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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15. 2023

크리스토퍼 보글리, <해시태그 시그네>

신인류는 어디에서, 누구로 사는가?

크리스토퍼 보글리(Kristoffer Borgli), <해시태그 시그네>(Sick of Myself) 

- 신인류는 어디에서, 누구로 사는가?    

“사물들의 형상이 ‘이미지’가 되는 것은, ‘대상과 비슷하지 않다’는 조건을 만족시킬 때뿐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21세기의 인류는 유례없는 번영과 풍요를 만끽하고 있다. 물질이 범람하다 못해 홍수까지 일으키는 오늘날, 그런데 인간의 정신성은 그 어느 시대보다 상스럽고 빈약하다. 오늘날의 인류는 다수가 '무력감'을 느낀다.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주장이다. 내적으로 빈곤한 이들은 자신이 특정한 일을 할 수 없다고 좌절하며,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조차 못할 것처럼 두려워한다. 이러한 자신감 결여는 흡사 전염병처럼 확대되는데 현대 사회가 이를 방치한다. 현대 산업은 사람들의 무한한 소비에서 이윤을 창출하기에 소비자는 항상 결핍을 느껴야 하고, 신생 산업인 SNS 또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류에게서 수익을 끌어낸다. 이를 위해 개인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오직 소비와 타인의 시선 등 ‘의존’으로만 결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무한히 선전한다. 하지만 의존은 내적인 생산성을 성장시켜주지 못한다. 무한 소비하고 외부에서 무언가를 빌려오는 사람들은 영영 내 것이 궁핍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무한 소비와 타인의 시선에 의한 페르소나가 아니라, 진짜 나를 되찾아야 한다. <해시태그 시그네>는 바로 이러한 현대 사회의 전형적인 인간을 탐구한다. 1985년 오슬로 태생의 크리스토퍼 보글리는 노르웨이의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국의 영화감독, 요아킴 트리에가 <리프라이즈>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 보여준 현란한 연출과 유사한 형식을 이어가는데, 장편 데뷔작 <드리브>에서 아주 다채로운 매체와 푸티지를 아카이빙하고 인서트하는 연출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형식성, 탐미주의는 ‘형식을 위한 형식’에 그치지 않는다. 보글리가 인서트하는 보도 영상, 푸티지 등은 단일하고 확고한 믿음에 균열을 내어 의심을 불러온다. 그 균열은 백인에 의해서 형성되는 프레이밍을 깨부순다. <드리브>의 주인공은 이란에서 노르웨이로 이주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아미르라는 코미디언이다. 아미르의 개그는 일반적인 현실과 비교해서 부조화하거나 터무니없는데, 즉 그는 기존의 범주를 위반할 때 웃음이 발생한다는 '부조화 이론'에 근간을 둔다. 그가 위반하는 기존의 범주는 일반성, 보편성, 통념, 선입견 등이다.      


미술을 전공한 아미르는 일반적으로 현실/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뉘고 후자에 속하는 ‘미술관’을 졸업 전시에서 현실에 편입하며 기존의 통념을 위반했다. 보통 가상의 예술들은 허구이기에 범죄가 난무하더라도 경찰이 충돌하진 않지만, 아미르는 경찰을 출동시키는 실제 마약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아미르는 ‘진짜일 수도 있는 예술’을 시도하며, 예술의 영향이 현실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친다는 것을 체감시킨다. 이후 아미르는 바이럴 비디오를 제작하며 크게 유명해졌다. 일반적으로 북유럽에서 중동 이민자들을 혐오하거나, 그들에 대한 특정 편견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주체는 백인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를 미술관과 달리 ‘진짜’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미르는 자신이 촬영, 퍼포먼스의 당사자가 되어 직접 북유럽 내 이민자들에 대한 인식, 처우를 영상으로 기록한다. 아미르는 백인들한테 시비를 붙이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등 기존 이민자들의 통념을 재생산하나, 그 이후의 모습은 백인들에게 쉽게 진압되며 자신이 약자라는 피해의식에 찌들어있던 백인들의 모순을 끄집어낸다. 즉 아미르는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현실의 가상성을 폭로하여, 그 가운데서 진실을 찾는 코미디언이다. 이후 아미르는 DRIB라는 허구의 에너지 음료 회사와 광고 계약을 맺는다. 광고 영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아미르는 감독들의 연출을 거부하고, 자신을 인터뷰하는 기자의 규칙 또한 부정하며, 타인에 의한 내가 아니라, 자신에 의한 나를 유지한다. DRIB라는 에너지 음료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광고 영상에 가깝지만 그 광고는 현실의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 그 자체로 독자적인 이미지다. 그리고 아미르를 캐스팅한 DRIB 내의 문화산업 당사자들은 모두 백인이고, 아미르는 문화산업의 마약을 들이키며 백인들에게 현혹된다. 이후 백인들은 당돌한 타자였던 아미르를, 무기력하게 폭행당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연출한다. DRIB 영상의 DRIB가 현실의 무언가를 가리키지 않는 것처럼, 영상의 아미르는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나 실제의 아미르와는 거리가 까마득하게 먼 이미지일 뿐이다. 이러한 착취 속에서 보글리는 가상을 만들고 유포하는 스튜디오의 ‘유리문’을 깨트리고, 현실을 향해 과감하게 뛰쳐나갈 것을 촉구한다.      


즉 보글리는 있을 법하고 그럴듯한 이미지들의 허구성을 혼을 쏙 빼놓는 연출과 문화산업의 이면을 탐구하며 폭로하고, 이를 통해 그들이 바라는 '페르소나'에 의해 대체되었던 실재를 회복하는데, 이러한 탐구가 <해시태그 시그네>에서도 이어진다.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짓 페르소나는 진짜 자아와 거대한 괴리를 자아낸다. 보글리는 그것을 '탈 육체'로 진단한다. 영화 속 시그네는 넌덜머리가 나있다. 손님들은 바리스타인 시그네에게는 관심이 없고, 커피를 마시거나 자기 할 일에 몰두한다. 또 퍼포먼스 예술가 토마스의 연인으로서 그녀는 그에게 부속품, 짐짝 정도로 치부된다. 그런 와중에 시그네는 카페에서 '개 물림 사고'에 휘말렸다. 그녀는 다치지 않았지만, 출혈이 심한 피해자를 돕다가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시그네를 걱정하고 염려한다. 본래 그녀가 멀끔한 일상적인 상태에서는 '따분하고 평범한 자신', 타인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일용직에 머물렀다면, 순식간에 피해자를 말리기 위해서 용맹하게 달려든 특별한 '영웅'으로 주목받아 ‘용기’라는 영향력을 주변에 설파한다. 그리고 토마스의 전시 오프닝에서 그녀는 손님들 중 유일하게 알레르기가 있는 척 연기를 한다. 시그네는 호흡이 가빠진 것처럼 사람들을 기만하다가 이윽고 쓰러진다. 알레르기가 있는 그녀를 위해 손님들은 조심히 배려해준다. 즉 기존 육체를 변형하면 사람들은 관심을 주고 이는 ‘이익’과 ‘의미’로 이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행색이 멀쩡한 상태에서의 연기에 그쳤다. 그녀를 포착하는 온유하고도 매끄러운 스테디캠의 상태에서 핸드헬드로의 간접 전환이었다. 그 핸드헬드는 기만이었다. 실제로 시그네는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그러나 불안정하고 현기증 나는 핸드헬드를 시그네는 이제 사실로 만든다. 시그네는 거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를 자극한다. 고의로 개 물림 사고를 일으키려 한다. 개에게 물려서 얼굴이 훼손되고 피가 줄줄 흐른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 따가움과 시큰거리는 고통, 피가 엉겨 붙어 끈적거리는 불쾌감, 그러나 시그네는 이를 개의치 않는다.  


개 물림 사고를 빙자하는 데 실패하자 이후 그녀는 러시아에서 피부 및 신경계를 손상시켜 금지된 약물 '리덱솔'을 밀반입하여 과다 복용한다. 단순히 용모가 추해지는 것을 넘어서, 목 넘김이 불편하고 다리를 절게 돼 걷기 어려워지며, 온몸에서 출혈이 발생한다. 그러나 시그네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는 극단적인 고통도 감내하는 시그네를 '마조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극단적으로 SNS와 타인의 시선에 집착하는 오늘날 사이버스페이스에 살고 있는 ‘신인류’들을 시그네와 마찬가지인 마조히스트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그네는 리덱솔에 의해 느끼게 될 통증 대신에 오직 ‘보이는 것’에만 집착한다. 여기서 그들을 규정하는 마조히스트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개념에 근거한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학자에 따라서 나뉘거나 나뉘지 않는다. 사도마조히즘이라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합쳐서 주장하는 학자들은 사디즘의 변태성을 속죄하기 위해서 마조히즘이 도래하고 이윽고 그것이 승화되면 다시 사디스트가 되기에,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하나로 엉켜서 순환한다고 본다. 그러나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메커니즘이 각기 다르다고 분석한다. 사도마조히즘이라고 묶이는 것이 ‘복합성’이라면, 들뢰즈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은 분리되어 있고 그저 '상호보완성' 수준에 그친다고 말한다. 들뢰즈가 분석하기에 사디스트는 일차적 자연을 파괴하여 제도적인 악을 실현하려고 '논증'하는 반면, 마조히스트들은 굴욕적인 상황을 바랐고 이를 감당 및 즐겼으나 그 사실을 부인하고 현장에서 이탈하며 반대 방향에 놓인 피해자로서의 쾌락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사디스트는 자신이 논증하는 순수한 관능의 입증 가능성을 엿본다면, 마조히스트들은 변증법을 통해 현실 세계를 무효화하고 꿈속으로 도약한다. 그리고 양자는 서로의 언어를 구사하지도 않고, 또 공통된 이데아를 지향하지도 않기에 분리되는데, 바로 시그네가 들뢰즈의 마조히스트의 전형이다. 영화 초반부에 시그네는 중앙구도에서 포착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단에 놓인다. 그녀 얼굴 위로 헤드룸이 거대하다. 즉 그녀는 현실 세계가 권태롭고 어딘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많다.      


모두 다 SNS로 과시하는 시대, 스펙타클한 사회 속에서 나 혼자 초라하다고 느끼는 심리를 보글리는 헤드룸으로 가시화하고, 시그네는 피학으로 빈곤한 현실을 무효화하여 꿈속으로 도약한다. 마조히스트인 시그네는 고통을 기꺼이 참아내고, 또 고통을 의도한 자신을 부정한다. 그녀는 가해자나 주체가 아닌 피해자로 넘어선다. 고통을 바란 상태에서 피해자로 도약하면 사람들은 병문안을 와서 ‘꽃’을 가져다주고, 토마스는 시그네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려와줘야 하며, 자신의 얼굴이 이상해도 토마스는 그녀와 섹스를 하며 시그네는 쾌락을 누린다. 또 알레르기에도 구애받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미지로 손님들에게 영향을 발휘하거나 그들에게 배려 받을 수 있으며, 불가사의한 병에 최초로 걸린 연구대상이 되어 인류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익은 속이고 ‘훔친 것’이다. 토마스는 절도범이고, 시그네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 이미지를 훔친다. 연인들이 훔친 이미지만 마주하는 사람들은 절도 이전의 실제에 다다르기 어렵다. 영화는 이를 편집으로 보여준다. 시그네가 개 물림 사고를 맞닥뜨린 시퀀스에서는 컷이 아주 잦은데, 그 중에서도 시그네가 ‘물러서!’라고 외친 숏을 아예 도려낸다. 친구들에게 사실은 전해지지 않고, 영화는 현장의 당사자들만 아는 것을 감상자에게만 몰래 보여준다. 즉 대담하게 ‘편집’하여 현실을 재구성하는 '영화적인' 시퀀스로는 시그네의 진실에 닿을 수 없다. 시그네가 스티안에게 리덱솔을 요구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스티안의 노트북에 나타난 리덱솔을 영화는 아주 짧게만 보여준다. 너무 빨리 지나가서 리덱솔에 대한 정보에 닿을 수 없다, 그것이 실체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오늘날 다만 그럴듯하게 존재할 뿐인 이미지의 속성이랴. 개 물림 사고를 빙자하다가 탄로 난 시그네는 견주에게 '썅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썅년인 그녀의 실제는 전달되지 않고, 훔쳐온 이미지에 의한 이익을 시그네와 토마스가 누린다. 물론 오롯이 이익은 아니다. 시그네가 리덱솔을 복용하는 과정은 목에 넘겨 내려가거나, 동글동글한 알약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그것에 의해 잠이 든 시그네가 고개를 떨구거나 널브러지는 '하강'의 형식에 담긴다. 즉 이미지를 위해서 현실이 아래로 침잠한다.       


또 리덱솔 부작용에 의한 시그네의 얼굴은 매우 흐물흐물해진다. 원하는 이미지는 탄탄하게 쌓아올려 가지만 현실은 흘러내려간다. 현실을 가리킨다고 '믿는' 이미지에 가치를 부여하는 오늘날, 이에 현실이 이미지를 위해 힘없이 추락하고 있다. 현실에서 못 걷게 되더라도, 그로 만들어낸 이미지에 따른 이익이 더 거대하다. 그래서 도입부, 식당의 웨이터는 2300달러짜리 와인을 훔친 스티브를 바삐 쫓아가다가 이윽고 쭈뼛쭈뼛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돌아간다. 와인을 되찾는 이익보다, 파인다이닝에서 2300달러에 전전긍긍하는 이미지가 더 손해이랴.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로 이어지는 세계를 영화 초반부 낙담한 시그네의 '페이드아웃'으로 가시화한다. 꿈이 마냥 실현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의 불발에 현실이 검은 페이드아웃으로 중단되는 것, 거짓의 연속이 일반적이고 진실의 연속이 비일반적인 것으로 오늘날에 뒤집힌다. 본래 그녀의 육체가 온전하던 당시, 그녀 의식에 가능한 '인서트'는 ‘플래시백’으로, 토마스의 절도 등 가능했던 기억, 한때 현실이 지리멸렬하게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시그네는 알레르기가 유발된 척 연기하고, 리덱솔을 이용해 육체를 훼손한다. 이후 인서트되는 것은 ‘꿈’, 곧 불가능한 것이다. 장례식에서 많은 사람이 바글거리고 아버지는 입장 못하는 망상, 언론에 출연하여 아버지와 아니에에게 사과를 받는 꿈, 모델로서 출세하여 토마스가 자신을 우러러보며 매달리는 욕망, 자서전이 대박나서 토마스와 안락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 침투, 삽입, 이어진다. 즉 마조히스트는 육체를 훼손하고 파괴한 대가로 불가능한 꿈을 실현하고 연속하고자 한다. 그렇게 꿈은 불가능에서 서서히 가능으로 뒤바뀌지만, 한편 이를 위해서 불가능으로 희생시킨 것은 현실이다. 시그네는 현실의 생활을 괄시하고, 진실을 외면한다. 그래서 시그네의 무의식은 불가능한 현실을 반영한 악몽을 꾼다. 녹아내린 피부가 식탁에 흡착되어 떼어내다가 뜯기는 꿈, 스티안에 의해서 진실이 탄로 나는 꿈을 말이다. 그리고 현실/꿈 간의 경계가 확연했던 인서트는 더 무차별적으로 이어지고 잘라져 현실을 교란한다. 꿈이 현실이 되고, 반면 현실이 꿈이 되며, 양자가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것이 곧 꿈과 같은 매스미디어, SNS에 천착하는 오늘날 그 자체다.      


이렇게 꿈에 다가서는 만큼 현실에 더는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걸음이 불편하고 목숨이 위태로워 드러누우며, 꿈인 것이 폭로될까 봐 거짓말을 일삼고 병원에서 검사를 받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시그네를 맡고, 또 <닌자베이비>로 유명한 크리스틴 쿠야트 소프는 '배우'답게 '연기'를 한다. 그러나 배우이자 실제로 의학을 전공한 앤더스 다니엘슨 리는 의사로서 시그네의 '진실'을 폭로한다. 즉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와 ‘의사로서도 진실일 수 있는 존재’를 캐스팅하며 자아내는 대비가 인상적이며, 오늘날은 의사라는 진실이 시그네의 꿈으로 전락하는 역전의 시대다. 또 영화에선 줌인/줌아웃의 사용이 인상적이다. 도입부의 시그네는 생일을 맞았고 토마스가 아주 비싼 식당에서 저녁을 선물해주고 있기에 마땅히 '귀인'으로서 주목받길 원한다. 시그네가 원하는 데로 토마스와 웨이터, 심지어 다른 손님들의 시선까지 독점할 때 영화는 줌인으로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선다. 흡사 그녀에게 모든 시선이 쏠리는 상황을 가시화하듯. 또 청각은 시그네와 토마스를 포착하더라도 시각은 다른 손님들을 비추던 카메라, 이 또한 시그네에게 되돌아온다. 각자 얘기하는 손님들의 청각까지도 시그네의 생일 축하를 위해 모여든다. 그러나 줌인이 언제나 가능하진 않다. 토마스는 빈털터리다. 값비싼 와인을 주문했지만 이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도주한다. 공범 시그네는 눈에 띄어선 안 된다. 그래서 줌아웃이 동반된다. 가까이 다가갈 만한 것은 이미지, 반면 서서히 귀인 시그네라는 ‘이미지’에서 멀어져 ‘현실’이 보인다. 그 누구의 주목도 받아선 안 되고, 또 주목하지도 않는 현실이다. 다시 헤드룸은 많아진다. 토마스의 전시 오프닝도 마찬가지다. 전시를 오픈한 주체가 토마스인 만큼 그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해서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 토마스가 추악하게 절도하면서 이를 아름답고도 대단하게 포장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함께 절도에 동반한 자신의 현실은 여전히 빈곤한데, 토마스만 풍요로운 것도 꼴사납다.      


그래서 알레르기가 유발된 척 연기한다. 웨이터가 언제나 특별 주시해야 하는 사람, 식탁에 있는 사람들이 보호하고 염려해주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자신은 아주 멀쩡하지만, 그 너머의 가련한 희생자가 되며 줌인으로 빈곤하던 헤드룸은 아주 꽉 차게 된다, 사람들의 연민에 의한 이익이 들어찬다. 즉 그녀는 이미지로 유명해져서 사람들에게 줌인되길 바란다. 외에도 토마스가 D2 잡지를 촬영할 때, 절도범이 예술가라는 이미지로 포장될 때, 줌인이 사용된다. 반면 줌아웃은 스티안이 시그네가 방문한 것을 확인했을 때 사용되는데, 아마도 스티안이 시그네에게 자위 영상을 보낸 사실을 어떤 거짓말로 무마할지, 즉 진실에서의 멀어짐을 보여주는 연출이랴. 이후 시그네는 단순히 친구들, 내빈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언론과 인터뷰하고 자서전을 광범위하게 출판하며, 모델이 되어 전광판에 걸리는 등 만인의 시선을 받아 이익을 누리고 싶다. 시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사르트르와 푸코, 그들에게 시선은 자유와 주체성을 잃게 만드는 따가운 눈총이다. 타인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몸은 수치심을 느끼고 전전긍긍한다. 내 몸으로서 자신만만할 수 없고, 타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교정을 시작한다. 이는 교도관들이 감시하는 시선에 범죄자들이 불응했을 시 징벌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에도 반영되는데, 즉 누군가의 시선에 들어맞지 않으면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한편 그만큼 시선에 합당한다면 이익이 따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그네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변형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마조히스트인 그녀가 스스로 규정·지배한다. 대신 그 시선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페르소나에 안정감과 타당성을 부여하며 이익을 얻는다. 영화에서도 시그네가 시선을 누릴 때, 슬로우 모션으로 포착되어 기존 시간에 비해 느려져 안정감을 띠지 않던가. 따뜻한 난색이 가득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녀는 시선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봐주길 원하는가, 슬로우 모션이 표현하는 황홀감은 어떤 것인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 영화 속 젠더에 주목해볼 법하다. 일단 남성들, 시그네가 마조히스트라면 토마스는 사디스트다. 그녀에게 물리적으로 폭력을 가하진 않지만, 현실의 기존 법에 테러를 가한다. 그는 미술관을 뛰쳐나온 퍼포먼스 예술가로, 캔버스나 하얀 종이에는 그리거나 표현할 수 있는 절도를 현실에서 대담하게 감행한다. 이후 장물을 작품으로 미술관에 전시한다. 토마스는 그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듯 매스미디어에 자신과 작업을 반복 노출한다. 즉 토마스는 자신의 악덕을 합법적이고 보편적인 제도로 만들고자하는 사디스트, 꿈과 망상에 잠겨 사는 시그네와 달리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 도래시키고자 하는 사디스트다. 사디스트는 당연히 공격적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않는다. 타인을 가학하며 느끼는 자신의 이기적인 쾌감이 우선이다. 토마스는 둘은 곧 하나라고 억지를 부리며 그녀가 보여주기 싫다는 노트북의 내용을 굳이 들춰내고자 질척인다. 개 물림 사고에 휘말린 시그네가 피범벅이 되서 돌아왔을 때,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중국음식을 시키겠냐며 질문할 뿐이다. 그마저도 2인분 이상 배달이 가능하기에, 즉 자신이 중식을 먹기 위해서 시그네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녀를 걱정하기보단, 그녀의 병이 감염 가능성이 있는지 자신만 염려하고, D2 잡지를 자랑하고 싶어 병실에서까지 안달이다. 이는 시그네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로, 아니에를 제외한 여성 친구들과 엄마는 시그네의 문병을 온 반면,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시그네가 자신의 기사가 게재된 것을 확인하기 위해 펼친 지면에서는, 어느 한 가장이 아내와 아이들을 잔혹하기 총기로 살해한 사건이 메인을 차지하였다. 즉 영화 속 남성은 공격성을 논증하여 구성원을 통제하는 사람이며, 공감할 줄 모르고 타인을 지배·소유한다. 그리고 남성의 공격성과 지배력, 이에 동반되는 과한 힘이 필요한 이유를, 취약하고 나약할 것을 강요받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수동적인 전근대적 여성상에 두는데, 시그네가 꿈에서 망설이는 여성상이 바로 수동적인 여성상이다.     

 

시그네가 퇴원하여 돌아가는 버스에서 한 승객이 토마스와 그녀를 본다. 그리고 토마스는 취약한 시그네를 리드하는 남성을 연기하고, 시그네는 그에게 기대는 여성이 되어 시선을 흡수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 여성성에 부합하며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시그네도 영웅을, 여성에게 불가능했던 남성성을 꿈꾼다. 그녀는 개 물림 사고 당시 다가서는 손님들에게 '물러서'라고 외친 이후 혼자서 사건을 수습했으나, 정작 친구들에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는데 자기 혼자 나섰다며 능동성·주체성·용기를 과장한다. 또 시그네는 토마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를, 즉 그를 지배하기를 바란다. 토마스가 'DAMAGE'라는 영어 단어로 전시 제목을 붙이려고 하자, 그녀는 왜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어를 쓰지 않느냐면서 딴지를 건다. 이후 토마스는 '파손'을 의미하는 노르웨이어로 전시 명을 바꾸며 시그네는 남자친구에게 영향력을 발휘한다. 모델이 된 이후에는 자신이 토마스를 업신여기는 꿈을 꾸고, 또 자서전을 출판하여 여성인 자신이 사회적 롤모델이 되길 갈망한다. 이와 동시에 그녀가 그리는 상이 피해자·희생자·‘취약한 여성’의 상이다. 그녀는 언론에서 인터뷰하는 꿈을 꾸지만, 결국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버지의 사과와 인정이다. 자신의 장례식에 입장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상상할 때도 가해자의 후회와 죄책감을 갈망한다. 토마스의 들러리로 전락한 시그네는 분명 토마스를 넘어서는 능동적인 여성으로의 도약을 꿈꾸나, 이와 동시에 강인한 남성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취약해야 하는 여성상도 꿈꾼다. 그녀가 최후에 되고자 하는 것이 오직 아름답고 예쁘기 위한 목적으로 노출되는 '모델' 여성인 것처럼 말이다. 모델은 본 작품에서도 스스로 촬영이나 옷, 용모를 규정할 수 없고, 자신을 캐스팅한 에이전시에 의해 선별된다. 즉 수동적이다. 이렇게 바라봐질 수 있다면 죽음조차 불사하는 여성의 꿈은 방황한다. 영웅이 되길 바라지만 이 와중에 조심스럽게 배려받길 원하는 전근대적 여성의 욕망이 공존하고, 또 영웅은 타인의 인정으로 형성되기에, 그 과정에서 여성을 인정하는 남성을 열망하며 여성 영웅은 수동적으로 전락한다. 남성의 시선을 끄는 취약함을 답습한다.      


시그네는 이러한 꿈을 보기만 한다. 영화에서 때때로 시그네의 동공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만질 수 없고 그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범람한다. 보글리는 <드리브>에서도 현실과 흡사하지만 단지 볼 수만 있고 현실에 대응하지 않는 예술에 우려를 표하지 않았었나, 본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35mm 필름을 사용한다. 촬영이며 매체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와 아주 흡사한 분위기를 구성한다. 양자 모두에서 동원되는 35mm 필름은 북유럽의 차갑고 건조한 색채를 효과적으로 강조한다. 또 35mm 필름은 16mm 필름이나 8mm 필름에 비해서 현실의 명확한 윤곽선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 뿌옇고 어슴푸레한 감이 있지만 이들보다는 선명하다. 현실과 유사하면서 색감은 아름답게 부각한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서는 그러한 미장센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정서를 가시화했고, <해시태그 시그네>에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35mm 필름으로 매개된 듯한 아름다운 이미지로 뒤덮인 현실에 살아가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해시태그 시그네>의 35mm 필름이 좀 더 많이 자글거린다는 점이다. 그레인이 자주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레인은 현실과 아주 흡사한 영화가 끝끝내 가상임을 폭로하는 매체적 한계다. 아무리 현실과 흡사해도 특정 매체로 아스라하고도 신비롭게 미화된 것, 특정 순간만 포착된 이미지는 현실과 오롯이 대응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의심하라는 단초가 바로 현실에 비해 흐린 질감과 물질의 훼손을 암시하는 필름에 낀 그레인이다. 구 예술인 회화, 조각은 비교적 현실과 분리되었다. 모더니즘 시기에 회화와 조각은 그들이 속한 상징 공간에서의 고독을 택하며 그들 자신의 본질을 추구했지, 현실의 무언가를 가리킬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모더니즘을 반성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미술관의 문이 활짝 열리다 못해, 현실과 경계를 긋는 창과 문을 모두 허문다. 또 회화나 조각과 달리 현실과 아주 흡사한 사진과 영상, 그러나 현실의 오직 일부, 찰나의 진실만 반영하거나 그마저도 진실이 아닌 이미지들이 무한 복제되며 현실을 뒤덮는다.      


즉 현실과 흡사하나 실제론 거짓인 이미지들이 범람하며 현실을 대체한다. 토마스의 경우 미술관을 뛰쳐나온 예술가, 시그네는 이미지로 현실을 대체하는 오늘날 SNS에 탐닉하는 인류의 전형이다. 토마스는 예술성이라는 명목으로 현실에서는 불법인 절도를 합리화하고, 시그네는 그럴듯한 화술로 개 물림 사고의 전말, 알레르기, 동물 학대, 리덱솔을 은폐·왜곡한다. 그러나 시그네가 화보를 촬영하는 미술관의 '웃는 조각상'은 '찡그리는 시그네'에 대응하지 않고, 또 통통 튀는 맹랑한 '배경음악'은 화장실에 갇혀서 사람을 부르는 '프리다의 목소리'를 은닉하기에, 예술은 현실에 진실로서 대응하지 않는다. 절도 퍼포먼스로 잡지까지 실린 토마스는 결국 체포된다. 패션계는 장애인들과 약자, 소수자,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을 공격적으로 캐스팅한다. 그들은 모델이 된 사람들의 부작용이나 병에 책임이 없다고 고지한다. 그래서 프리다가 사라지고 시그네에게 출혈이 발생하더라도 손을 놓고 방치한다, 예술만을 위해서 현실은 어수선하다. 에이전시에 고용된 시각장애인 노라를 위해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설계된 장소를 배려하지 않는다. 즉 오늘날의 예술은 약자, 소수자를 배려하는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배려가 대응하지 않는다. 배려라는 이미지일 뿐이다. 또 시그네의 얼굴을 그대로 촬영하지 않고 비장애인의 얼굴과 유사하게, 명확함과 질서를 요구하는 미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메이크업한다. 조각이 많은 미술관에서 촬영하는 시그네는 흡사 조각처럼, 그들이 요구하는 예술을 위해서 몸이 굳는다. 대사는 "시선을 무시하고 자신이 돼라."고 말하지만, 정작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예술계에서 시그네는 자신으로서 죽는다. 이렇듯 보글리가 예술이 현실을 대체하는 상황을 염려하는 이유는 ‘자기중심성’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자기가 바라는 표상을 상상한다. 거기에 타인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가 본인에겐 선하고 타인에겐 거짓이거나 악하다. 그런 예술가의 표상이 현실에 실현될 시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 해를 끼치며, 교란과 분열을 일으킨다.  


또한 예술이 현실을 잠식한다한들 현실 전체를 잠식할 수 없고, 삶의 진실은 잠식되지 않은 현실에도 있으므로, 예술에 따른 희생은 결국 삶의 몫으로 돌아온다. 시그네의 꿈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현실을 초탈하는 허무맹랑한 꿈, 다른 하나는 자신의 현실에서 비롯한 피부 괴사, 스티안을 통제하지 못한 ‘악몽’이다. 마조히스트가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고 넘어서더라도, 그들의 꿈 한쪽은 몸이 속한 현실을 반영한다. 사디스트 토마스가 끝없이 현실을 부정하고 악덕의 보편화를 논증해도 그는 체포된다. 지금까지 이미지와 관계 맺었다는 것에 분개한 마르테는 시그네의 곁을 떠나며, 두 ‘관종’의 도구로 전락한 잉베와 엠마도 그들의 표상에서 떠난다. 아무리 진짜 같아도 결국엔 가짜, 그것으로 창출한 가치도 빈곤하고 가볍긴 매한가지다. 가벼운 껍데기는 흩날려 사라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희생으로 난도질당한 현실일 뿐이다. 영화의 결말은 현실에 속한 인생을 사랑하라는 것, 물론 여전히 현실의 삶에 만족할 수 없어 다시 꿈을 꾸는 시그네와 현대인들, 오감 중 오직 간접적인 감각에만 집중하느라 직접 느끼는 감각을 괄시하는 우리는 여전히 길을 헤매겠지만… 이렇게 보글리는 <스웻>이나 <화이트 노이즈>처럼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을 잠식하는 오늘날을 우려하는 영화의 계보를 이어간다. 이들 작품과 비교해서 간접적이고 가상적인 이미지에 몰두한 나머지 직접적인 육체의 괄시, 젠더에 따른 시선의 차이, 이를 예술과 함께 엮어서 탐구한 진지함이 강점이나, 다만 한계라면 연출이 지나치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적절한 형식, 다만 덜 참신하다. 여하간 그럼에도 꽤 탁월한 통찰과 번뜩이는 형식으로 반짝이는 영화, 그러나 현혹되지 말지어다. 그레인을 만들어내는 풍파 가득한 현실로 되돌아가야 하는 우리는, 제 몸을 파괴하는 취약한 여성상과 마조히스트여선 안 된다. 또 동공만이 익스트림 클로즈업되는 세계에서, 사람들끼리 손을 잡은 세계, 이로써 촉각이 담긴 결말의 롱숏으로 회귀해야 할지다, 상담소에서 말하듯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주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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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15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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