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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2. 2022

마티유 아말릭, <홀드 미 타이트>

자유를 향한 도약은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마티유 아말릭(Mathieu Amalric), <홀드 미 타이트>(Hold Me Tight) 

- 자유를 향한 도약은 단번에 이뤄지지 않는다    

"남성들은 돌봄과 사랑보다 권위와 책임감으로 사회화되고, 여성들은 주장과 자율보다 복종과 의존으로 사회화된다.“ -베티 리어든-

전근대의 여성은 누구로 살아왔는가. 나로 살았는가, 요구되는 나를 살았는가. 여성은 언제나 후자로서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젠더를 요구받았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일반성, 물론 남성 또한 일반성을 강요받았으나, 그 일반성을 형성하는 주체가 남성이었기에 제 바람을 반영할 수 있던 반면,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은 자신을 반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성에게 불가능한 것이 곧 ‘자신’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거쳐 오늘날의 여성은 충실한 제 삶을 지향한다. 물론 전근대에 익히 가능했던 여성상, 그리고 오늘날에 불완전하게 가능한 여성의 자유, 양자 사이에서 여성은 여전히 자아분열에 처한다. 환상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남성에 의해 강제로 갖게 된 여성성을 혹 잃어버릴까 자꾸 뒤를 힐끔거리고, 그 과정에서 진정 내가 지향해야 할 모습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어 신경쇠약에 빠진다. 이렇게 가부장제 내의 여성상과 진정한 자신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성의 초상을 마티유 아말릭이 <홀드 미 타이트>에서 그려낸다. 1965년 뇌이쉬르센 태생의 마티유 아말릭은 프랑스의 배우로 우리에게 유명하다. 그는 아르노 데스플래셍의 작품에 자주 기용되고, 또 국내 개봉작으로는 <잠수종과 나비>,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에서 보여준 연기로 잘 알려져 있다. 웨스 앤더슨의 작품에도 조연으로 자주 기용된다. 과시적인 액션, 몸동작보다는 특유의 표정으로 심리적 고뇌, 소외된 삶을 다루는 데 특화된 배우인 아말릭은 배우임과 동시에 언제나 영화감독을 꿈꿨고, 2010년 <온 투어>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 아말릭 또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아말릭의 영화는 감상자에게 환상을 보여주는 영화계에 속한 구성원의 고민, 배우로서 자신과 배역 사이의 괴리를 다루는 테마로 유명하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장편들은 모두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나 <가을 소나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뒤틀었다고 볼 수 있다. 관객들 앞에 선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묻어난 작품으론 <온 투어>, <샹송가수 바르바라>를 꼽을 수 있고, 이러한 성찰을 보다 일상적, 보편적으로 전 인류에게 확장한 작품이 <블루룸>, 그리고 신작 <홀드 미 타이트>라 하겠다.     


일단 아말릭의 작품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온 투어>에선 성공한 네오-벌레스크 무용단, 그들을 관리하는 매니저이자 기획자 조아킴이 등장하고, <블루룸>에서는 기업체를 가진 줄리앙과 약사 에스더, <샹송가수 바르바라>에서는 전설적인 가수 바르바라를 연기하는 유명한 배우 브리지트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에 일반적인 얼굴에 만족하지 않는다. 현재의 얼굴이 아닌 평범한 아버지, 연인, 배역인 바르바라를 열망하며, ‘두 개의 얼굴’ 사이에서 고뇌한다. 일단 <온 투어>에서 일반 관객들에게 비일상적인 것은 네오-벌레스크 무용단들이 보여주는 환상의 쇼지만, 정작 그것을 연기하는 댄서, 관리하는 기획자에게는 흔하다. 그들은 오히려 TV나 음악을 끄고 싶고, 관객의 일상에서 익히 손에 닿는 결혼이나 섹스가 그립다. 관중들은 일반적인 육체의 한계를 초월한 댄서들에게 환호하지만, 정작 댄서들은 평범한 인간이 되고 싶다. 즉 이들은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사랑이 불가능하므로 닿고 싶어 졌다. 조아킴 또한 곁의 댄서들보다도 주유소에서 만난, 투명한 창을 넘을 수 없는 평범한 여성에게 더 이끌린다. 아말릭은 이를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흡사 모큐멘터리라고 착각할만한 양식에 담아낸다. 또 무대 뒤편을 포착하여 관객들이 볼 수 없는 환상의 이면을 까발리고 평범하게 만든다. <블루룸>에서도 마찬가지로 약사, 기업인, 기혼자 등 지금 내가 안정적으로 가진 것들은 시시하고, 대신 내가 갖지 못한 불륜, 동물적 욕망이 애달프다. 줄리앙은 키가 크고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에스더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에스더에게 줄리앙은 다른 여자의 남자로 가질 수 없었다. 그런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싶다. 그런데 이는 비단 사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줄리앙의 아내, 에스더의 남편이 사망하고, 불륜 관계였던 둘이 용의자로 재판에 선다. 그 과정에서 이들에게 고용되거나 봉사하는 노동자들이 반대로 그들 위에 군림하여 두 연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다. 의기양양해진 증인들, 사람들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바란다. 높다면 아래를, 아래라면 위를.   

   

<샹송가수 바르바라>에서는 그간 이분법적으로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던 경계, 차원을 더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뒤섞는다. 영화에선 배우 브리지트가 배역 바르바라를 단순하게 거부하거나 따르지 않는다. 감독과 관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배우의 상태에 신물이 나는 브리지트, 그녀는 수동적인 배우, 이미지에 맞춰 사는 배우를 거부하고 혼자서 걷거나, 잠들어버린 기사 대신 운전하는 등 능동성을 되찾는다. 한편 그러기 위해서 배역을 거부함과 동시에, 배역을 입는다. 노래하고 연주하는 바르바라를 빌려서 브리지트를 말한다. 익히 가능한 수동적 브리지트를 거부하고, 불가능하며 능동적인 바르바라를 입는다. 이렇게 불가능을 지향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순수할 수 없다, 혼돈 그 자체다. 인간은 갖고 싶었던 것을 충족하면, 이내 곧 가졌지만 잃어버린 것을 다시 열망하고, 당장 충족한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갈피를 종잡을 수 없는 존재다. <온 투어>에서 프로듀서였던 조아킴은 아버지인 자신을 되찾지만, 이윽고 아버지가 되고 나니 아들들을 집에 돌려보내고 싶다. 댄서들 또한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환상을 보여주지만, 정작 나의 환상은 성취되지 않음에 권태감을 느끼면서도, 정작 평범한 사람으로서 소망이 충족되면 다시 쇼는 시작된다. <블루룸>에서 위반은 감각적이다. 4:3 화면비에 정물화처럼 보존된 사물들, 각 신체의 감각을 극대화한 조각난 클로즈업 때문이다. 일상을 깨트린 위반은 박진감 있는 감각, 어수선해짐으로 감상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그러나 영화가 강조하는 것은 혼란을 질서정연하게 원상 복귀시키는 수사, 그리고 위반의 대가는 평생 지리멸렬하게 되풀이되는 삶만 허용되는 '종신형'이다. 과도한 금기, 불가능에 따르는 대가는 참혹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위반을 거부할 수 없고, 아말릭 또한 위반의 영화를 지향한다. <샹송가수 바르바라>는 처음에는 바르바라라는 대상을 촬영하는 영화로 시작했다가, 이내 곧 마티유 아말릭 본인이 연기하는 이브가 등장하는 자전적인 영화로의 변주 등, 감상자가 기대했을 전기 영화의 범주를 계속 벗어난다. 또한 감상자가 브리지트 내지는 바르바라를 안다고 속단할 수 있지만, 이내 곧 카메라가 노출되고 세트장이 붕괴하는 등, <샹송가수 바르바라> 속 이미지가 가리키는 앎이 영영 불가능으로 유예된다. 그녀가 발화하는 것이 브리지트의 것인지 바르바라의 것인지,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다.      


마티유 아말릭이 한때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혼하여 불가능한 존재인 잔느 발리바를 <샹송가수 바르바라>에 기용한 것, 잔느 발리바만 주목하던 카메라가 이윽고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변덕 또한 현실 속 자신을 반추하여 제 철학을 반영한 것이리. 그것이 아말릭이 생각하는 영화다. 감상자는 영화를 보며 배역이나 배우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배역은 배우를 빌린 상황이고, 배우 또한 배역으로 간접 나타날 뿐이기에, 그 어느 쪽도 온전하지 않고 심지어 이들은 실존하여 배역이나 배우에 대한 기존 앎은 감상자의 뇌리에서 계속 빠져나간다. 우리는 다만 <샹송가수 바르바라>라는 환상의 이미지만 알 뿐이다. 이윽고 그 이미지 또한 현 상태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하니, 감상자는 기존의 앎과 새롭게 현현한 대상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나 길 잃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필요 없이, 그 모든 것이 대상 그 자체다. 이렇게 배우-배역 관계를 빌려 불가능에 대한 욕망, 과도한 위반에 따른 대가를 논하고, 이를 연출로 가시화하는 것이 시네아스트로서 특징인 아말릭, 과연 신작에선 이러한 철학이 어떻게 펼쳐질까. 아말릭은 역시나 신작에서도 혼란스러운 연출을 선보인다. 영화는 집을 떠나 새 출발을 하는 클로리스의 세계를, 이와 청각적으로 겹치고 이어지는 남겨진 가족들의 세계와 교차편집으로 잇는다. 그리고 너무나 그럴듯하게 이어지는, 남겨진 가족들이 놓인 시공간은 믿을 만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교차편집으로 이어지는 세계가 클로리스의 상상이었음을 밝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이로써 식구들이 잘 지내고 있을 것이란 그녀의 망상적 기대에 함께 젖어 들었던 감상자의 믿음에 균열을 낸다. 바로 그 장치는 두 번씩 반복되는, 수미상관 구성이다. 일단 가장 먼저 도입부와 영화 말미에 반복되는 숏은 클로리스가 '같은 사진 찾기'를 하는 장면이다. 도입부, 사진을 맞추는 클로리스가 포착되기 이전, 영화는 새카맣게 어두웠다. 그러나 서서히 날카로운 새소리가 울려 퍼지고, 감상자의 눈을 아찔하게 내리쬐는 빛이 퍼져가며 밝아진다. 밝아지는 이유는 클로리스가 같은 사진을 골랐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영화에서는 클로리스의 현실과 상상, 현재와 기억, 시각과 청각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것이 같다는 것은 어색하게 겹쳐진 다른 두 개를 본래의 짝에게 돌려주는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클로리스는 이내 곧 신경질을 부리며 사진들을 뒤집고 엎어버린다. 이윽고 빛이 가득했던 영화는 다시 어두워진다. 비추던 영화는 다시금 감춘다. 그렇다면 무엇을 감추는가, 두 개의 쌍이 오롯이 맞춰지는 것을. 이후 클로리스가 밤에 식구들 몰래 집을 나서는 모습이 포착된다. 감춰지는 것은 클로리스가 떠난 이후 식구들의 삶이다. 그 이후는 모두 클로리스의 상상으로 대체되며 현실과 불일치한다. 이후 영화 말미에, 알프스에서 길을 잃어 사망한 식구들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클로리스가 텅 빈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 클로리스는 다시 같은 사진 찾기를 한다. 이제는 뒤엎지 않는다. 차분하고 점잖게 사진을 맞추는 클로리스가 포착된다. 같은 사진 맞추기, 즉 답을 찾는 클로리스는 자신이 떠남으로써 불행해진 식구들의 '정답'을 직면하기가 어려웠으리라. 그러나 식구들의 사망을 확인한 이후에도 그들이 살아있다는 망상으로 도피할 순 없다, 답을 맞추는 수밖에. 클로리스는 식구들의 사망이 확정되기 이전, 식구들이 알프스에서 조난당해 실종된 소식을 먼저 들었다. 실종된 당시는 겨울이어서 수색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죽음이 확정되지 않아 식구들에 대한 클로리스의 망상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봄이 되어 빙산 일부가 녹았고, 식구들의 유해가 드러났다. 스키장에서 실종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클로리스는 식구들을 찾아 뛰쳐나가더라도, 이윽고 다시 상상하지 않았었나. 이는 클로리스가 사망 소식을 접하고, 영화에서 두 번 반복되는 '호텔에서의 아침 식사'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는 클로리스, 그녀에게 주인이 다가와 식사를 치워도 되겠냐고 묻는다. 클로리스는 아직 놔두라고 말한다. 이후 첫 번째 시퀀스는 폴이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후반부에 클로리스가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이 다시 포착된다. 다만 차이점은 폴이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이어졌을 때는 그녀가 다른 손님들을 바라보는, 즉 그녀의 시점 숏이었다. 그래서 폴의 게임이 그녀의 자의적인 의식, 뇌리에서 상상한 것이라면, 두 번째 시퀀스에서는 그 손님들이 클로리스를 바라본다. 영화 내내 술을 마시며 현실 도피적인 클로리스와 달리, 아마도 정상적인 의식을 가졌을 손님들의 객관적인 시야에서 세 구의 시신을 확인하고 오열하는 클로리스가 포착된다.  

   

첫 번째 호텔 식사 장면에서 클로리스의 행위와 폴의 행위가 매치컷된다. 클로리스에 의한 폴, 여전히 멀리서도 어머니의 영향이 미칠 폴, 이로써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화목한 가정을 상상한 것이랴.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럴 수 없다. 삶이 가능성이라면, 죽음은 그 가능성의 차단, 더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 아들의 삶을. 마지막으로 반복되는 숏은 클로리스가 차를 타고 집 밖으로 나가는 숏이다. 같은 사진을 찾는 시퀀스와 마찬가지로 도입과 끝을 장식하는 숏, 전자에서는 떠났어도 클로리스의 의식이 집으로 되돌아왔다면, 후자에서는 클로리스가 떠나면서 영화도 막을 내린다. 전자에서는 익히 가졌던 것, 가능했던 것을 상상했지만, 후자에서는 아예 무(無)로 끝나며 기억에 구속받지 않고 무한하게 상상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후자에서부터 펼쳐지리. 그녀의 상상과 자유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본 작품의 연출을 더 살펴보자. 앞서 클로리스가 호텔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녀의 시점 숏과 타인이 그녀를 바라보는 숏이 대비를 이룬다. 카드 맞추기, 떠나기에 앞서 준비하는 그녀 모두 클로리스의 시점 숏이다. 그녀의 숨소리, 어깨 너머, 뒷모습에서 카메라가 따라다닌다. 카드 맞추기조차도 그녀가 카드를 바라보는 시점이다. 그래서 클로리스는 언제나 가까이에서 포착된다. 그러나 타인이 보는 그녀는 가까이 있지 않다. 서서히 멀리 있는 그녀가 포착된다. 멀어져서 낯설게 포착되는 것이 진실인가. 가까웠던 것은 클로리스의 바람이다. 그렇게 환각을 보는 눈, 환청을 듣는 귀에서 달아나며 사실이 폭로된다. 즉 후자가 중립적인 관찰자의 객관적인 시선, 클로리스의 사실이라면, 전자는 그녀의 주관적인 눈과 귀를 반영한다. 일례로 클로리스는 가족이 실종되고 사망이 확인되기 전의 텅 빈 집을 가족들이 이사 간 이후의 집이라 상상한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사진을 찍는데, 객관적인 시각은 텅 빈 식탁이지만, 그녀의 손과 눈에 의한 주관적인 사진은 가족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화목하게 식사하는 과거의 되풀이다. 또 직장에 출근하는데 자기를 외면하는 마크를 상상하거나, 쥘리에트라는 소녀를 루시라 오인하고, 마찬가지로 하키장의 소년을 폴이라 여기는 등 클로리스의 시선은 주관적이고 환각적이다. 그래서 아말릭은 사실을 찾기 위해 주관적인 나의 눈과 귀를 타인의 눈과 귀와 교차한다.     


즉 교차 편집의 이유는 그녀가 느끼는 환청과 환각이, 실제 귀와 눈이 속한 현재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함인 듯 영화는 시청각이 일치하지 않는다. 시각은 클로리스가 포착되어도, 루시가 연주하는 음성이 겹친다. 반대로 루시가 연주하는 모습이 포착되고 이후 마크가 피아노를 닫더라도, 청각은 여전히 클로리스가 차 안에서 재생하는 루시의 연주곡이 흘러나온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루시 연주가 테이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아이들의 음성이 클로리스의 뇌리에 기억되어, 떠나온 그녀는 이를 토대로 그리운 가정을 상상하고 그것이 숏의 시각에 펼쳐진다. 즉 연주나 음성이 비롯한 당시의 시각이 아니라 상상이기에, 상상의 시각과 실제 청각은 온당 일치하지 않는다. 이윽고 클로리스의 상상은 그녀의 현재를 반영한다. 집을 떠난 클로리스는 원하는 노래를 듣는다. 이윽고 그녀는 상상한다. 루시 또한 원하는 춤을 추기를. 술에 취해 낯선 남자에게 안겨서 이동하는 클로리스가 상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집을 떠난 것을 후회하는 클로리스는 마찬가지로 폴이 클로리스를 원망하고 그리워하기를, 그래서 자신처럼 마크에게 안겨서 이동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클로리스는 혼자서 문을 잠근다. 마찬가지로 마크에게 의존하지 않고 폴을 위로하고자 문을 잠그는 루시를 상상한다. 이렇게 상상한 시각은 언제나 클로리스가 간직하고 있는 구체적인 아이들의 음성, 아니면 아이들이 닮을 클로리스의 행동에서 비롯한다. 마찬가지로 클로리스의 현재를 포착하는 시각에서도 과거의 음성이 계속 침투해온다. 현재의 클로리스가 시각으로 포착되고, 과거 마크의 음성이 그녀 귓가에 맴돈다. 상상이란 현재, 현실과의 불일치다. 상상하는 존재는 현재 속에서 과거나 공상을 듣거나 보고, 상상은 상상하는 주체의 음성이나 시각이 덧입혀진다. 이후 시간이 꽤 흘렀다. 과거의 구체적 청각에 의존하며 상상하던 클로리스는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로운 그녀의 현재로 상상하기에 이른다.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했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TV에서 방영되는 미사라는 피아니스트의 쇼를 클로리스와 루시가 같이 보고 있을 것이라 상상한다. 그리고 클로리스는 미사의 용모를 현재의 루시가 닮았으리라 상상한다.      


또 클로리스가 상상한 마크는 과거 부부의 발화가 아닌, 현재 클로리스가 마크에게 바라는 욕망을 투영한다. 이로써 그럴듯하던 상상은 더 환상적으로 변해간다. 과거에 의존하던 클로리스의 상상은 비교적 구체적이어서 카메라가 안정적이고 점잖았다. 그러나 구체적 기록, 사료에 의존하지 않는 상상은 핸드헬드나 줌인 등으로 들썩거리며 카메라의 가상적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다. 또는 독자적으로 살아 숨쉬기에 헐떡거리는가. 미사처럼 흰 머리인 루시, 얼굴을 분장한 폴, 갑자기 옷을 벗는 마크는 이전의 상상과 달리, 타인의 삶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는 상상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과거에 덜 의존한 채로 현재에 살아 숨쉬며 독자적인 상상을 하는 클로리스의 헐떡임인가. 여하간 상상의 변주에 따른 연출의 차이가 흥미롭다. 이전 연출이 클로리스의 행동, 기억, 기록된 음성에 따른 플래시 포워드(그녀는 자신이 집에 남겨놓은 과거가 식구들의 현재로 이어지길 기원한다)와 매치컷에 의한 교차편집(클로리스의 행동이 식구들에게 똑같이 반영되기를, 특히 아이들에게)이었다면, 즉 구체적인 어떤 대상에 의존하였다면, 이후의 연출은 클로리스의 망상과 욕망, 그녀의 입에만 의존하며 방방 뛰기 때문이다. 클로리스의 경험, 기억을 투영한 상상은 언제나 ‘수동적 여성상’에서 비롯한 구체적 증거들이 상상한 시각에 콜라주처럼 중첩되었다면, 이제 독자적으로 상상하는 클로리스는 마크의 껍데기만 빌려온 이미지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현재의 클로리스는 상상 속 마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현재의 클로리스가 과거 마크의 질문엔 대답할 수 없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다, 상상은 가능이지만 현실은 불가능이다) 기억과 무관한 그녀의 질문과 지시가 마크의 행동과 답을 규정한다. 전자가 편집으로만 이어지고 정작 클로리스와 가족들은 유리되어 있었다면, 후자에서 클로리스와 가족, 특히 마크는 밀접하다. 전자는 그래도 그럴듯하게 클로리스가 위안한 것이라면, 후자는 거짓인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위로를 받는다. 상상할 구체적 대상이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상이 추상적일 때, 구체성에 얽매이지 않을 때 상상은 더 대담해진다.     


이렇게 상상, 그리고 상상의 유형에 따른 형식의 구분이 도드라지지만, 아말릭의 연출은 상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는 컷이 더 잦다. 클로리스가 상상하는 마크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이 곧 주부로서 클로리스가 맞이했을 등교 전의 부산스러움이랴. 그러나 바다로 여행을 간 클로리스는 비교적 긴 숏에 보존된다. 마크의 모습이 루시, 폴로 계속 뒤바뀌던 전자와 달리, 후자는 클로리스임이 비교적 길게 유효하다. 이렇게 아말릭은 연출로 클로리스가 떠난 이유를 대신 말한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자신을 집에서, 가족관계 내에서 잃었다. 이러한 연출은 마크와 클로리스의 첫 만남에서도 유효하다. 식구들이 스키장에서 실종된 이후, 클로리스는 방치되어 눈이 쌓인 차처럼,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릿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마크와의 기억을 해동한다. 식구들이 ‘떠나도 되는 대상’에서 ‘찾아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한 것처럼, 마크와의 사랑도 불가능으로 전락할지 모르기에 다시 그 기억을 되새겨본다. 클로리스와 마크는 클럽에서 만났다. 그간 클로리스와 마크는 분리되어 있었다. 잠든 마크와 깨어있는 클로리스, 이후 서로의 세계가 분리되어 주부를 수행할 마크와 남편을 수행하는 클로리스, 시각으로 포착된 클로리스와 청각만 남은 마크, 그 반대로 클로리스의 청각/마크의 시각 등으로 서로가 속한 차원이 나뉘었다. 그러나 이들의 첫 만남에선 하나의 숏 안에 서로가 함께 담겼다. 집을 뛰쳐나온 클로리스는 아이들을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그 정도로 가정이 지긋지긋했다고 회고하지만, 정작 마크와 첫 만남 당시에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이들은 생경한 서로에게 '특정한 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존재 그 자체를 파악했다. 클로리스가 젠더를 수행했고, 이후 클로리스가 가부장제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성을 대신 수행할 마크를 상상했다면, 이들의 첫 만남에서 그들은 각자의 몸이 원하는 이끌림, 가리킴, 춤에 충실했다. 그러나 몸에 솔직했던 그들 자신, 특히 클로리스가 사라졌다. 몸에서 멀어진 그녀는 몸에 달라붙기 위해서 마크 곁에서 떠난다. 그러나 클로리스의 여행은 자신이 아닌, 마크의 지시에 충실했다. 마크는 여행이란 오랜 시간 떠나는 것, 언어를 새로 배우는 것, 친구를 새로 사귀는 것, 일자리를 잡고 자리를 잡는 것이라 말했다. 이를 들은 클로리스는 마크의 여행 규정을 충실하게 현실에 옮겼다.     


즉 집에서 뛰쳐나오면서도 마크가 설명해준 여행을 따라간 그녀의 삶은 여전히 남편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보며 만족과 성취감을, 마찬가지로 아내 또한 남편을 보며 존재 의의를 느낀다. 클로리스는 분명 집이 갑갑했다. 집을 보라, 안주인으로서 여성을 향한 무수한 지시, 자신이 어머니임을 가리키는 '증거' 사진들, 여기서 클로리스는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망망대해가 펼쳐진, 액체로 가득 차 모든 것이 비규정적인 바다로 향했다. 그러나 클로리스는 그 바다를 어머니이자 아내의 증거가 잔뜩 써 붙여진 집의 ‘냉장고’로 만든다. 마크의 말 따라 클로리스는 언어를 배우고 활용하기 위해 관광해설사의 말을 관광객들에게 통역하는 번역 일을 맡았다. 그러나 통역가로서 클로리스가 아닌, 아이를 훈육하는 데 관심을 두는 어머니로서 자신을 소환한다. 한 독일인 남성의 훈육이 잘못되었다며 통역가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를 다그친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분신으로서 제 생을 이어가기를, 그리고 타자로서의 개선을 바란다. 그래서 클로리스는 루시가 여전히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실현하길 바란다. 폴이 자신과 닮길 바란다. 어머니로서 자신은 루시, 폴로써 완성되기에, 자식들은 그녀를 볼 수 없는 장소에서 그녀는 그들을 바라본다. 물론 상상이다. 가족들이 실종된 이후에 이어진 숏들이기에 볼 수 없는 환각을 본 것, 다른 청소년들에게 루시나 폴을 투영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가부장제 내에서의 여성성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많고 다양한 소음이 울려 퍼지는 바깥이 아니라, 폐쇄적인 차 안에서 단 하나의 기록된 음성을 반복 재생한다. 또 자립을 위해 여행을 떠난 여성에게 펼쳐진 현실을 거부한다. 술에 취한다. 낯선 남자를 마크라고 상상한다. '꼭 껴 안겨야 하는' 취약한 여성을 재생산한다. 고주망태가 된 그녀는 남성에게 껴안기고 의존하며 다시 가부장제 내에서 부여되는 아내의 성질을 재생산한다. 분명 마크가 자신의 물건을 치워버렸을 것이라 상상하고, 이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그녀는 홀로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가졌던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자신, 현재의 자유로운 여성 사이에서 클로리스는 방황한다.     


그러나 가족들이 실종되면서, 즉 구체적인 사실이 사라지면서 상상이 과감해지는 것처럼, 자신을 아내이자 어머니이게 하는 사실들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삶도 대담해진다. 가족들이 실종되자 클로리스는 이들이 이사한 것이라 상상하며 위안한다. 그녀가 상상하는 이사 시퀀스에서 루시와 폴 남매는 각자가 모은 수집품, 일기를 불태우고 버린다. 본 과정에서 상상을 규정하던 구체적인 언어가 담긴 청각들은, 모두 루시가 연주하는 '추상적인 청각'으로 뒤바뀐다. 기억의 구체성이 추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거쳐 클로리스는 과거에서 깨어나고, 이후 루시와 폴이 아닌 쥘리에트, 하키장의 소년을 인지하지 않던가. 과거의 특정 존재여야만 했던 사람들이 현재의 어떤 사람이 된다. 출근하지 않는 마크의 소식을 접하고, 식구들의 주검을 직면하지 않던가. 그렇게 현실에 참여함과 동시에, 과거에 더는 불참한다. 마크에게 지시하는 클로리스는 남편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받는 아내의 상으로도 볼 수 있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에게 지시하던 남편이 사라짐으로써 남자에게 지시하는 여성을 그려보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상상이 바로 실종, 과거 상실에서 비롯한다. 실종 이후 클로리스는 어머니인 자신을 계속 상상하긴 했지만, 번역가로서 자리를 잡은 모습이 암시되었다. 사회는 점진적으로 자유를 향해 발돋움해 왔다. 이와 달리 자유를 구속하던 구체적인 상들은 역사에 내재되어 현재로 일부 이어진다. 그리고 인간, 특히 여성은 이러한 과거의 족쇄 때문에 단번에 자유로 도약할 수 없었다. 구체적인 과거의 그림자를 모두 다 비워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성은 소유한 것, 소유했던 것을 뒤돌아보며 영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지니.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집에 갇혀 포착되는 여성이 아니라, 포착할 수 없이 떠나버리는 결말의 클로리스일 때 실로 여성은 자유롭다. 이렇게 아말릭은 떠나고도 자식과 남편에게 영향을 쏟는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여성의 딜레마를 절륜한 연출, 특히 편집으로 느끼게 만든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과도 같은 편집, 그 속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여성성이란 강제된 배역, 그러나 어머니이자 엄마라는 배역에 잡아먹히는 여성은 배역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배우이자, 카메라가 쏘아보는 시선에서 자유로운 인간을 회복해야 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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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12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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