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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22. 2022

마리 크로이처, <코르사주>

이미지의 제물이 된 여성들

마리 크로이처(Marie Kreutzer), <코르사주>(Corsage) 

- 이미지의 제물이 된 여성들  

“거기에 존재가 있지만,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결혼한 황후, 엘리자베스 폰 비텔스바흐는 이중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시대의 유행을 선도한 아이콘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여성이다. 씨씨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그녀는 하루 종일 머리를 감아서 부드러운 모질을 유지하였고, 머리숱에도 예민하여 빗에 머리칼이 많이 나오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녀가 머리에 꽂은 '다이아몬드 별' 장식은 따라 할래야 따라 할 수 없는 시그니처였고, 깨끗한 치아를 유지하기 위해 치과 치료도 꾸준하게 병행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 또한 엄격하게 관리했는데 말벌과도 같은 호리호리한 허리를 위해 식단을 관리했고, 지독하리만큼 운동에 집착했다. 편집증적으로 관리하는 한편 작위적인 꾸밈은 지양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를 위해 성격은 극도로 예민해졌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노화가 진행되고 비극적인 인생의 여러 풍파가 겹치자 자신의 추한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자 인위적으로 칩거를 선택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즉 아름다움의 아이콘이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이미지'에 삶이 잠식되어버린 것을 비극적으로 여길 수 있는 씨씨, 그녀의 이미지화된 삶을 마리 크로이처 감독이 <코르사주>에서 탐구한다. 1977년 그랏츠 태생의 마리 크로이처는 오스트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대안학교에 다녔던 유년 시절의 경험과 오스트리아의 녹색당 정치인인 어머니, 잉그리드 레흐너-소넥의 정치적 색채를 영화에 반영하는데, 근작 <내 발 아래>에서 이러한 영향력이 짙게 나타난다. 크로이처는 <내 발 아래>에서 조현병 환자의 삶, 환자를 보필하는 주변인의 삶,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찰한다. 일단 크로이처는 광인, 타자를 바라보는 사회 구조의 폭력적인 시선을 폭로한다. 롤라는 조현병 환자인 언니 코니를 돌본다. 또 롤라는 엘리제라는 여성 연인을 둔 레즈비언이다. 그리고 코니, 코니를 돌보는 롤라, 레즈비언 롤라는 모두 정상성을 강요하는 구조에서 지워진다.  

   

구조는 조현병 환자인 코니, 그녀를 돌보는 롤라, 사적인 삶을 지향하는 롤라를 승인하지 않는다. 구조에서 배척당하는 타자들은 점점 더 주변부로 내몰리고, 국가에게 마땅한 도움을 받아야 할 약자 또한 온당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짐에, 롤라는 자신이 바라는 삶과 강요받은 삶 사이에서 고뇌한다. 영화에선 코니가 롤라에게 숨겨진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하는 듯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코니가 연락을 건 것인지, 아니면 롤라의 죄책감이나 강박에 따른 환각인지 명확하지 않다. 코니에 대한 사실을 계속 은폐하는 롤라의 의식은 현실과 꿈, 사실과 망상이 뒤죽박죽 뒤섞인다. 크로이처는 코니의 조현병이 롤라에게 옮겨가며 문제가 불어나는 사회의 방관을 꼬집는다. 이러한 사회의 태도는 롤라의 직업인 '컨설던트'에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롤라는 기업의 효율성을 바탕으로 비효율적이라 여겨지는 직원들을 냉정하게 해고한다. 기업이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진 삶, 효율과 경제성에 따른 획일화된 삶에 맞추지 않으면 구조 및 사회에서 배제된다. 롤라는 기업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배태되지 않고자 자기 검열하는 도중, 그녀의 사랑과 삶은 실로 '비효율적'인 것이므로 번뇌한다. 이러한 와중에 크로이처는 롤라가 '운동'하는 장면을 반복 포착한다. 롤라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운동한다. 일과 간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사적인 요소를 모두 숨기는 롤라는 ‘초인’과 같지만 니체적인 자유로운 초인은 아니다. 그것은 기관이 요구하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육체의 철인, 자신이 배제한 '미혼모'가 되지 않고자 전전긍긍하는 가짜 초인이다. 이러한 초인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진지하고 차분한 검정 옷을 고집한다. 이렇게 크로이처는 롤라의 일대기를 통해 ‘정상적’이라 일컬어지는 개인이 작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폭로한다. 롤라가 코니를 시설에 보낸 이유는 국가의 방관과 인간을 효율로 판단하는 사회를 배제하고 생각할 수 없다. 롤라가 코니를 버겁게 여긴 이유도 부모가 부재한 자매의 삶, 광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더해진 것이랴. 크로이처는 사회가 요구하는 강인한 초인적 이미지로부터, 불현듯 닥쳐오는 몸의 이상 징후, 떨림을 강조하며 솔직한 나, 솔직한 몸, 솔직한 정신의 회복을 촉구한다.       

브론치노, <톨레도의 엘레오노라>, 1546

이렇게 이미지화된 인간을 탐구한 크로이처는 본 작품 <코르사주>에서 씨씨의 삶과 이미지를 추적한다. <내 발 아래>에서 크로이처의 연출은 자국 감독 하네케의 무감한 영화, 베를린파의 정적인 경향을 따라가는 ‘건조함’이 특징이었고, 또 35mm 필름을 사용한 점이 인상적이었는데 과연 신작에선 어떤 연출을 선보일까. 일단 이전 작품과 이어지는 연출, 본 작품에서도 크로이처는 35mm 필름을 사용한다. 아주 선명하고 뚜렷한 디지털에 비한다면 자글거리고 불명확하며, 이로써 신묘한 느낌으로 가득한 35mm 필름은 디지털에 비해 가상의 흔적을 남긴다. 즉 현실을 아주 또렷하게 모방하는 디지털 대신, 현실을 흐리게 만드는 35mm 필름을 선택한 이유는 씨씨의 현재를 반영하지 않는 허구적 이미지가 범람하는 세계, 이로써 씨씨의 현실과 사실, 진실 대신 가상이 판을 치는 세계임을 명시하고 표현하기 위함이랴. 이러한 35mm 필름의 질감을 크로이처는 더욱 차갑게 사용한다. 난색보다는 한색을 강조하여, 창백하고 생기 없는 느낌을 준다. 건조한 질감의 매체에 담겨 씨씨를 연기하는 비키 크리엡스 또한 <베르히만 아일랜드>나 <홀드 미 타이트>와 같은 최근 작품에서 등장한 모습에 비해 훨씬 창백하고 수척하다. 분명 아름답다, 그러나 대상은 어딘지 죽어가는 것만 같다. 왕이나 귀족들을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양식으로 미화하여 위엄을 강조한 매너리즘 시대의 초상화를 보는 듯하다. 그렇게 인물들은 아름다움과 위엄을 대가로 생기를 희생하며, 멈춰서고 죽어간다. 영화는 아름다움을 위한 희생을 연출에 반영한다. 크로이처의 카메라는 <코르사주>에서 단지 은은하게 흔들리기만 할 뿐, 큰 반경으로 움직이는 상황이 매우 드물다. 위치가 제한된 카메라, 이는 살아 숨 쉬는 씨씨가 회화에 담긴 자신의 모습, 흉상으로 보존된 젊은 날의 자신으로 대체되는 형국을 반영한다. 고정된 카메라는 움직임이 드문 정적인 프레임을 형성하고, 이로써 영화의 사각형은 캔버스나 사진 같다. 이러한 틀 안에 씨씨는 얼어붙거나, 이미지에 지배되는 씨씨의 삶이 회화적 프레임을 형성한다. 씨씨가 프란츠와 동행하는 귀족들과의 식사, 오스트리아 행사에서 오직 가능한 것은 침묵이다. 아름답고 황홀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허기를 꾸역꾸역 참고, 그저 대상의 말을 우두커니 수용하는 수동적 여성상을 연기하며, 이러한 씨씨를 포착하는 카메라도 당연히 멈춘다.     


그러나 영화는 ‘아름다운 황후’라는 이데올로기, 황실의 목적을 위해 희생된 씨씨를 그 상태에 방치하지 않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흔들린다. 씨씨가 주로 담기는 회화는 당연히 흔들림이 없다. 물론 서양미술사에서 바로크 시대에 이르러 사선 구도를 택하며 의도적으로 역동적이고 입체적인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다만 바로크 이전, 르네상스까지는 완전무결하게 닫힌 세계를 수평적이고 탄탄한 구도 안에 담아내었다. 그렇게 미술은 얼어붙은 세계, 조각과도 같은 세계에서 생기가 감도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었는데, 한편 이러한 와중에도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직관을 기울여서, 순일한 객관을 보존하는 정신적 평안의 영원한 기념비'로서 정물화나 초상화를 다룰 때는 여지없이 안정적인, 이로써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초월적인 구도나 양식을 선택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시간을 초월하고, 또 감상자가 어떤 욕구도 이입하지 않으며, 고통이나 감각과 무관하여 의지와 결합되지 않는 순수한 시각, 이로써 의지는 소멸하고 인식만 남은 상태를 위대한 거장들이 그리는 회화의 아름다움이라 평했다. 프란츠가 씨씨를 황후로 선택하여, 그녀에게 지시하는 목적 또한 마찬가지다. 유한하고 불안정한 육체의 욕구에 지배당하는 일반 인류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영원할 것만 같은 이상적인 왕족의 이미지를 씨씨는 선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씨씨는 금욕하고 카메라는 더더욱,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상태에 맞춰 멈춰야 했으리. 그러나 영화는 흔들린다. 영화의 도입부, 씨씨는 욕조에서 무려 1분 10초간 잠수했다. 욕조 바깥의 하녀들은 혹시라도 씨씨가 잘못됐을까 전전긍긍 불안해한다. 인간으로서 죽을 수도 있는 씨씨가 환기될 때의 공포를 핸드헬드로 가시화된다. 이후에도 카메라가 대체로 머물러있기는 하지만, 아예 고정되거나 부동 상태는 아니다. 항상 미세한 떨림이 동반된다. 그 이유, 씨씨는 이제 이미지에 잠식당한 자신이 아니라, 이상적인 이미지와 무관한 제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크로이처는 조각처럼 초월적으로 멈춰서 진공 상태로 보존된 이미지 씨씨로부터, 핸드헬드로 이미지를 넘어선 씨씨의 약동하는 ‘삶’을 표현한다.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로부터 여행, 승마를 즐기며 트래킹숏, 달리숏으로 '이동'하는 씨씨가 그렇다.      


씨씨는 자신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봉사하지 않을 때, 역으로 자신의 움직임에 카메라를 봉사하게 만들 때, 카메라에 구애받지 않고 말을 타고 저 멀리 사라질 때 자유롭다. 낙마 사고, 투신으로 인해서 씨씨가 더는 보이지 않고 ‘빈 공간’만 휑하게 남을 때 그녀는 자유롭다. 대중들의 시선에 노출되어야만 하는 의무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신하들은 좇아온다. 씨씨의 딸 조피는 어린 나이에 죽었지만, 아이의 방은 오롯이 비워지지 않고 흔적과 어미가 보고 싶은 초상화로 가득 찬다. 온전히 이동하기, 비우기란 당대 여성, 특히 왕족에게 결코 쉽지 않다. 씨씨는 아우어슈페르그 왕자와의 만남에서 쓰러진 이후 사택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올라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가는데, 크로이처는 이를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한다. 일반적인 시간을 지연하는 비일반적인 시간 슬로우 모션. 씨씨에게의 비일반성은 곧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프레임 바깥으로 이탈할 수 있는 씨씨의 순간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길게 보존한다. 즉 크로이처가 <코르사주>에서 씨씨의 삶을 영상화하며 특히나 공을 들인 형식이란 바로 ‘움직임’이다. 그리고 크로이처는 언어에도 신경을 쓴다. 본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독어다. 그러나 헝가리에서 태어난 딸 발레리와 대화할 때는 헝가리어, 씨씨의 자매가 거주하는 영국 여행을 갔을 때는 영어, 또 여행지에 따라서 불어, 이탈리아어가 각기 사용된다.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독어는 그만큼 일반성을 띤다. 독어로 씨씨에게 쏘아붙이는 것은 '살이 쪘다', "황후의 의무를 다하라", 자식에게서 "어머니가 부끄럽습니다." 등 씨씨의 목적 내지는 의무를 질타한다. 그녀는 자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베이와 밀회를 즐기며, 정신병원에서 체면을 세우기보다는 진심으로 약자들을 위로하고 싶다. 또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언어가 아니라,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광인의 ‘비명’이 그녀의 속내에 가깝다. 그녀는 정신병원의 광인들과 혼연일체되므로. 그러나 진심을 위해서 이미지를 포기하면 바로 독어로 제지가 가해진다. 독어가 가리키고 봉사하는 것, 그것은 실제가 아닌 이미지다.      


그래서 씨씨는 독어의 일반성을 거부하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랴. 헝가리어를 사용하여 발레리와 대화하는 씨씨는 딸에게 너무 교육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밖에서 노는 것이 더 좋다고 당부한다. 이후 밤에 발레리와 산책을 즐기면서 헝가리어로 대화한다. 영어를 이용하여 베이와 찰나의 밀회를 즐기고, 고풍스러운 발화만 허용되는 독어에서 '이탈'하여 속되고 경박한 농담에 낄낄댄다. 그리고 영화 기술에 흥미가 있는 루이 드 프린스와 만날 때 불어를 사용한다. 독어가 회화나 조각처럼 그녀를 고정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불어로는 생기발랄하게 움직이고 뛰노는 씨씨를 영화로써 보존한다. 또한 불어뿐만 아니라 ‘무성영화’도 강조된다. 언어가 가리키고 구속한다면, 소리를 담지 못하는 무성영화에서 씨씨는 청각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녀는 비언어일 때 자유롭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결말에서 이탈리아어가 사용된다.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씨씨는 대역을 잔뜩 만들어놓고, 자신은 씨씨를 열망하는 시선에서 달아나, 끝끝내 광대하고 무한한 바다에 첨벙 빠진다. 즉 크로이처는 여러 장치를 이용해 이미지가 일반성이 되어버린 19세기의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를 위해 발버둥 치는 씨씨의 여정을 추적한다. 이런 씨씨의 자유를 가장 먼저 방해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시선이다. 사람들 앞에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는 의무에 신물이 난 씨씨는 밤에 딸과 산책하러 나간다. 그런데 발레리가 감기에 걸렸다. 프란츠는 역정을 낸다. 사람은 아플 수 있다. 그러나 왕족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가. 이후에도 프란츠는 건강검진을 '병적'으로 집착하니, 병원의 누워있는 병자들 사이에서 꼿꼿하게 서 있어야 하는 씨씨가 제 이미지를 부정하는 방법은 바로 '아프기'다. 그녀는 창문을 열어서 해방감을 느끼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아예 제 몸을 투신한다. 이상적이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한 왕족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이로써 아플 수 있는 인간의 몸을 되찾는다. 그러나 쉽게 달아날 수 없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왕족에게 아름다운 이미지를 바라기 때문이다.      


철학자 사르트르와 푸코는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밝힌다. 집에 홀로 있는 나는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어떻게 행동해도 된다, 그 이유는 보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는 어떻게 행동하든 결코 위축되는 법이 없다. 그런데 집과 달리 외부에는 보는 사람들이 즐비해 있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들은 순수하게 나를 긍정하며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자신들이 속한 구조, 이데올로기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반영한다. 거기에 따르지 않는 타자들을 배척한다. 타자들은 검열에 따른 수치심을 느낀다. 또 대상이 보고 싶은 바람을 내게 투사한다. 일반성과 타인의 욕망이 담긴 시선, 여기서 씨씨는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의 도입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청각,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뿐. 그녀는 욕조 안에 잠겨있다. 작품 후반부의 욕조는 정신병원의 치료에 감명을 받은 씨씨가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선택한 도구다. 그러나 도입부의 욕조는 다른 용도로 보인다. 그녀는 깨끗하게, 몸의 모든 흠을 털어내고 나서 대중 앞에 서야만 한다. 이후 나타나는 것은 욕조 안의 씨씨와 욕조 밖으로 나오는 씨씨, 그녀는 몸을 닦고 코르셋을 조인다. 그리고 몸무게를 잰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는 그림을 위해 ‘얼굴빛’을 지적당한다. 드러날 수 있는 것은 대중의 시선이 바라는 비현실적인 여성의 아름다움이다. 추는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후 그녀는 행사장에 간다. 언론에선 씨씨가 살이 쪘니, 늙었다는 등의 가십거리를 대서특필한 모양이다. 도입부, 아우어슈페르그 왕자는 씨씨에게 "체중 관리에 힘이 들겠다."라거나, "우아한 모습으로 친숙하다." 등의 말을 한다. 이미지가 아닌 그녀, 이미지를 위해 벅찬 그녀는 쓰러진다. 그녀는 쓰러져서 타인이 나를 바라보지 않길 바란다. 그녀는 발레리에게 우리를 보이지 않게 만드는 '어둠'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씨씨는 언제나 노출된다. 영국 여행에 동행한 루돌프는 베이와 밀회를 즐기며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씨씨에게 체면을 지키라고 질책하고, 발레리는 씨씨가 정신병원에서 환자들과 담배를 피운 것이 부적절하다며 실망한다.      


이후 위엄과 기품이 있는 엄마의 모습이 좋다며 ‘그림’을 내민다. 그리고 그 그림에 담긴 것은 씨씨가 아니라 씨씨로 위장한 마리다. 앞서 언급했듯, 프란츠 또한 씨씨를 '왕실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써 간택했다. 이들은 모두 “타인 안에 있는 자기 모습을 사랑한다.” 타인이 자기에게 바라는 그림과 이미지에 갇힌 여성은 공적이고 정치적인 모임에 가서도 주체적인 발언권이 상실된다. 보스니아 점령에 대한 우려, 세르비아에 대한 경고, 1차 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몰락을 직감하지만, 프란츠는 그녀의 발언을 제지한다. 여성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공적 발화를 꺼낼 수 없고, 여성의 역할은 오직 아름답기 위한 목적에 국한된다. 인간은 그때그때에 새로운 목적을 상정한다. 앞서 언급한 쇼펜하우어식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목적이 충족되면 거기서 새로운 목적(곧 의지)이 차오르는 법이다. 그래서 성취하고 결핍을 느끼고, 또 성취하고 결핍을 또 느끼며 무한하게 갈망하고 채워간다. 그런데 씨씨, 그리고 여성에겐 누군가에게 헌신하거나 이미지를 위한다는 목적 외의 것을 부여받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제 존재에 마땅한 하나의 쓰임과 목적을 부여받는다고 믿는 프란츠의 지배 아래서 인간, 특히 여성은 이미 충족된 목적을 지리멸렬하게 반복할 뿐이다, 사명이라는 이유로. 씨씨는 황실의 얼굴, 자식들은 오직 왕위 계승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에 부합하지 않는 씨씨와 루돌프는 자신들의 처지를 '신의 실수'라 비웃는다. 더욱이 인간 스스로 목적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인간보다 미리 존재하여 인간이 그 목적을 채워나가는, 즉 인간과 목적의 순서가 뒤집힌 세계가 바로 크로이처가 바라보는 19세기 오스트리아다. 영화 말미에 여행을 떠난 씨씨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자른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 40세인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머리를 자르니 비로소 가벼워진다. 머리를 잘라버린 그녀는 더는 행사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행사를 기념해야 하는 황후'의 목적을 대체해야만 한다. 그래서 씨씨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우정을 나누는 마리가 대역이 된다. 그리고 씨씨는 마리가 자신을 유일하게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목적을 계속 수행해달라고 부탁한다. 마리는 목적을 위해 홀스타인 백작과 결혼할 마음을 접는다. 마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말미 씨씨는 여행을 떠나며 프란츠 곁에서 멀어진다. 그러나 프란츠 곁에서 그의 정욕을 해소해줘야 하는 목적은 누군가가 부여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씨씨는 프란츠의 정부를 만든다. 마지막까지도 씨씨는 자신의 대역을 잔뜩 세워 목적에 대비해놔야지만, 바다에 첨벙 빠지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즉 크로이처는 타인의 시선에 부응해야 하는 의무, 남성을 여성이 돌보거나 봉사해야 하는 목적으로 당대의 이데올로기가 구성됐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아래서 근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은 온전한 해방이 아닌, ‘대역’을 세우며 해방된다. 씨씨 뿐만이 아니라 씨씨가 언제나 '하니'라며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피니'라는 여성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여성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하녀'나 ‘아름다운 이미지’라는 대역으로만 기인하고, 이러한 목적에서 누군가가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면 그 자리를 제물 여성이 또 채워야 하니, 나의 자유를 위해 누군가는 이데올로기에 이중으로 헌신한다. 이러한 여성이 지향하고 불발되는 것은 ‘욕망’이다. 씨씨는 영화 내내 욕망에 들끓는다. 맨 처음 에로틱한 분위기를 풍긴 대상은 루트비히 공이다. 영화 초반에 씨씨는 루트비히 공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씨씨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담배를 피우는 자신을 본다. 루트비히 또한 가짜 수염을 뗀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을 위해 꾸미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민낯을 긍정하며 머리를 포갰다. 이후 바이에른 여행에서 씨씨와 루트비히는 재회한다. 투신하여 다리를 절뚝거리는 씨씨를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다. 자신을 갑갑하게 꽉 조이는 코르셋처럼, 마찬가지로 사방이 막혀있는 궁정이 아니라, 은은하게 흔들리는 호수 위에서 느릿느릿 유유자적 배를 탄다. 시간을 무용하게 누린다, 그것도 타인이 보고자 하는 욕망에 헌신하지 않아도 되는 보이지 않는 어둑한 밤에. 이후에는 배에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고 아예 호수 아래로 첨벙 뛰어들어 부드럽게 헤엄치며 나아가는 수영을 즐긴다.      


루트비히는 틀니를 끼지 않으면 썩은 이가 가득하지만 이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또 씨씨의 입에 달콤한 초콜릿을 부어 들이마시게 한다. 검은 초콜릿이 얼굴에 추하게 범벅된다. 그러나 추하지만 즐겁다. 측은한 것은 욕망을 누리지 못하는 아름다움, 기쁜 것은 추한 욕구다. 씨씨는 루트비히와 함께 있으면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으랴. 씨씨의 의무를 가리키는 얼어붙은 회화, 딱딱한 조각으로부터, 말랑말랑하게 뒤바뀔 수 있는 씨씨를 긍정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내 호수에서는 익사하지 마"라고 말하고, 또 초콜릿을 그녀 입에 강제로 들이부었다. 즉 씨씨의 기존 이미지와 '반대되는 이미지'를 보고 싶은 것뿐이지,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긍정한 것은 아니다. 바이에른 여행 전에 씨씨는 영국 여행을 갔고, 거기서 베이와 만났다. 그간 식사 자리에서 말하지 않던 씨씨는 베이와 속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리고 입을 뗀다. 그러나 씨씨의 자매, 그리고 아들 루돌프가 그녀를 방해한다. 베이에게로 향하는 씨씨를 카메라는 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심리가 투영된 팔로우숏으로 따라가지 않았나. 그러나 씨씨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이입하는 황족의 시선에 의해 그녀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다시 얼어붙는다. 그녀의 욕망은 오직 자신의 손, 자위로만 가능하다. 그녀는 외롭다. 베이와 루트비히 사이에, 씨씨는 왕궁으로 돌아가 나체로 프란츠를 맞이했다. 그녀가 그를 유혹한다, 날 것의 상태로. 그러나 프란츠는 씨씨의 나체를 이불을 덮어 가린다. 이후 그가 주도하여 아이를 갖기 위한 정사를 씨씨에게 제안한다. 씨씨는 목적 없는 맹목적인 쾌락, 제 알몸을 마냥 긍정해주는 사랑을 바랐다면, 프란츠는 전라의 씨씨가 주도한 쾌락의 섹스를 거부하고 번식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섹스를 택한다. 특히 출산율이 연구되기 시작하고, 섹스가 번식의 유일한 목적을 위한 행위로 의식된 시대다. 날 것의 씨씨는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당대의 통념에 의해 불발된다.    


영화는 여러 상징으로 제약을 넘어서고 자유를 추구하는 씨씨의 여정을 비춘다. 일단 승마다. 씨씨는 말 타기를 즐긴다. 그것도 궁중 안을 빙글빙글 무한히 반복하며 돌기만 하는 미용과 체중관리를 위한 승마가 아니라, 여행을 가서 베이와 함께, 아니면 제 혼자 말을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을 즐긴다. 보통 황후로서 그녀는 가고 싶은 곳에 가기가 쉽진 않다. 영화 후반부, 그녀가 마음대로 저녁 연회에서 일찍 자리를 떼고,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손님들을 모욕했다. 이후 프란츠가 그녀를 불러 바로 제지한다. 그러나 씨씨는 프란츠에 의해 멈추고 싶지 않다. 고정된 카메라가 아니라 트래킹숏으로 포착되고 싶다. 말의 빠른 발과 다리를 빌려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저 멀리로 사라지고 싶다. 그녀 자신은 낙마 사고가 나더라도 좋다. 앞서 언급했듯 그녀는 자해로 제 삶을 드러낸다. 그녀에게 산다는 것은 곧 비자유를 가리키기에, 오히려 죽음에 다가서는 것이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자유다. 그녀는 죽을 수 있는 인간을 바라지, 죽지 않고 노화도 거슬러야 하는 불변의 황족을 바라지 않는다. 이에 그녀는 투신해서 다치고, 또 낙마 사고를 당해도 개의치 않는다. 대신 낙마 사고를 일으킨 자기 애마 파이어를 신하들이 살해하자 이에 분개한다. 그녀의 다리는 다시 멈춘다. 이후 그녀는 루이 드 프린스를 만나 영화 필름에 담긴다. 그녀는 사진이 결코 객관적인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찍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대상을 멈추고자 하는 순간에 고정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사진이나 회화를 위한 모델과 달리 정지될 필요가 없다. 또 모델이 원하는 몸짓 또한 반영할 수 있다. 씨씨는 영화를 찍는 루이의 카메라 앞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그녀는 고정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 그녀를 가장 잘 알고 가까이서 살피는 마리는 씨씨가 '혼란스럽고 복잡한 영혼'의 소유자라 말한다. 그녀는 결코 아름다움이란 목적,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국한되기에 다면적인 존재다. 그러나 사진과 회화는 그 씨씨를 단 하나, 단 한순간에만 제한한다. 영화는 그녀가 다양한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동적인 매체다.      


이후 그녀는 영화에 담기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영화와 유사한 이미지의 연속인 만화를 연구한다. 피사체의 삶과 생기를 제한하는 매체로부터, 생기를 보존하고 담는 매체를 열망한다. 그러나 회화 및 조각, 마리가 대역을 한 이미지가 '실재'가 되고, 반면 자유로운 그녀 자신이 담긴 영화는 곧 '가상'으로 전락한다. 승마, 영화에 이어서 씨씨는 자주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멀어져야만 한다, 궁정과 기대하는 시선으로부터. 그래서 여행에서 도드라지는 숏 중 하나가 롱숏이다. 머리를 자르거나 루트비히와 유희를 즐길 때, 그렇게 내 몸이 솔직하게 지시하는 ‘춤’을 추고 호수에서 수중 발레를 할 때, 보이는 의무에서 달아나는 롱숏을 활용한다. 특히 바이에른 여행이 끝난 이후 궁에 돌아온 씨씨에게 방이 숨 막힐 듯 비좁다. 천장이 너무 낮고, 좁은 사방이 웅대하고 커다란 자신을 갑갑하게 제한한다. 더욱이 궁중의 목적, 또 궁중 내에서 각 공간의 목적에 맡게 배치된 하인들이, 자신과 씨씨의 목적에 따라서 행동과 말을 옮긴다. 예측 가능한 유한함으로부터 무한한 초원, 강, 바다로 그녀는 떠나고 싶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에는 미용을 위해서 펜싱을 코칭 받았다. 그러나 코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펜싱하며 프란츠에게 대적하고 제 욕망을 말한다. 즉 씨씨는 목적을 위한 몸, 행동이 아니라, 이를 잊은 몰아의 몸으로 행동하고 감각한다. 이렇게 순수한 몸을 마주할 때, 장발을 단발로 짧게 친 씨씨라는 대상 그 자체를 존중할 때, 프란츠와 씨씨는 사랑을 나누지 않던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존중하기, 그것이 다름 아닌 사랑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이데올로기의 목적, 그리고 나의 목적으로 타인을 수단화하는 세상에서,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실존을 지향하는 존재는 '광인'으로 치부된다. 씨씨는 영화 내내 자주 보라색 의상을 입고, 특히 정신병원에서 보라색은 항상 그녀와 동행한다. 보라색은 그 색채를 만들어내는 염료가 희귀하므로 고귀한 색으로 일컬어지지만, 따뜻한 빨강과 차가운 파랑의 병적인 조합, 조화될 수 없이 '냉각되어 버린 빨강'이란 기묘하도고 불길한 색채로도 일컬어진다.      


씨씨의 상태가 바로 그렇지 않은가. 이미지의 상태를 지양하고 삶을 지향하면서도, 양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한 채, 두 개가 조화하지 않고 병적으로 결합된 그런 상태 말이다. 보라색 의상을 입고 씨씨는 정신병원에 가서 구호 활동을 한다, 이미지를 위해서. 그러나 서서히 황후라는 이미지의 수단이 아니라, 씨씨 스스로 광인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철창에 갇혀서 포박된 존재가 곧 보라색 코르셋에 갇힌 자신 같을까. 억압된 감정을 치료하기 위해 욕조에 들어간 환자의 상태 또한 자신 같은지 궁에다가도 욕조를 설치하며, 환자가 누워있는 침대가 제 자리이기도 하다는 듯 함께 누워 담배를 피운다. 그녀는 목적과 이미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에서의 '광인'이다. 씨씨가 감정 이입을 하는 영화 속 여성 광인은 남성들의 눈에 보기 좋지 않은 여성의 간통이 '광기'로 규정된 사례다. 또 아이를 잃은 슬픔이 너무나도 크지만, 이를 억압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정신병에 걸린다. 즉 진실한 광인들은 사회의 일반성을 위해 정신병원으로 추방되거나, 헤로인을 복용하며 감옥 같은 현실을 비현실적 쾌락으로 대체하며 견디거나, 정신병원이 생기기 전 광인들을 추방했던 '강과 바다'로 사라진다. 이미지가 아닌 삶을 추구한다는 이유, 진실을 드러낸다는 이유로 광인이 된 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물길과 같은 불확실한 흔들림으로 포착된다. 그리고 광인 씨씨는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쿠키 영상 속 잠옷을 입고 수염을 붙인 상태로 춤을 추며, 여성의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멀어진다. 예측할 수 없는 광인은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자유로운 물길 속으로, 그녀를 붙잡는 특정한 시간 속에서 사라져가며 비로소 자유를 회복한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씨씨는 얼굴을 가린 복장으로 외부에 자신을 알리지 않았던가. 씨씨임을 확인할 수도 없는 아름다움에 대중들은 열광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기대하는 시선에 ‘진짜 씨씨’는 없지 않은가. 씨씨의 진실과 무관하게, 단지 아름다우면 그만인 씨씨의 이미지, 그것은 한갓 가벼운 대역들이 대체하고 또 대체할 테다. 가볍고 또 가벼운 이미지, 대체품들이 나부낄 뿐. 그렇게 진실은 사라지고 오직 허위와 헛것의 목적만 남은 이미지의 시대…     


이렇게 크로이처는 ‘씨씨의 삶’과 ‘이미지’, ‘광인’을 탐구한다. 아름답지만 타인의 기대와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미지, 이로써 자유를 제약당하는 여성들, 특히나 인간보다 목적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개인은 강제된 의무의 시종이 되어 겁박 당한다. 그러나 인간은 움직여야만 한다. 발과 다리, 말을 이용해 내달리며 시선에서 멀어지는 것이 인간의 자유다. 실존하는 인간이 광인으로 일컬어지는 시대, 그러나 씨씨가 루돌프에게 의무를 따르는 것을 안타까워하듯, 제 주장을 굳이 관철시키지 않듯, 또 발레리에겐 틀에 박힌 코스보다는 자유분방하게 놀 것을 지시하듯, 그녀의 자식들이 미래에 이어야할 것은 목적과 이미지의 제물이 된 인간이 아니라, 솔직하고 진실한 광기, 이로써 인간의 회복이다. 다만 그 작고 나약한 광인들을 압도하는 거대하고 단단한 '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다에 빠지고,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야만 했던, 즉 죽어야만 해방되는 비극의 시대, 삶이 죽음이었고 죽음이 삶이 되어버린 모순의 시대, 과연 그 시대가 19세기에만 국한될까, 크로이처가 씨씨를 오늘날에 불러낸 이유는 순환하는 이미지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 아닐까. 더욱이 거대한 선박 등은 분명 19세기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아나크로니즘, 오늘날에도 씨씨‘들’은 이미지에 갇혀있다. 이러한 광인의 여정을 필름, 카메라의 움직임, 언어 등 여러 장치로 가시화한 것이 흥미로운 작품, 매우 황홀하면서도 병적인 창백함을 매너리즘적인 미장센으로 잘 구축한 작품, 대중들에게 이미지로 알려진 시대적 아이콘의 표면을 들춰서 배후의 진실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앤드류 도미닉의 <블론드>가 연상되는 작품, 그러나 <블론드>보다 대상을 더 많이 배려하고 존중한 작품이 <코르사주>라 하겠다. 또 왕실과 시선의 목적에 따른 비운의 여인을 조명한 전기영화라는 점에서 파블로 라라인의 <스펜서>도 연상되는 작품이다. 유사하지만 시선의 의무와 황홀한 아름다움을 추와 '보이지 않음', 그리고 비일반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전복한 작업이 <스펜서>와 차별화되는 본 작품의 미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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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2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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