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2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17. 2022

조아생 라포스, <더 레스트리스>

그래야만 하는 땅과 바다

조아생 라포스(Joachim Lafosse), <더 레스트리스>(The Restless) 

- 그래야만 하는 땅과 바다    

“지금 이 세계는 환상도 아니고, 밤에 꾸는 흉측한 꿈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에서 깨어나고, 그걸 잊을 수도 없으며, 없애버릴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끝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믿는 게 아직도 힘들다.” -존 맥스웰 쿳시-

우리에게 집은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공적 영역에서 우리는 쉴 수 없다. 공론화되는 영역은 특정한 행동 양식을 강요하고, 보고 듣고 논할 가치가 있는 것만 발화를 허용한다. 이에 반하는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들은 공적 영역에서 배태된다. 하지만 인간의 사소한 욕구나 욕망은 자유로서 중요하다. 그래서 충족되어야만 하는 사소한 즐거움, 장난, 휴식, 게으름 등의 작은 행복은 사적 영역에서 충족된다. 유의미함, 통계, 이성이 따져 묻지 않는, 인간다운 요인을 사적 영역이 보장한다. 그래서 공적 영역에서 나 자신이 소외당한다면, 사적 영역에서 나를 회복한다. 그러나 사적 영역인 집, 가정 또한 공적 영역으로 변할 때가 있다. 사적 영역에서조차 가면을 써야 하는 식구들은 휴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지나친 강박이 양극성 장애로 이어질지 모른다. ‘쉴 수 없음’, 그리고 ‘양극성 장애’를 조아생 라포스가 신작 <더 레스트리스>에서 탐구한다. 1975년 우클 태생의 조아생 라포스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오가며 활동하는 벨기에의 시네아스트다. 그가 언제나 카메라로 포착한 것은 '가족'이며, 그중에서도 '서서히 붕괴되고 까발려지는 식구들의 민낯'에 다가선다. 가족을 주로 탐구하기에, 그가 포착하는 공간은 언제나 '집'이다. 그가 포착하는 집에서는 여느 가정과 별다를 바 없이, <사유재산>에서 욕실을 아무렇지 않게 공유하는 엄마와 아들의 모습처럼, 식구들은 서로에게 엄격한 타인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스스럼없이 모두가 서로의 내밀한 속내를 공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체는 <아워 칠드런>에서처럼 여성이 남성에 의해 갇혀서 나갈 수 없는 집이랄지, <애프터 러브>에서 함께 살고 싶어 모이게 된 집에 서로의 국경을 긋고 출입할 수 있는 날짜를 계획하는 분리주의가 발생하는 집이다. 라포스의 집은 '거주'의 의미와 가족이 다 '함께' 지내는 본령을 상실한다. 개개인의 이기심이 투영된 공간으로 뒤바뀌어 <사유재산>에서처럼 누군가는 처분을 원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완강하게 저지하고, 또 처분이라는 마음은 일치하지만 조금이라도 제 몫을 더 쟁취하고자 치열한 다툼이 오간다.      


이렇게 집이 분열의 공간으로 변하는 이유는 실상 서로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워 칠드런>에서처럼 상대방의 표면만을 아는 상태에서는 찰싹 달라붙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달라붙으니 결혼 첫날부터 달아나고 싶은, 내가 미처 몰랐던 상대방의 비밀이 드러난다. 라포스는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상대방에 대해 잘 모르는, 식구들 간의 무지를 꼬집는다. 개인이 아닌 ‘어머니’, '아내', '형제'의 보편적인 이미지에 갇혀서 실재와 멀어지거나, <애프터 러브>에서처럼 저 자신들의 고통, 외로움밖에 모르는 형국이다. 영화 말미에 파국으로 치달은 부부가 다시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상대방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욕구처럼 보인다. 상대방을 편견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라포스는 편견적인 젠더, 계급도 탐구한다. <애프터 러브>를 제외한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젠더의 관점은 방종하고 무책임한 아버지·남성의 모습과 어떻게든 자녀 곁에 머물며 자신을 희생하는 어머니의 의무다. <사유재산>에서는 패륜적인 아들들의 모욕조차도 꾸역꾸역 참아내는 어머니 파스칼, <아워 칠드런>에서는 교사로서 자신 대신 어머니와 아내로 살아가다 수척해져 가는 뮤리엘이 등장한다. 그래서 라포스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곧 폭발할 것만 같은 신경질적인 모습, 얼굴에 핏기도 생기도 없는 창백한 얼굴로 그려진다. 반면 남성은 <사유재산>에서의 무능력한 아들처럼, <아워 칠드런>에서 무슬림 무니르가 권위적이지만 놈팡이인 것처럼, 성별이 남성이라는 이유로 불로소득을 거저 쟁취한다. 그들은 어머니가 치장하면 창녀라 모욕하거나, 자신이 분유해서 나눠 가져야 할 부부의 책무를 아내에게만 부여하는 그들은 그녀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지렁이다. 아들들의 모욕처럼 어머니는 육체를 대가로 집을 쟁취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들들은 어머니의 희생에 조금이라도 필적할만한 대가도 없이 집을 거저 상속받으려 한다. 라포스는 이 같은 성별의 불평등을 포착하며, 특히나 '의존적인 남성', ‘맹목적으로 권위를 얻는 남성’을 비판한다.      


<애프터 러브>에서는 이 같은 젠더의 격차는 줄어들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계급의 격차가 부부를 이별 국면에 빠트린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부모'이기에, 파격적인 결말로 접어든 <아워 칠드런>을 제외하곤, <사유재산>에서처럼 돌아와서 깨진 유리 조각을 치우거나, <애프터 러브>에서 나름의 합의에 도달하듯,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 같은 가족의 이야기를 라포스는 롱테이크에 담는다. 다 같이 한자리에 한 시간에 모여 있지만 서로의 뜻이 결코 같지 않은, 서서히 발생하는 균열과 해체, 이로 인한 신경질적인 긴장감, 북적거림을 담아낸다. 하나의 테이크에 욱여넣어진 식구들이 곧 가족의 형식화처럼 보이고, 그렇게 가족으로 묶여 각각의 숏으로 분절될 수 없는 딜레마와 균열, 충돌을 효과적으로 가시화한다. 본 작품에서도 이러한 연출은 유사하다. 영화 속 데미안과 레일라는 각각의 다른 사유로 양극성 장애에 치닫는다. 데미안은 현실 너머의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임과 동시에, 자신의 지배력으로 가정을 가꾸는 가장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계속 현실 너머의 추상적 세계로 향해 바라는 가정을 실현하는, 현실을 거부하는 양극성 장애를 앓는다. 한편 레일라는 현실에서 아내이자 어머니인 존재, 현실 너머의 예술품이 아니라 현실에서 필요한 가구를 만드는 존재다. 그래서 레일라는 아내, 어머니임이 위태로워지자 변화를 거부하고 기존의 자신을 단단히 고정하려는 양극성 장애가 짙어진다. 현실 너머를 본다는 점이 동일하더라도 각각 가상, 과거를 바라보는 이들은 롱테이크에서 갈라지고 균열이 잦다. 잘려지지 않고 하나로 이어지는 롱테이크라 할지라도, 각각의 프레임에는 데미안, 레일라 개개의 얼굴만 위치하지 함께 놓이는 장면이 참으로 드물다. 놓이다가도 어느 한쪽이 멀어지고 퇴장한다. 또 서로가 참여하는 시간은 같더라도, 각자가 속한 공간이 침실/작업실, 지상/바다로 나뉘어 숏은 분절된다. 이러한 나뉨이 데미안과 레일라의 양극성을 보여준다, 각각의 세계, 시간에 참여하는. 이에 따라 카메라도 변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레일라는 해변에서 잠들어있다. 그녀는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되고, 풀숏으로 비교적 가까이 포착되며, 귀뚜라미 소리가 시각을 장식한다.     


반면 데미안은 다르다. 처음에는 아민과 함께 클로즈업으로 포착됐지만, 이윽고 롱숏으로 뒤바뀌며 수영을 하겠다는 핑계로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져 간다. 수영하러 사라진 데미안을 걱정하며 살피는 레일라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절벽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녀는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항상 틸트, 패닝으로 그녀를 좇는다. 그러나 데미안은 언제나 카메라로부터 멀어지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레일라가 구상이라면, 데미안은 추상이다, 그들의 작업 경향처럼 말이다. 이렇게 각각의 양극에 따른 연출은 대비를 이루지만, 한편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공통된 연출 또한 존재한다. 바로 ‘색조’다. 지금까지 라포스는 촬영된 숏에 과한 조명을 쏘거나, 색조 작업을 하지 않아서, 감상자가 느끼기에 질감이 매우 건조하고 현실적이었다. <사유재산>이나 <아워 칠드런>에서 분명 이자벨 위페르, 제레미 레니에, 에밀리 드켄, 타히르 라힘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에 어떠한 이상성, 미화도 덧붙이지 않는 거칠고 건조한 색감이 특징이었다. 라포스의 작품에서 배우들은 현실의 평범한 인물로 전락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색감은 유별나게 차갑고 푸르며, 조명은 누런빛을 띠는, 이에 따라 인위적인 느낌을 풍기는 색조가 눈에 띈다. 파랑은 현실 너머를 상징하는 색채다. 동경과 이상의 색채, 물질이 아니라 정신을 상징하는 색채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정신성, 이상은 일반적으로는 긍정적이나, 본 작품에서만큼은 긍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정신성, 이상을 위해 과도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현실 너머의 탐미주의, 추상성에 계속 집착하는 데미안, 또 그가 치료되어 가는 와중에 여전히 어머니이자 아내임에 집착하는 레일라, 양자 모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너머의 자신과 세계를 고집한다. 이에 의한 차가운 파랑은 병적이다. 본 파랑은 어두워서 내부로 응축하는 색채이나, 여기에 결합하는 것은 바깥으로 발산하는 노란 조명이다. 밝고 뜨거운 노랑은 항상 외부로 자신을 노출하며, 이에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것으로 여겨져 '광인'의 색채로 불린다. 자신이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어떤 강박적 행위, 비현실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광인의 색채, 무한히 자신을 불태우는 태양의 색채로 말이다.   

   

바다에서 데미안은 아민에게 해변으로 돌아가라고 일러두고, 자신은 태양을 향해 헤엄쳐간다. 또 그가 작업할 때면 항상 노란 조명이 그의 작업실을 수놓았다. 그는 내부로 움츠러들거나, 기존과 절충하지 않고 언제나 바깥, 너머로 분출하고 나아간다, 노랑이 가리키는 바깥이란 현실 너머의 파랑이랴. 또 노랑과 파랑의 결합은 영화 속 여성과 남성을 대비하는 두 속성과 닮아있다. 바로 바다와 대지다. 영화는 파도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시작된다. 이후 잠든 레일라를 포착한다. 하지만 레일라는 잠들 수 없다. 왜냐하면 항상 철썩거리고 밀어내며 찾아오는 파도처럼, 데미안은 사라졌다가 다시 찾아오고 또 사라지는 바다, 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왔다가 사라지는 데미안을 걱정함에 레일라는 눈을 붙일 수 없다. 데미안은 영화 내내 물의 유동적인 속성과 닮아있다. 요트 타는 것을 좋아하고, 바다로 가지 않더라도 수영장, 호수에 빠지곤 한다. 영화 결말에서도 그는 아민과 함께 호수에서 요트를 타려 했고, 약을 먹어 몸을 가눌 수 없는 순간에도 그는 욕조에 빠져 있었다. 그는 물처럼, 바다처럼, 파도처럼 항시 움직이고, 그것의 생명력처럼 무언가를 창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한편 그 파도가 충돌하고 맞부딪히며 변형시키는 대상, 물을 기다려주는 곳은 대지다. 파도 소리가 반복되며 철썩거리는 와중에 그 물살을 다 맞아주고 있던 대상이 바로 땅이었다. 대지는 쉽게 변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바다의 변덕을 참아준다. 마지막까지 데미안을 포기하지 않던 레일라처럼 말이다. 영화 속 지상에서 잠들어 있던 레일라, 데미안이 호수로 향하거나 물과 같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실로 향할 때도, 레일라는 대지처럼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 집, 침실에 놓여있다. 레일라는 그의 뮤즈다. 데미안은 레일라, 아민, 피에르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다. 가만히 멈춘 모델과 단단한 대지는 서로 일맥상통한다. 또 영화 중반부에 라포스는 사선으로 불안하게 뿌리를 내린 포도밭을 포착한다. 하지만 포도나무들은 흔들림 없이 안정적으로 서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나무의 뿌리를 단단히 붙잡고 놔주지 않는 대지의 의지다. 바다와 대지는 보완관계다. 바다에게 대지는 모델이자 쉬게 해주는 공간, 대지에게 바다는 변하게 해주고 충동과 우발, 즉흥을 경험시켜 주는 대상, 하지만 두 세계의 조화가 무너지며 양극으로 치닫는다.     


처음에는 데미안만 양극성 장애를 겪었다. 데미안은 화가다. 그는 추상과 표현주의를 결합한 회화를 그린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모사하지 않고, 줄곧 변형·이탈하며 그 너머의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이데아에 다가선다. 또 데미안은 가장이다. 그의 아들 아민에게 즐거운 추억과 경험을 남겨주려 하고, 또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들도 실망시키기 싫다. 그래서 가장으로서 데미안은 일을 벌인다. 그는 자신의 가정에 이미 있는 재료,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 과하게 식사를 차리고, 또 지금 없는 요트를 빌리며, 지상에서 호수나 수영장으로 아이들을 빠트리고, 구름을 향해 그네를 태운다. 그렇게 비일상적인 경험을 선사하며 거대한 지배력을 과시하는데, 데미안의 양극성 장애가 짙어진 상태에서 외출했을 때 그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집안에서는 가장의 말이 규칙이 될 수 있지만, 바깥은 그보다 선행하는 법이 있다. 라포스는 코로나 팬데믹을 반영한다. 그래서 외부 손님들이 찾아오거나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쓰며 방역 수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데미안은 밖에서도 마스크를 미착용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로 빵집에 들이닥쳐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긴다. 또 학교 앞에서 데미안은 자신이 머릿속에서 그리는 ‘친절한 학부모’, ‘다정한 아버지’라는 역할에 지나치게 몰입한다. 하지만 그 상은 그의 뇌리에서만 유효하고 현실에선 악취를 풍기는 광인이기에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불쾌를 안긴다. 그의 양극성 장애는 기존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만족하지도 않는다. 그가 현실을 더 아름답게 미화하는 것처럼, 살아 숨 쉬는 레일라와 피에르에게 포즈를 요구하며 아름다움을 대가로 정물화처럼 굳히는 것처럼, 현실을 어떻게든 변형시킨다. 문제는 데미안이 변형시키는 대상은 질료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가 요구하는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그의 양극성 장애는 시대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다시 찾거나, 새롭게 만들려는 강박 내지는 완벽주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았던 시대로의 회귀, 또 가장의 권위가 약화된 시대, 오히려 레일라가 더 성숙한 가장처럼 보이는 가정에서 '남성 가장'임을 되돌리려는 아집일 뿐이니. 영화 속 매혹적인 렌즈플레어, 그 둥근 경계에 데미안은 갇혀 있다. 그 안에서 데미안은 향기롭다고 여겨지더라도, 바깥에선 악취가 풀풀 풍긴다.      


레일라는 처음부터 양극성 장애를 겪지 않았다. 데미안의 양극성 장애는 그가 규정한 즉자로부터 비롯했다면, 레일라는 대자에 가까웠다. 최대한 데미안을 책임지려 하면서도, 도저히 그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이 정한 계획을 뒤바꾼다. 그녀는 밤이 되면 자고, 데미안과 아민에 의해 피가 거꾸로 솟을 때는 참지 않고 폭발하기도 한다. 그녀는 참여하는 현실의 우발성에 따른 자신의 변형에 융통성이 있다. 그러다가 데미안의 병이 치료되어 갈 때, 자신의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레일라도 양극성 장애의 징후를 보인다. 레일라는 데미안에게 작업은 가급적 하지 않는 객체를 주문한다. 더욱이 병자로서 객체 데미안을 지속한다면 레일라는 아내이자 어머니일 수 있다. 그리고 데미안은 서서히 회복해가며 의사의 소견 상으로도 건설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주체가 되어간다. 그런데 2년 동안 데미안의 양극성 장애에 지쳐있던 레일라는 그이 회복을 거부하듯이 보인다. 데미안이 과하게 변형하는 양극성 장애였다면, 레일라는 변화를 거부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양극성 장애에 가까워 보인다. 레일라는 아민을 데미안에게서 떼어놓고, 부자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불안해한다. 그녀는 데미안의 회복에 의해 지금까지의 어머니, 아내인 자신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또 데미안이 다시 악화되어서 바라지 않는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 싫은 것일까. 그렇게 양극성 장애에 치달은 부부는 실존을 거부한다. 즉자로서 자신, 객체로서 상대방을 바라는 이들은 독단적이다. 레일라가 잠을 청하는 밤에 자전거를 고치는 데미안, 그렇게 고쳐진 자전거는 누군가가 반드시 타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 집에 찾아온 아이들을 수영장에 던지고, 해먹으로 그네를 태워준다. 그런데 그네를 태워줄 때 아이들의 웃음은 불길하다. 웃음엔 울먹거림과 공포가 뒤섞여있다. 데미안에 의해 바라지 않은 상황에 아이들은 처한 것이다. 그가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대충 일을 벌여놓고 나가버려서, 뒷수습은 레일라가 다 해야 한다. 데미안의 독단으로 아이들, 레일라는 바라지 않는 자화상과 만난다.   

  

레일라에 의한 데미안도 마찬가지다. 상태가 호전된 데미안은 아민과 함께 있기 위해서 피에르의 집에 묵는다. 그런데 레일라가 들이닥친다. 데미안은 레일라에게 방해받지 않고자 문을 닫는다. ‘닫힌 문’, 문을 닫고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자신이 바라는 상태로 놓일 수 있다. 하지만 이튿날, ‘문을 열고’ 아민과 함께 요트를 타러 나가니 레일라가 저지한다. 바깥은 바라지 않는 우연, 즉흥이 산재한다. 이러한 양극성 장애의 원인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집’에 있다. 데미안에게 집은 작업실이 있고 가장으로서 관리해야 할 공간, 레일라 또한 흡사 직업으로서 어머니, 아내임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자 가구를 제작하는 공방이다. 그래서 이들은 집에서 자유롭고 유연하게 실존할 수 없이 노동을 반복한다. 즉 집은 그들의 특정 정체성, 부모 및 화가이자 목수임을 보장한다. 한편 집 밖을 나가면 이러한 정체성이 보장되지 않기에, 야외에서 이들의 행태는 타인의 눈에 광증, 강박증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독단적이지 않을 때, 상호 조화로울 때가 진정 아름답다. 휴식이 필요한 데미안이 레일라의 등에 의존하고, 외로운 레일라가 데미안의 등에 기대던 그 찰나가 황홀하다. 레일라 혼자 부르는 듀엣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는 그 혼자의 무의미함을 보고 있다. 현실에서 멀어지는 데미안이 아민의 눈에 낯설고 두려운 반면, 고지서를 어루만지고 현실에서 기능하는 가구만 제작하는 레일라는 아민에게 지겹고 비좁은 기분만 안겨준다. 세 식구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아민이 식탁의 ‘기능과 아름다움’, 부모의 두 속성 양자 모두로 조화로울 때 웃음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는 상호 실존할 때 아름답고 기능한다. 하지만 그것을 불발케 하는 즉자로서 가장·어머니, 예술가이자 목수라는 직업, 정체성,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액체와 같아야 하리. 상호주체성을 거부하고, 지나치게 변화하거나 과하게 변화를 거부할 때, 우리는 양극성 장애에 치닫는 법이니. 라포스에게 지나친 변화와 부동, 양자 모두의 이유는 젠더나 결혼 관습에 있다. 변화하는 시대 속 독선적인 가장, 보필하는 어머니 등의 자신이 한때 가졌던 것에 집착할 때, 더 나은 현실로 향할 우리의 행복한 실존은 불발하는 법이니, 우리는 단절과 고립을 멈추고 바라지 않는 대상과의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자처해야 한다. 

-----------

감상일: 220917 집에서(MUBI 스트리밍)

매거진의 이전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페트로프의 감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