사람은 새로운 오늘을 맞이해야 하리. 그것이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자유,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의 자유, 양자 모두가 공존하는 법이니. 영화 속 엠마뉘엘의 탄생을 기념하는 생일에 앙드레의 안락사와 관련한 서류, 즉 죽음이 공존하는 것처럼, 하루에 삶과 죽음이 한 쌍처럼 함께하는 것처럼. 이렇게 오종은 엠마뉘엘 베른하임의 원전을 영화화하며, 주체적인 죽음의 여정을 천천히 뒤따라간다. 죽음이 불현듯 다가온다면, 우리는 미처 결정하지 못한, 마치지 못한 생의 여지가 눈앞에 아른거리랴. 이는 남겨진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리. 그래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끝내야 할 모든 결정, 이에 따른 책임을 짊어질 수 있다. 그것이 곧 죽음과 그 이후조차도 내 것으로 만드는, 진정 자유로운 인간의 최후다. 한편 이를 바라보는, 남겨진 자들은 두렵다. 떠나가는 자와 내가 뒤섞여 만들어낸 조각, 그리고 회색을 더 이상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애달프다. 하지만 진정 자유로운 서로라면, 자유로이 끝마치고자 하는 삶의 여정을 존중해야 하리라. 우리는 떠나가는 사람과 뒤섞인 '내'가 아니라, 나와 분리된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 상대방은 파랑을 바라고, 나는 빨강을 바란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선택할 수 있는 죽음, 자유로운 죽음으로서 안락사를 고찰하는 오종, 하지만 상징적인 색을 제외한다면 <두 개의 사랑>이나 <썸머 85>에서 도드라진, 감독 특유의 개성 넘치는 연출은 거의 전무하다. 또 원전에만 집중한 나머지, 오종의 색채와 시선을 가늠하기 어렵다. 죽음의 시네아스트이기도 한 오종은 충분히 원전에 자신의 사유를 뒤섞을 수 있었을 텐데, 개성 넘치는 작가로서 오종에게 자신만의 색채가 다소 밋밋해진 아쉬움이 남는다. 

--------

감상일: 220908 광주극장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조나스 카피그나노, <키아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