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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6. 2023

위르실라 메이에, <라인>

남성은 모녀 사이에 선을 긋는다

위르실라 메이에(Ursula Meier), <라인>(The Line) 

- 남성은 모녀 사이에 선을 긋는다    

“이 세계들을 분리하는 경계선들은 각 세계의 내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기대할 수 있고 또 없는지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상상하고 지각하도록 규정한다.” -디디에 에리봉-

나와 상대방 사이에는 선이 있다. 나와 네가 다른 존재라고 분리하는 선, 서로 간의 경계를 명확히 긋는 선, 하지만 때때로 우린 상대의 선을 침범한다. 친구, 연인, 혈육 등 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을 말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선을 넘을 순 있다. 초대와 환대로써 말이다. 하지만 환대와 침입은 다르다. 환대는 상대방이 제안하고 수락한 것이라면, 침입은 타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폭력이다. 나는 상대와 닮았다고 생각하고, 또 뜻을 공유한다는 환각 하에 선을 침입한다. 특히 서로의 육신이 너무나 닮아있고, 한때 선으로 분리되지 않고 몸 안에 속했던 가족 간,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경계는 더욱 쉽게 흐트러진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말하듯 부모는 자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무한히 제 삶을 이어간다.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다. 이와 동시에 자식은 부모에게서 타자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식과 부모는 닮았지만 서로는 명백한 타자로서 분명한 선을 그어야한다. 이러한 부모 자식 사이의 선을 위르실라 메이에가 신작에서 고찰한다. 1971년 브장송 태생의 위르실라 메이에는 프랑스-스위스의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언제나 가족 영화를 연출했다. <홈>에서의 작지 않은 규모의 가족, <시스터>처럼 작긴 하지만 그럼에도 피로 이어진 혈연관계를 말이다. 메이에는 가족 영화를 통해 여성 감독의 시선에서 여성의 관계, 여성의 공간을 물색한다. <홈>에서 어머니인 마르테는 내부에 머무는 존재다. 자신의 배에서 나온 세 명의 자식을, 자궁과도 같고 자신이 어머니임을 유지하게 해주는 공간인 집에 계속 머물게 한다. <시스터>에서는 누나로 위장된 어머니, 루이가 등장한다. 세상은 시몽을 낳지 말라 종용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소년을 낳았다. 그렇게 어머니이고자 했지만, 한편 어머니 이전의 자신이 그립다. 어머니이지 못하는 족쇄와 어머니를 원치 않는 족쇄가 모순적으로 교차한다. 메이에는 여성의 복합적인 마음을 섬세하게 고찰한다.     

 

또 <홈>에서 데뷔한 아역, 케이시 모텟 클레인이 언제나 그녀의 작품에 출연한다. 아쉽게도 본 작품 <라인>에서는 출연이 불발되었지만 메이에는 그간 클레인을 통해, <홈>에서 어머니의 곁에 머물다가 <시스터>에서는 오히려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며 고군분투하는 성장을 보여줬다. 메이에는 공간을 탐구하는 작업으로도 유명하다. <홈>에서는 버려진 고속도로 인근에서 거주하는 한 가정을 고찰했다. 한편 끊긴 고속도로가 하루아침에 재개되어 가족의 집을 위협한다. 메이에는 외부의 위협에 맞서서 아이들을 지키는 집, 마찬가지의 집이지만 구성원들을 위협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를 대비한다. <시스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주안점을 둔다. 부르주아지들이 휴양을 즐기는 스키장에서 레프트카를 타고 하강하면, 이와는 전혀 상반된 허름하고 낙후된 거주지로 연결된다. 메이에는 이런 공간에 안주하지 않는다. <홈>에서 고속도로가 종으로 깔린다면, 가족은 횡으로 위태롭게 횡단한다. 운전자들이 교통체증으로 멈췄을 때 식구들은 움직일 수 있다.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 자유다. 또 <시스터>에서는 상승과 하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이면을 그려내고, 불가항력적으로 태어나서 내던져진 상황에 안주하지 않는 강인한 투지를 부각한다. 루이에게는 '아이를 포기하라'와 더불어 어머니가 된 이후에는 희생이라는 사회의 통념이 가해졌고, 시몽에겐 경제활동을 금지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바깥으로 나간다. 비록 아들은 남매로 둔갑되고, 불법적인 경제활동은 거짓말로 대체된다. 남매로 위장된 모자와 시몽의 도둑질 원인은 서로 유사하다. 하지만 이조차도 기존의 상태에 머물지 않으며 자유롭게 진실을 드러낸다. 또 서로 친밀해지고 싶지만 계속 엇갈리는 이들을 X자로 맞물렸다가 이별하고, 평행을 달리며 살짝 스치는 모습으로 그려낸다. 이렇게 메이에의 작품에서는 운동성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를 여성주의 관점에도 반영한다. <홈>에서 아버지는 바깥으로 나가는 자, 어머니는 머무는 자다. <시스터>에서 어머니인 루이는 머물고 싶지만, 시몽의 친부는 보이지 않기에 그녀는 잠시 내부에 머물렀다가 떠나며 아버지 역할도 수행한다.      


이러한 와중에 아이들은 마냥 집에만 머물지 않는다. <홈>에서 미성년인 줄리안과 마리옹은 붙잡히지만, 성인이 된 주디스는 바깥으로 나간다. <시스터>의 시몽은 아직 미성년이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자가 되어 생계를 유지한다. 왜냐하면 마냥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홈>에서 나가는 자와 머무는 자의 균형이 무너진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못 나가게, 집 안에만 머물게 한다. 이에 집은 곧 관이 된다,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며 안과 밖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시스터>에서는 머무르고 싶지 않은 루이, 반면 미성년이기에 안에 머물길 바라는 시몽의 갈등이 도드라진다. 어머니임과 동시에 자유를 추구하는 루이, 그리고 경제활동을 하고 싶음과 동시에 여전히 어린 시몽, 떠남과 동시에 만나고 싶은 균형에서 모자는 눈을 마주친다. 이렇게 X자로 교차하며 균형을 찾는 메이에의 작품, 과연 바깥으로 추방된 딸과 안에서 벌벌 떠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라인>에서 메이에의 작품 세계는 어떻게 이어질까. 일단 도입부, 카메라의 위치를 고정시켜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프레임을 연출한다. 카메라 무빙이나 편집보다는, 프레임 내의 이미지에 몰두할 수 있는 형식이다. 프레임 내에선 하얀 벽이 포착되고, 이윽고 거기에 사물이 던져진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채의 딱딱한 물건들에서부터 가벼운 종이까지, 모든 것들이 벽에 충돌한다. 던져진 사물들은 운동하는 방향으로 올곧게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의해 가로막혀 땅으로 떨어진다. 기존의 형태를 잃고 산산조각이 나 파편으로 흩어지다가, 이윽고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후 셀레스티나와 마르가리테를 포착한다. 엄마 셀레스티나는 도망치고, 딸 마르가리테는 그녀를 추적한다. 언뜻 보기에는 셀레스티나가 앞서 벽에 던져지던 사물 같고, 마르가리테는 그녀를 차단하고 파괴하는 벽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반대다. 셀레스티나는 유연하게 미끄러지듯 틈을 찾아 그 사이로 빠져나가며 도망친다. 오히려 셀레스티나가 호출한 남자들이 마르가리테의 앞을 막는다. 마르가리테에게는 셀레스티나가 벽이다. 마르가리테의 몸짓이 벽을 넘어서려는 듯 보이고, 마리옹에 의해 겨우 풀려난다.      


이후 풀려난 마르가리테를 향해 셀레스티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해를 권한다. 화난 마르가리테에게 강제로 다른 정서를 요청한다. 그러나 마르가리테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따귀를 때리는 패륜을 저지른다. 그러나 마르가리테는 어머니를 밀쳐야만 했다. 분명 '벽'과 같은 단단함으로 셀레스티나의 한쪽 귀를 먹게 한 사람은 마르가리테다. 그러나 그 이전, 셀레스티나와 그녀의 연인 세르쥬가 마르가리테를 뚱뚱하다는 등 비하했다. 마르가리테는 충동적인 만큼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런 그녀의 자유를 셀레스티나와 세르쥬가 벽처럼 막았다. 그래서 그녀는 달아나고 맞서야만 했다, 자신 또한 남성이라는 벽에 의해서 깨지더라도. 메이에는 앞선 작품들에서 '공간'을 탐구하는 데 강점이 있는 감독임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과 환경에 맞춰 생명은 유기적으로 진화하고 적응한다. 그렇게 공간이 한 개인을 형성한다. 벽으로 시작한 메이에의 신작은 여지없이 ‘공간에 의해 형성되는 사람’들을 고찰한다. 마르가리테는 경찰에 의해 셀레스티나의 집 100m 반경을 넘지 못하는 접근 금지 명령에 처한다. 모녀가 강제로 공간이 분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은 남성에 의해서 형성된다. 마르가리테의 두 동생 루이즈와 마리옹은 처음에는 마르가리테가 셀레스티나와 만나는 데 부정적이었다. 접근 금지 명령을 잘 따랐고, 그녀와의 만남을 기피했다. 그러나 두 자매는 마르가리테와 서서히 교류한다. 이와 달리 접근 금지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며 100m 기준선에서 마르가리테를 밀어내는 존재는 남성 세르쥬와 에르베다. 여성들끼리 있을 때는 폭력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성이 개입함으로써 모녀 사이에 단단한 벽이 생기고, 서로는 부딪혀 상처가 난다. 또 모녀간의 만남에 개입할 어떤 자격도 없는 세르쥬나 에르베가 접근 금지 명령을 따르며 마르가리테를 밀치는 과정에서, 딸에게 상처가 나 피가 줄줄 흐른다. 마르가리테는 가정 폭력 가해자로서 접근 금지 명령에 처해졌고, 이에 따라 공간이 규정·제한되었다.      


그러나 세르쥬나 에르베가 마르가리테를 밀치는 행위는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 여성의 폭력은 불법, 남성의 폭력은 합법인가? 그리고 세르쥬는 셀레스티나와 함께 마르가리테의 외모와 삶을 자기 좋을 대로 평가, 투영했고, 이후 에르베는 셀레스티나의 집을 자기 마음대로 뒤바꾼다. 셀레스티나의 정체성과 같은 피아노를 팔아서 더 이상 그녀가 음악인일 수 없고 강사로서 주체적으로 돈을 벌 수 없게끔, 또 마당에 건물을 지어서 자매들이 원하는 미관을 훼손한다. 즉 자격 없는, 그러나 가부장제가 초월적 권한을 부여한 남성이 여성의 공간에 선을 긋고 좌지우지하며, 이로써 여성은 자신의 경계를 침범 당한다. 여기서 반응은 둘 중 하나다. 남성에게 의존적인 셀레스티나, 가부장제에서 요구하는 '임산부'이자 '어머니'가 된 루이즈, 절대자에게 의존하는 마리옹은 수동적인 여성으로서 남성의 공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주체적인 여성, 남성성을 모방하는 마르가리테는 이에 항거하고, 그것이 가부장제에서 불법이다. 수동적인 여성들은 공사, 배치, 건설의 특권을 가진 남성들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좌지우지되고 무기력하다. 직접 돈을 벌기보다는 '지원금'에 의존하고자 서류를 망설이는 셀레스티나다. 그러나 마르가리테는 상처를 감내하고 남성과 다투며 직접 돈을 번다. 셀레스티나의 집에서 쫓겨난 마르가리테는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줄리엔의 집으로 향한다. 집주인인 줄리엔도 마르가리테가 더는 못 싸우도록, 현재 몸에서 상처가 더 생기면 출입금지라고 엄포를 놓는다. 남성의 가부장적인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고분고분한 여성을 주문하지만, 마르가리테는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줄리엔이 배치해놓은 사물을 파괴하며 제 기분대로 공간을 재구성한다. 즉 남성은 여성과 공간을 좌지우지하는 특권을 지니나, 반면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해를 가하더라도 그들의 공간을 구성할 힘이 미미하다. 한쪽 귀가 먹었다고 주장하는 셀레스티나는 딸들의 목소리는 안 들리지만, 남성의 목소리는 바로 인식한다.      


그러나 마르가리테처럼 자신의 삶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며, 그 이유는 남성들이 공간을 구성하며 끊어버리는 여성의 '탯줄'을 재건하기 위함이다. 본 작품은 모녀 사이를 분리하는 '선'도 도드라지지만, 이와 동시에 '줄'도 강조된다. 셀레스티나는 마리옹과 함께 '줄자'를 들고 마르가리테가 접근하지 못하게 선을 긋는다. 이를 작업하는 와중에 마르가리테가 방문하였고, 그녀는 마리옹이 든 줄자를 셀레스티나가 함께 잡은 것을 보자, 그녀와 소통하기 위함인 듯 마리옹의 줄자를 뺏어 든다. 그러나 그 줄은 남성의 접근 금지 명령에 따라 유효하지 않다. 어머니의 복중에서 자녀는 탯줄로 연결된다. 이후 탯줄이 끊어진 이후에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줄로 연결되지 않아도, 여전히 일련의 끈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루이즈가 낳은 쌍둥이의 입이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젖꼭지나 손가락이요, 그 끈을 통해 자녀는 양분을 제공받는다. 그러나 셀레스티나는 계속 끈을 끊어낸다. 세르쥬와 에르베에 의해서 장녀 마르가리테와 선이 그었다. 또 부모는 자녀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긍정해야 한다. 마르가리테는 폭력과 충동만 제외하고는 건실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셀레스티나는 마르가리테의 삶이 제 성에 차지 않는다. 음악적 재능을 썩힌다고 생각하며 결말까지도 그녀를 밀쳐낸다. 크리스마스다, 마르가리테를 제외한 온 가족이 모였다. 그러나 셀레스티나는 모든 가족과 동등하게 줄을 연결하지 않는다. 그녀가 연결하는 줄은 오직 에르베와의 것이다. 그녀는 영화 후반에 이렇게 말한다, “루이즈가 모유를 끊었더니 쌍둥이가 아프기 시작했다”고, 마르가리테에게도 마찬가지의 얘기를 한다. 어머니와 분리되면 자녀는 아프다. 그러나 그걸 아는 셀레스티나가 성탄절에 에르베하고만 이어질 뿐, 루이즈 및 마리옹과는 이어지지 않는다. 줄이 끊어진 여성은 아픈 반면, 남성은 영양이 과다하다. 두 딸은 소외되고, 루이즈는 작작 하라며 어머니에게 성화를 낸다.      


그렇게 세르쥬나 에르베가 셀레스티나가 연결되는 동안, 미성년자인 마리옹이 방치된다. 미성년자인 늦둥이를 내버려 두고 남자와 놀러 집을 비운 셀레스티나에 의해서 마리옹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마르가리테가 확인한다. 그리고 영화 후반에 셀레스티나는 종교적인 이유로 밥을 굶는 마리옹을 방치하여 쓰러지게 만든다. 부모와의 끈이 끊긴 아이는 죽어간다. 그래서 루이즈가 마리옹에게 젖을 물려 다시 일어나게 만들고, 또 그어진 선 너머로 마르가리테와 마리옹은 앰프에 '줄'을 연결하여 음악을 연주하고 꿈을 향해 나아간다.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고,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 간 상호 이어진 줄이, 친화력으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자연스러운 생존법이다. 친밀함으로 서로의 생명력을 주고받으며 생존과 주체성, 자유를 응원한다. 그러나 남성들과 연결된 줄은 다르다. 에르베에게 선물해준 옷을 ‘동시에 함께 입는’ 셀레스티나는 남근을 숭배하며 그들처럼 선을 쉽게 넘고, 책임에 대해선 방종하다. 에르베는 셀레스티나와 마리옹에게 사이즈를 대신 봐주는 친절함과 선물을 받기만 하고, 금연 구역의 선을 경솔하게 침범하며 피해를 준다. 그러나 마르가리테나 루이즈는 마땅히 그녀가 개입해야 할 마리옹의 문제를 제외하면 크게 개인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여성을 착취하여 남성에게만 흐르는 가부장제에 의한 인위적인 줄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생존한 비법인 상호 교류하는 이타적인 줄을 회복해야 하리. 이렇게 선과 줄에 의해서 형성된 인간을 탐구하는 영화, 그렇게 인위적인 선에 의해 만들어지기 이전 인간은 '노래'를 불렀다. 메이에는 노래로 인간과 자유를 탐구한다. 젊을 적 셀레스티나는 촉망받는 피아노 솔리스트였다. 그러나 20세의 이른 나이에 마르가리테를 임신하여 꿈을 접고 강사로 전향하였다. 흔히 춤과 음악은 인간에게 가장 솔직한 예술이라고 일컬어진다. 그 이유는 인간의 몸과 감성에 가장 밀접한 예술이기 때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음악이 의지 그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한 사랑의 속삭임, 광기의 노여움, 정열의 충동 등이 음악의 추상적인 선율 바로 그 자체다.      


이성적인 예술들이 개체 사이에 경계를 긋는다면, 감성적이고 본능적이며 충동적인 음악은 내면과 찰싹 달라붙어 일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을 다루는 본 작품에서 개체 사이에 선을 긋는다는 점이 모순이다. 여하간 음악은 나의 감정이자 본능이며 내면 그 자체다. 그런데 셀레스티나는 바로 그 음악이 마르가리테 때문에 불발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른 나이의 임신은 남성을 원망해야 하겠지만 그가 모녀 사이를 분리하기 위해 그은 선 때문에, 특히 엄마가 딸을 적대시한다. 더욱이 남자는 제 책임에도 선을 긋고 딸에게 타자화한다. 이를 통해 남성은 본래 여성과 그어진 선을 슬그머니 지우고 넘어서서 어머니의 사랑을 독점한다. 또 셀레스티나는 마르가리테가 음악적 재능을 썩힌다고 생각한다. 셀레스티나는 기악음악인인 반면, 마르가리테는 싱어송라이터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음악관이 딸과 맞지 않는 걸까. 또 셀레스티나가 남성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집에 주저앉혀진 여성이라면(<홈>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의 여성성을 따르는 셀레스티나는 실내의 인물이다), 마르가리테는 남성적이다. 남성은 무력을 이용하여 선을 긋고, 또 마르가리테를 놀리면서 남성이 다루기 어렵고 까다로운 여성임을 검열하며 비난함에도, 그녀는 남성성을 모방함으로써 자유에 다가선다. 마르가리테는 생물학적으로 여성보다 강점이 있는 남성의 육체노동에 참여하고, 또 가부장제 내에서 감시의 특권이 있는 남성의 일인 경비원이 된다. 남성은 여성이 선을 넘지 않나 감시하고, 여성은 선을 넘은 남성을 쉽게 징벌할 수 없지만, 마르가리테는 금연구역의 선을 넘은 에르베를 통제한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남성을 모방하는 한편, 마르가리테는 노래하는 본원을 잃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향후 남성적 직업이 아닌, 무대에 서며 자신을 회복한다. 또 셀레스티나가 말하길 루이즈는 재능이 없어서 노래하기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재능이 있는 여성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가? 모든 여성은 재능이 어떠하든 제 감정을 널리 표현하고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에게만 가해진 노래의 조건을 위한 선을 지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전적으로 노래하는 마르가리테와 달리, 마리옹은 그리스도에게 호소하는 찬송가를 부른다. 남성에 의해 여성은 수동적이고 무기력할 것이 내면화된다. 이에 여성의 주체적 노래는 의존적인 찬송가로 뒤바뀐다. 그녀들의 주체적인 노래나 연주는 잘 들리지 않는다. 셀레스티나는 마르가리테 핑계를 대면서, 실제론 피아노를 처분하겠다는 에르베에 의해 더는 연주할 수 없다. 또 마르가리테와 마리옹의 길가 연주는 거대한 화물차, 곧 남성적인 것이 자아내는 소음에 의해 소란스럽게 묻히고, 반대로 마리옹의 수동적인 노래가 셀레스티나의 귀나 피아노에 관한 진실을 은닉한다. 줄리엔은 마르가리테에게 공연을 제안하지만, 그녀는 선뜻 응하지 못한다. 자신을 드러내기가 두려운가. 그렇게 목소리 없는 여성들은 산만한 소음, 수동적인 노래, 남성들의 지시에 잠식되어 존재가 희미해지고 흩어진다. 그러나 다시 노래해야 한다. 가정폭력 사건 이후 마리옹은 노래하지 않지만, 마르가리테에 의해 다시 노래한다. 마르가리테 또한 무대에 오른다. 산만하게 집중을 분산하는 현실과 달리, 무대의 조명은 오직 마르가리테만 바라본다. 즉 노래하고 이를 들어주는 공간에서 존재만 오롯이 보존한다. 메이에는 이를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그 이전까진 기존 장소에 선을 긋는 행위를 반영하는 각각의 숏을 재빠르고도 거칠게 자르고 분리하는 편집이었다면, 노래하는 장소에서 마르가리테는 더는 잘리지 않고 존재와 노래하는 행위를 생생히 보존한다. 이렇게 다시 노래하는 영화는 객체에서 주체로 회복하는 여정을 담는다. 영화 도입부, 셀레스티나는 아주 우아한 귀부인의 복식과 화장을 하고 있는 반면, 마르가리테는 어떤 꾸밈 노동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셀레스티나가 남성의 시선에 보기 좋은 객체라면, 마르가리테는 자신에게 솔직한 주체이자 대자다. 이러한 주체를 향해서 세상은 '시선'을 쏘아보며 특정 객체를 요구·지시한다. 애초에 폭력 사태가 세르쥬와 셀레스티나에 의한 객체화를 거부하는 마르가리테의 몸부림에서 발생하였고, 이후에도 고분고분한 여성과 딸이 아닌 마르가리테를 세르쥬가 밀어낸다.      


또 마리옹이 탄 통학 버스에서 아이들은 ‘싸움꾼’인 여성 마르가리테를 별종이라며 비웃는다. 객체적 요구는 기존 주체적 육체와 충돌하며, 주체적으로 투쟁하느라 이미 상처가 가득한 몸에 상처를 또 더한다. 세르쥬와 에르베가 원하는, 선을 넘지 않는 여성을 위해서 마르가리테의 몸에 상처가 늘어만 간다. 상처가 많아짐으로써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움직임을 제한하기 위함인가. 또 마르가리테가 원하는 셀레스티나를 위해서 귀에 상처가,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집과 사회는 상처를 보듬고, 객체를 주체로 회복하는 사적 공간이어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 봉사하는 공적 공간이 아니라. 줄리엔은 마르가리테가 난폭해도 내쫓지 않고, 그녀의 상처를 성심성의껏 치료하며, 노래할 기회를 제공한다.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다. 서두에 언급한 레비나스의 말처럼 부모는 자신의 삶을 무한히 간접 연장하기 위해 자식을 낳는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와 닮은 분신임과 동시에, 고유한 자유를 추구하는 타자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열망을 투영한 객체를 요구하나, 그 열망을 꺾고 그들을 주체로 존중해야 한다. 루이즈는 일란성 쌍둥이를 낳았다. 구분하기 힘들고, 특히나 셀레스티나에게 쌍둥이는 자신을 '할머니'로 만들어준 ‘수단’이다. 그러나 얼굴은 같지만, 각기 다른 이름과 특징이 있는 쌍둥이를 개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마리옹처럼. 퇴원하는 셀레스티나는 세르쥬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즉 남성에 의해 여성은 운송된다. 그 단단한 차를 마르가리테가 가로막고 맞선다. 세르쥬는 마르가리테를 쳐버릴 것처럼 난폭하게 밀어붙이나, 그녀는 쉽게 밀리지 않는다. 객체임을 요구하는 부모가 자식을 파괴한다. 하지만 자식은 밀리지 않고 이러한 부모에게서 제 자유를 사수한다. 이러한 일방적인 밀어붙임과 폭력의 관계는 부드럽고 유연하게 섞이는 '화음'이자 '협연'으로 전환되어야 하리. 마르가리테와 마리옹의 협연, 줄리엔과 마르가리테의 화음, 이들은 서로 중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양자 모두 고유하게 보존한 상태로 조화롭게 뒤섞는다. 

물론 영화의 결말, 어머니 셀레스티나는 여전히 철부지처럼 생각 없는 말을 내뱉고, 마르가리테는 그저 어머니를 응시하며 침묵한다. 화음은 불발하고, 세르쥬가 다만 에르베로 대체되었을 뿐인 상황에서 영화의 도입부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도돌이표, 자녀는 여전히 부모를 들이박을 것이다, 자유를 위해. 폭력적이고 급박한 도입부에 우아하고 숭고한 오페라를 삽입한 이유, 부모가 부여한 선을 뛰어넘어 해방하려는 움직임을 슬로우모션으로 하나하나 붙잡은 이유가 바로 자유의 신성함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메이에는 남성이 긋는 선에 의해 좌우되는 여성과 여성적인 줄의 상실을 진단한다. 그러나 여성적인 줄이 이어내는 개인들 간의 솔직한 목소리와 자작곡은 회복되어야 하리. 접근 금지 명령 이후의 ‘탈의’, 줄리엔의 집에서의 ‘목욕’, 셀레스티나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마르가리테의 ‘전라’ 등, 여성에게 입혀진 옷과 그 이전의 솔직한 몸도 주목할 법하다. 사실적이면서 동화적인 메이에의 개성이 묻어나는 신작, 다만 프레임 내의 차갑고 어두운 미장센 외의, 촬영이나 편집에서의 영화적 강점이 덜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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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26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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