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12. 2022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페트로프의 감기>

무관심과 무절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Kirill Serebrennikov), <페트로프의 감기>(Petrov's Flu) 

- 무관심과 무절제     

“우리는 무한한 시각 메시지를 접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대부분을 보지 못한다. 시각을 통해 알려지는 것 모두에게 일일이 반응을 보인다면, 아마도 삶은 전혀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변하고 말 것이다.” -루돌프 비트코버-

지난 2017년 봄, 필자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소련의 전설적인 감독으로 손꼽히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전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여섯 작품 중에서도 감독이 본격적으로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기 시작하는 <나의 친구, 이반 라프신>에서부터 작가로서의 색채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본 작품에선 누군가의 의식·일상을 그저 무심하게 옮겨놓은 듯 서사의 굴곡이 없는 내러티브의 희미함, 또 흑백과 컬러를 자유분방하게 오가는 매체성, 이미지 그 자체를 중시하는 태도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소련 당국의 탄압 이후,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스탈린 시기와 정치권력을 비판하는 <크리스탈리오프, 나의 차!>는 어떠한 이성과 합리성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비이성적이고 혼란스러운 양식을 스탈린 대숙청 시기에 빗댔다. 이 시기의 게르만은 롱테이크를 사용하여 잘려나가지 않은 하나의 숏 내에서 서로 상충되고 모순되는 갖가지 일들을 무차별적으로 발생하게 놔두었다. 영화 속 등장하는 사람들의 신분이나 지위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바로 다음 숏에서 이어질 행동조차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인물들의 심리는 충동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해할 수 없음', '지위와 능력을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들',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혼란한 앞날'이 스탈린 시대를 관통하는 가장 적절한 양식이다.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신분을 숨기는 자들과 무능력하게 아첨하는 자들, 지도자의 변덕스러운 정념에 좌우되던 소련의 풍경을 ‘불쾌’, ‘낯섦’이라는 감정에 주안점을 두어 풀어낸다. 이후 게르만은 완성까지 13년이 소요된 대작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유작으로 남기며 시네아스트로서 일대기를 마무리했으며, 유작에서도 폭군들의 암투와 그로테스크함, 이성적 신중함보다는 커다란 주먹에 좌우되었던 러시아 비이성의 역사를 역겹고도 고어하며 강렬한 이미지로 빗댄다. 그리고 본 두 작품이 게르만의 작품 중 가장 높게 평가되며, 이들 작품의 ‘무의식과 본성에서 비롯한 초현실적이고 혼란한 양식’이 그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게르만의 유산은 그의 아들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나,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의 <4>라는 작품에서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러시아 및 소련의 역사, 정치사의 비합리성과 혼란을 직격하는 양식으로 그의 스타일이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게르만의 롱테이크나 초현실성, 혼란함이 느껴지는 2021년의 신작이 있다. 바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페트로프의 감기>이다. 세레브렌니코프가 줄곧 비판해온 러시아는 게르만의 양식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 1969년 로스토프 온-돈 출생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연극 감독임과 동시에,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와 함께 동시대 러시아 영화를 선도하는 시네아스트다. 물리학 전공이라는 다소 이례적인 학위를 가진 그는, 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1994년 연극 감독으로 데뷔했고, 이후 2004년 <라긴>이라는 작품으로 장편 데뷔하였다. 현재에도 연극 감독을 겸하는 세레브렌니코프의 연출은 이 같은 이력에서 비롯하듯, 연극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숏의 분절이 비교적 적은 롱테이크가 특징이다. 또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기교적이고 격양된 편이다. 유일하게 2012년 작품인 <비트레이얼>에서만이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를 연상케 하는 차갑고도 건조한 연출로 선회하였다. 그의 작품 색채는 현 러시아 정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가 담긴, 정치성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플레잉 더 빅팀>에서는 범죄를 재현하는 과정을 통해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잦다는 것을, 또 러시아의 과격한 남성성에 의해 발생하는 범죄와 이로 인한 세대 간의 갈등을 포착하였다. 러시아의 마초성과 경찰의 무능력함, 부패를 은근하게 포착하며 이념, 구조를 비판하던 세레브렌니코프는 과거를 재현하는 영상이 이내 곧 현실화되는, 폐쇄적인 구조에 의해 부조리가 범람하고 재생산되는 러시아의 사회를 직격하였다. 그리고 2016년 작품 <스튜던트>에서는 허울뿐인 정교회에 의해 억압받는 러시아 사회와 개인의 자유, 심지어 교리 그 자체도 왜곡되어 가고 있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세레브렌니코프는 정교회의 자정능력과 자애로움, 정신성을 잃고, 오직 일신론의 전체주의만 남게 된 동시대 러시아를 예리하게 축약하였으며, 그럼에도 진실을 포기할 수 없는 결연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또 세레브렌니코프의 작품에서는 욕망이 강조되는데, <플레잉 더 빅팀>에서도 범죄의 원인을 욕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진단하고, <비트레이얼>에서도 합법적 관계, 결혼이라는 권태로운 기분을 극복하고자, 금기를 위반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욕망을 고찰하였다. <스튜던트>에서도 주인공 베냐의 신봉자 중 하나는 그를 성적으로 흠모하며 이는 정교회의 교리에 거부되는 금기다. 즉 세레브렌니코프는 <비트레이얼>에서처럼 부조리하고 흉측한데도 욕망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인간의 거부할 수 없는 불법적 본능을 영화의 주된 원동력으로 삼는다. 이러한 세레브렌니코프의 연출은 앞서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매우 혼란한 편이다. <비트레이얼>이나 <스튜던트>에서는 이러한 연출이 덜하긴 하지만, <플레잉 더 빅팀>의 경우 일관성 없는 심리에 의해 하나의 롱테이크에서도 한 사람의 태도가 무작위로 변하는, 변덕스러운 본능이 특징이다. 또 현실의 영역과 내면·무의식에 상응하는 만화의 차원, 값싼 비디오카메라로 기록하여 일련의 허구성을 강조하는 매체가 줄곧 교차되었는데, 궁극적으로 허구적 매체들이 현실을 침범해오며 뒤죽박죽 엉망으로 뒤섞인 현실을 구현한다. <비트레이얼>에서는 연출 자체는 이성적이지만, 우연적으로 엄습해오는 사고와 악천후, 주인공의 계획에서 벗어나고 배신당하는 상황들이 질서를 파괴한다. 그의 근작 <레토>에서도 1980년대 레닌그라드의 억압을 참을 수 없어 이상향으로 줄곧 도피하는, 암담한 현실과 끓어오르는 청춘들이 바라는 자유의 환상이 마구잡이로 혼란하게 엉켜있다. 그리고 본 신작에서 세레브렌니코프는 바로 이러한 무질서함, <레토>에서 가시화되었던 개개인의 내면과 심리, 무의식을 더 산발적으로 가시화하여 현실과 교차하는 연출을 선보인다. 세레브렌니코프는 이를 롱테이크로 선보인다. 일반적으로 숏이 잘리면 차원, 공간, 자신/타자 등이 분리되거나 나뉜 것으로 수용한다. 본 작품에서도 분명 자르고 이어붙이는 편집은 존재하나, 이보다 훨씬 강렬하고 보편적인 형식은 롱테이크다. 잘리지 않은 하나의 롱테이크 안에 꿈과 현실, 객관과 표상 등이 한데 어우러진다. 이로써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초현실적인 형식을 구축한다. 감기에 의해 환각과 환청을 곧 현실이라 착오하는 의식, 심지어 환각과 환청이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이 꿈으로 뒤바뀌는 어지러움을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시각적으로는 롱테이크가 환각을 가시화한다면, 청각적으로는 외부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이로써 환청만 듣게 되는 자기폐쇄적인 진공 효과를 통해 감상자가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히게 되는 영화 속 감기를 체험하게 해준다. 대체로 롱테이크가 대두되긴 하지만 그런데도 편집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영화 초반부 상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페트로프를 분절한 숏이다. 점프컷 형태로 숏이 잘려나감으로써 페트로프 바깥에서 줄곧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페트로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대로다. 그는 외부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내부에만 침잠하는가. 본 작품의 시간은 흡사 홍상수의 <북촌방향>처럼, 라울 루이즈의 <되찾은 시간>처럼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영화 중반부에서 페트로프의 친구, 세르게이가 원고를 제출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제출하고 뒤돌아서 나가는 과정은 불과 몇 초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영화는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이 흘렀다. 흡사 ‘감상자의 시간’과 영화 속 인물들의 ‘표상의 시간’은 다르다는 듯이, 후술하겠지만 현실의 시간과 다른 ‘가상적 매체’의 시간에 따른다는 듯이 말이다. 외에 영화의 연출은 색감이 인상적이다. 세레브렌니코프의 초기작, <플레잉 더 빅팀>에서도 사용된 창백한 백색광과 흉한 녹색광을 이용하여 소련 해체 직후 부패와 병적인 징후가 끊이지 않던 괴괴하고도 차가운 풍경을 가시화한다. 인물들이 허황한 환각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부정하고 싶은 암담한 도시의 황량함을 색감으로 표현한다. 또 <레토>에서처럼 촬영된 영상 위에 일러스트로 UFO 그림을 그린다. 외계에서 온 UFO처럼 영화와 다른, 이계의 만화라는 매체가 침입해온다. 이는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처럼 서로 독립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앞서 언급한 롱테이크처럼 하나에 중첩하여 공존한다. 현실과 초현실을 함께 살고, 영화와 만화가 겹쳐지는 이유, 그것을 바로 감기의 알레고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영화의 시대는 1999년 소련이 붕괴한 이후이며, 배경은 예카테린부르크다. 페트로프가 버스에 탑승한 도입부, 정신 산만하다는 것만 빼면 그다지 현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의 롱테이크에는 이내 곧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을 일벌백계해야한다고 버스 안 시민들이 불만을 토로한 이후, 페트로프가 버스에 내려 체포된 정치인들을 즉각 처형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음’은 인간의 꿈처럼 어떠한 개연도 인과도 논리도 없다. 본 이미지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일가가 시민들에게 처형당하는 ‘대중매체’에 보도된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하나의 롱테이크로 이어져 현실이라고 착각할 법도 하지만, 이내 곧 페트로프가 깨어남에 따라 상상임이 확인된다. 이후에도 이러한 양상은 줄곧 반복된다. 페트로프는 그의 부인 페트로바와 별거 중이다. 하지만 페트로바는 여전히 그를 흠모한다. 그와의 사랑을 상상하는 시퀀스가 ‘멜로 영화의 감미로운 문법’으로 그려진다. 또 도서관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폭행하는 소동이 발생한다. 페트로바는 그를 아주 노련하게 제압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슈퍼히어로 장르의 문법’으로, 페트로바가 말도 안 되는 초자연적 괴력으로 불한당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라드 주드의 <배드 럭 뱅잉>의 결말처럼 말이다. 이후 TV에서는 어느 한 남자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한 보도가 흘러나오고, 페트로바는 자신을 귀찮게 하는 아들을 목을 그어 살해하는 상상을 한다. 그것은 소름끼치는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연출된다. 즉 이러한 상상들은 순수하게 개인의 열망에서 우러나오거나 연출되지 않는다. 이들 모두는 소련 해체 이후 서구에서 유입된 포르노적인 대중매체의 욕망을 재현한 상상이다. 영화 내내 아들은 게임에 빠져있고, 페트로바나 페트로프도 TV를 틀어놓는 것이 일상이다. 이미지가 범람한다. 현실과 닮은 아주 그럴듯한 이미지,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듯, 진실도 현실도 아닌 이미지에 천착함에 현실에의 무관심이 발생한다. 닮은 이미지는 다만 그럴듯할 뿐, 현실에 대응물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있다고 생각하고, 상상을 서서히 현실에 이식한다. 아이는 게임을 하느라 바쁘고, 페트로바는 저녁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서로가 각자의 세계만 바라보고 있음에, 페트로바는 실수로 아들의 손가락을 경미하게 그었다. 그 폭력이 TV에 나온 살인사건, 범죄영화의 대응물이 될 가능성을 느꼈을까. 또 작품에서 사드를 언급하는 그녀는 대중매체에 만연하는 가학성을 현실에서 느끼고 싶었을까, 대중문화가 페트로바의 모성과 책임을 약화시키는가. 이내 곧 길거리에서 한 남자를 ‘묻지마 살인’하며 TV의 보도와 범죄 영화를 실현한다. 또 페트로프와 거칠게 정사를 나누며 인간을 습격하는 SF영화의 외계인을 실현한다.      


페트로바가 현실에 환각을 옮겨온다면, 페트로프는 더 자주 잠들고 깨어남을 반복한다. 친구 세르게이의 자살을 도와주고 깨어난 그, 또 아이의 감기가 극심해진 꿈에서 그는 깨어난다. 하지만 그가 깨어나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물증이 없다. 특히 아이의 감기와 관련한 꿈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풍경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공과 사 모두에서 열악한 인프라, 소련 붕괴 이후 되찾은 종교의 자유가 곧 UFO를 숭배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니 말이다. 페트로바는 환각을 현실로 만들고, 페트로프는 현실에서 깨어나 환각으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함을 만들어내는 감기는 어찌하여 발생했는가. 소련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러시아에서 살게 되었다. 영화 도입부,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소련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현실 같은 것은 더 오래 살아온 소련 시절이요, 허구처럼 낯설고 이질적인 것은 작금의 러시아다. 그래서 익숙하거나 바라는 것, 곧 과거나 대중매체로 현재를 대체하고 싶다. 소련 시절, 그들은 러시아 외 공화국들의 구성원과 이웃이기도 했지만, 한편 과거의 대중매체에는 여전히 유대인 혐오라는 좋은 '증오의 상'이 있다. 소련 붕괴 직후 경제적으로 끝도 없이 추락한 러시아를 이해할 수단이 러시아인들에게 필요하다. 러시아인들은 책임을 쉽게 전가할 수 있는 유대인 혐오와 제노포비아를 다시 불러온다. 러시아인의 일자리를 앗아간 것으로 여겨지는 이민자들은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버스 안에서 외국인들은 음모론의 대상, 또 사서로 일하는 페트로바는 성에서 다른 민족임이 암시되어 한 남성에게 조롱당한다. 또 개혁개방에 의해 전근대적인 풍습은 사라진다. 이에 따른 막연한 불만으로 한 노인은 여성 혐오발언, 그리고 외국에서는 여전히 조혼이 진행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급변하는 현실 속에서 ‘그리운 과거’나 ‘자기만족적인 대중매체’ 속에 살며, 원리주의를 팽창시킨다. 소련 시절 올림픽 메달을 땄었고, 또 이혼하지도 않았던 그 당시의 명예, 즐거움을 말이다. 하지만 현재에 과거를 덧씌우는 것이 곧 환각 아니겠는가. 미시적 삶에서도 페트로프는 힘겨울 때마다, 감기가 점점 더 심해질 때마다 유년시절을 회고한다. 그 당시에는 부모님이 먹을 것을 내어주었고, 옷도 입혀줬다. 자신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페트로프는 이교도, 종교, 민주주의를 논하는 장면에선 술을 마시며 유년 시절을 상상한다. 성인 페트로프의 얼굴은 그대로지만 키는 작아져 아이가 되고, 그는 종교나 크리스마스를 의심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축제를 즐긴다. 신비로운 눈 아가씨와 함께 말이다. 그는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거나, 이교도들을 더 수용해야 한다는 등의 사고, 민주주의 내의 성인으로서 무수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사고가 1999년에 낯설 것이다. 동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신비로움과 황홀경, 그것이 선전하는 ‘일원론’을 맹목적으로 찬미하던,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 좋았다. 그래서 점점 더 환각은 짙어지고, 감기는 심해진다. 경제체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로의 급격한 이행 또한, 더 많은 것을 선택·생각해야 하는 혼란을 낳았고, 이에 ‘주인의 낙타’와도 같았던 과거를 더더욱 열망한다. 의심 없이 주인이 제공한 신비에 매몰되면 그만이었던 시절, 그래서 이들에게 과거는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하지만 노인이 조혼을 말하는 와중, 그걸 듣는 소녀나 청년은 불쾌해하는 것처럼, 과거가 모두에게 동일하지 않다. 페트로프가 항상 도피하고 싶을 때 회고하는 과거는 부모님과의 식사, 그리고 어머니와 동행한 크리스마스 행사다. 그곳에서 만난 눈 아가씨, 마리나는 페트로프의 첫 사랑이다. 페트로프는 마리나에게 가깝고, 페트로바와 멀다. 영화 내내 별거 중인 부부는 각자의 세계에 머물며 교차편집으로 이어지고, 아들로 인해 잠시 함께 거주하게 됐음에도 페트로프가 어딜 돌아다녔는지, 페트로바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신경하다. 서로가 낯설고 멀다. 페트로프는 마리나가 그립다. 하지만 그는 진정 마리나와 가까운가, 과거의 마리나를 아는가. 페트로프가 유년 시절을 회고하는 양식은 컬러 홈비디오와 아주 좁다란 화면비다. 반면 마리나는 널따란 화면비와 흑백으로 똑같은 시간을 회고한다. 페트로프에겐 색채가 있었고 마리나에겐 없으며, 페트로프는 멀리서 좁게 봤지만 마리나는 가까이서 넓게 봤다. 페트로프의 컬러 회상에서 마리나는 신비의 대상, 크리스마스 축제는 마냥 즐거웠지만, 정작 당시의 마리나는 지갑 사정과 낙태 결정으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즉 마리나에게 과거는 감당하기 어려운 광대한 것, 자신의 색채를 앗아가 버린 곤혹스러운 흑백, 이로써 회고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페트로프는 대도시인 예카테린부르크, 한편 마리나는 인근 지방인 네브얀스크, 양자의 고향도 차이가 있다. 발전이 더딘 고향을 떠나 예카테린부르크에 머물고자 하는 마리나는 더더욱 고심이 깊다. 이렇게 하나의 과거를 두고도 마리나와 페트로프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현재에 모두가 똑같은 시대를 회고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은 무수한 환각이다. 이에 페트로프는 현재에 달콤한 과거를 그리워할지 몰라도, 마리나는 현재에 현재를 살고 있을지 모른다. 더욱이 현재에 따라 선택하는 과거도 다르다. 페트로프는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자 부모님과 불화가 있었던 과거가 오버랩되고, 현재는 흡사 이를 극복했다는 듯이 더는 회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현재에 살아도 어떤 과거로 향할지는, 회고를 할지 말지는 다 제각각이다. 또 기억은 왜곡된다. 마리나는 회고에서 때때로 남자들을 나체로 본다. 현실에서 그들은 분명 옷을 입고 있으나, 객관적으로 보지 않는 과거는 상상이 첨가될 여지가 다분하다. 그래서 마리나는 남자들을 나체로 볼 수 있다. 이에 하나의 과거는 시점에 따라 같지도 않거니와, 더욱이 주관적인 왜곡가능성이 있음에 더더욱 환각성은 짙어진다. 이들의 과거는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회고하는 것이니, 이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페트로프처럼 현실에서 나름의 만족을 찾는 수밖에 없다. 자살을 도와주라는 작가 친구 세르게이와 달리 여전히 만화작가임을 유지하는 페트로프, 그리고 불화가 있던 부모님과의 관계를 극복하여 지금 아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니, 더 이상 좋은 향수라 하더라도 환각할 필요가 없다. 과거로부터 현재의 급격한 변화, 이러한 새로운 현재가 마냥 과거에의 그리움만을 불러오진 않았다. 분명 현재의 러시아에 평탄하게 이식된 것도 있었으니, 사적 소유가 일반화됨에 따른 개인주의다.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공통감각, 철학자 가다머는 공통감각이 사교적 덕성, 겸손함, 존경, 절제라 본다. 개별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이타심, 도덕을 따르며 과도한 욕구와 체력 사용을 절제한다. 나만의 욕망을 제한하고 금욕한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도래로 더 이상 공통감각, 절제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모두는 각자의 개인적인 표상만을 바라보고, 나의 피부만 느낀다.      


영화는 매우 산만하다. 버스에서 누군가가 떠들어도 듣는 사람이 없다. 함께 얘기를 하더라도 청자는 없고 두 화자만 놓여 각자 얘기만 쏟아낸다. 집단적 독백이다. 이들은 듣지 않고 포용하지 않는다. 오직 보고 듣는 것은 개인의 욕망으로, 술과 마약, 향락적인 대중문화에 쪄들어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자기 폐쇄적인 상태가 이어진다. 이러한 개인주의가 영화 전반의 문제를 자아낸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겁탈·다툼이 지성의 보고인 도서관에 만연하다. 자신만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직업에도 충실하지 않다. 가다머는 헤겔로부터 노동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배려하고, 사적인 이해, 개인적 욕구의 직접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고 말했다. 직업, 노동은 사적인 목적이 아닌 공적인 과제에 헌신하니, 이로써 자신 바깥에서 자신을 수립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하지만 왜곡된 개인주의에 의해 노동으로부터 생겨나야할 책임과 절제는 무절제로 뒤바뀐다. 버스안내원과 운전사는 개개인의 충동에 따라 버스를 세우고, 이 또한 버스에 탑승한 승객이 공공장소에서 도덕을 무시하고 제 자신의 감정만 중시한 결과다. 운구차를 모는 사람들은 자신이 태운 것이 주검인지 산자인지 확인하지 않고, 페트로프가 전화를 건 의료시설 또한 병자들을 방치한다. 노동의 방종, 한편 자본주의 이식 이후 지나친 노동에 의한 자기 소외도 발생한다. 페트로바가 도서관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더 이상 기력이 없다. 돌아온 가정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챙겨야할 체력이 조금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어머니인 자신을 포기하는 결과, 또 노동에 의해 소외된 자신의 욕망을 극단적인 사디즘으로 발현하는 결과를 낳는다. 노동의 지배로 박탈당한 나 자신은, 내가 타인을 극단적으로 지배하는 욕망으로써만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무책임한 노동, 페트로프의 친구 세르게이는 언론사에 원고를 제출한다. 하지만 신문사는 출판, 술판을 벌이며 자신들의 역할을 망각한지 오래고, 그의 원고는 방치되어 있다가 거절 통보를 받는다. 등단하고 싶으면 문학성과 무관한 워크숍에 참여하라는 얘기를 듣는다. 더욱이 페트로프가 이를 상세하게 읽어보는 과정에서 편집장이 원고를 사실상 읽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이기적인 편집장의 표상에 세르게이의 표상은 끼어들 틈이 없다.      


이와 달리 페트로프는 그의 원고를 읽으며 상상한다. 하나의 테이크, 곧 표트로프의 표상 안에서 세르게이의 표상이 함께 공존한다. 그것이 곧 되찾아야할 이타심이랴. 하지만 세르게이의 동성애 이야기는 현실에서 깡그리 추방된다. 극단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소외된 개인을 되찾고자 하는 개인주의는 더더욱 극단적인 방종, 이기주의로 나아가며, 이러한 개인들은 다른 개인들의 자유나 지향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르게이는 자살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의 방아쇠를 페트로프가 당긴다. 그는 강요된 살인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렇게 진짜 개인은 사라진다. 모두가 이기적인 제 자신의 표상만 바라보며 상대방을 개인으로 존중하지 않고 욕망으로 치부한다. 감기에 걸린 제 자신이 파티장에 가고 싶은 마음을 최우선으로 함에, 감기는 더더욱 널리 퍼지게 되리. 그렇게 이기주의와 환각이라는 감기가 널리 퍼진 세계, 모든 것은 허상으로 대체되고 뒤집히고 있다. 영화 초반에도 감기에 걸린 페트로프를 암으로 생각하는 승객이 있었다. 또 눈에 띄게 아파보이는 페트로프를 몰아내고 자신의 아이를 앉히는 승객도 있었다. '감기에 걸린 페트로프'라는 외부의 객관은 안중에도 없이, 주관적인 내부가 만들어낸 ‘비켜나야 할 대상’, ‘암에 걸린 대상’으로 뒤바뀐다. 앞서 언급했듯 자살은 타살로 뒤바뀌고, TV에 보도되고 영화에 등장한 살인이 현실에 실현된다.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 궁핍한 현재에 아스피린조차 제대로 구하기가 힘들어 1970년대에 생산된 아스피린을 먹이며 현재와 과거가 뒤바뀌고, 제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로 산자는 망자로 치부되며, 또 마땅히 살아야 할 사람들은 개개인의 욕망에 의해 죽어간다. 남편의 불임이라는 진실보다 제 자신의 욕망을 중시한 어느 한 여인은 외간 남자와 사생아를 낳았고, 그 아이를 불임인 남편의 소생으로 덮어씌운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조차도 페트로프가 들어갔던 집이 곧 디오라마로 전락하며 진실은 허구로 뒤바뀐다. 이기적인 나는 진실을 도무지 알고 싶지 않다, 내가 믿고 싶은 대로 ‘장난감’처럼 믿는다. 하지만 망자로 치부되었던 산자는 관을 열고 운구차에서 뛰쳐나온다. 초조하게 도망친 망자는 버스에 탑승한다. 페트로프가 영화의 도입에서 올라탄 바로 그 버스, 페트로프의 망상 속 여인들이 아닌 현실의 늙은 눈 아가씨가 있는 버스다.      


물론 현실에서 시작한 영화가 환각에 젖어들었듯, 또 다시 산자는 망자가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감기를 멈추려는 시도를 중단해선 안 된다. 기억, 대중문화로부터 다시 현실로. 이렇게 세레브렌니코프는 알렉세이 게르만의 양식을 빌려와 소련 붕괴 직후의 혼란한 러시아를 포착한다. 영화의 롱테이크는 게르만의 것처럼 현실의 시간과 동화된 양식 속에서의 생생한 비현실성, 혼란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초현실성은 신비로운 것, 황홀한 것, 환상적인 것이 아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앙상한 1999년의 풍경은 충분히 겉으로 구현될 수 있으나, 그 시대를 살아간 개개인의 혼란스러운 내면과 의식은 가시화하기 어렵다. 소련과 러시아 사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 껴서 무정부주의적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감각을 말이다. 영화가 가시화하는 혼란함, 불쾌함이 바로 이러한 당대의 감각이다. 급격한 변화로 인해 사회 곳곳에 출몰했던 원리주의, 이로 인한 현재와 과거의 혼재, 급격한 개인주의의 이식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출현한 부조리를 감각 그 자체로 보여준다. 이는 마찬가지로 급격하게 이식된 서구의 대중문화가 빈곤하고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대체해가는 혼란도 포함한다. 여기에 세레브렌니코프 특유의 경쾌하고 풍자적이며 에너제틱한 연출을 뒤섞어 현실을 대체해가는 허황한 이미지, 대중문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어지러운 연출 속에서 감상자는 옮은 구분과 판단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깨어나는 것이 꿈일까 현실일까. 어쩌면 이는 1990년대의 러시아뿐만 아니라, 점점 더 꿈과 회고를 현실과 구분하기 어려운 오늘날에 던지는 경고이기도 하리. 그것이 1990년대를 2020년대에 불러낸 이유이랴. 물론 자명하고 평범한 마리나의 흑백 시퀀스에서 영화의 혼란함과 광기가 한풀 꺾인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소 길게도 느껴지는 본 시퀀스를 축소했더라면 페트로프와 마리나가 과거를 수용하는 관점이 다름과 동시에, 그녀에게 혼란했을 과거를 듬성듬성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평범함과 늘어진 시간이 지루한 현재이나 일상에 상응할 수 있으면서도)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지 않는 개개인의 자유를 초현실적인 구성, 특히 다채로운 매체로 보여주는 세레브렌니코프의 연출은 흡족하다. 

--------

감상일: 220912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수아 오종, <다 잘된 거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