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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16. 2022

카밀라 안디니, <나나>

남의 시간, 나의 시간

카밀라 안디니(Kamila Andini), <나나>(Nana, Before, Now & Then) 

- 남의 시간, 나의 시간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보호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그 대가로 그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면, 방어 체계의 상위 개념은 항시 남성 중심적 국가가 될 것이다. 즉 국가는 사회를 보호하는 대가로 공권력을 합법화하고 독점해왔다.” -베티 리어든-

페미니즘 연구자이자 평화 교육가, 배티 리어든은 저서 『성차별주의는 전쟁을 불러온다』에서 가부장제와 전쟁 체제가 서로 깊이 결탁하고 있음을, 사실상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했음을 밝힌다. 일단 성차별주의와 전쟁 체제 양자 모두, 사회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몰아내기 어렵다. 그 사회적인 심리는 '남성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여성', '사회 질서와 국민 보호가 목적으로 일컬어지는 전쟁'이다. 즉 여성이나 약자 보호가 명분이지만, 군비 증축과 비호 받는 폭력성에 의해 여성이나 약자는 더 빈곤해지고 위험에 노출된다. 더욱이 가부장제와 전쟁 체제가 지배력을 과시하는 대상은 여성성으로 일컬어진 '나약함', 폭력으로 몰아내고자 하는 것은 ‘열등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나약한 젠더를 세뇌 받은 여성은 물리적으로 생존하고자 남성에게 의존하고, 심지어 스톡홀름 콤플렉스에 빠져 자길 위협하는 폭력적인 남성을 사랑한다. 그것이 곧 전쟁으로 확대된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약화될 때 전쟁을 일으켜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는 사회적 심리를 재생산한다. 즉 베티는 가부장제와 전쟁 체제는 공통된 뿌리로, 양자가 서로를 강화하고 촉발시킨다고 본다. 그렇다면 전쟁 중 여성의 삶은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리. 그러나 이러한 성차별주의와 전쟁체제를 물리치고, 의존적 여성이 아닌 강인한 여성이 되어야 하리. 그런 여성의 삶을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 펼쳐본다. 인도네시아의 국부로 불리는 수카르노는 1960년대에 집권하여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지향했다. 그러나 수카르노의 권좌를 욕심낸 군인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켜 수카르노를 실각했고, 이후 반공을 주창하는 수하르토의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약 100만 명 이상의 국민을 학살한다. 자유의 관용은 사라지고 오직 힘과 공격성만 숭상하던 수하르토 시대의 여성 나나와 이노, 그녀들의 선택에서 시대를 정화하는 희망이 맺힌다. 인도네시아의 영화감독 카밀라 안디니는 <나나>에서 1960년대 인도네시아 여성의 삶을 추적한다. 1986년 자카르타 태생의 카밀라 안디니는 인도네시아의 영화감독이다. 인도네시아의 영화감독인 가린 누그로호의 장녀로 태어난 안디니는 아버지의 작업과는 거리를 두되, 아버지에 의해서 영화를 향한 애정을 품어오며 현재 영화감독이 되었다.      


카밀라 안디니는 인도네시아의 자연, 신앙, 여성의 삶을 영화에 옮겨오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한편 그녀가 다루는 솔직한 자연은 정직하지 못한 문명으로, 잘 보이지 않는 신앙은 물질로 대체된 종교로, 주체적인 여성이나 진실한 인간의 감정 등은 사회에서의 특정한 여성 젠더의 상으로 대체되기에, 카밀라는 그의 대표작 제목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원을 줄곧 오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가는 것은 시간이다. 카밀라는 본 작품에서 낮과 밤을 대비한다. 낮에는 보인다. 낮에 카밀라가 주로 포착하는 것은 사물이다. 주인공 탄트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가 먹던 계란밥이 담긴 그릇만 덩그러니 남는다. 쌍둥이는 사라지고, 남매가 말랑말랑한 땅에 남긴 손바닥 자국만 남아 있다. 또 심부름하는 탄트리, 모내기와 구충을 논의하는 농부, 슬픔을 감추고 애써 담담함을 표하는 부모 등의 객체적 인간이 보이되 주체로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반해 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밀라는 밤을 애써 밝히지 않는다. 위라세타쿤의 <열대병>처럼 어두워야 밤이기에, 칠흑 같은 상태로 내버려 둔다. 그 어두운 가운데서 미지의 무언가가 계속 일렁거린다. 잘 보이지 않다가 서서히 드러나는 숨겨진 대상들은 아이들의 원혼, 깨어난 신, 춤추는 여성들이다. 또 탄트리와 탄트라는 밤에 깨어나 합창하고 같이 놀며 서로의 우정, 애틋함, 감정을 표현한다. 탄트라는 뇌종양 후유증으로 잘 느낄 수 없게 됐지만, 밤에 느낄 수 있는 합창, 역할 놀이, 연극을 즐긴다. 느낌은 오직 보이지 않는 밤에만 허용된다, 낮에는 오직 이성만이. <유니>에서는 보이지 않는 여성의 진실, 그 자리를 대체하고 보이는 여성의 거짓을 교차한다.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은 유니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다. 빨강과 파랑이 합성되어, 기존의 온색과 한색 모두를 간직하며 원색의 특질을 잃지 않는 기묘한 색 보라, 여성은 보라처럼 남성과 결합하고 사랑하면서도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보라는 외부에 보이지 않는 유니의 속옷이나, 작디작은 브릿지, 장신구 등에 그친다. 보라색 의상 대신 보이는 것은 남성이 요구하는 히잡이다. 또 여선생은 여학생들에게 캠퍼스 진학을 권유하나, 여학생들은 임신 및 조혼으로 캠퍼스를 볼 수 없고 학교에서도 서서히 사라진다.      


남학생들은 높은 성적은 그들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가 아니라, 강간 및 조혼, 임신으로 학업에서 여성을 배태하는 가부장제의 수혜를 입은 것이다. 남선생은 개인의 욕망을 위해 여학생과 결혼하려 한다. 남는 것은 남성, 이슬람교, 가부장제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의 욕망을 찾아볼 수 없다. 여자가 자위, 섹스 등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도 금기시된다. 끝끝내 사라지는 것은 여성이다. 모든 꿈이 사라진 유니는 결말에서 대지에 서 있지 않고 수중에 잠겨 사라진다. 보고 싶은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도네시아를 폭로하는 카밀라, 그러한 가운데 그녀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보완, 지지를 호소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탄트리는 달걀노른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것을 잘 아는 탄트라는 자매의 것을 대신 먹어준다. 주는 대로 먹으라며 달걀노른자를 발라주지 않는 엄마와 달리, 그래서 엄마와 함께한 어두운 밤엔 탄트리의 취향이 사라지는 것과 달리 말이다. 탄트리와 탄트라는 이란성 쌍둥이이기에 성별, 용모가 많이 다르지만, 그런데도 서로가 항상 곁에 있어야 각자를 실현할 수 있는 한 쌍이다. 흰자와 노른자, 요리사와 심부름꾼, 공연자와 감상자, 합창단원의 형태로 말이다. 그래서 탄트리는 탄트라를 위해서 대신 고통을 받아도 좋다고 말한다. <유니>에서 유니는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성 아난다를 이용한다. 아난다는 돈으로 유니를 매수하려는 남자들, 자신의 치부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결혼하는 남성들과 다르게, 유니에게 기꺼이 이용당하며 그녀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카밀라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자신에게 솔직한 삶을 지향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선 신비롭고도 불가해한 자연이 마을 공동체와 인접하다. 스스로 솔직한 자연, 그러나 영화 속 인간은 스스로 솔직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밤에 몰래, 은밀하게 솔직하다. 그래서 낮에도 솔직하기 위해 탄트리는 본능과 감정에 충동적인 자연을 빌려 닭, 원숭이 등으로 분장한다. 닭으로 분장했을 당시에는 탄트라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자신의 감정을 말했으나, 탄트라가 사망하고 원숭이로 분장한 이후에는 슬픔을 참을 수 없어서 길길이 날뛰는 제 감정을 표출하고 탄트라를 애도하며 살아있는 나, 떠나간 망자를 분리한다.      


<유니>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난다를 이용해서 높은 성적을 받지만, 그것은 그간 남성에게 여성이 의존하는 가부장제의 답습이자, 제 능력이 아닌 아난다의 능력을 훔쳐 온 것뿐이다. 그래서 아난다를 이용한 성취도 포기하고, 여성이 2번 이상 청혼을 거절하기 어려운 인도네시아의 관례도 무시하며, 유니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 자신을 회복하지만 이와 동시에 자신을 상실한다. 여성이 자신을 실현하면 죽어야만 하는 그곳 인도네시아… 이렇게 카밀라는 항상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커튼을 여는 장면이 도입부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에서 반복되던 것처럼, 까발려서 진실을 본다. 그녀에게 연극은 거짓 연극이 아니라, 나를 대신 돌려 말하는 가상의 진실한 표현 양식이어야 한다. 거짓 연극과 배역을 빌려서 나를 말하는 연극, 이제 그 연극들을 20세기의 여성이 수행한다, <나나>에서 말이다. 일단 본 작품의 연출부터 살펴보자. 도입부, 숲속의 나나는 앉아서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린다. 이런 그녀 앞으로 한 남자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나 실재가 아니라 환각이다. 그 환영은 나나가 강제로 이별한 남편이다. 그리고 나나는 그 남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다만 기다릴 뿐이다. 남편이 그녀에게 다가와야지, 나나가 그에게 다가감으로써 사랑을 거머쥘 수 없다. 그래서 마냥 기다릴 뿐인 여성의 욕망이나 꿈은 환각이다, 타인에 의해 완성됨에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여성의 바람이 불발되는 이유는 남성들이 무력으로 권력을 다투는 전쟁 속에서 힘이 약한 여성은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나는 기운 없이 나자빠져 기다리거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도망치고, 부유한 다르가와 어쩔 수 없이 결혼한다. 나나는 연인 이창을 잊기 싫지만 점점 더 기억이 희미해져간다. 나나는 이창을 잊게 만드는 강제혼, 가부장제에 의해 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카메라는 멈추는가. 도입부, 나나가 아들에게 젖을 물리던 와중, 그녀와 함께 도망치는 언니가 빨리 발을 떼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에 카메라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팔로우숏으로 변한다.      


그러나 카메라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갑갑하다. 나무들이 포개지고 또 포개져서 그 너머를 가리고 있는 숲, 이로써 많은 비밀과 가능성이 내재된 숲에서 나나는 남편이 다가오기를 상상했다. 그러나 여성은 상상만 가능할 뿐, 이를 실현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나나를 숲과 함께 포착하던 풀숏 내지는 롱숏의 구도가 실종되고, 바스트숏이나 클로즈업으로 아주 갑갑하게 그녀들의 얼굴만 포착한다. 그녀들이 숲을 바라볼 수 없고, 세계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는 남편이 실종되었고, 아버지의 처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살아있을 거란 가능성이 사라졌고, 수동적인 여성을 세계에 참여시켜줄 호의적인 남성들이 사라졌다. 목이 잘린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한 나나는 이윽고 꿈에서 깬다. 과거의 악몽이다. 이후 영화는 다르가의 집을 포착한다. 영화는 우아하고도 부드러우며 고상한 카메라 워킹이 두드러진다. 여기에 감미로운 배경음악이 섬세하게 사용되고, 나나가 다르가의 머리를 손질해줄 때는 창밖에서 우윳빛, 진줏빛의 순일하고도 부드러운 조명이 대상을 포개고 감싼다. 분명 감각성은 충분하다. 카메라는 움직이고, 또 카밀라는 대상의 가장 이상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정물화적인 태도와 구도로 피사체를 촬영하기에, 대상의 형태나 색채, 질감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 다르가의 집에서 연출은 풍요롭고 감각적이다. 그러나 생기는 없다, 또 위선적이다. 카메라가 분명 움직이긴 하지만 역동적이진 않다. 보폭이 크지 않다. 그 이유는 문이 닫혀있기에, 즉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노와 본격적으로 만나기 전까지의 나나는 보통 집안에만 머문다. 다르가가 나나에게 농장 경영을 가르쳐서 집밖을 나가긴 하지만, 남자에 의해 배운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 즉 움직임은 제한된다. 집안일만 하거나, 남자가 지시한 일만 따르는 존재, 또 꽃꽂이처럼 '아름다움'이라는 오직 단 하나의 목적에 국한돼서 움직이는 존재로. 또 영화는 나나의 시선에서만 전개되지 않고, 두 차례에 거쳐 시장 속 시민들의 대화를 교차 편집한다. 다르가의 집에서 감상자는 당대의 인도네시아가 어떤 상황인지 전해 듣기 어렵다.      


그러나 시민들의 입에선 반공숙청과 수하르토의 쿠데타가 새어 나온다. 다르가의 집이 정치를 외면하는 대가로 얻게 된 부와 풍요이자 아름다움이라면, 길거리는 이를 포기하고 쟁취한 자유로운 입과 진실이랴. 전자에서 나나가 다르가의 머리를 다듬어주는 대가로 황홀한 조명이 허용된다면, 후자의 연출은 전자와 달리 채도, 명암 모두 다 낮고, 감각적인 배경음악도 사용되지 않는다. 후자가 진실, 전자가 가식이나 위선, 거짓에 상응한다면, 전자의 연출로 포착되는 나나의 삶도 만족스럽지는 않으리라.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진실, 특히 그녀 자신에 대한 진실을 가리키는 양식으로 탈피해야 하리. 과연 나나는 다르가를 위해서 봉사하며 얻어낸 아름다움을 자신의 것으로 뒤바꿀 수 있을까.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가부장제와 전쟁 체제는 여성이 남성의 ‘노획물’로 전락돼야만 아름다운 삶을 보장한다. 도입부의 나나는 누추한 몰골, 그리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숲에서 도망친다. 혼자가 아니라 언니와 함께, 또 자신이 책임져야 할 젖먹이도 있다. 그러나 혼자서는 버겁고 자신과 강제로 결혼하려는 갱 두목의 손아귀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나는 다르가와 결혼한다. 나나와 다르가의 결혼생활에서는 가부장제의 두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남성은 힘으로 여성을 소유한다. <유니>에서도 가부장제, 이슬람 문화권 내에서 무조건적으로 부여되는 남성의 거대한 권위에 여성은 불응하기 어렵지 않던가. 이보다 과거인 <나나>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성의 폭력을 합리화하고 숭상하는 전쟁이나 내전 속에서, 나약하고 취약한 존재는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당연해진다. 그것이 나나가 강제혼에서 달아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경제력이 있는 남성과 애정 없이 결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늙었지만 부유한, 즉 무력은 없지만 경제력은 있는 다르가는 나나에게 선물 공세를 한다. 그 선물은 장신구로, 이것이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나타나는 가부장제의 두 번째 측면이다. 여성은 오직 남성의 눈에 즐거운, '아름다움'이라는 목적 단 하나만 부여받는다.      


나나는 다르가가 선물한 장신구만 차고, 자신이 전남편 이창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신구는 꼭꼭 숨겨둔다. 이에 따라 본 작품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일단 거울을 통해 보이는 것은 다르가를 위해 얼굴을 가꾸고 몸을 단장하는 나나의 용모다. 그녀는 머리를 빗고 핀을 찌르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또 무수한 친척이나 부녀자가 모이는 날이면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코르셋을 더 세게 조인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러나 흐트러짐 없이 말아 올린 헤어스타일에 의해 두피에 피부염이 생기고, 조금의 군살도 허용하지 않는 정돈된 각진 옷은 아름답지만 답답하고 뻣뻣하게 행동을 제약한다. 즉 남성의 눈에는 보기 좋고 아름답지만, 주체적인 여성 스스로를 위해서는 남는 것이 없다. 남성은 여성을 거동이 불편하고 무용하지만 다만 아름다울 뿐인 취약한 존재로 전락시켜 자신들의 힘과 지배력, 보호를 합리화한다. 아름다운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빈곤해질 뿐이다. 보호를 위한 사회적 비용은 모두 남성에게 향하므로. 시장에서 편한 옷을 입고 도축하는 이노만이 남성에게 향할 사회적 비용을 자신이 쟁취하여 풍족하다. 항상 점심이면 외출하는 다르가, 이로써 부녀자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다르가와 달리, 흐트러짐 없이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는 여성에겐 조금의 여지, 가능성도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되는 것은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남성의 집과 그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하며 가꾸는, 즉 남성을 위한 일이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아름다워야 하는 나나, 자신의 정돈된 몸처럼 집 또한 편집증적으로 관리해야만 하는 나나로, 이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비밀이나 감정이다. 다르가는 점심마다 나가서 다른 여자와 식사하고 잠자리를 갖는다, 즉 불륜 중이다. 그 사실을 나나가 편지를 보고 알았다. 남자의 방종한 삶은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불륜을 확인한 나나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다. 나나는 딸 다이스에게 말한다. 여자는 올림머리 속에 비밀을 숨기는 존재라고, 본래 비밀이 많은 존재라기보단 제 감정과 자유를 비밀로 부칠 것을 강요당한 존재가 바로 여성이다. 아름다운 올림머리를 위해서 그 안에 자신이 바라는 비밀을 숨겨놓는다.      


또 여성에게 허용되어 볼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남성에 의해 목적이나 역할이 구획된 폐쇄적인 실내, 반면 보이지 않는 곳(혹은 드물게 보이는 곳)은 숲이나 외부이다. 이로써 개방적인 공간에서 모호한, 그만큼 가능성을 띠는 여성이 드물다. 외부에서는 이노가 보낸 편지, 고기 등이 배달되어 새로운 만남을 예고한다. 또 시장의 여성들은 아내이자 어머니 여성을 뛰어넘어,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다, 나나와 달리. 이렇게 스스로가 보이지 않는 나나의 처지와 대비를 이루는 또 다른 존재는 아직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세뇌되지 않은, 자신으로 한껏 보이는 아이들이다. 영화 초반에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뛰논다. 서로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 각자의 눈을 마주치면서 말이다. 소년, 소녀 할 것 없이 동등하게 시선을 교환한다. 그러나 나나는 남편의 동공을 마주할 수 없다. 이발하는 나나에게 허용되는 것은 남편의 뒤통수다. 나나가 악몽을 꾸고 깨어난 순간 다르가는 자고 있으며, 나나는 깨어나 현실로 향해도 창문이 닫혀있어 그 이상으로 깨어날 수 없다. 그러나 남편은 꿈이 그리도 달콤한지 깨지 않으며, 현실에서도 갑갑한 창을 충분히 열고 나갈 수 있다. 여성은 볼 수 없고, 남성은 마음대로 볼 수 있다. 나나는 모임에 앞서 코르셋을 조인다. 그리고 자신이 비치해둔 꽃병을 아이들이 엎어뜨리자, 그들의 손과 발을 묶는다. 자유 억압, 무력에 따라 좌우되는 삶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친다. 그러나 아이들은 손과 발이 묶인 채로도 뒹굴뒹굴 방을 탈출하여, 모임이 진행되는 거실까지 굴러 나온다. 친척들은 말한다, "좋은 집안의 여성이 좋은 아이를 낳는 법이라고", 나나는 방문객의 송곳 같은 독설에 위축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비아냥에도 주눅 드는 법이 없다. 여전히 해맑다. 그리고 아이들은 나나가 전남편에게로 돌아갈 때, 누구와 살지 직접 선택한다. 그들은 아가훼 삼촌을 택하기도 하고, 다르가를 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타인의 눈과 입에 구애받지 않는 아이들을 나나는 동경한다.  


영화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젊은 여성이 나나의 눈에 환각처럼 비친다. 처음에는 나나가 버스를 타고 외출할 때, 두 번째로는 나나가 시를 낭송하는 시퀀스의 ‘안개’ 속에서 등장한다. 이후 결말에서 세 번째로 만날 때, 그 젊은 여성이 성장한 다이스임이 밝혀진다. 일단 버스에서 나나는 앉아있다. 버스 기사에 의해 옮겨진다. 카메라도 그녀의 발도 멈춰있다. 그러나 밖에서 그 당시에는 몰랐던 성장한 다이스가 걸어가고 있다. 카메라도 움직인다. 나나는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는 나나에게서 멀어진다. 성장한 다이스는 곧 나나의 과거다. 나나의 딸인 다이스의 미래는 곧 엄마가 투영되어 있고, 엄마인 나나가 딸을 보면 자신의 과거를 곱씹을 수 있다. 그녀는 본다, 능동적으로 걸을 수 있던 자신의 과거를, 이창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바로 그 시대를, 그러나 현재에 과거의 그녀와 멀어진다. 이창과 아버지의 환영처럼, 과거의 자신이자 미래의 다이스 또한 환영이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가. 성장한 다이스와 두 번째로 만나기 전, 그녀는 시를 읽는다. 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시간은 변화하고 또 축적한다. 그런 시간에 참여하며 나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러나 나나에게서 시간은 변화하지 않는다. 폐쇄적인 실내,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역할만 강요받는 여성, 그녀는 타인에 의해 시간이 강요되는 존재지, 스스로 능동적으로 시간에 자신을 새기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시를 읽는다. 시는 일반적인 문법, 단어의 사용과 달리 비일반적인 관점과 어법으로, 일상성을 깨트리는 언어다. 비일반적인 시를 읽고 안개로 나아간다. 도입부의 숲도 안개가 자욱했지만 그 숲속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여성은 모호한 존재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 명확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모호한, 그만큼 가능성이 다양한 안개 속에 성장한 다이스가 있다. 그것이 가능했을 자신, 또 앞으로 가능해야 할 다이스의 미래이랴. 그녀는 동경한다, 안개 속에 있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고 현재 충분히 자유롭기에 앞으로도 자유로울 다이스의 미래를. 이러한 나나의 동경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대상은 이노다.      


일단 나나와 이노의 첫 만남, 자기 집에 고기를 배달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한 나나는 시장의 유일한 도살자를 찾았다. 그 자가 바로 이노다. 이노를 조심스레 뒤따라가는 나나는 슬로우모션으로 포착된다. 일반적인 시간과 달리 느려진 시간, 더 조심스럽고 은밀한 움직임, 이러한 슬로우모션의 비일반성은 어째서 비롯하는가. 도살자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직업이다. 우락부락하고 거칠며 힘이 필요한 도살자란 직업을 남성이 아닌 여성 이노가 맡고 있다. 남성이 바라는 취약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아닌, 힘 있는 여성이 된 이노는 가부장제에 지배되지 않는다. 더욱이 한 상인은 이노를 보고 공산주의자라 말한다. 반공 숙청이 극심한 시대에 이노는 정치적 신념조차도 타협하지 않는 듯하다. 이후 다르가의 집에서 연회가 열렸다. 그날을 위해서 나나는 다르가와 춤 연습도 했다. 그러나 정작 잔치가 열리자 뒤로 빠진다. 다르가는 춤도 다른 여성과 춘다. 나나는 다르가 친척들의 눈치를 본다. 행동은 자유롭지 못하고 위축된다. 그러나 이노는 나나가 다르가의 아내로서 자유롭게 전면에 나서게끔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직후 나나는 꿈을 꾼다. 자신의 침실에 이노가 누워있다. 전라의 이노와 나나는 눈을 마주친다. 그러나 정작 다르가와 나나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동등하게 상호 교류하는 꿈속의 이노와 달리, 다르가는 나나를 일방적으로 바라보고, 또 일방적으로 껴안는다. 그녀는 꿈과 현실을 비교하여 침대 위에서 어떤 껴안음과 어떤 시선을 지향해야 할지 자각하는가. 이후 아이들이 소풍을 가자고 해서 이노와 함께 폭포 인근으로 나들이를 왔다. 이노는 남자 없이도, ‘되고 싶은 여자’를 꿈꾼다면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거침없이 폭포 아래로 다이빙하며 떨어진다. 나나가 놓여있던 실내는 모든 것이 딱딱한 고체, 이미 굳어져서 단 하나의 목적과 역할만 부여받은 사물로 즐비했다. 그러나 물로 가득하고, 또 그 액체의 움직임이 가장 격렬한 폭포에서는 변형의 가능성이 그만큼 다채롭다. 이노는 나나를 자신처럼 폭포 아래로 다이빙하게 만든다. 그리고 비로소 실외에서도 능동적인 트래킹숏, 흔들리는 핸드헬드로 그녀들이 포착된다. 안정적, 그만큼 붙잡히고 고정된 삶이 아닌, 흔들리고 변형의 여지가 있는 느슨한 양식은 여성의 능동성을 반영하다.      


이렇게 오후에 폭포 아래로 다이빙하며 변화할 자신을 시간에 새긴 이후, 저녁에는 이노에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터놓는다. 나나가 지금껏 꾸고 있는 꿈에 대하여, 남성의 죽음에 책임이 없는 그녀가 죄책감을 느껴왔음을 토로한다. 현실에서도 남자가 한눈을 파는 이유가 여성의 탓이라며 부녀자들이 떠들어대지 않던가. 그렇게 여성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남성의 감정에 봉사하지 않았었나. 그러나 이노에게 꿈을 털어놓은 이후 나나는 아버지도, 남편도 아닌 자신이 처형되는 꿈을 꾼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이 아닌, 내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진다. 그렇게 이노를 통해 나나는 타인을 위한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위한 자신으로 초탈한다. 2세기의 꿈 연구가인 아르테미도로스는 꿈을 두 가지로 규정한다. 하나는 주체의 감정 상태가 나타나는 꿈인 에누프니아, 다른 하나는 시간의 사슬 속에서 가까운 미래에 나타날 사건, 인과를 예지하는 오네이로이스다. 전자는 육체, 영혼을 반영하고, 후자는 세상사나 시간의 사슬을 반영한다. 그리고 미래를 예지하는 오네이로이스는 주로 법률에 부합하는 반면, 욕망을 반영하는 에누프니아는 법을 위반한다. 이러한 꿈 구분에 따른다면, 나나의 꿈은 언제나 남성에 의한 법을 위반하지 않는, 시간의 사슬 속 과거나 현재, 미래를 보는 오네이로이스다. 그녀에게 에누프니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노를 통해서 나나는 에누프니아를 꾼다. 그간 꿈에서조차 남성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 이로써 남성을 대신하여 죄책감을 짊어지는 여성을 나나는 영속했다. 아버지의 사망, 남편의 실종은 결코 자신의 탓이 아닌데도, 그들에 대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성이 타자화한 책임을 자신이 오롯이 짊어진다. 그러나 이젠 죄책감이 아니라, 제 목숨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에누프니아의 흔적들을 실현한다. 나나의 꿈은 큰 틀에선 오네이로이스에 가까웠지만, 그 가운데서 에누프니아의 징후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코르셋이 꽉 조여지고 정돈된 상태가 아니라, 한껏 풀어 헤쳐진 느슨한 잠옷만 얹고 정원에 나와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나. 그리고 이창과 애무를 즐기는 꿈을 꾸지 않았었나. 이창이 다른 남성들에게 이끌려감에 에누프니아는 오네이로이스로 뒤바뀌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 나나는 현실에서 이노와 함께 자유분방하게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이노는 나나가 이창과의 결혼 시절을 가리키는 장신구를 차게 한다. 이후 그 장신구를 알아본 이창과 나나는 재회한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그간 나나의 꿈이나 환각은 현실에서의 결핍에 따라 솟아올랐고, 그 꿈이나 환각조차도 현실적인 오네이로이스가 되며, 나나의 자유, 욕망은 꿈과 현실 그 어디에서도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나의 꿈 중 축사에 있어야 하거나, 이노에게 도축되어야 할 '소'가 가축으로서의 목적에서 벗어나,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숏이 있었다. 그 소는 남성을 위한 가축으로 전락한 여성을 이탈하는 그녀 자신인가, 아니면 소에 상응하는 이노를 맞이하리라는 예지인가. 자유로운 자신으로의 이탈이든 이노를 맞이하는 꿈이든, 이를 현실에서 긍정함에 나나는 진실한 자신을 회복한다. 이렇게 이노와의 만남 이후 그녀는 더는 꿈꾸지 않는다. 남성을 위한 여성으로서 죄책감도, 또 불가능한 욕망을 기투한 이창과의 사랑 모두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젠 타인을 위한 알량한 죄책감 대신 나를 느끼고, 이창을 현실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나나에게서 불가능한 환각들은 모두 다 현실이 되었다, 더는 꿈꾸지 않는다. 이에 따라 남성을 위한 아름다운 존재로 전락하면서 파생된 감미로운 형식이, 이제 실로 자신을 위한 아름다운 존재의 우아한 형식으로 변모한다. 카메라의 우아한 움직임과 풍부한 배경음악은 다르가의 집이 아닌 이창과 나나의 밀회에 사용되며, 조명은 육체와 무관한 희멀건 우윳빛이 아니라 시뻘겋게 끓어오르는 피와 살을 가리키는 붉은 조명으로 뒤바뀐다. 그렇게 카메라 움직임과 아름다움은 나나가 바라는 이창과의 사랑을 가리키고, 그간 강제되었고 위선적이었던 다르가에 의한 가족은 사진, 곧 '프리즈 프레임'으로 딱딱하게 얼어붙는다, 멈춘 과거라는 듯이. (더불어 사진 촬영은 그간 나나가 미신에 의해 할 수 없었던 바람이다. 자신을 회복하는 나나는 비로소 모든 자녀들과 사진을 찍는 자신의 꿈도 성취한다)      


이제 비밀은 없다. 다르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창에게 돌아간다. 이는 이노에게도 마찬가지다. 본 작품의 연대는 기묘하다. 다르가와 불륜하여 나나에게 충격을 안긴 이노가 그녀와 공조한다. 그러나 이노는 나나를 배신하지 않고, 다르가를 사랑하지 않는 나나가 진정 제 연인에게 향하도록 조력한다. 그렇게 나나도, 이노도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과의 사랑을 거머쥔다. 다르가 또한 마찬가지로 나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다면 그에게 향하라고 놓아준다. 카밀라는 이노라는 존재, 그리고 다르가의 태도 변화를 통해 시대를 반성한다. 남성이 여성을 선택하게 만들지 않고, 그들에게 그녀들이 의존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가부장제가 두둔하는 폭력으로 상대방이 가진 것을 빼앗지 않고,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며 내 자유도 실현한다. 남성중심적인 내전을 반성하고 바로잡는 것, 그것이 바로 여성의 자유와 연대다. 상대의 목을 처형하지 않고, 포용하고 포옹하기. 그리고 아이의 순진함과 자유를 동경하던 나나는 머리를 풀어헤친다. 그리고 환각이 아닌 실제 성장한 다이스에게 숨길 필요가 없는 비밀을 귀엣말로 털어놓는다. 자신의 과거이기도 한 여인을 보며 현재에 불가능한 나를 동경하던 나나는, 이제 자유를 딸에게 물려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바꾼다. 여성의 자유라는 꿈과 환각은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카밀라는 <유니>로부터 반세기 정도 전의 여성, <나나>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유니>에게로 향해왔을 ‘드러낼 수 없는 여성’의 수난사를 담는다. 그러나 드러낼 수 있는 여성이 되게끔 역사를 반성한다. 이러한 극의 초반부는 사회, 정치적 격변에 휘말린 여성의 일대기라는 점에서 장이머우의 <인생>을, 탐미적이고 감미로운 연출로 이창과 재회를 그린 후반부에서는 왕가위의 <화양연화>가 떠오른다. 참신하진 않더라도 아름다움에 흠뻑 도취하기엔 연출이 충분하다. 다만 각본이 다소 부족하다. 1960년대 정치적인 여파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또 나나-이노가 서로에게 끌리는 심리나 당위성도 넉넉하지 않다. 형식에는 깊이 몰입할 만하지만, 내용에는 깊게 침잠할 수 없는 허술함이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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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1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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