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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25. 2022

로맹 가브라스, <아테나>

비극적인 불은 새로움을 낳는다

로맹 가브라스(Romain Gavras), <아테나>(Athena) 

- 비극적인 불은 새로움을 낳는다

“비극 작품이 마치 석양의 빛처럼 둥근 지평선 아래로 서서히 사라질 때, 관객은 고결한 비극성 앞에서 아침의 여명을 기대하지 않겠는가?” -에른스트 블로흐-

최근 프랑스의 사회적인 영화는 이민자, 노동자들이 밀집한 파리 교외 지역을 비춘다. 국내에 개봉한 작품으론 셀린 시아마의 <걸후드>, 래드 리의 <레 미제라블>이 있고, 개봉 예정 작품으론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의 <가가린>, 영화제에서만 소개된 작품으로는 합시아 헤지의 <세상의 어머니는 행복해야 마땅하다>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의 특징으론 실제 현장에 참여하는 ‘공공성’이다. 감독은 인위적인 개입이나 설정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포착하며, 감독 본인이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 동고동락하거나, 아니면 영화에 캐스팅한 비전문 배우들의 배역이 그들 실제 삶과 구분되지 않게 만든다. 래드 리의 경우 감독 본인이 살아온 인생을 영화에 투영하였고,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윌은 영화가 포착하는 현장에서 지냈으며, 시아마와 합시아 헤지는 배역이 아닌 제 삶을 표현하는 배우들을 기용하여 굳이 꾸미지 않았다. 이를 통해 가상으로서 영화는 곧 현실과 경계가 허물어지고, 영화는 중심부에서 유리된 주변부의 삶과 현실을 감상자와 이어준다. 그렇게 고립되었던 각각의 삶은 '우리'가 되는데, 이러한 경향을 로맹 가브라스가 <아테나>에서 이어간다. <레 미제라블>을 연출한 래드 리가 각본을 공동 집필하며 말이다. 1981년 파리 태생의 로맹 가브라스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가브라스'라는 성이 그리스의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로맹은 실제로 코스타 가브라스의 막내아들이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화감독이 되었다. 로맹은 뮤직비디오 작업으로 영상 경력을 쌓았으며, 그래서 매우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연출, 노래에 맞춘 짧은 러닝타임에 많은 이미지를 꾹꾹 채우는 축약성이 그의 영화에도 반영된다. 그는 장편 <아워 데이 윌 컴>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2018년 넷플릭스에서 <세상을 가져라>를 공개했다. <아테나>는 그의 세 번째 장편인데, <아테나>에서 도드라지는 타자, 약자, 소수자에 대한 문제를 이전 작들에서도 고찰하였다.      


일단 아웃사이더다. <아워 데이 윌 컴>에서는 '이중 아웃사이더'가 등장한다. 현실에서는 게이이자 아일랜드계라서 이성애자와 프랑스인들로부터 차별을 받고, 거기서 달아나 소속감을 느끼는 게임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레이라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세상을 가져라>에서는 프랑스 내의 북아프리카, 아랍 이민자들과 여전히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아들이 자기 소외된다. 이들은 항상 버스, 집, 땅에서 쫓겨나거나 유랑하는,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며, 로맹의 리드미컬한 편집을 통해 찰나적으로 나타났다가 이동하는 디아스포라가 특징이다. 이를 바라지 않은 아웃사이더들은 소속을 바란다. <아워 데이 윌 컴>에서 첫 번째 소속은 ‘연기’가 요건이다. 호모포비아, 인종차별주의자, 거친 남성성, 약자 무시 등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 양식을 타자들은 과장하며 연기한다. 본래 자신들의 행동 양식이 아니었던 습관을 인위적으로 연기함에, 일반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였던 행동 양식은 우악스럽고 작위적으로 느껴지는데 이는 사회 내 아비투스가 일반화된 것이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양식이 아님을 까발린다. <세상을 가져라>에서 이민자 그룹은 백인 부르주아지의 파인 다이닝에서 소외된다. 그들은 백인들의 명품, 사치를 갈구하며, 서구 사회가 만들어놓은 철학 체계, 문화, 대기업을 뒤쫓기에 급급하다. 그들은 서구식, 백인 스타일로 성형한다. 이러한 백인 모방은 기성세대들이 수행하며, 그것이 곧 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프랑수아에게 세뇌되고 전이된다. 그런데 어색한 연기는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거짓으로 소속하던 이들은 나다운 상태에서의 소속을 염원한다. <아워 데이 윌 컴>에서는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이 바라고 상상하던 고향인 아일랜드로 향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그저 믿음일 뿐, 주관적 망상으론 그 어디에도 소속할 수 없다. 자신이 바라는 표상을 실현하고자 타자들은 보편자들이 약자, 소수자에게 강요하는 ‘이념 선전’을 반대로 뒤집어서 행동한다. 평상시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세뇌가 반대로 펼쳐지니 폭력적인 성질이 폭로된다. 석궁을 들고 다니고, 마음대로 침입하여 폭력을 일삼으며, 이성애자에게 동성 키스를 시킨다.     


<세상을 가져라>에서는 두 가지의 개인성을 고찰한다. 하나는 이기주의다. 한 갱이 납치당한 자신의 반려견을 구출한다. 그러나 갱은 반려견이 시끄럽게 굴자 학대한다. 그에게 반려견은 소유물, 이기적으로 오남용할 수 있는 ‘사물’으로 취급된다. 그는 반려견을 헤아려서 구조한 것이 아니라, 소유물을 빼앗긴 것이 분해서 되찾는 것이다. 대니에게 프랑수아 또한 마찬가지다. 술과 마약이 판치는 세계, 스스로 대단하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자기 폐쇄적인 세계에선 타인의 존중을 바랄 수 없다. 프랑수아의 계획을 언제나 대니가 배신하고, 그의 돈은 엄마가 죄다 탕진한다. 그래서 이기주의에서 달아나며, 이와 다른 개인성을 지향해야 한다. <세상을 가져라>에서 프랑수아는 모든 관계에서 벗어나며, 진정 자신이 바라는 사랑만 남겨둔다. 그렇게 강제된 공동 존재, 이기적인 존재들 사이에 둘러싸여 훼손되는 주체성에서 진정한 나를 회복한다. 욕망으로부터 사랑, 그것이 로맹의 또 다른 개인성, 지향해야 하는 개인성이다. 한편 사라지면서 포착되는 <세상을 가져라>와 달리, <아워 데이 윌 컴>에서는 멀어지고 사라진다. 신분이 드러나는 모든 흔적을 불태우고 말소하며 자신의 꿈이 실현될 수도 있는, 지상의 제약이 없는 하늘로 열기구를 타고 두둥실 떠오르지만, 이는 곧 현실에 발 디딜 수 없는 타자의 비극이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매우 탐미적이다. <세상을 가져라>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트래킹, 팔로우숏은 대상만 따라가는 목적에만 그치지 않고,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한 기교로서 매우 현란하다. 하지만 그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 목적성, 명분은 마땅하지 않아서 필요 이상으로 흘러넘치는, 과잉된 인상을 주곤 하였는데, 과연 로맹은 래드 리와 협업한 본 작품에서 어떤 타자와 연출을 고찰할까. 편집이 재빠르던 이전 작들의 기조와 달리, 본 작품은 카메라 워킹은 급박하고 빠를지언정, ‘컷’ 자체는 매우 드물고 느리게 발생한다. 로맹은 본 작품의 각본을 써준 래드 리가 연출한 <레 미제라블>처럼 롱테이크로, 영화를 바라보는 감상자가 속한 현실의 '잘려지지 않은 시간'을 보존한다. 이로써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닌 현실일 수 있음을 형식으로 명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냥 현실적이진 않다. 래드 리의 카메라는 흡사 살아 숨 쉬며 헐떡거리는 듯한 핸드헬드 및 줌인을 이용하여, 현실 속 인간의 심장 박동을 구현했다. 그의 <레 미제라블>에서는 배경 음악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로맹의 <아테나>에서는 일단 스테디캠으로 촬영한 매우 안정적인 카메라 워킹이 눈에 띄며, 또 비장한 배경음악들이 계속 감상자의 귀에 감돈다. 그리고 카메라가 돌면 특정 행동을 시작하고 완결하는 연극성도 도드라진다. 무대와 커튼의 열고 닫힘, 관객의 존재에 의해 행동이 좌우되듯. 마찬가지로 유사한 작품인 <사울의 아들>에서 인물의 그림자가 되어 ‘뒤’를 주로 따라가던 카메라와 달리, 본 작품에선 인물의 정면을 촬영하는 점에서도, 각본이 가리키는 현실성을 추구하기 보단 감상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느낌이 짖다. (물론 대상의 정면, 얼굴만을 포착하는 달리 숏은 초반부에만 국한된다) 래드 리와 달리 로맹은 형식이 현실에 종속되며, 예술의 독자성을 잃지 않고자 하는 것이랴. 그래서 본 작품은 나름의 기교적인 면모와 현실적인 면모가 형식에서 절충한다. 이에 따라 기교적인 롱테이크지만 현실의 특성들 또한 형식으로 가시화된다. 롱테이크는 '나뉘지' 않는다. 하나의 테이크 안에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며 상충되고 대립하는 요소들이 욱여넣어져 억지로 공존한다. 그것이 곧 현실이다. 아무리 각자가 하나의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주관적인 표상에 참여한다고 ‘믿어도’, 결국 궁극적으로 우리는 객관적인 하나의 세계에 모순적인 여러 표상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형국이다. 이러한 양가성의 공존, 일단 영화 도입부에서 경찰서는 문명의 흔적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잔혹하고 비정하게 홀로 내던져져 생존을 오직 나 혼자 챙겨야 하는 자연과 달리, 문명에선 법과 제도와 그것을 집행하는 경찰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윽고 안정적으로 포착되던 경찰서는 카림의 무리가 일으킨 소요 사태로, 흡사 '산불'처럼 혼란스럽고 야만스럽게 뒤바뀐다. 인간은 야만적으로 태어나서 사회화를 학습하는 존재, 그렇기에 교양인임과 동시에, 돌변하면 원시인일 수도 있는 그런 존재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간이 관장하는 경찰서 또한 마냥 반자연적인 공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명확하게 ‘들춰내고 보이게 만드는 문명’과 ‘연기를 피워 혼란스럽게 만드는 야만성’이 하나의 테이크 안에 공존하고, 이후 경찰서가 속하고 백인을 대표하는 도심의 중심부에서, 하층민과 타자들을 대변하는 주변부로 카메라를 옮긴다. 그 과정에서도 조금도 잘리지 않는다. 경찰서에서 아테나 지구로 복귀하는 카림 부대의 차를 매끄럽게 연속적으로 따라간다. 백인들이 주류인 중심부, 유색인종들과 하층민들이 모여 사는 주변부, 모두 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프랑스다. 그렇게 하나의 테이크 안에는 분리된 줄만 알았던 모순적이고 상충하는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 카림과 압델 또한 마찬가지다. 카림은 부패 경찰, 백인 권력, 극우 세력의 인종 차별에 대항하며, '정의'라는 대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어린이, 여성, 노인, 장애인 등의 약자를 내전에 휘말리게 만들어, 정의의 이면엔 '불의'가 내재한다. 이와 반대인 압델은 노약자들을 대피시킨다는 점에서 정의로우나, 한편 이를 위해서 백인들과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한 불의가 뒤섞인다. 그렇게 하나의 테이크, 하나의 인물들 안에서도 정의와 불의가 모순적으로 뒤엉켜 있음에 명확하게 어느 편, 누구의 편을 들 수가 없고 테이크는 더더욱 '카오스'의 상태가 되어간다. 래드 리는 <레 미제라블>에서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그저 교착 상태에서 끝맺음하지 않았던가. 내용에 있어서 그간 로맹의 작품이라기보다, 래드 리의 영향이 지대한 본 작품에서도 복잡한 이해관계와 불명확한 선/악에 의한 딜레마가 특징이다. 한편 롱테이크를 추구하다가 숏이 나뉘는 경우가 있다. 시퀀스가 다른 시퀀스로 넘어가기 위해서 잘리는 것이 아니라, 롱테이크를 포기하고 다수의 숏으로 하나의 시퀀스를 구성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리버스 숏의 형태로 말이다. 일단 극의 초반 임시 모스크에서 카림과 압델이 두 눈을 마주쳤을 때, 두 인물을 담는 숏이 각각 나뉘었다. 압델은 정통적인 종교적 ‘모임’을 고수하고 새롭게 소집된 카림의 군대를 ‘흩어지게’ 만드는 반면, 카림은 전통적인 공동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고자 한다. 뭉침과 해산에 대한 전혀 다른 두 형제의 생각, 이에 따른 차원은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후 카림이 집에 들른다. 카림은 벽에 걸려있는 이디르의 사진을 본다. 마찬가지로 숏이 분절된다. 카림의 육신은 이승, 현실에 놓인 반면, 이디르의 육신은 여기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형과 죽은 아우는 하나의 차원, 곧 하나의 숏에 공존할 수 없고 각자의 숏은 나뉘어야만 한다. 이후 카림과 제롬의 숏이 분리된다. 카림은 이디르를 향한 인종 범죄를 일벌백계하기 위해서 제 자신의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자’, 반면 제롬은 생존하기 위해서 백인 경찰이었던 제 신분을 바꿔 입는 ‘죽음이 두려운 자’다. 죽음에 밀접한 차원, 이와 달리 죽음을 유예해야하는 차원 또한 리버스숏으로 나뉜다. 이는 영화 결말에 죽음을 결심한 압델과 탈출하는 제롬의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마지막으론 세바스티앙과 압델의 분리, 전자가 극단적인 파괴와 살육 쾌감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필요악으로서 폭력을 상징한다. 전자는 순수 폭력, 후자는 정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폭력이다. 이렇게 도저히 하나의 차원에 공존할 수 없는, 서로의 입장 차이가 도드라질 때 리버스숏이 사용된다. 상충할 수 없는, 서로 속할 수 없는 각자의 리버스숏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본 작품에서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관철하지 않는 비범한 영웅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웅들이 언제나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본 작품은 비극, 그것도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한다. 본 작품의 비장한 배경음악, 그리스적인 이름이 형식적으로 그리스 비극에 상응하고 영웅의 죽음, 그것도 영웅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관통한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다. 그러나 특정 죽음만이 ‘비극’으로서 더 슬프거나 값지게 여겨지는 이유는, 영웅이 자신의 사명과 의지를 위해서 죽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 속 영웅들은 비범하지만 자신들의 노력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목격한다. 이에 자신들이 회피할 수 없는 사명, 의미심장한 가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행위로서 ‘결단’을 내리고 자결한다. 그래서 비극은 죽음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그 모순적인 운명이 슬프다. 오히려 죽음에는 냉담하다. 즉 비극의 죽음은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정선된 의지, 철저한 자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비극적 관점에서 본 작품 속 영웅은 카림이다. 카림과 그를 따르는 반군들은 경찰서가 허용하는 굴욕적인 평화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공권력과의 충돌을 감행하고, 자신을 오인하고 공격을 계속하는 아군이 있더라도 이에 겁먹지 않고 결연히 제 자신을 드러내며 상황을 정리한다. 카림은 고통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경찰이 던진 화약을 다시 집어 던지다가, 손에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 고통스러워할 뿐, 바로 초연하게 감정을 정리한다. 제 손을 못 쓰게 되더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같은 결연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이후 목타르의 연줄인 부패 경찰들에 의해 카림은 총살당할 위기에 처한다. 화염병과 총을 내려놔야지만 그는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흥정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부조리한 그들에게 대항하며 죽음으로 자신의 대의를 완수한다. 그의 반군은 방탄복을 입고 시범 삼아 자신에게 총을 쏴본다. 방탄복의 안전함에 확신을 갖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명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결연한 혁명 의지가 더 강하다. 이들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위기와 갈망 속에서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전대미문의 선각자가 카리스마의 주체, 그 비범함에 동의하는 추종자들에 의해 상호적으로 카리스마가 생겨난다. 반추종자들, 혁명을 바라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에게 카리스마는 광기, 선봉장은 광인이나, 반대 세력의 인정을 전유하고 독점한다. 카림이 그렇다. 한편 이는 제롬의 태도와 상반된다. 제롬은 방탄복과 진압봉, 방패 등 인간을 비교적 안전하게 해주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지만 무장이 제대로 갖춰진 게 하나도 없는 아테나 지구에 출동하는 것이 불안한 눈치다. 네 살배기 딸이 있는 그는 두렵다. 본 출동은 아버지로서의 사명도 아니기에, 겁만 날 뿐 확신이 없다. 이후 제롬은 압델이 권총으로 협박할 때, 여느 인간처럼 죽는 것이 두려워 미친 듯이 울부짖는다. 사명을 위해서라면 죽음에 초연한 의지, 반면 죽음에 평온하지 못한 일반성이 비극, 카리스마 있는 영웅을 판가름한다. 압델, 카림, 이디르와 이부형제인 목타르도 마찬가지다. 제롬은 4살짜리 딸이 있어서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면, 목타르는 제 막냇동생의 죽음을 바로잡기 위한, 프랑스 전역이 불타오르는 대의에 관심조차 없다. 오직 제 사리사욕, 마약을 운반하고 이로써 배를 불리는 이기심에 눈이 멀어 죽음이 만연한 아테나 지구를 도망친다.    


즉 자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삶, 소유물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범인과 영웅을 가른다. 영웅들은 불태움과 동시에 스스로 불탄다. 불태우기만 하는 자들은 영웅이 아니다. 영화 결말에서 이디르를 살해한 자들이 경찰복을 불태우는 장면이 플래시백으로 나타난다. 극우 분자는 타인을 불태우고, 그들을 방관하는 경찰들 또한 방화를 방치한다. 이들은 자기 얼굴에는 불을 비추거나 붙이지 못하는 소인배다. 불은 분명 파괴와 죽음의 상징이다. 하지만 불은 동서고금에서 파괴 이후의 잉태, 출산, 탄생에 상응하였다. 인도의 프라만타는 불 제물인 만타나의 도구다. 하지만 프라만타는 단순히 불을 지피는 용도에만 그치지 않는다. 피상적으로 불을 지피는 용도임과 동시에, 상징적으로 성적인 의미가 있다. 구멍이 뚫린 나무는 음문, 마찰을 일으키는 막대기는 남근, 이에 점화된 불이 어린아이로 여겨진다. 즉 고대인들은 불을 만드는 행위에서 죽음과 탄생을 봤으며, 불꽃이라는 탄생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막대기의 마찰, 스스로의 점화가 필요하다. 경찰복을 불태우는 범죄자들의 방화와 카림과 반군에 의한 폭죽, 화약, 검은 연기, 화염병 등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가 죽인다면, 후자는 자신을 불사르며 새로운 정신을 낳는다. 불태움과 동시에 스스로를 점화하는 카림은 영화 내내 중앙 구도에서 당당히 자신을 노출한다. 이후 카림은 새로운 도그마를, 그리고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던 형과 자신의 차원을 하나로 모은다, 자신을 죽이고 불태우며. 일단 카림이 낳는 도그마, 그것은 압델의 것과 상반된다. 형제는 모두 알제리계 이민자다. 프랑스와 알제리는 식민국과 피식민국, 전자의 후자 학살 등 적지 않은 악연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고 압델은 프랑스의 군인으로서 역사적 감정을 뒤로 하고 타협한다. 카림 무리가 납치한 제롬을 돌려주려 하고, 또 백인의 끄나풀로 마약을 공급하며 '식민주의'를 자처하는 이부 형 목타르와 공조하여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다. 압델은 경찰서, 임시 모스크 등 전통적으로 모여 있는 곳에 함께 한다. 그렇게 ‘모이는’ 이유는 함께 있으면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압델이 노약자들의 아파트 탈출을 돕고자 그를 중심으로 모여서 탈출하고, 움직이기 힘든 초고도비만 주민을 돕기 위해 다들 힘을 보태며 모이는 것처럼 말이다.     


모두가 흩어지는 와중에 끈끈하게 모여서 탈출하고, 검은 연기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와중에 무언가를 보이게 만들며, 다수의 시야가 제 안위만 보는 상황에서 이타적인 압델은 분명 카리스마 있는 영웅이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 이를 구성하는 백인 권력과 타협하여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뻔한 일반성은 오직 그만의 믿음, 영웅성이나 카리스마와 무관했다. 압델은 경찰과의 협상, 대화를 시도하다가 반군으로 오인당해 '부당한' 진압을 당한다. 백인들에게 똘똘 둘러싸여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이윽고 지상에만 놓여 있었던 카메라는 하늘로 올라가 그 혼란한 상을 비춘다. 로맹의 전작에서 카메라가 하이앵글로 변모하거나, 인물들이 두둥실 하늘로 떴던 이유는 더 이상 지상에 발 디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심부와 주변부가 '다 같은 국민'이라는 그의 믿음이 붕괴되자, 그의 신념은 이제 지상에 발 디딜 수 없는 헛것으로 전락하였기에 카메라는 저 멀리 하늘로 사라지는가. 그것을 카림은 진작 알고 있었다. 이디르의 죽음을 밝히지 못함에(혹은 않음에) 믿지 못할 경찰의 곁에서 뿔뿔이 흩어졌고, 다른 사람들 또한 해산하게 만든다. 경찰들이 한데 뭉쳐서 압델을 특정 공간에 몰아넣고 진압하듯, 백인은 이민자들에게 협소한 공간만 허용하며 서서히 좁혀간다. 그래서 카림은 '자치 지역'으로서 널따란 아테나를 선언하고 더는 접근하지 못하게끔 바리케이드를 쳐서 백인을 차단한다. 그리고 백인에 의한 중앙언론 대신, 개인 라이브 방송으로 알제리계 이민자가 스스로 상황을 진술, 전달한다. 그렇게 백인의 모임을 해체하고 공간을 재조직한 이후, 스스로를 중심으로 형제들이 모이게 만든다. 흩어짐의 이유가 신뢰할 수 없음이라면, 모이게 되는 이유는 신뢰할 수 있음, 그 신뢰의 이유는 카림이 이독제독, 역지사지를 말하며 백인에게 종속되는 공동체가 아닌, 동등하고 독립적인 공동체를 주창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카림은 불태우고 알제리계의 도그마를 새로이 정립한다. 그의 불사름은 이념적 변화를 가져오는 혁명이다. 그리고 부패 경찰들이 자신을 향한 사격을 거두지 않을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제 한 몸 불사른다. 그렇게 자신을 불사르며 프랑스와 형제를 맺던 압델을 각성하고 본래 혈족을 복원한다. 비로소 형과 아우는 삶과 죽음이 엇갈렸음에도 하나의 테이크에 놓인다.  


알제리계인 이부형제들의 뿌리는 살아남은 세 아들들에게 똑같은 어머니가 전화를 거는 숏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목타르와 압델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역사적인 알제리의 분노를 이어가는 카림만 어머니의 연락을 받는다. 이후 카림이 죽고 나서야, 그간 프랑스에 소속하기 위해 알제리라는 모계, 형제애를 망각한 압델이 뿌리를 환기한다. 압델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우고 백인들을 위해서 마약을 공급하는 목타르를 경멸하고, 카림의 반군을 이어받는다. 그간 아테나 지구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삭일 것을, 벽 안쪽에 있을 것을 지시하던 압델은, 이제 '벽을 허물라고' 명령한다. 동생이 형에게 계승한 카리스마는 여전히 추종자들, 시대가 열망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알제리를 위한 선택은 아니다. 압델은 뿌리인 어머니의 전화를 여전히 받지 않고, 또 '위험한 인물'로 분류되는 세바스티앙과 손을 잡는다. 그렇다면 카림은 압델이 스스로의 감정, 분노에 솔직하도록 제 몸을 불살라 형을 각성한 것이랴. 여하간 이어폰을 끼고 전쟁과 유리되어 있었으며, 추하고 잔혹한 현실에서 자신만의 아름다운 정원을 꾸미던 세바스티앙과의 공모는 본 소요의 목적을 흐린다. 맹목적인 분노, 목적 없는 폭력은 그저 허무주의와 염세주의, 오히려 목적을 위해서 굴욕조차 감내하며 생존하는 제롬을 더 숭고하게 만든다. 무엇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불사를 것인가, 그것을 모른다면 비극도, 영웅도, 혁명도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본 작품은 최근 프랑스 사회적인 영화의 계보를 스타일리시하고도 세련되게 이어 나간다. 집의 침략, 그럼으로써 원주민들 삶의 붕괴는 프랑스 바깥의 <바쿠라우>와도 연관될 법한 작품, 하지만 거친 폭력의 불쾌 내지는 숭고보다 심미적인 오락성·쾌감을 강조한 연출 경향이 다소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폭력의 경각심보다는 만족감을 부추기진 않을까. 래드 리의 현실적인 각본과 결합한 탐미적인 폭력성은 현실에의 모방을 부추길 여지가 있지 않은가. 다만 약자가 강자를 향한 폭력이기에 나름의 혁명성으로 참작할 수 있는, 무엇보다 카림의 죽음 이후의 동력과 목적이 해이해진 폭력성, 제롬을 차마 죽이지 못하는 압델의 태도는 맹목적인 무력에 대한 경각심과 반성을 자극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여하간 <레 미제라블>에 비한다면 연출과 각본의 현실성이 모두 부합하진 않지만, 그간 로맹의 무의미한 탐미주의가 나름의 합목적성이 있는 형식으로 발전한, 꽤 훤칠한 작품임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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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925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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