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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24. 2022

나탈리에 알바레즈 미에센, <클라라 솔라>

불태워라! 혼자서 강인하게

나탈리에 알바레즈 미에센(Nathalie Alvarez Mesen), <클라라 솔라>(Clara Sola) 

- 불태워라! 혼자서 강인하게    

“평화나 사랑 같은 모든 단어들이, 분별 있고 긍정적인 모든 연설들이, 때 묻고 방탕해지고 품위를 잃어버리고서 진저리쳐지는 기계의 새된 소리를 내는구나.” -위스턴 휴 오든-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는 장애, 그러나 생명의 강인한 의지와 갈망은 이를 충분히 극복할 힘을 제공한다. 인간은 문제를 치료하거나, 다른 기관들을 고도로 성장해내어 장애를 극복한다. 인간의 의지는 장애를 뛰어넘으려 하지, 결코 처음부터 낙담하진 않는다. 어쩌면 장애 그 자체보다 더욱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장애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일지 모른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이를 치료하거나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방해하는 공작, 장애가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회의 아비투스(특정한 사회, 문화, 계급에 속한 구성원들의 행동 체계, 사고, 인지를 지칭하는 단어. 아비투스는 특정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는 무의식적으로 체화 및 내면화된다. 이후 아비투스는 하나의 습관처럼 무의식중에 발현된다. 아비투스는 개인의 생각조차 좌우하기에 아비투스는 특정 공동체 바깥의 사유조차 어렵게 만든다. 아비투스는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속한 공동체를 보여주며, 속하지 않은 공동체의 아비투스는 알아챌 수 없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진다.)에 의해 장애인들은 장애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스스로는 장애를 뿌리치고 대안의 자유를 펼칠 의지가 충분한데, 다른 장애물이 이를 가로막고 앗아가는 형국이기에. 그리고 장애가 아니라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하여도, 그것이 마냥 나의 것이 아니라면 행복하지 않다. 타인에 의해 도구화되어 착취당한달지, 그래서 그 재능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자유가 불발된 나는 좌절한다. 그래서 사람은 장애고, 재능이고 언제나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장애를 뿌리치기, 재능을 주체적으로 활용하기, 그것을 세상 그 어느 것보다 확실하고 솔직한 진실인 '성'으로 말이다. 1988년 코스타리카 태생의 스웨덴 감독인 나탈리에 알바레즈 미에센은 코스타리카로 향해서 본 세 가지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를 연출한다. 그녀의 <클라라 솔라>는 장편 데뷔작으로, 코스타리카에서 지냈던 유년기를 투영한다. 그녀는 나고 자랐던 환경이 남자 없이도 충분히 가부장적인 갑갑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회고한다. 지금까지 그녀는 무수한 단편을 연출해왔다. 그녀의 여러 단편에서 장편에서 펼쳐질 색채를 가늠해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단편 데뷔작인 <낫 블루>다. 본 작품은 '본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상대와 나의 거리감을 탐구한다. 남매로 추정되는 남, 여가 등장한다. 영화는 그들의 눈을 익스트림 클로즈업한다. 이윽고 서로를 본다, 아드리안이라는 남자는 여자의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낫 블루>에서 보는 것은 마냥 시각을 수용하는 행위가 아니다. 내가 상대방을, 보는 대상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행동이다. 이후 잡지에 나온 여러 모델의 눈을 잘라 자기 동공 위에 얹는 장면, 아드리안이 눈을 가리고 여자에게 인도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과연 우리는 스스로 보는가, 아니면 타인, 외부 가치체계에 의해 보는가. 그렇게 나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보기, 이는 그녀의 아드리안 집착으로 이어진다, 아드리안을 자신처럼 여기기. 그들은 최근에 상을 당한 모양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집착하고 죽음에 예민하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내 눈과 네 눈은 같지 않다. 이후 <필립>에서 이를 더 상세하게 탐구한다. 동생 필립은 형 세바스티안을 존경한다. 그의 모든 행위를 따라 한다. 하지만 형의 성 지향성이 동성애임을 확인한다. 자신과 다르다. 또 동네 아이들의 동성애 혐오를 견딜 수 있을까. 그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 다르다는 것, 버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같은 방향을 보지 않고 다른 방향을 보며 잔다. 나는 타인일 수 없고, 타인은 나일 수 없다. <아순더>에서는 나와 타인의 엇갈림을 더 첨예하게 탐구한다. 주인공 니나는 생일파티를 위해 오랜만에 친척 집에 방문한다. 거기서 사촌오빠 테오가 반겨준다. 테오와 니나는 어렸을 적부터 친밀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른들이 말하듯 많이 컸다. 몰래 술을 챙기고 밤에 외출한다, 변화했다. 특히 오늘의 니나는 테오를 흠모한다. 연인이 되기를, 하지만 테오에게 니나는 여전히 사촌 동생, 가족, 지켜야 할 규범이다. <아순더>는 나와 상대방의 서로 다른 마음, 성적 자유와 규범, 타자 존중의 딜레마를 고찰한다.

      

<레팅 고>에서는 이해에 대해 논한다. 주인공은 아기인 동생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엄마의 언어는 '혼자 내버려 두라'는 것, 이에 가장 쉬운 선택, 동생을 지하철에 저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인간은 어려운 이해 대신 손쉬운 이해에 유혹되며, 익히 할 수 있는 것이나 나쁜 선택에서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 이해란 익히 일반적이고 답습되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항상 이해는 더디다. 상대방이 드러내는 얼굴, 행동으로만은 심리를 파악하기 어렵고, 전혀 다른 언어는 내게 낯설고 불쾌감만 자극한다. 그래서 익히 이해하기 쉬운 선택, 나만을 위한 결정을 내리거나 '보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봐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다른 상대방, 낯설고 모호한 타자다. <클라라 솔라>는 이러한 나탈리에의 탐구, 특히 성적 규범, 과거의 역할에서 일탈하는 <아순더>,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장애물이 언급되는 <필립>을 코스타리카에서 확장한 작품이라 하겠다. 영화의 시작, 부모가 붙여준 이름 클라라, 그녀가 사물, 동물, 인간 등 대상의 속마음을 읽어내어 밝히는 ‘감춰진 이름’, 스스로가 지향하는 이름으로서 솔라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선명하지 않다. 아웃포커싱으로 그녀의 이목구비는 흐릿하게, 거의 지워지다시피 포착된다. 도입에서 클라라는 그녀와 끈끈한 우정으로 이어진 백마, 유카와 대화를 나눈다. 클라라는 그녀의 마음을 읽고, 또 그녀를 설득한다. 유카는 관광객 투어에 동원되는 말이다. 유카는 인간의 노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안 내키는 모양인지, 이를 애원하는 클라라의 얼굴을 아웃포커싱으로 흐릿하게 외면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후 아웃포커싱은 다시 한번 활용되는데, 프레시아가 클라라의 손을 촛불에 지지며 그녀의 주체성을 부정할 때 나타난다. 아웃포커싱은 바라지 않는 것의 외면, 주체성의 흐려짐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마냥 강요하지 않고 대화하며 유카의 마음을 헤아린다. 이윽고 클라라, 유카 서로의 얼굴이 선명해지고, 각각의 숏에 각자의 얼굴이 놓이며 분리되었던 서로는 하나의 숏에 함께 놓이며 서로 공존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카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을 이해하는 클라라의 곁에서 멀어져야만 한다. 클라라는 유카에게 투어에 가야 한다고 독촉하긴 했지만, 투어를 진행하는 중년 남자와 각각의 숏으로 분리된다. 유카를 인간의 노동에 동원하는 것이 클라라의 진의가 아님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그렇게 유카와 함께 있고 싶고, 백마를 배려하고 싶은 그녀에게서 말은 멀어진다. 이후 각자의 숏으로 멀어지고 클라라는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와보니 창문 너머로 마리아가 노래를 들으며 춤을 추고, 또 얼굴을 예쁘게 가꾸고 있다. 영화 내내 클라라는 마리아를 동경한다. 도입에서도 어린 마리아를 부러워하듯 쳐다본다. 현재 클라라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마리아의 자유분방한 삶의 태도, 제 몸을 스스로가 지배하며 꾸미는 주체적인 몸이다. 하지만 그 불가능은 그녀와 아예 분리되진 않는다. 유카를 투어에 데려가는 남자와 클라라가 아예 분리되고 멀어져 있었다면, 마리아가 포착되는 숏에 클라라는 뒤태와 어깨가 일부 노출되며 자신을 걸치고 있다. 온전하게 춤추고 노래하며 치장할 수 없지만, 그 꿈을 단념하진 않겠다는 듯, 마리아가 포착되는 프레임 중앙으로 더 깊숙하게 들어가겠다는 듯 말이다. 이렇게 영화의 도입에서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형식, 그리고 서사를 좌우하는 클라라의 욕망이 명시된다. 본 작품에서 하나의 숏에 여러 사람이 놓인다는 것은 곧 이해, 지향성을 의미한다. 유카와 클라라, 마리아를 동경하는 클라라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 다르면 각자의 숏에 놓여야 하고, 서로 이해하고 사랑할 시에만 하나의 숏에 공존해야 하는데, 서로의 다름을 좁히지 못했음에도 하나의 숏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클라라의 어머니 프레시아와의 관계다. 클라라는 서두에 장애를 언급한 것처럼 척추에 문제가 있다. 또 불치병 및 난치병을 치유하는 초자연적인 능력, 동식물 및 사물과 대화하는 영적인 능력이 있다. 그리고 조카 마리아를 동경하듯 세상에 자신이 예쁘게 보이고자 하는, 지향하는 여성상이 있다.      


그러나 프레시아는 클라라의 주체적인 열망과 재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으로 동일시, 도구화한다. 이에 척추를 수술하고 싶은 클라라의 열망은 이를 반대하는 프레시아의 독선으로, 클라라가 자유롭게 동식물과 소통 및 교감하는 능력은 선교와 헌금을 위한 종교적 도구화로, 클라라가 지향하는 자신의 어떤 상은 프레시아가 강요하는 성모 마리아의 상, 그리고 '코르셋'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클라라를 존중하지 않고 그녀의 숏에 침투하여 선교하고 자위를 방해하며, 또 클라라를 객체화하는 교인들은 그녀에게 질식할 것만 같은 불쾌감, 갑갑함을 자아낸다. 하나의 숏에 함께 놓이고 싶다면 이해해야 한다. 영화는 대체로 클로즈업이 잦다. 프레시아가 클라라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자신이 바라는 클라라를 덧씌워서 허구의 클라라를 바라보는 것은 지금까지 나탈리에가 단편들에서 밝혀낸 시선의 습관이다. 객관적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편향적인 판단 기준을 토대로 대상을 단정하는 것, 그러나 이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바라보는 작업이 곧 대상에게 밀착한 클로즈업이라 할 수 있다. 대상과 멀리 있으면, 이에 대상을 추측해야 한다면 상상의 여지가 많아진다. 나탈리에는 클로즈업 및 미디움숏으로 이를 차단하는 것이랴. 우리는 가까이서 클라라의 주체성, 때 묻기 이전의 자아를 본다. 한편 이러한 클로즈업은 갑갑하게도 느껴진다. 그것은 곧 자기에게로의 갇힘이 아닐까. 클라라는 약소한 자폐증이 있는 것으로 명시되고, 프레시아는 그녀의 자폐증을 극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내부로 파고들며 극심해지게 만든다. 그녀가 나고 자라난, 프레시아의 믿음대로라면 그리스도가 만들어놓은 형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게 강요하고, 이에 클라라는 외부로 나아가고 싶지만 점점 더 '프레시아가 규정해 놓은 자신'에게로 갇힌다. 그녀의 뒤틀린 척추는 이내 곧 장기를 건들기 시작한다. 외부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아, 척추가 곧 그녀의 얼굴만을 포착하는, 외부를 차단하는 갑갑한 클로즈업일까.      


이러한 클로즈업의 연속에서 때때로 롱숏이 동원된다. 그것은 서서히 클로즈업으로부터 외부로 눈을 뜰 때, 산티를 사랑할 때다. 롱숏이 아니더라도 나름의 여백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롱숏으로는 썩어가는 집에서 원치 않는 옷을 입는 클라라를 포착할 때, 산티아고와 호수에서 자유로이 잠수하고 속마음을 터놓는 대화를 나눌 때, 그리고 산티아고의 집에서 함께 놓인 두 남녀를 포착할 때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개별의 존재가 각각의 숏에 놓인 단절·분리와 달리, 두 다른 존재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구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숏, 그러나 여기서도 썩어 문드러지는 집에 앉아 수동적으로 꾸며지길 기다리는 클라라의 모습은 침울한 반면, 자연에서 나상의 상태로, 그리고 제 솔직한 감정을 지향하며 이동하는 모습을 롱숏으로 포착할 때는 해방감이 느껴진다. 여러 존재가 참여하는 거대한 세계는 이처럼 자유와 해방이 담보되어야 한다. 이러한 본 작품은 대체로 카메라 워킹이 잦은데, 한편 움직이는 대상이 아닌, 대상이 속한 거대한 세계를 포착하는 롱숏에서 카메라는 정지하고, 또 TV나 성모 마리아 조각을 포착할 때 카메라는 고정된다. 후자에 있어선 무생물을 포착할 때의 고정, 현재에 능동적으로 만들어가지 않고 과거에 만들어진 여성의 상이나 관념의 정지를 보여주는 연출이랴. 그리고 이에 좌우되지 않으려는 클라라의 뒷모습을 따라갈 때, 영화는 핸드헬드로 그녀를 포착한다. 핸드헬드는 다양한 함의를 지니리라. 클라라는 프레시아가 자신에게 강요하는 마리아상의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프레시아의 강요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TV에서 방영되는 남성을 위한 여성상에는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지향함에,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게 정지된 무생물들, 과거의 산물이 악귀처럼 들러붙어 있다. 즉 그녀의 발걸음은 불편한 척추 때문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고정과 스테디캠 사이의 핸드헬드일 수밖에 없으랴. 산티아고가 유카를 트럭에서 내리려고 하자, 말은 아주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는데 그때 핸드헬드가 말의 자유/인간의 아집의 충돌에 더 흔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또 더 단순하게 핸드헬드에 접근하여, 정적·회화적인 촬영과 핸드헬드를 비교하자면 흔들리는 카메라 워킹은 어찌 됐든 자유다. 강요되는 바를 무시하고 그녀가 산티아고에게, 강요된 클라라가 아닌 솔라를 지향할 때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영화에서는 클라라에 의해 두 차례의 지진이 발생하고, 그것은 클라라가 자유를 추구할 때 일어나는데, 이러한 지진의 흔들림과 핸드헬드는 닮아있다. 본 핸드헬드를 자아내는 작품의 배경은 자연이다. 수풀이 우거진 정글, 거기서 포착되는 벌레, 조류 등은 아주 자유롭게 비행하고 움직이며, 풀잎들 또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정글 속 자연물들은 멈춰있지 않고 계속 변화한다, 스스로가 지향하는 실존에 따라서. 그러나 클라라는 그럴 수 없다. 클라라도 물론 변화하고 싶다. 수술하고 싶고, 중세부터 이어져 온 성모의 상을 입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글에서 인간은 실존을 축소하는 편협하고 갑갑한 규율을 꾸역꾸역 만든다. 기독교 세계가 들어선다, 클라라의 마음이 향하는 데로 변화하는 실존 대신, 일신교의 일원론에 따른 보편성이 강요된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서구 사회의 전체주의적 지배, 그것을 가능케 한 기독교로 위시된 일신론의 해악을 '동일성의 원리'로 꼬집는다.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이 제시하는 하나의 형식에 강제하여 지배하는, 그래서 지배를 위해 필연적으로 기만 가득한 가상을 산출하여 이를 현실에 이식하는 원리다. 동일성의 원리는 타자의 개별성을 단절시키고, 보편의 동일성을 세뇌하여 지배하는 대상을 나와 똑같거나 유사한 ‘내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지배되는 대상인 자연, 타자, 주체는 지배자의 도구로 천편일률적인 획일화를 거치며 모든 특수성을 말소 당한다. 클라라의 초자연적인 능력도 기독교적인 판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할 테지만, 프레시아는 클라라의 능력을 그리스도가 일으키는 기독교적인 기적과 동일시하며 멋대로 단정한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기적이란 현실에 나타날 수 없는 사건을 통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폭발적 의지를 자극하며, 완전히 새로운 사명을 전해주고 이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프레시아는 클라라의 능력을 이용하여 교도들을 기적으로 인도하지만, 정작 클라라에게 기독교의 프레임 바깥으로 뛰쳐나갈 만한 기적을 차단한다.     


또 클라라는 자기 척추를 수술하고 싶고, 결말에서는 스스로 이를 교정한다. 그러나 프레시아는 자신의 신앙을 클라라에게 강요하며 그간 이를 좌절시켰다. 클라라는 재능을 스스로 활용하지 못한다. 프레시아가 선교하고, 또 헌금을 받기 위해서, 즉 그녀의 종교적 사업과 동일시된다. 프레시아에게 동일시되는 가정에서 클라라는 식구들 모두 다 일한다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사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 프레시아는 클라라가 자위할 때마다 침범하여 이를 간섭한다. 클라라의 자위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자신에게도 선하다. 하지만 프레시아는 자위한 그녀의 손을 매운 고추로 따갑게 하거나, 촛불에 가져다 대며 고통을 준다. 프레시아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클라라가 동일하게 생각하게끔, 그녀에게 작위적인 고통을 가하여 자위를 죄로 만든다. 이러한 집안에서 클라라 또한 남자 조카, 프란시스코가 있는 방을 덜컹 열며 자위하고 있는 소년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모든 것이 다 프레시아, 가족 중심으로 동일시되며 개개인의 은밀한 사적인 자유와 개별성은 모조리 말소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공동의 것이 된다. 나탈리에는 대상의 영혼을 꿰뚫는 클라라의 능력이 어디서 어떻게 왜 발원한 건지 파고들어 가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기적이라고 단정할 뿐 클라라의 능력이 어떻게 발원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 본 작품의 세부는 아쉽게 느껴지면서도, 프레시아가 기독교적 기적이니 선물이라고 단정하는 종교적 동일시에 의해서 접근 불가한 영역으로 치부되는 것, 즉 프레시아에 의한 구속을 보여주기엔 효과적으로 느껴진다. 각각의 학문이 독립적으로 홀로 서며 발전되기 시작한 근대, 그 이전 분과들이 종교에 속하며 고유하게 발전되지 못한 중세를 보여주듯 말이다. 프레시아는 클라라에게 복음에 앞서 옷을 입힌다. 그 옷은 코르셋이라서 조이면 조일수록 클라라의 척추 장애가 더 심해진다. 스스로 걸을 수 없게, 프레시아가 강요한 길만 걸을 수 있게 만든다. 그래서 클라라는 달아난다. 프레시아는 클라라가 제 입술에 칠한 립스틱을 강제로 지운다면, 클라라는 이를 바르고 싶고, 산티아고는 이를 예쁘게 정돈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한편 고운 옷을 입으려는 클라라의 열망은 마냥 긍정적인 것으로 비치지 않는다. 클라라는 마리아의 파란 드레스를 입고 산티아고에게 향한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가 아니라 한껏 꾸며진 그녀, 마리아와 닮은 그녀를 산티아고에게 전시한다. 그리고 마리아의 생일파티에서 여성들은 공주로 일컬어지고, 여성의 용모를 타인에게 인정받고 이로써 객체화되는 '미인대회', ‘디즈니 풍의 무도회’가 펼쳐진다. 그 자리에서 클라라는 미인대회의 무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산티아고에게 건넨 고백을 거절당한다. 클라라가 갈망하는 상도, TV에서 송출되는 우월적인 남성에게 간택되는 수동적인 여성으로의 이행, 재생산일 뿐이다. TV에서 방영되는 연속극에선 남성이 여성의 립스틱을 대신 칠해주며, 그가 바라는 그녀의 용모를 꾸며주지 않았던가. 이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속 에리카처럼 단지 자신을 지배하는 대상을 어머니에서 산티로 옮겨가는 것뿐이지, 진정 주체적인 대상으로 우뚝 서는 것이 아니다. 프레시아에 의해서도 자신은 타자화되고, 마리아와 산티아고를 열망하는 클라라 또한 자신을 누군가가 만족스러워 할 모습으로 만들며, 내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으로 타자화한다. 욕망의 자유란 사실 '산티아고가 클라라를 사랑함'이 아니라, '클라라가 그에게 고백할 수 있음'을 의미할지다. 클라라가 그의 기준에 맞춰가는 것, 또 그녀의 환상에 의해서 산티아고가 그녀를 사랑해야 하는 것 또한 강요된 욕망, 자기 소외다. 영화는 상징으로 환상의 실현이 아닌, 욕망의 해방을 그린다. 클라라가 산티아고를 열망하기 시작한 순간, 그의 등에 풍뎅이가 날아든다. 클라라는 풍뎅이의 ‘오피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벌레에게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주며 훗날 산티아고에게 벌레를 보여주리라 다짐한다. 오피르를 산티아고에게 보여준다는 것, 그것은 곧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감정을 내비친다는 것. 그러나 그녀가 그를 사랑할 수 없을 때 오피르를 가두고 죽였으며, 그러다가 호수에서 산티와 대화하고 잠수하며 클라라의 꿈 일부를 실현하자 차갑게 굳어버린 오피르의 육체에 온기가 돌아왔다. 이윽고 날아서 산티의 집 방향으로 사라진 오피르, 클라라는 오피르를 따라 그에게로,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으로 향한다.      


그 이전 클라라는 산티가 마리아와 정사를 나누는 것을 몰래 훔쳐봤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다는 듯, 연인의 침실과 클라라의 바깥은 각각의 숏으로 분리되었다. 이는 불가능일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밝은 것, 클라라에게는 어두운 것. 그러나 클라라 스스로 욕망하는 것은 환하게 밝혀질 수 있어야 한다. 프레시아에 의해 죄과로 규정될 것이 아니라, ‘반딧불이’가 자유로운 그녀를 찾아서 비추듯 마땅히 스스로 빛나야 한다. 장애의 극복이란 산티아고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클라라가 산티를 사랑함에 방해받지 않는 것, 클라라가 그 감정에 충실할 수 있음을 의미하리. 클라라는 이를 바라왔다. 영화 도입에서 클라라는 마리아와 함께 저 하늘로 손을 뻗었다. 또 프레시아와 자매, 조카들에게 구속당하고 붙잡힐 때, 클라라는 2층 창문 바깥으로 손을 내뻗었다. 하지만 집안에서 두 손은 하늘에 닿을 수 없고, 또 가족들에 의해 좌절된다. 이후 트럭에서 산티를 만난다. 산티도 차창 밖으로 손을 뻗는 것을 보며, 클라라는 호감을 느낀다. 그녀는 산티를 제 자유의 구원자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산티는 그녀를 욕망하지 않는다. 다만 클라라에게 산티는 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은 맞다. 클라라는 프레시아가 요구하는 청빈한 성녀 이미지 대신, 진흙에 몸을 뒹굴어서 더럽혀진 상태로 신도들 앞에 나타난다. 그렇게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이미지에서 벗어났음에도, 신도들은 성경에 이와 관련한 나름의 구절이 있다며, 다시 그녀를 기독교 체계 내로 편입시킨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이 클라라를 주관적으로 오독함에, 그 시선을 피하고자 클라라는 항상 숨어들었다. 그녀의 자유는 바깥에서 말리기 위해 널어놓은 이불과 이불 사이, 그 누구도 자신을 쏘아보지 못하는 외진 숲속에서 가능했다. 그런데 산티는 클라라의 자위를 비추는 반딧불이처럼, 클라라를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긍정할 뿐, 그의 의중으로 동일시시키지 않는다. 그 앞에서 클라라는 굳이 자유를 위해서 숨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된다. 또 그와 함께 호수 아래로 잠수하며, 지상의 제약에서 멀어져 잠깐 그녀의 바람을 간접 실현하기도 했다. 그녀는 유카를 풀어주면서 말의 몸에 뫼비우스의 띠를 그렸다. 프레시아에 의해 팔리고, 그렇게 팔려서 주인의 의중에 말이 동일시되면, 유카라는 나는 대상의 기준에 따라 유한해진다.     


하지만 대상에게서 달아나고 도망쳐서, 끝없이 흐르는 강을 따라가는 유카는 무한해진다. 산티는 클라라에게 이 무한을 허용하는 존재다. 단지 클라라의 무한은 긍정하되, 클라라에 대한 산티의 마음 또한 자신의 무한한 감정에 따라야 하므로, 진정한 자유란 산티도 그녀에 대한 감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갈래로. 산티에게 고백을 거절당한 클라라는 그 이후, 자신이 환상을 품었던 여성상과 프레시아가 바라는 성모상, 그 모든 것에 환멸을 느끼며 파티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비명을 지른다. 지진이 일어난다. 지진은 그전에도 클라라가 숲에서 자위할 때, 제 욕망과 바람이 깨어날 때 발생하지 않았던가. 이 또한 영화에 만연한 상징이다. 지상에서 클라라의 자유는 항상 불발하고, 강으로 향하는 호수에서 잠수하며, 즉 ‘검열의 지상’에서 멀어져서 클라라의 욕망은 간접 실현되지 않았나. 그리고 클라라가 동경하거나, 클라라의 자유를 비추는 자연물들은 언제나 지상의 구속에서 달아나 비행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지진은 검열하고 구속하는 지상이라는 제반, 특히 종교적 여성상과 남성에 의한 수동적인 여성상, 모두가 자리한 지대를 지진으로 무너뜨려 여성만의 주체적인 표상을 새로이 건립하는 의식이다. 이에 더해 불태워져야만 한다. 그렇게 특정 여성상이 강요된 '클라라'라는 이름이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지만, 솔라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혼자서’, ‘강인하게’ 우뚝 설 수 있다. 그렇게 이름과 척추, 양자 모두 자유로워진 존재는 곧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유카를 만난다. 다만 유카의 죽음이 암시되었던 만큼, 또 영화의 결말에서 유카와 솔라 모두가 사라진 텅 빈 곳만 포착되어 불길함이 감도는 만큼, 부디 그들의 재회가 사후가 아니길, 단지 유카와 솔라가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난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러한 본 작품은 스웨덴 감독이 타자들을 다룬 영화의 계보, <렛 미 인>이나 <경계선> 등을 이어내는 작업이라 할법하고, 또 여성 감독이 느끼는 지배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피아니스트>를 전유하며 탐구하는 작품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그 이질성에 대한 탐구나 기원이 다소 깊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말하고자 하는 정신과 그것을 위한 미장센은 매혹적이고 비전문 배우들의 날것의 육체도 생생하지만, 이러한 요소를 훌륭하게 승화할만한 세부의 빈약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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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924 광주극장에서(스웨덴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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