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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29. 2022

앤드류 도미닉, <블론드>

진실 혹은 남근의 욕망

앤드류 도미닉(Andrew Dominik), <블론드>(Blonde) - 진실 혹은 남근의 욕망     

“사람들이 현실 세계의 환상을 몰아냈을 때, 사실적인 것이 사실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사실적인 것에는 객관적 사실성이 없다.” -장 보드리야르-

우리는 마릴린 먼로라는 사람을 어떻게 아는가.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은 섹스심벌이라는 단어의 동의어로 굳어졌다. 오늘날에도 제2, 제3의 마릴린 먼로라는 표현이 만연하게 범람한다. 마릴린 먼로라는 단어가 섹스심벌이나 다른 배우를 지칭하지 않고 그녀를 가리키더라도, 여기에 뒤따르는 이야기는 언제나 염문설이 주를 이룬다. 그녀는 여전히 마릴린 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연상하는 사람들의 성 착취에 동원된다. 그녀의 시각적 이미지는 어떠한가. 풍성한 백금발과 하얀 원피스, 이로 인해 두드러지는 입가 주변의 매력점과 두툼한 입술을 강조하는 레드립, 풍성한 속눈썹과 반쯤 감긴 눈꺼풀의 조합이 바로 마릴린 먼로다. 그녀의 이미지는 언제나 대중, 특히 남성들을 향해 활짝 웃고 있다. 그들의 지배력을 만족시키고자 쉽게 구슬릴 수 있는 백치미를 자랑한다. 우리는 이렇게 섹스심벌 먼로의 이미지를 안다. 이러한 복식의 사진, 영화, 팝아트가 오늘날까지도 무한하게 복제된다. 흡사 그것이 먼로의 전부인 양, 하지만 이는 대중들이 원하는 먼로지, 마릴린 먼로의 실제 삶 그 전체는 아니다. 그 기대를 악용한 문화 산업은 먼로의 의도를 과장 및 왜곡하고 이를 무한 복제했으므로. 미국의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는 그 이미지 너머의 먼로, 대중들이 거부한 먼로의 삶을 『블론드』란 소설에서 상상했다. 그리고 이를 앤드류 도미닉이 동명의 신작으로 영화화하는데, 한편 오츠의 소설, 도미닉의 영화도 결국 픽션이다. 과연 그들의 허구는 여전히 먼로의 이미지만 만들어내는 작업일까, 아니면 진실을 가리키는 허상이 될 것인가. 1967년 뉴질랜드 웰링턴 태생의 앤드류 도미닉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실존했던 흉악한 범죄자 마크 리드, 미국의 범죄자이자 영웅인 제시 제임스 등을 다룬 ‘전기영화’로 유명하다. 실존 인물이 아니더라도 <킬링 소프틀리>처럼 거칠고 비정한 범죄 소설을 영화화하는 등, 도미닉의 영화는 매우 와일드하다. 2000년에 데뷔해서 줄곧 범죄 영화, 범죄자 전기 영화를 연출하는 그는, 마찬가지로 호주에서 범죄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연출하는 저스틴 커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특유의 범죄 영화를 연출하는 도미닉은 범죄자들의 '초인'적 성질에 주목한다. 장편 데뷔작 <차퍼>의 주인공 마크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실현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타인들에게 지시, 호출, 강요, 협박하고, 심지어 원하는 결과를 위해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교도소의 권력자 키스를 살해하고, 자신의 범행을 목격한 모든 증인을 뛰어난 기억력으로 통제하며, 자신을 살해하려는 지미의 상해에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서서 버티고, 교도소를 나가기 위해서 자기 귀를 담담하게 자른다. 그렇게 제정신, 육체, 타인의 삶을 우직하게 제어하는 그는 더 많은 우발, 즉흥이 지배하는 현실 또한 통제한다. 도미닉이 해석한 초인, 마크 리드는 단순히 타인에게 지시하는 수준을 넘어서,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시선까지도 지배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으로 향한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킬링 소프틀리>에서도 이어진다. 도미닉의 공통되는 요소, 일단 그가 그려내는 호주, 서부 개척 시대, 미국 모두 범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범죄에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음에 항시 평온한 일상, 질서는 중단된다. <차퍼>에서 갑작스럽게 마크가 다른 사람들의 표상에 침범해서 범죄를 일으키는 것처럼,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도 잘 달리던 기차의 철로가 갑자기 끊기고 강도가 발생하며 우발적인 살해가 발생하는 등 무질서, 무법이 질서를 대체한다. <킬링 소프틀리>의 배경은 오늘날이다. 그런데도 범죄가 판을 치던 서부 개척 시대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차퍼>에서도 흉악한 범죄자를 경찰이 정보원으로 이용해 먹은 것처럼, <킬링 소프틀리>에서도 불법 도박장을 국가나 기업이 방관 및 후원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강도들을 '유능한 노동자'인 청부살인업자를 동원해서 처리하는 무법, 이기주의의 질서화를 꼬집는다. 도미닉의 작품에서 거친 범죄자들과 멀끔한 화이트칼라들은 항상 공조한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도미닉은 전자의 무법이 후자에 의해 합법화되는 것이 세상의 실체라고 본다. <킬링 소프틀리>의 탐미적인 살인 시퀀스처럼, 구조는 마땅한 악덕을 아름답게 포장한다.  

    

그래서 도미닉의 무법천지에서 범죄자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차퍼>에서 사람들이 범죄자를 칭송하는 것처럼,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도 포드가 제시를 동경하듯 말이다. 포드는 제시와의 공통점을 찾으려 애걸복걸하며 ‘막내’라는 유사성을 겨우 찾아 즐거워하고, 제시가 인정하면 포드는 아이처럼 기뻐한다. 제시를 죽임으로써 그처럼 잔혹해진다. 하지만 도미닉에게 동경은 막연한 ‘따라 하기’로만 성립되지 않는다. 초인이 되고자 한다면 항상 어떻게 보일지 의식해야 한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서 제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존재감으로 타인의 행동을 자신의 시선, 손아귀 아래 둔다. 사후에도 그의 주검은 사진이 찍히며 대중의 시선을 좌우하고, 그의 업적은 노래로 칭송된다. 하지만 포드는 제시처럼 보이기는커녕 비겁하다는 수식이 덧붙여지고, 사람들에게 조롱거리로 전락된다. 그는 제시를 죽이기야 했지만, 그의 죽음 이후를 자신의 의도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킬링 소프틀리>에서는 시들어가는 백인 권력을 포착한다. 영화는 2007년으로 부시의 실책, 오바마의 부상, 백인들의 너절한 생활공간을 유기적으로 엮어서 보여준다. 강도를 위해 고용된 백인들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처럼 모두 멍청하고 나약하다. 부시와 이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 역으로 다른 사람들의 통제에 머문다. 재키의 속셈과 배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의 계획대로 처리된다. 재키는 무법천지와도 같은 2007년의 미국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타인에게 지배되지 않으며, 자신이 주변을 통제한다. 그러한 사람만이 대통령의 자리, 높은 부를 거머쥘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그가 신작에서 마릴린 먼로를 다룬다. 도미닉이 항상 구성하는 무법천지에서, 과연 먼로는 어떤 모습일까. 또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우러러보고 섬기는지 규정하는 강인한 초인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섹스심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먼로에게서 어떻게 해석되고 있을까.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본 작품의 연출과 유사한 작품을 꼽으라면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및 <프렌치 디스패치>와 지아장커의 <산하고인>을 언급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도미닉이 본 작품의 주된 시대상인 1930~50년을 형식, 특히 화면비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일단 노마 진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양식으로, 1930년대 당시 영화계에서 통용되던 4:3의 좁다란 화면비를 선택한다. 그래서 영화는 4:3의 화면비로 시작되고, 또 20세기 초중반의 유행이었던 복고적이고 과시적인 ‘줌인’을 자주 사용한다. 이후 1950년대로 넘어와도 본 연출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4:3의 화면비는 시대 변화에 따라서 때때로 2.39:1의 널따란, 1950년대 영화관에서 통용됐던 화면비로 확장된다. 하지만 대체로는 4:3 화면비를 고수하는데, 널따란 화면비가 '영화적인 순간'에 사용된다면, 좁다란 화면비는 먼로의 일상에 사용된다. 이는 2.39:1이 비일상적 공간인 영화관, 영화라는 가상적 차원에 상응한다면, 4:3은 일상적 공간인 집의 ‘브라운관’에 해당하는 화면비로 볼 수 있으랴. 이렇게 1950~60년대에 2.39:1과 4:3의 화면비가 교차 사용된다면, 1930년대에는 영화적인 화면비와 일상적인 화면비의 차이가 크게 없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화면비가 동일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영화관과 브라운관의 화면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화면비가 그대로 머물러 있던 것은 아닌데, 바로 옷장 속의 아기가 어머니를 바라봤을 법한 시선을 가시화한, 좁고 긴 화면비로의 변화가 있다. 즉 영화의 연출은 단순히 시대적인 매체에만 그치지 않고 인물의 시야, 의식, 심리에도 상응하는 형식을 고안하는데, 그런 점에서 1950년대에도 지속해서 사용되는 좁고 갑갑한 화면비는 단순히 당대의 매체로만 국한할 순 없을 것 같다. 1930년대의 어린 노마 진은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신을 폭행하고, 상상 속의 아버지는 제 곁에 없으며, 미스 플린과 클라이브는 자신을 보육원에 버린다. 1930년대에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다닌 ‘갑갑한’ 꼬마 노마 진, 하지만 마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본인이 선택한 1950년대의 성인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문화산업은 마릴린의 임신 중절을 조력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마음을 뒤바꾼 순간에도 수술을 강제하며, 케네디 일가는 아예 강제로 마릴린을 납치하여 임신을 중단시킨다. (물론 이는 유산을 암시하는 꿈일 수도 있으나, 후반부 먼로의 의식은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으므로 그것을 현실이라 볼 여지도 충분한다) 그래서 남성 중심적 산업에 의해 형성되고 이끌려 다니는, 병원에서 도망치고자 몸부림치지만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곳 없던 강제된 마릴린의 삶을 가시화하는 형식으로 좁다란 화면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 먼로의 유년기에 해소되지 않은 엘렉트라 콤플렉스 및 강박증이 삶 전반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그 좁다란 욕망과 시야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의 심리에도 상응하리.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화면비를 바꾸는 영화, 그런데 1930년대에는 화면비의 변화가 더뎠다고 언급했다. 대신 1930년대에 현란하게 변화했던 것은 흑백과 컬러로의 전환이다. 글래디스는 사귀던 남성에게 배신당하고 노마 진을 낳았다. 그녀는 씁쓸하고 따가운 현실의 고통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 와중에 캘리포니아는 기상천외한 환락의 가상을 충분히 제공했다. 그래서 글래디스는 술과 마약 등에 찌들어서 가상 속에 살았고, 자신의 망상을 노마 진에게 사실처럼 주입했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는 컬러다.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출구로서의 망상, 하지만 생명력 없는 상상으로서 채색이 절망적인 현실의 흑백에 희멀겋고도 ‘창백하게’ 덧입혀져 있다. 하지만 망상하는 어머니는 정신 병원에 수감되고, 이웃인 미스 플린과 클라이브는 노마 진을 더는 돌봐줄 여력이 없다. 그래서 영화는 망상이 싹 걷힌 흑백으로 뒤바뀐다. 이후 1950년대에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고, 이는 2.39:1이라는 영화관의 화면비와 함께 사용된다. 마찬가지로 찬란한 컬러는 가상에 상응하나, 한편 마릴린은 서서히 남성적인 문화산업이 형성한 컬러에 기대를 접는다. 이제 그녀는 흑백 속에서 자기 삶, 그리고 글래디스와 유사한 '넬'을 연기하거나, 아니면 체호프의 『세 자매』 속 나타샤 등 현실의 여성들을 연기하며, 현실에 참여하고자 한다. 그녀는 컬러로 이행하는 대신, 흑백이란 현실에서 임신하고 '영화적인 순간'을 실현하길 갈망한다.     


그 이유는 화면비가 확대되고, 흑백에 컬러가 수놓아지는 꿈과 같은 가상의 순간들이 결코 노마 진 내지는 마릴린 먼로, 그리고 여성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작을 프리미어 하는 행사장에서 매니저가 그녀를 기쁘게 해줄 특별한 손님이 기다린다고 전한다. 그녀는 스위트룸의 그 손님이 그토록 손꼽아 기다리던 '아버지'일 거라 상상한다. 하지만 스위트룸에서 펼쳐진 꿈은 그녀의 꿈이 아니라, 조 디마지오가 마릴린에게 청혼하고 그것이 승낙되는 남성의 환상이다. 이는 영화관에서 나올 법한 2.39:1의 화면비로 확장되고 컬러로 전환되지만, 이 순간에 마릴린은 기쁘지 않다. 그렇게 참여하고 싶던 가상, 이제는 참여하고 싶지 않은 가상, 거부하던 현실, 이제는 정착하고 싶은 현실이 모두 뒤죽박죽 뒤섞인다. 그녀가 바라는 차원들은 그녀는 바라지 않는 남성적 시선이 점점 더 덧씌워져, 그녀는 흑백과 컬러, 좁다란 화면비와 널따란 화면비 그 어디에도 서 있을 수 없다. 컷이 비교적 적던 노마 진 시절로부터, 컷이 많아져 영화 속에서 배역으로 살던 마릴린 먼로 시절, 이후 디마지오와 결혼한 순간만 하더라도 컷이 적은 롱테이크의 차원이 조금도 익숙하지 않았다. 디마지오의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도, 디마지오의 가정 폭력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먼로는 이젠 롱테이크 뿐만 아니라 컷이 많은 차원까지도 견디기 버겁다. 컷이 많은 차원에도 본인이 바라는 꿈은 없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놓일 수 없이 길을 잃고 깨어서도 자면서도, 현실에서도 가상에서도 무한히 헤매기만 하는 후반부 초현실적인 구성이 본 작품의 백미이자, 먼로의 진실을 가리키고자 하는 본 작품의 적디 적은 미덕이다. 초현실성 외 본 작품의 미덕은 바로 먼로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다. 실제로도 글래디스 먼로 혼자서 마릴린을 키웠고, 훗날 아버지로 판명이 난 찰스 기포드는 그녀들 곁에 존재하지 않았다. 먼로는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확실치 않은 아버지를 항상 그리워했고,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망에 강박처럼 지배됐다. 마릴린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제임스 도어티는 마릴린이 자신을 daddy라 부르며 아버지상을 기대했음을 인터뷰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먼로가 디마지오, 밀러, 케네디에게 'daddy'라 부르는 것도, 해소되지 못한 아버지의 애정을 남성들에게 이입했기 때문이랴.     


보통 유년 시절 자녀가 부모를 에로스하는 욕망은 충족되어 해소되거나, 아니면 부모의 훈계이후 그것을 각인한 초자아가 알아서 억제하는 방향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글래디스는 먼로에게 아버지를 선망하고 사랑할 것을 부추기고, 그렇게 충족되지도 않고 금기시되지도 않은 엘렉트라 콤플렉스는 노마 진에서 마릴린 먼로로 이름을 바꾼 당시까지도 남게 된다. 해소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욕망은 먼로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먼로에게 아버지는 추상적이어서 무한히 상상해볼 만한 대상, 그래서 좋아 보이는 남성이 있다면 항상 그를 아버지라 상상했는데, 이와 달리 어머니는 유한하게 구체적으로 존재했다. 유한하고 구체적인 어머니는 먼로에게 어떤 한계를 그었다. 먼로는 성인이 된 이후 케스 채플린 주니어와 에디 로빈슨 주니어와 쓰리썸 관계를 맺었다. (이는 실제와 다르다) 그리고 채플린 주니어와 로빈슨 주니어는 유명한 배우들의 자녀였는데, 유약한 그 아들들은 전설적인 ‘거인’ 아버지의 후광을 넘지 못했다. 보통 아들들은 신화에서의 유명한 테마, '부친 살해'를 통해서 아버지를 부정하고 넘어서며 독자적인 존재,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않던가. 하지만 두 주니어는 아버지들의 업적이 너무 위대한 나머지 그를 부정하고 넘어서지 못한다. 두 아들들은 채플린과 로빈슨이라는 단어로 이해되는 그림자로 전락한다. 먼로에게는 어머니가 그렇다. 먼로는 자신을 홀로 낳아 기른 글래디스가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먼로는 그 용감함을 답습하고자 그리도 임신에 집착한 것인지 모른다. 또 글래디스의 정신병이 유전일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이자 임신 중절을 결심한다. 먼로에게 글래디스가 뛰어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닮음을 거부할 수 없다. 먼로는 '엄마 되기' 뿐만 아니라, 글래디스의 ‘손버릇’이나 심리 상태까지 모방한다. 그렇게 위대한 아버지, 용감한 어머니를 뛰어넘지 못하는 자식들은 그 후광과 영향을 그저 긍정하며, 제 가능성을 축소한다. 그런데 먼로가 그저 상상으로만 그려볼 뿐인 아버지는 영영 손에 잡히지 않는다. 상상할 수 없는 글래디스가 부모를 따라 하는 자녀의 가능성을 축소한다면, 추상적이고 모호하기에 여러모로 상상이 가능한 아버지는 먼로의 가능성을 무한하게 넓힌다.     


처음에 먼로는 어머니의 손버릇, 엄마 되기, 심리 상태 등을 따라 한다. 먼로는 글래디스와 유사한 '넬'이라는 배역을 연기할 때, 연기자로서 가장 훌륭하다. 한편 모방의 이유는 떠나간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에겐 연적이지만 아버지에겐 연인이었을 어머니를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처럼 돼서 사랑받고자. 이후 먼로가 배우가 되자 아버지라 주장하는 사람이 그녀에게 편지를 쓴다. 아버지는 나타나겠다고 말하면서도 먼로에게 실망했다며 그녀 눈앞에 등장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서 먼로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고 그에게 인정받고자 글래디스의 단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인정의 대상은 처음에는 아버지를 뛰어넘지 못하는 시시껄렁한 놈팡이에 그쳤다가 이후 야구선수, 대문호, 대통령으로 발전한다. 이는 먼로가 인정받고자 하는 아버지라 주장하는 작자가 편지에 적은 인정의 '허들'이 높아진 결과다. 그래서 먼로는 아버지의 시선에 부응하기 위해서 자신을 가꾼다. 단순 어머니, 섹스심벌에 그치지 않고 식자로 거듭난다. 한편 아버지의 시선에만 만족하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지배하는 것 같지는 않다. 먼로가 노마 진이던 시절, 그녀는 어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지배하지 못했다. 글래디스, 미스 플린 등에게 자신을 어떻게 봐달라고 호소하고 눈물을 흘려도 그것은 수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마 진의 시선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액자는 글래디스가, 보육원은 미스 플린이 규정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시선을 결정하지 못하는 결핍, 혹은 자신의 시야를 지배하던 어머니를 따라 하기 위해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통제하는 '스타'가 된 것인지 모른다. 글래디스가 정신병원에 입원된 순간에도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 마릴린 먼로가 된 노마 진이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노마 진을 찾으며 자신의 시선에 딸을 봉사하게 만들지 않던가. 여기에 더해 도미닉이 비추는 무수한 남성들의 시선, 위협적으로 벌린 입, 전구가 깨지며 터트려지는 카메라에 의해서, 너무나도 새하얗게 왜곡된 먼로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이를 위해서 케스 및 에디와 어떻게 보일지를 '거울'을 보며 연구하던 먼로는 스스로의 전시를 철저하게 통제한다. 대중에게 자신을 어떻게 드러낼지 계획하는 먼로는, 시사회의 계획에서 실수하자 전전긍긍 불안해한다. 제 의도대로 보이는 것에 실패했다며 말이다.     


먼로는 자신이 타인의 눈에 휘황찬란하게 비칠 것을 몸소 규정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가 된다. 그녀는 에디 및 케스와 함께 있던 시절 가장 주체적으로 빛났다. 볼록렌즈 앞에 서서 제 자신이 이미지를 만들었다가 지워내며 이미지를 통제했고, 객관적인 이미지가 왜곡될 수 있음을 인지했다. 또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별이 되어 잉태로 빛난다. 케스와 에디는 먼로에게 "몸이란 보여주기 위한 것, 이를 위해서 거울을 바라볼 것"만 알려줄 뿐, 그 이상의 영향력을 과시하지 않았다.(물론 추후 아버지로 위장한 케스의 막대한 영향력이 밝혀진다) 그러나 이후 먼로는 자신을 손에 쥐려 하는 남성 권력에 휘둘린다. 그것이 그간 남성들이 등장한 도미닉의 작품과 차이다. 도미닉의 남성들이 스스로 시뮬라시옹하며 초인을 의도하고 타인의 시선을 지배했다면, <블론드>에서 먼로는 스스로 시뮬라시옹하는 천부적 능력을 지녔음에도 더 거대한 남성 중심적 구조가 그녀를 시뮬라시옹하며 대체한다. 먼로는 넬을 연기하거나, 오디션에서 특정 배역을 연기하며 남성들이 여성의 삶, 그리고 제 연기 능력, 표현을 알아봐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남성들은 이에 관심이 없고, 대신 먼로를 강간하거나 엉덩이를 본다. 언론은 에디 및 케스와 쓰리썸을 갖는 먼로를 사실 그 이상으로 과잉 보도되고, 먼로의 임신은 영화사에 의해 강제로 중단된다. 대체된 이미지는 분명 현실과 그럴듯하게 닮아있다. 영화는 현실에서 무언가를 모방하여 만드는, 시뮬라시옹을 거친 시뮬라크르다. 그것은 현실에 대응물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뮬라시옹은 객관적이고도 냉철하게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진 않는다. 그 과정에서는 왜곡, 편집, 축약 등이 오가고, 이에 현실과 대응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응할 수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만인이 인지한다면 다행이지만, 대체로 이러한 시뮬라크르들이 사실 및 실재로 호도되어 현실에 시뮬라시옹, 즉 역으로 모방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영화가 다루는 인간상이나 도덕, 윤리 등은, 아무리 예술이 현실에서 자유롭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지닐 필요가 있다.      


그리고 본 작품도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하나의 시뮬라크르다. 이러한 유형의 시뮬라크르인 전기 영화는 실제 인물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책임이 가볍진 않았는데, 그래서 최근 공개된 작품들 가운데서도 논란이 일었다. 먼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논란이 된 것은 이소룡 묘사였다. 타란티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고증에 신경을 쓰면서도 평행우주의 할리우드를 그리기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평행우주에선 오만하고 경박한 가상의 이소룡을 창조했다. 하지만 가상의 이소룡은 평행우주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이소룡이 살았고 감상자가 사는 현실에 발을 걸쳤기에, 유족들은 실제 성격 및 인품과 상반되는 이소룡 묘사에 분개하였다. 이를 두고 타란티노가 이소룡은 실제로 그랬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면서, 현실을 왜곡하고 대체할 수 있는 타란티노의 오만하고 주관적인 해석은 불붙은 논란에 기름을 끼얹다. 그리고 프란시스 리의 <암모나이트>의 경우 레즈비언임이 확인되지 않은 메리 애닝을 레즈비언으로 묘사한 것이 논란이 되었다. 바바라 애닝이라는 후손은 선조의 성 지향성을 레즈비언으로 해석한 감독을 비판했고, 반면 로레인 애닝이라는 후손은 이를 지지했다. 아무래도 전자는 거짓, 고인 모독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한 것이라면, 후자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진실, 고인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드러내지 못했던 영역으로 간주한 듯싶다. 즉 두 사례처럼 아무리 가상이라 할지라도 현실에 대응하고, 심지어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영화는 진실을 왜곡하거나 다루는 대상의 주체성을 오독할 시에 논란이 되고, 반면 진실이거나 그럴 수 있다는 명분이 충분할 시엔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너그럽게 허용된다. 그렇다면 <블론드>는 어떠한가. 할리우드 문화산업, 정·재계와 결탁한 옐로 저널리즘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이면의 먼로의 진실을 보여준다는 의도 자체는 당위성이 있고, 선정적이지 않은 숏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먼로가 활동하던 당시 할리우드 문화산업 이면의 추접한 성 착취는 감상자를 불쾌하게 할지라도 진실이라면 인지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최근의 사례로 세르게이 드보르체보이의 <아이카>, 안드레아 아놀드의 <카우>,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 등이 떠오르며, <블론드>도 고통스럽지만 봐야만 하는 작품이라고 항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논란이 되는 적지 않은 숏들(적나라한 케네디와의 구강성교, 임신 중절과 이로 인한 트라우마, 성 착취당한 이후의 먼로를 비추는 노골적인 숏 등)의 진실을 확인해줄 수 있는 유족이 먼로에겐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것이 먼로의 진실이라 할지라도 과연 그녀의 의중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본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먼로는 스스로 어떻게 보이고 노출할지 선택한 여성이다. 먼로는 자신의 의도를 벗어난 과잉 보도나 촬영 결과물에 항상 분개하였다. 남성에 의해 특정한 모습으로 먼로가 꾸며지며, 그녀가 원치 않는 중절 및 유산(아서가 먼로를 친구들에게 ‘정숙한’ 모습으로 소개하고자 한 야욕이 없었다면 먼로는 유산할 일도 없었다)이 반복된다. 또 먼로는 영화 속 영화에서 남성의 기분을 돋궈주는 도구로서 여성, 남성이 구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서 선택권 없는 여성을 연기하는데, 이러한 시뮬라크르가 그녀의 의중을 대체하자 밀러와 결혼 시기의 먼로는 남성들의 손길을 완강히 거부하지 않았나. 이를 외면한 남성들이 그녀를 화장해주고, 약물을 처방하며, 경호원을 이용해 목적지를 규정하면서, 먼로는 끝끝내 어디에서도 주체적인 여성으로 설 수 없게 되지 않았나. 그런데 본 작품에서 먼로가 보여주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법한 '수치스러운 이미지들', 그리고 사실 여부를 파악할 수 없는데다가 먼로를 향한 저열한 호기심과 욕망을 충족시킬 뿐인 이미지들은, 도미닉이 본 작품에서 비판하는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의 시뮬라크르, 옐로 저널리즘의 과잉 보도에 본인도 일조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녀의 의중과 상반되는 이미지들이, 대중들에게 자의로 나타나기를 원했던 먼로의 진실을 반영하는가, 아니면 착취당한 먼로를 보고 싶은 감독의 자의적 해석이자 저열한 사디즘인가. 후자라면 겉으로는 먼로 착취를 비판하는 감독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또 <레벤느망> 같은 작품에서는 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대상이 느낄만한 불쾌감을 헤아리며 양자 모두를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 작품은 대상이 느낄 만한 수치심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먼로는 극의 후반에 온 집안의 거울을 전부 깨트렸다. 그녀는 대중들이 바라는 시선에 봉사하게끔, 비추고 노출시키는 거울에 신물이 났다. 이런 대상을 헤아린다면 필연적으로 비추는 영화이긴 하지만, 최소한 대상이 거울을 깨트리게 된 이유를 영화로 반성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이미지들이 실존 인물을 다만 차용했을 뿐인 허구의 창작물이라고 항변하더라도, 먼로의 실제 삶과 대다수 일치하는 구성 속에서 과연 감상자는 실제 먼로와 <블론드> 속 허구의 먼로를 구분하기 쉬울까. 더욱이 배우나 제작진들이 먼로의 유령이니 영혼을 운운하며 ‘무덤’까지 방문하는 것은 실제 먼로에게 기대고 있음을 자백하는 것이 아닌가. 감독은 과연 감상자들이 분간하기를 원했을까, 아니면 본 작품의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기를 원했을까. 감상자가 본 작품을 현실의 먼로와 구분하기를 바랐더라면, 현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더 전위적인 연출과 구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았을까. 영화 및 배우가 실존 인물을 입을 뿐인, 그럼으로써 대상을 본 딴 허구임을 폭로하는 마티유 아말릭의 <샹송가수 바르바라>라는 좋은 사례처럼 말이다. 여하간 남성 우월적인 구조에 착취되는 먼로의 일대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본 작품에서 임신 중절은 문화산업 및 이념이 강제한다. 낙태를 종용하는 이념이 여성의 개인적 꿈을 앗아간다. 그런데 이는 사실과 무관한 장면이다. 그렇다면 감독에 의해서 ‘굳이’ 선별된 시퀀스, 이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작금에 흡사 이를 찬성하기 위한, 난임 여성의 가련함을 내세운 선동은 아닌가. 당대의 이념이 임신 중절을 종용한 것처럼 악마화하여 이를 수정하기 위한 명분으로서 말이다. 여하간 영화 내내 먼로는 “사랑해주세요”를 외치지만,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그녀가 아닌 정숙한 여성상으로 교정되거나, 마그다의 대체품이거나, 케네디의 하룻밤 욕정에 그치며 사랑받지 못하고, 심지어 그녀의 온 인생이 케스의 욕망에서 조종됐음이 밝혀진다. 그렇게 자기의 온 인생을 부정당하고 죽어서야 아버지를 만나게 된 여인을 진정 사랑하고 배려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먼로와 마찬가지로 시대적 아이콘이었던 로미 슈나이더의 이미지와 실재의 괴리를 다루며, 현실의 그녀를 연민하고 사랑한 <키브롱에서의 3일>처럼 말이다. 분명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먼로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다룬 점, 그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없었던 먼로의 의식을 단순 시대상 지칭, 현실/허구의 도식적인 역할에 갇히지 않은 연출로 보여준 점은 미덕이다. 그러나 몇몇 숏들은 당시 문화 산업이 먼로에게 가했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기에, 이를 비판한다고 거창하게 떠들어대는 영화로서 교활하고 파렴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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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929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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