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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10. 2023

드니 코테, <댓 카인드 오브 썸머>

정도를 찾아서…

드니 코테(Denis Cote), <댓 카인드 오브 썸머>(That Kind of Summer) 

- 정도를 찾아서… 

“넘침은 아름다움이다.” -윌리엄 블레이크-

인간은 불가능한, 그래서 신비롭고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을 욕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욕망 일부는 법에 의해서 금기시되고, 또 성적 도착증이란 개념으로 명명된다. 일단 몇몇 성애가 금기시되는 이유는 과도한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주장하길 우리는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자극 방어막'을 형성하는데 이는 개인별로 편차가 있고, 방어막을 넘어서는 충격은 ‘외상적 자극’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원치 않거나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을 가하는 행위가 범죄로 규정된다. 또 도착증의 경우 실천적인 욕구의 좌절에서 비롯하는 증세로, 욕망을 충족하려는 충동과 방어하려는 충동 사이의 투쟁이다. 도착증은 불가능했던 기억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방어적인 태도로서 일부러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기도 한다. 도착증은 무익하고 완수 불가능하여 환자를 무력감에 빠트리기에 치료 대상이다. 한편 지금까지의 성은 남성에 의해서 연구되고 규정되었기에, 여성의 성적 문제로 명명된 것들이 남성의 욕망을 대변하거나, 여성의 몸을 대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드니 코테의 신작 <댓 카인드 오브 썸머>에선 성적 문제를 진단받은 여성들이 치료차 여름휴가에 집결한다. 과연 이들의 문제는 진정 금기시되어야 하는 악덕인가, 아니면 도착증의 하나일까, 아니면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상한 것으로 치부된 여성의 성일까. 1973년 뉴브런즈윅 태생의 드니 코테는 캐나다 퀘벡 영화를 대표하는 시네아스트이다. 그의 영화는 하나의 장르,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다큐멘터리에서 파생된 인터뷰, 푸티지 등을 픽션에 적극 인서트하며 단일한 하나의 장르를 교란한다. 또 최근에는 다루는 소재에서 파생되는 형식을 고안한다. 일례로 <우화>의 경우 박제된 동물들의 처지, 동물원에 전시되는 불운한 동물의 삶을 형식으로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고정한다. <윌콕스>의 경우 안전한 문명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자연으로 향한 인물의 삶을 보여주기 위한 신비로운 디졸브, 뿌연 렌즈 플레어를 적극 사용하고, 영화관의 관객들이 파악할 수 없는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 무성영화임을 택한다. <공중보건>에서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바라는 과거와 새로운 현재의 기로에 선 오늘날을 아나크로니즘으로 선보인다. 연극 같은 무대에서 항시 인물들이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것도 영화가 촬영되고 있는, ‘거리 두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형식을 바탕으로 드니 코테는 현대인의 고립 및 고독, 여성 혐오를 주로 고찰한다. 데뷔작 <방랑자>에서는 노동과 생산을 위해 사물로 전락되는 삶, 이에 자신의 감정을 따라 타인과 교류할 수 없는 자기소외를 진단한다. 이에 더해 어딘가에 소속하고 싶지만, 이와 동시에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양가적인 마음을 고찰하는데, 이는 근작 <윌콕스>에서도 이어진다. 노마드인 주인공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마찬가지의 방랑자들과 교류하고, 생존하기 위해 문명과 접촉한다. 코테에게 현대인이란 그 어느 욕망도 충족시킬 수 없는 모순적인 존재다.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에서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남성성을 찬미하고 심미화하는 누아르의 장르성을 뒤집는다. 여성을 폭압하는 남성의 폭력성을 꼬집고 고발하는 장르로 말이다. 포주 남성들에게 소유되는 여성들을 흑백에 담아내며, 형식으로 그녀들이 빼앗긴 삶과 자유, 감각을 보여준다. <베아트리체 없는 보리스>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가장의 방종과 욕망을 신화 속 탄탈로스 이야기를 차용하여 풀어낸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도드라지는 코테의 또 다른 특징은 초자연성과 로컬성이다. <방랑자>나 <그녀가 바라는 모든 것>에서는 자신이 나고 자란 뉴브런즈윅의 로컬성을 반영하여, 캐나다라는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질 수 없는 개개의 생활양식을 보존한다. <베아트리체 없는 보리스>에선 오만한 가장 남성의 무능력함과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로, 가부장제와 남성 너머의 힘에 상응하는 초자연적인 설정을 가한다. 남성의 절망은 가부장적 신화와 달리, 여성과의 결합으로 극복된다. 이는 근작 <윌콕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지 못했지만 존재하는 삶, 문명 너머의 확인하지 못한 미지의 자연을 디졸브, 렌즈 플레어, 물질에서 영혼이 튀어나온 듯한 불명확한 포커싱, 블러로 환기한다. 마지막으로 <유령 마을>은 코테의 로컬성과 초자연성이 혼재된 작품으로 '닫힌사회'에서 비일반적으로 전락한 죄책감 및 양심을 가면, 유령,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비행'이라는 초자연적 상징으로 보여준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성은 헛것으로 전락한다. 리얼리즘에서 시작되어 초자연성으로 전환되는 코테의 전개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결국 낯선 것을 포용하고 유한한 기존에서 나아가야 할 너머에 상응하기에 이를 외면할 수 없다. 


다큐멘터리 <부드러운 살결>도 우락부락할 것만 같은 보디빌더의 통념, 거친 물질 너머의 낯선 영혼, 부드러움을 비추는 영화가 아니었던가. 코테는 물질로부터 영성의 회복, 피상을 넘어서 내면과 진실을 꿰뚫는 시선을 촉구한다. 이렇게 피상 너머를 들추는 작업을 줄곧 이어가던 드니 코테는 이제 '비정상성'이란 피상, 그리고 '걸레'라는 오명 너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바라본다. 본 작품은 사회 내에서 성생활에 문제를 진단받은 세 명의 여성이 26일간 유유자적한 별장에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26일 중 1박 2일간의 휴일이 영화 중후반부에 주어지며, 그전까지 참가자들은 성생활에 제약은 없지만, 본인의 문제를 섹스나 자위 외의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상담사이자 연구자 옥타비아에게 충실히 상담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휴일 외의 '평일'에 참여자들은 성의 과잉을 치료하기 위한 '유용한' 활동에 이바지한다. 상담에서 세 여성은 그저 말밖에 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녀들의 말은 모두 옥타비아와 사미의 귀에 들어가 치료를 위한 자료이자 보고서가 된다. 또 옥타비아가 본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유는 자신이 현재 소속한 대학에서 임기를 보장받기 위함이다. 즉 평일에 정상적이라 일컬어지는 인류는 모두 생산성, 유용한 것을 위해 힘쓴다. 그런데 이 평일에도 이따금 휴식 시간과 핸드폰이 주어진다. 그 중 본명은 가엘이지만 자신이 선택한 가명 게이샤라는 이름을 쓰는 한 여성은 자위를 즐기고, 레이나 또한 핸드폰으로 사도마조히즘 포르노를 찾아보며 성감대를 자극한다. 핸드폰을 주지 않아도 그녀들은 기구로 오르가즘을 즐기고, 가장 저돌적인 성격인 게이샤는 별장을 이탈하여 인근 축구장으로 향해 남성들과 직접 살을 맞대고 섹스를 나눈다. 즉 이들은 평일, 합법적으로 주어지는 휴식 시간 외에도 수치화, 자료화되지 않는 무용하고 소모적인 행위인 섹스를 즐기기 때문에, 생산성과 성장을 따지는 국가에서 비정상적으로 규정되어 치료 및 연구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평일에 이들, 특히 정상인인 옥타비아는 내가 누군지, 왜 여기서 이런 일을 하는지 공허함을 느낀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충일하다, 그러나 나의 영혼은 궁핍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영혼에 다시금 촉촉한 양분을 제공해주는 날이 바로 '휴일'이다. 평일에 간접적인 섹스를 즐기던 게이샤와 레오니는, 휴일에 별장을 벗어나 미리 약속해놓은 장소로 향한다. 게이샤는 삭발한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가발이든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고, 이에 휴일에는 검은 단발 가발을 선택한다. 이렇게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어 하고 싶은 ‘역할 플레이’를 즐긴다. 그리고 휴일에 레오니는 땋은 머리를 한다. 두피에 피가 쏠리는 팽팽함이 느껴질 만큼 머리를 꽉 조인다.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다. 몸에도 끈을 팽팽하게 묶어, 살집들이 조이고 이에 평소보다 흉하게 튀어나온다. 이윽고 그 끈은 철봉에 묶여 레오니의 육체는 지상에서 붕 뜬다. 레오니는 중력이 팽팽하게 잡아끄는 것이 느껴지는 위태로운 감각, 피가 덜 통하고 온몸에 자극이 가해지는 통증을 느끼며, 통각으로 육체의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평일 내내 금욕하던 유제니 또한 트럭 기사에게 하룻밤 함께 자자는 요구를 제안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은 매춘부가 아니라며, 돈을 받지 않을 거라 말한다. 그녀는 단지 즐거움, 자신이 머릿속에 그려온 환상을 실현하는 만족감을 원한다. 이렇게 그녀들은 휴일에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나 생산성의 관점에서 그녀들은 부질없이 에너지를 소모했을 뿐이다. 무언가를 만들지도 못했고, 돈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모성이 나를 즐겁게 한다, 평일에 잊힌 나를 되찾는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무절제한 ‘소진/소모’와 반면 합리적인 ‘축적’이라는 두 축으로 경제를 논한다. 무절제한 소진/소모는 내재적 원리를 따르고 현재의 내게 충실한 반면, 합리적인 축적은 외재적 원리를 따르며 미래의 나를 염두에 둔다. 전자는 현재의 내가 낭비하며 즐거움을 만끽한다면, 후자는 미래의 성장과 생존을 위해 금욕적이고 외재적 원리에 자신을 맡긴다. 그리고 전자를 이념으로 삼은 국가가 티베트나 아즈텍이었고, 후자는 오스만 제국이나 청교도 사회에서 나타났는데, 본 작품에서의 정상성이 후자요, 비정상적으로 치부된 여성들이 전자에 해당한다.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마틸드는 임산부다. 국가를 대변하는 그녀에게 성이란 오직 출산율, 번식, 합리성을 위한 도구임이 불룩 솟아오른 배와 성 외의 다른 유용한 방법론을 강구하라는 주문에서 나타난다. 그녀의 임신과 출산은 이에 소모되는 막대한 에너지가 그만한 대가를 불러오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프로젝트 내 실험 대상자인 세 여성의 섹스는 임신이나 출산, 즉 미래의 성장력이나 경제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이 미래의 자신, 뱃속의 타자, 이를 지시하는 종교나 국가, 즉 타율에 충실한 것이라면, 내가 직접 즐거움이나 황홀감을 만끽하는 소모적인 쾌락은 합리적인 대가가 돌아오지 않아 공허하더라도 내게 충실하다. 그런데 사회는 진실한 나를 궁핍하게 만든다. 휴일이 끝나고 여성들은 다시 별장으로 돌아온다. 먹구름이 잔뜩 껴 흐린 날씨에 비를 맞고 들어오니 그녀들은 흠뻑 젖고 우울해진다. 돌아와서 해야 하는 일은 타인을 즐겁게 하려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다 함께 먹을 과일 깎기 등이다. 그러나 영화는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무절제한 자기중심적 쾌락도 치료 대상으로 간주하되, 성장에만 치중하며 내게 소홀한 현대인들의 자기 소외도 치료 대상으로 본다. 프로젝트 내내 가사를 돕는 디안은 몸과 정신에 별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리잔을 깨트리는 실수를 한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가 장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수하는 행위에 대해서 고찰했는데, 실수는 우리의 의식이 해야 하는 일과 '정반대의 것'을 하는 것, 그것이 의식과 무관하게 불쑥 튀어나오는 사건이다. 그런데 실수는 때로는 완전히 정상적인 행위로 해석되는데, 바로 '본능 충동'이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이성에 따라서 디안은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무위하고 싶은 본능 충동은 억압된다. 그 본능 충동, 무의식이 일순간 육체에 지시하여 유리잔을 깨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 디안은 이를 청소하고, 이후 양파를 썰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한다. 내 본능에 충실하지 아니하고, 의식에 각인된 외재적 원리와 의무에 충실하다. 옥타비아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더 성공하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맡았고 독일을 떠나 캐나다에 왔으나, 정작 모국에 있는 연인 모니카와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다. 현대인인 그녀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가? 드니 코테는 언제나 그랬듯, 이를 평탄하고 따분하게 펼쳐놓는 것엔 관심이 없다. 그는 영화적 요소로 이를 가시화하는데, 본 작품의 도입부에서 도드라지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의 도입부, 텅 빈 프레임 안으로 마틸드가 걸어 들어온다. 사물인 카메라가 자유로워 마땅한 인간 마틸드를 맞추기보다는, 마틸드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물인 카메라에 맞추는 움직임이다. 이후 마틸드는 프로젝트의 목적과 규칙을 설명한다. 섹슈얼리티가 금기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자유로우나, 한편 섹슈얼리티가 아닌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라고 주문한다는 점에서 마냥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이를 말하는 과정을 프레임에 마틸드의 얼굴을 가득 채우는, 이로써 다른 여지가 지워지고 배제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한다. 이후에도 꽉 차는 것은 프로젝트의 목적에 따른, 이로써 사물화되는 개개인의 얼굴이다. 시각에는 사물화된 얼굴 외의 여지가 없지만, 그 너머에서는 새소리가 들려오며 무한한 가능성의 원천인 자연이 암시된다. 그러나 자연은 너무 멀리 있다, 시각으로 포착되지 못한다. 마틸드의 발표가 끝난 이후 유제니와 옥타비아는 담배를 피우러 야외로 나간다. 프레임에 조금이나마 틈이 생겼다. 푸르른 초록이 그녀들 얼굴 사이로 슬그머니 침투한다. 그리고 쾌락을 위한 섹스처럼 비이성적이고 무용한 담배의 즐거움을 누린다. 즉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폐쇄성은 단 하나의 얼굴이나 목적, 이로 인한 사물성을 가시화한 것이라면, 이로부터 점차 개방해가며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선택하며 즐거움을 누린다. 영화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점차 클로즈업, 미디엄숏으로 변화하여 공간을 확장하고, 이들의 휴가 기간에는 풀숏으로 육체를 포착하며, 게이샤가 축구장으로 향한 일탈이나 게이샤와 레오니의 아침 호수 산책에서는 롱숏을 사용한다. 이러한 롱숏으로 <공중보건>, <윌콕스>에서처럼 자연과 무위를 예찬하는 코테, 자연이 외재적 원리에 지배되지 않고 스스로의 내재적 원리를 따르는 것처럼, 인간도 그래야 한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개인만의 내재적 원리를 따르기 시작하며, 외재적 원리가 가능성을 차단하며 발생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작게 만들어야 할지다. 이러한 본 작품은 언어도 특기할 만하다. 휴가를 제외하고는 영화에서 그녀들의 성생활은 오직 청각으로만 둥둥 떠다니는, 기표만 있는 언어로 전달된다. 그 기표가 가리키는 기의인 시각은 직접 포착되지 않는다. 옥타비아의 연인 모니카도 그저 기표로만 존재한다.     


반면 기표가 없는, 오직 순수한 기의로서 이미지만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입주한 지 얼마 안 된 유제니가 프레임 모서리 부근에서 자위하면서 이윽고 침대 중앙으로 올라올 때, 그리고 게이샤가 축구장으로 일탈했을 때다. 특히 후자의 경우 소리는 있지만 게이샤와 남자들의 대화는 담기지 않으며,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핸드헬드와 즉흥적인 구도가 도드라진다. 거의 무성영화에 가깝게 순수 이미지를 지향한다. 기표를 통해 대신 전해지지 않고, 날 것 그 자체로 전달되는 기의, 그러나 이를 가리킬 기표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의를 가리키지 못하는 기표, 반면 기표를 가질 수 없는 기의, 이로써 허구의 기표가 되거나 기록하고 가리킬 수 없어 일순간 존재하고 사라질 기의가 곧 작품 속 솔직한 섹슈얼리티다. 반면 기표와 기의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은 프로젝트의 규칙이 담긴 기표에 따라서 행동하는 기의로서 옥타비아나 사미다. 그런데 기표나 기의, 둘 중 하나가 부재한 그녀들은 결여가 있었을지언정 자신에게 솔직했다. 그러나 사미나 마틸드는 솔직한 여성들의 표정과 달리 내내 경직된 표정을 띠고, 그들의 언어는 자신을 반영하지 않는다. 즉 그녀들은 언어는 온전치 않거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존재하는 반면, 현대인에 상응하는 마틸드나 사미는 그들을 가리키는 언어는 있으나 자신이 결여된다. 또한 사미가 아는 기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피치료자들의 자존감이 매우 낮다는 것인데, 이 기표는 피치료자로서 기의인 게이샤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즉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가리키지 않고 허위의 대상을 가리키거나, 아니면 기의를 기표에 따라서 존재하도록 왜곡한다. 물론 기표에 의해서 기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 치료자 모두 성에 능동적이다. 자신이 바라는 성적 판타지가 있다. 실현되지 않은 그것을 파트너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게이샤의 파트너는 그녀와 '약속'을 했고, 유제니가 만난 트럭 운전기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즉 강제된 왜곡이 아니라, 서로가 바라는 기표를 기의로 실현한다. 이로써 기표와 기의는 하나를 이룬다. 더욱이 상담에서 언제나 과거형에 그치며 존재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는, 휴가에서 기의로서 나타나는 레오니를 통해 현재가 되어 존재한다. (또는 레오니가 말하는 여성 학대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로만 존재해야 한다, 현실을 가리켜선 안 된다)     


즉 언어의 일치, 이와 더불어 디안은 그녀들이 스스로를 사회적인 통념에 따라 '나쁜 아이'로 명명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여전히 그녀들을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녀들을 '나쁜 아이'로 가리키는 기표가 잘못됐다는 것을, 즉 기표가 아닌 현실 그 자체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영화 속 편견에 균열이 발생한다. 정상성에 균열을 일으키는 비정상적인 그녀들은 어떠한 정상성을 교란하고 위협하는가? 일단 사미는 게이샤와 같은 섹스 중독자들이 자존감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게이샤는 사미가 제 방에 출입하고 나갈 것을 '지시', 즉 매우 능동적인 사람이다. 축구 경기장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남성에 의해 선택되지 아니하고, 자신이 즐기고 싶은 남성들을 스스로 선택하여 섹스를 나눈다. 즉 게이샤는 남성을 수동화한다. 그렇다면 게이샤를 자존감이 낮은 존재로까지 폄하하여 성을 억제하려는 이유는 그녀가 가부장적, 즉 남성 중심적 사회를 위협하고 교란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내에서 여성보다 우위에 서야 하는 남성의 권위를 위협한다. 유제니 또한 돈을 받지 않음에 트럭 운전사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경제적 우위에 서지 못하게 만들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게 만드는 존재로 전락시키지 않던가. 그녀들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 틈으로 빠져나와서 여성의 성적 자유를 실현한다. 그리고 앞서 내내 언급한 것처럼 끝없이 생산하고 성장하며 축적하는 사회, 그것이 즐겁다고 세뇌하는 사회에서 피학적일 정도로 소모적인 그녀들의 욕망, 진정한 즐거움은 억제된다. 옥타비아는 사회가 말하는 노동에 충실하다보니 모니카와 결별, 즉 사적인 위기에 처하고 그녀들의 상담을 도맡으며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녀는 교수로서 자리를 잡고 정상성에 편입한 이후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에게 충실해지려 했다. 그러나 교수가 아닐 수도 있는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에게는 솔직할 수 없는가. 이에 그녀들이 모두 휴가를 떠난 날에 옥타비아는 자기 방에서 자위를 즐긴다. 축적은 곧 생존이라면, 소모는 생명을 위협한다. 그리고 자위하는 그녀의 동공에 거대하여 위협적인 거미가 비친다. 소모에 따른 죽음을 암시하나 그것조차 즐거움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옥타비아는 자위하며 이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순간 배가 부푼 마틸드가 옥타비아의 방에 쳐들어온다. 오묘하고도 날카로운 무표정으로 옥타비아를 쏘아본다. 아마도 이는 실제가 아닌 환영이리라. 그러나 현대인은 축적을 요구하는 사회규범 속에서 낭비했다는 죄책감, 즉 환영의 눈총을 피할 수 없다. 균열을 일으켜 비정상적인 자신을 회복했으나, 사회에 속한 우리는 정상성의 감시와 검열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균열의 일대기를 코테는 여지없이 형식으로 가시화한다. 영화는 낡고 흐릿한 매체인 16mm 필름을 선택한다. 일단 흐리고 탁하며 지지직거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보이지 않는가, 솔직한 섹슈얼리티의 진실이 아니겠는가. 정상성에 의해 탁해진 비정상성을 매체로 가시화한다. 이와 동시에 드니 코테는 16mm 필름이 훼손됐다는 것을 나타내는 '그레인'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레인은 필름에 힘이 가해지고 충돌하며 발생하는 균열이다. 그렇다면 흐려지는 섹슈얼리티를 가시화하는 이 혼탁한 매체에 어떤 힘이 가해지는가, 그 힘이란 바로 그녀들의 비정상성이다. 즉 탁함과 균열을 가시화하는 매체의 선택이 인상적인 본 작품, 이와 더불어 핸드헬드에도 주목할법하다. 영화 속 카메라는 스태디캠을 이용하여 온화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정상성에 상응하는 이들이 비정상적인 그녀들을 마주하는 흔들림, 심지어 그녀들에 의해 기존 자신들의 통념과 신념에 불안을 느끼는 흔들림이 특징인데, 그래서 영화는 핸드헬드를 유지한다. 피치료자인 대상들이 오히려 의료인이 되고, 반면 의료인인 줄 알았던 옥타비아가 피치료자로서 치료의 대상이 되는 뒤집힘, 바로 그 흔들림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핸드헬드가 유달리 강조되는 순간은 치료 과정의 일환으로 보이는 카누 및 승마 시퀀스다. 상담하며 자신을 터놓기 이전, 이로써 성에 위축되어 자기에게 소외된 당시의 레오니와 달리, 게이샤와 유제니는 승마와 카누의 출렁거림, 그 자체를 만끽한다. 비정상성의 흔들림, 음부를 자극하는 쾌감, 소모/소진하며 흔들리는 상황에의 즐거움을 말이다. 그런데 사미와 옥타비아는 다르다. 그 흔들림을 안정적으로 바꾸려는 듯 카누를 몰고 승마는 배운다. 목적 없는 흔들림을 목적지가 있는 운행으로, 무용한 즐거움을 배움으로 뒤바꾼다.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양극단에 놓여있는 서로의 ‘정도’를 찾는다. 영화에서는 금욕적인 존재와 지나치게 호색한 사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지나치게 타율적인 사람들이 극단에 놓여 있다. 일단 게이샤는 지나치게 호색하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존감이 높다. 그러나 자신의 확신은 어떤 대상과 어떤 섹스를 하고 싶다는 것에 그친다. 그리고 섹스는 당연히 혼자서 할 수 없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고 주도적인 존재라 한들, 상대방의 수락이 없다면 섹스는 불발한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호색한 게이샤는 자존감이 높음과 동시에 수동적인, 즉 모순에 빠질 수 있다. 레오니는 본래 섹스에 다소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상담하며 자신을 털어놓고, 그렇게 노출한 자신을 옥타비아가 긍정해주기 전까지,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기억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나 성적 트라우마와 이로 인한 피학증을 털어놓고 그녀는 능동적으로 변한다. 다만 그녀의 피학증은 게이샤보다도 더 소모적이다. 단순히 에너지를 낭비하는 수준이 아니라, 제 육체를 훼손하고 축내는 위험에 이를 수 있다. 더욱이 레오니의 욕망은 여성을 피해자, 희생자로 전락시키는 폭력적인 남성상과 수동적인 여성상을 재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균형을 찾아야 하는 그녀들과 대비되는 존재가 바로 옥타비아다. 자신을 되찾지 못하는 존재,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정도를 찾아야 할까. 그것은 핸드폰을 줘도 평일에는 금욕을 유지하다가 휴일에 성을 폭발하는, 또 타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으며 제 기분에 솔직함과 동시에 이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소모하며 창조하는’ 유제니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가 하반신만 내놓고 거실에 나와서 꽃과 어떤 의식을 하는 모습이 옥타비아의 눈에 비친다. 보통 음부의 자극, 몸의 통각을 위해 게이샤와 레오니는 타인에게 하반신을 의존한다면, 유제니는 흡사 꽃에 음부를 갖다 대어 대화를 하는 모습이다. 아주 기묘하고 환상적인 그 의식을 정확히 규명할 순 없지만, 음부에 닿는 존재와의 거리감과 관계에 있어 섹스에 탐닉하는 여성들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확연하다. 어느 한 존재에게 쏠리기보단 동등해 보인다. 또 게이샤는 듣지 않는 사람, 언제나 말만 쏟아내는 화자다. 그녀는 레오니가 자기 얘기를 고백할 때, 이에 집중하지 않고 자리를 이탈하여 제 몸의 지시에 따라 흥청망청 춤을 춘다. 그리고 타인의 말을 단지 들을 뿐 수용하지 않는 사미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분이나 도그마에 갇혀있다.     


반면 옥타비아나 유제니는 언제나 청자다. 옥타비아와 달리 유제니는 레오니의 얘기를 굳이 들어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묵묵히 다 들어준다. 한편 청자적 태도는 화자로서 자신을 억제하는 금욕과 연관된다. 청자/화자와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언제나 남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이로써 제 몸이 원하는 휴식이 불가능한 디안처럼 말이다. 그래서 코테는 편견을 넘어서고 서로 포용하는 대화를 주문한다. 그것이 곧 영화 후반부의 디졸브, 그리고 ‘동행’으로 나타난다. 일단 휴가까지 이들은 독립적인 성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이들은 친구가 되어 함께 움직인다. 게이샤와 레오니는 푸르른 새벽 호수를 둘이 함께 산책하고, 끈적거리는 진액을 같이 만지며 고립된 섹슈얼리티를 개방하여 교류한다. 본 시퀀스는 앞선 숏인 뜨거운 모닥불에 비친 옥타비아의 얼굴과 디졸브, 즉 포개졌다. 정열적이지만 이성적인 옥타비아의 얼굴, 반면 차갑고 정념적인 색채이지만 뜨거운 그녀들의 만남은 단절되지 않고 포개진다. 분단을 넘어 합성되고, 이로써 축적하고 소모하며 이성적이면서 본능적인 ‘인간’의 총체를 회복한다. 프로젝트가 끝난 영화의 결말, 디안·사미·옥타비아는 남겨져 있고, 반면 게이샤·레오니·유제니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그간 외재적 원리에 따라 갈 곳이 있었던 정상성은 비정상성과 접촉하여 비정상적인 나를 깨운 이후, ‘내가 갈 곳’에 대한 무지를 확인한다. 일반적이었던 정상성에의 성공, 그러나 영화 말미 옥타비아와 사미의 대화처럼 정상성에의 '실패'가 일반적임을 깨닫고, 정상성에 성공하며 실패하는 내게 빈곤했음을 깨우친다. 반면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져서 사라졌던 비정상성은 다시 나타난다, 세 명이 끈끈하게 묶인 친구로서. 물론 다시 사라지지만 함께 사라지며 자기 폐쇄적이고 이기적이었던 서로는 우정이라는 사회성을 회복한다. 이렇게 코테는 여성의 욕망 전체를 치료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성에 집착하는 현대인들도 치료 대상임을 환기하고 또 지나친 쾌락의 시대, 이로써 자신밖에 모르는 시대에서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깨고 나오는 것이 치료이되, 쾌락 그 자체는 이성의 시대에서 구제 대상임을 역설한다. 극단의 시대 속에서 정도를 찾을 것을 주문하는 작품, 여성의 금기시된 성을 다뤘다는 점에서 <님포매니악>이 연상되는 작품, 코테의 실험적 형식이 흥미로운 작품, 다만 볼륨에 비해 헐거워지는 후반부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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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10 집에서(MUBI 스트리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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