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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Jan 30. 2023

플로렌스 미할레, <횡단>

분리와 뒤섞임

플로렌스 미할레(Florence Miailhe), <횡단>(The Crossing) - 분리와 뒤섞임     

“잿빛 배경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남편과 아내는 한날한시에 죽을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한 사람을 보내고 나서도 살아가야 한다.” -안톤 체호프-

인간은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다른 성질'이 밀어낼 것이 아니라, 상호 긍정하고 존중해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사회화 이전, 인간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 인간 본성은 타자를 위협적인 적이라고 느낀다. 우리에게 첫 번째 타자는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르게' 방해하는 어머니다. 아버지가 될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양육에서 배제되어 자녀들과 부딪힐 일이 없는 아버지들은 어머니만큼 타자로서 적대시되진 않는다. 이후 생물학적 섹스를 성장해가고, 사회적인 젠더를 체화해가며 이성이 타자가 되고, 한 국가의 국민으로 거듭나면 외국인, 이민자 등이 타자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타자에 대한 불안은 주로 '경계선'을 넘지 못한 상태에서의 막연한 공포와 선전에서 비롯한다. 실제로 경계를 넘어 대화하면 자신이 느낀 타자 공포가 줄어들다 못해, 친밀함이나 사랑스러움, 이해로 뒤바뀐다. 반대로 경계선을 강화하거나 공포의 대상으로 규정된 타자를 물리치려는 악마화가 계속되면 이는 전쟁으로 확장된다. 서로의 '선'이 강화되어 타자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세계, 그 속에서 선 대신 경계가 불명확한 '색' 뭉치로 혼합되고 뒤섞이는 시대로의 나아감, 그 안에서의 화합을 플로렌스 미할레는 특유의 인상주의적, 표현주의적 화풍의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다. 1956년 파리 태생의 플로렌스 미할레는 프랑스의 만화영화 감독이다.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그림 및 조각 활동으로 초기 경력을 쌓아가다가 1991년 <Hammam>이라는 단편으로 만화영화계에 데뷔했다. 그녀는 유리 위에 잘 마르지 않는 유성 물감을 이용해 매번 수정해가며 그림을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촬영하는 '페인트 온 글래스 애니메이션'과 유리 위에 모래로 형상을 만들어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촬영하는 '모래 애니메이션'을 혼재한 기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기법은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에 비해서 움직임이 투박하고 분절적이다. 이에 따른 비일반적인 연결은 영화적인 움직임 속에서 미술적이고 사진적인 숏 개개를 주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러한 비일반적 주목으로 미할레는 비일반적인 것을 보게 한다.  

앙리 마티스, <춤>, 1910

데뷔작 <Hammam>에서도 그렇고 이후 작품들에서도 미할레의 화풍은 마티스적, 큐비즘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의 형태는 마티스의 <춤>을 연상케 하는 매우 단순한 선과 조형으로 환원되는데, 근원적 단순함으로 되돌아가 비일반적인 것이 된 인간의 본질을 길어낸다. 미할레가 주목하는 인간의 본질 중 하나는 <Hammam>에서의 풍만한 인간의 육체와 목욕탕의 유희 등 무목적적인 즐거움, 춤과 노래, 자유로운 재창조다. 인물들은 제 몸이나 신체를 자유롭게 변용한다. 그것은 곧 <세헤레자데>에서 현실과 불일치하는 이야기, 신화적 특성에도 상응한다. 미할레의 환상적인 특성은 <25 Passage des Oiseaux>에서도 이어져 동물과 인간이 혼재된 자유로운 존재들이 등장한다. 즉 미할레는 비일반적인 것으로 전락한 자유를 재조명하는데, 이와 더불어 미할레가 주목하는 비일반성은 유한한 내가 모르는 다양함과 무한성으로 이는 <이웃 이야기>에서 도드라진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한 인형은 도시 속 무수한 사람들의 손을 거치고 미할레는 그들에게 주목한다. 서커스 맹수의 탈출에서부터 게이의 키스, 노숙자를 말이다. 한편 마약 밀매나 아동 실종 등 다양성엔 언제나 맹랑한 일만 존재하진 않는다. 다양한 존재들을 보고 접촉하며 인류는 기존 상태에서 뒤바뀌는데, 이러한 변용은 모래, 아크릴 물감이란 매체의 부드러움과 매끄러움, 뒤섞이는 특성에서 비롯한다. 데뷔작 <Hammam>에서는 네가 곧 내가 되고, 이로써 모두 하나 되는 평화로운 인류 공동체를 이 같은 매체로 융화한다. <세헤레자데>는 『천일야화』를 미할레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천일야화』의 특징으론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 하나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로 무한히 확장되는 점이다. 그리고 미할레의 페인트 온 글라스 애니메이션은 이전 숏에 물감이 번지거나 덧칠해지고 일부 지워지며 다른 숏이 탄생한다. 이전 숏이 다음 숏에 남아있음과 동시에 변형되는 자신의 기법으로, 현실 속 듣고 말하는 사람에 의해 더해지고 확장되는 이야기를 가시화한다.      


매끄러움 움직임, 수정 및 변화 가능성은 <Hammam>과 <하얀 새, 검은 새>에서 공통되게 등장하는 새에서 인간으로의 변신을 그린다. <이웃 이야기>에서는 고립되어 있었던 서로를 인형으로 이어내고, 그 인형과의 만남을 계기로 발생하는 무한한 변신을 미할레 특유의 연출로 표현한다. 그것은 너와 나의 뒤섞임이지만 미할레는 존재가 보존되는 변형이나 변신을 긍정하지, <이웃 이야기>에서 원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혼탁한 '파괴'나 '연기', <하얀 새, 검은 새>에서 검은 새가 불러오는 불화와 파멸, ‘끝’으로서 변화는 긍정하지 않는다. 미할레가 긍정하는 변화는 원색적이요, <이웃 이야기>의 도시 속 광고판에 그려진 환상으로의 연결이다. <하얀 새, 검은 새>가 확장된 <25 Passage des Oiseaux>에서도 마찬가지로 동물인 올빼미에 인간의 흔적이 묻은 존재는 길조이자 들추는 하양인 반면, 인간이 까마귀의 부리를 한 검은 존재는 감추고 흉흉하다. 동물이 인간의 지성을 갖추는 것은 더 많은 가능성을 밝히지만, 인간이 동물로 퇴보하는 것은 이성적 가능성을 말소하기 때문이다. 미할레는 검정에 의한 축소나 은닉이 아닌, 하양에 의한 드러남으로 연결한다. 즉 미할레는 비일반적인 연결로 마찬가지로 인류에게 비일반적인 것으로 전락했으나 다시 실천해야 하는 '자유'를 매번 부각하고, 그런데도 매끄럽고 유연하게 연결되고 뒤섞이는 움직임, 곧 '영화적 요소'로는 화합이나 연결을 천명한다. 미할레가 첫 번째 장편을 선보인다. 영화의 도입부, 플로렌스 미할레가 만화영화 감독임을 아는 감상자는 아마 아크릴 물감과 모래가 자아내는 두터운 마티에르와 현란한 색채, 단순해진 인류의 형태와 분절적인 움직임을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횡단>은 이런 기대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출발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실사 영화다. 카메라는 미할레의 작업실을 포착한다. 그런데 오롯이 현실도 아니다. 작업실의 창문과 그것이 비추는 바깥은 만화영화로 처리되고, 마찬가지로 가족들의 스케치가 담긴 일기장을 여는 손도 그림이다. 현실에 머물지만 현실이 아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이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는 창밖과 손으로, 일단 창밖, 미할레가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그린 동산 위로 새가 날아간다. 쨍한 색채는 아주 감각적이고, 새가 날아가는 모습은 해방감을 준다. 그런데 그림의 찬연한 원색과 비행이 오늘날의 현실에서 가능한가? 영화의 소재는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발생한 유대인 박해로 미할레가 작중 언급하는 것처럼, 인류의 원색을 삭막한 부동의 '회색'으로 전락시킨다. 비행하게 놔두기보단, 붙잡아둔다. 이러한 타자 박해가 20세기에 종언을 고했을까, 아닌 것 같다, 영화 속 무수한 난민들이 모인 기차역은 곧 오늘날의 풍경과 무관하지 않다. 쿄나와 아드리엘 남매가 어느 한 부르주아의 자택에 인신매매되어 입양된 당시, 그들을 입양한 여성은 인신매매 브로커인 욘과 '컴퓨터'로 연락한다. 본 작품은 미할레가 자신의 할머니와 자전적 이야기를 조금씩 뒤섞어서 만든, 여러 사실을 뒤섞은 허구의 회고물이다. 그렇기에 영화의 시간대는 당연히 오늘날을 기준으로 약 한 세기 이전이지만, 그런데도 그 과거가 오늘날과 겹쳐는 아나크로니즘 장치들이 존재한다. 즉 과거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 기억은 오늘날과 겹칠 정도로 흡사하거나, 또 회고하는 주체에 의해서인지 현재에 과거가 재현된다. 그렇게 재현되는 것이 디아스포라다. 즉 오늘날까지 비극적인 디아스포라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할레는 현실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고향을 떠나는 과정에서 작별한 부모님, 또 여정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무수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현실이 아니라 미할레의 작업실과 그림 속에서만 보존되어, 그때 그 상태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할레의 손도 그림으로 처리된다. 그녀가 속하고 싶은 차원은 비극이 지속되는 오늘날, 소중했던 많은 사람을 잃어버린 현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존재했던 과거, 그것을 승화하고 보존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미할레의 손은 그림이 되어야만 그들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현실에서 출발하여 만화영화로 나아가는 작품, 거기서 미할레는 공간성을 고찰하고, 이에 따른 인간성을 탐구한다.      


영화의 첫 번째 공간은 '숲'이다. 쿄나와 아드리엘 남매가 숲으로 산책을 간다. 숲은 무수한 원색이 빼곡하다. 그 무수한 원색으로 칠해진 나무와 덤불이 아주 빡빡하게 들어차 있다. 그러나 틈이 있고, 또 자유롭게 올라갈 수 있다. 쿄나는 아드리엘의 눈을 피해서 나무로 올라가, 다른 목소리로 '변신'하며 그를 놀린다. 또 숲은 특정 목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훗날 교도소에서의 음식과 약은 교환이나 소유 대상으로서의 목적에 맞춰야만 갖거나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숲의 체리는 남매와 까치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상품이나 소유라는 특정 목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숲 스스로가 겨울에서 봄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그 안에 사는 존재들도 단일한 목적으로 획일화되거나 굳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유동한다. 물론 그렇기에 자연의 변화는 예측불허하고도 변덕스럽다.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가는 숲, 그래서 모든 것이 새하얘진 숲은 남매를 강제로 생이별시키고, 쿄나를 꽁꽁 얼게 만든다. 까치는 쿄나의 귀걸이나 브로치 등을 마음대로 집어 채간다. 이렇게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부정의 가능성도 내재하나,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얼음으로 얼어붙었던 것은 녹아내려 샤워와 소변을 허용하고, 액체로 녹아내린 물 위론 남동생을 상상할 수 있다. 또 자연의 약탈은 훗날 까치가 브로치를 되돌려주고, 그것이 탈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희망으로 뒤바뀔 수 있다. 숲의 존재 마녀는 경찰이나 군인의 법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며, 이러한 국가와 법에서 이탈할 때 도주하는 쿄나에게 자유가 허락된다. 그런데 숲에 계속 머물 수 없다. 도입부에서는 마을이 불타서 숲을 떠났고, 쿄나는 마녀의 숲을 떠나 아드리엘을 찾으러 가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친척이 있는 마을이다. 즉 인간은 숲 인근에 살더라도, 결국 인간끼리 모여 사는 인세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미할레는 자유로워야 하는 인간이 법과 규칙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인세를 반성한다. 본 작품의 초입에서는 영화로 따지면 '디졸브', 회화로 따지면 '콜라주'에 가까운 기법이 활용된다. 본 기법을 활용하여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나 국경을 넘기로 계획한 가족을 비춘다.      


가족은 아직까진 차가운 현실과 직면하진 않았다. 희망차진 않지만 그래도 마냥 절망할 순 없는 가능성이 잔존한다. 그래서 잠든 쿄나가 꾸는 몽상이 현실로 이어진다. 그리고 가족의 계획에 상응하는 '지도'가 창밖에 수놓아지거나, 또 지도 위에 가족들의 여정이 새롭게 그려지고, 고정되어 있던 지도는 뭉개진다. 물론 여러 가능성을 그려보는 몽상이나 공상에는 배가 침몰되거나 탈출이 실패할 가능성도 동반한다. 그런데도 조각처럼 딱딱하게 경계를 고정하는 선, 특히 직선이 아니라, 경계를 불분명하게 흐트러트리는 색채와 곡선의 가능성은 희망을 동반하고, 이는 자연과 그 인접의 시골과 경계를 횡단하는 '기차역'에서는 있었다. 그런데 향후 영화는 경찰과 군인, 보편적인 시민들로 가득한 직선적인 도시와 감시하는 시선이 빽빽하게 들어찬 부르주아의 저택, 모든 사람을 똑같은 행색으로 통일하는 교도소로 옮겨간다. 변화의 가능성은 말소된다. 숲에서 나무 위로 올라간 쿄나는 마을이 불타는 상황을 확인한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앞서 미할레의 예술론을 언급할 때, 검정색은 가능성의 말소에 상응한다고 말한 바 있다. 본 작품에서도 그러하며, 미할레의 작품 세계가 아니더라도 검정은 기존의 개성을 간직하고 있던 원색들이 서로 뒤섞이며 최종적으로 향하는 '끝'으로서 죽음을 상징하는 색채다. 하양도 눈보라가 몰아친 겨울의 숲처럼 '무(無)'에 상응할 수 있지만, 그 하양은 이윽고 나무에 이파리를 틔우고 사슴을 등장시키는 시작의 무다. 그렇게 끝의 무에 낙담하지 않고자 피난길에 오른 가족, 이윽고 부모님과 결별하여 남매 단둘이서 도시로 향한다. 부모는 자신들이 죽더라도, 간접적으로 다시 시작하고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 분신인 아이들에게 남긴다. 그래서 부모 자신을 희생하고 아이들을 살린다. 그렇게 살아남은 아이들이 도착한 도시는 숲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숲의 나무와 덤불과 꽃과 풀처럼, 도시에는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러나 사이사이 틈이 있어서 너머로 향할 수 있고 자신을 오르는 것을 허용하던 나무와 달리, 건물 숲을 이룬 도시는 사방이 막혀 있고 위로도 올라갈 수 없다.      


더욱이 도시의 건물들은 특정한 사명을 갖고 있다. 그 사명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만약 벗어나면 존재 가치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 도시와 건물 주변에 둘러싸여 사는 경찰, 군인, 국민도 마찬가지로 획일화된 정체성이나 목적, 의무를 부여받으며 서로 똑같은 보편자가 된다. 그래서 타자를 쫓아내는 보편자들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용모, 서로를 분간할 수 없게끔 그려진다. 그리고 색채도 검정 그 자체이거나, 검정으로 향하는 채도가 낮은 거무튀튀한 색채다. 즉 가능성을 말소하는 도시에서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기준이 되는 보편성에 맞춰서 살지, 나로 살지 못한다. 가능성 없이 검정으로 막힌 삶은 광대한 자유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원색적 환경에 머물러야만 한다. 쿄나와 아드리엘은 어느 한 부랑자 청소년 그룹과 접촉한다. 이후 그들과 동행하는데, 호화롭지만 모든 것이 조각처럼 '굳어' 있고 막혀 있던 도시와 달리, 부랑자 촌은 쓰레기장 인근이지만 색채가 다채롭고 쫓겨난 타자들의 개성을 소각하지 않는다. 불태우는 검은 연기가 마을을 가렸다면, 쓰레기장 인근에서 원색으로 반짝거리는 부랑자들은 찌꺼기 더미 가운데서 반짝이고 쓸모 있는 것을 찾아낸다. 가능성이 없다고 치부된 쓰레기 중에 여전히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들을 찾아낸다. 이렇게 쓰레기의 기존 목적을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쓸모없다고 평가받았기에 도시 중심부에서 밀려난 그들 또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부활한다. 쿄나와 아드리엘 남매를 입양한 부르주아 부부 중 부인은 '배우'다. 연기하고 꾸미는 배우는 마찬가지로 아드리엘과 쿄나에게 연기를 주문한다. 그것도 변신의 한 유형으로 볼 순 있다. 그러나 타인의 기대가 강제하는, 이로써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변신이다. 금발만이 가능한 공간에서 흑발로 변신하는 것과 달리, 다양한 머리색을 사회가 유일하게 허용하는 금발로 바꾸는 것은 제한된 변신이다. 쿄나의 억센 머리를 잘라버리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엔 호사스럽고 아름다운 부르주아의 대저택이지만, 그곳은 원색들이 각자의 개성을 보존할 수 없는 '새장'이요, 손님으로 찾아오는 군인과 경찰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가식적인 타율에 의한 변신이다.      


타율이 강제한 원색은 역겹다. 피터와 자넷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개명되어 자유로운 본래의 존재를 왜곡하여 얻어낸 아름다움은 고약하다. 미할레는 부르주아의 사치스럽지만 고약한 집을 모든 색채가 부조화하게 뒤엉킨 화풍으로 처리한다. 이후 숲을 지나서 남매는 이곳저곳 유랑하는 서커스단에서 재회한다. 부르주아의 집에서 남매는 객체가 되었다. 남매는 부르주아에 의해 규정되고 관리되는 프롤레타리아로서, 원치 않지만 두 남녀를 부모로 호칭하고, 그들에게 보기 좋은 예법과 행실을 '노동'처럼 이행한다. 사실상 부르주아를 위한 사물로 전락하고, 그들이 규정해놓은 경계선(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는 본 작품을 <남매의 경계선>으로 번역했다), 국경을 넘어서면 안 된다. 그러나 항상 국경을 횡단하는 서커스단에서는 단장이 엄마라는 호칭을 금지하더라도, 단원들은 자유롭게 단장을 부르고 싶은 대로 호칭한다. 남매의 환상을 말소하던 부르주아와 달리, 단장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휘황한 환상을 관객들에게 매개하고, 여성 댄서로 군인들을 유혹하여 직업에 따라 제한된 목적 너머의 환상에 다가선다. 즉 국경을 넘어서고, 국가가 부여한 객체라는 목적에서 벗어날 때, 개인이 꿈꾸고 그려온 환상에 근접할 수 있다. 지도가 가리키는 환상적인 지역에 서서히 도달하는 서커스단, 그러나 남매는 욘의 손길이 닥쳐오자 위험을 감지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군인에게 붙잡힌다. 탈출 과정에서의 '바위산', 그리고 그 바위산 분지에 있는 '수용소'에서 경계는 그 어느 때보다 삼엄하다. 아주 딱딱하고 빽빽해서 뛰어넘을 수 없다, 그 경계가 구분하고 만들어놓는 죄수임을. 남매는 경계선을 뛰어넘을 수 있을 때, 부르주아가 부여한 부당함을 극복하지만, 뛰어넘을 수 없을 때 죄수로서의 부당함에 체념하고 순응한다.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공간과 뛰어넘을 수 없는 공간, 전자에서는 인간이 자유롭지만, 후자에선 자유를 박탈당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시의 시민들과 군인, 경찰들은 모두 검정색이다. 그리고 원색의 부랑자들은 검정색 탈을 뒤집어쓰고 '절도'하는데, 그것이 곧 국가가 요구하는 보편성이다.      


보편적인 검정들은 타자를 약탈하고, 그들에게 쿄나가 빼앗긴 것은 그녀가 가장 소중히 아끼는 스케치북이다. 스케치북엔 쿄나가 타인들과 같지 않은 고유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기억과 화풍이 수놓아져 있었는데, 이를 빼앗겨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한다. 즉 도시는 타인의 자유를 약탈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따르는 경찰과 군인은 자유를 향해 도주하는 남매를 수색하고 국경을 가로막으며, 평범한 시민들은 민병대이자 공범이거나 방조자다. 그러나 미할레에게 인간은 법을 따르지 않는 ‘반항아’다. 아드리엘과 달리 쿄나는 부르주아의 집에서도 항상 반항했다. 부인은 남매가 따라야 할 법을 만들곤 하는데, 쿄나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호락호락하게 맞춰주지 않는다. 또 잘생긴 소년 에르데완은 여자라면 으레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여성의 선택 가능성을 축소하나, 쿄나는 그에게 결코 호락호락하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은 에스칸데르에게 향한다. 또 죄수로서 묵묵히 최후를 기다리지 않고 에르데완, 이시와, 아드리엘과 탈출을 시도, 즉 국가가 강제한 운명에서 반항하며, 브로치를 빼앗으려던 간수에게 저항했던 것이 욘을 물리치며 탈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즉 미할레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음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고, 이로써 자유를 그릴 수 있었던 기원을 장편에 기록한다. 작년 개봉한 <나의 집은 어디인가>가 떠오른다. 운명에 의해 자유가 감춰지면 가능성이 제한된다. 수용소에서 죄수에 의해 감춰진 강아지가 '식용'이라는 역할로 제한되는 것처럼, 반면 그 상태에서 저항하고 도망쳐 원색을 뽐낼 수 있을 때 비로소 무궁무진한 자유의 가능성을 피울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작품 또한 현실에서 달아나는 몸부림이다. 작품 속 운동이 사라져 그림으로 전락한 무수한 난민들이 머무는 기차역의 풍경은 현실과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런 이들에게 원색과 움직임을 불어넣어 현실에서 영화로 뛰어넘고, 이로써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녀의 작업이다. 이러한 자유야말로 절대적으로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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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130 집에서(마이 프렌치 필름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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