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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19. 2023

사뮤엘 테이, <소년, 조니>

생애 초기의 연인

사뮤엘 테이(Samuel Theis), <소년, 조니>(Softie) - 생애 초기의 연인     

“의식적인 모든 것은 약화된다. 무의식적인 것은 영속한다. 그러나 한 번 해방된 무의식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이들은 저 자신에게 솔직한 존재다. 어떠한 교육도 거치지 않은 아이들은 오직 자신의 욕구밖에 모른다. 왜 보호자가 욕구를 제지하는 것인지, 또 왜 마음대로 욕망해선 안 되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몸에 관한 관심이 서서히 약화되고, 외부로 관심이 트이기 시작하며 남을 이해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로는 자신의 욕구밖에 모르던 '남근기'를 거쳐서, 사회성과 우정을 길러가는 '잠복기'로 규명할 수 있다. 잠복기 시절의 아이들은 분명 사회적으로 미숙하지만 그 어떤 나이대보다 외부에 몰두한다. 이후 사춘기를 거쳐서 다시 내게 모든 이목이 쏠리고, 이후 내재적 원리와 외재적 원리를 조화롭게 사용하는 성인으로 거듭난다. 사뮤엘 테이의 신작, <소년, 조니>는 격동의 잠복기를 보내고 있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생식기가 주문하는 욕망을 넘어선 소년은 외부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런 소년에겐 과연 어떤 현실과 스승이 필요할까. 1978년 포르바크 태생의 사뮤엘 테이는 프랑스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다. 사뮤엘 테이는 마리 아마슈켈리-바르사크, 클레르 뷔르게와 함께 연출한 <파티 걸>로 장편 데뷔하였고 2014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였다. 총 세 명의 공동 감독이 함께 연출한 작품이니만큼, 어느 하나를 콕 집어서 누구만의 특성이라고 간주할 순 없겠지만, 두 공동 감독과 함께 사무엘 테이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결합한 리얼리틱한 형식을 통해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픽션을 선보였다. 본 작품의 주인공은 늙은 카바레 접대부다. 그래서 영화의 배경은 당연히 카바레로, 여성을 훑는 '남성의 시선', 그들에게 간택되고자 춤추고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을 교차하며 권력관계를 드러내고, 젊은 여성들과 늙은 여성들의 처지도 대비한다. 젊어서부터 접대부였던 늙은 여성들은 현재에는 수입이 썩 좋지 못하다. 그럼에도 남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며 가부장제를 교란한다. 부도덕하다는 오명도 씌워지지만, 그들은 한 남성이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이고, 남성들에게 선택됨과 동시에 남성을 선택하여 성과 쾌락에 주체적이며, 그녀들의 이름으로 자본을 축적한다.      


즉 <파티 걸>은 가부장제에서 부도덕한 프레임이 씌워지지만, 오히려 여성주의 관점에서 능동적인 접대부의 삶을 고찰한다. 늙은 접대부 중 한 명인 앙젤리크에게 미셸이란 손님이 구애하고, 늘그막에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자유롭게 옷을 입던 그녀가 미셸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또 능동적으로 목적지를 선택하던 그녀가 미셸의 모임에 수동적으로 따라다니며, 가장 남성이 자랑삼아 내세우는 소유물로 전락된다. 앙젤리크는 결혼을 위해서 자녀들과 연락하고 '어머니의 언어'로 어렸을 적 입양을 보낸 딸 신시아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어색하다. 또 그녀를 위해서 시간이나 돈을 쓰지 않는 미셸이 쪼잔하게 느껴진다. 정작 그녀는 그를 위하기에 불평등하다. 젊어서부터 일을 한 그녀는 전남편이 무슨 일을 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즉 자유로운 여성의 시선에서 결혼은 여성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경제적 타협’, ‘자기 언어가 아닌 행위’다. 결국 앙젤리크는 미셸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길거리와 카바레로 되돌아가는데, 가부장적인 결혼제도에 때 묻지 않은 앙젤리크와 <소년, 조니> 속 조니의 공통점은 이념이라는 필터가 덧씌워지지 않은 순수한 시선과 자유가 아닐까? 바로 그 시선으로 사뮤엘 테이는 그의 두 번째 장편, 연출을 혼자 맡은 첫 번째 작품에서도 사회를 바라본다. 일단 테이는 <파티 걸>의 유산을 일부 이어온다. 그럼으로써 여러 감독이 함께 공동 연출한 <파티 걸>에서 자신의 색채가 무엇인지 규명한다. <파티 걸>에서 접대부로서 능동적인 삶을 포기하고 결혼한 앙젤리크가 수동적이고 보편적인 삶으로 '이사'가는 것이, <소년, 조니>에서 아버지 혹은 융 부인의 연인과 함께 있고 싶은 조니가 어머니에 의해 원치 않는 포르바크로 터를 옮기는 이사로 이어진다. 즉 <파티 걸>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특히 늙은 여성이 자유를 포기하고 보편적인 남성의 세계로 편입하는 것과 <소년, 조니>에서 선택권이 없는 10살짜리 어린이 조니가 어머니가 선택한 세계로 강제 편입되는 것은 서로 닮았다. 이로써 <파티 걸>에서처럼 순수한 개인을 저지하게 만드는 불순한 사회, 구조,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고찰한다.      


이렇게 구성, 탐구 면에서도 닮아있지만, <파티 걸>에서 앙젤리크를 맡은 앙젤리크 리첸버거가 단역으로 초반에 깜짝 출연하고, <파티 걸>처럼 본 작품의 배경 또한 프랑스-독일 양국이 함께 관리하는 알자스-로렌이다. 원하는 세계와 원치 않는 세계를 교차하는 영화, 그래서일까 영화의 연출 또한 두 경향이 줄곧 교차 혹은 충돌한다. <파티 걸>에서는 롱테이크와 핸드헬드를 결합한 형식이 극 전체를 지배하였는데, 본 작품에서는 핸드헬드와 트래블링 숏을 오간다. 도입부, 스테디캠을 이용한 트래블링 숏으로 온유하고도 부드러운 정경을 포착하고, 이를 줌인한다. 조니와 소년의 아버지 내지는 융 부인의 연인이 식탁에 함께 앉아 있다. 소년은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남자가 담배를 말기 시작하자 보필한다. 이후 끈끈하게 포옹하지만 떨어져야 한다. 조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남자는 조니의 엄마이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부였을 융 부인과 이혼한다. 폭언이 오가고, 더는 상대방과 닮기 싫음인지 가차 없이 상대의 물건을 창밖으로 내던진다. 이에 핸드헬드로 전환된다. 부부의 분열과 이별을 조니는 원치 않는다. 낯선 터전으로 터벅터벅 이사하고 남자와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핸드헬드는 조니가 바라지 않은 거친 현실, 기존의 흔들림을 가리킨다. 그것이 영화 내내 일반적이다. 핸드헬드는 포르바크의 질 나쁜 무리가 조니의 허스키를 괴롭힐 때, 이후 융 부인과 청소년들이 충돌할 때, 멜리사와 늦게 귀가해서 엄마와 다툴 때, 아담스키 선생님에게 키스를 시도한 이후 쫓겨날 때 도드라진다. 그 흔들림은 트래블링 숏으로 포착된, 이상의 붕괴이자 종말이다. 트래블링 숏은 아담스키가 조니에게 장래 희망을 불어놓고 소년의 재능을 상찬할 때, 체육 수업에서 세차게 뛰느라 숨이 가빠졌을 때 안정감을 부여하는 선생님의 손길, 그와 함께 박물관에 갔을 때 사용된다. 아담스키는 재능이 있는 조니가 지식인이 되도록 인도하는 롤모델이자, 남자를 좋아하는 소년이 짝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렇지만 전자는 가능할지언정 후자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테디캠은 언제나 무너진다. 아마 조니가 도입부의 남자에게 품은 감정도 그렇지 않았을까?     


즉 스테디캠은 허위이거나 간헐적이다. 그래서 결말에서 방방 뛰며 춤추는 조니가 핸드헬드로 포착되듯, 현실에서 솔직함을 실현해야 한다. 이렇게 살펴본 영화의 연출은 안정적/불안정적인 운동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이와 동시에 이동에도 주목해야 한다. 영화의 주된 숏은 조니와 친밀하게, 그의 뒤를 능동적으로 따라다니는 달리 숏, 팔로우 숏이다. 흡사 그의 그림자가 된 듯, 클로즈업 수준의 가까운 거리에서 조니의 뒤를 밟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카메라가 관조적으로 멈춰 서서, 롱숏으로 조니를 포착하는 연출로 변화할 때가 있다. 전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후자는 무기력하고 체념적이다. 영화 초반, 소년은 엄마를 찾아 나선다. 이후 소년이 모르는 한 남자와 엄마가 차 안에서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부모와 자식의 거리는 매우 좁다. 그러나 성에 있어서는 그 어떤 타인보다도 까마득하게 먼 존재다. 또 후술하겠지만 남자를 흠모하는 소년에게 엄마는 연적이다. 그래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엄마가 껄끄러울지 모른다. 그런 엄마의 곁에서 소년은 떠나고, 영화의 카메라도 멀어진다. 찾는 것엔 적극적일 수 있지만, 엄마의 사생활엔 개입할 수 없다. 즉 영화의 여러 연출이 주체적으로 판단하거나 선택할 수 없는 소년의 능동성과 체념·좌절을 교차한다. 이는 공간성에서도 가시화된다. 영화의 배경은 알자스-로렌의 포르바크다.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는 행정구역으로, 알자스는 독일계가 다수이고, 로렌은 프랑스계가 다수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지만, 표준 불어나 독어에 비해서 변형이 많이 가해진 방언을 사용한다. 이에 온전히 독어도 불어도 아니다.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고, 그 어디의 표준과 비교해도 완전하지 않다. 영화에선 포르바크의 경제적 낙후를 지적한다. 융 부인은 여기가 빈민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우 거칠고 공격적이라며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조니에게 당부한다. 그 누구도 대신 조니의 몸을 지켜주지 않는다. ‘그 누구’는 곧 제도와 사회와 국가를 포함하리.      


버스에서 아담스키는 기사와 대화하는데, 도시 곳곳에 침하가 발생하는데 이를 방치하는 당국을 비판한다. 독일과 프랑스 그 어디에도 속하지만, 지역에 발생하는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며,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지역이 곧 알자스-로렌이랴. 이러한 이원화가 융 부인-아담스키에게 이어진다. 융 부인은 조니가 원치 않지만 계속 간섭하는 사람인 반면, 아담스키는 조니가 바라지만 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사실상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다. 융 부인은 남편 없이 홀로 세 아이를 책임진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오롯이 헌신하기가 버겁다. 가장으로서 돈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리사를 조니에게 떠맡기고, 또 종교 수업을 듣지 않게끔 사유서는 써주지만 그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다. ‘분수에 맞춰서 적당히’만 허용한다. 반면 아담스키는 분수 이상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의 연인 노라가 박물관에 조니를 데려가며 분수 이상의 지원을 할 때는 불편한 기색이다. 조니는 자신을 똑똑하다고 평가해준 아담스키의 추천에 따라 기숙학교 진학을 꿈꾸지만, 엄마는 포르바크의 학교에 머물러도 나쁘지 않다며 좌절시키려 한다. 소년은 아담스키를 따라 지금 너머의 꿈을 바라지만, 어머니는 소년이 지금 여기에 머물렀으면 한다. 이는 영화의 공간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융 부인은 부엌에 머물고, 조니와 멜리사는 주로 거실에 머문다. 두 공간은 가림막으로 나눠져 있다. 조니는 엄마에게 다가가기 싫다, 오히려 뛰쳐나가 아담스키 집으로 향한다. 본래 아담스키 집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소년, 그러나 이젠 아담스키 집의 '초인종'을 누르며 실내에 진입한다. 그러나 아담스키는 소년을 쫓아내고, 반면 엄마는 가림막을 넘어서 소년이 박물관에 입고 갈 옷을 추천해준다. 조니의 욕망은 아담스키에게 소아성애이기에 밀어내야만 하는 불가능한 것, 반면 조니가 바라진 않지만 익히 가능한 융 부인과의 시간, 성찬식은 언제나 소년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영화는 소아성애라는 금기는 당연히 불가능해야 하지만, 아담스키가 소년에게 불어넣은 꿈과 희망은 실현한다.  

    

자신의 축제이자 잔치가 아니라 어른들이 술에 취해서 춤을 추는 파티였던 성찬식, 그 이후 집에 돌아와 조니는 엄마가 듣든 말든 자기는 무조건 기숙학교를 진학하겠다고 말한다. 즉 억압, 특히나 두 문화권의 이중 억압과 불안정한 가정 상황에 의해서 더더욱 체념하던 소년, 그럼에도 소망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파티 걸>에서도 앙젤리크가 예속되는 것을 거부했듯, <소년, 조니>에서도 결말의 소년은 꿈을 천명하며 춤을 춘다. 그 꿈이 한갓 애욕이자 진짜 콜라이며 단지 맛있는 음식이라 하여도, 사회적으로 높게 평가받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내게 진귀한 것이다. 앞서 서두에선 잠복기에 대해서 간략하게 서술했다. 남근기 아이들이 시선을 오롯이 제 몸에 집중하였다면, 잠복기의 아이들은 외부를 바라본다. 그리고 외부를 바라보며 타인이나 새로운 공간에 나를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아담스키의 부임 첫날, 아이들은 장래 희망에 대해 말하고, 이는 내 몸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욕구에 귀착되어 있던 남근기의 욕구에서 발전된 것이다. 그들은 알자스-로렌 너머의 플로리다와 어른들의 직업을 말한다. 그러나 조니는 바라는 것이 없다. 장래 희망을 말하는 아이들은 SNS를 통해 더 먼 나라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보거나, 또 모범적인 부모님과 여행을 직접 떠나봤다. 그러나 조니에겐 현재·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여력이, 또 모범으로 삼을만한 어른이 주변에 없었다. 오히려 소년은 외부를 보며 희망을 품기보다는 헤아린다. 영화 초반에 조니는 이타적인 반면, 아담스키에게 자극을 받은 후반의 조니는 솔직해진다. 그리고 초반의 조니가 이타적이었던 이유는 어머니와 다투면서도, 그녀의 상황을 안쓰럽게 여겼기 때문이랴.(또는 괄괄하긴 해도 자녀를 홀로 돌보는 어머니의 포용력을 여성성을 가진 남성인 게이가 체화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더 자세히 후술할 것이다) 남편 없이 홀로 남성의 책임까지 떠안은 여성, 못 믿을 장남 딜런, 그래서 조니는 어머니를 객관적으로 헤아려 동생 돌봄을 자처했으나, 정작 일상 너머의 많은 것을 보고 현실·현재 너머로 자신을 투영할 잠복기의 꿈을 설정하지 못한다.      


조니와 멜리사는 소꿉놀이한다. 다른 아이들이 장래 희망으로 현실 너머를 그릴 때, 조니와 멜리사는 패배적인 현실을 재생산한다, 담배를 피우는 어른, 배우자가 부재한 어머니를 연기하며, 그것 이상의 명랑하거나 희망찬 가능성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근기의 아이들은 외부에 신경을 덜 쓴다. 생식기에도 수치심을 덜 느낀다. 그러나 잠복기의 아이들은 그 어느 연령대보다 외부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이는 ‘시선’을 의식한다는 얘기다. 더욱이 포르바크는 이전에 살던 지역과 같지 않아서, 과거와 다른 시선을 신경 써야 한다. 융 부인은 청소년들과 충돌할 때, 엄마답지 않은 용모를 지적받았고 이후 자신의 땋은 머리를 모조리 풀어버린다. 청소년들의 지적과 더불어, 그녀 직업이 가게의 서비스직이기에 타인의 시선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심리 상담에 편견이 있어서 자살 기도한 조니를 방치한다. 시선을 의식하는 잠복기와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공간, 거기서 소년은 장래 희망이 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장래 희망이 없는 자신, 남들과 달리 동작을 곁들여서 하는 시 낭송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인간의 음료가 개에겐 해로운데 자꾸 그것을 들이미는 압력이 곧 포르바크의 상대에게 무지한, 자신만을 강요하는 시선이다. 이러한 시선을 받는 소년은 꿈이 없었다. 우리는 타인의 껄끄러운 시선 아래 서면 “혹시 내 용모에 문제 있지 않은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내 기준이 아니라, 불편하게 쳐다보는 상대의 시선에 따라 용모나 태도를 교정한다. 시선은 무시 못 할 힘이 있고 그것은 나를 변형시킨다. 그 시선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잠복기의 소년에게, 포르바크의 시선은 곧 패배자임을 내면화한다. 그런데 잠복기의 소년은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그 어떤 연령대보다 반짝이는 호기심으로 외부를 바라보기도 하다. 그간 남들의 시선에 의해서 ‘객체’가 되었던 소년은 이제 자신이 바라보며 상대를 객체로 만든다. 바로 아담스키를 자신의 아버지이자 연인으로 말이다. 그를 아버지로 삼고자 하는 이유는 아담스키가 소년을 객체로 전락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불가항력적으로 배정받은 부모아래서, 아버지가 없거나 수시로 뒤바뀜에 남성인 조니는 롤모델의 영향 아래 놓이지 못했고, 더욱이 어머니는 패배주의를 덧씌운다. 조니의 바람 중 실현해줄 수 있는 것은 사유서 정도에 그치며, 융 부인의 시선은 본래 조니가 가진 재능을 저평가한다. 그러나 아담스키는 조니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준다. 남들이 비웃는 발표나 시 낭송을 묵묵히 들어주고 그의 가치를 긍정한다. 아담스키의 자애로운 시선 아래서 조니는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담스키의 시선은 어떤 모습이든 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물관에서 소년은 아담스키를 따라다니며 그를 제 것으로 갈망한다. 그가 자신을 쳐다봐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조니가 아담스키를 바라보는 시선은 감춰져 있다. 또 박물관에서 둘의 관계는 예술, 감상자가 예술을 바라보지만, 정작 작품은 감상자를 바라봐주지 않는 일방적인 시선이다. 그래서 작품화된 아담스키는 조니를 바라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몰래 쫓아다니는 조니를 아담스키는 모른다. 그래서 조니의 시선은 효력이 없다. 효력 없는 시선, 그것이 곧 생애 초기에 부모를 흠모하는 영유아의 시선이다. 본 작품은 조니의 게이라는 성 지향성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틀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셀린 시아마의 <톰보이>와 유사하다. 박물관을 관람한 이후, 아담스키-노라의 집에서의 저녁 식사를 담은 시퀀스에서, 카미유에 의해 조니가 게이이자 아담스키를 연모함이 밝혀진다. 일단 조니에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게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남근기 때 해소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앞선 아버지조차 친부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소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발현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제대로 금기시되거나 억제되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소년은 융 부인의 이혼한 연인이나, 아버지적인 아담스키 선생을 흠모한다. 아버지적 존재의 연인이 되기 위해서 조니는 이성인 어머니의 노출을 따라 하기에, 동성을 동일시하는 이성애자의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와 다르다.      


이와 동시에 조니는 동성인 아버지들도 따라 한다. 담배 말기를 도와줬던 당시에는 흡연 행위를, 아담스키를 흠모할 때는 책을 선물 받아서 공부에 열중한다. 테이는 동성애자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복합성을 드러낸다. 융 부인, 노라는 흠모하는 짝사랑의 합법적인 연인이기에 연적이다. 조니는 융 부인이 소아성애를 추궁할 때, 아담스키는 탓하지 않고 노라가 질투한다고 곡해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하려면 소년 조니는 소녀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진 소년이 여성을 대하는 마음은 애증, 양가적이다.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 이후 이성애자 아이들은 동성 보호자를 동일시하지만, 동성애자 아이들은 이성도 닮으며,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타자화하지 않는다. 또 페미니스트 평화학자 배티 리어든이 지적하듯, 항상 양육이 강요된 어머니-여성은 자녀의 욕구를 통제해야만 했기에, 자녀에게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어머니는 사랑을 방해하는 연적 수준이 아니라, 아버지에 의해서 생긴 아들의 바람을 모조리 좌절시키는 적으로 본 작품에서 등장한다. 융 부인은 조니를 체벌하고, 소년의 의견을 뭉갠다. 일반적으로는 근친, 본 작품에서의 소아성애는 연적이자 원망의 대상인 어머니에 의해서 금기시되고 억제된다. 욕망이 좌절되어 무의식으로 추방된 조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 원망스럽다. 그런데 원망하는 소년은 잠복기의 외부 관심을 비로소 자신에게 쏟는다. 조니는 아담스키에 대한 제 마음을 인지한 이후 딜런에게 멜리사를 맡기고, 아담스키의 거절 이후 오토바이를 쓰러트리거나, 학교에서 울적한 마음에 자살을 기도하고, 저녁 식사에서 모든 식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등 제 마음에 솔직해진다. 이렇게 잠복기의 아이는 욕망을 자각하며 그 이후 시기인 생식기로 진입하고 외부와 내부의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생식기의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전혀 무관한 연인을 좇진 않는다. 금기시된 영유아의 사랑은 완전히 소멸되거나 억제되지 않고 어렴풋한 잔상으로 변형되어 향후 유사한 이상형을 찾아간다. 그것이 성장이다.      


영화에선 빛의 사용이 인상적이다. 영사기의 빛, 렌즈플레어, 태양, 아담스키의 오토바이, 스마트폰의 플래시 등, 빛은 무언가를 비추고 드러낸다. 특히 어둠 속에서 조니를 밝힌다. 그리고 조니도 아담스키와 노라의 진실을 보았으나, 잠복기에서 생식기로 진입하는 소년에겐 자신의 ‘욕망’이 우선이었다. 사실을 무시하고 아담스키를 유혹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와 닮아가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춰준 아담스키를 더는 음해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에게 솔직함과 더불어,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외/내부의 정도를 걷는 성장이다. 그리고 영화는 카메라가 빙글빙글 회전하는 촬영이 인상적이다. 처음에는 또래들과 싸울 때, 이후에는 체육수업에서 아담스키가 경동맥을 느끼게 할 때 뱅뱅 돈다. 양자 모두 방어해야 할 자신이나, 스스로의 심박동을 느끼며 내가 중심이 되어 세상이 회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나를 자각하는 것이 성장이다. 또 마라톤 시퀀스에서 호흡이 벅찬 조니는 카메라에서 멀어져 롱숏으로 포착된다. 그러나 한계를 극복하여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서 거대해진다. 고통과 한계를 이겨내고 내게 가까워지는 것이 성장이다. 소년은 기숙학교를 반대하는 어머니를 꺾으리라 다짐하며, 영화는 끝나고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테이는 포르바크를 배경으로 격정적인 유년기를 담아낸다. 통속적인 성장 영화는 아니다. 이성애 중심적으로 연구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게이의 시점에서 뒤틀어서 보여주는 점이 특별하다. 불가항력적인 어머니와 환경에 의한 극단적인 객체화, 반면 소아성애의 위험을 내포한 조니의 극단적인 주체성, 양자 사이에서 균형과 사랑을 찾는 성장을 리얼리틱하면서도 몽환적인 연출로 풀어낸다. 또 항상 연적이자 원망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여성, 이와 달리 연인이자 롤모델이 되는 남성을 다룬 젠더 연구도 흥미롭다. 조언하지만 책임지지 않고 거리 두는 아담스키는 달콤하지만, 반면 자녀 곁에 머물며 개입하는 노라나 융 부인은 악마화된다. 그러나 균형 어린 성장에는 악역이 필요하다, 다만 여성이 강제되어선 안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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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19 집에서(마이 프렌치 필름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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