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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01. 2023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메모리아>

불가항력: 업에 따른 모든 시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메모리아>(Memoria) 

- 불가항력: 업에 따른 모든 시간    

“순간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저 멀리 놓여 있는 것을 미리 아는 것보다 더 결정적이다.” -발터 벤야민-

기억은 나를 구성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존재의 육체는 이전과 같다 한들, 무엇이 자신다운 것인지 밝힐 수 없다. 우리의 자아, 인격, 정체성 모두가 기억의 집합이다. 현재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무수한 기억의 총합에서 발생한다. 기억이 없는 유년기의 우리는 즉흥적이고도 우발적으로 결정했지만, 무수히 기억이 쌓인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심사숙고하여 선택한다.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개개인이 각각의 다른 선택을 내리는 이유는 각자가 쌓아온 기억이 다르기에, 각자가 성공했던 결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의 축적이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인생에서의 무수한 '첫 번째 기억'이 특히 더 중요하다. 첫 번째 기억이 하나의 경전이 되어, 그것을 바탕으로 무수한 다른 기억이 파생된다. 이렇게 한 개인이 무의 상태로 태어나 무수한 기억, 곧 유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인생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인생은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업보 윤회설에서 인간은 전생의 업이 현생을 규정한다. 우리는 전생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업은 우리의 육신에 흉터처럼 흔적을 남겨, 끝없이 윤회하는 우리는 그저 잔상뿐인 전생의 기억을 헤집어간다.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였던 나를 되찾기 위해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태국에서 콜롬비아로 장소를 옮기고 내놓는 첫 번째 장편 <메모리아>, 공간은 달라졌을지언정 불교 신자로서 윤회를 탐구하던 그의 관심은 여전히 이어진다. 1970년 방콕 태생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태국 모던 시네마를 열어젖힌 선각자로 평가받는 영화감독이다. 현재의 그는 영화계와 미술계를 오가며 활동하고, 영화감독으로서 그는 기존의 문법을 해체하는 실험적이고 비관습적인 아방가르드 영화로 유명하다. 반면 때때로 미디어 아트를 작업하는 위라세타쿤은 그의 건축 전공을 반영하듯, 대단히 정교한 시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영화계에서도, 미술계에서도 그는 현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는 작품을 보인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의 일환으로 구 국군 광주병원에서 그의 전시가 열릴 때, 위라세타쿤의 작품세계를 보다 밀접하게 접할 수 있었는데, 그는 5.18 당시의 상흔이 남겨진 본 장소를 조금도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으며, 당시의 망령에 상응하는 아주 간소한 설치를 덧붙였을 뿐이었다.      


또 그의 데뷔작 <정오의 낯선 물체>가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오가는 것처럼, 그는 재료가 되는 현실에 과한 왜곡을 가하지 않으며, <친애하는 당신>의 드로잉 기법처럼 그 위에 살짝 자신의 터치를 끼얹을 뿐이다. 그러한 터치는 현재-현실에 과거-전생의 가능성이나 흔적의 가시화다. 그의 영화는 잔잔한 일상처럼, 특정한 목적의 서사 없이 유려하게 흘러간다. 또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엉클 분미>를 두고 누군가는 서구가 윤회 사상을 막연히 신비롭게 여기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비판하였다. 서구권의 비평가들이 태국 불교의 윤회에 매혹된 것은 그간 백인이 동양에 접근해온 태도를 생각할 때 아예 틀리지 않은 지적이긴 하나, 다만 위라세타쿤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여 불교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구 국군 광주병원 인근을 둘러보며 ‘망령의 흐느낌’을 느꼈다고 밝혔다. 그에게서 윤회나 유령과의 공존은 서구를 의식한 태도가 아니라, 그저 태국인이자 불교 신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이 마냥 정해져 있지 않은 철학, 종교관을 솔직하게 투영한 것뿐이다. 그의 작품에서 윤회는 <열대병>의 1장-2장의 구조로 나타난다. 이전 장의 내용과 기억이 생각나지 않는 똑같은 인물의 새로운 삶과 이야기는 대단히 거칠고 비유기적이지만, 전생이 기억나지 않음에도 그 흔적을 더듬는 환생이 곧 <열대병>이다. <징후와 세기>에서 탄생 이전의 삶은 <열대병>보다 더 가시화되어 극의 전면에 등장한다. <징후와 세기>와 <열대병>은 별개의 영화이지만 <징후와 세기>의 끝이 <열대병>의 시작이 되어,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명확히 종결되지 않은 영화들을 이어내며 필모그래피로 윤회를 구현한다. 이전 작품이 곧 전생이 되어 끝나지 않고, 이에 새로운 작품이지만 구작의 흔적을 지니고 이전의 작품이 된다. 이전 작품들에서의 흔적과 유사성을 간직하는 배우진의 반복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그의 영화는 숲이 중심 배경이다. 그는 구 국군 광주병원에서도 맹꽁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보였는데,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자유와 생명의 기원이다. 반면 <친애하는 당신>에서 호소하고 간청하는 타인의 입에 의해서 말하는 타율의 공간이 도시요, <찬란함의 무덤>에서 도시는 군부 독재가 여전히 이어지는 태국의 정치를 온당 반영한다. 즉 도시는 인위성의 구속, 죽음이 가득한 공간이다.      


도시와 달리 숲은 <친애하는 당신>에서처럼 스스로 말하고 비관습적으로 피부와 성기, 정사를 촬영할 수 있는 공간, 성애가 차오르며 생명력이 샘솟는 공간, <열대병>에서처럼 태곳적, 원시적인 육신으로 되돌아가는 공간, <엉클 분미>에서처럼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며 윤회가 발생하는 순환적 공간이다. 하지만 자연과 문명은 분리되지 않는다. 쓰레기, 침입 등 도시는 자연에 밀려들고, 그 충돌이 자아내는 긴장감 또한 위라세타쿤 작품 세계의 기둥과 같다. 도시와 자연의 장소성은 ‘병원’에 집약해서 나타나는데 <친애하는 당신>, <징후와 세기>, <찬란함의 무덤> 등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병원이 등장한다. 병원에서 이성과 합리적인 관점을 중시하는 서구적 태도와 비이성적이고 초자연적인 태국의 사상이 충돌하면서, 두 세계가 겹쳐진 태국의 오늘날을 반영한다. 또 생명을 관장하는 공간이지만 병원은 딱딱하고 운동성이 느껴지지 않으며 또각거리는 발소리만 들려오고, 이와 대비되는 춤이나 음악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삶과 자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본원적 공간과 행위로 회귀하며 되살아나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친애하는 당신>의 인물들이 도시에서 벗어나 능동성, 주체성을 회복하는 수단이 바로 육욕이며, <열대병>에서 성소수자들의 사랑은 폭력에 짓밟히지만 반면 진정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은 자신을 잠식하는 호랑이와 같은 연인에게 육신을 내어준다. 무력의 사용이 증오라면, 상대의 폭력조차 긍정하는 힘이 사랑이다. 또 국가에 지배되고 희생당한 <찬란함의 무덤> 속 식물인간이 된 군인들이 비로소 모든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발기되어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로 보여준다. 이러한 욕망은 실제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느낀 억압당한 성의 경험, 그리고 해방의 바람을 투영한 것이다. 이렇게 진정 자유분방한 자연에서 드로잉 기법이나 <친애하는 당신>의 중반부에 띄워지는 크레딧, <열대병>의 전혀 다른 두 개의 챕터가 이어지는 ‘무위의 형식’을 선보인다. 이를 통해 자연에서의 자유, 같지만 다른 생명으로 전환되는 윤회, 처음과 끝, 유령이 침투하여 삶과 죽음이 불명확한 우리네 인생을 형식으로 보여준다.      


과연 위라세타쿤의 철학적, 종교적, 영화적 지론은 <메모리아>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영화감독 위라세타쿤을 좌우하는 특징적인 연출부터 살펴보자. 영화는 35mm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피사체를 선명하고도 확실하게 조명하는 디지털과 달리, 색채를 강조하여 모호한 뉘앙스나 분위기를 부각하는데 탁월한 매체가 필름이다. 이 같은 필름의 매체성은 현존재가 하나로서 구체적이거나 확실하지 않고, 여러 존재가 축적되어 현재에 나타나는 ‘윤회’를 탐구하는 본 작품에서 효과적이다. 감상자가 보고 있는 제시카는 지금 여기에서 유일무이한 제시카가 아니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며, 과거와 미래에는 제시카가 아니었고 아니리라, 그럼에도 그, 그녀는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가 제시카를 보고 있지만, 제시카가 가리키는 것이 언제나 제시카가 아닌 불명확성, 입체성을 35mm 필름의 아스라한 매체성으로 보여준다. 또한 과거의 매체인 35mm 필름은 ‘기억’의 속성을 지칭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동시대의 매체인 디지털이 아니라, 20세기의 역사적인 매체인 필름이 첩첩이 쌓이고 동시에 흐려지며 오늘날로 다가온다. 이러한 35mm 필름에 위라세타쿤은 롱숏을 결합한다. 그래서 틸다 스윈튼이나 최근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의 주연인 다니엘 기메네즈 카초 등 유명 배우들의 이목구비가 흐려진다. 배우들 또한 <메모리아>라는 세계로 진입하여 기존의 자신을 잊고 제시카나 후안이라는 새로운 옷이 덧입혀진다. 또 에르난이라는 배역에는 후안 파블로 우레고, 엘킨 디아즈 두 배우가 맡아 1역 2인이다. 하나의 존재는 두 존재가 될 수 있고, 두 존재는 하나일 수 있다. 이로써 발생하는 ‘흐려짐’이, 공간에 동화되고 개인의 자아·개성이 혼탁해지는 롱숏이다. 롱숏에서 공간은 살아 숨 쉬지만, 인물들은 흡사 조각처럼 멈춘다. 롱숏이라 해도 인물들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드러난다면 나름의 생동감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 인물들은 주로 누워있거나 앉아있어, 동작은 크지 않다. 업에 따라 무기력하고 체념적이다. 영화 후반부에 제시카가 늙은 에르난과 개울에서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청각과 인물을 둘러싼 풍경으로 짐작가능하다. 얼어붙은 듯한 인물들만 봐서는 영화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러한 연출은 약동하는 공간, 조각 같은 인간을 표현하는데 이는 영화에서 탐구하는 바와 맞닿아 있다. 현생의 내가 알지도 못하고 주체적으로 쌓아가지도 않은 전생의 기억이 먼저 주어져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이러한 전생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공간이 미리 주어지거나 펼쳐져서 나의 기억을 좌우한다. 또 현재의 업이 미래를 시시각각 규정하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미래의 나는 이를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좌우하는 거대한 시공간은 꿈틀거리고 약동하는 반면, 이 안에 참여하는 인간은 무기력하다. 영화의 롱숏은 한 개인의 삶보다 우선하는 전생, 타자, 공간의 어마어마한 운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편집에도 주목할법하다. 영화의 시퀀스는 유기적으로 단순하게 이어지지 않는다. 일례로 제시카가 법의학자 아네스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아네스가 제시카에게 연구실을 보여주겠다고 제안하니 제시카는 동행한다. 하지만 그 직후 바로 이어진 숏은 연구실이 아니라 도서관이다. 일반적으로는 아네스와 연구실로 동행하는 숏이 이어져야 할 테지만, 아네스는 사라지고 제시카 홀로 식물 관련 서적을 읽는 숏으로 이어진다. 또 영화 초반, 비 오는 날 집 밖으로 나가는 후안 일가를 포착한다. 그렇다면 이후에도 비 오는 풍경이나 식구들이 이어져야 할 테지만, 다음 숏에는 화창한 날씨와 제시카의 삶이 담긴다. 또 비 오는 풍경 자체도 미심쩍은 것이, 전후 맥락으로 보건대 후안의 아내이자 제시카의 동생인 카렌은 아직 퇴원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퇴원하지 않았을 현재에 미래에 퇴원한 카렌이 미리 침투해있다. 또 제시카는 아네스를 따라 나서 발굴 현장으로 향한 모양이다. 그 지역에서 공통된 환청을 듣는 사람들이 몰리는 병원에 방문한다. 그러나 그 이후 이어진 제시카와 아네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제시카가 아네스에게 시를 낭송해주는 숏은 과거로 추정된다. 제시카가 도시에서 맞닥뜨린 떠돌이개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천연덕스레 연결된다. 이러한 편집의 미스터리를 해결할만한 단서는 제시카가 치과의사 안드레스를 죽은 줄 알았다고 착각한 장면에서 주어진다. 그녀는 과연 안드레스의 죽음을 착각한 것일까. 그녀는 안드레스의 죽음을 미리 본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맨 처음 병실에서 카렌과 만나는 장면에서, "깨어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반문하는 제시카가 본 것이 과거가 맞을까? 그녀는 카렌이 깨어나게 된 미래를 본 것이 아닐까. 또 늙은 에르난은 나고 자란 장소를 떠난 적이 없고, 그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 에두아르드의 집에 머무는 제시카는 안다고 하지만, 정작 도시에 머무는 젊은 에르난의 기억, 그가 제시카와 만났던 기억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늙은 에르난의 윤회 이후의 미래가 젊은 에르난일지 모른다. 그리고 제시카는 젊은 에르난을 봤다. 그녀가 젊은 에르난을 만났던 장소는 그가 사라진 이후,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있다. 공간은 같지만 시간은 너무나 먼 간극이 있어 보인다. 제시카는 스스로를 여러 공간을 누비는 '여행자'로 소개한다. 그런데 마냥 공간만 누비는 것일까. 늙은 에르난은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신은 '저장장치'요, 그녀는 '안테나'라고 말한다. 그녀는 한 개인이 업에 의해서 간직하고 있는 모든 시간을 증폭하고 이해하는 4차원적인 여행자인가. 위라세타쿤은 <징후와 세기>나 <열대병>에서 보여준 거친 편집을 일상 속에 적용한다. 그것은 전작에서처럼 단일한 존재가 아닌, 여러 존재로 윤회하는 현존재의 불확실성과 불연속성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현재는 과거의 업에 의해서 결정되고, 마찬가지로 미래 또한 현재의 업에 의해서 시시각각 결정되고 있다. 그리고 제시카는 현재를 있게 한 업과 현재의 업에 따라 결정된 미래를 증폭하는 안테나다. 분명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은 맞다. 감상자도 현재 시간의 흐름을 지각한다. 도입부에서 입원한 카렌은 퇴원하고, 제시카는 후안에 의해 젊은 에르난을 만나 그와 무언가를 쌓아가고. 이와 동시에 영화에서 목재의 '흡습성'을 강조하고 '균열'을 말하는 것처럼, ‘현재를 있게 한 과거’와 ‘현재에 따른 미래’가 침투한다. 한편 그 시간이 단선적이지 않기에 영화는 복잡하다. 순간에 여러 시간이 중첩된다. 그것이 곧 하나에 과거의 업과 미래의 업이 중첩된 불교적 시간을 느끼게 만든다.     


현재의 제시카를 있게 한 UFO가 자아낸 굉음, 제시카를 현재에 발굴지에 있게 한 아네스의 연구실, 공원에서의 만남 등이 업으로서 침투하고, 또 현재에 결정된 미래 또한 본다. 퇴원한 카렌과 죽은 안드레스, 늙은 에르난이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에르난을 말이다. 위라세타쿤은 선형적으로 쭉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업에 의해서 순환하고 결정된 시간의 '건물'을 건축한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감상자에게 행동에 관한 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비 오는 날 집에서 나오는 후안 일가는 갑작스럽게 끊기고, 아네스의 연구실로 들어가는 제시카가 포착된 숏도 미완의 상태로 흐려진다. 해야 할 일을 남겨두는 것이 곧 업이다. 그래서 꽤 많은 숏이 지난 이후에도 업에 의해서인지 비오는 날 제시카가 후안 및 카렌과 식사하고, 제시카가 아네스의 연구실로 들어가는 숏이 영화에선 이어져야만 한다. 그러한 영화는 결코 끝을 단정할 수 없으리, 식사 장면에서 카렌이 말한 민족 연구란 업은 어떤 미래를 규정할까, 아네스의 발굴 또한 마찬가지다. 즉 업이 현재의 발걸음을 좌우하고, 현재의 발걸음이 미래를 보게 한다. 이러한 업과 기억을 좇게 되는 감각을 영화에선 시청각의 대비로 보여준다. 시각은 주로 현생의 나다. 확실하게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끔 펼쳐져 있다. 특히나 나만의 공간은 단단하고 폐쇄적이다. 젊은 에르난의 스튜디오처럼 철두철미하게 통제한다. 또 제시카가 본업을 위해 난초 보관 기기를 파는 매장으로 향했을 때 영화는 핸드헬드와 달리가 사용되고, 거리는 클로즈업으로 좁혀간다. 만져질 듯한 가까움, 공장의 딱딱한 철제 너머를 침범할 수 없음이 곧 현세다. 너무나도 확실한 것, 제시카인 자신이 익히 잘 아는 것, 운동하는 능동성… 반면 제시카에게 선제된 공간은 미리 도착해서 고정된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다. 도입부에서도 텅 빈 공간에 미리 카메라가 배치되어 있었다. 흡사 굉음이 울려 퍼지며 제시카가 깰 것이란 걸 예측이라도 하듯, 이후에도 프레임을 미리 형성해놓은 카메라 안으로 제시카는 걸어 들어온다. 젊은 에르난의 스튜디오, 미술 전시장, 이후 제시카가 전시를 보고 나오는 거리에도 카메라는 미리 배치되어 있고, 제시카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올 것이 예정된다. 제시카가 늙은 에르난의 방을 구경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카메라가 먼저 도착해서 빈방을 포착하고, 이후 프레임 안으로 제시카가 진입해온다.      


이들 숏 모두 도착과 방문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 미리 결정되었다는 듯, 이러한 전생, 공간, 세계는 나와 무관하게 엄습해있고 침입하기에 당혹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이 있기에 우리는 존재를 확장한다. 업의 한 면은 폐쇄적이어서 단단한 시각이고, 이와 동시에 무지한 나를 확장하는 추상성으로서 업의 양면이 청각으로 제시된다. 제시카는 자다가 쿵 하는 소리를 듣고 깬다. 영화의 소재는 폭발성머리증후군이다. 자다가 거대한 환청이 뇌리를 뒤흔드는 병으로, 실제로 위라세타쿤이 겪었다. 이후 위라세타쿤이 콜롬비아에서 본 작품을 촬영할 때 증후군이 사라졌다고 밝혔는데, 본 작품에서도 이를 반영한다. 제시카는 폭발성머리증후군에 의한 굉음을 계속 미심쩍어하다가, 후안이 소개해준 젊은 에르난에게 가서 유사한 소리를 재현하여 밝혀본다. 하지만 그 소리 자체를 묘사할 수 없다. 금속 재질 우물 바닥에 무언가가 쿵 떨어지는 것 같다며 ‘비유’를 한다. 즉 청각 그 자체가 아니라 유사한 속성을 빌려서 우회적으로 대상을 말한다. 그렇게 유사한 소리를 구현하여 앎을 더하긴 했지만, 여전히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영화 초반에 제시카는 동생이 입원한 병원에 방문하고, 후안까지 만난 이후 길을 걷는다. 그런데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한 남자가 쓰러진다. 굉음은 흡사 총격과 유사하게 들린다. 그래서 남자는 쓰러진 것이었나, 하지만 사격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버스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건대, 기관 중 하나가 고장이 나면서 발생한 소리로 추정된다. 즉 오인한 사격 소리가 아니었고, 이걸 아는 인파는 당황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쓰러졌던 남자는 이를 확인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아직 당황한 여파가 남은 것일까, 허둥거리며 굉음이 발생하여 쓰러졌던 곳에서 도망친다. 추상성은 남자의 행동을 확장한다. 반면 제시카는 그 남자를 희한한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도로의 굉음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소리의 근원인 시각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잠을 깨운 이상한 굉음에 대해선 여전히 골똘히 신경을 쓴다. 후안 가족과 식사하는 동안에도 굉음이 울려 퍼지지만, 이는 환청이라서 제시카에게만 들린다. 후안 가족에게는 들리지 않고 내 눈이 볼 수 있는 외부와 결합되지 않는다. 외부 너머의 외부로 확장해야 한다.     


즉 청각의 추상성 덕분에 구체적인 현실에 여러 가능성을 그려볼 수 있다. 도입부, 어둠으로 가득 찬 폐쇄적인 침실에서 실내 정원으로 나간다. 제시카가 카메라 하단에 잠들어 있기에 아무 것도 포착되지 않던 프레임, 그러나 굉음에 의해서 깨어난 그녀가 포착되고, 또 거울에 그녀가 비치며 무는 다수의 유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확장한다. 0에서 1로, 1에서 2와 다수로, 단순히 사람 숫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고, 또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배우를 기용한다. 언어는 주로 영어와 스페인어를 오가고, 영국 배우인 틸다 스윈튼을 시작으로 아네스를 맡은 잔느 발리바는 프랑스 배우, 후안을 맡은 다니엘 기메네즈 카초는 스페인 배우로서 그들은 다른 언어와 다른 나라로 모이며 확장한다. 그들은 자신이 썼던 언어, 그리고 향후 사용할 수도 있는 언어를 저반다. 그들이 디딘 땅 또한 마찬가지이랴. 그렇게 확장하며 이들은 시를 쓴다. 후안은 제시카가 연구하는 식물과 균류에 대한 지식 덕분에 기존의 유한한 앎을 확장해서 다른 각도에서 시를 쓸 수 있었고, 굉음과 후안과의 만남을 통해 제시카는 젊은 에르난을 만났으며, 카렌의 병문안과 아네스와의 접촉 이후의 제시카는 시를 쓰고 발굴 현장으로 향한다. 우리는 추상적인 청각을 구체화하고자 한다. 젊은 에르난이 아리송해하고 불분명한 음향들을 정교하게 '건설'하고 그것과 부합하는 '시각'을 밝히는 것처럼, 그렇게 추상을 그가 놓인 '스튜디오'의 형태로 단단하게 만드는 것처럼, 아리송한 추상을 계기로 우리는 유한한 것을 무한하게 증축해간다. 또 청각은 사물인 자동차가 ‘주인’ 인간이 목적을 부여하는 ‘종’의 운명에서 달아나게 한다. 주차장에 어떤 인파도, 물질적 접근도 없었다. 그러나 자동차들이 무리를 지어 경보음을 울려대기 시작한다. 인류를 위한 사물, 경보음이 울리는 규칙, 모두에서 벗어난 알 수 없는 맥락 속에서 추상적인 사운드를 내뿜으며 단단한 고체에 갇혀있는 사물의 목적을 확장한다. 이러한 청각, 미지, 기억이 '나의 잠'을 깨운다. 본 작품은 잠에서 시작된다. 도입부, 보이는 것은 어둠, 커튼, 그리고 누워서 자는 제시카의 실루엣, 들리는 것은 그녀의 안온한 호흡뿐이다. 제시카의 단잠을 방해한 것이 바로 미심쩍은 굉음이다. 굉음이 중단한 것은 제시카의 꿈, 그리고 영화에서 꿈은 '익히 아는 나'를 반영한다.      


병원에 입원하여 주로 잠을 자는 카렌은 '개'와 관련한 꿈을 꿨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한 개를 발견했었다. 개를 동물병원으로 옮겼으나 어떤 처치를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여, 일단 맡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날부터 갑자기 원인 모를 병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제시카의 꿈은 개가 자신에게 저주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는 자신을 재생산한다. 병에 대해서 짐작할만한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아는 것만 지지부진하게 반복한다. 자동차들도 굉음을 내기 전에는 잠들어있었다, 오직 자동차라는 운전이라는 목적을 위한 사물로서. 그러나 자동차가 잠에서 깨니 일반적으로 인류가 아는 사물로서 자동차가 아니다. 한 자동차는 낮에도 시끄럽게 울어대며 지나가는 인파를 향해 인류에게 사물로서 귀속되지 않는 자동차임을 천명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시 잠들면 순종적인 자동차가 된다. 즉 꿈은 멈춤이요, 가능성의 축소이며, 깨어남은 그 반대다. 그리고 굉음에 의해 꿈에서 깬 제시카는 제시카로서 해야 할 일을 멈추고, 꿈이 아닌 굉음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 에르난에게 향한다. 그리고 꿈 얘기를 하는 사람, 반면 꿈을 중단하고 깨서 나가는 사람은 촬영에 차이가 있다. 꿈 얘기를 나누는 카렌과 제시카는 구도 변화가 없다. 그러나 굉음을 추적하기 위해 젊은 에르난의 스튜디오로 향한 제시카는 해당 시퀀스에서 숏이 여러 번 분절된다. 에르난과의 만남, 음향의 감상, 그것의 이름을 규명하는 모니터를 바라보는 구도로 각기 변화한다. 꿈은 카렌의 병목에 대한 단 하나의 각도밖에 제시해주지 못한다. 영화 말미, 의사를 찾아가는 제시카 또한 마찬가지다. 의사는 일신교인 기독교를 믿는다. 그래서 카메라 구도는 하나다. 그러나 현재에 과거가 침투하고 그것을 추적하기 위해서 여러 공간으로, 편집에 따라선 여러 시간으로 확장되는 제시카는 여러 각도에서 비친다. 그리고 그 행위들을 따라 현재를 비롯케 한 근원적 업과 현재의 업에 따른 미래가 서서히 밝혀진다. 굉음에서부터 나 너머의 타인의 소리, 잘 모르는 인파의 북적거림, 도시의 소음을 넘어 자연의 무수한 동식물들의 소리로 나아갈 때, 내가 가진 무수한 시간들이 밝혀지고 또 밝혀진다.      


그래서 영화에선 이를 밝혀내는 장치가 인상적이다. 영화 초반부에 제시카는 전시장으로 향한다. 어두운 색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치적으로도 보이고, 또 UFO로 추정되는 물체가 광선으로 인간을 빨아들이거나 아니면 떨어트리는 것 같다. 이는 훗날 늙은 에르난에게 확인할 탄생의 기원이다. 불교에서 해명하고 풀어야 하기에 계속 이끌리는 업, 그래서 확실하게 목도하기 전에도 업의 주위를 뱅뱅 맴돈다, 단지 알아채지 못했을 뿐. 여하간 그녀는 이를 촬영한다. 그런데 그녀가 작품을 잘 몰라서 봐야 했을 때는 전시장의 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작품을 촬영하자, 이로써 알고 소유하자 불이 꺼진다. 제시카가 도서관에 있는 모습을 담은 숏도 마찬가지다. 조명이 점차적으로 꺼진다. 그녀는 균류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모르는 것이 아닌 익히 잘 아는 것, 그래서 서서히 어두워진다. 한편 그렇게 어두워지고 흐려져 살며시 잊히기에 향후 풀어야 할 업으로서 궁금해지고 이로써 다시 이어질 테다. 굉음을 추적하는 제시카처럼 말이다. 또 굉음은 제시카가 카렌에게 몰입할 때 발생한다. 제시카가 카렌에게 이입하여 개를 경계하다가 공원 벤치에 앉았을 때, 식당에서 카렌과 대화할 때, 깬 상태에서도 굉음이 울려 퍼진다. 익히 아는 것, 안온한 것에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고 무지한 것을 해명하게 만드는 업, 그 업이 자아내는 감각은 곱지 못하다, 오히려 거칠고 불쾌하며 쨍하다. 제시카 뿐만 아니라 관람객 또한 놀라게 하는 굉음, 그것 자체의 불쾌감과 풀리지 않은 의문의 찝찝함이 제시카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쓴맛을 남긴다. 그러나 그 불쾌감에 의해서 제시카는 굉음의 근원에 다가선다. 병을 얻었던 카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잠들지 않고 이젠 깨어나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개 이외에 병을 얻게 만들었을 여지로, 너무 미스테리하여 '투명 민족'으로 불리는 이들의 저주 의례를 지목한다. 즉 불쾌감을 해결하고자 문제에 다가선다.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주지 않으려는 의사는 기독교 책자를 내밀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살바도르 달리를 소개한다. 앞서 언급했듯 꿈의 예술가이기도 하지만, 의식적인 나 너머의 무의식적인 검은 영역의 자신을 긍정하는 예술가다. 병원 앞 달리의 조각은 하나의 존재가 두 얼굴로 양분되어 있다, 의식적인 내가 잘 모르는 무의식적인 나와 함께한다.      


무지하여 나 자신조차 두려운 무의식적인 나처럼, 현재의 내가 모르는 과거와 미래의 나는 분명 모호해서 불쾌하다. 그러나 신경안정제로 이를 무디게 만들면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불쾌가 가리키는 나의 실마리를 영영 말소함에 자신을 부정하게 되리. 반면 불쾌감의 근원으로 서서히 나아갈 때, 나 자신의 시간과 존재의 가능성이 확장되는 쾌감,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한 불쾌를 자아내는, 어두운 영역에서 불현듯 나타나는 굉음은 아주 날카로운 섬광과 같다. 위라세타쿤은 최근 미술 작업에서도 동굴, 그림자 등 매우 어두운 작업을 즐겼다.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두운 미장센이 자주 등장한다. 도입부에서 잠든 제시카나 주차장, 병원도 마찬가지고, 중반부의 유골이 매장된 동굴도 그렇다. 나도 잘 모르는 무의식이 간직한 기억, 현생의 내가 모르는 전생의 기억이 이 어둠에 묻혀 있다. 이러한 기억에 굉음과도 같은 예리한 빛이 쏘여지고 우리는 기억과 업을 발굴한다. 잠에는 소리로, 동굴에는 빛으로. 전생의 기억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축적되어 있거나, 나와 무관하게 제시되어 있다. 흡사 세계와도 같다. 자신임과 동시에 타인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나를 규정한다. 또 우리는 나였던 기억, 나의 업에 따른 윤회만으로 살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개 한 마리가 제시카를 따라온다. 개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제시카는 뒷걸음치지만, 사실은 그녀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제시카가 착각한 이유는 카렌의 꿈에서 개가 나온 이야기를 들었고, 이후 제시카 스스로를 카렌처럼 여겼기 때문이랴. 젊은 에르난 또한 마찬가지로, 제시카와의 교류 이후 흡사 자신을 그녀처럼 여겨 비싼 난초 보관 장치에 돈을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미리 주어진 업, 곧 프레임 안으로 흡습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타인의 기억을 내게 흡습한다. 제시카가 스스로를 카렌처럼 여기고 개를 만난 장면에서 카메라는 이동하고 있었고, 젊은 에르난이 제시카에게 이입한 순간도 카메라는 ‘균열’을 일으킬 듯 흔들렸으며, 젊은 에르난이 제시카에게 이동하니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다. 카메라는 변화가 없었지만 젊은 에르난과 제시카의 첫 만남에서, 에르난이 본래 듣던 음악이 중단되고 제시카의 인사가 끼어들며 다시 음악은 재생된다. 그렇게 에르난의 것에 제시카가 틈입한다.      


제시카가 연구하는 포자나 균은 난초에 달라붙는다. 별개의 둘은 흡착하며 하나가 된다. 어쩌면 윤회도 그렇다. 타인이지만 과거엔 하나였거나, 또 현재에 균으로서 흡착·흡습하여 하나가 되거나, 될 수 있는 존재이기에. 그래서 아네스는 죽은 자신일지도 모르는 대상들을 발굴한다. 제시카 또한 유골과 발굴지로 이끌린다. 제시카는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늙은 에르난의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교감하여 흐느낀다. 또 내내 제시카에 의해서 전개되는 영화는 후안의 강의, 후안 일가가 집을 나서는 장면, 발굴 현장으로 장소를 옮긴 이후에 전혀 모르는 인파만 나타나는 등, 그녀가 사라지는 숏들이 중간 중간 침투한다. 제시카와 단지 관계 맺은 타인, 장소와 연관한 숏, 그러나 제시카가 없어도 이 또한 제시카다. 후안과 카렌이 제시카를 규정하고, 아네스와의 만남 이후 발굴지에 동행하는 그녀는 아네스나 발굴지의 매장 또한 자신이 된다. 영화 후반부 늙은 에르난은 눈을 뜨고 잔다. 눈을 감고 자는 카렌은 꿈을 꾸며, 자는 동안 꿈나라 바깥에서 흘러간 시간을 모른다. 그러나 눈뜨고 자는 그는 잠자면서도 몸이 속한 외부를 바라본다. 외부의 굉음, 곧 타자의 접근에 화들짝 놀라는 잠자는 제시카와 달리, 부산스러운 외부 소음과 파리의 접촉이 간지러울 법한데도 깨지 않는다. 외부와 물아일체된다, 소음과 파리 또한 자신의 일부라는 듯 무덤덤하고, 그는 자신 너머의 제시카와 원숭이의 언어 모두 이해한다. 그것을 늙은 에르난은 모두 기억한다. 스스로를 저장장치라 말하는 늙은 에르난과 타인을 자신에게 거쳐 증폭하고 송출하는 안테나인 제시카는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제시카는 에르난에게서 과거의 속삭임을 듣는다. 콜롬비아에 착륙했던 UFO, 늙은 에르난이 말하듯 ‘탄생’을 완수하고 다시 이륙하는 UFO의 굉음이 자신의 폭발성머리증후군임의 원인임을 확인한다. 늙은 에르난의 손을 떼도 보고 들릴 정도로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잠을 청한 제시카는 잊었었다. 그리고 잠들지 않았던 누군가를 찾아 나서며 그것의 기원을 밝힌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만 젊은 에르난임은 기억하지 못하는 늙은 에르난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아마도 젊은 에르난이 자신의 과거나 전생이 아니기에, 오히려 늙은 에르난 이후의 삶이기에 모르는 것이랴. 다만 모를 뿐인 결정된 미래의 나, 그것 또한 타인과의 접촉으로 환기하리.      


UFO를 조우한 이후 영화는 제시카의 시점을 탈피한다. 굉음과 이에 따른 지진을 다 함께 경험한 마을의 구성원들이 포착되고, 이후 광대한 대지와 하늘로 확장된다. UFO가 내려와 탄생될 당시에는 모두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점차 현재로 이어져오며 무수하게 분화되고, 인류를 넘어 거대한 자연으로 확장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공통 기억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나였거나, 여럿이서 함께 공동존재였거나, 그렇기에 나의 가능성은, 나였던 것과 나인 것으로 무궁무진하고 숭고할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찝찝함의 연대기는 끝나지 않는다. UFO는 어디에서 왔고, 탄생의 주체는 누구이며, 어째서 창조했는가? 어쩌면 업에 따른 시간은 모두 주어져있을지 모르지만, 그 광대함을 몸소 실천하고 확장하기 위한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확장해가며 하나의 나는 무수한 내가 되고, 하나의 시간 속에서 무수한 시간을 본다. 이렇게 위라세타쿤은 '내가 될 수 있는 자신'이나 ‘나였던 존재’들을 포착하며 '나 너머의 나'를 광대하게 집대성한다. 이를 경험케 하는 것이 기억이다. 선형적으로 흘러가듯 보이면서도 비선형적으로 과거나 미래가 침투하는 편집은 현재를 결정한 업과 함께, 또 현재의 업으로 규정된 미래를 함께 사는 존재의 다채로움과 복합성을 보여준다. 물론 다른 차원에서, 미지의 어딘가에서 어렴풋하게 '흔적'만 남기는 기억은 실체가 확실하지 않아 불안하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나 정작 그것을 해결하기에 나의 의식은 미미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이 이끄는 인연을 긍정해야 하리. 그런 태도가 영화 속 부드럽게 서로에게 스며드는 만남, 조심스러운 따스함을 이루고, 이는 혼자서 극복하기 어려운 미지와 결핍을 함께 극복한다. 위라세타쿤이 실험적인 연출로 가리키는 다양한, 심지어 무수한 시간까지도 초월한 타자들, 그들을 나로서 긍정하랴. 그런 삶이 영화처럼 다채로운 확장과 쾌감을 불러올지니. 태국을 떠나 콜롬비아로 향한 위라세타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영화를 만든다. 이와 동시에 콜롬비아도 잃지 않는다. 타자를 나처럼 느끼기, 이와 동시에 타자에게서 나를 찾기, 위라세타쿤은 터를 옮기며 발생할 수 있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작가적 색채와 로컬성 양자 모두를 지켜낸다. 그것이 곧 <메모리아>의 태도를 연출로써 몸소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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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0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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