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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Oct 10. 2022

가스파 노에, <소용돌이>

여러 개의 세계와 시간

가스파 노에(Gaspar Noe), <소용돌이>(Vortex) - 여러 개의 세계와 시간     

“산다는 것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낄 수는 없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낀다면, 그건 어제를 기억하는 것이지 느끼는 게 아니다. 어제 이미 살았고 그래서 잃어버린 것을 오늘 살고 있는 시체일 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

① 2021년 상반기에는 기억에 관한 영화가 다수 공개되었다. 플로리안 젤너의 데뷔작 <더 파더>에서 기억은 바위처럼 완고한 자아를 이루는 질료다.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하는 안소니는 한때 기억이 선명했을 때, 어떤 사람보다 완고했고 강인했으며 똑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흐려져 뒤죽박죽 뒤섞이는 그의 의식에 의해 자아는 흐려져 간다. 과연 그는 누구인가, 누구였는가, 무슨 일을 했는가? 또 과거와 지금을 혼동한다. 과거에 그랬던 내가 현재에 엄습해오고, 반면 현재에 그래야만 하는 나는 부재하니, 치매 환자와 그를 둘러싼 다른 이들은 서로 다른 '언제'에 살고 있다. 또 현실과 영화의 관계 속에서 ‘안소니’는 과연 누구인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어느 차원에 머무르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안소니는 영화에 안소니로 머무는가, 아니면 현실의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에게 기대는가. 한편 어떤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기억을 잃었다. 크리스토스 니코우의 <애플>에서 말이다. 기억은 나를 행복하게도 만들지만, 한편 괴롭게도 만든다. 한때 행복했던 기억을 더 이상 현실에 적용할 수 없음에, 그리고 슬픈 기억이 잊히지 않아 줄곧 나를 고통스럽게 함에, 주인공 알리스는 기억을 지우고 싶다. 그렇게 기억 없는 나, 기억이 현재에 지시하지 않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를 초기화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지만, 한편 그 과정에 타인의 손길이 개입하여 수동적인 나로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은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뇌리에 남아있어야 한다. 기억 없는 존재는 자신이 스스로를 자각할 수 없으니, 나조차 망각한 내가 되어버리는 것이니.

② 지알로: 노랑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에서 비롯한 영화 장르 및 사조 명. 노란색은 주로 광인의 색채라고 불린다. 밝고 뜨거운 색채로서 노랑은 줄곧 자신의 에너지를 쉼 없이 소진하는 태양을 연상케 하고, 이는 흡사 자신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는 채 무절제하게 자신을 낭비하는 광인에 상응한다. 지알로 장르의 속성도 그렇다. 절제라곤 모르는 무분별한 분출과 표현, 욕망과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시키는 서사 등, 지알로 장르의 특징은 동물적이고 가학적인 본능을 자극하며, 우리를 통제하는 현실의 제어에서도 벗어나 초자연적이고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허용한다. 작금에 지알로 장르는 영향력으로만 남아 있다. 마리오 바바는 1980년에 작고하며 지알로 장르에 막을 내렸고, 현존하는 지알로의 기수 다리오 아르젠토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곤 있지만 80년대 이후로는 전성기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서두에 기억 상실과 지알로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가스파 노에의 신작 <소용돌이>가 한 노부부의 치매를 소재로 하는데, 본 작품의 주연이 바로 다리오 아르젠토이기 때문이다. 그간 몇몇 단역을 제외하면 연기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감독을 주연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지알로를 대표하는 다리오 아르젠토의 상징성은 본 극의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그는 지나가 버린 지알로의 시대를 되뇔지도, 아니면 작금에 흐릿해져 가는 지알로 장르의 현실과 전성기 기억과의 간극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이와 더불어 그의 아내를 맡은 배우는 장 외스타슈, 마르그리트 뒤라스, 앙드레 테시네의 작품에 출연하며 20세기 프랑스 영화를 풍미한 프랑수와 레브랑이다. 저물어가는 지알로의 기수와 누벨바그의 뮤즈, 노에는 흐려가는 20세기의 영화의 오늘을 본 작품에 담아낸다. 1963년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의 가스파 노에는 아주 극단적이고도 자극적인 표현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 군부가 주도한 '국가 재건 과정'의 민주주의 타도, 독재 때문에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에서 자라났다. 현재까지 아르헨티나 국적은 유지하고 있지만, 줄곧 프랑스에서 작품을 찍고 있다. 영화제에서 그의 작품이 상영되면 객석은 언제나 얌전히 넘어가는 법이 없다. 비명과 경악이 내질러지는 한편, 어느 곳에서는 경탄한다. 극단적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작품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객석은 소란스러워지고,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줄곧 논쟁이 오간다. 왜냐면 가스파 노에는 성애, 본능에 대한 아주 적나라하고도 극심한 표현을 일삼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이 악명으로 저명해진 것은 바로 <돌이킬 수 없는>에서 롱테이크로 적나라하게 구현한 강간 테이크 때문일 것이다. 이후 <러브>에서는 아주 노골적인 정사를 3D로 구현하여 체액이 스크린 바깥으로 튈 것 같은 추잡함을 보였으며, <클라이맥스>에서는 희미한 이성의 끈에 매달려 유연하게 펼쳐지는 춤, 약물에 의해 극단으로 치닫는 본능의 폭력성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카메라가 중앙에서 과감히 포착하였다. 그의 숏들은 언제나 펄펄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은 붉은 색채로 뒤덮여 있으며, 크레딧에서부터 시뻘겋게 표현되는 텍스트도 욕망, 피를 선보이고자 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예고한다. 물론 욕망에 대한 가스파 노에의 관심은 반성적이고 심오하다.      


<돌이킬 수 없는>의 극단적인 표현은 경각심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남성의 이기적인 폭력에 의해 한 여성이 어떻게 파멸하는지를 생생한 간접 체험으로 경고한다. 롱테이크를 선호하는 노에의 연출은 연극적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매우 현실적으로 그가 밀착한 감각성을 관람객이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 <러브>에서는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연출임에도 허망하게 손에 잡히지 않는 욕망의 본질적 공허함을 탐구했고, <클라이맥스>에서는 이성의 통제에서 벗어난 극단적인 본능을 경계하였다. 그는 언제나 욕망에 대해서 이기적이어선 안 됨을, 욕망의 대상과 풍부한 교감이 있어야 하고 잘 알아야 함을 역설하나, 이러한 주제 의식은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해야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궁핍함, 부조리함을 ‘공백’으로 담아냄으로써 주제 의식을 강화하는데, 이러한 부조리한 씬들이 노에의 의도와는 달리 감상자의 태도에 따라서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찬반양론이 갈린다. 위험한 것을 포착하는 그의 카메라가 마찬가지로 위험할 수 있다. 그것이 경각심을 일으키든, 악랄하게 착취되든, 여하간 노에의 카메라는 감상자를 간접 체험하게 만든다. 이는 <소용돌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의 막바지에 놓인 노부부의 불안과 치매의 혼란을 생생히 체험하게 할 연출을 노에는 선보인다. 그리고 노에의 자극적이고 붉은 이미지들은 지알로 장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런 점에서 다리오 아르젠토를 기용하여 한 노인의 퇴장을 담아내는 그의 영화는 존경과 헌사의 의미를 지닐 것이다. 캐스팅 외 지알로와 아르젠토에게 경의를 바치는 형식으론, 영화 끝자락에 초록색, 노란색 화면으로 노부부가 퇴장하는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지알로스러운 쨍하고 키치한 원색으로 인생이라는 꿈을 마감하는 루이와 엘르를 담아낸다. 이러한 영화 말미의 색채를 제외한다면 영화는 지알로풍도 아니고, 노에의 그간 자극적인 형식도 지향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감각보다는 화면비와 분할 스크린으로 치매의 감각을 구현하는데, 좁다란 화면비의 경우에는 웨스 앤더슨이나 지아장커, 자비에 돌란 등이 연상되는 실험이고, 분할 스크린은 베르트랑 보넬로가 연상되는 형식이다.      


그간 노에와 다른 연출, 일단 본 작품의 화면비는 1:1로 매우 좁다. 그리고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본 화면비는 아주 고전적이다. <소용돌이>의 화면비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본 화면비와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국내 개봉작으로 <행복한 라짜로>, 미개봉작으로 리산드로 알론소의 <도원경>을 꼽을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나 <도원경>의 1.33:1의 화면비, 그리고 본 작품의 거의 1:1의 화면비는 서로 닮아있고, 이는 초기 영화 시대의 화면비, 무성영화 시대에나 사용할 법한 화면비다. 이들 작품과 <소용돌이>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좁은 화면비만 닮지 않았다.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점도 닮았다. 보통 영화의 모서리는 각이 져 있다. 완벽한 직각, 하지만 본 작품과 과거 영화에선 모서리를 부드럽고도 둥글게 처리하곤 했다. 그래서 둥근 모서리와 좁은 화면비의 결합은 '과거'라는 시간성을 가리킨다. 영화 속 치매를 앓는 사람은 엘르다. 그녀는 장난감을 찾는다. 손자 키키에게 주려는가? 하지만 그녀는 키키를 인지하지 못한다. 또 현재의 아들 스테판은 젊은 날의 루이와 닮은 모양인지, 엘르는 스테판에게 키스한다. 즉 그녀의 의식은 과거에 머무는데, 그런 점에서 엘르는 키키를 위해서 장난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억 속의 어린 아들 스테판을 위한 장난감을 사려는 것이랴. 1944년생인 레브랑, 그녀가 연기하는 치매에 걸린 엘르, 이들은 초기 영화 시대에 갇혀 있다. 하지만 치매에 걸리지 않은 루이 또한 둥근 모서리의 좁은 화면비에 포착된다. 치매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는 아주 무수한 기억이 축적된 사람이다. 루이는 영화감독이다, 배역을 맡은 다리오 아르젠토처럼 말이다. 그래서 현재에도 각본을 집필하고,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 풍부하다. 또 엘르의 배우자로서 마땅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영화에 대한 관심, 부부에 대한 의무, 그 모든 것은 기억에서 비롯한다. 둥글고 좁다란 화면비부터 있어왔던 것들, 하지만 영화에서 보건대 그는 각본을 끝끝내 쓰지 못하고 엘르는 커녕 자신조차 돌보지 못한다. 치매에 걸려 퇴행하는 엘르, 치매에 걸리지 않았어도 기억이 더 많은 루이는 이렇게 과거에 완성된 틀에 갇혀있다.     


그리고 부모들이 축적한 사물들로 구성된 집에 방문하고, 부모들이 남긴 장례식에 참여하는 현재적 존재인 키키와 스테판도 둥글고 좁은 화면비에 속한다. 자식과 현재의 인류는 부모, 조상의 오래된 기억의 축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듯이. 그래서 본 작품의 둥글고 좁다란 화면비로 사물이나 정지된 초상을 포착할 때는 흡사 '액자' 같은 느낌도 든다. 인간은 현재를 능동적으로 사는 존재이기보단, 과거에 멈춰서 고정되고 붙잡힌 사진이나 회화 같은 존재라는 듯이. 이러한 둥근 모서리는 부드럽게 사람의 시야를 안쪽, 중앙으로 모으는 효과를 내며 좁은 화면비에 쏙 들어오는 얼굴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각진 화면비로 구성된 영화 감상에 비해서 작위적이고 어색한 가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는 좁다랗기에 1.66:1의 화면비나 2.39:1의 화면비에 비해 레터박스와 필러박스, 즉 검은 화면이 더욱 많아서 가상성이 안 그래도 도드라지는데, 이러한 좁은 화면이 스크린에 두 개씩 공존하고, 두 개의 화면 사이에 좁은 필러박스가 위치해서 더더욱 허구적인 느낌을 준다. 본 작품에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밤의 환경과도 같은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영화가 곧 꿈이요,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곧 꿈이라는 노에와 아르젠토의 지론이 대사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상대방의 표상을 흡사 영화관에서 감상하듯, 의식이 잠들어 어두운 무의식이 스멀스멀 깨어나는 꿈을 영사하듯, 검은 화면에 영화 및 인생이란 좁다랗고 둥그런 가상적인 '꿈'을 그려 넣는다. 이러한 화면비에서 노에 및 아르젠토의 꿈은 롱테이크로 포착된다. 하지만 완전한 롱테이크는 아니다. 영화는 아주 짧은 블랙아웃, 즉 롱테이크처럼 보이지만 중간중간 아주 짧고 찰나적인 컷이 침투하여 불연속적으로 깜빡거린다. 아주 짧게 잘렸기에, 잘림을 기준으로 전과 후는 별 어색함 없이 연결되지만, 그런데도 잘렸다가 다시 이어 붙인, '불완전한 연결'이다. 이는 인간의 필연적인 불완전함을 의미할 테다. 의식은 과거로 줄곧 회귀하고 길을 잃지만 육체는 현재에 놓인 엘르, 현재의 변화한 육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에 지배받는 루이는 아주 매끄럽게, 그리고 온전하게 과거에서 현재로 흘러올 수 없다. 당연한 흘러감을 중단하거나, 양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과거라는 장애가 계속 현재에의 참여를 '컷'한다.      


또 과거의 매체인 '흑백'과 이어지기도 한다. 현재의 매체인 '컬러' 대신에 말이다. 한편 루이는 과거만으로 깜빡이지는 않을 테다. 늙은 루이는 앞으로 살아갈 시간보다 살아온 시간, 즉 기억이 많은 존재이긴 하지만, 엘르와 달리 무언가를 '창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의 한계를 초월하여 환상을 실현하는 영화를 여전히 창조하고자 시도하는데, 그렇게 현실에서 꿈으로 초탈하기에 컷이 대두되는 것인지 모른다. 여하간 지상의 인간은 불완전하다. 어찌 됐든 현재가 불만족스러워서 엘르는 과거로, 루이는 미래로 향한다. 그렇게 현재를 컷하는 인간과 달리,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도입의 틸트, 반대로 지상에서 하늘로 상승하여 이내 곧 뒤집히는 결말은 롱테이크가 완전무결하다. 하늘은 현재에 불만족스러운 인간이 이상을 동경하고 그려보는 이데아이기에 완전해야 한다. 또 결말의 뒤집힌 세계는 현실에서 직접 마주하기 어려운, 영화라서 가능한 구도로서 꿈의 실현인데, 그렇게 실현된 꿈은 불완전한 현실과 달리 완전하게 이어지고 보존된다. 이러한 영화는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화면의 개수가 계속 변화한다. 일단 영화의 시작은 화면이 하나였다. 부부는 각자의 방에 있었다. 그러다가 창문으로 눈을 마주치고 대화하며 하나의 공간으로 나와 티타임을 가진다. 영화 속 유일하게 루이와 엘르가 대화하는 장면이며, 리버스숏으로 각자의 시야에서 연인을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들은 분명 두 개의 몸과 두 개의 정신이지만, 하나의 화면에 놓일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육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다. 하지만 이윽고 하나의 화면은 둘로 나뉘고, 앞서 언급했듯 중간에 필러박스가 끼어 좁고 가깝지만 까마득한 단절이 가시화된다. 둘로 나뉜 이후에는 하나의 프레임에 둘이 함께 놓이지 않고, 엘르, 루이, 스테판은 각자의 프레임에 홀로 놓인다. 물론 이들은 하나의 프레임, 그리고 하나의 공간에 놓일 때면 공통된 청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들을 담아내는 둥글고 좁은 화면비가 무성영화를 시사하는 것처럼, 이들의 관계도 무수한 말이 들려오지만 사실상 서로의 귀에 미치지 않는 무성영화와 같은 상태다.     


이들이 참여하는 시간은 분명 하나다. 오직 시간만이 공평하게 모든 사람에게 같다. 현재에 의식이 있는 존재는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하나의 시간, 그것을 가리키는 공통된 청각을 인지할 수 있다. 영화에선 루이와 스테판, 영화 바깥에선 감상자가 그렇다. 하지만 엘르에게는 현재의 청각이 미치지 않는다. 그녀에겐 청소 및 장난감을 사라고 지시하는 내부의 소리가 작동하고 있으나, 외부의 존재는 그녀 내부에서만 메아리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치매에 걸린 사람은 분명 현재에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현재의 육체로 수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튕겨내는 사람이다. 그래서 엘르가 놓인 숏은 언제나 고립된다. 두 개의 화면에 스테판과 루이가 놓일 때, 이들은 흡사 리버스숏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엘르와 놓였을 때, 이들은 대화가 되지 않고 엘르와 그들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혹은 못한다) 이러한 두 개의 화면은 깜박거리며 좌우가 전환된다. 처음 화면이 두 개로 분할되었을 때 좌측에 루이가 있었고, 우측에 엘르가 있었다. 루이는 잠들었고 엘르는 깨어있다. 그러나 상황이 반전된다. 엘르는 일어나긴 했지만 과거를 향해 '잠든 존재'가 되어버린 반면, 루이는 현재에 각본을 검토하는 '깨어있는 존재'가 되며 각자가 놓이는 화면이 뒤바뀐다. 그렇게 위치가 뒤바뀌니 루이는 당황한다. 하지만 엘르가 경험한 ‘잠든 공간’을 루이도 경험했기에 그는 엘르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두 개의 화면을 검은 필러박스가 가로막은 상황에서 상대방을 마주하는 것은 검은 화면 속의 영화를 보는 일, 꿈을 꾸는 일과 흡사하다. 스테판이 루이에게 병원에 가라고 종용하는 장면에서, 엘르가 놓인 화면에는 루이의 팔이 검은 화면을 뚫고 엄습해온다. 외에도 본래 위치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 침투할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연속이 아니라 검은 화면에서 불연속적으로 나타나는 꿈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렇게 꿈처럼 나타나는 상대방이 사라진다. 루이가 먼저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하고, 이후 엘르가 가스를 유출해 자살로 세상을 등진다. 이들이 생을 마감할 때의 특징은 항상 왼편에서만 죽는다는 것이고, 한 편의 영화이자 꿈과 같았던 상대방이 사망하자 생의 동력을 잃는다는 점이다.      


루이는 엘르가 각본을 모두 없앤 이후, 또 불륜 상대와 만난 이후 생을 마감하고, 엘르는 루이의 사망 이후에도 남편을 위해 청소를 하다가 그것의 덧없음을 느끼고 자살한다. 인간의 인생이 곧 꿈 그 자체라면 이러한 꿈의 동력이 동났을 때,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을 때 사망하는가, 그렇게 노부부가 왼편에서 사망한 이후 남은 사람들은 오직 오른편 화면에서만 포착된다. 스테판이나 키키는 아직 꿈을 잃지 않았다. 망자들은 죽어서 집과 같은 화면을 잃지만, 아직 살아있는 부자는 여전히 집과 같은 프레임을 지닌다. 그들은 집을 잃는 왼편에서의 경험이 아직 까마득하다. 그래서 노부부가 사망하는 왼편과 청년들이 살아있는 오른편은 전환되지 않는다. 왼편이 죽는 공간이라면, 그렇게 죽기 전까지 우리는 오른편에서 무던히 꿈을 꾼다. 치매에 걸려 기억이 사라져가는 엘르는 계속 무언가를 비운다. 루이의 서재에 가득 찬 쓰레기통, 그의 각본 및 서류, 화장실의 약들을 싸그리 치운다. 쓰레기장, 변기가 위치한 화장실이 그녀의 공간이다. 그녀는 현재를 비우고 그곳에 과거를 채운다. 그녀는 현재의 장성한 스테판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아들 스테판임을 지워내니, 젊은 시절의 루이로 보인다. 남편으로 오도된 아들과 키스하려 한다. 이러한 그녀가 꾸는 것은 밤꿈이다. 밤에 꾸는 꿈은 창조적이거나 미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통 우리의 경험, 기억이 밤꿈에 반영된다. 향수는 달콤한 꿈으로, 나빴던 기억은 악몽으로 현현한다. 밤꿈을 꾸는 엘르는 현재를 밤으로 어둡게 만든다. 어렸던 스테판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어머니, 정신과 의사인 자신, 루이의 아내로서의 기억을 되풀이한다. 그리고 아이의 의식으로 되돌아간다. 손자 키키와 할머니 엘르의 행동은 닮아있다. 그들의 행동은 무질서하고 충동적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무수한 규율과 인습과 법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일단 그것을 기억한 이상, 마냥 나만의 충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 축적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어린 시절의 밤꿈을 꾼다면, 우리는 외부가 어떠하든 꽃을 보고 향기를 맡으며 즐거워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장난감을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지 않을까. 아이와 닮아가는 치매를 보며 알 수 있는 인간의 꿈, 그것은 ‘기억 축적 이전’을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에게 기억이란 언제나 다채로운 것을 축적해가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상 내지는 특별한 상으로 불리는, 백지와도 같은 인간의 하얀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는 최초의 기억들이 있다. 이러한 기억들이 하나의 판단 준거가 되어, 그 이후에는 동일하거나 유사한 기억을 파생해간다. 그것이 곧 인간의 자아를 이룬다. 기억이 아무리 지워져도 아내, 어머니, 의사로서의 특별한 상이 남아있는 엘르는 청소, 장난감 구매, 처방 등의 행위를 반복하며 최초의 상에 따른 행위들을 재생산한다. 루이 또한 마찬가지다. 기억이 가리키는 밀회의 여인, 엘르에 대한 의무,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못한다. 즉 인생이란 특별한 최초의 기억이 가리키는 꿈을 축적해가는 것인가. 부부의 집에 잔뜩 쌓인 무수한 책, 서류, 사물들처럼, 심지어 현재까지도 루이는 꿈을 위해 각본 작업을 이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작업을 이어가는 루이는 낮꿈을 꾸는 사람이다. 철학자 블로흐의 개념으로 밤꿈이 어제를 본다면, 낮꿈은 내일을 본다. 내일 세상이 어떠했으면 좋겠고, 내일 자신이 이러했으면 좋겠으며, 그렇게 내일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다. 밤꿈의 비이성과 달리, 낮꿈은 감성과 이성이 결합하여 썩 타당하다. 낮꿈을 꾸는 사람은 밤꿈 꾸는 엘르가 찾는 과거의 장난감과 달리 항상 새로운 책을 갈구하고, 현재의 변화한 대상을 인정한다. 과거의 그리운 엘르가 아니라, 현재에 떠도는 엘르가 원망스럽더라도 그렇게 변한 그녀를 찾아 헤맨다. 낮꿈을 꾸는 사람은 현재를 식별한다. 현재에 어떤 문제들이 있어야만 더 나은 내일을 갈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 참여하는 스테판과 루이는 바깥세상을 누비고, 거기서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밤꿈을 꾸는 엘르는 현재의 많은 것들이 당혹스럽다. 루이가 창문을 열고 환기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존재라면, 엘르는 영화 내내 계속 문을 닫는다. 또 그녀는 분명 TV를 쳐다보고 있고,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긴 한데, 초점은 불명확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현재를 의심하는 눈초리다. 엘르는 스테판, 키키, 루이를 식별하지 못한다. 그렇게 현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자신이 유일하게 기억하고 아는, 이로써 만족을 주는 과거로 거슬러 내려간다. 과거의 꿈을 꾸기 위해서 어둡고 차단된 공간에 자신을 가둔다. 엘르는 현재의 외부 자극이 싫다.    


하지만 노인들에겐 현재의 식별/비식별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두 노인은 기억이 많다. 아무리 현재를 식별해도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루이이며, 설령 과거를 거슬러 내려간다고 해도 축적된 멀쩡한 기억이 엘르가 현재를 식별하게 만들기도 한다. 젊은 날의 기억이 많은 루이는 자신을 젊게 본다. 스테판이나 감상자는 그가 엘르를 간병하기 무리라 판단하지만, 루이는 간병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다. 그렇게 건장한 가장의 기억에 머무르며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노인은 결국 현재의 자신을 식별하지 못하며 자멸한다. 배우자로서의 자신,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 그 모든 것이 과거에는 가능했던 것, 하지만 현재에는 가능하지 않다. 반면 엘르는 약사로서 유일하게 약물을 식별하는 듯하다. 기억을 덜어내고 또 덜어내도, 축적된 기억이 많은 노인이기에, 여전히 현재를 식별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 엘르는 루이의 불면증, 편집증적인 문제를 인지한다. 하지만 무수한 기억으로 현재를 때려 맞추는 노인, 그래서 밤꿈에서 헤어날 수 없는 노인은 영화관과 같은 어두운 암실에서 잠을 잔다. 꿈을 꾸는 그들 곁에서 엘르가 처방을 논의하고, 스테판과 루이의 대화는 엘르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며 그녀에게 차단된다. 그렇게 가상을 향해 잠든 노인들은, 깨어있는 현실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무방비하다. 또 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골치 아픈 현실보다는 마약을 흡입하며 꿈에 침잠하고, 그 사이 엘르는 가스를 유출해 자살한다. 꿈에 사는 우리는 현실을 통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 속 대사처럼 꿈꾸지 못한다면 살 이유도 우리에겐 없다. 영화 속 라디오에서는 망자가 사멸해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들이 생존한다고 떠들어댄다. 하지만 엘르의 검은 화면에 침투하던, 하나의 꿈과 같았던 루이가 사라지니, 그의 주변을 청소하는 배우자로서 엘르의 행위는 모두 불발된다. 여전히 꿈을 꾸는 스테판이 마약을 흡입한다면, 엘르의 변기는 막혀서 내려가지도 않는 교착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루이가 생존한 당시 엘르는 '아내'라는 자신의 특별한 상이 가리키는 '청소'라는 꿈을 계속 생성, 이행했다. 이는 집을 어지럽히는 루이가 실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루이는 엘르에게 해결해야만 하는 꿈이었으니, 하지만 루이 사후 엘르에겐 더 이상 문제도 없고, 이에 그것을 해결하는 꿈을 꿀 수도 없다. 그렇게 꿈꿀 수 없는 존재들은 사망한다. 이러한 꿈, 영화사적으로는 레브랑이 20세기 함께 활동하던 영화감독들 대다수가 타계함에 과거의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는 배우의 수동성, 반면 감독으로서 아르젠토는 여전히 능동적인 꿈을 바라지만 정신과 달리 육체와 주변 환경이 이를 허용하지 않음에 전성기의 기억과 현재가 불일치하는, 두 ‘영화의 노인’들이 겪는 쇠퇴의 일대기로 본 작품을 요약할 수 있으랴. 자신의 각본이 모두 부정당함에 꿈꿀 수 없는 영화감독은 사망하고, 감독의 사망에 더는 꿈꿀 수 없는 배우도 뒤따라 사망하니. 또 늙은 감독은 젊은 시절의 자신에게 집착하며 영화를 만들 수 있으리란 착각에 빠지는 한편, 젊은 날의 감독들을 모두 잃은 배우는 치매에 걸려 가능했던 어제를 꿈꾼다. 그렇게 노에는 20세기 영화사와 인간의 운명을, 늙음과 치매로 탐색한다. 인생은 어떻게든 꿈꾸는 것,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현재에 불만족을 느끼며, 내일을 창조하는 낮꿈일 수도 있고, 어제를 갈망하는 밤꿈일 수도 있다. 그렇게 현실 대신 어떤 방향으로의 꿈을 꾸기에 각자는 현실이 아니라 표상에 갇히는데, 노에는 이를 분할 스크린과 좁다란 화면비로 가시화한다. 이러한 꿈은 나 혼자 꾸지 않는다. 대상과 함께하는 순간이 곧 꿈과 같았기에, 영화라는 꿈은 배우와 감독의 협연으로 가능했었기에. 하지만 노인들은 현재의 상대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해 협연은 불발된다. 그들의 얼굴에 무수한 기억을 덧씌우기도 하고, 또 현재를 전면 외면하고 머릿속의 이미지와 착각하기도 하니, 노인들은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는 낮꿈 대신 밤꿈을 주로 꾼다. 하지만 그 밤꿈조차도 인생을 지탱케 하는 소중한 무엇, 그 밤꿈조차도 꿀 수 없을 때,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영사되지 않을 때, 우리 생은 막을 내리는 법이니. 그래서 노에는 여전히 영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영화가 곧 꿈의 동의어이자 인생의 동의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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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010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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