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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3. 2023

엠마누엘 마레&줄리 르쿠스트르, <제로 퍽스 기븐>

땅과 하늘 사이에서

엠마누엘 마레&줄리 르쿠스트르(Emmanuel Marre & Julie Lecoustre), 

<제로 퍽스 기븐>(Zero Fucks Given) - 땅과 하늘 사이에서   

“그가 넋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그가 이러한 지배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 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기 드보르-

지상에서는 중력이 우리의 발과 다리를 꽉 붙잡는다. 또 대지는 단단하다. 중력의 족쇄와 딱딱함 앞에서 우리는 가로막힌다. 반면 하늘은 자유롭다. 제약 없이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다. 특정 장소로 자유롭게 향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현 장소에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 새로운 장소가 부여할 가능성과 만나고, 하고 싶은 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린 날개가 달려 하늘을 비행하는 새들이 해방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지의 중력은 제약임과 동시에 보호이기도 하고, 반면 하늘과 그 이상의 무중력은 자유임과 동시에 무장해제다. 하늘에서 자유롭지만, 우리를 붙잡은 대가로 보호해주는 장치들이 부재하기에, 그만큼 더 불확정적이고 불안정하다. 그래서 스튜어디스에게 요구되는 것이 하늘의 무제한성과 상반된, 단정하고 정돈된 옷차림이다. 또 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혹시 모를 위급 상황에서 승객들이 동요하지 않게끔 조율하는 차분함이다. 엠마누엘 마레와 줄리 르쿠스트르의 장편 데뷔작, <제로 퍽스 기븐>은 대지와 하늘 사이를 누비는 스튜어디스가 겪는 한바탕 소동극이다. 이를 연출하는 1980년 태생의 엠마누엘 마레와 1987년 태생의 줄리 르쿠스트르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마레는 지금까지 다수의 단편을 연출하였고, 줄리 르쿠스트르는 본 공동 연출작이 단/장편 종합하여 첫 작품이다. 즉 우리는 마레의 단편을 비추어 <제로 퍽스 기븐>에서 이어질 작가론, 예술론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 일단 그의 단편들에선 주로 ‘아이-부모’가 등장한다. 단편 픽션 <작은 기사>도 그렇고, 단편 다큐멘터리 <머리 자르기>에서도 부모에 의해서 결정되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작은 기사>에서처럼 부모가 운전하는 차에 실리거나, <머리 자르기>에서처럼 부모가 원하는 이발을 위해 의자에 단단히 고정된다. 부모와 아이는 다르다. 아이들은 원하는 머리가 있거나, 흑인 아이들은 머리칼이 억세서 부모의 빗질이 아프고 따갑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아이들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타일러서, 어른이 보기 좋게끔 아이의 머리를 가꾼다.      


즉 어린이는 어른과 다르게 움직이고 싶고, 특히 어른들과 비교하여 용모나 정신이 더 많이 다른 ‘영유아’들은 타협하기가 더더욱 까다롭다. 물론 다큐멘터리의 결말은 꽤 만족스럽지만, 마레는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 동일시되고 자기만의 다름을 타협하는 경험으로 이발을 보는 듯하다. 왜냐하면 <작은 기사>에서는 어른에 의한 구속이 더욱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강자 어른에 의해 끌려다니고, 더 강자인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거나, 부부싸움에서 서로 조율하기는커녕 불화하고 결별하는 모습만 본다. 이를 본 아이는 자기보다 더 어린 여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학교에서 다른 학생과 문제를 겪는다. 약자의 다름, 개별성은 강자가 동일시하는 보편성과 힘에 의해 말소되고, 그들이 운전하는 운송수단에 강압적으로 탑승하게 되는데, 과연 비행기에 탄 젊은 여성 스튜어디스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 그 스튜어디스의 이름은 카산드르다. 영화는 비행기에서, 즉 ‘하늘’ 내지는 ‘지상과 하늘의 사이’에서 시작하지만, 카산드르의 삶은 당연하게도 지상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그 지상에서의 삶이 밝혀지는데, 카산드르에게 지상은 아픔이 있는 곳이다. 영화 초반에도 비행을 마쳐서 아르튀르와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해 자유롭게 대화하던 여가 시간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지상의 아픔 일부가 전해졌다. 그리고 카산드르가 저가 항공사에서 정직당해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극의 후반부, 어머니의 교통사고에 카산드르의 책임이 암시되고, 그녀는 그 사실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불현듯 잠적하여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제한 없는 하늘은 부딪히지 않을 것만 같다. 이와 달리 제약으로 가득 찬 지상은, 이에 상응하는 단단한 바위에 차가 부딪쳐 말랑말랑한 인간의 육체를 산산조각 낸다. 대지는 중력으로 슬픈 운명을 강제한다. 이에 인간은 새를 갈망하며 하늘로 떠난다. 그런데 하늘로 떠나는 것만이 능사일까? 인간은 하늘로 거저 가지 않는다. 비행할 수 있음과 동시에, 단단한 대지의 특성을 간직하는 '비행기' 위에 올라탄다.      


또한 대지와 달리 무제한적인 가능성이 있지만, 무한함엔 긍정뿐만 아니라 위험도 내포한 만큼, 온갖 규칙으로 변수를 제거한다. 그래서 하늘은 오히려 더 빽빽하다. 영화의 도입부, 저가 항공사이기 때문에 티켓 가격으로만 수익이 충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판촉을 공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다른 항공사에서는 그 몫을 판매자인 스튜어디스와 꽤 합당한 수준으로 나눠 갖는 모양인데, 본 항공사에서는 분배가 다소 공평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팔아야만 한다, 스튜어디스로서 하늘에 머물기 위해서. 그들이 파는 것은 향수다. 그리고 카산드르는 한 승객에게 판촉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향수를 뿌리는 것이 '착한 여자'로서의 상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승객은 주장한다. 즉 하늘에 머물기 위한 것, 그 하늘에서 팔고 뿌리는 것은 착한 ‘객체’임을 요구하는 제약이다. 그래서일까, 카산드르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 상부의 요구를 막연히 듣고만 있을 때 카메라는 멈춘다. 가만히 멈춘 카메라가 규칙에 따른 프레임을 형성한다. 그것은 사람을 위하지 않고 ‘규칙 자신’을 위하며 가만히 머무른다. 포착되거나 노출되기 위해선 개인들이 카메라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와야지, 카메라는 인간을 따라다니지 않는다. 즉 개인이 드러나기 위해선 카메라, 곧 그것이 반영하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인간을 위한 규칙이 아니라, 규칙을 위한 인간이 된다. 그 카메라 아래서 개개인들은 원치 않는 표정을 짓는다. 카산드르는 주니어 직급으로 남고 싶었지만, 항공사의 정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관리자로 승진하여 다른 승무원들을 통솔한다. 이를 위해서 교육을 듣고 프로필을 새로 촬영하는데, 일단 카산드라는 현재 권태롭고 울적하다. 그녀는 퇴근 이후에도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항공사가 제공한 숙소에 머무르는 만큼, 저 자신에게 마냥 솔직하기가 어렵다. 그들과 모여서 모임이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다반사이기에 타인에게 나를 일련 맞춰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제 육체에 집착한다. 술과 섹스, 쾌락에 탐닉하며 내 몸의 자극을 솔직하게 느끼고, SNS로 만난 남자에게 전라 사진을 보낸다. 즉 타인에 의해 규정된 몸이 아니라, 날 것의 내 몸을 받아들여 주길 원한다.      


그래서 프로필 촬영을 하는 동안에도 승객을 위한 대사를 읊고 30초간 웃고 있어야 하는데, 자꾸 표정이 일그러진다. 30초간 웃기에는 얼굴에 쥐가 날 지경이다. 더욱이 카산드르는 주니어로서 덜 책임지면서, 또 몰래 보드카를 마시며 일을 하고 싶었지, 누군가를 관리하는 위치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착한 여자’보다는 ‘참을 수 없는 여자’로서 관리자들에 비한다면 표정도 자유로웠다. 그녀는 노조의 시위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면서 권리를 누리기보다는, 짊어지지 않거나 덜 짊어지면서 여유롭고 싶었다. 그런데 의무와 권리를 괄시한 결과가 원치 않는 강제 승진인 걸까? 그녀는 책임지지 않는 주니어로서 원하면 담배를 피우고 다른 직원들과 '장난'을 치고 싶다. 즉 자신의 욕구에 좀 더 솔직하고 싶다. 주니어였던 당시에는 술을 마시더라도 관리자와 잘 조율하면 근무할 수 있었다. 분명 규칙이 빽빽했지만 비교적 너그러웠다. 그러나 관리자가 되면 진지함을, 주관성이 아니라 객관성을 요구받는다. 주니어였던 당시 스튜어디스로서 따라야 할 규칙을 따르면서도, 비교적 자유분방했던 카산드르, 그러나 관리자급이 되자 더 많은 객관성과 보편성을 요구받는다. 주니어였던 당시에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을 대신 짊어질 관리자가 있었다면, 이제 그녀 자신이 관리자가 되었으므로 지상에 비해 불확정적인 책임, 그리고 아랫사람의 책임을 많이 떠맡는다. 주관적이던 몸은 동의를 얻고 타당해야 하는 몸이 된다. 그녀는 프랑스인이기에 불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승객이 모인 비행기에서는 공용어인 영어를 구사한다. 그녀는 수술받기 위해 난생처음 홀로 비행기에 올라탄 한 승객과 대화를 나눈다. 이때 그녀는 외국어를 사용하고, 카산드르는 영어로 말한다. 이후 규칙에서 벗어나 개인 카드로 술을 구매하여 그녀에게 선물한다, 긴장을 풀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일, 또한 이로운 일이지만 비행기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승객과 교감하기보다는, 성희롱하고 술값을 지급하지 않는 포악한 손님의 갑질을 꾹 참을 것을 규칙이 강제한다.      


하늘은 넓다. 그러나 인간에게 할당된 하늘은 오직 비행기 안, 그 비행기 또한 소수가 소유하고 규정한다. 규칙은 그 소수를 위하며, 널따란 하늘에 할당된 소수의 공간에 피해 갈 수 없는 시선이 빽빽이 에워싼다. 카산드르는 이 지긋지긋한 저가 항공사를 그만두고 고가 항공사로의 이직을 생각한다. 낭만도 없는 도시들을 쳇바퀴 돌리듯 왔다 갔다 하기보다는, 휘황찬란한 관광지들을 더 많이 여행하고 싶다. 그러나 고급 항공사로 가기 위해선 요건이 더 까다롭다. 영어 이상의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카산드르가 직접 면접을 봐보니 요구하는 표정이나 성격, 염색 등이 저가 항공사보다 더 빽빽하다. 사적인 일정도 모두 비워놔야 한다. 이러한 하늘에 비해서 지상이 더 자유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는 여러 연출을 현란하게 오가며 지상과 하늘을 대비하는데, 일단 하늘에서나 하늘에 가기 위한 연출은 '경직'을 부각한다. 영화 초반, 비행이 시작됐다. 하늘은 아주 푸르고 하얗다. 몽환적이고 신비롭다. 꿈에서 볼법한, 그 꿈이 실현된 것만 같은 관념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그 하늘을 유랑하기 위해서 카산드르는 아주 어둡게 포착된다. 하늘에 올라가기 위한 대가로 자신은 은폐된다, 규칙에 의해. 또 영화에서 그녀가 걸을 때는 핸드헬드를 활용하여 담아낸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가만히 서 있을 때, 전동 킥보드에 올라탔을 때, 그리고 출근을 위해 공항의 무빙워크에 서 있을 때, 즉 다리 대신 운송수단에 의해 수동적으로 옮겨질 때 스테디캠이 활용된다. 어딘 가로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의 발걸음과 흔들림이 제한된다. 심지어 무빙워크에 올라탔을 때, 카산드르는 동료와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고 오직 이미지, 그것도 항공사를 대표하는 ‘기호’와 ‘상징’이 대체한다. 저가 항공사 유니폼은 남색의 의상에 노란 스카프를 곁들인다. 차분하고 고요한 명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어둡고 차가운 색채인 남색으로, 낯선 외부로 뻗어가는 만큼 불안을 느낄 승객들에게 내부로 파고드는 신뢰와 안정감을 주되, 물질적인 색채로 일컬어지는 노랑으로 지상과의 끈, 쨍한 활기를 아예 단절하지 않는다. 카산드르는 색채와 유니폼으로써 항공사를 가리키는 심벌로 전락한다, 하늘로 향하기 위해서.      


그러나 전후에, 지상에 놓인 카산드르를 포착한 숏에서는 그녀의 대화가 아주 활발하게 잘 들렸다. 전의 시퀀스에선 현란한 조명이 깜빡이는 클럽에서 아르튀르의 플러팅이 시시하다고 솔직한 말을 전한 이후, 그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떤다. 출근 이후의 시퀀스에서는 SNS를 구경하고 채팅하는 카산드르를 핸드헬드로 포착한다. 즉 지상은 대지보다 더 자유로워 보인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는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늘에서는 변수들이 보이지 않아선 안 된다. 모두 보이게 만들어서 통제해야 한다. 관리자가 된 카산드라가 사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아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듯, 비행기에서는 보여야 하는 것이 규칙이다. 또 협소한 장소이기에 보이지 않아도 보이게 되고, 술 냄새도 다 맡아진다. 하지만 대지는 제약이 많은 만큼 드넓다. 그만큼 제약하는 시선을 피해 숨을 곳이 있다. 그 차이가 연출의 대비로 나타난다. 하늘에서는 색채에서부터 구도까지,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정돈된 모습이다. 그러나 지상에선 아주 현란한 조명이 깜빡거린다. 안정적으로 계속 보이기보다는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또 색채가 계속 변화하여 기존에 봤던 것들이 이후에 똑같이 이어지지 않는다. 변수로 가득하다. 또 아르튀르와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 영화의 연출은 '스냅사진' 내지는 그냥 일반인들이 스마트폰으로 아무렇게나 촬영한 듯한 '아마추어리즘'이다. 즉흥적인 핸드폰 플래시로 조명을 설정한 듯한 조악함과 어둠, 금방 스마트폰 내지는 카메라가 쓰러질 듯한 위태위태한 구도 속에서, 보여도 그만 안 보여도 그만인 인물들은 보이기 위한 모습이 아닌, 보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순수한 무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하늘은 자유롭고, 또 지상의 슬픔을 지워내기 위한 이상적인 도피처다. 그러나 도피처로 향하기 위해서 날지 못하는 인류는 제약이 많다. 오히려 모든 것은 날기 위한 규칙의 시선 하에 노출된다. 안전한 곳은 협소하다. 그러나 지상은 제약으로 빼곡할지언정 인간이 서 있거나 머무를 수 있는 곳이 드넓다. 그래서 시선이 덜 미치거나 아예 미치지 않는 음습한 곳으로 향해서 술과 담배, 마약을 즐긴다.      


인간은 하늘에 머물기 위해 대지의 제약을 모방한다면, 대지에서는 제약을 극복하여 하늘로 향한 듯한 기분을 어떻게든 누린다. 또 하늘에 있는 '남의 집'이 아니라, 지상의 '내 집'에서 아버지는 항소를 포기하지 않는다. 둘 다 가질 순 없다, 모든 것엔 제약이 따른다. 그래서 영화는 하늘과 지상만 대비하지 않는다. 각각의 장소에 머물기 위한 이유로서 자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보임'과 '보이지 않음'을 고찰한다. 앞서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프레임 안으로 판촉의 규칙을 듣는 스튜어디스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후에도 유사한 숏이 반복된다. 한 승객이 말하길, 지난번 수속 때는 가방을 들고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는데, 규칙 변화로 카산드르에게 제지당한다. 또 앞서 언급한, 수술을 위해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은 예매한 티켓의 좌석과 다른, 창가가 보이는 좌석에 앉았고 이를 카산드르에게 저지당한다. 그들은 계속 포착되기 위해선 규칙을 지켜야 한다. 가방을 수납할 추가 요금이 없다는 승객은 아마도 규칙에 따라 프레임 바깥으로 멀어진 것, 반면 수술하러 가는 승객은 규칙을 지켜 프레임 안에 포착되는 것이리라. 이들과 달리 규칙의 주체는 보이지 않고도 머무른다. 보이지 않는 특권을 지니는 소수와 달리 다수의 인간은 보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왜 보여야 하는가? 프랑스의 예술가이자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철학자였던 기 드보르는 저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적 생산 조건의 거대한 축적물이자 최종점으로서 '스펙타클'을 설명한다. 스펙타클은 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정보, 선전, 광고물, 곧바로 소비되는 오락물 등의 '보는 것', '이미지'로 구성된다. 그것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고 선전하고, 인간이 직접 경험하는 시간 대부분을 점유하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즉 현실을 위해 이미지를 만들던 시대에서 이미지를 위해 현실을 희생하는 세계로의 역전, 모든 사람의 구체적 삶이 사변적인 세계로 퇴행하고, 현실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철학화를 위한 현실이 곧 20세기와 오늘날 스펙타클 사회다. 스펙타클은 이를 구성하는 상품이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동원되는 소비자, 노동자, 생산자 모두를 소외시킨다. 완성품은 그것 자체를 위하거나, 스펙타클을 후원하는 정재계에 귀속되며, 정작 이를 만든 이들은 오히려 완성품에 의해 역으로 지배된다.  

    

심지어 스펙타클은 현실을 가리키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이미지로써 ‘경제를 위한 경제’인 자신만 발전시키는데 본 작품에서도 그렇다. 카산드르는 두바이로 운행하는 고가 항공사에의 취직을 갈망한다. 그 항공사를 열망하는 이유는 해당 항공사의 유니폼을 입은 스튜어디스들을 '보면서', 그들의 인스타그램에 게시된 이미지를 '봤기' 때문이다. 카산드르의 동료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을 것이라 말하지만, 카산드르는 그럼에도 고가 항공사에 들어가 그녀가 보는 것처럼 전시하고 싶다. 그런데 보는 것은 내가 타인을 보는 것이다. 드보르가 말하길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환각적이고 현란한 판촉물에 담긴 초월적인 이미지와 상품을 '보면서' 광적으로 흥분하고, 이를 소비하며 신비로운 발현을 꿈꾼다. 그러나 정작 내가 봤던 것은 내가 아닌 타인, 나와 유리된 상품, 현실에 대응하지 않는 환상적인 이미지이기에, 정작 나 자신의 기대는 불발된다. 스펙타클을 넋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고, 활동적인 인간 행위가 타자에게 귀속되어, 무엇이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카산드르가 어머니의 비극에서 도망치고자 저가 항공사에 취직했을 때도 일종의 스펙타클을 열망한 것이 아닐까? 현실이 비판과 공포로 둘러싸인 확고한 불행의 중심이라면, 스펙타클의 이미지는 행복으로 통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가 항공사에서 그녀가 바라보고 열망한 삶은 없다. 이미지에 의한 현실 소외에 더더욱 불행이 도드라진다. 고가 항공사도 마찬가지로 두바이에서 규칙을 위한 삶은 더더욱 강제된다. 이에 카산드르는 제 몸이 어떤 일을 하지만 그 일의 결과와 자신은 분리된다. 주니어 시절의 항상 뾰로통한 표정은 노동에 따른 제 육신의 불만과 권태를, 관리자 시절에는 자신과 승객에게 보람찬 일을 하였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비행기의 주인은 이에 반발한다. 보이지 않는 스펙타클의 주체를 위해서 보이는 것들은 현실에 이바지하기는커녕 되레 희생해야 한다. 더욱이 오늘날의 스펙타클은 새로이 태동한 SNS를 이용해 인간 스스로 스펙타클이 될 것을 강요하여 실제 가치가 아니라, 이미지화된 스펙타클로 인간의 교환 가치를 평가한다.      


영화에서 반복 등장하는 SNS, 줌으로 면접을 보며 '이미지화'된 서로를 만나는 카산드르와 면접관, 저가 항공사 시절 화상통화 하며 상사의 비위를 맞추는 카산드르의 이미지, 현실에서도 멀끔한 양복이나 메르세데스 차량을 운전하며 공인중개사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를 강화하는 아버지와 멜리사가 그렇다. 즉 프레임에 머물며 돈을 벌기 위한 요건은 스스로의 스펙타클화다. 그렇게 머물다 보면 주시하는 사람들이 제안한다. 통신사에서 더 좋은 요금제를 알려주기 위해 연락이 오고, 지인은 고가 항공사에 카산드르를 추천한다. 지금까지 보여준 이미지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갑갑하다. 저가 요금제로 바꾸기 위해서 해야 할 절차가 꽤 복잡하다. 카산드르가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친구들과 만날 때 후줄근한 옷을 입는 것과 달리, 고급 항공사와의 면접에서는 화장과 정장으로 내 몸에 흠을 가리고 상대방의 시선에 일조한다. 즉 프레임 안에 머물면서 스펙타클로서 보이면 이득이 있고 더 높은 곳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보이기 위한 나는 갑갑하다. 이에 나는 보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자유롭게 보는 시선을 회복한다. 내내 1.66:1의 화면비로 진행되며 보이는 인간을 담아내던 영화, 그런데 카산드르가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당시 1.33:1의 화면비에 풍경과 정물이 담긴 숏이 인서트된다. 내내 시선에 봉사하던 스펙타클이 사라지고, 대신 인간이 능동성을 회복하여 자유롭게 동공을 굴리는 시선이 자리한다. 즉 인간이 보이기 위한 의무를 내려놔야만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 제약이 많은 항공 생활에 지친 카산드르가 멜리사와 아버지 곁으로 내려왔다. 내내 승객들을 위해 이미지가 되어 봉사하던 카산드르, 그러나 다소 퉁명스럽고 까탈스러운 태도로 아버지의 스튜어디스에 관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제 견해를 당당히 피력한다.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의무가 없으니 자유롭다. 멜리사도 평일에는 양복과 고객을 위한 발화로 중무장한 반면, 휴일에는 친구들과 사적인 얘기를 나누고, 술과 담배에 취해 흥청망청 놀다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토하며, 참을 수 없는 육체에 솔직하다.      


또 자매는 현관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데, 와중에 불이 자꾸 꺼진다. 조명을 다시 켜면 존재를 밝히며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조명이 인기척을 인식하게끔 인간이 '특정 행동'을 해야 한다. 이에 조명을 켜는 행위에 지쳤는지, 부녀는 어둠 속에서 얘기한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춤추는 모습, 즉 자유분방한 모습이 좋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보이지 않는, 또 보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 무의미하지만 존재했던 유년 시절 얘기를 나눈다. 이후 완전한 어둠 속에 멜리사와 카산드르가 놓인다. 보이지 않는다. 그녀들이 어떤 행동을 할까 감상자는 궁금해지고, 또 자매는 감시하고 기대하는 시선에서 분방하리. 그런데 자매는 담뱃불을 켠다. 행위가 명확해진다. 즉 보이지 않음은 곧 자유와 가능성에 상응한다. 또 비행기의 감정적일 수 없는 규칙과 달리 어둠 속에서 감정을 얘기한다. 그런데 인간이란 언제나 보이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카산드르는 보이기 위해 두바이로 간다. 그러나 더 화려하게 보이는 만큼 규칙이 빽빽하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을 반영하여 삼엄하게 거리 둔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곳을 갈망하지만, 그럼에도 보여야 하는 이유는 분수가 자유롭진 않아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즉 마레와 르쿠스트르는 더 높은 곳과 자유로운 곳, 사적인 곳과 공적인 곳을 지상과 하늘에 빗댄다. 그 탐구는 드보르가 말하는 스펙타클 사회와 연관한다. 현란하게 현대인을 유혹하는 스펙타클 사회가 지상에서 유리된,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하늘과 비행기다. 매혹된 인류는 거기로 향하지만 정작 내가 봤던 것은 현실에 대응하지 않고, 비행기에서의 노동은 삶의 소외를 대가로 치른다. 그리고 환상적인 스펙타클이 전체주의적인 정치·경제적 획일화를 유도하듯, 하늘에서 지상의 딱딱함을 모방하는 비행기는 축소된 스펙타클 사회다. 이에 진부해진 삶, 실제 카산드르의 사용 가치에 타당하지 않은 삶, 그녀는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열망하나, 기만적으로 보일 것을 요구하는 스펙타클한 자본주의를 위해 다시 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영 그사이를 배회하는 울적한 현대인, 이를 가시화하는 현란하지만 텅 빈 모순적 연출이 강점인 신인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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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23 집에서(마이 프렌치 필름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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