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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Dec 22. 2022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 <가가린>

거주, 꿈과 자유의 비료

파니 리에타르&제레미 트로윌(Fanny Liatard & Jeremy Trouilh), 

<가가린>(Gagarine) - 거주, 꿈과 자유의 비료    

"집은 악천후로부터 인간을 지키고 천적이나 재앙으로부터 인간을 숨겨주는 것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1961년 4월 12일, 인류는 지구를 떠나 최초로 우주를 유랑했다. 인류 최초의 우주여행을 달성한 사람은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었다. 그의 유년 시절은 불우했다. 가가린의 고향이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침략이 반복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가가린은 나치에 의해 폴란드로 강제 이주 당해 노역을 겪고 가까스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마주한 것은 전쟁으로 참혹해진 환경, 하지만 가가린은 비행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내 하늘을 넘어 우주까지 여행하였다. 가가린의 일화는 국가가 국민을 품고 그들의 꿈을 후원해야 하는 이유로서 개개인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암시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이브리쉬르센에서는 프랑스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를 위한 주거단지 건립이 진행되었다. 1961년 시작된 주택조성사업은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이라는 미명 하에 출발했다. 이후 1963년 조성된 이후에는 본 주거단지의 이름을 '시티 가가린'이라 명명한다. 주택 위기로 인해 노동자들이 살 곳을 잃은 상황에서, 그들을 품어주는 요람으로써의 역할, 이후 우주로 나아갈 가가린처럼 그들이 자유와 꿈을 펼칠 수 있길 고대했다. 입주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미명에 부합했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프랑스로 꿈을 품고 이주한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 또한 시티 가가린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점차 잠시 머무는 곳, 우주로 나아갈 곳이란 미명은 희미해져갔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티 가가린은 대표적인 마약 시장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2000년대부터 시티 가가린의 존폐가 논의됐고, 끝끝내 2020년 시티 가가린은 철거되며 역사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시티 가가린 철폐 결정은 외부에서 가가린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좌우되었다. 과연 내부에서는 가가린을 어떻게 여겼을까, 거주자 다수가 부패와 불법의 오명을 쓴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본 글에서 다룰 <가가린>은 공동주택에서 꿈을 키웠던 거주민들의 이야기, 즉 내부의 시선을 다룬다. 이를 연출하는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트로월은 학창 시절 만난 이래로 현재까지 함께 연출하는 공동 감독이다. <가가린>은 그들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들은 2015년 본 작품과 동명의 단편을 내놓기도 했고, 또 2018년에는 <블루 도그>라는 단편을 공개하며 활동을 함께했다. 일단 단편 <가가린>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간다. 일단 다큐멘터리는 시티 가가린의 설립을 기념하여, 유리 가가린이 직접 주거단지에 방문한 당시의 흑백 푸티지를 인서트한다. 당대 사람들은 꿈을 꿨다, 희망에 가득 찼다. 이후 영화는 픽션으로 이어진다. 유리 가가린과 동명의 소년 '유리'는 비행사가 되고자 꿈을 꾼다. 유리의 꿈에 상응하는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유리는 우주선을 연상케 하는 안테나를 바라보거나, 또 건물이나 공간을 뒤집어진 구도로 바라본다. 암울한 환경이어도 시선을 달리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꿈이 여전히 푸티지, 영화 속 현실과 다른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이유는, 시티 가가린에선 정전이 일상이요, 주민들의 삶은 버거우며, 철거 소식으로 분위기가 흉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은 누군가가 이뤄놓은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푸티지일 수밖에 없으나, 그럼에도 소년은 주택단지를 우주로 만든다. 그렇게 꿈으로 한발자국 다가선다, 그리고 다시 흑백 푸티지로 되돌아와 당시 희망을 품던 소년의 인터뷰를 인서트하며 가망을 놓지 않는다. 다음으로 <블루 도그>다. 리에타르와 트로윌은 이번에도 외곽 주거 단지로 향한다. 단편에서 이어지는 그들의 작업 경향이 <레 미제라블>의 래드 리, <걸후드>의 셀린 시아마와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주택 단지의 질은 좋지 못하다. 벽에는 금이 가있고, 경제적으로 열악한 이민자들, 하위계층이 모여 산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TV에 빠져서 비참한 현실을 외면한다. 하지만 이윽고 줌아웃으로 확대되며 TV가 아닌 아버지, 그리고 그가 놓인 현실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서 이상향을 의미하는 파랑이 실현되어야 함을 공동 감독은 역설한다. 균열 위에서도 두 마리의 푸른 잉꼬는 짝을 이루고, 삭막한 세태에서도 푸른 옷을 입은 연인과의 꿈을 포기하지 않으며, 비록 외관은 추레하지만 집 내부와 강아지를 파랗게 물들이며 현실에 주저앉지 않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파랗게 춤을 추며 이상으로, 동경으로 조금씩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을 공동 감독은 매우 탐미적으로 포착하며 아름다움을 위한 아름다움이 아닌 현실을 위한 심미주의을 천명한다. 또 주인공은 손에 힌두교의 신인 크리슈나 카드를 쥐고 있는데, 그가 사랑 및 보호를 상징하는 신인 것과 집의 본령이 맞물려야 함을 교차한다. 이들이 파란 꿈을 꾸고, 파란 춤을 출 수 있게끔.    

  

이렇게 그들의 작품은 다큐멘터리로써 현실을 기록하고 픽션도 리얼리즘에 충실하나, 현실을 거꾸로 뒤집어 보거나 관점을 달리하여, 즉 다른 맥락에서 파생되는 시적인 이미지로 예술적인 성취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큐멘터리에서 시적인 이미지로 나아가며 아름답고도 이상적으로 개선되는 과정은 영화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영화가 푸티지로 기대는 현실에서도 나타나야 할 변화인데, 단편에서부터 도드라진 이러한 경향, 과연 단편 <가가린>을 장편으로 승화한 본 작품에서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장편으로 이어진 <가가린>은 단편에서 포착된 연출의 미덕이 여전히 이어진다. 이보다도 먼저 달라진 요소부터 언급하자면, 단편에서는 유리와 그의 어머니가 삶의 무게에 찌들어 가가린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장편으로 뒤바뀌며 유리의 상황은 사실상 고아로 설정된다. 어머니는 살아 있지만 가가린에 거주하는 유리를 방치하고, 그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애초에 언급조차 되지 않고 어머니 또한 방종한 상황, 그럼에도 유리가 꿈을 키워갈 수 있는 이유는 가가린이 요람이자 지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의 요소들은 단편과 유사하다. 장편 <가가린>에서도 주거단지가 완공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리 가가린이 직접 방문한 다큐멘터리 푸티지가 삽입된다. 본 푸티지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아주 좁다란 화면비에다가 흑백이다. 좁아서 매우 갑갑하고 세계의 필수적인 요소인 색채를 잃어버렸다. 선명해야 마땅할 세상은 당시를 포착한 필름이 낡고 삭아 그레인이 자글거리고 흐릿하다. 하지만 그리 암담하지만은 않다. 더 널따랗게 포착될 수 있고 색채를 되찾아 선명할 수 있으리란 듯이, 흡사 동경과 이상에 다다를 것이란 희망을 포기하지 않듯, 유리 가가린은 아파트 앞에서 훗날 하늘로 뻗어 나갈 나무를 심는다. 이윽고 그 나무가 자란 현재가 이후 영화의 형식이랴. 1:1의 좁다란 화면비는 2.35:1의 광대한 화면비로 넓어지고, 칙칙하고 화질이 불명확하던 흑백은 컬러, 그것도 비일상적인 쨍한 원색이 조명으로 깜빡거리며, 아이 레벨 숏은 변칙적인 구도로 뒤바뀐다.      


하지만 형식성과 포착하는 대상의 성질은 마냥 일치하지 않는다. 가가린의 여건은 여전히 흑백과도 같다. 거무튀튀한 잔해, 폐기물들이 쌓여있고, 60년대 이후에 별다른 보수 없이 방치된 아파트의 조명, 배관, 벽 등은 온전치 않아 어두침침하고 균열이 가득하니 흑백과 별 다를 바 없으며, 조악한 필름처럼 노이즈가 잔뜩 끼고 그레인이 자글거리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유리는 열악한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가가린에서 꿈을 꾼다. 다른 거주자들도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프랑스의 타자들인 유색인종 이주민들도 많지만, 마냥 안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흔들리는 핸드헬드가 지당하나, 안정적인 스테디캠에 의한 트래킹 숏으로 이행하는 노력을 끊이지 않는다. 또 삭막한 무채색은 유채색으로, 특히 단편 <블루 도그>에서 강조되었던 하늘의 색채, 동경과 이상의 색채, 물질을 넘어선 관념의 색채인 파랑을 부각한다. 유리의 방, 유리의 나시나 운동복이 언제나 파랑색인 것처럼, 이들은 가가린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너머의 꿈을 꾼다. 그래서 1960년대의 가가린을 포착한 조악한 매체는 더 널따랗게 확장,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랴. 이렇게 발전된 연출로 나아가게끔, 가가린에서 꿈을 꾸는 유리의 노력은 무엇인가. 일단 가가린의 공간성부터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부는 척박하다. 영화의 중반부에 유리와 디아나는 저 멀리서 호사스럽게 빛나는 도시의 중심부를 응시한다. 황폐한 자신들의 동네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하지만 도시의 중심부가 빛날 수 있는 이유는 가가린이 그들이 내놓은 폐기물을 먹고, 그들의 발전을 위해 자신들은 방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실제로도 프랑스 중심부에서 3D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거주지는, 정작 중심부가 아니라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모두 다 빛나면 밝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밤과 어둠, 그늘에서 빛은 더욱 눈에 띈다. 가가린은 빛나더라도 미약하게 빛나는, 다른 것이 빛날 수 있게끔 희생된 공간이다. 하지만 외부는 어둡더라도, 내부는 밝다. 주민들은 활력 있게 가가린에서 거주하고, 단일하지 않은 인종과 민족들이 거주하며 다양성으로 반짝인다. 무엇보다 외부에서 쉬이 볼 수 없는 내부, 개개인의 사적인 공간, 내면에서 꿈을 키워 간다. 유리의 파란 방처럼 말이다.      


그리고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아파트는 매우 삭막해 보인다. 층과 층, 세대와 세대가 단절되어 있다. 평행하게 내달리는 직선이 이들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유리는 창문에서 망원경을 이용하여 서로 단절된 사람들을 바라본다. 직선과 시선이 제한적인 2차원적 구도는 가로막지만 3차원적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옥상에서 유리의 눈은 타인들과 이어진다. 그리고 새벽녘의 달을 본다. 구체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마치 지우개로 지워진 듯 흐릿하게 포착된다. 흡사 지워진 부분에 뭔가 더 칠할 수 있다는 듯, 그렇게 포개지고 연결될 수 있다는 듯. 또 건물이 구식으로 지어진 까닭일까, 옥상에 올라가면 각 층과 방에서 주민들이 떠드는 모든 소리가 모여든다. 유리는 그것을 청취한다. 이렇게 가가린을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단절을 극복하고 있다. 이윽고 서로의 청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들도 아우를 수 있는 일식 축제를 개최하고, 또 어둑어둑하여 서로가 보이지 않던 복도의 조명도 개선한다. 낙후된 가가린을 보수하는 과정의 연출도 주목할법하다. 수리하는 과정에서 전후의 숏은 엄격하게 잘리지 않는다. 하나의 테이크처럼 보이게 만드는 트릭을 이용하여 이어붙이거나, 아니면 디졸브처럼 포개서 연결한다. 이렇게 하나의 테이크(혹은 그렇게 보이는 숏)에 다수가 희생하고 모여서 가가린을 개선한다. 철거 명령을 극복할 수 없으리란 개인의 낙담은 곧 연결과 유대로 조금이나마 극복한다. 당국의 철거 결정 및 퇴거 명령에 의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간 한 주민이, 현재의 거주지는 가가린과 달리 교류가 없어 삭막하다고 말하지 않던가. 가가린도 분명 그렇게 삭막하고 고립된 공간일 수 있었지만, 건물에 나 있는 사소한 균열이나 주민들이 모일 수 있는 널따란 공터, 소리가 모여드는 옥상 등이 교류를 만들고 있었다. 그 교류가 경제적 약자, 소외계층, 노약자와 여성들이 모여 사는 가가린에서 삶의 질을 조금이나마 증진시켰고, 개개인이 꿈을 피워갈 수 있게 만들었다. 파리 아줌마는 분방한 부모에 의해 방치된 유리에게 식사를 제공한다. 이와 동시에 유리도 파리 아줌마를 돕는다. 그리고 주민들이 이사를 가는 날에 아이와 짐을 대신 들어주는 등, 서로 도와준다.      


반면 이기주의는 그 삶을 무너뜨린다. 우삼의 아빠와 어느 한 주민이 이기주의 때문에 가가린의 실태를 조사하러 온 공무원을 설득하는 유리 일행에게 훼방을 놓지 않던가. 또 지하실에 연기를 일으켜 그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와해될 때, 삶의 질은 저하되고 꿈은 불가능한 채 오직 생존만 전전긍긍하는 삶이 이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앞서 도입부에서 유리가 돈을 빌린 친구에게 도와준 게 있으니 갚으라는 것처럼, 디아나가 공짜는 아니라는 것처럼, 서로가 결핍을 보완하고 충족하며 삶은 풍요로워진다. 연대는 개개인을 존중하는 연결이다. 가가린을 보수하기 위해서 모두 한데 모인 테이크 이후 옥상에서 춤을 추는 시퀀스로 연결되는데, 거기선 앞선 연출과 달리 각자의 몸에 충실한 개개인의 몸과 얼굴을 각각의 숏에 담아내고 이를 이어 시퀀스를 구성한다. 내가 개인일 수 있기 위해서, 개인을 보호해주는 공동체를 위해 잠시 희생하고, 다시 나를 회복한다. 그런 나의 얼굴에는 타인이 포개져있다. 파리 아줌마와 유리가 차 안에서 작별할 때, 그들의 얼굴에 유리창에 비친 상대의 얼굴과 가가린이란 건물이 포개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 주민이 이사를 가는 와중에도 살 집은 없더라도 '우편함', 즉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창구를 챙기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언급한 가가린의 공간성을 종합하면 영화가 촬영되던 2010년대의 법률에 들어맞지 않는, 종합병동 그 자체라 할 수 있으랴. 하지만 영화에선 이러한 문제에 안주하지 않는다. 영화 도입부에서 인서트된 푸티지에선 가가린의 소년들이 거리와 도로로 나가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자유로이 질주하고 내달리고자 하던 1960년대 가가린의 꿈, 여전히 그 정신이 2010년대까지 이어진다. 영화 초반부에 유리 또한 친구들과 자전거를 탄다. 이는 그들 옆에 놓여 있는 무수한 철길과 대비를 이룬다. 무수하고도 복잡하게 꼬아진 철길, 하지만 그런데도 철길은 철길이다. 이탈할 수 없고, 정해진 철길 외의 가능성이 없다, 철길은 오직 단 하나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는 그들은 자유롭게 도로와 길을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다. 철길에 안주하지 않는다.      


안주하지 않는 그들은 변화한다. 가가린이 지어진 1960년대로부터 2010년대의 건축법은 변화했다. 가가린은 여기에 부적합하다. 그래서 철거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2010년대의 건축법을 따라 개선할 것들을 보수하여 유리와 주민들은 머물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철거 명령과 정책 변화에 안주하지 않는다. 이러한 저항은 곧 유리가 일식 축제를 여는 것과 같다.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익숙하게 보여야 할 태양이 달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가가린의 주민들은 바로 일식과도 같은 저항을 하고 있다. 당연한 태양과 같은 국가권력의 명령을, 달인 그들이 거부하듯 말이다. 마약상인 달리처럼 분명 환경에 순응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유리가 일식 축제를 여는 것이 영 거북하다. 하지만 대체로 다른 주민들은 페이스페인팅을 하며, 즉 기존 얼굴을 탈피하여 변화해보고, 또 기존의 삭막한 움직임에서 이탈하여 단체로 춤도 춘다. 대지에서 멀어진 옥상에서 조심스럽게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지대로부터 발을 떼면서, 그렇게 구속에서 달아나길 시도해본다. 하지만 잠시 달이 태양을 가릴 수 있다고 하여도, 태양은 다시 돌아와서 빛을 쏘아대며 명령한다. 개선이 여전히 미흡한 가가린의 철거를 말이다. 대다수의 주민이 떠났지만 유리와 달리는 떠날 수 없다. 유리는 엄마가 찾아오기로 했지만, 그녀가 아들을 또다시 배신하여 갈 곳 없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머물 수밖에 없는 유리는 당국의 명령에 최후까지 저항한다. 당국이 가가린에서 떠날 것을, 가가린에 어떠한 생명도 없을 것을 명령한다면, 가가린에서 머물고자 하는 유리는 식수를 만들고 식물과 곤충을 기른다. 흡사 인류의 접근을 불허하는 우주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여건을 우주선에 조성하는 것처럼, 무중력에 저항하며 행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유리는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남긴 발자국처럼, 가가린 철거 명령이 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거주하는 첫 번째 사람의 ‘발자국’을 남긴다. 유리는 거주 불가능의 시대에 거주의 의미를 환기하는 최초의 개척자가 된다.      


이렇게 유리는 시련을 이겨내고 어둠을 밝히며 자유로 향한다. 영화의 연출은 단편에서처럼 가가린을 일반적이지 않은 구도에서 바라본다. 일단 퇴거명령에 의해 카메라는 기운다. 가가린과 유리가 붕괴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는 가가린에 상응하듯 빙글빙글 회전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유리는 꿋꿋하다. 마약상 달리는 스스로가 빙글빙글 돌지만, 어지러워하지 않는다. 흔들려도 우직하게 서 있다. 또 영화가 줌인으로 집중하는 대상은 유리, 그리고 유리가 만든 우주선이요, 반대로 줌아웃으로 멀어지는 대상은 가가린이다. 그것은 사라져갈 가가린의 운명에도 상응할 수 있지만, 당국에 의해 철거될 가가린이라는 공간성에 저항하며 이로부터 멀어지는 유리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유란 구속되지 않고 하고 싶은 데로 변화하는 것, 그래서 타인에 의해서 빙글빙글 회전하거나 기울여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하고 싶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 머물고 싶다면 단단하게 서 있는 것이다. 영화는 카메라 워킹, 구도 등으로 퇴거 명령이라는 국가권력의 영향력을 가시화하나, 그런데도 꿋꿋이 서 있거나 자유롭게 변용하는 유리의 숭고를 줌인, 대상을 다르게 조명하는 시적인 연출로 가시화한다. 앞선 도입부 푸티지의 나무는 곧 가가린에서 꿈꾸는 거주민들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의 뿌리를 덮는 흙과 비료가 곧 가가린이라 말할 수 있으랴. 흙과 비료는 무언가의 죽음, 찌꺼기, 유해, 끝이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탄생의 밑거름이 된다. 영화는 누군가의 죽음과 희생으로 피어나는 성장, 삶을 고찰한다. 가가린을 보수하기 위해서, 고물상을 운영하는 제라르에게 받아오는 것들은 ‘폐품’이다. 유리가 이를 이용하여 건물을 보수하며, 누군가의 죽음이 가가린의 생명을 연장한다. 다른 건물의 유해도 흙이고, 가가린도 흙이다. 가가린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죽어가는 가가린에서 삶은 피어난다. 가가린의 운명과 대비되는 활기찬 아이들의 초상을 보라. 폐품 그 자체인 가가린, 하지만 노후한 건물이 주민들을 이불처럼 덮어줌에, 그들은 여전히 꿈꾼다. 심지어 가가린은 자신의 죽음으로 주민들의 마지막 꿈을 덮어준다. 그렇게 기존 주민들이 다시 재회하는 꿈을 싹틔운다.      


하지만 당국이 급박한 퇴거 명령을 내리자 주민들의 꿈은 멈춘다. 가가린이 낡았다고 한들, 거주민들은 가가린의 보호 하에 주거 그 자체, 곧 생존에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었다. 생존 이상의 꿈으로 나아갔다. 디아나가 훗날 미국으로 가려는 꿈은 있었지만, 지금 당장 주거를 위해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거주라는 당장의 생존이 꿈의 발목을 붙잡는다. 꿈은 내가 향후 성장할 방향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장을 위해선 생존 이상의 과잉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과잉 에너지는 고사하고 당장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국가는 주민들을 덮고 있는 흙을 앗아가고 다른 흙, 곧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꿈도 삶도 저물어간다. 영화에선 언어를 논의한다. 왜 인류는 외계인을 적대적으로 여겼을까, 그 이유를 두고 디아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한다. 인류의 본성은 다른 것을 적대시하는 심리가 있고 경험과 교육, 소통을 통해 점차 적대심을 누그러뜨리고 포용한다. 그런데 당장 모든 국민의 다름을 포용해야 할 당국이 가가린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국은 주민들의 얘기를 듣기보다는,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법률 상의 언어가 가가린에 부합하는지만 확인한다. 이로써 당국의 언어는 어둡고 공격적이며 일방적이다. 무언가를 밝히지 않고 항상 덮고 추방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든다. 즉 소통이나 이해의 용도가 아니다. 창문 너머로 당국의 명령을 받은 인부들이 달리를 몰아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달리를 보이지 않게 만들리라. 흡사 창문은 스크린처럼 느껴져, 인부들이 달리를 몰아내는 모습은 영화처럼 포착된다.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며 합리화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허구마저도 당국은 차단한다. 당국은 주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가가린을 철거하는 와중에도 엘리베이터나 ‘통로’를 가로막고 차단한다. 그들은 변기를 파괴한다. 변기 또한 물이 차오르고 빠져나가던 통로가 아니던가. 이렇게 파괴의 언어는 1960년대 가가린에서 미래를 꿈꾸던 흑백 상태 이전으로 되돌려놓는다. 당국의 언어에 의해 주민들이 이사하는 날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 어두침침하고 비가 내린다. 그들을 가리고 적신다. 안정적이고 평온하던 삶이 흔들리고 아래로 무너져 내리며 침잠한다.      


그러나 유리의 언어는 다르다. 유리와 디아나는 모스부호로 소통한다. 유리가 알려지지 않은 가가린에 남은 최후의 거주자가 되자, 디아나는 모스부호로 그의 존재를 밝힌다. 그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밝히는 언어, 둘의 같은 언어는 이해한다. 인부들이 파괴하고 차단한다면, 유리는 벽을 뚫어 공간을 이어내고 빛을 들어오게 만든다. 당국의 퇴거 명령에 가가린에서 자라나던 풀들이 모두 말라 죽었다면, 유리는 다시금 개와 식물, 곤충이 살 수 있는, 그들을 밝히고 작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언어를 현실에 지시한다. 그렇게 공간이 뚫리자 그 통로로 디아나와 달리가 들어온다. 그간 유리와 적대하던 달리는 그의 농사를 돕고, 또 그가 조성해놓은 환경을 칭찬한다. 그리고 디아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위로 올라갈 때는 눈을 가려야 하는 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고 크레인 위로 오르게 해준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는 언어, 인도하는 언어로 삶은 풍요로워진다. 이들의 최후의 모스부호는 SOS다. 그것은 유리 자신의 구조신호였을까, 아니면 발광하는 건물을 위한 구조신호였을까. 빛으로 밝히는 언어와 추방하고 파괴하는 언어, 후자에 의해 가가린도, 집시촌도 모두 짓밟힌다. 그것이 과연 능사일까, 화사한 색채와 빛으로 뒤바뀔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유리만 혼자 남겨두는 엄마의 언어에 의해 소년의 삶은 위태롭지 않던가. 홀로 가가린에 남은 유리에게 현재와 다른 '과거'라는 시간이 연결되고 '예술'이 이어지며, 또 디아나와 달리가 모여듦에 끔찍한 환경은 아름답게 변하였지만, 추방의 언어에 의해 디아나와 달리가 유리 곁에서 멀어지자 소년에겐 '겨울'이 몰아닥치지 않던가. 그렇게 빛은 사라진다. 그래서 대상을 헤아리지 않고 이기적으로 명령하는 언어에서 달아나야 한다. 집시촌에서 디아나의 가족들이 뭐라고 떠든다. 번역되지 않아 뜻을 알 수 없지만, 두 남녀는 거기서 도망친다. 지시하는 언어가 빛나며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연인을 가로막거나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인서트된 푸티지 중 하나는 가가린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춤’이 담겨있다. 공적 영역에서 끝없는 노동의 굴레에 빠져 자기소외를 느낄 주민들이, 사적인 공간을 보장하는 가가린에서 잠시나마 나의 육체와 기분을 회복하는 춤을 출 수 있었다. 세상의 무게에 찌든 둔탁한 움직임, 외부로부터 규정된 움직임이 아니라, 내가 제 자유를 날아가듯이 표현하는 경쾌한 움직임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를 복권하던 가가린이 사라진다. 유리는 가가린이라는 우주선에서 추방된다. 그것은 비행이 아니라, 죽음이다. 추방된 이후의 무중력상태에서 인류는 중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 추방을 마땅히 중력이 되어야 할 국가가 자행한다. 그런데 유리의 다급한 SOS 신호를 가가린의 최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주민들이 인지한다. 그간 유리가 망원경으로 주민들을 보고 그들을 이어준 것과 달리, 이번에는 주민들이 유리를 보고 소년을 구출한다. 주민들이 유리를 바라보고 그의 언어를 이해함에 따라서 중력을 회복한다. 눈을 뜬 유리의 시야에서 주민들은 희미해지며 사라진다. 흡사 현재 구체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변화하고 덧붙여질 수 있다는 듯, 그리고 가가린은 사라져간다. 그러나 유리는 미소를 짓는다. 가가린은 비록 파괴되었지만 가가린 없이도 서로 이어지고 연대할 수 있는 희망을 주민들에게 남겼다. 그래서 꿈이 다시 가능할 유리는 비관하지 않는다. 리에타르와 트로윌은 이렇게 죽어가며 희망을 남기는 빛을 아름답게 승화한다. 파괴와 폐허 속에서도 반짝이는 빛, 그것이 곧 인류의 자유로운 발광이랴. 가가린이 저물어가는 세태, 하지만 그 와중에도 위험을 감수하며 자유를 추구하는 주민들과 유리가 빛난다. 문제에 귀속되지 않고, 이를 해결하여 뛰노는 인류만이 경쾌하게 빛날 수 있는 노릇이므로. 이러한 이상과 동경에 다다르기 위해 씨앗을 덮는 흙이, 인류를 덮는 거주가 필요하다. 파괴는 필연이다. 파괴된 잔해와 유해가 흙과 거주와 가가린을 이루고, 또 우주로 향하기 위해서 실패와 추락이 필수인 것처럼, 파괴로부터 흙과 자유가 발생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포착되는 것은 단지 파괴, 철거가 다른 형태의 거주로 쉬이 이어지지 않는, 이에 자유와 꿈을 포기시키는 현실이다. 영화 마지막 크레딧의 파괴 영상에 의해 1:1에서 2.35:1로 넓어졌던 화면비가 세로로 다시 좁혀진다. 어떤 것도 덮지 못하고 어둠으로 축소시킬 불필요한 파괴는, 가가린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할 유리의 초상과 대비되어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영화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파괴로부터 보존하고 빛나는 것들을 포착하며, 그들의 숭고함을 예찬한다. 이는 시적인 연출로, 또 사라져가는 가가린과 그곳의 추억·꿈을 붙잡는 아카이빙 푸티지로 말이다.     


본 작품은 사회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사회성에 마냥 잠식되지 않고 저항하고 굴절하며 미적인 실천으로 나아간다. 지난 시대의 낡은 푸티지가 오늘날에 새로운 의미와 꿈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국가의 당연한 영향력을 가가린 거주자들의 시점, 그리고 미적인 관점에서 다르게 본다. 그렇게 달리 보면 빛나는 것들, 아름다운 것들, 자유로운 것들, 이러한 영화의 미적 성취를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마무리 짓고자 한다.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상징 공간, 장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상징 공간은 우리의 외부를 이루는 사회적 세계, 경제체계와 동일하지 않은, 이와 다른 체계나 언어로 해석되는 표상의 범주다. 외부에서는 분명 상징 공간, 장을 향해 영향을 쏟는다. 하지만 각각의 장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영향을 마냥 무기력하게 수용하지 않고, 이를 장 내에서 통용되는 고유의 체계와 논리로 굴절하거나 변환한다. 이를 통해 장 외부, 그리고 각 장과 구별되는 고유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본 작품의 미덕도 이러한 관점에서, 가가린을 재개발하여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려는 국가권력의 알력이, 이들과 상반된 의견을 띤 가가린이라는 장과 예술장에 들이닥친다. 가가린에 속하지만 동시에 국가에 속하는 주민 대다수는 이를 거스를 수 없어서, 영향을 '이주'로 수용한다. 그러나 국가보다는 가가린에 속하는 유리는 남기로 한다. 도시의 흉물로서 무가치하다는 평가를 가가린 장에 밀어 넣는 국가권력, 하지만 유리와 감독들은 가가린이 생명을 피워내고 자유를 준비하게 만드는 유의미하고 아름다운 공간임을 고유한 가치 판단과 미적 실천으로 보여준다. 더욱이 가가린 외부에서 평가하고 국가권력과 달리, 유리와 공동감독은 내부에서 참여·거주하고 실천한다. 그래서 본 작품은 영화임과 동시에 공공예술이다. 거주자와 참여자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와 상반된 외부의 목소리를 대비 시켜, 원주민들에게 진정 필요한 사회적 실천을 매개한다. 강하고 지배적인 한 개인의 창조력, 목소리가 아니라 이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이를 미적으로 실천한 공공예술의 미덕을 보여준다. 즉 리에타르와 트로윌은 국가권력과 예술장의 관계, 국가권력과 가가린이라는 장의 관계에 동시에 속하는 와중에, 국가권력의 영향을 반전하여 다양한 목소리와 각 장의 자율성을 반영하는 예술적·사회적 실천을 본 작품 <가가린>을 통해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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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21222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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