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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28. 2023

레일라 부지드,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

문턱을 넘어서

레일라 부지드(Leyla Bouzid),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A Tale of Love and Desire) - 문턱을 넘어서    

“개인의 운명에 대한 염려, 끊임없이 감정이 들끓어 오르는 자기의 몸뚱이를 느끼는 일 등, 인생에서 근본적인 책임이 사라져 버린 마당에, 그만 계속해서 똑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순 없었다. 그의 내부로 우수가 밀려들어 왔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심리학자이자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향해야 할 삶의 태도로 '창조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지금까지 국가는 맹목적으로 권력에 조아리게 만드는 권위주의와 비양심적이고 잔혹한 착취로 국민에게 '수동적 감정'을 보편화하였다. 내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목적에 따른 느낌, 이로써 인간의 수단화를 구조로써 만들어냈다. 수동적으로 느끼는 우리는 내게 솔직할 수 없고, 다만 막연하게 수용할 뿐이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느끼기 시작할 때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고,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며 비로소 나의 것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동적 감정인 수치심, 죄책감을 느끼고, 이에 따라 검열하며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인간은 비로소 자기애를 느끼기 시작한다. 증오와 다른 사랑, 그것은 연모하는 대상의 행복과 발전, 자유를 위해 매진하고 기도하는 행위다. 사랑하는 나는 내가 고양되고 해방되길 갈망한다. 그리고 자기애에 의해서 나와 닮은 타인도 사랑할 수 있고, 또 타인과 사랑하며 자기애도 상호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즉 사랑에는 자유와 솔직함, 자기 인식과 타인 존중이 서로 뒤엉켜있다. 반면 욕망은 사랑과 달리 자립적이지 않다. 욕망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의존적이고 파괴적이며 자아 말살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관점에서 레일라 부지드의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과연 어떤 욕망과 사랑이 널뛰고 있을까? 1984년 튀니스 태생의 레일라 부지드는 튀니지의 영화감독이다. 튀니지의 영화감독 누리 부지드의 딸인 레일라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현재 프랑스와 튀니지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최근 국제 영화계에서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즉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 영화감독들의 활발한 활동에 주목한다. 레일라 부지드 또한 새로운 중동의 물결에 일조하는 감독이다. 그녀의 장편 데뷔작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을 짚어보자. 일단 미혼모는 아니지만 여성 혼자 양육을 전담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리암 투자니의 <아담>에서도 강조되는 바로 남성 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의 불평등이 여성에게 미치는 파장을 고발한다.      


또 그녀는 몸과 욕망에 관심이 많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에서 주인공 파라는 가수로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가사에 투영하고, 이것은 남성 청취자들의 반발과 국가의 검열을 불러온다. 그녀가 몸과 욕망을 탐구하는 이유는 가부장적인 남성에 의해 검열되기 이전, 솔직하고 당당한 여성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젠더 불평등과 더불어, 튀니지 내 베르베르인과 흑인 간의 불평등을 파라의 어머니 라예트와 그녀가 고용한 흑인 가사도우미의 관계로 탐구한다.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며, 후자는 불안한 경제적 입지에 의해 전자의 부당한 요구를 묵묵히 수행하고 따른다. 이러한 그녀의 색채는 다니엘 아르비드의 <베이루트 호텔>이나 <파리지엔>, 나딘 라바키의 <카라멜>, 요아나 하지토마스(with. 카릴 요에이)의 <메모리 박스>, 카우타르 벤 하니야의 <미녀와 개자식들>, <피부를 판 남자>와 같은 타 무슬림 여성감독들의 작품과 유사하다. 강자 남성 무슬림의 시선에서 은폐하는, 약자 여성이 체감하는 부조리와 서구 백인들이나 자국 내 흑인들과의 권력관계를 솔직하게 묘사하며, 궁극적으로 자유를 천명하는 점에서 말이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에서 남성들의 시선이 곧 검열이다. 픽션과 솔직한 홈비디오에 촬영된 푸티지가 교차하는 작품, 후자에는 파라의 진솔한 노래와 이에 반발하는 무슬림 남성들의 반응이 생생하게 담기지만, 그것을 국가가 압수하고 파라를 납치한다. 경찰은 파라 실종을 수색하지 않는다. 납치범과 경찰은 한통속이다. 경찰에 납치되기 이전에도 파라와 보렌의 사랑을 도처에서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방해했고, 이러한 검열에 따른 수동적인 여성상이 내면화된 라예트 또한 파라를 의대에 진학시키려 하며 그녀의 육신을 단속한다. 라예트는 과속하며 자기 말에 따르지 않으면 죽어도 좋다는 듯 딸을 협박하나, 레일라는 이에 굴하지 않는 여성, 남성에게 좌우되지 않는 사랑을 통해, 제 몸과 마음에 솔직한 ‘춤과 노래를 즐기는 여성’을 꿈꾼다. 궁극적으로 남근 숭배에 일조하는 어머니로부터, 딸의 노래를 지지하는 어머니로의 이행, 이로써 여성들 간의 연대를 호소한다. 즉 구조, 남성, 타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을 기원한다.      


레일라는 튀니지가 아니라, 튀지니 출신의 파리 유학생 파라와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가정에서 자란 아흐메드의 사랑 이야기로 되돌아온다. 튀니지에서 검열당한 젊은이들의 자유와 욕망은 이슬람 사회와 비교했을 때 매우 자유로운 파리에서 어떻게 펼쳐질까. 본 작품의 시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밤인데 조명까지 희박하다.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윽고 붉은 조명이 서서히 발산되며 어떤 형체가 일렁이고 아른거린다. 여기에서 '붉은 조명'은 레일라의 전작,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에서 파라의 연애를 찬미하는 형식으로 사용된 바 있다. (외에 튀니지에서 검열당한 ‘파라’라는 이름이 이젠 파리에서 분방하게 존재하고, 전작에서 파라의 음악을 반대하던 라예트를 맡은 가니아 베날리가 본 작품에서 '가수'로 등장하며, 그녀의 작품 속 여성의 권리는 점차 진보한다) 나와 상대방의 온기, 끓어오르는 피와 살덩이에서 비롯한 ‘붉음’, 물론 그것이 타인의 시선이 덜 미치는 흐릿하고 혼탁한 어둠에서만 가능할지라도, 붉은 조명은 언제나 인간의 곁에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다. 이윽고 붉은 조명이 가리키는 것이 보다 명확히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뚜렷하진 않지만 유리창 너머로 불그죽죽한 무언가가 비친다. 영화의 도입은 클로즈업이기에 분명 가깝다. 그러나 유리창에 의해 불투명하게 매개되어 낯설고도 멀게 느껴진다. 이윽고 유리창에 비친 정체가 드러난다. 유리창은 욕실의 문이었고, 그 안에는 주인공 아흐메드가 샤워하고 있다. 즉 불투명하게 매개된 무언가는 아흐메드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피부, 근육, 뼈대였다. 이렇게 감춰진 육신은 무언가에 의해 간접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직접 드러날 수 있어야 한다. 이윽고 카메라는 문 너머로 향해 아흐메드의 떡 벌어진 등짝을 비춘다. 그렇게 문을 넘어서는 영화, 이후 아흐메드가 대학교로 첫 등교를 한다. 욕실의 문을 넘었던 그는 이제 엘리베이터의 '문', 아파트 '출입문'을 넘는다. 갇혀있던 육체는 널따란 세계로 나간다. 클로즈업은 풀숏이 되고 롱숏이 되어, 세계에 아흐메드가 참여한다. 그러나 등교하는 과정에서 파리 테러의 여파인지 검열을 당한다. 롱숏에서 다시 클로즈업으로 돌아가는 영화는 유리된 세계와 자기 폐쇄적 거리감을 드러내는데, 즉 프랑스의 아랍인은 언제나 자신을 불명확하게 매개할 수밖에 없는가.     


이렇게 도입부를 살펴보았다. 도입부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몸'과 '문'이었는데 레일라는 본 작품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탐구한다. 서구 내 무슬림, 아랍인의 삶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말이다. 일단 몸, 곧 신체부터 살펴볼까. 검문을 마친 아흐메드는 강의실로 향한다. 그리고 머리가 곱슬곱슬한 아랍계 소녀를 자연스레 쳐다본다, 흡사 자신을 바라보듯 자연스럽게 의식할 새도 없이. 이후에도 아흐메드의 눈은 그녀에게 향한다. 적나라하진 않아도 힐끔힐끔 쳐다본다. 그러나 눈은 솔직할지언정, '입'은 정직하지 못하다. 눈이 몸과 관련한다면, 입은 뇌를 거쳐서 무언가를 말하는, 동물의 입과 달리 인간의 입은 이성적이고 정신적인 역할도 겸한다. 그 입이 봉인되어 제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그 소녀, 파라에 의해서 두 남녀는 겨우 대화의 운을 뗀다. 이후 강의에서 또 아흐메드는 파라를 쳐다본다. 이윽고 교수가 아흐메드에게 낭송을 시킨다. 그러나 소년의 입은 소극적이다. 말하지 못한다. 애초에 강의 첫날에도 교수가 앞줄로 오라는 말에 백인 학생들, 그리고 능동적인 파라는 앞으로 당긴 반면, 아흐메드는 교수와 자신의 물리적 거리감을 좁히지 않는다. 수업에 무관심하지 않은 그는 다가가고 싶었을지도, 그러나 다가가지 못한다. 이후 파라와 아흐메드는 데이트한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파리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파라의 집에 간다. 아흐메드의 손은 파라의 몸 위에 놓인다. 그리고 남근도 한껏 달아오른다. 그러나 네 발로 걷는 다른 포유류와 달리, 이족 보행하는 인간 아흐메드의 '두 다리'는 파라에게서 도망친다. 즉 아흐메드의 몸은 이원화되어 움직인다. 하나는 자신의 솔직한 본능의 지배요, 다른 하나는 이후 살펴볼 외부 규율과 종교, 타인에 의한 지배다, 그들이 지금 여기에 부재하더라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아흐메드는 발표를 미루고 또 미루다 결국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의 입이 열린 반면, 그의 눈은 소극적으로 다른 학생들의 동공과 얼굴을 응시하지 못한다. 그리고 신년 파티에서 파라가 아흐메드에게 키스한다. 그러나 아흐메드의 눈동자는 두리번거리고 허둥대며 눈과 입은 또다시 일치하지 않는다. 입이 본능적이거나 자신의 것일 때는, 이제 눈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이처럼 아흐메드의 신체 각 기관은 따로 논다. 그의 신체는 자신의 지배보다는, 외부가 더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이는 아흐메드의 꿈 시퀀스에서도 나타난다. 문신기구나 칼로 추정되는 물체를 든 손이 아흐메드의 척추를 긋는다. 척추를 따라서 목까지 오게 된 손과 물체는 그의 목을 쿡 찔러 출혈을 발생시킨다. 타인의 손과 기구에 따라서 아흐메드의 육체는 그어지고 그려지며 생사가 결정된다. 아흐메드는 화들짝 놀라서 깬다. 또 도서관에서 파라와 레아는 아흐메드가 동정이라거나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인지 여러 추측을 해본다, 그의 미적지근하고도 소극적인 태도가 도통 속을 알 수 없어서 말이다. 이윽고 아흐메드가 나타나서 그녀들의 발화를 중지하지만, 정확하게 자신이 무어라고 선언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무슬림 공동체에 부합하면 그만이지, 독립적인 자아는 희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자신을 포기할 정도로 무슬림 공동체에 부합하는가? 일단 연출의 차이에서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아흐메드 가정은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부모님의 구속이 심하진 않지만, 남매는 그들의 눈치를 본다. 가정은 스테디캠으로 포착된다. 안정적이고 온화하지만, 아흐메드의 동생 다릴라는 오빠에 의해 자신의 연애가 엄마에게 탄로 날까봐 전전긍긍한다. 즉 집안의 안정성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식이 작동할 때 부여된다. 이후 아흐메드가 속한 젊은 남성 무슬림 무리에서 다릴라의 연애를 질타한다. 그녀는 비랄이라는 사내와 사귀는데, 그의 행실이 영 좋지 못한지, 무슬림 공동체의 평판을 폄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흐메드는 다릴라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시선', '평가'에 따라 동생을 질타한다. 또 무슬림 공동체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와 누구나 다 천편일률적으로 사는 '전체주의'적 획일화를 강요한다. 아흐메드는 이에 따라 파라와의 연애나, 학교에서 권리를 지키는 것에 소극적이다. 공동체와 다른 방향이기 때문이다. 교수는 아흐메드에게 그렇게 패배적이면 제 권리를 지키지 못한다고 충고한다. 타인, 가족, 종교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소극적인 아흐메드에게 파라는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본 장면은 페이드아웃에 의해 어두운 숏이 빠르게 침입하여, 불그죽죽한 숏을 가리고 차단한다. 빨간 피와 살로 이뤄진 내 몸이 어둠에 가려 불연속된다.     


아흐메드가 파라를 만날 때는 항상 핸드헬드가 동반된다. 좁은 책상과 의자의 틈 사이로 들어가기 위해서 소년과 소녀가 몸을 밀착할 때, 이후 비교문학 강의에서 고전 아랍시의 에로틱한 경향을 설명할 때 카메라는 부르르 떨린다. 그 핸드헬드는 타인에 의해서 유발되는 흔들림은 아니다. 떨림은 전율하는 자신의 진동이다. 극의 후반부에 핸드헬드가 아흐메드가 아파트를 바라보는 시선임이 밝혀진다. 또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소년의 몸과 흔들림을 반영한다. 그리고 제 기분에 따라 중간고사를 포기할 때도 핸드헬드가 사용됐다. 핸드헬드의 결과는 중간고사 포기로 인한 '낙제'일 수도 있고, 춤 또한 어지럽고 불안정하다. 아버지는 알제리에서는 기자였으나, 프랑스에 와서는 백수이자 패자로 전락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프랑스에서의 삶을 스테디캠으로 유지하게 해준 것이 무슬림 공동체이자 알제리인으로서 정체성 아니었을까. 검열당하고 취업이 쉽지 않은 불안한 입지 때문에 아흐메드 또한 핸드헬드보다는 타인에게 기대는 스테디캠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무슬림 무리는 아흐메드에게 이삿짐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제공하기에 말이다. 그러나 타인에 의한 자신은 스스로에게 저 멀리 소외된다. 아흐메드가 과제를 발표하는 숏에서 눈과 입이 따로 노는 아흐메드는 카메라에서 멀리 떨어져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에게 말을 거는 건지, 또 어디에 서 있는 건지 외면하던 눈에서, 제 위치와 나를 바라보는 대상을 확인하는 솔직한 눈을 회복할 때, 영화에서 '줌인'이 사용된다. 비로소 아흐메드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그리고 아흐메드의 가까워짐, 곧 육체와 자아·영혼의 일치는 진솔한 생각이 담긴 문학에서 기인한다. 문학과 예술은 그것을 감상자가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서 한갓 허구로 전락하거나, 반면 허구지만 실제적인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처음에 아흐메드는 에로틱하고 섹시한 고전 아랍 문학에 반감이 있었다. 파라는 고전 아랍 문학의 성적 개방성에 매료되는 한편, 아흐메드는 이를 부정한다. 제대로 접하지도 않을뿐더러, 이는 문학이 아니라며 거부한다. 파라에게 책에 담긴 에로틱한 문장과 단어는 현실이 된다. 그녀는 소설의 작가나 주인공이 좋아하는 와인에 매료되어 현실에서 이를 직접 마셔본다. 파라에게 책이 가리키는 기표는 곧 현실의 기의를 실현하며, 둘은 일치한다.     


그러나 아흐메드에게 문학의 기표는 둥둥 떠다니지 결코 현실에 접합되지 못한다. 분명 문학은 아흐메드가 파라에게 품은 욕망과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녀를 좋아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이슬람 사회의 검열이나, 그녀에게 몸을 조심하라거나 글에 대해서 훈수를 두되 사랑에는 소극적인 마초주의에 의해서, 아흐메드의 사랑을 가리킬 수 있는 기표는 허구로 전락한다. 즉 진실한 몸과 언어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거짓이 된다. 이와 더불어 어렸을 적부터 글을 써온 아흐메드는 문학에 대한 독특한 신념이 있다. 아흐메드는 발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환상으로 남아야 신성해진다. 현실에 이뤄지는 사랑은 실망한다." 파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흐메드는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인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일지 모른다. 흡사 <헤어질 결심>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의 사랑만이 정답은 아니다. 교수는 아흐메드가 지향하는 것처럼 신성하고 고귀한 유형의 사랑도 있지만, 사랑에 따르는 육체적 즐거움을 무시할 수 없다고 조언한다. 즉 신성시된 사랑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흐메드를 지배하는 반면, 그의 육체를 반영하는 문학은 자신에게서 유리되어 있었고, 또 공동체에서 말하는 언어를 억지로 육화했다. 더욱이 그의 문학은 입을 통해 직접 말하고 발표하기보단, 내 몸 대신 ‘종이’가 글자를 간접 매개하는 수동성이 도드라졌다. 몸은 글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종이에서 몸으로, 유리창에서 내 피부로, 정신에서 육체로, 또 나만의 도그마에서 타인과의 상호 교류로 넘어서야 한다. 문턱을 넘어서는 첫 번째 작업이 바로 글자를 넘어서는 일이다. 아흐메드는 교수의 조언을 흘리지 않고 잘 귀담아들은 이후, 집에 돌아와 아랍 소설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아주 매혹적인 디졸브가 발생한다. 디졸브는 본 작품에서 두 차례 가량 등장한다. 첫 번째로는 교수가 말한 대로 에로틱한 문학에 적대심을 내려놓고 탐독할 때, 두 번째는 파라에게 편지를 쓸 때다. 그리고 양 시퀀스 모두 다 책과 편지라는 '언어'와 파라에 대한 '상상'과 현실 속 그의 '육체'가 포개지며, 문학은 그의 육체와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첫 번째 디졸브에는 음부처럼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를 삽입한다. 문학과 현실은 단절이 아니라, 그러한 틈 사이로 파고드는 에로틱한 교류다.     


디졸브 외에도 지하철에서 아흐메드가 책을 읽을 때, 파라의 손이 그의 가슴팍 위에 올라와 있는 듯한 착란을 느낀다. 즉 문학은 가상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 몸에 실제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또 한갓 종이와 글씨일 뿐인 것이 그간 내가 알던 나보다, 더 상세하고 깊게 나를 가리킨다. 그래서 문학의 문지방을 넘어서면 나를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선 깊이 독해해야 한다. 외국어라면 '번역'해야 한다. 프랑스의 알제리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아흐메드는 프랑스의 인종차별주의자들 때문에 프랑스인으로서 녹아들지 못하고, 보수적인 무슬림 정체성을 강화했다. 반면 튀니지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왔고, 부모님이 모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로 아랍인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파라는 진보적이다. 반면 아흐메드는 불어를 쓰나, 파라는 불어와 더불어 아랍어도 쓴다. 그래서 아흐메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글자를 쓰는 반면, 파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아랍어로 된 편지를 그에게 전해준다. 너무나 다른 서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단순하게 보는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아흐메드는 아버지를 거쳐 편지를 번역한다. 그녀의 다름을 이해하고 편지에 담긴 사랑을 실현한다. 그리고 아버지도 알게 된다. 즉 언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밝혀야 한다. 상대 언어의 모호함을 넘어설 때 비로소 나를 뛰어넘어 타자의 문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고, 문학을 현실로 실현하리. 앞서 도입부에서 문을 넘어선 아흐메드가 집과 현재를 넘어서, 대학교와 과거의 아랍으로 여행을 떠났다. 문을 넘어서야지만 더 널따란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닫혀있다면 유한한 자신을 재생산할 뿐이다. 아흐메드가 파라를 위해서 파리 곳곳의 명소들을 파악하고, 또 파라가 이를 따라와 주는 과정에서 두 남녀는 서로와 파리 곳곳을 더 잘 알게 되지 않던가. 능동적인 상호 교감에 많은 것들이 더더욱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그가 파라와 레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지한 상태에서 그녀들을 억압할 때, 또 도서관에서 파라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흐메드 자신이 원하는 '참견'을 권할 때, 오히려 그녀들은 말소되고 아흐메드가 원하는 마초적인 상황만 남는다. 즉 어느 한쪽만 열려 있거나 수용해서는 안 된다.   


아흐메드는 발코니에서 파라와 함께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을 관찰한다. 똑같이 불면증을 겪는 두 남녀가 보인다. 심지어 밤마다 동일한 TV 프로그램을 보지만, 서로는 벽으로 막혀 있어 알지 못한다. 만약 문을 넘어선다면 둘은 불면증에 대한 고충을 털어놓고 위안을 받을 수 있었으랴. 그러나 닫혀 있기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잠들지 못하는, 이로써 꿈꾸지 못하는 권태가 이어질 뿐이다. 아흐메드는 오토바이를 새로 산 사이두를 알아채지 못했다. 사이두가 헬멧을 쓰고 있어서 그의 신원이 '닫혀' 있었고, 아흐메드는 위협적인 익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슬금슬금 접근하자 방어적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그러나 서로가 열리니 사이두는 아흐메드의 제안으로 파라의 신년 파티에 가고, 아흐메드도 사이두의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또 백인 모두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편견에 닫혀 있는 아흐메드와 달리, 백인 및 능동적인 여성에게 선입견이 없는 사이두는 레아와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닫혀 있으면 가까이 있는 상대라 한들 결코 모른다. 다릴라에게 열려 있어야 가족들의 남아선호사상을 인지할 수 있고, 아흐메드는 한평생 아버지와 같이 살아도 왜 자신에게 아랍어를 가르쳐주지 않았는지 몰랐다. 이에 따라 그와 관계 맺는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를 안다면, 이로써 상대와 관계 맺는 나도 일련의 해답을 찾는다. 서두를 다시 언급하며 정리하자면, 자기애가 없던 아흐메드는 자신의 열망이 도통 흐릿했다. 그러나 아흐메드를 전체를 위한 도구가 아닌, 개별로서 존중해주는 파라와 교수에 의해서 그는 자기애를 확립해간다. 이후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누구를 사랑할지, 그렇게 사랑해준 대상들을 모방한다. 그래서 결말의 아흐메드와 파라는 '특정 옷을 입은 상태'가 아니라 헐벗은 '전라'의 상태에서 진실한 몸과 영혼을 넘어서고, 무표정의 아흐메드는 제 영혼과 기분에 솔직한 '미소'를 짓는다. 자기애가 없는 대상은 타인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며 미천한 자신을 치켜세운다. 그러나 타인과의 교류로 자기애를 찾은 사람은 감히 그 대상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못한다. 그것이 상대방에게서 시작되는 자기애,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연모다. 레일라가 진단하길 지금 이슬람 사회에 필요한 것, 서구에 자리 잡은 무슬림들이 회복해야 하는 것이 서로의 문을 뛰어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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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28 집에서(마이 프렌치 필름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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