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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07. 2022

노아 바움백, <화이트 노이즈>

‘믿음’의 제국

노아 바움백(Noah Baumbach),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 - ‘믿음’의 제국   

“우린 이미지를 포착하러 여기 온 게 아니에요, 그걸 유지하러 온 거지요. 모든 사진이 사물의 아우라를 강화합니다. 느껴지나요, 잭? 이름 없는 에너지들의 축적이.” -돈 드릴로-

잭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히틀러학과 교수이자, 대학의 학과장이다. 그런데 소설을 통틀어서 잭이 교수이자 학과장으로서 과연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일반인도 알만한 히틀러에 대한 지엽적인 사실만 읊고, 학위 자격에 독어가 요구되지만 정작 잭은 독어에 무지하다. 과연 교수로서 잭의 실체는 무엇이고, 히틀러학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런데 다른 교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현실과 대응하는 중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리얼 박스'의 겉만 읊어댄다. 학장은 교수들에게 그들이 담당한 학문과 권위를 포장하기 위해서 단지 이름과 외모의 정돈만 요구한다. 이러한 교수와 보호자들 밑에서 자라나는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교수들은 TV에 송출되는 현란한 쾌락의 체계를 공인하는 사람들이다. 자식들은 TV를 본다. 그들은 라디오나 TV에 흘러넘치는 정보, 그것이 자극한 욕망에 잠식된다. 물론 모든 지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분명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배우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자신이 현재 손으로 만지고, 발을 딛고 있는 땅보다도 매스컴에서 송출된 허위 정보에 자신의 의식과 정신의 뿌리를 내린다. 이에 발생하는 미국적 미스터리, 실제적 사회성을 포기하고 가상의 무언가와 네트워크를 맺으며, 상대적인 의미를 뒤집어놓은 TV에 의해 지력 감퇴를 겪는 사람들, 도처에 ‘백색 소음’이 가득하다. TV는 일방적이다, 대화할 줄 모른다. 그리고 TV를 보는 사람들도 대화할 줄 모른다. 분명 두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두 개의 독백으로 전락한다. 유독가스 공중유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잭은 자연재해는 빈민들에게나 일어나는 것, 학과장인 자신에게는 어떠한 위협도 미치지 못 하리라 자만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피행렬의 라디오에선 맹랑한 광고를 떠들어대고, 사람들은 이에 매료되지 마땅히 보고 들어야 할 사실과 직면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실을 외면하고 싶다. 죽음 공포를 억압하기 위해서 넋 빠진 행위를 하거나, 죽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을 자처한다. TV는 파괴적인 스펙타클쇼를 늘여놓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는 죽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에 이입하여 죽음을 극복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시늉만 하는 존재인 인간이 쾌락에 탐닉하여 진실을 외면하자, 미지에 너무나도 쉽게 굴복하는 존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견딜 수 없는 존재, 공포와 통증과 죽음과 현실을 부자연스럽게 여기는 존재로 추락한다. 그래서 진실과 현실이 가져다주는 고통에 더 취약해진 인간은 오직 진열대 앞에 서서 익히 간파된 상품들과 정보를 보며 즐거워한다. 소설의 끝자락까지도… 이는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를 요약한 것인데 이를 언급한 이유는 노아 바움백이 이를 영화화하기 때문이다. 1969년 뉴욕 태생의 노아 바움백은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1990년대에 데뷔한 미국 독립영화 감독들과 함께 묶이며, 특히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판타스틱 Mr. 폭스>를 공동작업하고, 자신의 작품인 <오징어와 고래>의 프로듀서를 맡은 웨스 앤더슨과 주로 묶인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우디 앨런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며, 실제로도 그의 영화는 대화 위주의 전개,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방황, 미리 주어진 날 것의 뉴욕의 거리 곳곳을 배경으로 삼는다는 점이 그와 유사하다. 또 그의 영화는 자전적인 것도 특징인데, 부모님이 이혼한 여파로 격정적인 청소년기를 보낸 경험을 <오징어와 고래>에 투영한다. 일단 그는 영화에서 가족을 주로 탐구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가장 버나드는 아내 조안을 소유하고,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로 치부한다. 친선 테니스 경기에서 버나드는 강서브를 날려 조안을 공격한다. 결혼한 존재를 마음대로 소유한다. 자기 집에 잠깐 머무는 릴리가 거부함에도 성적인 접촉을 강요한다. 버나드는 자신 덕분에 조안이 작가가 되었다고 평하며, 버나드를 존경하는 윌트 또한 똑같이 생각한다. 문학가이자 평론가인 버나드는 항상 자신의 시선에서 대상을 평가하고 재단하는데, 이러한 소유자(가장)들은 소유한 것들(식구들)을 제 마음대로 통제한다. 부모의 자식 소유도 마찬가지로 버나드는 프랭크가 원치 않는데 억지로 탁구하거나, 조안은 아들들이 듣기 싫은 말을 마음대로 쏘아붙인다.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즈>에서 가장 헤롤드는 자식들에게 무관심하다. 자식들과 함께 결정해야 할 사항을 자신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다. 그래서 가족은 서로를 잘 모른다. 자신의 목적이 투영된 소유물로만 알지, 실제로 상대방이 무엇을 하는지 무지하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부모들은 자식들의 성적인 문제, 표절, 이별 등으로 충격을 받는다. 부모들은 자신이 바라는 자식의 상을 상상했을 뿐, 실상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몽매했다. 총 5부 구성인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즈>에서도 바움백은 막이 넘어가거나 씬이 이어질 때, 인물들이 내뱉는 발화를 잘라먹는 컷을 통해 서로의 말을 듣지 않거나 진실을 끝까지 알 수 없는, 이로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만 실상 서로에 대해 무지한 가족을 형식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여러 세대가 등장하는 본 작품에서 일상적인 것은 이혼, 세대 간의 불화, 간병의 분업화다. <결혼 이야기>, 실상은 '이혼 이야기'인 바움백의 근작에서는 하나의 프레임에 함께 놓이지 아니하고 분절된 각각의 숏에 부부를 담아서 단절을 구현한다. 또 망원렌즈의 흐릿한 속성을 이용하여 '하나'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연인이 서로의 시야에서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보였음을, 몰랐거나 왜곡해서 바라보고 있던 주관적 시선을 가시화한다. 그래서 바움백의 작품에선 자신과 무관한 타인의 시선, 사회의 관습에서 달아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내는 이혼하여 남편을 떠나고,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달아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조안은 버나드에게서, 프랭크는 아빠에게, 윌트는 엄마로부터 달아난다. 조안은 버나드가 짝으로 더는 특별하지 않았고, 프랭크와 윌트는 부모를 닮기 싫다. <결혼 이야기>에서 부부는 '배우자'라는 배역에서 달아난다. 영화의 소재가 연극 및 영화이기도 한 본 작품에서 결혼생활 동안 어머니이자 아버지라는 배역을 입으며 불가능했던 감정과 표현이 이혼 과정 중에, 현실 속 시간과 일치하는 롱테이크로 생생하게 드러나며, 인물들은 원치 않았던 연극에서 달아나 현실로 되돌아온다. 이러한 배역을 입게 된 이유도 그것에 환상을 품었기 때문으로, <위 아 영>이나 <결혼 이야기>에서 결혼 생활이나 연인, 젊음과 청춘에 대한 맹목적인 기대감, 상상을 부각한다.     


바움백의 ‘달아남’은 때로 자기 혐오적으로 자신을 타자화, 즉 내게서 도망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윌트는 조안에게, 프랭크는 버나드에게서 달아나지만, 실제로 이들의 성격은 달아나는 대상과 닮았다. 윌트는 엄마와 더 좋은 기억이 많고, 프랭크의 문제는 버나드가 어렸을 적에도 겪었던 문제임이 암시된다. <그린버그>에서 로저는 성격 장애가 있다. 그는 외부의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며, 타인에겐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어 있는 것들을 자신은 무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항상 항의하거나 멀어지지만, 실상 로저의 자기 애착은 그가 혐오하고 부정하는 대상들과 차이가 없다. 그래서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즈>에서 달아나는 것은 아버지의 몰이해, 가족 간의 무지다. 아버지의 무지와 독단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엘리자의 진취적인 실험영화를 이해하고자 시도한다. 또 진이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그 진실로 가족은 결속되며 맹목적 결속을 끈끈한 진실과 앎의 결속으로 뒤바꾼다. 이는 아버지의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닮아갔던, 제 자신으로부터의 달아남이다. <결혼 이야기>의 롱테이크에서 니콜은 자신을 회복하지만, 찰리는 자신이 니콜에게 강요한 것을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로써 보수적인 정치 지형과 관계가 있었을 자신의 독단적인 가부장적 태도에서 달아난다. 이렇게 달아나는 존재들은 주로 청년이다. 바움백은 가족이나 부부를 다룬 영화로도 유명하나, <프란시스 하>나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등 청춘 영화로도 유명한데, 그가 다루는 청년들은 자아를 찾기 위해서 달아난다. <오징어와 고래>에서 윌트와 프랭크는 각각이 누구와 닮았는지를 모르고, 본인의 행동에 몰지각하다. 윌트는 소피와 릴리 사이에서 망설이는 숙맥으로, 현실에서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른다. 이러한 윌트의 선택은 실패로 귀결되지만, 본 과정에서 막연히 아버지를 선망하며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던 시선으로부터, 자신의 기억과 심리로 시선을 돌리며 나 자신을 확인하고 성장한다. 제목 <오징어와 고래>가 자신이 진정 좋았던, 하지만 그간 잊고 살던 기억을 가리키며, 아버지의 그늘에서 비로소 <오징어와 고래>에 도달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린버그>에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로저는 이타심을 깨우치며 성장한다. 그 이타심은 영화 속 일반적인 중년이 갖춰야 하는 안정적인 직장, 바글거리는 아이들, 무수한 인맥 등의 ‘일반성’이 아니다. 플로렌스를 사랑하기에 져야 하는 인간의 본질적 책임이다. 플로렌스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로저와 반대로 지나치게 이타적이다. 로저가 산만함을 참지 못한다면, 플로렌스는 정신 사나운 그린버그 가족의 요구를 묵묵히 전부 들어준다. 바움백은 훗날 <위 아 영>에서 뉴욕의 20대를 힙스터로 상정한다. 20대도 관습이 있다. 그들은 기성의 관습을 벗어나서 개성을 추구하지만, 실상 자신들이 추구하는 개성과 자유는 그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인습, 곧 ‘각본’이었다. <그린버그>와 <위 아 영>의 진정한 성장은 '개성의 관습', '세대의 관습'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을 회복하고, 꾸며지지 않은 무위의 모습을 다큐멘터리로써 기록하는 것이다. 진실을 가리킨다고 현혹하는 허황된 시뮬라크르에 둘러싸여 가족 간의 무지, 세계에 대한 몽매를 물리치지 못하는 『화이트 노이즈』의 풍경, 이는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안다고 착각하는 바움백이 그려내는 가족의 전형과 닮아있다. 바움백은 또다시 분열의 가족을 영상화한다. 과연 믿음은 순환할 것인가, 사실로 나아갈 것인가. 일단 바움백은 신작에서도 시뮬라크르로 둘러싸인 세계를 창조한다. 이미지가 오직 회화와 조각에만 국한되어 희소했고, 또 이미지가 현실과 양적·질적 차이가 있던 과거에는 이미지가 현실을 쉽게 대체할 수 없었다. 또 과거 이미지의 희소함과 질적인 우수성은 종교적 세계, 이데아 등 초월적이었다. 그러나 현실을 객관적으로 옮긴다고 다들 ‘믿는’ 사진 기술이 개발됐고, 이후 아예 움직이는 현실을 담아내는 영화가 발전됐으며, 심지어 이들은 무한 복제되어 영화관과 TV를 통해 일상 곳곳에 송출된다. 현실을 쏙 빼닮은 것들이 일상 곳곳에서 흡사 실제처럼 자리한다. 그런데 아무리 닮았어도 사진이나 영화는 객관적인 현실의 총체가 아니다. 산업에 포섭된 기술은 객관적 시각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싶은 이미지를 제공한다. 또 현실에서 타인들과 상호 느끼는 지각과 달리, 영상이나 사진 이미지는 일방적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느낄 수 있으며, 또 현실 속 고통과도 유리되어 있다. <화이트 노이즈>에서 다루는 미국이 바로 그렇다.     


도입부, 영사기가 감상자를 향해서 무언가를 상영한다. 빛이 아주 눈이 부시다. 이윽고 자동차나 기차 등의 거대한 운송수단이 충돌하거나 폭발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현실에서 그토록 가까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열기나 따가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스크린의 교통사고는 단지 이미지에 그쳐 감각은 시각에만 그친다. 우리를 향해서 영사되고 있어도 통각을 자극하진 않는다. 고통 대신, 거대한 규모와 아주 쨍한 색채가 자아내는 스펙타클이 쾌감으로 다가온다. 현실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가 현실처럼 이어진다. 현실이라면 우리는 사고를 수습하고,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상대방을 곧 내 처지처럼 느낄 수 있는 다정다감한 인간은 사고를 직접 겪지 않더라도 고통스러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 지각이, 일방적이고 현실적인 이미지에 의해 불발된다. 몇 개의 시퀀스가 지나고, 잭과 바벳의 아이들이 TV를 본다. 언론은 비행기 추락 사고를 송출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열광한다. 철학자 질 들뢰즈가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밝히길, 우리의 몸에 가해지는 힘이 세지면 세질수록 감각은 커지고 자극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익숙한 감각보다는 다른 감각, 흡사 신체 일부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활동을 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 더 흥미롭다. 들뢰즈는 예시를 항문으로 든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TV는 작지만 그 좁다란 프레임에 포착되는 시각적 에너지는 너무나도 막강하다. 광대한 규모와 일상적으로 볼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의 분출, 그것이 우리의 동공을 가학적으로 가격하고, 이를 보는 아이들은 숭고함에 전율하고 흥분한다. 사실 현실에서 이런 이미지를 봤어도 흥미로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에너지의 분출만 목격되는 것이 아니라, 튕겨진 파편이 피부에 부딪혀 고통이 느껴지거나, 또 희생자와 죽음이 있다. 그리고 역재생되거나 무한 복제될 수 없는 삶, 곧 동족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미지를 송출시키는 주체는 현실이 아니라 산업에 포섭된 대중문화이자 옐로 저널리즘, 돈을 벌기 위해서 언론은 희생자를 포착하지 않고 오직 스펙타클한 쇼로 비극적인 사고를 승화한다. 본래 언론을 통해서 사건이나 정보를 접한 시청자는, 이윽고 내가 겪지 못한 외부 현실과 이어지지 않던가.      


그러나 개인의 쾌감에만 그치는 이미지는 외부 현실과 대응하지 않는다, 조응하는 것은 개인이 폐쇄적으로 기대하고 상상했던 욕망이다. 그간 바움백의 연출은 현실을 크게 이탈하지 않는, 자기 손에서 통제할 수 있는 '소박함'과 '리얼리즘'이 도드라졌다. 그리고 영화 내용 상 아무리 개개인이 표상에 갇혀있다고 한들, 현실과 표상은 충분히 교차할 수 있을 만큼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돈 드릴로가 비관한 디스토피아를 옮겨오는 바움백의 연출은 달라진다. 전작들에서 개개인의 기대와 착각이 덧씌워진 부부나 식구들이 많았다고 한들, 그 이미지들이 현실을 대체할 만큼 양적으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본 작품에서 이미지들은 현실에서의 작은 실수나 착각 수준이 아니라, 아예 작정하고 휘몰아쳐서 양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현실과의 끈이 끊어진다. 본 작품에서 사용되는 다소 꺼끌거리는 느낌을 주는 35mm 필름과 65mm 필름은 가상성을 굳이 숨기지 않고, 휘황찬란한 시각적 자극으로 만연한 쾌락의 세계를 높은 채도로 더욱 쨍하게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은 집에서도, 대학교에서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현실과 무관한 스펙타클 쇼를 본다. 그리고 그것을 익히 '미국적인 낙관주의', '걱정 없는 중산층의 평화' 등으로 모방하는데, 이러한 '모방'에 따른 것인지 바움백은 그간 다루지 않았던 장르 영화 문법을 고루 손댄다. 바벳이 남성으로 변하는 악몽을 잭이 꿨을 때는 공포영화를, 캠프 및 습지를 자동차로 탈출할 때는 액션영화 내지는 전쟁영화를, 그리고 잭이 다일라 판매업자를 살해하러 갈 때는 스릴러 영화의 분위기로 쉴 새 없이 변화한다. 그렇게 영화는 하나의 일정한 연출, 특히 롱테이크로 이뤄진 현실적인 연출에 안주하지 않는다. 롱테이크를 쪼개고 또 쪼개어 영화에서나 가능한 '잘린' 시간으로 이행하고, 현실의 소박하고도 불안정한 카메라워킹은 우아하게 미끄러지면서도 조금의 불안정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카메라워킹으로 뒤바뀐다. 그렇게 현실에서 계속 이탈한다. 물론 현실을 포착한, 16mm 흑백 필름에 담긴 나치당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이를 보고 한 학생이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사건을 가르쳐달라 질문한다. 그러나 잭은 푸티지가 가리키는, 과거의 현실을 답하지 않는다. 현실과 전혀 무관한 현학적인 문장을 내뱉을 뿐이다. 시각은 현실인데, 언어는 허황하다. 사실에서 비롯한 시각은 가상을 위해 봉사한다.     


다큐멘터리 푸티지조차도 현실에 비해서 흐릿하고 거친 ‘16mm 필름’과 색채로 가득 찬 현실과 다른 ‘흑백’이란 매체에만 집중한 결과인지, 현실이 아니라 가상으로 간주한다. 즉 현실을 보더라도,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해주는 대중문화, 그리고 사고 싶은 것만 진열해놓는 쾌락의 자본주의에 깊숙이 자리한 개인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 미국적 낙관주의를 말하는 도입부 이후, 대학교에선 입학식이 열렸다. 그러나 잭은 입학식이라는 내용에 관심이 없다. 입학식의 북적거림과 다채로움에 매료되며, 즉 입학식의 내용이나 본질이 아닌, 표피에 불과하거나 자신의 기대나 욕망을 투영한 스펙타클한 쇼로 해석한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 내지는 이미지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현실은 더더욱 멀어지는데, 바움백은 이를 만나지 않고 엇갈릴 뿐인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선 두 차례의 교차편집을 특기할 만하다. 첫 번째로 히틀러학을 맡은 잭과 엘비스학을 맡은 동료 교수가 현실에서 하등 쓸모없는 ‘지식 배틀’을 카메라 앞에서 벌인다.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보다는, 카메라와 학생들의 시선에 어떻게 비칠지 현란한 몸짓과 억양을 의도한다. 학생들은 현장에서 펼쳐지는, 또 학교 너머의 감상자들은 TV에 송출될 교수들의 현실 유리적 '쇼'에 집중하리. 그런데 이와 교차 편집되는 숏은 나이오딘 D를 실은 트럭 운전사가 음주 운전하여 일으킨, 기차와의 추돌사고다. 현실에선 독성 물질이 유출된다. 감상자는 이를 알지만 가상적 쇼에 갇힌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현실은 닿지 않는다. 별개로 교차한다. 이후 재등장하는 교차편집은 잭과 바벳의 관계를 드러낸다. 나이오딘 D에 중독된 잭은 주황색이 알록달록 칠해진 MRI 기계에 들어가 정밀 검사를 받는다. 검사를 받기 전의 의사도 명랑하게 듣기 좋은 말만 했었다. 잭이 불안해서 나이오딘 D를 먼저 언질하기 전까진,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잭은 맹랑한 가상적 세계에 침잠한다. 그러나 다일라로도 죽음 공포를 극복할 수 없는 바벳은 어둡고 칙칙한 배경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울부짖는다. 그리고 잭과 바벳의 세계는 동떨어져서 만나지 않는다. 바벳은 잭의 명랑한 세계가 안보이고 나이오딘 D 때문에 정밀검사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잭은 바벳이 심각한 신경증을 앓는다는 현실이 단절되어 서로에게 수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현실-타인과 엇갈린 채로 자신만의 시뮬라크르에 잠식되는가. 이들은 잊고 싶다, 유한하고 고통 받는 인간이라는 것을, 빈약한 교수라는 사실을, 어머니인 자신을. 다일라를 복용한 바벳은 영화 전반부에 건망증을 앓는다. 아이들의 이름도 잊을 정도다. 그런데 다일라를 복용하는 바벳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잭은 학생들에겐 독어를 요구한다. 그러나 막상 교수인 자신은 독어가 미숙하여 몰래 교습을 받는다. 그리고 강사에게 신신당부한다, 외부로 유출되면 안 된다고. 이들은 잊는다, 어머니이자 유한한 인간이자 수준 미달 교수라는 자신의 무거운 책임을 말이다. 그렇게 잊고 ‘되고 싶은 나’, 바라고 욕망하는 나를 내세운다. 잭과 바벳은 서로가 일찍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상대의 죽음이 슬픈 것이 아니라, '홀로 남게 될'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다. 내가 외롭지 않게 관계를 영속하기 위해서, 배우자와 자녀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혼자 남을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죽음은 부정한다는 얘기다. 잭은 나이오딘 D가 유출돼서 가족과 마을이 위협에 빠졌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바벳은 다일라를 복용하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바벳은 도로의 '정지판', 즉 외부 규칙을 무시한다. 또 미각은 직접 몸에 흡수된다. 통각도 피부에 직접 닿는다. 후각도 코를 통해 내 몸에 흡입하고, 이 세 개의 파장은 몸에 변형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TV나 라디오, 스펙타클 쇼로 전락한 강의의 감각은 시각과 청각이다. 시각은 아무리 봐도 대상을 변형시키거나, 또 내 몸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청각도 거대한 볼륨이 아닌 이상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청각에 매몰된 이들은 몸에 변형이 덜하다. 시뮬라크르로 대체된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안전하다고 세뇌한다. 또 대중문화는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인리히와 달리, 언제나 자기 주변을 ‘수평적’으로 고개만 까딱거리며 편안하게 관조하는 잭은, 대중문화에서 보여주는 평화롭고 사치스러운 미국적 풍경이 잘 영위되고 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이미지는 현실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그 이미지, 곧 시뮬라크르들은 이미지에서 현실로 시뮬라시옹된다.     


즉 잭이 바라보는 풍경은 이미지와 무관한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한 현실일 수 있다. 현실을 대중문화의 이미지가 대체하는 세계, 곧 사람들이 이를 모방하는 세계에서 이미지를 자아냈던 본래의 현실은 왜곡된다. 이미지는 더는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더욱이 쾌락은 시청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트에 가면 값싸게 나를 즐겁게 하는 공산품들이 휘황찬란하게 진열돼있다. 먹기 싫은 것, 맡기 싫은 것, 느끼기 싫은 것을 느낄 필요가 없다. 나이오딘 D가 퍼지는 와중에도 풍요로운 미국은 처먹고 싶은 저녁 식사를 처먹을 수 있다. 고통스럽고 애달픈 사고는 유리되거나 스펙타클 쇼로 대체되고, 이성애자 남성 교수들의 입에선 오직 여성과 섹스 얘기만 나돌 뿐이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탐욕을 실현할 수 있을지 대책을 강구한다. 이에 나이오딘 D에 의한 거무튀튀한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또 잭은 교수다. 그런데 잭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 그마저도 현실에 통용되지 않는 지식을 내뱉는 데만 능하다. 잭의 동료인 화학 교수는 다일라를 분석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에 미치는 여파는 모른다, 즉 지식이 현실에 닿지 못한다. 연구는 현실에 뿌리내리지 않고, 똑똑한 자신을 과시하고 이미지를 만드는데 그친다. 잭은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지 않는다. 하인리히나 드니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은 현재의 현실에 적용할 수 없거나, 또는 현실에 적용하기 부적절한 지식임에도, 나태한 태도로 익히 아는 것을 재생산하고 반복한다. 그 이유는 변화한 현실을 인식하는 것도, 또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외우는 일은 얼마나 머리를 싸매게 만드는가. 그러나 익히 외운 것, 입에 밴 것을 술술 되풀이하기는 얼마나 쉬운 작업인가. 잭이 재생산하고 싶은 것은 자신, 그것도 제 욕망이 실현된 쉬운 자신이다. 그는 악몽을 꾼다. 자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바벳이 없다. 창가에 앉아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바벳이 아닌 것만 같다. 바벳이었던 존재 아니면 여전히 바벳인 존재는 팔다리에 털이 수북이 나고 몸도 퉁퉁 불어버린 투박한 남성이다. 이후 잠에서 깬 잭은 바벳을 확인한다. 그대로다, 그것도 영화 말미 바벳이 잭을 위한 아내로서 노력한다는 발언을 보건대, 잭이 보고 싶은 모습으로 그대로로 말이다.      


즉 잭은 자신의 기대나 욕망과 '다른', 타자를 접하는 것이 두렵다. 기쁘고 즐거운 나와 달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 살아있는 나와 다른 죽은 것, 익히 아는 것과 다르게 생경하고 낯선 것을 수용하기 어렵다. 이들의 욕망에 봉사하면서 산업에 속하는 대중문화는 사람들이 돈을 내지 않을 이미지가 아니라, 돈을 쓸 만한 욕망의 이미지를 시뮬라시옹한다. 이에 잭의 시야는 익히 볼 수 있는 인근을 고개만 휘젓는, 수평적인 수준에 국한된다. 2차원적인 한계에 3차원적으로 접근해야 보이는 진실, 2차원 너머의 나이오딘 D의 검은 연기와 구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개인들은 자기 폐쇄적인 표상에 갇힌다. 영화 초반에 성인들의 대화는 질문을 하더라도 언제나 말을 빙빙 돌려서 답변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각자 할 말만 하기 바쁜 '집단적 독백'이다. 타자가 원하고 알고 싶은 대답을 말하지 않거나, 또 타자의 나와 다른 발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무슨 약을 먹는지 영영 답하지 않을뿐더러, 잭은 애초에 드니스와 달리 바벳의 진실에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타자보다는 내가 우선이기에 저녁 식사나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기 폐쇄적인 태도가 단순 TV를 보는 수준, 가족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을 명멸할만한, 2.39:1의 화면비로 포착된 익스트림 롱숏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묵시록의 재앙을 연상케 하는 거대하고 검은 나이오딘 D 구름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과연 대재앙이라는 사실로서 검은 구름을 인식하는가, 아니면 번쩍이는 검은 구름을 자아내는 스펙타클한 테마파크로 인식하는가. 또 잭은 주유소에서 나이오딘 D에 2분 30초 이상 노출되었기 때문에 검사를 받는다. 줄은 길고 뒤에는 울면서 기다리는 여인이 있다. 그런데 잭은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또 교수로서 자원봉사자를 깔보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질문 세례를 퍼붓는다. 빨리빨리 해소되어야 할 현실의 검사가 지체된다. 자기 폐쇄적인 독단적 태도가 현실을 방해한다. 그것은 곧 영화 속 현실에 참여하지 않음에 발생하는 '교통사고'로 나타난다. 캠프에 갈 때 새치기 또는 다른 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운전자의 오만에 의해서, 캠프에 나이오딘 D가 유출되어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시야에 갇힌 사람들에 의해 충돌 사고가 만연하다.     


영화에선 안과 밖이 단절, 특히 안에서 밖이 보이지 않는다. 주유소에서 차량 외부의 잭은 가족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보이는데, 차량 내부의 가족들은 잭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선 보거나 듣는 존재가 있다. 바로 청소년들이다. 바움백은 두 가지의 희망을 제시하는 데 그중 하나가 청소년이다. 물론 청소년들 일부의 요소는 성인들을 모방한다. 비윤리적인 태도로 비행기 추락 사고의 쾌락에 탐닉하고, 또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가 말하는, 기존의 앎과 시야를 부정하여 자신을 드넓히는 '경험'이 부족해서 시야가 대체로 좁다. 잭에게 전화를 걸게 만드는 드니스가 자신의 기준에서 성인에겐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주문하는 것, 결말에서 스테피로 추정되는 아이가 "내 기준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투의 대사를 내뱉을 때 좁은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배움에 게으른 교수 어른들과 달리, 청소년들은 더 알고 싶다. 나이오딘 D나 다일라에 대한 진실에 다가선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이를 뒤바뀐 현실에 능동적으로 적용한다. 더 보거나 알고 싶은 청소년들은 수평적인 시야에 그치는 잭과 달리, 하늘을 향해서 고개를 치켜들거나,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을 향해 망원경을 들이밀며, 사실에 깊이 접근하는 ‘수직적인 시야’를 지향한다. 또 현실에서 욕망을 보고 또 보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욕망을 손쉽게 실현하는 중산층 성인들과 달리, 청소년들은 아직 TV의 수동적인 욕망에만 그친다. 이들은 욕망으로 현실을 바꾸지 못하기에, 날 것의 현실을 본다. 경고문을 읽지 않고, 또 동물실험에 대한 주장을 자기 좋을 대로 내뱉는 바벳과 달리, 드니스와 하인리히는 경고문을 읽고 변화하는 현실을 능동적으로 체감하여 구토한다. 바벳을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잭과 달리, 현실로 보는 아이들은 바벳의 문제점을 직감하고 걱정·염려하며 상대를 느낀다. 잭이 스펙타클한 쇼로 군중들을 불러 모은다면, 하인리히는 캠프에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으로 청중들을 불러 모은다. 기존의 시대가 가상으로 보편성을 이룬다면, 하인리히에 의한 공동체는 사실로 보편성을 이룬다. 그리고 강에 빠져서 길을 잃었을 때, 잭이 아니라 하인리히의 지휘로 빠져나온다. 바벳의 문제를 인지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도 잭이 아니라 드니스다.     


이렇게 이미지와 욕망이 습관이 된 성인들과 달리, 현실에 대한 호기심과 유연한 사고를 여전히 간직한 청소년이 희망의 단초다. 또 다른 희망의 가능성은 '타자'다. 일단 욕망과 상상에 대한 믿음의 제국으로 전락해버린 <화이트 노이즈>에선 내가 서있는 현실조차도 나와 무관한 타자로 배태한다. 본래 이미지와 상상의 세계에 사람들이 덜 매몰된, 이미지가 질과 양 모든 차이에 의해 현실과 분리되던 과거에, 현실은 자신으로부터 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이 만들어낸 표상에 갇힌 이들에게 우발적이고 고통스러운 현실은 낯설고 생경하다. 그래서 부정한다. 그러나 현실을 마주해야만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칠 수 있다, 내가 유지된다. 그런 현실을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주유소에서 하늘을 인식하는 잭을 포착할 때 본래 아이 레벨 숏 수준에 머물던 카메라가 하이앵글숏으로 떠오른다. 지상에만 머무르는 인류와 달리 하늘도 포함하는 현실이, 인간 표상 너머의 시야와 불가해한 구도인 하이앵글로 가시화된다. 지상 너머의 시야를 인식하고 긍정할 수 있을 때, 그렇게 표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세계에 참여할 때, 현실의 중력에 발이 묶인 인간의 문제를 진정 극복할 수 있다. 그런 세계는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영화가 현실로 나아갈 때, 우리의 기분을 밝게 만드는 화사한 채도는 칙칙한 채도, 쨍한 명함은 어두운 명암으로 뒤바뀐다. 심지어 극의 후반부에는 아주 불쾌한, 독을 지닌 양서류나 파충류를 연상케 하는 괴괴하고 해로운 녹색으로, 또 불안정하게 깜빡거리는 조명이 등장한다. 그러나 죽음과 폭력이 가득한 현실과 맞닿은 본 형식을 인식해야지만, 그리고 이를 해결해야지만 진정 객관적인 세계의 난색, 바로 '태양'이 밝아온다. 그리고 또 다른 타자들이 등장한다. 캠프에서 대피하던 당시 스테피가 토끼 인형을 떨어트렸다. 딸을 위해서 주우러 가는 잭은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러나 줍기가 불가능하다, 자칫하면 뺑소니 당하고 인파에 밟힌다. 그런 잭에게 토끼 인형을 잡은 구원의 손길을 누군가가 내민다. 손 주인의 용모는 다소 이상하다. 보편적인 이분법적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재되어 있다. 인파 속에서 그는 실종되어 버렸지만, 이윽고 신원이 일부 확인된다. 바로 총기 허용 여론이 보편적이고 이를 헌법이 보장하는 미국에서의 타자인 총기 규제 협회 소속원이다. 보편적인 사람들이 밟고 뺑소니를 일으킨다면, 이들과 다른 사람들이 잭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삼다가 길을 잃고, 이후 옥수수밭을 거쳐서 도로로 돌아간다. 그런데 도로에 차가 빼곡하다. 캠프로 향하는 시퀀스에선 보편적 백인 다수가 교통사고를 일으켰지만, 다행히도 본 시퀀스에선 동양인 운전자가 끼어들기를 허용해준다. 덕분에 잭은 교통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 잭에게 증상을 확인시켜준 의사 또한 동양인이 아니었나. 영화 속 배경은 구체적인 시대상은 알 수 없지만 냉전 시기의 미국임이 확실하다. 그리고 소련이 노동자들에게 금욕을 강요하고 거시적 축적과 발전을 주문했다면, 미국은 그 반대로 사치와 낭비로 개개인의 내재적 원리를 주문한 국가였다. 문제는 절충을 이뤄야 할 축적과 소비가 양극단에 쏠리다 보니, 미국에서는 오직 내재적 원리에 따라 모두가 욕망에 갇혀버렸다. 그런 와중에 미국의 보편성에서 이탈한 타자들이 현실 참여를 도와준다. 한편 어떤 이민자들은 미국인들의 욕망 때문에 소환됐지만, 이내 곧 효력이 없자 버림당한다. 잭은 이민자인 다일라 실험 매니저를 죽이려 한다. 바벳이 실험 매니저와 몸을 섞고 그의 기대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불륜의 증거를 몸소 없애 없던 일로 만들고, 자신이 기대하는 바벳으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떤 존재든 인공 호흡하며 긍정한다, 다름은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하는 것이니. 그리고 회복해야 하는 타자는 곧 ‘타자화된 나 자신’도 포함한다. 약에 중독된 바벳의 의지는 제 것이 아니다. 눈과 귀가 내 것이 아니고, 타인과 약에 의해 좌우된다. 또 불멸에 대한 상상으로 언젠가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타자화한다. 그리고 바벳은 약에 의한 자신이 아니라면, 잭이 바라는 여성으로 타자화된다. 그러나 자신의 진실을 긴 시간을 할애하여 밝혀서, 타자화된 자신을 내 몸과 의식 안으로 되돌려놔야 하리. 그리고 지루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잭은 자신을 고백하는 바벳의 대화를 참고 들으며 그녀를 존중한다. 그리고 나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총알을 함께 맞은 고통을 공유하여, 자기 폐쇄적 표상에서 객관적 세계로 빠져나와 연대해야 한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수녀 간호사가 무신론에 대한 믿음을 '독어'로 논증하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잭과 바벳은 이를 외면한다. 사고를 수습하는 당시에도 밀매상과 응급실에서 거짓말, 즉 사실이 아닌 나를 면피하기 위한 말이 오가지 않던가. 이후 또다시 쾌락의 전당인 마트로 이어지며 영화는 끝나지 않던가.      


즉 인간이란 언제나 진실을 망각하고, 그 자리에 욕망과 상상을 채우는 존재다. 핸드헬드로 변화한 영화가 다시 기교적인 카메라워킹으로 되돌아가듯, 계획에서 이탈하던 잭과 바벳이 자본주의의 알고리즘이 데려온 진열대의 뮤지컬에 끝끝내 동참하는 것처럼, 코로나 팬데믹을 연상케 하는 마스크나 미국의 총기 규제, 공해 문제 등을 언급하며 과거를 배경으로 삼는 영화를 오늘날로 이어내면서도, 아름답다 못해 과잉으로 흘러넘치는 기교를 현실 대신 전시하는 영화의 형식처럼… 그래서 반성하는 극이라기보단, 언행 불일치 인간의 한계를 수긍하는 극으로도 볼 수 있다. 동료 교수의 죽음 대신, 그 직전의 서핑을 상상하는 잭처럼 인간은 영영 제 표상에 갇히는 존재, 죽음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 드릴로가 문자로 보여준 스펙타클 사회에 부합하며 바움백의 또 다른 가능성을 증명하는 현란한 영상화, 다만 지나치게 드릴로에게 기댄다. 원전에 대한 바움백의 의식이나 관점은 무엇인가? 또 바움백의 전작들에서 그레타 거윅의 연기는 잘 어울렸지만 본 작품에서만큼은 부조화하다. 자신조차도 우악스럽게 이미지화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에서 아담 드라이버의 과장된 연기는 잘 어울리지만, 거윅 만큼은 이전의 소박한 표현을 익히 반복하며 과장의 시대에서 겉돈다. 여하간 항상 소규모 자본으로 연출하던 바움백이 진정 하고 싶었던 작업이 이런 유형일까, 흡사 그와 친밀한 웨스 앤더슨의 형식적 부유함처럼, 영화관에서 꼭 봐야만 하는 영화를 연출하고 싶었을까. (그런 영화가 넷플릭스라니!) 그런데 껍데기는 남고 드릴로의 정신성도 남지만, 바움백의 정신은 도통 모르겠다. 더욱이 감독 자신도 넷플릭스가 시뮬라시옹을 위해 동원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제작비를 대변하듯, 본 작품에서 경고하는 시뮬라시옹에 모순적으로 일조하는 연출과 형식은 관점에 따라 실망스럽다. 필연적으로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현실 건망증'에 이끌림을 보여주는 연출일 수도 있지만, 이와 동시에 무분별한 시뮬라시옹을 가속하는 형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나친 단맛과 쾌감이 자아내는 불쾌감처럼 더 과잉된 표현을 했거나, 아니면 대혼란의 소련을 담아낸 알렉세이 게르만의 카오스적 형식처럼, 여하간 다른 연출이었으면 더 효과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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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07 CGV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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