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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06. 2023

조지 밀러, <3000년의 기다림>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조지 밀러(George Miller), <3000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시야의 확장은 그 자체로 어떤 계시와도 같다.” -카를 융-

우리는 어렸을 적, 『알라딘』을 읽으며 한 번쯤 상상해본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자신을 발견해준 대가로 총 세 개의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일생일대에 단 세 번밖에 주어지지 않을 값지고 귀중한 기회, 현재와 미래 모두 만족케 할 만한 소원을 빌어야 하리. 그런데 현재에 꼭 채워야 할 것만 같은 결핍을 충족하면, 과연 그 충일함과 만족감이 생 내내 이어지긴 할까. 세 개의 소원은 과연 만족스러울까. 과연 우리는 어떤 소원을 빌어야 할까, 또 무수한 신화와 소설에 통달한 전문가라면 어떤 소원을 빌까? 조지 밀러의 <3000년의 기다림>은 램프의 요정을 모티브로 한 A. S. 바이엇의 『나이팅게일 눈 속의 진』을 원전으로 한 작품이다. 과연 조지 밀러는 어떤 소원을,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길어낼까. 1945년 브리즈번 태생의 조지 밀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흔히 <매드 맥스> 시리즈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졌지만, 이와 동시에 아주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세계 또한 특출난 실력으로 연출한다. 일단 신화란 무엇인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 시리즈에서 집대성한 중남미 각 민족의 신화, 일단 신화는 고도의 객관성이 부여된 여러 다른 현실과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련 없이, 창조적 자발성에 빠져 있는 세계다. 밀러의 신화적이라 할 수 있는 <꼬마 돼지 베이브 2>나 <해피 피트> 시리즈에서 본 특징이 도드라진다. 일단 <꼬마 돼지 베이브 2>에서 인간이 동물을 다루는 현실의 관계와 법이 대응하지 않는다. 돼지는 식육용에서 양치기이자 친구가 되고, 끝끝내 영웅이 된다. 잘 날지 못하는 거위는 비행기에 못지않게 비행하고, 사격 클럽에서 살해당할 운명을 극복하며, 맹견은 순해진다. 농부의 아내 에즈미는 일반적으로 남성에게 귀속되는 농촌 여성의 운명을 넘어서, 남성의 조력 없이 문제를 해결한다. <해피 피트> 시리즈에서는 노래하고 춤추는 펭귄들이 등장하고, 비일반적인 탄생, 이질적인 존재를 설정한다. <해피 피트>에서 멈블이 펭귄신의 교리에 들어맞지 않는 놓친 알에서 태어났고, <해피 피트 2>에서 멈블과 글로리아의 아들 에릭은 의심하지 않는 남들과 달리 항상 '이유'를 따진다.      


밀러는 이러한 존재들을 새로운 세계, 그 자체로 본다. 흡사 이러한 존재들의 탄생이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라는 듯이, <해피 피트> 시리즈의 도입부가 우주에서 포착되는 지구인 것처럼, <해피 피트 2>에서 그들이 움직이면 지구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크릴새우들은 은하처럼 보이는 무리에서 이탈한 고유한 '행성'이자 ‘별’이며, 결말에서도 멈블의 가족을 우주 속의 '원', 곧 하나의 행성으로 상징하듯 말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창세기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다. 그러나 결말에 최초의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과거를 말하는 신화와 달리 미래를 비추지만,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조차도 다시 시작할 세계를 논한다. 행성, 세계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이질적인 인물들, 신화에서 풍요로운 상상력과 이로 인한 혼돈 뒤에 질서가 내재하는 것처럼, 그 질서를 비범하고 용감한 영웅이자 신적 존재가 재정립하듯, 밀러의 작품에서도 영웅과 신에 필적하는 이질적 존재들이 성숙하며 세계의 질서를 구성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가부장적인 임모탈이 지배하는 세계는 남성중심적 일신교가 강화된 모습, 즉 원리주의적인 이슬람이나 가톨릭의 형태를 띤다. 역사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민주주의의 요건으로 자원의 분배와 재생산을 꼽지 않던가, 그래서 만인이 권력과 자원을 쥘 수 있을 때 권리가 분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자원은 임모탈이 독점하고 혈액이나 모유, 임신과 출산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그에게 노예화된다. 그러나 기존의 세계에서 이탈하는 퓨리오사, 맥스, 눅스가 임모탈에 대적하여 승리하고 새로운 세계, 곧 물이 분배되고 여성적인 포용력과 협동이 질서로 자리 잡는 민주적 세계를 건립한다. <꼬마 돼지 베이브 2>에서는 베이브가 영웅이다. 현실에서의 신은 인간이다. 인간에 의해 동물들은 가축화된다. 또 인간, 특히 도시인들에 의해 부당한 마약 수사를 받고 체포되거나 동물들은 구속된다. 그러나 영웅 베이브는 기존 신인 인간의 '공포' 대신에, 물에 빠진 맹견을 구하고 개와 고양이를 화해시키며 동료들을 탈출시키는 등 화합과 공존으로 질서를 다시 쓴다. 도시의 원리에 의해 전원까지 지배당할 뻔한 베이브의 농장, 그러나 베이브 의해서 도시까지 역으로 정화한다.      


<해피 피트>에서는 인간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빌린 '도사' 러브레이스, '펭귄신'의 위엄을 빌린 황제펭귄 족장이 등장한다. 반면 신들의 규범, 보편성에 들어맞지 않는 멈블이 등장한다. 노래하는 펭귄의 세계에서 음치이자 탭댄스를 추는 멈블, 그러나 실존하지 않는 신의 권위만 빌린 신적 존재들과 달리, 멈블은 직접 선각자가 되어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들고 인간과 펭귄을 매개하며, 노래와 춤, 황제펭귄과 아델리펭귄의 화합을 보여준다. 또 물범, 범고래, 인간 등의 역경을 극복하는 그를 사회 전체가 흠모, 선망한다. <해피 피트 2>에서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황제펭귄 사회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또 그간 황제펭귄, 아델리펭귄, 바다코끼리, 고래에게 먹히는 크릴새우의 세계는 각기 고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맹목적인 고착화의 반복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따져 묻고 각자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힘을 모으며, 즉 일반성에서 이탈하여 위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내가 해야 할 일을 할 때, 세계의 주인을 나로서 바로 세우고 신적 존재가 된다. '아기' 돼지와 펭귄, 성체가 되어서도 ‘아기 펭귄의 털’을 지니는 멈블이 순수하게 내가 바라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처럼 영웅과 신적 존재, 곧 ‘초인’이 되기 위해선 가장 순수한 자신으로서 니체적인 '어린아이'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러한 신화는 허무맹랑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매혹된다. 사회적인 측면과 객관적인 질서가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를 특유의 감수성으로 매료하기 때문이다. 신화의 감성성은 밀러 특유의 연출에서 나타난다. <꼬마 돼지 베이브 2>에서는 귀여운 동물들과 슬랩스틱 코미디, 하이스트 무비의 연출이 관람객을 매료한다. 그들의 감각은 기존 법을 유린하여 무로 되돌려놓은 다음 새로운 유로서 법을 구축하는데, 그렇게 구축된 결과가 아름다움이다. <해피 피트>는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멈블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극복하는 액션 문법과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공간성이 특징이며, 이를 역동적인 카메라워킹으로 비춘다. 이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도 이어진다. 임모탈의 세계가 사슬로 구속하고 붙잡는다면, 영웅과 신적 존재들은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빠져나가며 자신을 보존한다.      


또 <해피 피트 2>에서까지 황홀하고 광대한 규모의 춤과 노래로 사람을 매혹한다. 이들 시리즈는 3D 애니메이션임에도 후반부에 인간을 포착할 때는 실사다. 현실이 3D 애니메이션인 펭귄의 세계를 지배하였으나, 3D 애니메이션 속 펭귄의 노래와 춤이 인간을 매혹하여, 현실을 신화로 매개하고 뒤바꾼다. <꼬마 돼지 베이브 2> 또한 현실과 이에 CG 효과가 더해진 동물의 세계가 교차하는데, 이러한 양식 또한 매우 신화적이다. 신화에는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변신, 그 반대의 변신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후자가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의 퇴락을 의미한다면, 전자는 자연과 문화가 매개됨으로써 발전에 상응하는데, 밀러의 작품도 그렇다. 동물이지만 인간으로 나아가는 존재들은 자연과 문화적 세계의 각기 다른 연출을 혼합하는 매개체로써, 그들로 인해 두 세계는 뒤섞이며 더 나은 세계로 진보·도약한다. 신화가 분리된 자연과 문명을 언제나 화해시키듯, 연출도 그렇고 밀러 작품 속 영웅이나 신적 존재들도 ‘화해’를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다. 또 신화적 사고는 분명하게 시작하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끝마치지도 않는다. 완성해야 할 것을 항상 남겨두는데 이는 밀러의 시리즈 구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완성된 작품을 하나로서 닫지 않고, 언제나 차기 시리즈를 이어가는데, 이러한 밀러의 신화가 <3000년의 기다림>에서 다시 펼쳐진다. 영화의 도입부, 알리테아는 연구를 위해서 튀르키예에 도착한다. 그녀는 인류의 공통적 진실을 길어내기 위해서 동서고금의 전설과 신화를 연구하는 서사학자다. 그래서 그녀는 '비행기'에 탑승하고 지상에 비해 '덜 막혀있고 추상적인' 하늘길을 넘나든다. 밀러는 일상, 현실 너머의 동화나 신화로 나아갈 때, 항상 비행기를 삽입한다. <꼬마 돼지 베이브 2>에서도 시골에서 도시로 진출할 때, 이로써 다채로운 것을 예고하는 장치가 비행기였다. <해피 피트> 시리즈에서는 비행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에 필적하는 다이빙이나 수영이 등장하고, 또 <해피 피트 2>에서는 직접적으로 에릭이 퍼핀의 비행을 선망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나고 자란 황제펭귄의 세계에서 아델리펭귄, 바다코끼리, 인간의 세계로 진입한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도 임모탈의 세계에서 모래폭풍이 불어 닥치는 사막, 변해버린 녹색 지대로 나아간다. 이렇게 나아간 세계는 역경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며 영웅이 되고, 기존 공동체에서 핍박받는 타자였던 주인공은 새로운 세계에서 내재적 원리의 비범함을 인정받아 신에 필적하며, 그 주인공은 두 세계의 고착화된 문제와 결핍을 다름과 화합으로 해결한다. 알리테아에게 영국은 구속하는 공간이다. 이웃 기독교도들이 그녀를 사이비취급하며 무시하는 공간, 또 합리주의와 경험론이 지배적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 '비이성적'인 것들이 추방당하는 장소다. 또 그녀가 나고 자랐기에 ‘익히 가능한 공간’이 아닐까. 그러나 하늘길을 넘어 불가능한 공간, 구체화된 영국과 달리 추상의 여지가 많이 남아있는 튀르키예로 향한다. 이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알리테아는 정령을 본다. 여기서 카메라 구도에 주목할법하다. 카메라는 그녀의 뒤태와 정령을 포착한다. 즉 그녀의 얼굴과 어깨 부근에 있는 카메라는 그녀의 시야에 상응한다. 그러나 이윽고 숏이 잘린다. 그녀를 마중 나온 귄한과 그의 동료들이 포착된다. 그리고 알리테아의 정면을 포착한다. 알리테아의 시야에서는 추상적인 것, 관념적인 것, 환각적인 것이 보인다면, 그녀의 정면을 보는 귄한의 시야에서는 알리테아의 물질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늘길을 넘어서 이국에 도착하긴 했지만 딱딱한 대지는 대지다. 다시 중력과 물리적 구속이 시작된다. 이후 차량에 탑승한다. 차량 내에서 숏의 잘림은 없다. 흡사 현실의 시간처럼, 그리고 정령도 나타나지 않는다. 잘리지 않는 숏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에 물질 너머의 관념, 물질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동료들은 정령을 믿지 않는다. 이후 알리테아는 강의한다. 그녀의 정면과 함께 스크린에 송출되는 PPT가 보인다. 관중들의 시선이다. 강의를 듣는 관중들은 지식을, 익히 이성적인 것을 깨닫고 싶다. 그녀 또한 과거에는 재해나 현상을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화가 필요했다고 말하지만, 서서히 그 자리를 과학이 대체할 것이라 강의한다. 그러나 알리테아의 시선이 향하는 객석에선 그녀의 뒤태와 함께 정령이 보인다. 이윽고 그녀는 정령에게 잡아먹힌다. 정령은 과학이 자신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할 위엄을 선보인다.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귄한은 이를 '병'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알리테아는 자신의 상상력 때문에 졸도를 일으켰다고 판단한다. 이후 그랜드 바자르에서 ‘나이팅게일의 눈’이란 물병을 샀다, 본 장면은 원테이크로 포착되어 현실과 밀착했다. 테이크는 잘리지 않음에 현실의 시간처럼 오롯이 시간을 보존한다. 이후 호텔에서 알리테아는 병을 닦는다. 그리고 진이 나타난다. 현실 곧 물질계에서 가져온 물건, 그러나 거기에 비물질적인 가능성이 내재해있다. 이후 마찬가지로 알리테아의 등 쪽에서, 그녀의 뒤태와 함께 진이 포착된다. 또 그녀가 진을 보는 순간과 룸서비스가 들이닥치는 숏은 각기 컷으로 분리된다. 후자가 객관이고 전자가 주관이자 환각인가. 또 그녀의 정면은 진과 함께 포착되지 않는다. 진이 관념이라면 알리테아의 얼굴은 물질이라는 듯 양 차원은 분리된다. 그러나 서서히 진과 함께 그녀의 정면이 포착된다. 그녀의 물질과 진이라는 비물질적 관념 내지는 상상이 하나의 차원에 공존한다. 이후 후반부에 진을 사랑하는 알리테아는 그를 해방시키지 않고, 연인이 되어 공존한다. 그리고 알리테아의 신념을 부정하는 이웃들에게 그를 데려가서 보여준다. 이웃들은 기독교적인 일신론 너머의 범신론적 가능성, 영국 너머의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을 그간 부정했다. 그러나 튀르키예에서 가져온 ‘난에 노코드치’를 먹고 진을 본다. 그것이 곧 이웃들의 편협한 사고를 확장한다. 결말에서 진과의 동거를 담은 소설을 끝마친 알리테아는 공원 중앙의 산책로를 걷는다. 좌측에는 일반적이다 못해 모범적인 ‘인세’의 전형이 펼쳐진다. 익히 가능하고 사회가 허용한 단란한 가족의 모범, 반면 우측은 뻥 뚫린 공간에 아무것도 들어차 있지 않다. 좌측이 일반성의 충족이라면, 우측은 가능성이 차오를만한 여백, 이윽고 우측에서 진이 나타난다. 알리테아와 진은 함께 걷는다. 물질적인 좌측과 비물질적인 것이 피어오르는 우측의 '정도'에서 가능한 것이, 나를 넘어서는 '사랑', 또 일반 인류가 불가능한 진의 경이로운 '발재간'이다. 소년들은 진의 말도 안 되는 축구 실력에 놀란다.    

 

즉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 비물질적인 것, 현실 너머의 것을 보려고 노력함과 동시에, 단순히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과 공존한다면 삶은 더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밀러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일단 본 작품은 포커싱이 흐렸다. 명확한 대상의 윤곽선이 블러 처리되어 아스라하다. 그래서 대상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으로, 흡사 빛의 변화 가능성과 불확정성을 긍정하는 인상주의, 정념의 변덕을 가시화하는 표현주의 회화처럼 나타난다. 구체적인 하나의 물질에 희미하게 잔상이 복제되고 새어나오니 ‘하나’ 너머의 가능성을 천명한다. 알리테아가 일신론적인 이웃에 반대하고 범신론을 지향하듯 말이다. 또 구체적인 존재가 지워지고 흐려진 만큼 그 여백 사이에 무언가 채워질 여지가 생긴다. 그것은 곧 알리테아의 ‘안경’, 진이 갇힌 ‘물병’과 대비를 이룬다. 진이 처음 나타났을 때, 알리테아는 안경을 쓰고 진의 피부를 자세히 확대해 본다. 그러나 익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드는 능력, 즉 비가시적인 것에 주목할 때, 진의 황홀한 이야기보따리에 올라탈 수 있나니. 영화 내내 욕실엔 거울에 김이 잔뜩 껴 있다. 거울은 내면이나 영혼이 아니라, 오직 물질만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매개하고 반영한다. 그러나 거울에 물질이 보이지 않을 때, 그것이 정확하지 않고 흐릴 때, 물질 너머의 것을 상상하고 볼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진은 물병에 갇혀 주로 바다 속에 떨어지거나, 아니면 어딘 가에 묻힌다. 또 매가 물병을 잡고 하늘로 날아가니, 진은 저 멀리 비행하는 셈이다. 일상적 지상을 떠나야 진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삶에 만족스러운 사람들, 평범하게 돌이나 사물로서 물병을 취급하는 사람들은 진을 만나지 못한다. 자신의 직업적인 복식을 쫙 빼입고 거기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한계를 뛰어넘고 욕망을 성취하는 걸텐이나 제피르가 물병을 접한다. 그녀들은 신분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하거나, 가부장제의 매매혼에 굴복하지 않는, 제약 너머의 여성을 바란다. 그래서 영화는 진과 마주할 때, 또 알리테아가 다른 정령과 만날 때, 카메라가 극적으로 흔들린다. 고정되고 정착된 기존을 붕괴시키고 다른 무언가가 차오른다는 듯이. 또 알리테아의 경우 지식에 대한 갈망과 더불어, 진과 만날 때 알몸을 느슨하게 가릴 뿐인 '가운'을 입고 있다.      


즉 쉽게 벗겨지고 다시 다른 옷이 입혀질 가능성의 상태, 옷이 아니라 제 나신에 솔직한 상태다. (또 그녀는 공항과 강연에서 무채색 옷만 고집하는 영화 속 보편 인류와 달리, 선명한 원색을 제 몸에 수놓는다. 무채색의 흑백논리가 아니라, 다양한 원색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긍정할 때,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출로 밀러는 무엇을 비추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외재적 원리가 아니라 내재적 원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물병과 접촉한다. 그녀들과 더불어 영화에서 “살집이 커질수록 쾌락이 커진다”고 말하는 것처럼, 먹고 싶고 쉬고 싶은 제 몸에 충실한 '뚱뚱한 여자' 슈가 럼프가 진이 담긴 병을 소환하고, 제 욕구와 욕망에 솔직한 '아이' 무라트와 이브라힘이 물병을 접할 뻔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들들을 찾는 왕비가 도착하자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게 된 아들들은 병을 발견하지 못한다, 무라트는 권력밖에 모르는 존재, 이브라힘은 감옥에 갇혀 생식을 위한 아기가 된다) 그들은 협소한 가능성에 갇히지 않았다. 병에 담긴 진은 언제나 무궁무진한 변화의 가능성으로 충만한 액체로 가득찬 망망대해에 빠진다. 진이 병에 유폐될 때는 환상이 실현되어서 가능성이 말소될 때, 그 상상을 하는 주체가 사망할 때, 더는 환상을 바라지 않을 때다. 그래서 이를 다시 바라는 사람이 진과 만난다. 그렇게 진과 만나려면 알리테아가 초반부에 하는 강의처럼 과학적 태도가 아니라, 신화적 태도가 필요하다. 알리테아는 분명 혼자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주장하고, 이성적으로 제 삶을 완벽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현재가 불만족스러워 펼쳐보는 상상력, 그리고 현재를 의심하는 판단유보가 진과 만나게 한다. 앞서 조지 밀러의 작품 세계를 설명할 때 언급한 레비-스트로스에 더해 신화를 보충해보자.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외적인 일의 진행에는 개의치 않고, 내적 원천에서 흘러나온 변화무쌍한 형상들을 생산하는 환상의 세계', '꿈의 사고'로 신화를 규정한다. 사물의 실제와 상관없는 이질적인 것들이 관계를 이루고 불가능한 세계가 들어선다. 오늘날에는 신화적 사고를 몰아내고, 목표지향적인 과학, 기술에 의해 지식이 풍부해졌다, 그러나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지혜'가 풍부해지진 않았다. 이들은 오직 '공식'만 따라 움직인다. 공식 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      


이를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말을 빌려서 더 보충하자면, 신화는 교환될 수 없는 것과 교환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현상을 미메시스한다. 계몽의 경전이 계산가능성, 유용성의 척도, 통일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몰아내고, 비합리적인 것들을 부정한다면, 신화는 이를 인정할 수 있는 체계다. 계몽이 보이지 않는 것과의 단절이라면, 신화는 '연결'이다. 이로써 신화적 태도를 가진 걸텐은 신분을 뛰어넘어 왕자를 사랑하고, 가부장제 내에서 제피르는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여성으로 거듭난다. 그들의 동공은 언제나 물질 너머의 것이 투영되고, 이계로 확장된다. 늘 지식에 목마른 제피르와 알리테아는 다리를 떤다. 현재의 자신이 불안하고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그 이상의 자신과 연결되겠다는 듯 말이다. 이를 위해선 두려움을 물리쳐야 한다. 미끄러져서 병을 발견한 비대한 슈가 럼프, 그러나 그녀는 진을 거부한다. 그녀는 만족스럽거니와, 이브라힘에 의해서 '총독' 자리를 거머쥐었다. 즉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 아니라 이브라힘에 의해서 제 욕망을 대리충족하고, 이에 제 자신이 홀로 짊어져야 할 소망이 버거울 것이다. 또 결여를 인식해야 한다. 영화에서 언제나 소원을 비는 자는 여성이다. 반면 남성들은 소원과 유리된다. 가부장제 내에서 그들의 소원은 부조리한 매매혼이나 암살 등의 방식으로 성취되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이브라힘과 무라트를 왕좌를 위한 존재로 전락시키지만, 그것이 꽤 만족스러워 자신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가부장제에 종속된 제 처지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그 너머를 상상한다, 이 때 내게 더 많은 것이 채워진다. 이러한 신화적 태도로 무궁무진한 것들과 연결된다. TV에서는 영화 기술이 완성된 이후 촬영한 아인슈타인만 송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화적 존재 진은 실재 아인슈타인을 소환한다. 또 진의 이야기 꾸러미에는 영화 기술이 없었던 저 먼 과거의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황홀하게 펼쳐준다. 즉 신화적 태도는 기술의 한계로 상상할 수 없는 과거의 생생한 이미지를 현재와 연결해 준다.      


그렇다면 신화적 태도로 불가능한 것들과 이어진 이들은 무엇을 보는가. 알리테아 학창 시절로의 플래시백, 물질을 포착한 실사다. 그러나 여기에 ‘만화’가 침투한다. 바로 알리테아의 상상 친구 '엔조'가 일러스트로 침투하고, 이내 곧 이미지는 실재가 된다. 이후 알리테아는 천식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내재적 원리를 따라 자신을 지지해주던 엔조를, 외재적 원리에 따라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고 불태워버렸다. 그렇게 허위이지만 현실에 소환되기를 바라는 것, 소환되었다가도 바보 같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은 ‘사랑’이다. 진의 첫 번째 이야기, 시바의 여왕은 아주 이성적이다. 흔들림 없는 판단력과 이를 이용한 통치는 합리적, 객관적이다. 이후 시바의 여왕은 연인이던 진 대신에, 살아 움직이는 악기로 연주하는 마법사 솔로몬에게 매료된다. 진의 보좌로 국가를 잘 이끄는 것과 달리, 마법사와 결합하여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이성적으로 무용하다. 흩어져서 사라지는 쾌락만 잠시 머물고 떠난다. 움직이는 악기는 매우 신묘하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감미롭다. 그러나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마법사와 사랑을 나누는 시바의 여왕은 불사가 아니라, 자신의 비명을 목격한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충만한 나는 이제 비이성적인, 그저 무의미한데도 충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환상적인 마법사에게 몸을 맡기고, 그 마법사는 소원이 남은 진을 추방한다. 시바에게 더 이상 소원은 필요 없다. 즉 소원을 거스를 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것, 또는 소원 그 자체가 바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파멸적이다. 알리테아는 잭이라는 남자와 사랑했다. 그러나 잭의 아이를 유산하고, 둘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잭은 알리테아가 공감 불가능한 여인이라고 판단했으며, 알리테아 또한 헤어진 것이 후련했다고 밝힌다. 사랑하면 대상에게 묶인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유’를 바란다. 둘이서 하나였던 것이 다시 둘이 되며 상대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렇다면 왜 상처를 입는가? 걸텐은 무스타파 왕자를 사랑했다. 소원 두 개를 그와의 사랑, 그의 아이를 임신하는 데 사용했다. 그러나 권력 투쟁에 휘말린 무스타프 왕자가 시해되었고, 마지막 소원이 남은 걸텐에게 진은 목숨을 부지하라고 읍소했지만, 그녀는 소원과 목숨을 포기한다.      


사랑은 곧 연인과 같아지는 것, 그래서 연인의 죽음에 걸텐도 생의 동력을 잃는다. 연인이 죽거나 나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연인인 나는 자신을 부정당한 기분에 빠진다. 또 노예 걸텐은 불가능한 사람을 사랑했다. 무스타파 왕자의 권좌는 아무에게나 가능하지 않은 자리, 이를 걸텐에게 뺏기자 다른 사람들이 시기한다. 희소한 명예를 빼앗기 위해서 질투심이 폭발한다. 즉 내게 가능한 것은 누군가에게 불가능, 그것을 넘보며 소원을 비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했던 사랑의 끝은 다시 불가능, 곧 파멸로 치닫는다. 또 연인과 공동의 신의로 묶이는 사랑은 자유의 동의어는 아니다. 진은 제피르와 사랑에 빠졌다. 제피르는 지식에 관한 두 가지 소원을 빌었고 한 가지 소원만 남았다. 그런데 그녀가 남은 소원을 빌면 진은 해방되지만, 그 대가로 제피르에게서 멀어진다. 그래서 진은 제피르의 마지막 소원을 저지한다. 제피르는 진의 연인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사랑의 대가로 희생한 자유, 이에 그녀는 갑갑해한다. 그래서 진은 끝끝내 자신을 병에 가두어 사랑을 포기하고, 반면 제피르를 자유롭게 한다. 또 자유롭고 이성적이었던 시바의 여인은 솔로몬에게의 지배와 비이성적인 사랑을 바랐다. 그러나 제피르에겐 진과의 사랑이 있지만 자유가 없다. 그리고 알리테아가 사는 오늘날과 달리, 제피르가 살던 시대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과학'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자유와 과학, 곧 이성을 보고 싶다. 이는 황홀한 미장센으로 펼쳐지나, 한편 소원은 이기적이다. 시바의 소원에 의해 진은 사라지고, 진이 사랑을 추구한다면 제피르가 불행하고, 반면 제피르가 행복하다면 진이 불행하다. 그래서 이성/비이성, 사랑/자유의 양자택일, 마찬가지로 너와 나의 택일, 자신에겐 이로우나 상대에겐 해로운 것이 소원이다. 모두를 구원할 소원이란 과연 가능할까. 알리테아와 진의 관계도 그렇다. 알리테아는 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결여, 곧 필요한 것이 사랑임을 확인한다. 시바에게서 시작한 여성의 여정, 이윽고 오늘날의 여성은 시바의 상태로 되돌아왔다. 비교적 평등해졌고 자유로우며 이성적이지만, 반면 사랑과 비이성이 결여된다. 그래서 알리테아는 그에게 자유를 선사하기보단 그녀 곁에서 사랑으로 영원토록 머물게 만든다. 더욱이 진의 존재를 통해서 신화론에 관한 자신의 도그마를 지지받고 싶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야 하고, 또 보인다 한들 간헐적으로 보여야 하는 존재 진이 알리테아에 의해서 연기 같은 자신을 구체적이고 탄탄하게 고체화한다. 비과학적인 존재가 사랑에 의해서 과학적인 세계에 머물며 과학적인 존재가 된다. 구체적이어선 안 되는 존재는 알리테아의 소원을 위해 자신을 자포자기하며 서서히 바스러진다. 보이는 것에의 안주, 또 대상을 보고자 하는 내 소원에의 집착, 이는 대상의 죽음 그리고 소원의 죽음이다. 3000년의 기다림으로 알 수 있는 것, 인류는 언제나 증오가 승리했다는 것, 이기적인 소원에는 언제나 증오가 뒤따랐다는 것. 그러나 소원을 빌어가며 발전해가는 3000년의 기다림 끝의 알리테아는 증오 대신 사랑을 택한다. 그래서 알리테아는 진을 자유롭게 놓아준다. 자신 또한 아집으로 변질되기 직전의 사랑을 포기하여 자유로워진다. 즉 인류의 소원은 사랑과 자유 사이,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그 ‘어딘가’다. 양자 모두 가능하면 좋겠지만,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이타심과 헌신으로 인해, 자유는 일련 희생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소원을 이루면서도 여전히 소원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런 우리는 이야기로써 꿈꾼다. 이야기는 주로 허구다. 하지만 아예 거짓은 아니다. 서사는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인물의 목표나 필요에 따라 목적론적으로 어떻게 기여하고, 또 어떤 인과적 역할을 맡는지를 서사가 알려준다. 그래서 인류는 서사를 통해서 미리 살아보고 대신 산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서사다. 불가능한 권좌를 열망하는 무라트는 한 늙은 이야기꾼을 사랑했다. 물론 다른 이야기꾼도 있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추방하고 살해했다. 너무 허무맹랑했을까, 또 뻔했을까. 그러나 늙은, 그만큼 많은 지혜가 축적된 이야기꾼의 서사는 타당하고 풍요로웠으리. 그렇게 자신 너머의 무언가를 보게 만들어줬을까. 우리는 그 서사를 여전히 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적인 자신은 신화적인 자신으로, 자유로운 자신은 사랑하는 자신으로, 그 반대도 가능해야 하고, 단순 서사 수준이 아니라 이를 지혜로써 현실에 통용해야 할지다.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다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서사함과 동시에 현실에 실현하고 다시 서사하며 사라지는 알리테아와 진의 관계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꾼 밀러는 신화와 이야기, 그리고 이를 모두 포괄하는 예술을 상찬한다. 과학의 물질적으로 정밀하고 자세한 것,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실험실과 같은 장소에서 고도로 통제되어 분석된 것 너머의 비결정적인 것을 서사는 상상하고 예술은 보여준다. 안주하면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선 무스타파 시해 이후의 걸텐이 그렇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상상하려 하지 않고 소원도 거부한다. 그러나 소원을 빌지 않으면 재앙이 닥친다. 우리는 비이성과 이성 사이를 재빠르게 넘나들며 소원을 빌고, 이로써 황홀한 내게 다가서야 한다. 그것이 곧 세계의 근원이다. 밀러는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옛날 옛적 창조 신화처럼 본 작품의 도입을 뗀다. 아직 우리의 세계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듯,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창조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이자, 이를 바라는 소원이다! 영화의 감각성을 중시하는 밀러는 이야기보따리를 아주 황홀한 규모의 미장센과 불명확하고 아스라한 미장센을 뒤섞어 액자 구성으로 펼쳐낸다. 다만 무라트가 늙은 이야기꾼에게 듣는 서사 또한 시각으로 확장하고 펼쳐 보여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나의 이야기에서 타인의 이야기로, 그 타인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타인의 이야기로 확장되어가는 신화적 가능성과 소원의 풍부함이 더해졌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가 더 매혹적일 수 있지 않았을까. 여하간 서사하고 예술로써 이어지며, 사랑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결국 스스로를 고양할지다. 그런 인간의 소원은 세 개로 끝나지 않는다. 결코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며, 소원으로 인한 변화는 기존의 파멸을 불러올 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원에 앞서 배드엔딩을 아는 인간은 망설이고 겁먹는다. 그러나 머무르거나 얽매이지 않는 예술적 인간, 그 너머를 볼 수 있는 꿈꾸는 인간, 신화적 인간, 그들에게서 사랑과 자유의 공존이 가능할지니. 그리고 그게 가능하게끔 밀러는 (시퀄을 제작할지 가늠할 순 없지만), 알리테아와 진의 관계를 미완으로 남겨둔다. 그렇게 닫히지 않고 계속 창조하는 신화와 인간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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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0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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