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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Feb 01. 2023

다니엘 아르비드, <단순한 열정>

열정: 되돌릴 수 없는 예측 불허한 위험, 그러나 해야만 하는 것

다니엘 아르비드(Danielle Arbid), <단순한 열정>(Passion simple)  

- 열정: 되돌릴 수 없는 예측 불허한 위험, 그러나 해야만 하는 것  

“나는 한 사람의 열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알게 되었다. 욕망은 극에 달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랬을 때는 무분별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신념에 차서 스스럼없이 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아니 에르노-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삶을 문학으로 솔직하게 보존하고 표현한 작가다. 임신중절이 불법이던 1960년대에 실존을 위해서 묵묵히 불법을 감행했던 자신의 고백록 『사건』에서부터, 아니 에르노의 시선에서 아버지의 삶을 그려보고 그 궤적을 추적하는 『남자의 자리』 모두 다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검열당하지 않은 자신과 여성과 실존을 순수한 언어와 표현으로 옮겨온다. 그녀는 도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어떤 의미 있는 줄기를 굳이 파악하려 애쓰지 않는다. 특정 의미를 지양해야만 솔직한 존재의 진정한 의미와 구조가 나타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녀의 욕망을 담은 『단순한 열정』도 그렇다. 그녀는 동구권 출신의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녀에게도, 그리고 그에게도 관계는 불륜이었다. 그러나 관계를 맺었어야만 했다. 그는 그녀가 지금까지 중요시한 가치체계를 죄다 뒤흔들고 재건하여 새로운 삶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태어난 그녀는 열정을 되찾는다. '해야 하는 것'에다가, '하고 싶은 것'을 더한다. 열정을 끝까지 다한 그녀는 죽음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삶에 충실했다. 불법과 부도덕, 그러나 그 대가로 되찾은 인간의 본질, 열정과 꿈과 죽음… 이를 다니엘 아르비드가 동명의 영화로 영상화한다. 1970년 베이루트 태생의 다니엘 아르비드는 프랑스의 영화감독이다. 아르비드의 가족은 1987년 레바논 내전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을 레바논을 배경으로 한 <베이루트 호텔>, 그녀의 대학 시절을 녹여낸 <파리지엔>에 투영했다. 저널리즘을 전공한 그녀는 레바논의 정치에 관한 르포적, 리얼리즘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섹슈얼리티에 관심이 많다. 이는 동향의 여성 영화감독인 요아나 하지토마스(<메모리 박스>), 나딘 라바키(<카라멜>), 레일라 부지드(<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와 유사한 색채다. 레바논의 여성들은 내전이라는 ‘정치적’ 굴레와 레바논을 지배하는 기독교와 이슬람, 양자 모두 가부장적인 '종교적'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구속과 억압을 '섹슈얼리티'로써 해방한다.      


아르비드는 이러한 섹슈얼리티를 가능케 하는 장소에 주목한다. <베이루트 호텔>에서는 여러 정치적 입장이 교차하고, 종교에 의해서 삶, 특히 여성이 억압받는 베이루트를 묘사한다. 영화의 주인공 조하와 마티외는 자신들을 '아내', '변호사' 내지는 '스파이'로 고정시키려는 베이루트의 구속이 갑갑하다. 그러나 '호텔'은 얽매이지 않는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기에 자유롭다. 호텔에서 조하와 마티외는 사랑을 나누며 자신을 감시하는 '시선'에서 달아나지만, 한편 보고 싶은 서로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항구적인 주소가 아닌, 잠시 머물다 떠나는 호텔에서 마티외가 떠나면 그를 찾을 수 없다. 즉 호텔에서만 가능한 섹슈얼리티의 자유, 그러나 호텔이기에 이는 간헐적이고 불안정하다. <파리지엔>에서도 장소성이 도드라진다. 작품에서는 항구적으로 머물 수 없는 이민자에게 불안정하지만 자유로운 도시 파리, 반면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지만 폐쇄적이고 충돌로 가득하며, '교통체증'으로서 나아갈 수 없는 공간 레바논이 대비를 이룬다. 그녀는 항상성과 방랑, 억압과 자유 사이에서 계속 헤맨다. 둘 다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장소성에서 왜 아르비드는 섹슈얼리티로 해방을 찾는가? 그것은 ‘몸의 자유’와 연관한다. <베이루트 호텔>에서 남성은 여성의 몸을 소유하고, 국민은 국가 간의 입장에 따라 목숨을 저당 잡힌다. 내 몸은 내 몸이 아니다. 언제나 누군가가 내 몸을 뒤쫓으며 그들의 시야가 소유한다. 그들은 자신으로 살지 않고 부부와 국가에 대한 '의무'와 '목적'으로 산다. 이러한 가운데 무목적하게, 오직 내 몸이 가리키는 욕망에 솔직해진다. 비로소 타인의 시선에 의한 몸이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만의 몸이 된다. <파리지엔>, 영화의 시작부터 리나의 고모부가 그녀를 child grooming한다. 흡사 태어나면서부터 여성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서 피해자로 만들어진다는 듯이. 그렇게 고모의 집에서 탈출하지만 이후에도 파리의 법, 자신의 책임을 레바논인에게 타자화하는 프랑스인들, 가부장적인 남성에 의해서 그녀의 몸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그녀가 자유를 찾는 곳은 클럽, 몸을 흔들 수 있고 제 욕망에 솔직한 장소다.      


이렇게 아르비드는 자유를 탐구하지만, 이와 동시에 국외자의 자유는 간헐적이고 내국인에 비해서 불안정하다. <베이루트 호텔>에서는 자유를 방해하는 국가 간의 알력을 묘사하고, <파리지엔>에서는 그 불확실한 자유를 거래하고자 외국인에게 부정적인 극우파에게 리나가 기대기도 한다. 국적에 따라서 차별적인 자유를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만들고자 하는 아르비드는 인류를 법과 생산의 수단이자 목적으로 삼는 극우주의가 아니라, 진보와 사랑으로 개개인이 자유를 되찾아야 함을 천명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여성의 해방을 특히 더 촉구하는 아르비드, 그녀의 작품에서는 남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성을 리드할 정도로 주도적인 여성들, 몸을 숨기고 은닉하는 전근대적인 여성이 아니라 육체를 드러내고 노래를 부르는 저돌적인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그간 발칙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아니 에르노의 원전을 영상화하는 <단순한 열정>에서 해방을 맞는다. 도입부, 엘렌이란 이름의 여인은 하릴없이 기다린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잡히지 않는 허망한 자동차 헤드라이트, 마찬가지로 청각은 잠시 들렸다가 희미해지는 차들의 경적, 오직 안정적으로 머물고 포착되는 것은 ‘그녀’와 ‘그녀의 기다림’, 본 도입부는 영화의 결말과 동일하다. 수미상관 구성의 영화는 엘렌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플래시 포워드를 취하며 과거를 천천히 곱씹으며 현재로 돌아온다. 그리고 과거에 넘쳤던 사랑과 열정은 이제 지나가는 자동차와 불빛, 영영 도착하지 않은 연인으로 뒤바뀌며 사라졌다. 그럼에도 다가서야 하는 열정, 아르비드는 이를 연출로 가시화한다. 도입부와 그 직후, 카메라를 앞에 두고 엘렌이 독백하는 장면(실제로는 독백이 아니다, 영화 후반부에 그녀가 수면제를 처방받기 위해 의사와 면담하는 장면임이 밝혀진다)에서 프레임 안에 그녀의 얼굴이 아주 거대하게 채워진다. 그녀의 얼굴이 프레임 바깥으로 넘치고 잘려 나갈 듯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한가득 담긴다. 그녀는 자신의 열정이 가리키는 연인을 기다리고, 또 독백으로는 조금은 부도덕한 욕망 이야기를 털털하게 회고한다. 그와 함께였던 기억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커다랗다.      


그 커다랗고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그녀가 향하는 열정이다. 즉 열정에의 다가감, 이로써 제 자신에게 충실해지는 것이 곧 프레임을 오롯이 '나 혼자' 점유하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이다. 그런데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엘렌만 포착하지 않는다. 엘렌과 알렉산드르의 육체가 함께 담기기도 한다. 처음에 두 육체는 구분된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엘렌의 육체, 반면 근육질이어서 각지고 날카로운 알렉산드르의 육체, 그러나 서로의 살결이 밀착하고 카메라도 이에 흡착함에 서로의 육체는 구분되지 않고 사실상 동일해진다. 엘렌에겐 그의 몸이 곧 자신이다. 그녀의 열정은 상대와 포개지고 겹쳐지기를, 네가 곧 나이길 바란다. 이러한 도입부의 그녀를 두고 카메라가 회전한다. 지구의 공전, 즉 외부 현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닌, 내재적 원리에 따라 스스로 회전하고 지배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룰 때, 타인이 박탈하거나 지배하지 않을 때… 이렇듯 영화의 연출은 열정을 가리킨다. 본 열정은 엘렌에게 무엇을 불러오는가? 영화에서 특기할만한 또 다른 연출은 '디졸브'다. 디졸브는 앞서 언급한 엘렌의 독백 이후, 그녀의 회상 장면인 알렉산드르와의 정사를 포개고 이어낸다. 자신이 바라는 열정적인 ‘연인’의 상태는 이어내고 싶은 반면, 자신이 바라지 않은 '엄마'로 그 직후 이어지는 엘렌은 디졸브로 포개지 않는다. 엘렌은 이중생활을 즐기며 폴에게 밀회 사실을 숨기므로 알렉산드르와의 정사는 폴이 함께한 부엌으로 연결될 수 없거니와, 이와 동시에 부엌에 놓이는 엘렌 또한 디졸브로 다음 숏과 이어지지 않는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성, 어머니를 연속하고 싶지 않다. 즉 열정은 내가 지속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디졸브로 이어지고 포개지고 싶은가. 알렉산드르와 정사에서 사용되는 연출은 전·후의 형식과 차이가 있다. 전·후의 연출이 테이크가 비교적 느리게 잘렸고, 카메라 워킹도 그리 빠르지 않아 감각이 무디고 둔했다면, 알렉산드르와의 정사에서 숏은 빠르게 잘리고 카메라 워킹도 아주 탄력적이다. 즉 엘렌은 열정을 추구함으로써 감각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몸을 회복한다.      


그런데 그 감각과 운동이 빠르게 잘린다. 알렉산드르와의 정사도 그렇고, 또 알렉산드르를 만나기 위해서 옷을 선택하는 엘렌도 그렇고, 모두 숏은 빠르고 거칠게 잘려 다음 숏으로 넘어간다. 흡사 이전의 '어머니', '교수'로서의 자신을 지워내고 싶다는 듯이, 자기가 바라는 감각적이고 '헤픈 옷'을 입고, 또 옷을 벗고 나신으로 그에게 달려들고 싶다는 듯이… 즉 ‘지지부진한 일상 속의 느린 컷’과 ‘열정을 추구하며 발생하는 빠른 컷’은 공적 규범에 따른 잘릴 수 없는 나와 이를 이탈하는 열정적인 솔직한 나를 대비한다. 이렇게 이전 모습에서 빠르고도 거칠게 잘려서 알렉산드르와의 정사를 선취한다. 본 과정에서 카메라는 엘렌과 알렉산드르 각각의 신체 기관을 클로즈업으로 잘라내어 강조한다. 평소 몸 전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던 시선에서 주목받지 못한 각각의 신체에 집중하고, 가까워진 각 기관들은 내밀하고 친밀한 감각이 느껴진다. 엘렌의 세계에 남자는 위자료를 주는 전 남편, 자신이 돌봐야 하는 아들로 국한된다. 그들과 관계 맺는 신체는 오직 어머니이자 교수인 자신을 이행하는 이성의 도구다. 이성에 의해 느낌은 추방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엘렌의 볼기를 찰싹찰싹 때린다, 영화관에 앉아만 있던 엉덩이에 자극적인 통각이 전해진다. 입은 취식을 위한 도구가 아닌, '안전 고리'를 넘어서 키스하고 애무하는 기관으로 뒤바뀐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그녀가 회복한 주체적 얼굴을 표현한다면, 클로즈업은 본래 감각의 기관임을 회복한 엘렌의 육체를 부각한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저서 『감각의 논리』에서 신체 기관이 본래의 역할에서 이탈할 때, 그가 예시를 들기를 배설 기관인 항문이 성감대가 될 때, 이로써 기존의 지지부진한 감각을 털어내고 넘어설 때 쾌감이 극대화된다는 것을 밝힌다. 본 작품에서도 어머니와 교수로서 이성의 도구로 전락한 신체를 넘어서서, 모든 신체를 감각의 수단으로 비틀 때 쾌감은 극대화된다. 카메라 또한 이에 동조하여 클로즈업으로 어머니이자 교수로서 신체를 ‘이례적으로’ 뒤틀어서 강조한다. 감각에, 그것을 자아내는 몸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엘렌에게 알렉산드르는 합법적인, 즉 항구적인 연인이 아니다. 엘렌 자신의 육체에 영영 가까울 순 없다. 폴이 하교하지 않은 시간에 아주 잠깐 머물다 사라지고, 엘렌의 집이 아니라면 호텔에서 간헐적으로 만난다. 그래서 엘렌에게 알렉산드르는 노트북에 비친 '이미지', 또 본 작품에서 사용하는 매체인 16mm 필름의 복고성에 의한 ‘과거’, 노이즈가 자글거리는 필름이 가리키는 ‘가상’으로 전락한다. 그를 만나서 가상, 기억, 이미지를 실현 및 소환하면 엘렌 자신을 회복한다. 비로소 그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실현하며, 자신이 살아 있는 기분이다, 충만하다. 그러나 이는 길게 머물 수 없다. 영화는 이에 더해 미장센이 매우 창백하다. 희고 건조하며 어딘지 빛바랜 인상이다. 엘렌의 집 벽도 아주 희멀겋고 새하얗다. 차가운 상태, 그러나 엘렌이 알렉산드르와 만나면 인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프레임을 가득 채워 기존의 삭막함을 대체한다. 창백한 벽에는 열정적이고 뜨거운 두 육체와 온기가 가득 찬다. 무감함과 차가움은 곧 농밀하고 진한 감각으로 뒤바뀌고, 매체가 자아내는 거친 느낌은 매끄럽게 마모되는데, 엘렌이 바라는 이 긍정적인 감각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 엘렌이 알렉산드르를 찾기 위해 모스크바로 직접 떠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촬영된 시퀀스들은 인파나 행인이 통제된 꿈과 같은 '픽션'이었다면,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를 기다리는 엘렌의 모습은 다큐멘터리와 같은데, 실제 길거리를 오가는 배역이나 배우가 아닌 러시아의 인파를 담고, 그 행인들은 엘렌을 맡은 래티시아 도쉬를 배우로 의식하지 않는다. 그 차가움, 평범성, 영영 도래하지 않는 픽션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반성이 현실이다. 차가운 운명을 자아내는 현실에서 이탈하여 뜨거운 자신을 되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열정이다. 알렉산드르와 함께 있는 엘렌은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지 않지만, 폴과 함께 부엌에 있던 엘렌은 프레임 바깥으로 나가며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탈해서 찾고 만나는 것은 러시아의 발레리노 세르게이 폴루닌이 맡은 알렉산드르다.     

 

배우가 아닌 러시아의 발레리노를 캐스팅한 이유는 원전에서 아니 에르노의 연인이 동구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기성 배우의 습관이 덜 묻어있는, 그래서 기성 배우들과 어딘지 다르고 어색한 발레리노 폴루닌의 연기가 서구권과 동구권이 충돌하고 혼재되는 원전의 독특한 분위기를 시각화하며, 평범함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엘렌의 마음을 가시화한다. 또 폴루닌 또한 애무나 삽입 등의 정사씬을 연기할 때는 발레의 정교함 및 규칙성과 상반되는, 불규칙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그리고 섹스가 끝난 이후에 발레리노의 단아하고 절제된 손놀림으로 머리를 정돈한다. 폴루닌의 상반된 두 움직임, 그 또한 발레리노를 지배하는 행동과 인간의 자유로운 몸짓의 대비, 전자에서 후자로의 일탈이다. 이렇게 이탈하는 영화, 엘렌에게 어머니임을 강요하는 폴과 전남편의 딱딱한 언어에서 감미로운 '배경 음악'으로 이탈하는 영화, 그렇게 이탈하여 초당 프레임이 줄어들고 이로써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숏 하나하나를 간직하고 싶은 영화, 아르비드는 그렇게 이탈하게 만드는 ‘공간’을 본 작품에서도 탐구한다. 영화 초반부, 부엌을 떠난 엘렌은 친구와 영화관에 가기 위해서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며 잠깐 잠이 든다. 그리고 투명하여 무엇이든 비칠 수 있고, 또 텅 비어 있어 추상적인 백지 같은 ‘창’에 알렉산드르와의 기억을 수놓아본다. 물질과 현재 너머를 꿈꾼다. 엘렌이 그와의 사랑을 그려보는 이유는 현실에서 알렉산드르는 프랑스를 떠나서 과거로 전락했기에, 또 영화를 보고 나와서 엘렌이 친구에게 하는 말처럼 역사 속에서 여성은 사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영화에서는 창문을 계속 강조한다. 안에 놓이는 엘렌, 그러나 정원과 내부를 매개하는 거대한 창문은 내부의 엘렌과 바깥의 나무를 포개며, 외부와 내부를 잇는다. 또 폴이 등교하는 순간 창문을 바라보며 엘렌은 알렉산드르를 상상한다. 엘렌은 자신의 공간과 현 상태를 포기하고 제한 없이 투명하게 넘어서고 싶다, 그것이 바로 열정이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열정이란 나방이 태양에게로 향하는 것, 그렇게 향해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 알 수 없는 위험을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자아를 굴복시키는 리비도이자 거스를 수 없는 어떤 힘이라 말한다. 열정은 인간 자신, 유한성과 현세를 넘어선다. 인간을 꿈과 환상으로 높이는 가운데 육체를 말살한다. 열정은 인간의 정해진 한계를 벗어나는 타락의 한 유형임과 동시에, 신처럼 스스로 절대적이고자 하는 신성이다, 신성과 타락의 양면성. 그 열정이 한계를 부여하는 공간을 넘어서라고 지시한다. 엘렌은 창에 비치기 전까지, 그 창을 통해서 알렉산드르를 상상하고 그에게 향하기 전까지, 부엌과 강의실에 주로 머문다. 부엌에서 폴의 등교와 식사를 책임지고, 또 강의실에선 학생들을 가르치는 역할에 국한된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고 각인된 것뿐, 내 무의식적 열정이 자의로 불타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현재 너머의 미래를 염두에 두는 생산과 공공을 위해 넘어서기보단 버티고 인내한다. 열정적인 넘어섬은 미래로 유예한다. 이를 위한 공간은 빽빽한 물질로 가득 차 있고, 창과 달리 그 너머를 가늠하거나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폐쇄적으로 꽉 막혀 있다. 그러나 열정적인 그녀는 자신을 엄마이자 교수로 전락시키는 물질의 한계를 투명한 창으로 넘어서고, 물질로 가득 찬 현실이 아니라 도래하지 않은 관념과 그 너머를 갈망한다. 그래서 물질 너머로 이탈하는 그녀는 물질로 가득 찬 마트에서 넋을 잃고, 또 그 너머로 향하게 해줄 알렉산드르와의 문자에 신경 쓰는 나머지 차를 후진하다가 폴을 칠 뻔했다. 그것은 곧 안과 밖, 법과 불법의 경계를 긋는 '안전 고리'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키스하는 것, 이윽고 그 고리를 풀러 아예 불법의 영역으로 이탈하는 것이다. 법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된다. 견고하고 단단한 물질과도 같다. 그러나 시각을 변용하는 창문에서 법에 제한받지 않는 자연의 나무와 포개진 그녀는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 현재를 넘어서 과거와 상상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현실 또한 뒤바꾼다. 용변을 보는 장소인 화장실에서 '교수'인 그녀는 알렉산드르와의 끈적끈적한 밀회를 상상한다.      


구체적이고 빽빽한 절제를 포기하고 투명한 무제한과 무절제로, 또 나방이 태양과 하나 되듯 나를 포기하고 대상에게 넘어서는 불연속적인 열정, 파괴와 폭발을 유도하는 무분별한 열정, 이러한 열정은 어떤 그녀를 불러오는가? 엘렌은 남편과 이혼했다. 양육권이 그녀에게 있고 전 남편은 위자료를 지급한다. 남남이다. 그래서 부인이 있는 알렉산드르는 불륜이지만, 그녀에겐 불륜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알렉산드르와의 밀회를 남자들에게 숨긴다. 아들은 어머니가 축구 경기를 관람해주거나 등교 시간을 맞춰줄 것을, 전 남편은 위자료를 주는 대가로 폴을 똑바로 키울 것을 지시한다. 즉 가부장제 내에서 그녀는 이혼하고도 남자에 의해 양육의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성적 의무에서, 본능적 열정으로 이탈한다. 그녀는 강의실에서 '시'를 가르친다. 보들레르는 퇴폐적인 시를 써서 당대의 경건한 독자나 언론의 먹잇감이 되었고, 또 그는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평가받지 않으며, 그저 시를 쓰는 행위를 즐긴 열정적인 작가였다. 애프러 벤이라는 작가는 스파이임과 동시에 시인이었다. 즉 시란 언어의 본래 문법이나 현실을 가득 채운 일반적인 법·윤리에 구애받지 않는, 작가의 고유한 내재적 원리를 언어로써 풀어내는 비관습적인 창조물이다. 마찬가지로 엘렌이 연구하는 시인들은 비관습적인 스파이임과 동시에 연인이었다. 시의 비관습성이 곧 사랑이요, 스파이 행위란 타인을 위해 일반적인 나를 배신하는 연인되기다. 시를 가르치는 그녀는 몸소 시를 실천한다. 알렉산드르는 차를 운전하고, 조수석에 앉은 그녀는 그가 사라져도 그를 간직하고 싶다며 촬영한다. 이윽고 불이 붙어 알렉산드르가 운전과 동시에 엘렌을 애무한다. 차선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 곧 위법은 죽음과 근접하지만 그만큼 짜릿하고 즐겁다. 지지부진한 관습적 감각이 아니라, 신선하고 개운한 비관습적 감각을 느끼고자 일상적인 것을 배반하여 시를 쓰고 사랑한다. 또 20세기 후반에 집필된 에르노의 원전을 2020년대로 옮겨오며 설정을 여럿 덧붙인다.      


엘렌은 페미니스트인 반면, 알렉산드르는 푸틴주의자로서 서유럽과의 관계가 석연치 않다. 두렵고 무서운 존재, 만나선 안 될 것만 같은 존재, 그의 몸에 그려진 '사신' 문신처럼 삶과 적대적인 존재, 그러나 섹스로써 사랑해선 안 될 것을 사랑한다. 그 위반이 엘렌에게 참으로 즐겁다. 철학자 바타이유는 성은 인류 역사에서 합법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본성적으로도 섹스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나체로 전락하는 위험을 불러오기에 불편한 감정을 동반했다. 역사 속에서도 섹스에 쓰일 막대한 에너지를 생산에 활용해야 했고, 또 섹스에 따르는 위험인 임신과 출산을 무분별하게 감당하기 어려웠던, 의학이 열악한 과거에 통제되지 않은 쾌락을 위한 섹스는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섹스는 언제나 위반하여 불법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 그 불법의 영역으로 넘어가 죽음 공포와 마주하는 것, 그러나 쾌감과 사랑에 의해서 그것과 친밀해지는 행위다. 알렉산드르와의 사랑도 그렇다. 불안정한 운전, 강의실에 전화벨이 울려 퍼지며 교수로서의 엘렌, 즉 생산적이고 미래를 바라보는 노동을 하는 그녀를 중단하는 알렉산드르는 비생산적이고 앞날을 위협한다. 그러나 어둡고 날카로우며 그녀의 '헤픈 옷'을 간섭하는 공격적인 그, 반면 인상이 부드럽고 둥글둥글하여 정 반대에 놓인 그녀는 서로 사랑한다. 서로의 다름, 사랑에 따른 위신이나 평판에의 위협, 이로써 불안정할 미래조차도 더는 두렵지 않다. 그렇게 사랑한 이후 그녀는 빈곤과 죽음에 가까이 있는 ‘노숙자’에게 너그러워지며 돈을 건넨다. 불법과 불안정함과 유랑을 사랑한다. 그런데 아르비드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엘렌은 분명 남편과 아들에 의한 관습적인 자신을 탈피했다. 불안정해진 자신도 사랑한다. 그리고 마트와 미용실에서도 자신과 유사한, 아내이자 어머니일 테지만 그 너머로 나아가고 있는 여성들을 직감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엘렌은 알렉산드르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고, 길거리에서 마주한 다른 여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엘렌은 남성에 의한 자신을 위하여, 주체적인 교수로서 자신을 포기한다. 논문을 쓰기 위해 안전 고리를 걸어 놨다.      


그러나 안과 밖, 자신과 알렉산드르를 구분하는 고리를 해제하여 상대를 내게 받아들인다. 외부에선 열 수 없다. 알렉산드르를 위해 스스로를 무장해제한다. 그에게 선물을 내어주고, 또 그와의 데이트 때 입을 옷을 고르기 위해 교수로서 연구해야 할 애프러 벤 전집을 포기한다. 엘렌이 곧 알렉산드르가 된다. 더욱이 알렉산드르는 보수적이다. 그녀가 요염한 옷을 입지 못하게 간섭한다. 그녀 스스로의 자유를 천명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신념을 방해한다. 즉 남자들에 의해 어머니로서 자신이 규정되고 있었지만, 연인이라는 자신 또한 남성 알렉산드르의 요구로 규정된다. 분명 열정에 의해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보고 싶은 대로, 즉 주관적으로 본다. 알렉산드르가 프랑스를 떠난 이후, 길거리의 남자들을 알렉산드르로 착각한다. 그렇게 열정으로 그녀가 세상을 곡해하고 통제했지만, 이와 동시에 그에 의해서 그녀의 열정은 유지될 수 있었기에 알렉산드르에게 의존하며 수동적이다. 그러나 영화 중반에 엘렌은 엘렉산드르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꿈에서 그녀는 비행했고, 이에 상응하는 드론 숏 내지는 헬기에서 촬영한 하이앵글 숏 푸티지가 인서트된다. 그녀의 바람은 해방이다. 알렉산드르가 부재하는 동안 그녀는 식물을 심기 위해 땅을 판 적이 있다. 그러나 잘 파지지도 않는다. 그 답답함이 곧 알렉산드르와의 만남에 따른 제약이나 수동성으로, 엘렌은 이를 넘어서고 싶다. 또 그녀는 내가 느끼고 싶어서 그와 만난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애무에서 알렉산드르의 손이나 혀가 닿는 주체는 엘렌의 몸이다. 알렉산드르에게 보여 주고 싶은 화려하고 다양한 로브를 입지만, 이와 동시에 그 옷들은 그녀가 입고 싶은 것이었다. 영화 초반, 엘렌은 친구와 알랭 레네가 연출한 <히로시마 내 사랑>을 본다. 작품을 감상한 이후 남자를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는 20세기 여성의 사랑에 대해 논한다. 그래서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 그녀들의 살갗에 밀착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남성의 시선이 닿으면서 만들어지는 그녀들의 육체,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오늘날 프랑스의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데이트앱을 사용하여 남성을 '찾는다.' 그래서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의 수동적인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단순한 열정>에선 주체적인 여성들의 육체를 반영하며 뒤바뀐다. 물론 혼자 할 수 없는 욕망이기에 알렉산드르를 향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그녀는 주체적이다.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 포기를 잠시 허락한 것뿐,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의 즐거움이 식어가니 나를 위해 관계를 정산한다. 알렉산드르가 떠난 지 8개월이 지나고, 다시 엄마이자 교수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그가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예전 같지 않다, 왜일까? 손에 그가 잡히지 않을 때는 소중했고 간절했지만, 정작 그가 손에 잡히니 평범해진 탓일까? 일상적인 육체에서 위반하고 탈피하며 자아낸 쾌감과 짜릿함이 반복되자 이젠 둔감해진 탓일까? 여하간 감정이 시들해지자 이별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르가 아닌 그녀가 운전하고, 더는 연애 사실을 숨기지 않고 폴을 내보내 공간을 통제하며, 같이 걷던 연인은 이제 서로 다른 방향, 특히 그녀가 궤를 튼다. 그간 그를 향한 열광은 그에게 그녀의 꽤 많은 것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열정이란 언젠가 사그라지는 즐거움이요, 인간이라면 무릇 타인에게 소유되지 아니하고 응당 자유로워야 한다. 열정은 나를 즐겁게 하지만 이와 동시에 나를 포기하는 크나큰 대가를 수반하는 만큼, 열정이 식을 때 우리는 자신을 돌려받아야 한다. 평정심과 균형을 되찾고, 그럼으로써 주도권을 복권하며… 

즉 아르비드는 다시 한번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자유에 주목한다. 자신의 국외자적 정체성을 탐구하던 이전 작품으로부터, 아예 여성에게만 포커스를 맞춘다. 아니 에르노라는 이름과 명성이 보증하는 원전의 서사나 대사에만 기대지 않고, 아르비드 자신만의 번뜩이는 영상 언어로 재해석한 점, 원전에 그녀만의 살을 붙인 점이 흥미롭다. 통제할 수 없는 성인 남성 연인과 달리, 통제할 수 있는 어린 아들 폴을 알렉산드르의 대체품으로 삼고 피렌체 여행에 데려가는 어머니의 아들 애착을 탐구한 점이 말이다. 여성은 단지 권력과 무력이 부족했기에 수동적인 사랑을 일관해왔을 뿐, 그녀들 또한 그들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열정의 고압성은 동일하다. 그러나 이 또한 벗어나야 할지다, 벗어나야지만 아들의 오이디푸스적인 어머니 애착을 해결할 수 있고, 상대를 힘으로 정복하고 소유하는 열정의 악순환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로써 상호 자유를 되찾을 수 있나니. 다만 반복 속에서 번뜩이고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다소 퇴색된 점이, 이로써 날카롭던 감각이 다소 지루하게 변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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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 230201 광주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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