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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ul 15. 2022

빅토르 코사코프스키, <군다>

자연: 삶과 어머니

빅토르 코사코프스키(Victor Kossakovsky), <군다>(Gunda) 

- 자연: 삶과 어머니     

“모든 자연에는 올바른 해독제, 즉 실마리를 푸는 각각의 대책이 있게 마련이다.” -나딘 고디머-

그간 서구 역사에서 자연의 동물들은 끝없이 착취당했다. 근대까지 살아남은, 고래를 제외하고 가장 큰 포유동물이었던 스텔라바다소, 하지만 바다소에게서 식량을 얻고, 기름과 가죽을 얻고자 하는 인류의 야욕에 커맨더 제도에서 발견된 지 불과 27년 만에 멸종된다. 멸종과 거리가 멀어 보였던 웨이크뜸부기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웨이크섬에 살았던 신기로운 뜸부기는 2차 대전 당시 일본과 미국의 싸움에 휘말렸다. 전략적 요충지인 웨이크섬을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그들의 식량을 충당하고자 베일에 가려 있던 웨이크뜸부기는 알까지 사냥당해 이윽고 1945년에 종전과 함께 지구에서 종적을 감춘다. 외에도 인간이 문명을 형성하고, 자연을 개척하며, 무수한 동물들이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 심지어 펭귄이라는 이름의 어원이 된 큰바다쇠오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마녀'라는 오인을 사, 즉 인류의 종교 때문에 가련히 멸종되었으니, 동물은 인간의 도구이자 이념을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문명 내에서 여전히 인간과 함께 동거하는 동물들, 즉 가축들의 운명도 과연 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돼지와 닭은 언제나 잡아먹히는 대상으로, 말은 탈것으로, 소는 농경을 위해서 언제나 사물처럼 여겨지지 않았던가. 가축들은 생의 말미까지 인간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더 이상 특정 목적으로 착취할 수 없었다면 잡아먹거나 폐사시키지 않았던가. 과연 우리는 목적을 덧씌우지 않은, 생생한 존재 그 자체로 그들을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멸종하지 않은 가축임에도 그들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또 가축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던 터전에 인간이 문명을 세워, 인류와 동거하게 된 동물들은 어떠한가. 우리는 그들의 생태를 이해하지 않고, 단지 그들을 '시끄럽다', '불쾌하다' 등의 인간 중심적 사고로 편협하게 바라보진 않던가. 하지만 문명은 필연적으로 대자연에 속하고, 이러한 대자연은 생물종의 다양성이 생태계를 이루며 거대한 삶의 대순환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명에 속한다 한들, 우리와 종이 다른 존재의 삶과 언어를 이해해야 하리.     

 

빅토르 코사코프스키의 신작 <군다>가 바로 이러한 경험을 선사한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가축의 순수한 시청각에 집중한다. 거기에는 번역도, 해석도 없다. 단지 그들의 삶을 촬영한 이미지 그 자체를 느껴야 한다, 있는 그대로. 이를 연출하는 19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의 빅토르 코사코프스키는 러시아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흡사 다이렉트 시네마와 유사하다. 다만 다이렉트 시네마에 속하는 프레더릭 와이즈먼이 포착하는 대상과 친밀해져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순간까지 이른 이후, 대상을 매우 친밀한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면, 코사코프스키는 대상에게서 카메라의 존재감을 매우 희미하고도 옅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카메라가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대상을 드러내는 롱숏을 선호한다. 정치적이기보단 형이상학적으로, 약동하는 생명 그 자체를 포착하는 그의 롱숏은 타르코프스키의 롱숏에 필적한다. 또 <지구 반대편의 초상>에서는 중국의 흐린 날씨를 포착하였는데, 코사코프스키는 우리에게 보기 좋은 것, 보고 싶은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상이 보여주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낼 뿐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대상을 포착하곤 하지만, 음악이나 클로즈업을 이용하여 객관적인 대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주관적인 생각을 덧붙이기도 한다. <지구 반대편의 초상>에서 코사코프스키의 음악은 주로 삶과 세계의 숭고, 경이로움에 상응하고, 또 때때로 거꾸로 뒤집히는 카메라는 우리가 가늠하지 못하는 반대편 너머의 삶을 환기함과 더불어,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중력에 매달려 있을 우리의 삶을 시각적으로 가시화한다. <아쿠아렐라>에서도 코사코프스키는 음악으로 자신의 취향을 객관적 이미지에 일부 덧댈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삽입한 헤비메탈조차도 마냥 주관적이지 않다. 격렬하고도 과격하게 붕괴하는 빙산의 운동감과 유사한, 거칠고도 괴괴한 음의 연쇄가 특징인 헤비메탈을 삽입하여 양자의 감각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연출로 코사코스프키는 감상자의 인식을 확장한다. <지구 반대편의 초상>에서 그가 주로 포착하는 것은 인류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무한히 숨어있는 광활한 하늘이었고, 또 자연의 일부인 닭의 생태를 마주하고 삶을 성찰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는 우리가 잘 모르는 화산지대, 콘도르, 하마, 사자, 작은 곤충 등의 삶에 주목하며, 우리와 다른 난관에 부닥친 삶을 경이롭게 헤쳐 나가는, 작지만 거대한 생명의 에너지에 주목한다.      


<아쿠아렐라>에서는 무거워서 계속 아래로 가라앉고, 어두워서 내부로 침잠하며, 차가워서 단단하게 얼어붙는 러시아 극동의 '물'에 초점을 맞춘다. 코사코프스키는 모든 것을 꿀꺽 집어삼키는 자연 및 물의 섭리, 아주 두터워 휩쓸려버릴 것만 같은 파도의 형태감, 명확하고 분명하던 하나의 생명이 혼탁한 물로 되돌아가서 다시금 맹아를 틔우는 순환을 포착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코사코프스키가 예찬하는 것은 삶이다. 그는 이러한 삶을 지나치게 무겁거나 진지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느슨하고 유유자적하며 때론 경쾌하다. 이는 감상자가 마주하기에는 특별한 사건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포착되는 대상에겐 지금까지 누려왔던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별 다를 바 없는 일상이지만 소중한 삶을 지속해서 이어가고자 하는 노동, 작업, 동물들의 사냥 등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행위의 이유는 바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저 하늘을 비행하는 자유에 있다. 이러한 삶을 지속해서 계승하고자 임신, 새끼라는 소재가 지속해서 반복된다. <아쿠아렐라>에서는 자연의 운동감과 인간의 운동감을 대비한다. 물로 대변되는 자연이 계속 내부로, 아래로 집어삼킨다면, <지구 반대편의 초상>처럼 중력을 거스를 수 없다면, 인간은 그렇게 빙하와 바다가 집어삼킨 사람, 자동차 등을 건져 올리며 죽음이란 자연의 원리를 잠시 유예하는 삶을 지속한다. 자연의 섭리는 수면 위의 빙하가 수면 아래로 붕괴하고, 이에 바다 아래 있던 빙산이 반작용으로 솟아오르는 수동적인 상승이라면, 인간은 저항적이고도 주체적인 태도로 계속 상승하려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빙산이 수직으로 제시된다면 인간은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바다가 수평으로 펼쳐진다면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역경을 극복하는 숭고한 인간의 초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도 값진 삶을 포착하는 코사코프스키의 카메라는 이제 돼지와 닭, 소들이 사는 농장으로 시선을 옮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흑백이다. 영화의 색채는 무채색으로 제한되고, 세상의 찬연한 유채색은 실종된다. 하지만 우리는 색채가 사라진 만큼 이외의 요소에 더 많은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코사코프스키는 색채 대신 대상의 윤곽과 움직임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 위해서 영화는 대사나 자막도 포기한다. 대사나 자막이 있는 영화는 그것의 텍스트가 영화의 시청각을 보조해주기도 하지만, 한편 텍스트가 이미지를 지배하여 잡아먹는 경우도 으레 있다. 후자 같은 경우에는 '움직이는 이미지'로서 영화를, 텍스트라는 문학 내지는 언어가 지배하는 매체의 역전이 발생한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텍스트가 전면 배제됨에, 자막이 존재하는 무성영화보다도 훨씬 더 순수한 시각, 언어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한 청각을 보여준다. 순수한 시청각은 인간의 해석이 덜 덧씌워진 순일한 동물을 비춘다. 코사코프스키는 이를 아주 긴 호흡의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그간 코사코프스키의 숏들이 비교적 짧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독은 짧은 숏들의 연속으로 발생하는 움직임이 아닌, 하나의 숏에서 살아 숨쉬는 동물들의 움직임과 이미지, 현실의 시간에 집중한다. 그래서 하나의 숏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카메라의 트래킹이 눈에 띈다. 마찬가지로 다른 요소가 제거되어 영화의 훌륭한 촬영이 더욱 돋보이는데, 운동감은 대체로 부드럽고 경쾌하다. 새끼들을 조심스럽고도 애정어린 시선으로 굽어보는 영화의 매끈한 트래킹은 흡사 어미의 시선을 형상화한 것과 같고, 새끼 돼지들이나 소들이 축사 밖으로 나가서 뛰어 놀 때는 그들의 다리에 상응하듯 매우 발랄하다. 카메라는 동물의 운동을 가시화하고, 영화의 결말에서는 이와 상반되는 인간의 무거운 운동감을 대비한다. 동물들의 움직임이 자유로움에 상응하는 경쾌함이라면, 모든 가능성을 말소하는 지게차의 획일화된 움직임, 무거운 운동감은 불안하고 괴괴하다. 이렇게 긴 호흡의 유려한 테이크로 포착되는 것은 동물의 순수한 자기표현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당나귀,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에서의 소, <토리노의 말>에서의 말은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순수한 자기표현의 경지에 이른다. 그들은 타인의 시선에 부합하거나, 카메라를 의식하며 움직이지 않는 거짓 없는 순수한 자기표현을 보여준다.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새끼돼지들이 난생처음 보는 카메라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카메라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며 행동을 뒤바꾸진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제 마음대로 행동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새끼 잃은 어미 돼지의 슬픔도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슬픔을 과시하고 전시하기 위해서 어미 돼지는 애달프게 새끼들의 흔적 주변을 배회하지 않는다. 어미 돼지는 주변에 누가 있든, 자신이 진정 슬퍼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자기표현에 집중할 수 있는, 특정 감각을 제한하여 움직임과 형태, 표현을 강조한 형식으로 코사코프스키는 농장 곳곳을 파고든다. 이러한 농장에서 코사코프스키가 주목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찬동하는 삶이다. 영화는 어미 돼지의 출산으로 시작된다. 도입부에선 출산하는 것이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어미는 잠든 것처럼 보이고, 활발한 새끼들은 꼬물꼬물 우리 밖으로 나오고 있다. 새끼들은 세상이 몹시도 궁금하다. 하지만 이러한 호기심보다 더욱 급한 일은 어미의 젖을 빠는 일이다. 새끼들은 다시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이후 어미가 출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렇게 모체에서 빠져나온 한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어미의 젖꼭지를 향해 허겁지겁 기어간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들은 자신들이 젖을 물어야 한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할 것이다. 왜 먹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머니가 헐떡이고 뒤척이며 일어나서 자기 곁을 떠나려 할 때 왜 비명을 질러야 하는지도 모를 테다. 그들은 왜 먹어야 하고, 왜 어미 곁에 붙어있어야 하는지, 그렇게 왜 생존해야 하는지, ‘왜’에 답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새끼들은 이유도 모른 채로 그저 살고 있다. 하지만 이유 없는데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이다. 그렇게 먹고 이제는 잠을 청하는, 삶의 어떠한 불순한 요소도 뒤섞이지 않은 새끼 돼지들을, 이에 걸맞은 아주 새하얗고 순수한 자연광으로 포착한다. 삶이라는 것은 단순하고 이유도 없이,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끝날 때까지 삶 그 자체를 비추며 지속해야 하는 것… 이후 아기돼지들이 점차 자라난다. 이제 제법 자란 돼지 남매들은 우리 밖으로 나가서 산책하고 뛰어논다. 바깥은 태양의 눈부신 빛이 찬연히 쏟아짐에, 흩날리는 먼지조차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만물을 드러낸다. 또 볏짚이 잔뜩 깔려있어 푹신푹신할 우리 안과는 다른, 질척거리는 진흙과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하며 때론 따가운 잔디의 감촉이 자리해있다. 때때로 비가 내리면 우리 안에서는 느껴보지 못했을 물의 감촉도 느낄 수 있다.  

   

아기 돼지들은 이러한 바깥에서 쉴 새 없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태양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며 눈이 부심을 느끼며, 코사코프스키의 카메라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튀어 나간다. 난생처음 바깥에서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 그들은 이러한 호기심을 충족하는 생경함이 흥미로우리라. 하지만 이러한 호기심이라는 이유가 아니어도 이들은 마냥 즐겁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것, 눈이 부신다는 것은 그들의 감관이 제 역할을 한다는 것, 그것이 마냥 만족스럽다. 또 다른 형제들과 투덕거리며 놀기도 하고, 이는 다툼처럼 보이기도 한다. 돼지들은 다른 형제로 살지 않고, 제 기분대로 산다. 자신의 공격성으로 이를 느낀다. 돼지뿐만이 아니라 많은 시간 축사에 갇혀있는 소들도 바깥으로 나와서 이유가 불명확한 즐거움을 누린다. 축사는 보나마나 소들의 행동을 제약했으리라. 그러한 축사에서 잠시 동안 초원으로 풀려나 해방을 맞는다. 소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표정도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이들은 마음대로 질주한다. 이렇게 외부에서 그들은 제 몸이 기능을 다 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며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환기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감각을 느껴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까. 산다는 것, 특히 '나'로 산다는 것, 그것은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저 절대적으로 값지고 고귀하기에 영화는 맹목적인 삶의 치열함과 즐거움만을 포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이러한 새로운 감각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 아기 돼지들은 자기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머물러 있던 우리를 떠나야만 한다. 그들이 너무 어렸을 때는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외부의 까마귀 소리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직은 어미가 지켜줘야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스스로 나갈 수 있는 존재인 닭들을 포착한다. 그들이 사는 닭장은 비좁음을 대가로 새들을 지켜준다. 닭의 귀에도 아기 돼지와 마찬가지로 야조의 울음소리가 관통하며 바깥은 두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날벌레 소리도 도처에 만연하다. 닭들은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그들이 날벌레를 잡아먹어야만 자신의 생을 이어갈 수 있다. 그래서 닭들은 문밖의 풀숲에 숨으면서 외부로 나가 생명을 이어간다.      


이는 평화로움과 동시에 미지의 물안개가 잔뜩 껴있는 초원도 마찬가지다. 축사에 비한다면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는 공간, 그럼에도 소들은 바깥으로 나간다. 영화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닭의 발과 그들의 갸웃거리는 머리를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닭의 시점을 구현하여 인간의 시선에서는 느껴보지 못할, 또 안전한 문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겐 잊힌, 삶과 죽음이 언제나 한 쌍인 자연의 인지적 가치를 전달한다. 그리고 이렇게 필연적으로 외부로 나가는 삶이란 지금까지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정적인 이미지와 정반대인, 트래킹 숏이나 달리 숏, 패닝 등의 움직이는 이미지다. 고정된 카메라는 멈춰있다. 이는 기존 삶의 고정일 수도 있겠지만 움직이지 않는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움직이는 것이 곧 사는 것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에는 항시 자유와 위협이 한 쌍으로 공존한다. 능동적인 연출로 포착되는 닭들은 털과 다리가 아주 멀끔하여 건강함이 느껴지는 이들도 있지만, 한편 머리 부근에 털이 잔뜩 뽑혀 있는 닭이나, 다리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외다리 닭도 있다. 그들은 외부의 위협에 더욱 취약하다. 이들은 다른 닭들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죽어가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외부로 나간다. 우리는 이러한 닭들을 보며, '죽어가며 살아가는' 세계의 본질을 환기한다. 외다리 닭은 초원을 누빈다. 한걸음 떼고, 날개를 퍼덕이는 것도 다른 닭들에 비하면 힘들고 절망스러우랴. 하지만 닭은 포기하지 않고 한걸음씩 조심스레 전진하고, 그렇게 절망스럽고 암담해 보이는 세상을 찬란한 하늘이 장식하기 시작하며, 닭들은 여명의 밝아옴에 울부짖는다. 그것이 바로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릎 쓰며 외부로 나가는 삶,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가는 삶, 그렇게 삶을 버팀에도 필연적으로 죽음이 곳곳에 묻어나는 삶… 이렇게 코사코프스키가 포착하는 자연은 여러 미적 속성이 교차한다. 일단 도입부에서 어미 돼지가 출산하는 도중에 들려오는,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예로부터 인간이 아주 듣기 좋은, 미적인 소리로 여겨졌다. 컬러나 텍스트를 소거하여 시청각에 집중을 집약하는 <군다>는, 그들의 울음에 더욱 주목할 수 있다. 그들의 울음은 인간의 귀에 아주 질서정연하게, 또 경쾌하고도 유려하게 들린다.      


그런데 산새가 우는 목적이 자신들의 삶과 유리된, 인간의 유미적인 목적을 위해서 지저귀는 것일까. 새들은 이유 없이 지저귀지 않는다. 구애할 때, 무리와 소통할 때, 인간의 귀에는 유려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들이 싸울 때 지저귄다. 그 소리의 형식 자체가 아름답게 여겨질지 몰라도, 그 형식이 기원한 것은 구애하며 새로운 삶을 피워낼 때, 치열하게 제 삶을 지키기 위할 때다. 산새들의 청각과 조화를 이루는 시각이 어미 돼지의 출산인 것처럼, 시청각이 서로 가리키는 것이 ‘삶’인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은 지금껏 미를 자연에서 길어왔다. 동북아의 산수화는 인간의 작은 영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영혼 그 자체인 자연을 아름답게 여겼고, 이를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자연을 구성하는 그들 각각의 시선에서 가장 이상적인 '다시점'으로 구현하였다. 또 예술적인 춤과 예술적이지 않은 춤을 구분하는 존 위버, 장-조르주 노베르의 이론에서 예술적인 춤은 무언가를 모방하는데, 그 무언가는 아베 바퇴의 주장에서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이란 전통을 이어간다. 이렇게 인간은 자연에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감각, 형식을 예술로 빌려온다.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이 오직 아름다움만 수반하고 있을까. 최소한 본 작품에서는 자연미의 기원이란 바로 생명이 탄생하고 이후 버텨가고, 이제는 그들이 번식하려고 치열하게 이어가는 삶과 연관한다. 그렇다면 추하다는 것은 당연히 이와 반대되리. 영화에서도 그렇다. 아름다움이 출산과 탄생이라면, 추는 어미가 조금만 뒤척여도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는 약하게 태어난 한 아기 돼지, 털 빠진 닭, 외다리 닭, 부패에 몰려드는 파리떼다. 그들은 죽음에서 멀리 있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있으며, 심지어 죽음이 묻어난다. 하지만 그들은 마냥 추하지 않다. 오히려 경외감이 든다. 이유는 다른 존재들보다 불균형하기에 더욱더 많은 힘과 의지가 필요한데도, 그들은 꿋꿋하게 서 있고 버티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한 그들로부터 압도적이고도 거대한 힘을 인식하는 '숭고'를 느낀다. 이렇게 코사코프스키는 자연에서 모방하는 미적 속성의 기원을 추적하며, 필연적으로 추하지만 아름답고자 숭고한 생명에 주목한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그들은 혼자 살지 않는다. 아기 돼지는 어미 없이 혼자 살 수 없고, 닭들도 여러 마리가 공존하며, 소들도 무리를 이룬다. 영화에선 닭보다 소가 더 많은 수로 무리 지어 살고 있음이 강조된다. 하지만 이윽고 영화는 개개의 초상에 주목한다. 하나의 무리에 모여 있지만, 개별의 소는 너무나 다르게 생겼다. 그들은 무리에 속하지만 분명 구성원들과 다른 개별로 살아간다. 하지만 다시 개별은 ‘함께’가 된다. 소들은 꼭 비슷한 개체가 두 마리씩 짝을 지어 서로의 거죽을 부대끼고, 행동을 따라한다. 또 가만 보면 숏에 단 하나의 생명체만 포착되지 않는다. 소의 몸에는 파리가 들러붙어 있으며, 특히 그들의 눈물샘에 잔뜩 모여 있다. 소들은 파리떼가 너무나도 귀찮다. 파리떼 때문에 잠을 청할 수도 없다. 너무 귀찮아서 꼬리를 탁탁 치지만 그런데도 공존해야 한다. 파리가 소의 눈물샘에 붙어있는 것은 소가 내어주는 수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랴. 그렇게 눈물샘에 모여 있는 파리가 포착된 이후, 아기 돼지들이 빗물을 받아먹는 숏으로 이어진다. 눈물샘에 모인 파리, 젖과 빗물을 받아먹는 아기 돼지, 양자는 결코 혼자서 생존할 수 없다. 어미 돼지와 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나’로 살되, 공존하며 살아간다. 지구와 공존하며 빗물과 터를 받아먹고, 그들이 다른 작은 생명체에게 지구가 되어 물을 나눠준다. 그래서 한 개체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개체가 이룬 작지만 경이로운 생태계 또한 파괴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연이기도 하지만, 가축으로서 문명의 일부이기도 하다. 인간이 전혀 개입하지 않은 자연이라면 적은 먹이를 두고 다투었겠지만, 본 작품이 포착하는 것은 문명의 일부이기도 한 농장이기에 이들은 풍요롭다. 그렇게 풍요롭고 위협으로부터 일련 안전한, 문명이기도 한 농장에서 우리는 공존의 미덕을 본다. 이들이 자연과 다른 것은 약자들이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도입부에서 약하게 태어난 아기돼지, 태어나서는 볏짚에 퐁당 빠질 정도로 유약했고, 어미에게 밟혀서 다리가 부은 상태의 기형으로 자라나며, 어느 정도 자란 이후에도 다른 형제들과의 걸음, 먹이경쟁에서 뒤처진다. 자연이라면 이미 도태되었을지 모르지만, 가축으로서 문명의 일원이기에 그 새끼 돼지는 살아남는다.      


병든 것으로 추정되는 닭, 외발만 남은 닭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공존하고, 문명은 약자들과 함께 동행한다. 문명으로 편입된 동물들의 행동을 보며 동시대인들이 망각하곤 하는, 약자와 함께 살기 위해 비롯한 문명의 본령을 환기한다. 더욱이 병들고 외발만 남은 닭은 산업 동물로서 가치가 사실상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생명은 가치와 무관하게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기 위한 생명의 첫 번째 공존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 너머의 문을 뛰어넘는다. 아기 돼지들은 어머니에게서 빠져나왔고, 또 문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던져지지만 태어난 직후의 아기 돼지는 너무나도 약하다. 그래서 당연하다시피 다시 문 안으로, 어머니의 품으로 파고들어 어미의 젖꼭지를 찾는다.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들판은 롱숏으로 포착된다. 새끼들은 롱숏으로 겨우 담아낸 거대한 세계에서 미약하리만큼 왜소하다. 하지만 어미는 거대한 세계에서도 눈에 띄게 큰 존재다. 세계가 무지하여 두려운 새끼들은, 오직 눈에 띄고 잘 아는 어머니를 따라간다. 어머니는 새끼들의 표적이자 목적지다. 그렇게 어머니의 뒤를 따라가다 새끼들도 어머니에게 필적하는 존재들이 되리. 이렇게 어머니에 의해서 공존이, 탄생이, 생의 지탱이 가능하랴. 어미 돼지는 언제나 젖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어미에 의해서 뽀송뽀송해진다. 축사 안으로 들어온 새끼들은 빛과 어둠이 절반씩 공존한다. 어둠에 파묻힌 새끼는 어머니의 헌신으로 세상 속에서 제 존재를 발광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어미는 아예 어둠에 파묻혀, 영화의 포스터처럼 오직 '윤곽'만 남는다. 어미는 자신을 어둠에 가두어 새끼들에게 빛을 내어주는 존재다. 물론 새끼들은 충분히 자라나서 어미도 더 이상 어둠에만 파묻히지 않고, 새끼들은 알아서 바깥에서 빛을 쐬곤 한다. 하지만 새끼들에게 젖이 충분해 보이는 순간에도, 어미가 지쳐서 쓰러진 것처럼 보이는 와중에도, 여전히 어미는 자식들에게 젖을 물린다. 어머니는 항시 출산하고 젖을 물리며, 짚에 파묻힌 새끼는 들춰내는, 무언가를 '배출'하는 존재다.      


이렇게 자신의 일부를 새끼들에게 내어주는 어미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어미가 호흡하는 것인지, 새끼들이 젖을 물면서 발생하는 살 떨림인지, 어미 돼지 복부의 움직임은 정체가 분간되지 않는다. 어미 돼지는 그녀 자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끼들에 의해 산다. 새끼들이 어느 정도 자란 이후, 어미의 움직임은 훨씬 더 줄어든다. 이제 새끼는 어미의 허락 없이도 바깥으로 나갈 수 있고, 이제는 지친 어미가 축사 안에서 쉰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미의 일은 멈추지 않아서, 몸은 축사 안에 있는 상태에서 얼굴은 바깥으로 빼놓고 여전히 걱정스레 새끼들을 바라본다. 어미란 자신을 멈추어가며, 자기 자손들을 움직이고 뛰어놀게 해주는 존재다. 그렇게 공존하는 존재의 호흡이란 나 자신의 호흡임과 동시에, 타인이 발생시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의, 어머니의 질서에 인간이 개입한다. 새끼들을 데려간다. 어미는 새끼들과 강제로 이별한다. 어미는 떠나간 자식들이 남긴 발자취를, 흔적을 빙글빙글 돌기만 할 뿐이다. 어미와 그녀의 젖꼭지는 목적을 잃은 채로 방황한다. 새끼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미는 그들의 부재에 더 이상 활기를 누릴 수 없다. 앞으로 진전하던 어미의 삶은 새끼와 함께 가능했기에, 아무리 빙빙 돌아도 새끼가 돌아오지 않아서 비관한 어미는 우리 안에 자신을 가둔다. 새끼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어미에겐 죽은 것으로 여겨지기 충분할 것이기에,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기에. 공존하지 못하는 삶에 어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어미, 이렇듯 공존하지 않는 삶은 '퇴보'다. 공존을 모르는 인간은 자연과 어머니의 정신을 망각한다. 문 밖으로 나가며 시작되었던 영화는 다시 문 안으로 들어오는 악순환을 포착하며 마무리된다. 자신의 삶을 새끼들에게 나눠준 어미 돼지였지만, 마찬가지로 어미의 살 떨림과 호흡은 자식들에 의해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자식들에 의해서 살아가던 어미 돼지, 그러한 어미 돼지의 호흡을 미약하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불필요한 개입이다. 인간의 개입은 출산과 탄생 이후 때 이른, 불필요한 죽음을 부른다. 코사코프스키는 너무나 당연해진 폐해에 경종을 울린다.      


이러한 본 작품은 자연 미학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코사코프스키의 카메라는 비록 인공물이지만, 그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순수한 자연물이기에 말이다. 자연 미학의 대가 알렌 칼슨은 예술품과 자연물, 각각의 지각 차이를 논한다. 예술은 감상자에게 적절한 지각의 방식을 유도한다. 하지만 자연물은 인간 감상자의 시선을 상정하고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서 요구되는 것은 지각을 위한 감상자의 특별한 태도, 특히나 자연에 대한 지식, 과학, 교양을 습득하여, 이에 따라 미적 속성을 판단하는 능동적인 감상이다. 예술품이 감상자가 전제하지 않아도 될 정보를 몸소 제공해 준다면, 자연물들은 감상자를 위한 정보를 제공해주지도 않고, 우리를 위해서 '연기'하지도 않는다. 자연물을 위해야 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다. 코사코프스키의 <군다>는 바로 이러한, 자연물에게 깊이 참여하는 자연 미학의 미덕을 일깨우며, 그간 ‘감상되기 위한 인공물’들을 마주하는 경험과 전혀 다른, 감상을 전제하지 않은 자연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몸부림치고, 대상을 느끼고 교감하고자 오감을 깨우는 생경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시는 바로 영화 속 닭들이다. 닭들의 첫인상은 볼품없어 보인다. 아름답기보단 억새고 거칠게 보인다. 과연 “가축으로서 닭이 맞긴 할까, 인간에게 버려진 노계는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든다. 이윽고 그들이 사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환경을 고루 보며 골똘히 유추하니, 그 초라한 몰골이 이해가 된다. 이제는 불쾌하거나 초라하기는커녕 숭고해 보인다. 영화는 위험한 대지에 꿋꿋이 서서 버티는 닭의 발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하며 '예술'로서 숭고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하지만, 감상자는 능동적으로 닭의 삶과 환경을 오감으로 이해하며 불쾌를 숭고와 미로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되리. 이러한 경험, 대상에게의 참여는 곧 잊힌 공존의 정신, 자연과 어머니의 희생을 되새기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무수한 불순한 것들로 잊히고 퇴색된 본원적 정신, <군다>는 그 값진 정수를 자연, 그것도 일상적이어서 주목조차 하지 않은 친숙한 농장에서 길어내며, 공존이 우리로부터 전혀 멀리 있지 않고 다시 회복해야 함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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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071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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